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동네 서점에서 한 달 전에 출간된 쳇 베이커(Chet Baker)의 전기를 한 권 구입했다. 사실은 다른 책을 구해볼까 해서 떠난 '사냥'이었지만ㅡ이 '작은 시골'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못 구하는 일은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인데ㅡ얼마 전 뜬금없이 연습용 트럼펫을 하나 구해 독학하기 시작한 이후로 '부는' 악기에 관련된 모든 것들이 전과 같지 않게 예사롭지 않은 기운으로 다가온다. 개인적으로, 쳇 베이커의 전기가 '때마침' 출간된 것은, 말하자면, 일상 속에서 느끼는, 작지만 짜릿한 우연의 한 사례이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실은 '책 읽기'라고 하는 하나의 기나긴 여행 역시나, 확고한 일정이나 잘 짜여진 계획표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책이 내놓은 여러 갈래 길들, 그 길들이 만들어낸 '돌발적'이고도 '임의적'인 하이퍼텍스트들을 따라가는, 마치 거미줄과도 같은 우연성으로 점철된 여정이라는 것. '읽기'의 여정은, 적어도 내게는, 이렇듯 소중한 우연들이 만들어낸 필연성들로 가득 차 있는 '길 없는 길', '성채 없는 성(城)'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올해의 책들' 중 번역서 다섯 권을 뽑아본다:
1. 미셸 푸코, 『주체의 해석학』(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2. 마루야마 마사오,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김석근 옮김), 문학동네, 2007. 
3. 가라타니 고진, 『세계공화국으로』(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7.
4.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1, 2, 3권(변상출 옮김), 유로, 2007.
5. 자크 데리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 미셸 푸코, 『 주체의 해석학 』(심세광 옮김), 동문선, 2007.
Michel Foucault, L'herméneutique du sujet. Cours au Collège de France 1981-1982,
    Paris: Gallimard/Seuil(coll. "Hautes Études"), 2001. 

1) '주체의 해석학', '자기의 테크놀로지', 혹은 '존재의 미학' 등 푸코의 후기 사상을 정의하고 규정하는 여러 어구들은 이미 인구에 회자된 지가 오래이므로 이에 관해 재론할 필요는 따로 없을 것이다. 다만, '나의 언어'를 차용해서 말하자면ㅡ내 자신의 언어조차도 '차용'해야 하는 나의 언어 '미학'에 1초 정도 회의를 느끼며ㅡ,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헤겔의 자리에 선 푸코'의 초상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존재의 미학' 혹은 '자기 배려'라고 하는 하나의 '역사적' 사례가 가리키는 것ㅡ어쩌면 나는 여기서 "역사적"이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붙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ㅡ, 그것이야말로 특수성이 쟁취하는 보편성의 '한' 사례가 아니겠느냐는, 그런 생각 한 자락이 나를 오랜 시간 동안 푸코 읽기에 빠지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학자 아닌 역사학자' 푸코의 초상이 가리키고 있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 곧, 첫째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쟁취', 이어서 둘째, 이를 넘어선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파괴', 그리고 마지막으로 셋째, '특수성을 통한 보편성의 재고/[재]확인'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세 개의 과정은 지극히 '변증법적'으로 보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 있는데, 말하자면 내가 뜻하는바 '헤겔의 자리'란 이러한 것이다. 그런데, 살펴보면, 이는 동시에, 그 모습 그대로, '한계를 확인하는 위반'의 운동, 바로 그 모습을 닮고 있는 것이 아닌가(아마도 푸코에게 미친 바타이유의 영향이란 단순히 '스캔들적'인 것으로 해소되거나 환원되어서는 안 되고 바로 이러한 '사상의 내재적 운동' 안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이는 푸코에 대한, 혹은 철학사 전반에 대한 들뢰즈의 '방법론'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깨달음을 빙자한 짓궂은 질문 몇 자락). 이는 또한, '헤겔의 자리에 선', 동시에 '헤겔의 자리를 벗어난' 푸코의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 푸코를 통해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비변증법적 변증법'에 관한 나의 문제의식이란 이런 것이다.

   

▷ 프레데리크 그로 外, 『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 』(심세광, 박은영, 김영, 박규현 옮김), 길, 2006.
Michel Foucault, Dits et écrits. Tome IV: 1980-1988
    Paris: Gallimard(coll. "Bibliothèque des sciences humaines"), 1994.

심세광의 번역으로는 작년에 출간된 『미셸 푸코 진실의 용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97년에 동문선에서 『자기의 테크놀로지』가 번역 출간된 이후로 실로 10년만에 우리는 푸코의 '후기 사상'을 독해할 수 있는 '기본 구성 요소' 번역본들을 갖게 된 셈인데, 그의 『말과 글(Dits et écrits)』 전 4권ㅡ몇 년 전에 Quarto 총서로 재출간되면서 두툼한 두 권으로 다시 묶인 바 있다ㅡ, 특히나 위의 주제와 관련해서는 그 중 4권이 어서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람 또한 함께 첨부해둔다.



▷ 마루야마 마사오, 『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김석근 옮김), 문학동네, 2007.

       

丸山眞男, 『 「文明論之槪略」を讀む, 上 』, 岩波書店, 1986. 
丸山眞男, 『 「文明論之槪略」を讀む, 中 』, 岩波書店, 1986.
丸山眞男, 『 「文明論之槪略」を讀む, 下 』, 岩波書店, 1986.

2) 마루야마 마사오와 근대성의 문제에 대한 거의 '강박'에 가까운 내 개인적인 '병증'에 대해서는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알 테지만, 특히나 올해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 대한 독해의 산물인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소식만큼이나 설레고 반갑던 소식은 또 없었던 것 같다. 틈 날 때마다 아무 곳이나 펼쳐 읽기도 하고 또 원본을 옆에 두고 함께 또박또박 읽기도 했던 책인데ㅡ원서는 상, 중, 하 세 권으로 분책된 문고판으로서 내가 소장하고 있는 판본만 해도 벌써 20쇄를 넘은 일본의 스테디셀러, 하지만 생각해보니, 마루야마의 이 책이 대상으로 삼고 있는 후쿠자와의 책이야말로 스테디셀러 중의 스테디셀러가 아니었던가ㅡ올해가 다 가도록 아직 완독하지 못한 나의 게으름이 부끄러울 뿐이다. 마루야마 마사오와 그의 책들에 대해서는 일전에 고야스 노부쿠니(子安宣邦)에 대한 글이라는 가면을 쓰고 간략하게나마 다룬 바 있다(http://blog.aladin.co.kr/sinthome/1384652). 결국 나는 마루야마를 통해서 다시금 '사상사(思想史)'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인데, 나의 시커먼 기억의 저장소를 검색하다보면, 한 지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을 받았던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토 진사이(伊藤仁齋), 오규 소라이(荻生徠), 그리고 그들에 대한 마루야마의 분석에는 '열광'과 '광분'을 넘나들면서 왜 '우리의' 사상가인 퇴계나 율곡에 대해서는 그만한 '정성'을 들이지 않는가. 이는 어쩌면 지극히 '민족적'인 질문일 수도 있고 또한 오히려 지극히 '코스모폴리탄적'인 질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양쪽 중 어느 한 방향으로만 해소하거나 환원할 수 없는, 말 그대로 하나의 '질문'인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질문의 내용과 형식, 그리고 이 질문 앞에서 흔들리고 망설이고 있는 대답의 여러 몸짓들, 이 모든 회로가 이미 '우리의' 근대성이 지닌 하나의 '징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더불어 드는 '여담'과도 같은 생각 한 자락은, 마루야마와 같은 '중독성 있는 치밀함과 성실함'을 얻기 위해서 나의 글은 얼마나 더 담금질을 해야 할까 하는, 고로 생각하면 할수록 더욱 아득해지고 아찔해지는, 이 하나의 '반성' 또는 '욕망' 역시나, 다시금 얼마나 지극히 '근대적인'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반성, 또 하나의 욕망, 그것들에 대한 잡생각이 되고 있는 것.



▷ 가라타니 고진, 『 세계공화국으로 』(조영일 옮김), 도서출판 b, 2007.

3) 올해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책 『세계공화국으로』의 번역 출간은 작년의 『근대문학의 종언』(도서출판 b) 출간과 함께 최근 국내 출판계의 커다란 이슈들 중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일단 소위 '운동의 방향성'을 고민하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이 불러일으킨 반향ㅡ그러한 반향이 '열광'이든 '고려'이든 '반감'이든 간에ㅡ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는데, 이 책은 내게는 개인적으로 무엇보다 최근의 사상 진영에 있어서 헤게모니 투쟁의 전체적 '지형도'를 그릴 수 있게 해주는 한 축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크다. 말하자면, 결핍의 윤리학과 충만의 윤리학 사이, 혹은 적대의 정치학과 우정의 정치학 사이, 혹은 부정성의 철학과 긍정성의 철학 사이에 가로놓인 하나의 전선을 떠올려볼 때, 이 책이 점유하고 있는 위치는 정확히 어떤 곳인가 하는 물음, 이 책은 내게 무엇보다 그러한 물음의 자격과 지위로 먼저 다가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책을 '쉽다'고 말하는 만큼ㅡ아마도 그렇게 '쉬운' 만큼, 딱 그만큼, 이 책은 여러 가지 비판들에 대해 '취약'할 수도 있을 것ㅡ내게는 그만큼 이 책이 또한 '어렵게' 느껴지는 부분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일 텐데, 나의 개인적인 '아포리아'는 바로 이 책이 서 있는 '정치적 자리'에서 기인하는 것일 터, 말하자면, 이는 다름 아닌 이 책의 숨겨진 기조저음(basso ostinato)으로서의 '모스(Mauss)-바타이유(Bataille)-카이유와(Caillois)'의 정치학적 계보ㅡ이는 조금 변형시키자면 바타이유-데리다(Derrida)-낭시(Nancy)의 정치학적 계보가 될 수도 있을 것이고, 또한 알튀세르(Althusser)-마슈레(Macherey)-랑시에르(Rancière)의 계보와도 연계될 수 있을 텐데ㅡ가 지닌 어떤 '가능성'과 결부되고 있는 것. 말하자면 이 책은 내게ㅡ마르크스(Marx)에 대한 가라타니의 '시의 적절했던[따라서 동시에 니체적 의미에서 'unzeitgemäß'하기도 했던]' 어법 그대로를 그에게 다시 돌려주자면ㅡ'가라타니, 그 가능성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1권: 출범 』(변상출 옮김), 유로, 2007.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2권: 황금시대 』(변상출 옮김), 유로, 2007.
▷ 레셰크 코와코프스키, 『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권: 황혼기 』(변상출 옮김), 유로, 2007.

4) 올해 출간된 또 다른 '시의 적절한' 번역본을 찾자면 그것은 아마도 코와코프스키(Kołakowski)의 이 세 권의 책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게도(!) 이 중 마지막 책인 3권이었는데ㅡ바그너(Wagner)의 저 <신들의 황혼(Götterdämmerung)>을 굳이 떠올리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breakdown'의 번역어인 '황혼기'만큼이나 황홀한 언어가 또 있을까ㅡ구입하자마자 찾아본 부분은 역시나 당연하게도(!) 루카치(Lukács)에 대한 장(367-437쪽)이었다. 물론 루카치에 대한 코와코프스키의 이러한 '품평'을 일종의 '일반론'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내가 원하는 것은 루카치에 대한 보다 더욱 '징후적'인 독해이다. 그런데 '징후적 독해'를 거론하기로 한다면야 코와코프스키의 이 책만큼이나 그러한 독해 방식에 적합한 책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 한 자락. 코와코프스키의 글을 그대로 옮기는 것으로 [무언가를] 대신한다(특히 내가 다른 색깔로 강조한 부분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종의 '명문(名文/明文)'에 해당하는 것으로, 내게는 보이는 것이다):

"루카치의 개성과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그가 행한 역할은 생생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문제였다. 또 이는 분명 오래 동안 계속될 문제이다. 그러나 루카치가 스탈린주의 정통파의 시대에 가장 탁월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부분 동의하는 사항이다. 사실 좀 더 정확히 하자면 그는 이 분야의 유일한 철학자였다고 말할 수 있다. 유일하게 그는 독일 철학 전통의 언어로 레닌주의의 기본 교의를 표현했으며, 당대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달리 최소한 서구 지식인들이 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글을 썼다. 그러나 그가 스탈린주의의 진정한 철학자, 즉 이 특수한 체제를 해설한 지식인이었던가, 아니면 사람들이 이런 그의 행위를 두고 말하듯이, 그리고 그 자신이 나중에 밝혔듯이 그것이 일종의 트로이의 목마, 즉 스탈린주의를 가장하고 실제로는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의 비-스탈린주의 형태를 전파한 솔직한 정통파의 사도였던가 하는 것이 논쟁의 문제가 되고 있다. [...] 공산주의와 마르크스주의에 공감한 시절부터 루카치는 철학과 사회과학의 모든 문제들은 원칙적으로 해결되어 왔으며, 남아있는 유일한 과제라고는 물려받은 정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마르크스와 레닌 이념의 진정한 내용을 확신하고 선언하는 길뿐인 것으로 알았다. 그는 마르크스의 '총체성'이 그 자체로 참된 것인가, 그리고 그 진리가 증명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를 두고 어떤 사상도 덧보태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지적했던 그의 저작들은 논거들의 집합이 아니라 교조적 주장들의 집합인 셈이다. 그는 진리와 적확성의 단 하나의 기준을 찾아낸 후 이런저런 대상, 요컨대 헤겔 혹은 피히테의 철학 · 괴테의 문학 · 카프카의 소설 등에 그것을 적용했던 것이다. 그의 교조주의는 절대적이어서 거의 완전히 숭고할 정도이다. 스탈린주의를 비판할 때도 그 기본 토대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루카치는 이성을 사용하고 방어하는 전문가들의 이성에 대한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20세기에 가장 돋보이게 행했던 인물인 듯하다."
ㅡ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흐름 3권: 황혼기』, 367쪽, 437쪽.

