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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교실 혁명 ㅣ 핀란드 교육 시리즈 1
후쿠타 세이지 지음, 박재원.윤지은 옮김 / 비아북 / 2009년 10월
평점 :
전 국민이 다 아는 대망의 수능시험이 있는 날이다. 그동안의 처절한 몸부림이 점수로 나오는 날. 온갖 스트레스와 억압된 자유와 선택하지 못한 미래에 대한 수치가 정확히 나오는 날. 수능날에는 관공서가 출근 시간을 늦추고, 부모들은 극도의 긴장 상태에서 하루를 보낸다. 수년간 공부한 것들을 종합하고 집중해서 단 한 번에 해내야 한다. 그래야 부모가 원하고 사회가 원하지만, 나도 원하는지 모르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비이상적인 교육열로 아이들이 고통받는 한국은, 아이들이 즐거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얼마나 노력하고 있을까? 하긴, 조금만 다른 시도를 하려고 해도 명문대 못 가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는 온갖 비난 속에 시도조차 포기해야 하는 많은 교육자들. 사실, <핀란드 교실 혁명>은 부모들이 읽고 반성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뭐 개중 부모들은 잘하는 아이만 열심히 가르치면 되지 공부에 흥미 없는 아이 뭐하러 애써서 가르치느냐 하겠지만.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은 핀란드 교육은 한마디로 파격적이다. 강요도, 고함도, 권위도, 억지도 없는 선생님과 함께 소수의 인원이 반을 이루고 자유로운 커리큘럼에 따라 자기가 할 수 있는 능력만큼만 공부한다. 아이들은 할 공부를 끝내고 종이접기를 하거나, 수업시간에 뜨개질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잠을 자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잘못된 학생들이 아니다.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 아니다. 그냥 우리 반 학생이다. 선생님은 빨리빨리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참을성 있고 끈기있게 아이들이 혼자 해낼 때까지 기다린다. 선생님은 아이의 공부가 협력자가 될 뿐, 지배자는 아니다.
핀란드의 교육철학은 '격차'를 없애는 것에서 출발한다. "교육의 질이 떨어져서도 안 되고, 아이의 배경이나 출신이 교육에 영향을 미쳐서도 안 됩니다." 정말 멋진 말이다. 명문대의 학생들이 강남, 고소득자 아이들로 채워지는 우리의 현실을 봤을 때는 말이다. 교육은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핀란드. 아이들이 학교에 오기만 한다면 수업 시간 내내 여자친구만 바라봐도 뭐라 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교육이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OECD는 15세 학생들을 대상으로 3년마다 PISA라는 연구 프로젝트를 실시한다. 기술과 지식에 대해 정책 지향적인 국제지표라고 할 수 있는데, 핀란드의 아이들은 골고루 격차 없이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시험도 없고, 학습 진도도 저마다 다르다. 방대한 지식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도 않고, 선행학습을 하라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이들은 명민하며 똘똘하다.
우리의 교육이 똑똑한 아이들을 골라내고, 양성하는 교육이고, 탈락자를 골라내는 교육이라면, 핀란드의 교육은 스스로 하는 공부를 지향하고 스스로 깨우치도록 유도한다. 남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이 그 문제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넘어간다면 느리더라도 상관없다. 교육은 삶의 원리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들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한다. 사회구성주의 교육을 추구하는 핀란드의 교육에서는 '협동의 지식'이 우선이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속에서 더욱 충실한 지식을 만들어가는 핀란드 교육. 뜨개질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는 수업시간에 뜨개질을 하지만, 뜨개질 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아이들과 그룹으로 뜨개질을 해서, 어떤 것을 만들기도 한다.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무언가를 만들기로 하고, 서로 나누어서 자기가 해야 할 것을 정하고 나중에는 작품으로 완성된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이 다른 방식으로 협동도 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해내기도 한다. 어려서 어설퍼 보여도 그들만의 방식으로 협동해서 공부하는 게 핀란드 아이들이다.
또한, 핀란드 교사들은 자율성과 전문적인 권한이 있다. 자신의 반 아이들을 자신의 학습 방법대로 가르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아이들의 스케쥴을 조절한다. 한 반에 2, 3학년이 함께 공부해도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는다. 진도가 빠른 아이는 빠른 아이대로 3학년 수업에 맞춰갈 수 있고, 진도가 느린 3학년은 2학년 학습을 더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아이가 지진아라고 하지 않고, 빠르다고 우쭐해 하지 않는다. 그냥 조금 더 빨리 알고, 조금 더 느리게 알 뿐 어쨌든 다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게 학생들과 선생님의 생각이다. 그렇게 되니 교육에서 상호 작용은 활발하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것에 두려워 않는다. 억압된 풍경에서 선생님의 비위를 맞추며 공부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과는 사뭇 비교되는 광경이다. 공부 스트레스도 심한데 선생님의 성격까지 맞추며 살아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은 비뚤어지게 되면 그 이유를 학생에게 돌린다. 사실 아이가 비뚤어진 감정을 갖고, 엇나가는 행동을 하는 것에는 어른들이 가장 큰 이유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우리는 너무 많은 짐을 지우고 있는 건 아닐까?