   

▷ 소련 과학아카데미 編, 『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 I 』
    (신승엽, 유문선, 전승주 옮김), 일월서각, 1988.
▷ 소련 과학아카데미 編, 『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 II 』
    (신승엽, 유문선, 전승주 옮김), 일월서각, 1988.

위 두 권의 책은 '미학'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제목의 서적 중에서 내가 가장 처음으로 샀던 책들로 기억하고 있다(아마도 때는 1989년이었을 것이다). 구입 당시에는 반의 반의 반도 채 다 이해하지 못했을 저 책들을 나는 아직까지도 아주 가끔씩 들춰보고 있는데ㅡ예를 들어 나는 화장실에 갈 때 꼭 책 한 권씩을 들고 들어가는 '악습'을 갖고 있다ㅡ, 이러한 책에 대한 독서야말로 '징후적 사상사 독해'에 있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곤 하는, 이 나라는 인간이야말로, 지극히 '독한' 징후적 독해가 꼭 필요한, 그런 인간이 아닐까 하는, 잡생각 한 자락을, 오늘도, 어김없이, 남겨보는 것. 그래서 어쩌면 나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루카치에 대한 저 코와코프스키의 평가가 일면 부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는 것이 아니겠냐는, 마찬가지의 잡생각 한 자락, 역시나 어김없이, 덤으로 얹어놓고 지나가는 것일 터.

       

Louis Althusser, Politique et histoire, de Machiavel à Marx
    Paris: Seuil(coll. "Traces écrites"), 2006.
Étienne Balibar, La philosophie de Marx
    Paris: La Découverte(coll. "Repères"), 2001(1993¹).
▷ 에티엔 발리바르, 『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윤소영 옮김), 문화과학사, 1995.

더불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Balibar)의 책들 몇 권을 첨부해둔다. 먼저 첫 번째 책은 작년에 출간된 알튀세르의 고등사범학교 강의록으로서 역사철학의 문제, 마키아벨리, 루소, 홉스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두 번째 책은 발리바르가 쓴 '마르크스 개설서'이다. 특히나 이 책의 일독을 '강권'하는 바인데, 이는 이미 1995년에 윤소영 선생의 번역으로 국역본이 출간되었던 바 있다. 왠지 갑자기 이 순간 계간지 『이론』을 오랜만에 다시 읽고 싶어지는 것은 어떤 '징후'의 일면일 것인가.

      

▷ 자크 데리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 』(진태원 옮김), 이제이북스, 2007.
Jacques Derrida, 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1993.
▷ 자크 데리다, 『 마르크스의 유령들 』(양운덕 옮김), 한뜻, 1996.

5) 마르크스를 읽자, 데리다를 읽자. 올해 또 한 권의 실로 반가운 번역본은 단연코 진태원의 『마르크스의 유령들』 국역본이다. 아는 사람은 이미 다 아는 사항이겠지만, 이 책은 이미 1996년에 한 번 국역되어 나온 바 있고 또한 그 번역에 있어 이미 많은 비판을 받은 바 있다. 이 겨울에서 저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 아마도 나는 위의 저 세 권의 책들을 함께 비교하면서 읽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여력이 된다면, 일전에 정리해두었던 『법의 힘』에 관한 단상들과 함께 무언가를 새로 써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마도 나는 벤야민(Benjamin)의 저 폭력에 관한 글과 번역에 관한 글과 역사이론에 관한 글을 또 다시 읽을 게 분명하고, 이어서 얼마 전 새로 나온 벤야민 선집 번역과의 비교 또한 시도할 것이 뻔하며, 또 아마도 올해 번역된 소렐(Sorel)의 폭력에 대한 글도 함께 읽게 될 것이 불을 보듯 자명하다. 내가 앞서 말하지 않았던가, 이 우연의 필연성들이 직조해내는 거미줄의 매력과 위험을.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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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12-19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쓰신 멘트들이 기대를 갖게 하네요. 이 겨울에서 저 봄으로 넘어가는 길이 심심하지 않겠습니다.^^

람혼 2007-12-20 00:55   좋아요 0 | URL
아, 정말 심심하지 않아야 할 텐데요...^^; 언제나 가장 크게 걱정되는 것은 저의 게으름과 능력부족입니다. 2008년 로쟈님의 멋진 계획들이 궁금하군요.^^

2007-12-20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2-21 02:22   좋아요 0 | URL
반가운 분, 소중한 말씀에 고개 숙여 합장 올립니다. 그 '이기적인 이타심'이 제게는 참으로 큰 힘을 주는 것 같습니다.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개'에 관해 쓰신 말씀을 읽으니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헤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데요, 알튀세르의 헤겔에 관한 글들 역시 모종의 '부활'을 위한 훌륭한 제의의 역할을 수행해주었던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더불어, 역시나 '같은 이유'에서, 건강과 건필과 건승을 기원하겠습니다!^^

2007-12-24 1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2-26 03:10   좋아요 0 | URL
거의 20년 전에 출간된 책이기에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에 대한 반응은 거의 기대하지 않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제가 오히려 참으로 반가운 마음이 듭니다. 반갑습니다.^^ 먼저 코와코프스키의 마지막 문장은 제 생각으론 아마도 루카치의 저 유명한 <이성의 파괴>를 '역으로' 염두에 두고 있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를 들자면, 루카치의 '어떤' 합리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이성의 파괴>의 일독을 권해보는 바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미학의 기초이론>을 '지금 이 순간' 읽는다는 행위가 결코 그 '사상'과 '사상사 서술'의 '진위' 혹은 '정오'를 판단하기 위한 독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바로 이러한 점에서 '징후적 독해'라는 것이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곧, 님께서 지금 현재 그 책을 읽는 행위 자체도 비단 그 사상의 진위 여부에만 관계된다고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직접적인' 독해보다는 분명 어떤 '다른' 문제의식 하에서 그 책을 읽으시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징후적 독해가 시작되는 지점은 갖고 계신 바로 그 문제의식의 지점이 아닐까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을 '곧이 곧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사상사적 맥락'에서 재위치시키는 것이 징후적 독해의 기본적인 출발점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제 생각엔, 그 책을 독해하실 때 그 책 두 권만 읽으실 것이 아니라, 예를 들자면 지젝의 최근작 The Parallax View, 또는 지젝 편집의 Revolution at the Gates를 함께 읽어보시는 건 어떨까 하는 견해도 살짝 밝혀둡니다. 지금 이 작은 댓글의 공간에서 드릴 수 있는 말씀은 한정되어 있지만, 말씀하신 대로, 기회가 될 때 '잡설' 한 자락 마련해볼 것을 약속드립니다.^^

2008-01-07 09: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8-01-09 15:45   좋아요 0 | URL
아마도 말씀해주신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학'에 대한 독서의 자세와 제가 루카치에 대해서 갖고 있는 '양가적인' 감정이 비슷한 형식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단순히 프로파간다적 예술론이라는 이름으로 피상적으로 폐기처분되곤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학을 새롭게 '다시 읽는' 방식이 분명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조금 더 '정치하게' 말씀드리자면, 제 생각에는ㅡ이 또한 '아리송한' 잡설일지 모르겠지만...^^;ㅡ그 다시 읽는 방식이 사상의 '진위 여부'에 집중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뒤집어보기의 방식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를 들자면, 지젝이 그의 책 The Parallax View에서 제기하고 있듯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뒤집은 '유물론적 변증법'이 단순한 수사학적 치환이 아니라 유물론과 변증법에 대해서 다시 새롭게 생각하게 해주는 어떤 '적극적' 조작이라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마르크스-레닌주의 미학'을 '미학적 마르크스-레닌주의'로 읽어보려는 노력도 그만큼의 의의가 있지 않을까 하는 제안을 해봅니다.^^

2008-01-10 09: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년, 돌이켜보면 올해는, 작품 몇 개를 하다보니 훌쩍 가버린, 내게는 참으로 빠르게 흘러간 한 해였다. 그렇게 참으로 정신 없이 흘러간 한 해였지만, 누구에게나 그렇듯이, 그 '짧은' 기간 동안 물론 크고 작은 일들도 많았다. 그런 소소한 일상과 비일상들이 모여 '지난 1년'이라는 이름으로 용해되고 응고되면서 만들어진 덩어리는, 올해도 어김없이, 제 스스로 어떤 '구체적 추상성'을 띤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반면교사' 혹은 '타산지석'이라는 이름의, 자기 자신을 끈임없이 '타자화'해왔던 저 거대한 기억의 장부 속으로, 다시금 허리가 접혀 들어간다. 때로는 고이 포개진 채로, 때로는 격렬히 구겨진 채로. 그러고 보면 기억의 단층들을 하나의 책이 지닌 저 '무수한' 책장들에 비유하는 것도 나름대로 일리가 있을 거라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되지도 않는 주억거림을 주억거리게 되는 것, 되는 곳, 되는 때. 이것, 이곳, 이때에 즈음하여, 이른바 '올해의 책들'을 선정해본다. 물론 당연하게도, 아주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서 되도록 많이 읽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 매겨본 독서 '성적표'의 점수가 별로 신통하지 못해 마음에 차지 않는다. 이 '올해의 책들'은, 하나의 '완결'과는 거리가 멀고, 결국 딱 그 수만큼의, 아니 딱 그 배만큼의 '숙제'만을, 잔인하게 남겨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한 숨 돌리기보다는 오히려 가쁜 숨으로 더욱 신발끈을 조일 수밖에. 더구나, 국내 저자의 저서, 외국 저자의 저서, 그리고 번역서라는 세 범주에서 각각 다섯 권씩 선정해놓고 보니, 역시나 이러한 목록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편협한 '카테고리'와 '리밋'과 '바운더리'임에야. 뜬금없이, 이제껏 실감이 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정말 20대와는 영원히 안녕이다. 다음 생애에 또 만나서 멋지게 한 번 더 놀아보자, 나의 20대여(지극히 '랑만적인' 어조로 발음할 것)!

먼저 국내 저자의 저서 다섯 권을 뽑아본다:

1. 이경훈, 『대합실의 추억: 식민지 시대의 근대문학』, 문학동네, 2007.

2. 고지현, 『꿈과 깨어나기: 발터 벤야민 파사주 프로젝트의 역사이론』, 유로, 2007.

3. 신준형,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 가톨릭 개혁의 시각문화』, 사회평론, 2007.

4. 오생근, 『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 문학과지성사, 2007.

5. 김덕영,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길, 2007.

   

▷ 이경훈, 『 대합실의 추억: 식민지 시대의 근대문학 』, 문학동네, 2007.
▷ 이경훈, 『 오빠의 탄생: 한국 근대문학의 풍속사 』, 문학과지성사, 2003.

1) '모던 보이'와 '모던 걸' 시대의 문학에 관한 천착에 있어 이경훈만큼이나 열정적이고 치밀한 자세로 경주하고 있는 '소장학자'를 찾아보기란 아마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대열에 권보드래와 김예림을 추가한다). 『대합실의 추억』은 4년 전에 출간되었던 『오빠의 탄생』의 속편을 이루고 있다(『오빠의 탄생』이 출간되었을 때는 정말 신이 나서 읽어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강한 영향력을 느낄 수 있었던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저자는 '문학이면서도 문학이 아닌' 이른바 "콘텍스트 작업"을 지향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는 이러한 하나의 '방법론'이 본문에서 제대로 펼쳐지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개인적으로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생각이지만, 이 책은 모더니티의 문제를 둘러싼 최근의 근대문학 연구에 있어 빠트릴 수 없는 평론집이라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더불어, 문학과지성사에서 몇 년 전부터 연이어 출간되고 있는 한국문학 시리즈 중에서 이경훈이 책임 편집을 맡은 이광수의 소설 『흙』의 일독도 함께 권해본다.


       

▷ 고지현, 『 꿈과 깨어나기: 발터 벤야민 파사주 프로젝트의 역사이론 』, 유로, 2007.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V-1. Das Passagen-Wer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V-2. Das Passagen-Werk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2) 얼마 전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번역 선집 일차분이 출간된 바도 있거니와, 가히 '벤야민 르네상스'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최근 출판계의 동향인 듯하다. 개인적으로 오랜 시간을 두고 읽어오고 있는 철학자이기도 하기에, 이러한 '부흥'에 대한 소회가 없을 수 없겠다. 다만 벤야민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국내 저자의 연구서를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었는데, 반갑게도 올해 출간되었던 고지현의 책이 이에 대해 일정 부분 '해갈'을 해줬다는 느낌이다. 특히나 이 책은 벤야민의 역사이론이 마르크스주의와 맺고 있는 관계에 가장 큰 초점을 두고 있다. 벤야민과 '파사젠-베르크' 읽기를 위한 도입으로서 추천할 만하다. 수잔 벅-모스(Susan Buck-Morss)의 『발터 벤야민과 아케이드 프로젝트』(문학동네, 2004)와 그램 질로크(Graeme Gilloch)의 『발터 벤야민과 메트로폴리스』(효형출판, 2005)와 함께 읽는다면 '파사젠-베르크'로 들어가는 하나의 훌륭한 '지도책'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 일독을 권한다. 그나저나 이런저런 사정들을 이리저리 측정해보고 있자면, 나는 아마도 2008년 역시 벤야민 '독해'로 한 시절을 보내게 될 게 뻔하다. 개인적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신준형, 『 천상의 미술과 지상의 투쟁: 가톨릭 개혁의 시각문화 』, 사회평론, 2007.
▷ 츠베탕 토도로프, 『 일상 예찬 』(이은진 옮김), 뿌리와이파리, 2003.

3) 신준형의 책은 저자의 말마따나 "종교문화의 시각적 분야"에 관한 한 권의 좋은 연구서이다. 이 시기의 서양 회화를 단순히 '종교 미술'로 바라보는 것과 '종교 문화가 반영된 하나의 시각적 체험이자 도전'으로 바라보는 것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미술사'라는 개념을 당연한 듯 전제하게 되지만, 후자는 '인간학적' 혹은 [광의의] '현상학적' 입장에서 바로 그 '미술사'의 범주를 넘어서게 된다. 바로크와 르네상스 미술에 관한 책이 흔히 '양식 분석'이나 '도상 해석'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과는 차이가 나는 대목이다. 이렇듯 외견상 미술사에 대한 것으로 보이는 책이 바로 그 '미술사'라는 개념 자체에 물음을 던질 때 나의 기분은 상쾌해진다. 말하자면, 저 그림들은, 말 그대로, '천상의 미술'을 위한 '지상의 투쟁'인 것(신준형의 이 책이 '의도적으로' 다루지 않고 있는 부분, 곧 같은 시기(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는 토도로프(Todorov)의 책 『일상 예찬』을 통해 '보완'할 수 있을 텐데, 이 두 권의 '병행 독서' 또한 추천하는 바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열아홉 살 무렵 곰브리치(Gombrich)의 책을 읽고 흘렸던 닭똥 같은 눈물은 바로 저 '천상의 미와 지상의 싸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곰브리치는 복음서의 저자 마태를 묘사한 카라바조(Caravaggio)의 두 그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쓰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마음속에 전혀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비상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보아온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며, 아기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자들이 그를 찬미하러 찾아들고, 한 어부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정경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아주 참신한 안목으로 해독하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분노케 한 경우가 수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물의의 전형적인 예로서 1600년 전후로 작품 활동을 한 매우 대담하고 혁명적인 이탈리아 화가 까라바죠가 있다. 그는 로마의 한 교회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성 마태의 그림을 부탁받았다. 그가 받은 주문은 성 마태가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그가 글을 쓸 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한 천사를 그려넣는 것이었다.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젊은 화가 까라바죠는 한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가 갑자기 책을 저술하려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그리기 위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붙들고 있으며 손에 익지 않은 필기(筆記)를 하기 위해 애써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성 마태>를 그렸다. 마태의 옆에 있는 젊은 천사는 방금 천상으로부터 날아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처럼 그 노동자의 손을 우아하게 인도하고 있다. 까라바죠가 이 그림을 제단에 모실 교회로 가져가자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 성 마태에 대한 경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분개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까라바죠는 성 마태를 다시 그려야 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자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까라바죠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으므로 지금도 명화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보다는 첫번째 그림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인다."
ㅡ 곰브리치, 『서양 미술사 上』, 열화당, 23-24쪽.


   

▷ 다니엘 아라스, 『 디테일: 가까이에서 본 미술사를 위하여 』(이윤영 옮김), 숲, 2007.
Mark Rothko, The Artist's Reality: Philosophies of Art
    New Haven/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4.

덧붙여, 다니엘 아라스(Daniel Arasse)의 책 또한 일독을 권한다. 이런 종류의 '정교하고 치밀한' 미술 서적을 보는 즐거움으로 올해는 피서(避暑)를 대신할 수 있었다. 또한 내게 거의 종교적 '신열'에 가까운 열광을 불러일으키는 화가 로스코(Rothko)의 글 또한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왜 이 두 권이 함께 떠올랐을까?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은 이러한 나의 '엉뚱한' 연상(association)에도 해당되는 것이려나.


   

▷ 오생근, 『 프랑스어 문학과 현대성의 인식 』, 문학과지성사, 2007.
Henri Michaux, Lointain intérieur, Plume, Paris: Gallimard(coll. "Poésie"), 1985.

4) 프랑스어 문학의 '세계'는 단순히 프랑스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는, 오생근의 책을 통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세제르(Césaire)와 상고르(Senghor)의 시들, 또한 그것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네그리튀드(négritude)의 존재, 곧 아프리카의 프랑스어 문학을 두고 하는 말이다. 네그리튀드에 대한 독립된 국내 연구서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이 책의 2부는 실로 반가운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이 책에 수록된 글들 중 사르트르(Sartre)와 바르트(Barthes), 또는 들뢰즈(Deleuze)의 문학비평에 관한 글들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도 앙리 미쇼(Henri Michaux)에 대한 글이 개인적으로 가장 반가웠다. 미쇼의 경우, 그의 시선집이 예전에 한 번 번역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나, 현재로서는 국역본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로 시의 '번역'에 대해서는 상당히 '유보적인' 입장이기는 하지만, 미쇼 시의 번역에는 조금 욕심이 있다는 고백 한 자락 남겨본다. 그의 『플륌』은 여전히 나를 폭소케 함과 동시에 또한 섬뜩하게 만든다! 미쇼에 대한 '애정'의 글은 나중에 따로 자리를 마련해보도록 하겠다.


   

▷ 롤랑 바르트, 『 기호의 제국 』(김주환, 한은경 옮김), 민음사, 1997.
Henri Michaux, Ailleurs, Paris: Gallimard(coll. "Poésie"), 1986.

미쇼 이야기를 하고 있자니 예전에 번역되었던ㅡ세상에, 벌써 10년이 지났군!ㅡ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 국역본이 떠오른다. 이 책의 번역자는 첫 번째 역자 주를ㅡ게다가 이 주석이 역자 주 중에서 가장 긴 것인데ㅡ이렇게 채우고 있었다:

"이 번역 작업 내내 이 <가라바니Garabagne>라는 말만큼 역자들을 괴롭힌 것도 없었다. 출전에 대해 적절한 역주를 달아야겠는데 도무지 어디서 나오는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분명 어떤 가상의 나라를 지칭하는 것 같지만, <감>만으로 역주를 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영역본이나 일역본도 아무런 역주 없이 그냥 말만 옮겨놓고 있다. 온갖 백과 사전과 문학, 어학, 철학 사전까지 뒤져보았지만 <Garabagne>라는 말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바르트의 제자이며 <프랑스 사람>인 다니엘 다이안 교수에게 물어보았으나 그에게도 이는 처음 보는 낯선 단어였다. 다만 그는 혹시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에 나오는 말이 아닐까 추정했다. 희망에 부풀어 도서관에 가서 라블레의 온갖 책을 뒤졌으나 <가라바니>라는 말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현대 불문학을 가르치는 미셸 리치만Michele Richman 교수에게 물어보았으나 그도 모른다. 자기 동료들에게 물어보겠다고 한 것이 벌써 여러 달 전이지만 아직 연락이 없다. 우리나라에 잘 알려진 마크 포스터 교수 역시 <가라바니>에 대한 대답 대신 자신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되었는데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엉뚱한(?) 질문만을 보내왔다. 미시간 대학의 에릭 래브킨Eric Rabkin 교수, 제퍼슨 대학의 존 운스워스John Unsworth 교수, 프린스턴 대학의 윌라드 맥카티Willard McCarty 교수 등도 모르겠다는 대답만을 보내왔다. <정보의 바다>라는 인터넷을 뒤지기 시작했지만 <가라바니>는 없다. 불문학, 현대 문학,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주제를 다루는 인터넷 전자 우편의 여러 논의 모임에 가라바니에 대한 질문을 보냈지만 추측만 무성할 뿐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다. 어떤 이는 혹시 바르트의 신조어가 아니겠느냐는 추측까지 보내왔다. 역자들은 <가라바니>라는 단어 하나에 그간 투자한 시간과 노력이라면 자그만한 책 하나를 더 번역할 수 있었으리라 믿고 있다. 혹시 독자 여러분 중에서 <가라바니>의 정확한 뜻과 출전을 알고 계시는 분은 역자에게 알려주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린다."
ㅡ 롤랑 바르트, 『기호의 제국』, 139-140쪽.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면 문장들은 숫제 일종의 소극(farce)이 되어버린다. 이건 거의 애절하기까지한 어조가 아닌가. 역자 주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예의'마저 던져버리고 하소연할 정도로 역자들의 답답함은 극에 달해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자문을 구했던 미국의 교수들이 죄다 바보들이었는지도 모를 일이고, 라블레(Rabelais)의 작품은 그만큼 방대하고 변화무쌍하기 짝이 없는 세계일 것이며, 또 10년 전의 인터넷이 요즘 같을 수야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리 해도 결국 앙리 미쇼가 만들어낸 가상의 땅 '가라바뉴(Garabagne)'를 알지 못했던 것! 미쇼의 시 중에서는 가상의 공간을 설정하고 그곳의 동식물과 풍습, 언어에 관해서까지 상세히 '서술'해가는 시들이 있는데, 그 시들이 "다른 곳(Ailleurs)"이라는 표제 하에 처음으로 묶여 나왔던 것만도 이미 때는 1948년이었던 것.


   

▷ 김덕영, 『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 』, 길, 2007.
▷ 게오르그 짐멜, 『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 』(김덕영, 윤미애 옮김), 새물결, 2005.

5) 김덕영의 책 『게오르그 짐멜의 모더니티 풍경 11가지』는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에 관한 본격적인 국내 연구서의 '개시'라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하다. 2005년에 편역 출간했던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된 김덕영의 짐멜 소개는 올해 출간된 짐멜의 번역 선집이 가세하면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인데, 이에 최근 많은 이들이 짐멜의 사회학에 주목하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으로 생각된다. 내게는 한때 '글쓰기'라는 하나의 '형식적' 문제에 있어서 벤야민의 '모더니티'와 짐멜의 '모더니티'가 공유하고 있는 지점이 상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던 기억이 있는데, 올해 김덕영의 책은 내가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짐멜을 새롭게 환기시켜준 계기가 되었다. 만만치 않은 두터운 분량이지만, 일독을 권한다.


    

▷ 게오르그 짐멜, 『 게오르그 짐멜 선집 1: 게오르그 짐멜의 문화이론 』
    (김덕영, 배정희 옮김), 길, 2007.
▷ 게오르그 짐멜, 『 게오르그 짐멜 선집 2: 근대 세계관의 역사 』(김덕영 옮김), 길, 2007.
▷ 게오르그 짐멜, 『 게오르그 짐멜 선집 3: 예술가들이 주조한 근대와 현대 』
    (김덕영 옮김), 길, 2007.


   

▷ Georg Simmel, Gesamtausgabe Band 6. Philosophie des Geldes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89. 
▷ Georg Simmel, Gesamtausgabe Band 11. 
    Soziologie: Untersuchungen über die Formen der Vergesellschaftung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2.

더불어 짐멜의 두 '주저'에 대한 번역, 곧 『돈의 철학』의 재번역과 『사회학』의 초역이 어서 이루어졌으면 하는 소망 한 자락 덧붙여둔다. 여담이지만, 올해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의 『사회적 체계들(Soziale Systeme)』이 번역 출간되었을 때 루만을 전공하고 있는 한 선배로부터 번역의 몇몇 문제점들을 전해들을 기회가 있었는데, 짐멜이든 루만이든, 사회학의 고전들을 '좋은' 번역으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은, 'Garabagne'의 뜻을 애타게 찾았던 10여년 전 어떤 역자의 마음만큼이나, 거의 애절하기까지 하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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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12-15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지극히 '개인적인' 이군요 =333

람혼 2007-12-15 14:01   좋아요 0 | URL
아, 물론, 이미 말씀드렸던 대로, 또 이곳의 모든 글이 그러한 대로.^^

로쟈 2007-12-1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호의 제국>은 재출간된다고 하는데, '가라바뉴'에 대한 주석은 바뀔 거 같네요.^^ <데테일>은 저도 관심을 두었던 책인데, 아직 돈도 시간도 못 구하고 있습니다.--;

람혼 2007-12-15 14:04   좋아요 0 | URL
<기호의 제국>이 재출간되는군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디테일>은 로쟈님이 챙겨주셔서 구입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는데요, 역추천합니다.^^
("돈과 시간"에 공감...ㅠㅠ)

yoonta 2007-12-1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호의 제국>역자들이 람혼님을 일찍 알았더라면 저런 혼란은 없었을 터인데..^^ 그나저나 람혼님의 영향을 받아 바타이유에 관한 글을 하나 써보는 중인데 영 진도가 안나가네요.

람혼 2007-12-16 02:30   좋아요 0 | URL
와우! 댓글을 보자마자 정말 '실제로' 소리 내어 탄성을 질렀답니다.^^
바타이유에 대한 yoonta님의 글,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너무 기대됩니다.
(원래 좋은 글은 진도가 느리게 나가는 법...이 아닐까요? ^^;)

2007-12-17 0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2-17 02:22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바, 바로 바타이유의 '일반경제학'이야말로 가라타니가 <트랜스크리틱>과 <세계공화국으로>에서 계속 강조하고 있는 '교환'과 '교통'의 개념을 이미 선취한 이론이라는 것이 저의 문제의식입니다. 정말 반가운데요.^^ 저는 또한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의 <호모 사케르>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문제의식과 개념의 틀 역시 바타이유의 '일반경제학'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조만간 이에 대해서도 기회가 되면 '함께' 정리를 한 번 해볼까 합니다. 일전에도 한 번 말씀드렸듯이, 개인적으로 제게는 '가라타니 안의 모스-바타이유-카이유와 계보'야말로 '가라타니, 그 가능성의 중심'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죠. 자세한 이야기는 또 다른 글로 대신하도록 하겠습니다.
 