학창시절, 성격 더러운 선생님에게 별명을 붙이고, 담임 선생님은 '담탱이'라고 비하하며 선생님의 매와 힘에 순응하고 움직일 때가 많았다. 종소리가 나면 자리에 앉아서 수업을 받아야 하고, 피곤해서 졸기라도 하면 복도행이었다. 수업시간에 내 기분보다는 선생님의 기분에 좌지우지되었고, 혹시 모르는 문제를 풀라고 하지 않을까 창피당하게 될까 봐 안절부절 못하게 되는 게 우리 교실 풍경이다.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에서 좁은 교실에서 우글우글 수업을 받다 보면, 아이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시기, 질투하게 되며 외면하게 된다. 참지 못하는 아이들은 가출을 하고, 학교를 떠난다. 평균에서 이탈하는 게 두려운 부모들은 자식을 다그치고, 모든 게 자식 탓인냥 선생님에게 굽신 된다. 부당한 처우를 받고도 학교에 정당하게 요구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자식이 혹 다른 피해나 입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자유롭게 가르치고 싶은 깨인 선생님도 공부 잘하는, 돈 많은 부모의 항의로 압박을 받는다. 자신의 경력이 손상되길 바라지 않기에, 보통 선생님처럼 행동하려고 애쓰지만, 사실 선생님이라는 지위로 아이들에게 많은 상처를 준다.
'대학' 때문이다. '대학'에 가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생각하고, 명문대를 가는 것이 가문의 영광이며 사회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교육에는 '여유'가 없고, '억압'과 '집착'만 있다. 학교는 특수고를 몇 명이나 보냈는지, 명문대를 얼마나 보냈는지 수치화하고 자랑한다. 하지만, 핀란드의 교육은 생각 자체가 다르기에 모두가 평등하고 재미있게 자신을 위해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은 여유롭고 편안하게 수업을 진행하고, 서로 수업 방식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경계'를 만들지 않고 '경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 말 없는 아이는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답을 생각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이 참 따뜻하다.
행복한 공부를 하는 교실 풍경. 공부를 하며 불행하다고 느끼는 아이는 없는 것 같다. 과제를 끝나면 게임을 할 수도 있다. 아이의 인격과 개성을 존중하는 교육 속에서, 아이는 교육이 부담스럽다고 느끼지 않고 학교를 즐거운 놀이터 정도로 생각한다. 학교에서 하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고, 존중받을 수 있으니 수업이 끝나도 학교를 떠나지 않는 아이들이 많다. 급식도 채식하는 아이와 이슬람교 아이, 다른 인종의 아이를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그 하나만 보아도 핀란드에서 어떤 교육을 추구하고 있는지 확연하게 드러난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님도 행복하고, 배우는 아이들도 행복한, 그랬더니 세계 최고의 학력을 낳는 핀란드가 되었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적용되기 힘든 교육도 있을 것이며, 핀란드만 무조건 따라하자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잘하는 아이'를 위한 교육이 아니라 '모든 아이들을 위한 교육'이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기다려주고 생각해줄 수 있는 교육'이라는 것이다. 숨 가쁘게 공부한 한국의 아이들은 숨 가쁘게 진로를 결정하고, 숨 가쁘게 취업 준비를 한다. 공부가 좋은 직장을 얻는 것을 위한 도구인 듯, 모른 채 끌려왔다가 허탈에서 자기의 길을 잃기도 한다. 핀란드는 기초 교육이 끝나고 고등 교육이 끝나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사회 경험을 할 수 있거나, 전문학교에서 원하는 길을 찾기도 한다. '대학'이 이유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공부의 이유이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도 그렇다.
학부모들이 직접 교육에 달려들어 아이들이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고, 자신이 갈 수 있는 길을 찾는 공부를 하도록 방향을 모색한다. 이게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장학사도 장관도 대통령도 교육의 병폐를 어쩌지 못하고 방관한다. 그들이 그렇게 자랐기에 밟고 올라갔기에 그들은 그게 맞는 것으로 생각하는지 모른다. 부모는 허리 휘게 돈을 벌어 자식의 교육에 쓰느라 행복을 느끼지도 못하고 아이는 아이대로 부모가 자신에게 투자하고 있다는 걸 아는지라 좋다 싫다 말도 못한다.
'공부해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하고 싶을 때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했다. '책 좀 읽어라'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읽고 싶을 때 읽고 쓰고 싶을 때 썼다. 우리 부모님이 자유 교육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었고, 그냥 사는 게 바쁘셔서 공부해라는 말도 책보라는 말도 안 하셨다. 남들만큼 지원해주지 못하는 것을 미안해하셨을 뿐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난 부모님한테 감사하다.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뛰어나게 잘하진 않았지만, 욕심도 부리곤 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을 걱정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어떻게 해야 우리 아이들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즐겁게, 하고 싶어서 할 수 있을까? 문득, 핀란드의 교실 풍경이 부럽다. 부모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육 정책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는 부모가 먼저 변해야 아이에게 행복한 교육 환경을 만들어 줄 수 있다. 많은 과제를 주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