▷ 창 밖으로 동이 터 오는 책상 앞에서. 『에로스의 눈물』의 세 가지 판본들.

1)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국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읽기의 편집증. 나라는 인간은,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에로스의 눈물(Les larmes d'Éros)』의 불어본(1판과 2판)과 영역본과 국역본을 동시에 펼쳐놓고 비교 독해하기. 이러한 병증(病症)은 사실 어떤 하나의 원칙,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발현되고 발설되고 있는 가장 개인적인 징후이자 증상의 장소일 터. 그 원칙과 이데올로기란 아마도, 불어와 영어와 '국어'가 만나 그 중간의 어디쯤에선가 '형성'되는, 형성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하나의 '진의(眞意)'에 대한 순진하리만치 '독실한' 믿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타협[절충] 형성(Kompromißbildung)'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벤야민(Benjamin)이 말했던 저 '순수 언어(die reine Sprache)'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 지독히도 철저하고 처절한 일종의 '텍스트주의자'에 다름 아닐 것, 그런 것, 그런 곳으로, 몇 자락의 잡설들이, 흘러든다. 예를 들자면, 에스페란토(Esperanto)라는 '인공적' 언어의 창안자들에 대한 나의 오래 묵은 애틋한 심정 또한 저 '순수 언어'에 대한 '동병상련'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 공통의 병인(病因)이란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창안'이라는 움직임이 지닌 저 '형이상학적' 운동성 안에 있을 것. 말하자면 언어는, 나의 안과 밖에서, 다시금, 반복되고, 또한 매번 다르게, 반복된다. 이 원환(圓環) 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은 소박한 '인류애'임과 동시에ㅡ이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희망의 원리'일 것인가ㅡ그에 못지않은 하나의 거대한 '공포증'ㅡ말하자면, '대중들의/에 대한 공포'ㅡ일 것.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IV-1: Kleine Prosa. Baudelaire-Übertragung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1: 1913-1926
    Cambridge/Londo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 발터 벤야민,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2) 하나의 집착. 예를 들면,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Übersetzung)은ㅡ아이러니컬하게도ㅡ원문을 적어도 보다 더 결정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 심는(verpflanzt)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은 더 이상 이 이외의 그 어떤 중계(Übertragung)를 통해서도 옮겨질 수 없으며, 항상 오직 이러한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새롭고 다른 부분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독어판, p.15) 이를 일종의 '전도된' 낭만주의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어 벤야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원문의 성립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번역의 언어가 원문처럼 읽힌다는 것은 번역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문자 그대로의 번역에 의해 보장 받게 되는 충실한 번역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작업에서 언어의 보충(Sprachergänzung)에 대한 거대한 갈망(Sehnsucht)이 드러난다는 점이다."(독어판, p.18)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보충'으로서의 번역/중계, 곧 원문 전체에 대한 포괄이 아니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원문보다 더 '결정적인' 어떤 언어의 영역, 이식과 이행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착이란 내게는 '언어' 자체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교통(Verkehr)'에 대한 이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집착이 내게 단순히 '아집'으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순수 언어는, 바로 그 순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므로 순수 언어란, 하나의 확고한 동일성으로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행과 이식의 행간에서, 언뜻, 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터. 그런데 잡설의 범람이 여기까지 이르고 보면, 나의 '공간'이란, 그 이행의 순간들과 이식의 지점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무수히 헛되거나 헛되이 무수한, 그런 덩어리들이 비우고 있고 그런 틈새들이 채우고 있는 하나의 장소에 다름 아닐 터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나의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다름 아님'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내 정원의 오래 된 이름, 'Anarchiv' 혹은 '襤魂齋'. 나는 가끔 이 정원의 이곳저곳에 물을 주지만, '잡초'를 솎아내지는 못한다. '잡초'따위는 없다고 하는 서투른 연민의 감정과 '시혜의식'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잡초'라고 생각하는 나의 어설픈 '범신론(汎神論)' 때문이다.

3) 번역이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정의(definition/justice)'의 한 형식:
얼마 전에 이제이북스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론 이 번역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제는 유달리 '도발적'일 것도 없을 하나의 테제는, 흔히 고전 번역의 '위태로운' 기반이라는 '위급한' 정세 진단과 맞물려서 자주 논의되곤 한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한국어] 그 자체로 읽힐 수 있는 번역본'의 [가슴 벅찬] 가능성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가능성'이란, '번역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에 대한 '가장 나은' 차선(次善)을 생각하는 사유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 그러한 번역본의 가능성은 인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수효와 수요의 가능성에 곧 바로 연결되고 있다.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훈고학(詁學)'이 아닌 다음에야 이러한 번역본의 존재 여부가 바로 '인문학의 위기'를 타파하는 열쇠 중의 하나라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세계 시민'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조잡한 인류애의 총합'이 낳는 결과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다언어와 다문화에 대한 이해ㅡ그것도 단순히 '어설픈' 이해가 아니라 '농밀한' 이해ㅡ는 필수적이다못해 필요불가결하다고까지 할 사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히 말하건대, 우리 모두는 단순한 '향유자'가 아니라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누구나 읽을 수 있는'이라는 기준을 멋대로 세워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준은 흔히 '하향 평준화'되기 십상인데, 나는 그런 기준을 설정하는 기존의 연구자 또는 번역자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ㅡ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ㅡ'엘리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외국어를 한국어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번역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어로 된 번역본은 무엇보다 그것의 '원문'이 되는 외국어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내게 있어 좋은 번역본이란, 이런 '완벽한' [언어의] 타자를 계속 '환기'시킬 수 있는, 또한 심지어 그러한 유령의 출현을 '조장'할 수 있는 언어의 집합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결국 다시금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그리는 어떤 나선형의 선으로 소급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바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의 '순수 언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이야말로 성마른 번역에 대한 변명이기는커녕 '최고의 차선'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덧붙여, 최근 인터넷 공간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는 여러 '서평'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의 책을 채 다 읽지도 않고 다만 몇몇 부분의 오류에 대한 인상만을 가지고서 마치 그 책 전체를 평가할 수 있을 것처럼 덤벼드는 행태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그러므로 이 또한 '몇몇 부분에 대한 인상'이 지닌 편견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된 번역본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그 고전을 이루고 있는 타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유발'하는, 따라서 번역본 그 자체로서는 어쩌면 '실격'일지 모르는 그런 '불완전한' 번역본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가능해진다, 라고, 그리고 또한 그러한 번역본[과 그것에 수반되는 '타자'와 '유령']을 미련하리만치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끈질기고 진득한 '독해(讀解/毒解)'의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읽는다, 읽을 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 2007.

   

▷ Aristotle, Metaphysics[Books I-IX](trans. by H. Tredennick),

    Cambridge/Lodon: Harvard University Press(Loeb Classical Library), 1933.

▷ Aristotle, Metaphysics[Books X-XIV], Oeconomica, Magna Moralia

    (trans. by H. Tredennick, G. C. Armstrong), 

    Cambridge/Lodon: Harvard University Press(Loeb Classical Library), 1935.

   

▷ 조대호 역해,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문예출판사, 2004.

▷ Vasilis Politis, Aristotle and the Metaphysics,

    London/New York: Routledge, 2004.

4) 소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원본은 희랍어-영어 대역본으로, 1930년대에 하버드 대학의 Loeb 문고로 출간되었던 다소 오래 된 판본이다. 사실상 학부 졸업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거의 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대호 선생의 역해본이 나왔던 2004년에 다시금 오랜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정이 불타 올랐으나 그 뜨거움이 얼마 가지 못해 이내 사그라졌던 기억이 있다. 같은 해에 출간되었던 폴리티스(Politis)의 개설서 또한 읽을 만하다. 일독을 권한다. 올해 완역본의 출간으로 이제 다시 새로운 '무기'를 탑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하여, 함께 하는 일독을 권커니 잣거니.


▷ 단 한 순간으로서만 남은, 어느 저녁. 창문을 통해 넘어온 노을이 너무 예뻐서, 그리고 그 노을의 조명을 받은 공간이 너무 아늑해서, 문득 사진 속에 담아본 나의 '고요한 전쟁터'. 이 사진을 찍자마자, 저 노을은, 거짓말처럼, 갑자기, 산등성이 너머로, 얄밉게 물러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결국 저 저녁도, 여느 저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단 한 순간만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나를 매료시키는, 저 헤겔적 특수성과 보편성(들).

   

5) LP를 듣는 시간, 감싸는 먼지들의 소음 속에서. 일종의 망중한, 혹은 의도하지 않은 어떤 '준비'의 시간. 나는, 한 인간을 '아는' 척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서로 부대꼈는가, 얼마나 서로 살을 맞닿았는가, 라는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들, 차라리 또 다른 한 무더기의 질문들. 한 인간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이런저런 담화가 항상 경솔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시간'에 대한 물음과 믿음 때문이다. 그 시간이 커지고 깊어짐에 따라, 오히려 언어는 줄어들고 축소되기 마련이다. '이심전심', '불립문자'라고 완곡하고 범박하게 말해도 좋다. 어쨌든 그럴수록 언어는 침묵에 더욱 근접해간다. 견딜 수 없는 침묵ㅡ언어는 부재하고, 급기야는 실종된다ㅡ이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하는 침묵ㅡ연타(連打)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무(無), 곧 하나의 연속체(continuum)에 도달한다ㅡ도 있다. 앎을 포장한 언어들의 수다스러움, 마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취약한 단어 몇 줌에 담을 수 있을 것처럼 구는 저 모든 규정의 몸짓들이, 지겹고도 두려우며, 천박하면서도 척박하며, 또한 시시하면서도 서럽다. 조도(照度)를 한껏 낮추고, 실로 오랜만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A Love Supreme>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가사가 없어도, 가사가 들려온다, 그런 점이 좋다(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콜트레인은 굳이, "a love supreme"이라는 어구를, 입을 떼어, 그렇게 반복해서 읊조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하나의 아쉬움, 이 느낌만은 역시나 오롯이 그대로인데, 하지만 유독 오늘따라 저 부정관사 하나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건, 왜일까).

   

▷ Martin Heidegger, Zur Sache des Denkens,

    Tübingen: Max Niemeyer, 1988³(1969¹).

6) 다시, 선물에 대하여: 일본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몇 달 전에 선물받은 앙증맞은 회중시계 하나. 귀를 기울이면, 책상 위에서 항상 째깍째깍, 나의 시간에 '메터(Meter)'를 부여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선물은 그가 내게 준 것이었으나, 다시 말해서, 그가, 내게, 선물을, 준, 것이었으나, 이 모든 주어와 술어와 목적어의 구조를 넘어서서, 다만, '그것은 준다'. 인칭과 비인칭, 그리고 [어쩌면] '3인칭'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금 주워 담으며, 오랜만에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Zeit und Sein)」 속 몇몇 구절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차라리, 선물(gift/don)이란, 그러므로 하나의 '문형 연습'이랄까, 혹은 외국어 습득하기에 준하는, 어설픈 걸음마와도 같은 하나의 힘겨운 '격설(鴃舌)'이랄까: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서구의] 여러 형식들. '직역'하자면, "그것이 준다(Es gibt)", 혹은, "그것이 거기에 갖고 있다(Il y a)". 그러니까, "비가 온다(Es regnet/It rains/Il pleut)". 아니, 차라리, "그는 운다(Il pleure)". 그러므로 사실 '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름으로 포장된 하나의 물음이 묻고 있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이에 나는 다시금 '번역'과 '정의'의 형식으로 되돌아온다.


   

▷ Jacques Lacan, 
    D'un discours qui ne serait pas du semblant. Le séminaire, livre XVIII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2006.

▷ Jacques Lacan, 

    Le moi dans la théorie de Freud et dans la technique de la psychanalyse.
    Le séminaire, livre II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78.

7) 정신의 단련, 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모: 출간은 작년부터 예고되었지만 얼마 전에야 비로소 도착한, 따끈따끈한 라캉의 세미나 18권(그러니까 전체 25권 중에서 이제 모두 열네 권이 공식 출간된 것!). 라캉이 이제는[이라고 해봤자 이미 1971년!] 한자(漢字)에도 손을 대는군, 하고 혀를 차며 읽고 있다가, 예전에 폭소를 터뜨리며 읽었던 세미나 2권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살짝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라캉의 대사: "어디, 「도둑맞은 편지」 읽어 온 사람들 있으면 손 좀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이런, 절반도 안 되는군!"(세미나 2권, p.228 참조)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는 아마도, 내가 종종 라캉을 게 눈 감추듯 읽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항상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

▷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8) 코스모폴리스(cosmopolis)를 가로지르거나 훑어내리는 지하철이라고, 아니, 차라리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를 관통하는 지하철이라고, 그렇게 말해야 할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서울을 살짝 벗어나 살기 시작한 이후로 지하철은 나의 또 다른 '훌륭한' 독서 장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울의 어느 곳으로 출타를 해도 책의 한 장(章)쯤 읽어내는 건 유(類)도 아닌 이 '적확한' 거리감과 '적절한' 소외감. 요즘 그 지하철을 오가며 가장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올해 출간된 들뢰즈 철학에 대한 작은 개설서 한 권(특히나 책 사이사이에 포진한 박스 기사(encadré)까지 '게걸스럽게' 읽게 되는 아주 알찬 입문서로서, 역시나 일독을 권한다). 초반부(pp. 29-38)에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저 '새로움(nouveauté)'에 대한 강박ㅡ나는 이것을 하나의 '강박'이라고, '강박'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ㅡ을,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새로움'의 어떤 그림자일 뿐인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동시에 한편에선 이미 잔잔한 감동을 받고 있는 나는, 이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당신은 알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는 당신이 알기를 바라고 있기는 한 걸까, 알 수 없다,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들뢰즈의 철학적 과제 하나를 간단명료하게 요약한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처럼, 다만 "현재를 진단할(diagnostiquer le présent)" 수 있기만을 바랄 뿐(p.32). 그러니, 기껏해야 나는, 나라는 인간은, 코스모폴리탄이 되기는커녕,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되기에도 힘에 부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물 밖으로 나온, 아니 이제는 숫제 처음부터 물 따위는 없었을 거라고 지레짐작까지 해대는, 호흡만 가쁜 한 마리 물고기처럼,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뭍 만난' 물고기처럼.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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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40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마늘빵 2007-11-3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일상을 담은 페이퍼 조차 너무 어려워요. 문단을 나눠주세욤.
그나저나 저 노랗게 물들은 서재는 너무 부럽군요.

람혼 2007-11-30 12:49   좋아요 0 | URL
제가 문단 나누기를 잘 못하는 악습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도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는 저녁 노을 풍경이었습니다.

로쟈 2007-11-3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는 단순한 '향유자'가 아니라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람혼님의 기본 입장을 읽을 수 있군요. 이것은 '가장 좋은 의미'의 엘리트주의는 아닐까요? 하지만 레이 초우의 말을 빌면 그러한 "발언을 형성하게 한 제도적 조직과 기구에 대한 의식"은 거기서 누락되는 게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란 대단한 고전이 있다, 이게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800쪽이 넘는다, 란 발언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너희가 이 정도 안 읽었으면 아는 체하지 마라). 읽는다는 건 언제나 '여가'의 문제이고 '유한계급적' 토대와 결부됩니다. 내가 책을 읽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신 설겆이를 해야 하고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들에게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액면으로만 따지자면 그렇지 않은 번역이 있나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너희도 '연구자'가 돼 보라, 고 권유할 수 있을지도. 가장 나쁜 의미의 엘리트적, 부르주아적 입장에서 깆게 되는 생각입니다...

람혼 2007-11-30 12:5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입니다. 특히나 계급적이고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들에 대한 의식을 누락한 읽기에의 '강요'가, 가장 나쁜 의미에서에의 엘리트적/부르주아적 입장이 될 수 있다는ㅡ살짝 비틀어서 따끔히 지적해주신ㅡ말씀에는, 부끄러움과 불끈거림이 동시에 깃든 동감을 표하게 됩니다. 제 기본적인 생각은 어쩌면 가장 나쁜(?) 의미에서의 '유토피아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아마도 그래서 '몽상'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겠죠^^;). 다만 우리 모두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 생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개인적으로는 바로 저 "너희가 이 정도도 안 읽었으면 아예 아는 체도 하지 말라"는 말로 대표되는 지식-권력적 편향성에 대한 의문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희랍어를 알고 <형이상학>의 번역본을 원문과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는 없겠죠(다만 여기서 희랍어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유한계급적 표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하지만 존재 사태에 대한 이해가 언어적 상황을 벗어나서는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설픈 '하이데거리안(혹은 어쩌면 '안티-하이데거리안'?)'의 입장에서는, 번역자만의 '국어'와 그 번역을 불평하면서도 계속 들춰볼 수밖에 없는 독자만의 '국어' 사이에 가로놓여진 깊은 골에 자꾸만 시선을 주게 됩니다. 로쟈님 같은 분이 있어 많은 번역자들이 자극을 받고 의견을 공유하며 오류를 수정하는, 그리고 독자들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고 '양서'의 출현에 일정 부분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분위기는 실로 고무적인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그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ㅡ영어만 공부해서 취직하기도 벅찰진대!ㅡ단순히 '번안'된 번역본의 '국어'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러한 '국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타자들, 다른 언어들에 대한 관심과 의문을 스스로 촉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번역본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의 '유토피아주의'의 기본적 발상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오히려 외국어와 번역에 대한 어떤 '독점'이 역으로 기존의 "제도적 조직과 기구"를 더욱 공고히 하는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국어'의 자리라는, 이 지극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함의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국가-언어'의 위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건 아닐까요? 이는 반복해서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희망의 원리'이자 동시에 '공포증'이라는 복합적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개인적인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번역과 외국어의 문제는 분명 계급적 문제 혹은 사회-교육적 문제와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겠으나,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더욱, 이 '몽상'과 '잡설'의 자리는 바로 그 '계급투쟁'의 지점에 대한 의식과 의문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 또한 단지 '이 번역은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만 툭 던지는 번역본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번역본도 결국...?'이라는 반복되는 실망, 그리고 독서를 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반복되는 '이물감'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해법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물음이 '유토피아적 몽상'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을까, 혼자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말씀드렸듯이, 번역과 외국어에 대한 제 기본적인 발상은 로쟈님께 이렇게 '글'로 고백하기가 부끄러울 만큼이나 지극히 소박합니다: 소통하기 위해서.

로쟈 2007-11-30 13:3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람혼님의 식견과 열정이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되기를 기대하는 쪽입니다. 조금 다른 얘기로 둘러보면, 똑똑하고 글 잘쓰는 젊은 문학평론가들이 많은데, 안타깝게도 문학평론집은 거의 팔리지 않고 그들에게 주목하는 독자들도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이'에, 이 '중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전에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그런 문맥인데, 공부 잘하고 열심히 하는 학자들 적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대중/독자들과 소통되지 않고 있고 이게 저는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발견된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하는 것, 그게 더 중요한 현안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람혼 2007-12-01 14:07   좋아요 0 | URL
'발견된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하는 것'은 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사이'와 '중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해소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기회'와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는 질문이겠지요. 무엇이 '소통'인가라는 물음을 끈질기게 가슴 속에 품고 느린 걸음이나마 정진해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yoonta 2007-11-3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말씀에도 동의하고 람혼님말씀에도 고개를 끄떡이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로쟈님말씀처럼 외국어공부나 번역이라는 것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수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현실적 판단..그리고 그처럼 번역이라는 것이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하는 엘리트의식아래에서 하향평준화된? 번역본을 내놓는 번역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람혼님의 다소 유토피아적인 관점..둘 다 수긍할만한 일면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원전과 함께 읽을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부분에서는 약간 갸우뚱하게 되는 측면이 있는데..원전을 환기시키는 번역이라는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부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때문입니다. 위에 말씀하신 "하향평준화된 번역"이란 것이 한국어로 읽을때의 가독성부분에만 촛점을 맞춘 번역을 지칭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에의 대안으로 아마도 원어의 뉘앙스와 느낌을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린 번역이 이상적인 번역이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그것이 꼭 한국어로 읽을때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일일까하는 부분에서는 그렇지도 않을수 있을텐데하는 의문때문입니다. 원어의 느낌과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한국어로 번역했을때도 쉽게 이해할수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원래 번역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아니었던 가요? 로쟈님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도 결국 그것을 말씀하시는걸로 저는 이해합니다.

람혼 2007-12-01 14:07   좋아요 0 | URL
의견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yoonta님(사실 제가 항상 yoonta님을 '윤타'님이라 부르지[쓰지] 않고 'yoonta'님이라 부르는[쓰는] 것에서도 제 [편집증적] '언어관'이 드러납니다^^;). 말씀하신 대로,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란 어구는 제 생각에도 '구별 짓기'와 '대립각을 세우기'라는 측면에 있어 문제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긴 합니다. 제가 벤야민의 '순수 언어'를 언급한 것, 그리고 제 생각의 시발점이 다분히 '유토피아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전제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인데요, 분명 '하향 평준화'된 번역본이 지칭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독성의 영역, 거칠게 말하자면 곧 '의역'의 영역입니다(그러므로 '하향'이라는 것이 꼭 질적인 저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나 '이상적인' 번역의 정의(definition/justice)에 대해서는 yoonta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인구어의 구조는 한국어의 구조와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번역문 투'라고 부르는 어투가 존재하고 또 이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상황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아시는 바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문장이 비문인가 아닌가를 점검하기 위해 주어와 술어의 호응, 주절과 종속절의 호응을 따지는 것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리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인구어의 교육과 번역이 낳은 결과겠지요. 확장해서 말하자면 번역에 있어서는 쫓아야 할 두세 마리 토끼들이 존재하는 것일테지요. 흔히들 이러한 언어적 '구조'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좇다가 저들말도 우리말도 아니게 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되지만, 그래서 또한 가장 훌륭한 '의역'의 가능성을 찾곤 하는 것이지만, 저는 오히려 '직역'의 영역에서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어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또한 제게는 이 점이 바로 벤야민의 수수께끼(?)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 다시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곧, 말하자면 '번역문 투'의 정교화와 첨예화라는 형식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설픈 '직역'을 택하여 차마 읽을 수도 없게 되는 번역본들을 여럿 봐왔지만, 그래서 그러한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생각 또한 결코 떨쳐버릴 수 없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번역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펼쳐보게 되는 생각의 한 자락은 바로 이러한 '직역'의 어떤 가능성과 결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이 제가 생각하는 번역의 이상적인 조건, 곧 원문의 언어가 가진 구조와 성격을 '환기'시키는 '이상적인' 번역의 한 조건이 될 수 있겠죠. 다만 이러한 결과물이 '여전히' 한국어인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제기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국어'의 문제, '국가-언어'로서의 '한국어'의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코스모폴리탄의 '국어'라는, 일견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제게는 사실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어쩌면 이는 일종의 'eidos'에 대해 품고 있는 제 개인적인 '집착'으로[만], 또는 말 그대로 지극히 '이상적인' 조건들로[만] 소급해가는 측면이 있겠으나, 뭐랄까, 이러한 번역에 대한 상상과 몽상, '간극' 속에만 존재하는 '순수 언어'에 대한 공상은, 어떤 구체적인 번역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이라기보다는, 제 스스로에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짐을 두는, 일종의 '채찍'이자 '신발끈 매기'의 측면이 강하다는, 그런 고백 아닌 고백을 해봅니다.^^

yoonta 2007-12-0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쓰면서 약간은 람혼님의 글을 거칠게 요약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위의 댓글을 보니 불분명하게 다가왔던 람혼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 번역'이 무엇인지 인제 감이 좀 잡히네요. 결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견해이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번역본을 보다 보면 "이런 구절은 차라리 직역하는게 더 좋았을 텐데"하는 구절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번역가들의 지나친 의역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적절한 직역과 의역의 접점을 찾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의심없이 올바른 어떤 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소위 "國-語"라는 언어에 대해서 그 속에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개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동시에 그렇다면 보다 이상적인 "코스모폴리탄"적 언어 혹은 "순수언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것인가라는 고민을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하시는 람혼님의 "신발끈 매기"에 대해서는 저도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직까지 저는 능력미달입니다..^^;;

그건 그렇고 님의 본업은 작곡이신가봐요? 네이버블로그 가보니 작곡작업도 손수하시는것 같네요..책보시랴, 작곡하시랴..눈코뜰새 없으시겠습니다.^^

참 글고..John Coltrane의 a love Supreme 앨범은 Blue Train과 더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Coltrane 앨범이랍니다..^^

람혼 2007-12-03 03:03   좋아요 0 | URL
아마도 yoonta님의 블로그에 들어가보신 분이라면 "능력미달"이라는 이 '과도한 겸양'을 아무도 믿지 않으실 게 뻔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수학과 철학, 혹은 수학과 음악 사이의 점접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일천하고 미약하나마 지속적으로 사유를 계속해오고 있지만, 가끔씩 올려주시는 yoonta님의 글에서 많은 도움과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 작은 댓글의 자리를 차용해, 새삼 감사의 마음을 전해봅니다.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편은 못 되지만, 본의 아니게(?) 작곡과 연주를 본업으로 삼고 있네요. 작업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좋아하시는 Coltrane의 앨범이 저랑 일치하시네요.^^ 그에겐 많은 음반들이 있지만, 저 역시나 말씀하신 저 두 장의 음반, 그리고 Ballads 앨범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yoonta님과 음악 이야기도 실컷 나눠봤으면 합니다(Bowie도 좋아하신다는 말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qualia 2007-12-02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 님, 안녕하십니까? 처음으로 인사드리게 되는군요.

람혼 님께서 올리신 번역에 관한 흥미로운 사색의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님과 yoonta 님의 댓글도 흥미롭군요. 그런데 번역의 정의, 직역과 의역의 상호관계와 그들 간의 차이점 따위와 관련하여 몇 가지 람혼 님께 의문이 생깁니다. 람혼 님께서는 이상적인 번역은 (일종의) 직역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십니다. (람혼 님의 핵심 주장을 윗글에서 따오되, 편의상 약간의 어구를 가감하고, 문장 구조를 약간 변경하고, 토씨 따위를 몇 개 바꾸어서 다음처럼 제시해 봅니다.)

좋은 번역(혹은 이상적인 번역)이란, 외국어를 한국어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번역이 아니라, 한국어 번역의 ‘원문’이 되는 외국어의 존재를 ‘가리키고’ ‘완벽한’ 언어의 타자를 계속 ‘환기’시킬 수 있는, 또한 심지어 그러한 유령의 출현을 ‘조장’할 수 있는 번역이다.

즉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된 번역(즉 의역)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 그 자체로서는 어쩌면 ‘실격’일지 모르는 그런 ‘불완전한’ 직역이 좋은, 이상적인(*불완전하기 때문에 이상적이라는 람혼 님의 이 함축!), 번역의 한 조건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외국 고전을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역(본)’이 좋은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역본을 끈질기고 진득하게 ‘독해(讀解/毒解)’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외국 원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람혼 님의 기본적 주장/견해는, 제 생각에,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번역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몽상가’ 혹은 ‘순수언어주의자’(이런 개념이 있다면)의 지고지순한 천명/선언 같아서 오히려 기존의 원론적 번역 담론에 신선한 자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원래 순수주의자나 근본주의자가 그 누구보다도 전복적일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람혼 님의 윗글과 댓글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즉 람혼 님의 직역 개념 자체는 무엇인가? 람혼 님께 의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과연 다른 독자님들은 람혼 님의 번역 개념, 직역 개념, 의역 개념, 그리고 이것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윗글/댓글을 읽고 구체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을까? 직역/의역 각각의 적법성 혹은 그 우열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논의의 전제 조건이자 성립 조건인 각각의 개념 제시는 없는 것일까? 그저 언중이 상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혹은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막연히 짐작되는) 사전적 의미의 직역/의역 개념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이 계속해서 글을 읽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제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차피 번역이란 그 시초부터 ‘의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번역은 그 본질/본성/탄생에서부터 의역이며, 진정한 의미의(다시 말해 순수언어주의자적 개념의) 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주장 또한 제 자신의 의문 제기에 대해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개념 규정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심층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직역/의역 개념은 형식적인 혹은 ‘개념적인 개념’(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의 번역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언어 옮기기 작업’은 의역이며, 이 의역이라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언어/사고/문화 따위의 암호를 ‘상호 이질적으로’ 해독하는 과정이며, 이 이질적인 상호 해독 과정은 근본적으로 원전을 왜곡/변형/변환/재창조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밀고나가 말한다면, 역설적으로 가장 잘 왜곡/변형/변환/재창조하는 것이 가장 잘 번역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것이 오독/오역/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제가 말씀드리는 번역/직역/의역 개념을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여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면, 람혼 님의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현재로선 섣부른 생각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직역 개념이나 의역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 견지에서, 위에서 람혼 님께서 거론하신 직역/의역의 가독성 문제 건에 관해 간단하게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컨대 우리 한국어 번역문이 주술 호응 관계, 주절과 종속절의 호응 관계 따위의 문장의 구성 측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문법적 완성도를 보여준다면, 그것이 의역이든 직역이든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잘 읽히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전 내용의 과학적 전문성, 철학적 심오함, 이론 전개의 치밀함, 배경 지식의 방대함 따위에서 기인하는 난해함도 번역가가 그 내용을 정확히 독해하여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매끄러운 번역문으로 바꿔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직역이든 의역이든 독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죠(게다가 올바르게 내용을 파악하고 번역하는 번역가는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 주나 해설로 원전의 난해함을 덜어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상식적 의미의 직역과 매끄러운(잘 읽히는) 번역문은 서로 대립하거나 역비례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읽기 뻑뻑하고 전혀 요령부득인‘번역투’나 ‘직역투’를 구사한다고 비판받는 번역자/번역가들이 변명을 늘어놓을 때, 원전의 원의미나 뉘앙스를 손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직역을 했노라고 곧잘 강변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변명에서 (대개의 경우)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치명적인 약점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문장, 즉 비문이나 원전의 내용을 한참 빗나가는 오역 범벅을 수도 없이 저질러 놓고 ‘그것을 직역이라는 개념으로 얼버무리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애초에 우리가 직역/의역의 개념에 관한 한 아직도 상식적이고 사전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으며, 올바른 한국어 문장 형식과 그 구성, 한국어 문장과 외국어 문장들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비문의 각종 유형과 그 폐해 따위를 철저히 학습하지 않았다/못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요컨대, 제 생각에, 소위 직역과 가독성 사이에는 역비례 관계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있다면 그것은 직역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의 난이도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죠). 뒤집어 말하자면, 소위 의역이라고 해서 가독성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즉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구성적으로 튼실하기만 하면, 직역이든 의역이든 얼마든지 통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번역가들은 자신의 오역이나 부실한 번역문들을 ‘직역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제 생각의 한 자락이 어느 정도 논리가 닿는 것이라면, 람혼 님의 견해와 어느 정도 대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감/동의하는 측면도 많기는 하지만요. 혼란스런 와중에서 두서없이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제 자신, 앞으로 생각을 더 공글려 나가야 할 줄 압니다. 고맙습니다.

람혼 2007-12-03 03:48   좋아요 0 | URL
우선 정성과 열정이 느껴지는 댓글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즐겁고도 흥미롭게 읽었음을 고백합니다.^^ qualia님 반갑습니다, 저 역시 첫인사를 올립니다.

일단 제가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저 벤야민의 '순수 언어'가 서 있는 지점입니다. 특히 근래에 들어 상당히 많은 분들이 벤야민의 삶과 저작에 큰 관심을 갖고 지속적이거나 간헐적으로 독서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나 일차적으로 벤야민의 글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의 이론적 지점, 학문적 위치에 대해 여러 번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의 '순수 언어'에 대한 이론은 이러한 그의 학자적 '입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거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란 것이, 우리가 그 말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개념인가, 바로 이 질문이 사실 저로 하여금 벤야민의 저 잠언과도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추동력입니다. 이는 벤야민의 이론적 입지와 연계시켜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벤야민이야말로 '주변적'이며 '파편적'인 글쓰기에 있어 가장 큰 성과를 보여주었던 작가/철학자였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글은 독일 고전 철학과 괴테 이후의 독문학, 또한 당대의 유럽 문학/문화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의 글쓰기는 동시대의 다른 비판 이론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오롯이 도드라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가장 극명한 예를 들자면, 후설(Husserl)의 것과도 다르고 아도르노(Adorno)의 것과도 다릅니다. 이 '변방'의 글쓰기 이론가에게 있어 도대체 '순수 언어'란 무엇인가,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저의 '직역'에 대한 생각은 바로 벤야민의 이 '순수하지 않은' 순수 언어, 가장 '주변적인' 중심 언어에 대한 물음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소 사변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게 되는 듯도 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순수주의적이면서 근본주의적인 것이 가장 전복적인 힘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벤야민의 '순수 언어'가 과연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물음이 될 듯합니다. 오히려 제 생각에는, 그러한 순수주의적, 근본주의적 번역론을 고수할 때 낭패를 겪게 되는 경우를 더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셨던 바, 모든 번역은 '숙명적으로' 일종의 '의역'일 수밖에 없다는 점, 아마도 벤야민의 출발 지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직역을 주장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이미 하나의 실패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헤겔/라캉 식의 '오인'의 지점이 중요해지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벤야민에 대한 제 일천한 생각을 중심으로 에둘러서 말씀 드렸지만, 제 생각에는 사실상 qualia님의 번역에 대한 생각과 제 생각이 크게 대립된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qualia님이 쓰신 글에서 이미 함축하신 바, 정말 '제대로 된' 직역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의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벤야민의 '신비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 '직역'의 영역과 '의역'의 영역이 상충되지 않고 양립가능하게 만나게 되는 '신비한' 지점, 바로 그 번역의 지점이 '순수 언어'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게는 아마도 이러한 접근이 벤야민의 저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오는 중입니다. 그렇게 보면, '순수 언어'라고 하는 것이 동일성에 기반한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번역과 이행과 이동의 사이, 그 틈새의 간극, 그 안에서만 존재할 것이라는, 따라서 그 '순수 언어'란 그 말 자체와는 다르게 '순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주변적이고 매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순수 언어'란 곧 '타자의 언어'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지요. '순수 언어'와 '직역' 혹은 '원문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제 생각의 시발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그것은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오인/왜곡/변형/재창조'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저 '순수 언어'는 사실 가장 '불순한' 언어로서의 가장 '훌륭하고 이상적인' 번역어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qualia님이 갖고 계신 문제의식과 저의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용어의 용법과 함의에 대해서 적확하게 잘 지적해주셨듯이, 기존의 단순한 '직역'과 '의역'의 구분법으로써는 저의 이 '몽상'은 잘 해결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제 생각을 더욱 공글려 가야겠지요.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 사람은 저인 것 같습니다.^^

일천하고 미약한 단상의 한 자락을 펼친 글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놀랍고 또 한편으로 감사한 와중에서 또한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은, 정말로 많은 분들이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많고 깊은 상념들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결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모든 방향과 생각들이 하류에서 함께 만나는 물처럼, 그렇게 '신비롭게' 만날 '불가능한 가능성'을 고대하고 또 그것을 위해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푸하 2007-12-0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제 이해력의 한계의 지점들이 아릿아릿 전류를 일이키네요.^^ 앞으로 또 몽상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꾸벅~

람혼 2007-12-09 00:05   좋아요 0 | URL
푸하님, 이러한 만남의 반가움이 지닌 전류에 비할 것이 있겠습니까? ^^ 귀한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
 



▷ Ernst Freud, Lucie Freud, Ilse Grubrich-Simitis(hrsg.),
    Sigmund Freud: Sein Leben in Bildern und Text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2006[revidierte Neuausgabe].
 
1) 소피아 서점의 백환규 선생님으로부터 며칠 전 이 책(1976년 초판의 개정·증보판)을 선물받았다. 지금껏 혼자서ㅡ누군들 이런 일에 '혼자'가 아니겠는가마는ㅡ고군분투와 악전고투를 거듭해오고 있는 나의 일천한 공부와 빈약한 연구를 묵묵히 응원해주셨던 백선생님인데, 그래서 더욱 '그저 도움이 좀 될까봐' 하고 무심한듯 건네시는 이 선물에 나는 그만 눈물이 핑 돌았다. 한 사람을 오랜 시간 지켜보는 과정이 녹아들어가 있다고 느껴지는 선물에는 언제나 감동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슴이 찡했다. 벌써 아흔의 나이에 가까워지신 백선생님이 언제나 지금처럼 정정하시고 활달하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2) 소피아 서점은 1950년대에 문을 연ㅡ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국내 최고 유일의ㅡ독일어 인문학 서점이다. 내가 스무살 때 백종현 선생님의 소개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독일어본을 처음 구한 곳이 바로 이 서점인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강산이 바뀌고 남을 만큼의 시간 동안 이런저런 '거래'를 계속 해오면서 내가 이 서점에서 입은 '은혜'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서점의 총지배인을 맡고 계신 분이 바로 백환규 선생님인데, 일제시대 일본의 上智대학(소피아대학) 독어과을 나오신 분이다(소피아 서점의 이름은 바로 이 '소피아대학'에서 따온 것인데, 하지만 철학 또는 인문학과 'σοφία'라는 단어가 맺고 있는 저 역사적이고도 상징적인 관계야 굳이 여기서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학에 다닐 때는 정말 하루에 10시간 이상을 독일어와 씨름하셨다는 추억담을 가끔 이야기하실 때면,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지며 신발끈을 다시 고쳐 매는 심정으로 마음을 다잡곤 한다. 하지만, 여전히, 가도 가도 턱없이 부족한 이 느낌에서는, 아직도, 헤어나올 길이 없다.

   

▷ Edmund Husserl, Phänomenologie der Lebenswelt. Ausgewählte Texte II,
    Stuttgart: Reclam, 1992.
▷ Georg Lukács, Die Theorie des Romans,
    München: Deutscher Taschenbuch Verlag, 1994.
 
3) 조용히 떠올려 보면, 개인적으로 내 공부의 어떤 접점이라 부를 수 있는 시기마다 백환규 선생님으로부터 소중한 선물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위의 두 책은 바로 그러한 선물들이었다. 한 책은 내가 후설(Husserl)에 빠져 있었을 때, 한 책은 내가 루카치(Lukács)에 젖어 있었을 때ㅡ하지만 이렇듯 과거형 문장을 썼다고 해서 지금 내가 이 두 '거인'들에 대한 애정과 채무감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것은 결코 아닌데ㅡ, 각각 백선생님이 주신 선물이었다(특히나 루카치의 저 『소설의 이론』은 내게, 심지어 침대 안까지 갖고 들어가 틈틈이 계속 탐독할 만큼, 딱 그 만큼의 애정과 경배의 대상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신발끈만 고쳐 매다가 가버린 쏜살 같은 시간들, 누군들 후회가 없을까, 하는 '평등주의적' 위안을 해보지만,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것은, 여전히 어쩔 수가 없다. 오직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한 번, 신발끈을 고쳐 매는 일, 그뿐일 터.
 
4) 가끔씩 자신이 '갇혀' 있는 이론의 무게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무엇에겐가 짓눌려 있을 때 간과하기 쉬운 것은, 그러한 이론을 품고 굴려갔던 이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라는,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사실, 바로 그것이다. 사진과 글로 보는 일종의 프로이트 전기(傳記)라 할 저 소중한 선물을 펼쳐보고 있으면, 프로이트가 한 시대를 말 그대로 치열하게 살았던, 다시 말해, 한 시대와 격렬하게 부딪치고 만났던, 하나의 인간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느낌과 관련하여 독서 중 인상 깊었던 한 구절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삶이 지닌 전경(Vordergrund)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면에서, 그 자신의 나약함과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둘러싼 씨름 속에서 흔들림 없이 머물렀던 한 인간, 또한 어쩌면 마치 야곱처럼 의기소침과 자포자기 속에서 '당신이 나를 축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당신을 가게 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부르짖었을 한 인간, 바로 그 인간이 행했던 거인적인 투쟁의 일면을 목격하게 된다."(Sigmund Freud: Sein Leben in Bildern und Texten, p.38)

   

Die Bibel[Luther-Übersetzung],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9.
La Bible[traduction œcuménique de la bible],
    Paris: Société biblique française et Éditions du Cerf, 1988.
 
5) 이 야곱의 '외침'은, 아는 사람은 다 알다시피, 성경에 나오는 저 유명한 야곱과 천사의 씨름 장면에서 나오는 대사, 정확히는 창세기 32장 27절의 내용이다. 다만 국내 개신교 성경에서는 이 부분이 32장 26절로 되어 있는데, 32장이 어디서 시작하는가에 관한 편제의 원칙이 가톨릭과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 성서회에서 펴낸 루터(Luther) 번역판 독일어 성경ㅡ그러고 보니 이 성경도 소피아 서점에서 구입했던 것인데ㅡ에서는 이 부분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그리고, 어쩌면 당연하지만, 위에서 인용한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에 나오는 해당 문장도 이와 동일하다): "Ich lasse dich nicht, du segnest mich denn." 불어 번역 성경에서는 같은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Je ne te laisserai pas, répondit-il, que tu ne m'aies béni." 아직 히브리어 공부가 일천하여 정독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예전에 성 바오로 서원에서 구입했던 히브리어 구약의 표지도 함께 올려본다.



Biblia Hebraica Stuttgartensia,

    Stuttgart: Deutsche Bibelgesellschaft, 1997[5. Auflage].

6) 이렇듯 선물이라는 물건에 생각이 미치자, 그리고 다시 이 물건에 꼬리를 무는 다른 연상들에도 생각이 미치자, 어머니의 선물보다 더한 선물이 있을까, 나는 새삼 이런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는 것이다(물론, '미치다'의 두 가지 의미ㅡ'reach'/'go mad'ㅡ에서). 일전에 독일 여행에서 돌아오시면서 자식 생각에 사오신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에 관한 이 한 권의 책, 이 역시 프로이트에 대한 위의 책과 마찬가지로 '그림으로 보는 그이의 삶'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음에, 새삼 기이하고 경이롭기까지 한 느낌이 든다. 삶이라는 형식 혹은 삶을 펼치듯 보여준다는 형식, 이는 실로 '선물'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형식이 아닌가.

▷ Volker Michels, Hermann Hesse: Leben und Werk im Bild,

    Frankfurt am Main: Insel, 1973.

7)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헤세 역시ㅡ그 어떤 글쓴이들이 그렇지 않겠는가ㅡ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굳이 호들갑 떨 필요도 없이, 너무도 당연하고, 지극히 당연하며, 지독하리만치 당연한 이 사실 앞에서, 나는 이렇듯 기이하게 훈훈한 경이감, 이상하리만치 따뜻한 기이함을 느끼고 있다. 그리하여, 반복하지만, 한 인간을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또 얼마나 고귀한 일인가, 하는 생각, 그리하여 또한, 훌쩍 비약하자면, 한 인간이 세상에 나고 사라짐은, 언제나, 얼마나 매혹적인 일이고 또한 얼마나 슬픈 일인가, 하는 생각, 그런 잡생각 한 자락을, 보이지 않는 신발끈 위에, 슬며시 내려놓는다.

2007. 6. 23.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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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外, 『 이론 이후 삶 』(강우성, 정소영 옮김), 민음사, 2007.

1) 개인적으로 현재 몇 편의 연극 음악 작업과 무용 음악 작업, 그리고 그 외 다른 공연 준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서도, 최근 데리다(Derrida)와의 대담집 『이론 이후 삶』이 국역 출간된 것을 핑계 삼아 앞으로 데리다 읽기에 관한ㅡ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인ㅡ잡설을 몇 편 연재해볼까 한다. 연재를 약속했던 아날 학파에 관한 글들이 아직 '밀려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연재를 시작하기가 조금 저어되기는 하지만, 데리다가 『이론 이후 삶』에서 말하고 있는 방식으로 말하자면, 연재에 대한 '충절'이야말로 동시에 연재에 대한 '배반'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므로, 또한 '약속'과 '서약'이야말로 언제나 매번 '같으면서도 다르게' 반복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라는 또 다른 핑계를 대면서.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핑계'가 <1. Outside> 앨범의 연재 약속을 어긴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 식의 그런 '솔직한' 배반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흩뿌리면서(탐정소설 형식의 이 '연작' 앨범이 '연재' 형식으로 발매될 것이라는 1995년의 '약속'은 결국 지켜지지 않았지만, <1. Outside> 앨범은 1970년대 말의 '고전적' 일렉트로니카 앨범 3부작(<Low>, <"Heroes">, <Lodger> 연작) 이후 근 20년만에 선보였던 보위-이노(Bowie-Eno) 듀오의 또 다른 '걸작'이었다는, 잡설 한 자락, 지나가는 길에, 즈려밟고).



▷ David Bowie, <1. Outside>, Virgin, 1995.

2) 데리다에게 있어서도 일종의 '예비학(Propädeutik)'이 가능할까? 데리다 '입문'을 위해서는ㅡ또는 심지어 데리다 '심화 학습'을 위해서도ㅡ그의 대담집만한 좋은 자료가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데리다는 대담집을 상당히 많이 '산출'해내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인데, 우선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단연 『입장들(Positions)』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를 비롯한 네 명의 대담자들과의 대화를 싣고 있는 이 책은, 데리다가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 '쏟아놓았던' 그의 가장 기본적인 사유의 핵심들을 대담 형식으로 소화할 수 있는 값진 책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과거 1992년에 솔 출판사의 '입장' 총서의 한 권으로 박성창 선생ㅡ이후 수사학에 대한 책을 저술했고 현재는 서울대 국문과에서 가르치고 있는ㅡ의 번역을 통해 소개된 바 있었는데, 현재는 절판인 것으로 알고 있다(이 국역본은 원서에 담긴 세 편의 대담에 덧붙여 1991년의 대담 한 편을 더 번역하여 수록하고 있는데, 하도 소싯적에 읽은 책이라 현재로서는 번역의 질을 왈가왈부할 사정이 되지 못한다).

   

Jacques Derrida, Positions, Paris: Minuit(coll. "Critique"), 1972.
▷ 쟈끄 데리다, 『 입장들 』(박성창 편역), 솔, 1992.



John D. Caputo(ed.), Deconstruction in a Nutshell,
    New York: Fordham University Press, 1997.

3)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데리다의 대담집은 1997년의 것으로 미국의 빌라노바(Villanova) 대학에서 이루어졌던 대화를 수록하고 있는 캐퓨토(Caputo) 편집의 책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인데, 이 대담은 데리다의 후기 사상, 특히나 법과 정의 또는 신학과 종교학에 관한 그의 생각들을 일별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 책은 『이론 이후 삶』의 내용과 일정 부분 중첩/반복되는 부분도 찾을 수 있어, 두 책의 비교 독해 또한 시도해볼 수 있다(덧붙여,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나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가 최근에 행한, 국민국가 혹은 교환/증여에 관한 이론적 작업과 맺고 있는 어떤 접점, 혹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정치철학과 맺고 있는 어떤 접점 또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ㅡ그런데 나의 이 공간에서 '여담'이 아닌 '담론'이 어디 있겠느냐마는ㅡ개인적으로 '대담집'은 매우 흥미로운 책의 '장르' 중 하나인데, 그러한 흥미들 중 먼저 '국적'에 따른 대담 '스타일'의 차이를 꼽고 싶다. 일례로ㅡ이는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인상'에 속하는 것으로 소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대표적인 경우이겠으나ㅡ프랑스의 대담집과 미국의 대담집은 그 '질문과 대답'의 방식에 있어 전혀 상이한 스타일을 보여주는데, 프랑스의 대담집이 '대화'라는 인상을 주는 반면에ㅡ이러한 '인상'에 관해서는 디디에 에리봉(Didier Eribon)과 조르주 뒤메질(Georges Dumézil)의 대담집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텐데, 이 책에 관해서는 차후 뒤메질과 그의 '엄청난' 저작들에 대한 독립된 글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ㅡ미국의 대담집은 '전투'라는 인상이 강하다. 뭐, 여담은 여담일 뿐, 이하의 내용은 Deconstruction in a Nutshell의 1부에 수록된 데리다와의 대화를ㅡ물론 글뿐만 아니라 말에서도 드러나는 데리다만의 '스타일'이 지닌 매력을 조금 감소시킬 위험을 무릅쓰고서ㅡ내가 개략적으로 번역/요약해본 것이다, 칸트적 의미에서의, 일종의 '예비학'으로서:

캐퓨토(Caputo)의 질문:
1. 해체가 기존의 저명한 철학적 유산과 전통적인 텍스트들에 대해 파괴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른바 "철학의 종언(end of philosophy)"을 고한다는 일반적인 편견에 관한 데리다의 입장은 무엇인가.
2. "전적으로 새로운 것의 돌출(the iruption of something 'absolutely new')"을 의미하는 '개시/시작(inauguration)'은 해체 안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제도/설립(institution)은 무언가를 완전히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곧 제도/설립은 과거의 규칙과 유산들을 어느 정도 따라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새로운 것의 정초인 한에서는 과거와 기억들로부터 완전히 단절하는 것이며 따라서 과거의 규칙들로부터 그 어떤 보장도 받을 수 없기에 폭력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 제도/설립의 순간이 어떤 위험성을 띠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완벽한 단절 또는 이질성(heterogeneity)으로서의 개시(inauguration) 없이는 어떠한 책임도 결정도 있을 수 없다. 나는 철학이라는 학문 분과 안에서 이러한 종류의 제도/설립을 다양한 형태로 계속해왔지만 너무 엄격하거나 교조적인 제도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을 취해왔다.

브로건(Brogan)의 질문:
1. 서구 철학 전통의 개창자들(inaugurators)인 그리스 철학자들과 데리다와의 관계는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가.
2. [부가적으로] 데리다가 서양 철학의 고전들을 독해하는 방식과 전략은 해체와 구축 사이의 어떤 긴장(tension)으로 특징 지을 수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그렇다. 해체는 그러한 긴장을 특징으로 한다. 특히나 해체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과는 달리 나의 텍스트는 위대한 고전들에 대한 존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방식이 단순히 반복적이거나 보존적인 것은 아니다. 나의 분석은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가를, 또한 어디서 작동하고 있지 않은가를 살펴보는 것, 다시 말해 그 작품이 자신 안에 지니고 있는 긴장과 모순과 이질성을 찾아내는 작업이다. 따라서 해체란 작품의 외부에서 작품의 내부로 적용할 수 있는 방식이 아니다. 해체는 오직 작품의 내부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어떤 것이다. 민주주의(democracy)와 철학(philosophy)은 모두 그리스 전통에 그 기원을 두고 있지만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와 철학은 그리스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적 형제애의 개념이 그리스적 형제애의 개념을 변용한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의 개시, 변형(mutation), 단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리스적 전통 속에서 잠재적으로 기입되어 있던 그 개념의 본래 모습을 가리키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화의 출처인 그러한 그리스적 기원으로 계속해서 돌아가서 우리의 역사와 역사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물음을 제기해야 한다. 해체가 목표로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원과 변형 사이에 있는 긴장에 대한 감각이다.

부시(Busch)의 질문:
1. "다양한 것들 사이의 통합(E pluribus unum)"이라는 미국의 모토를 떠올려볼 때, 해체는 언제나 다양한 것들, 곧 다양성과 복수성의 입장에 서서 전체성과 동일성을 해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통합을 결여한] 다양성은 그 자체로 매우 위험한 것은 아닌가.
2. [따라서] 해체 이후에 통일성(unity)은 과연 가능한가.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을 띨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먼제 '국제성(internationality)'이라는 개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이는 분명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의 '인터내셔널(International)'과는 다른 것이다. 오늘날의 국제법은 국가와 주권(sovereignty)에 대한 서구 철학의 개념에 뿌리박고 있는 것이며, 이는 분명 일종의 한계이다. 우리는 이러한 국제법의 정초를 해체해야 하는데, 이는 국제 기구 자체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러한 국제 기구가 의존하고 있는 철학적 기반들을 다시 사유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국제법의 또 다른 한계는 그것이 군사와 경제 강대국들을 중심으로 한 특정 국가들에 의해서 운영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국제적인 권력을 현상황의 국제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서, 곧 국민국가라는 체제에 종속되어 있는 시민성을 넘어서는 어떤 것에서 찾아야 한다. 나는 이를 '新 인터내셔널(New International)'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것은 국민국가에 종속된 시민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개념의 시민성으로부터, 새로운 개념의 환대(hospitality)로부터, 새로운 개념의 국가와 민주주의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는 그 자체로 새로운 개념이 아니라 우리에게 전통적으로 주어진 민주주의의 개념에 대한 새로운 결정을 의미한다. 우리는 통합과 다양성 중에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독특성(singularity)의 개념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독특성은 통합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며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순수한 통합 또는 순수한 다양성은 죽음과 동의어이다. 문제는 통합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자신 안에 어떤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문화적, 민족적, 언어적 동일성/정체성(identity)이라는 것은 이미 그 자신과 다른 무엇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가 구조에 전반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내가 타자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내 자신과 일치하지 않는 이러한 차이 때문이다. 이는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오히려 책임감을 갖고 결정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방식이 된다. 따라서 분리(separation/dissociation)는 타자와의 관계를 위한 조건이며, 이는 블랑쇼(Blanchot)와 레비나스(Levinas)가 말했듯 "관계 없는 관계(rapport sans rapport)"라고 할 수 있다. 국가의 경우도 단지 통합[unum]만을 중시해서는 안 되고 민족, 언어, 문화, 개인의 다양성에 보다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슈미트(Schmidt)의 질문:
1. 데리다는 정의가 모든 계산, 경제, 변증법, 교환 체계, 복수와 형벌을 넘어서는 어떤 선물/증여(gift, don)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정의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2. 이러한 정의는 이름의 문제, 곧 독특성(singularity)의 문제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데리다의 답변:
"한 마디로 딱 잘라 말해(in a nutshell), 해체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처럼, 그러한 문제는 결코 이러한 토론의 형식 안에서 간략하게 제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먼저 불어에서 법(law)은 두 개의 단어, 곧 'le droit'와 'le loi'로 구분된다. 나는 정의(justice)를 법/권리(right)와 법체계의 역사를 의미하는 법(law)으로부터 구별시키고자 했다. 곧, 법은 해체 가능한 것이지만, 정의는 바로 그러한 해체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다. 법은 법체계와 법 또는 권리들의 역사, 곧 실정법의 역사를 의미하며,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법들을 증진시킬 수도 있고 또한 다른 법들로 교체할 수도 있다. 모든 혁명과 도덕, 윤리, 진보가 지닌 역사성은 이런 식으로 설명될 수 있다. 하지만 반면에 정의는 이러한 법과는 달리 우리에게 법 자체를 증진시킬 수 있는 어떤 충동과 욕구 또는 운동을 부여해주는 것이다. 곧 정의는 법의 해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해체 가능성의 조건은 곧 정의에 대한 요청이다. 정의는 법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곧 그 어떤 기존의 법적 구조의 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곧 정의는 자기 자신과 동등하지 않음을, 일치할 수 없음을 말한다. '정의'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dike'를 예로 들면, 나는 'dike'와 'adikia'를 '정의(justice)'와 '불의(injustice)'로 구분하는 하이데거의 분석에 반대하여 정의 그 자체 안에 통합적이지 않은 분리의 요소가 있음을, 곧 이질성과 비-동일성(non-identity)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 우리가 정의에 대한 요청에 결코 답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나는 정당하다(I am just)"라고 말하는 것은 이론적인 결정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가 정당한지/정의로운지(just)는 알 수 없고 다만 내가 옳다는(right) 것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내가 규칙과 법률에 맞게 행동한다면 나는 내가 옳다고 말할 수 있지만 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곧 정의는 지식의 문제도 아니고, 계산의 문제도 아니며, 이론적 판단의 문제도 아니다. 우리는 옳은 것을 계산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계산이 정당하다고/정의롭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결정을 내릴 수 있으려면, 우리는 단지 법전화된/약호화된(coded) 법만을 기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되고 각각의 독특한(singular) 상황에서 그때마다 정당한/정의로운 관계를 새롭게 발명해내야 하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정의는 타자에 대한 관계이며 그것이 전부이다. 왜냐하면 타자와 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어떤 계산될 수 없는 것과 마주치며 법체계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해체는 지속적으로 기존 제도와 법체계를 비판하는 것인데, 이는 단순히 그러한 제도와 체계를 파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의에 공정해지기 위해서(to be just with justice), 곧 타자와의 관계를 정의로서 존중하기 위해서이다. 예컨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코라(khôra)'의 개념은 플라톤의 철학 체계를 구성하는 여타 대립 개념의 쌍들과 마찬가지로 동시에 바로 그 체계 자체를 동요시키기도 하는 것인데, 우리는 이 개념에서 새로운 정치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곧 환대를 위한 장소, 선물/증여를 위한 장소이며, 이는 우리로 하여금 정치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정치적 전통을 해체하려는 나의 최근 시도들은 단지 정치를 탈정치화하려는(depoliticize) 것이 아니라 정치라는 개념과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하기 위한 것이며, 이러한 작업은 특히 선물/증여와 독특성의 개념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선물/증여는 재전유될(reappropriated) 수 없다는 점에서 정의와 공통점을 갖는다. 선물/증여는 감사의 마음이나 상업적 거래 또는 어떤 보충이나 보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내가 선물에 대해서 "감사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 선물을 거부하고 파괴하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나는 그 선물을 재전유하고 그것에 대한 등가물을 제시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나는 네게 이것을 선물/증여한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선물/증여는 그 자체로는 인지될 수 없는 것이며 재전유와 감사의 순환을 벗어나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일이긴 하지만, 또한 이것이 바로 선물/증여가 주어질 수 있는 조건(the condition for a gift to be given)인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선물/증여와 정의가 공유하고 있는 계산 불가능한 성격이며, 우리는 정치와 민주주의의 개념을 이러한 조건 위에서 다시 사유해보아야 한다.

캐퓨토의 질문:
1. 데리다는 자신의 메시아주의를 성경 전통의 역사적 메시아주의와 구별하여 "유사-무신론적(quasi-atheistic)" 메시아주의라고 명명하고 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란 어떤 것인가.
2. 유대교와 성경에서 발견되는 정의의 예언자적 전통과 데리다의 작업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나는 '종교'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종교라고 부르고 있는 것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등) 안에도 긴장과 이질성이 존재한다. 어떤 특정한 종교 안에 위치해 있다고 생각되는 예언자들의 텍스트들도 하나의 제도나 체계로 환원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항상 새롭게 발명되는 것이자 매순간 전적으로 새로운 것이다. 이에 나는 종교(religion)와 믿음(faith)을 구분하고자 하였다. 종교라는 것이 신앙과 교리와 제도의 집합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해체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 여기서의 믿음은 내가 말하는 정의나 선물/증여와 비슷한 성격, 곧 가장 근본적인 해체의 성격을 띠고 있다. 믿음의 행위 없이는, 증언/신앙고백(testimony)의 행위 없이는, 우리는 타자에게 말을 건넬 수 없다. 타자와의 관계의 전체를 이루는 "believe me"라는 요구는 정의와 마찬가지로 단순히 이론적인 진술이나 결정적 판단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이러한 믿음은 특정 종교로 환원될 수 없는 것이며, 따라서 보편적인 것이다. 이러한 독특성에 대한 주목과 주의가 동시에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독특성(singularity)과 보편성(universality)을 대립적인 관계로 보지 않는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도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다. 미래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도래를 기다리는 시간적 경험, 이것이 바로 경험의 개시이다. 누군가가 도래할 것이고, 그는 지금 도래할 것이다(Someone is to come, is now to come). 정의와 평화는 타자의 도래, 곧 "believe me"라는 약속과 관계가 있으며, 모든 행위가 이러한 약속에 기반한다. 미래와 도래를 기대하는 이러한 약속의 보편적 구조는 바로 정의와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내가 메시아적 구조(messianic structure)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러한 메시아적 구조는 특정 종교로 환원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미묘한 차이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메시아적인 것(the messianic)과 [특정한 종교의] 메시아주의(messianism)를 구별하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남는데, 그렇다면 특정 종교의 메시아주의는 단지 이러한 보편적 메시아주의의 한 사례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 종교의 전통이 그 자체로 메시아적인 것을 드러내주는 어떤 환원할 수 없는 독특한 사건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아직 이 두 가지 가능성 사이를 오가고 있다. 블랑쇼의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나온다. 구세주(Messiah)가 누더기를 걸친 채 로마의 문에 서 있었다. 그가 구세주임을 알아차린 한 사람이 구세주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은 언제 오실 겁니까(When will you come)?" 그는 지금 도래할 것이며, 이것이 바로 지금 미래를 기다리는 방식이다. 따라서 이러한 메시아적 구조가 가리키는 책임성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구세주는 미래 시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임박한(imminent)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메시아적 구조를 통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임박함(imminence)인 것이다. 또한 구세주와의 관계는 다음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 나는 구세주가 도래하여 정의와 평화와 혁명이 오기를 희망하지만, 그와 동시에 구세주의 도래를 두려워 하고 그 사건을 무한히 연기시키고자 하는 욕망이 또한 내게 있는 것이다. 메시아적 구조 안에는 이렇듯 무엇을 기다리면서 또한 기다리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모호함이 존재하며, 이는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이다.

머피(Murphy)의 질문:
데리다의 작업이 문학 작품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 특히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의 문학과 맺고 있는 상관 관계는 어떤 것인가.

데리다의 답변:
내가 조이스의 『율리시즈(Ulysses)』와 『피네건의 경야(Finnegan's Wake)』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 작품들이 하나의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와 문학과 종교를 통해 총체성(totality)을 구현하려 하기 때문이다. 조이스 문학의 이러한 시도는 문학사를 재편하고 문학사 안에서 어떤 단절을 개시하고 있음과 동시에 또한 조이스 문학 연구라는 하나의 제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의 문학을 해체의 역사에서 하나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본다. 조이스를 후설(Husserl)과 비교해보면, 조이스는 은유와 수식의 다의성을 축적함으로써 역사의 전체화를 이루려고 하는 반면에, 후설은 과학적이고 수학적이며 순수한 언어의 투명한 일의성을 통해서 역사성을 구성하려고 한다. 후설에게 있어서 역사성이란 전통의 투명성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 반면, 조이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언어에 있어 다의성의 축적 없이는 역사성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 된다. 또한 나는 우리 토론의 주제와 관련하여 조이스에 대해 두 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스티븐 디덜러스(Stephen Daedalus)가 부성(paternity)이 일종의 법률적 허구(a legal fiction)라고 말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프로이트는 부계지배(patriarchy)가 인류사의 진보를 나타내준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성(reason)이 필요하지만 그에 비해 어머니가 누구인지를 판단하는 데에는 단지 감각적 지각(sensible perception)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판단하는 것 또한 경험의 해석과 사회적 재구성의 문제이며 따라서 일종의 법률적 허구의 성격을 띤다. 또 다른 하나는 『율리시즈』의 마지막 단어인 "yes"와 관련이 있다. 이 말은 개시/시작(inauguration)의 지점이며 이 말에 선행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yes"는 기원이자 설립의 순간이지만, 이러한 "yes"는 그에 이어지는 두 번째 "yes"를 통해 항상 보증되고 확증되어야 한다. 따라서 "yes"는 자기 스스로를 이중화하는 것이며, 이는 "yes"가 약속의 말일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되풀이 (불)가능성(iterability)이라고 부르는 것이다['iterability'에 대한 번역어는 진태원 선생의 것을 따랐다]. "yes"는 매일 날마다 새로 시작되어야 하고 새로 발명되어야 한다.

   

▷ Maurice Blanchot, L'écriture du désastre, Paris: Gallimard, 1980.
▷ Jacques Derrida, Gianni Vattimo(éds.), La religion, Paris: Seuil, 1996.

4) 덧붙여 위의 대담에서 데리다가 블랑쇼의 것으로 잠시 언급하고 있는 메시아에 관한 매력적인 이야기는 원래 블랑쇼의 책 『재앙의 글쓰기』의 말미(pp.214-216)에 수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 책은 특히나 '파편적' 글쓰기를 향한 블랑쇼의 시도가 가장 성공적으로 구현된 후기의 대표작으로, 끈질기게 일관된 주제를 관통하고 있는 일종의 '풍요로운 잠언집'에 가깝다. 일독을 권한다. 더불어, 종교와 관련된 데리다의 저작들은ㅡ특히나 후기로 오면서 더욱ㅡ다양하지만, 그 중에서도 지안니 바티모와 함께 편집한 위의 책을, 또한 그 속에서도 위의 대담 주제와 관련하여 특히 데리다의 글 「믿음과 지식(Foi et savoir)」의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5) 일종의 예고편: 다음 '데리다를 읽자'의 재료와 주제는, 첫째, 후설(Husserl)의 텍스트들과 데리다의 『목소리와 현상』 읽기, 둘째, 데리다의 『마르크스의 유령들』원전 비교 독해ㅡ최근 진태원 선생의 번역으로 새 번역본이 출간되었는데ㅡ및 후기 저작 일별, 셋째, 데리다의 Otobiographies와 자서전의 규약, 넷째, 데리다와 '메시아적인 것' 혹은 해체론과 종교학, 이 넷 중 하나가 될 것이다(그리고 아날 학파에 대한 다음 글은 마르크 블로크(Marc Bloch)와 뤼시엥 페브르(Lucien Febvre)의 저작들에 대한 글이 될 것이라는 예고도 첨언해둔다). 현재의 미친 듯한 일정이 아마도 최소한 11월 중순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될 것이기에 이 연재들이 언제쯤 속개될 것인지 속단은 내리지 못하겠지만, 한 지인(知人)의 값진 조언처럼 "끝은 있고, 그 끝은 언제나 달콤한 것"이기에, 그리고 또한 매일 새롭게 쏟아지는 신간들과 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추억의 책들 '사이'에서 언제나 매번 '같으면서도 다르게' 일어나는 틈새-글쓰기의 '강박적' 욕망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나를 추동하고 있기에, 무엇을 향한 것인지도 모를 다짐 몇 자락을 두어본다. 그런데 이러한 '글쓰기'의 상황에 대해서 데리다는 '감사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나는 이를 두고 일종의 '동병상련'이라고 부르는 모험을 감행한다):

"프로이트나 하이데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자 할 때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것을 듣기 위해 내가 뭔가를 말해야 하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 차례가 되어 뭔가를 써야 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쓰게 되면 뭔가 다른 것을 말하게 되고, 뭔가 새로운 것, 뭔가 다른 것이 존재하게 되며 이것이 제가 이해하는 충절입니다. 이것이 이론과 철학과 문학의 충절이고, 예컨대 결혼 같은 일상 생활에서의 충절이기도 합니다. 동일한 것을 그대로 반복할 수는 없고 발명해야만 합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존중하려면 뭔가 다른 것을 행해야만 합니다."
ㅡ 『이론 이후 삶』, 24쪽.

그러고 보면 데리다는, 그가 스스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음성'과 '현전'에 대한 '이론적' 거부의 몸짓과 함께 그러한 '음성'과 '현전'을 향한 '삶의' 욕망으로 동시에 꿈틀거리고 있는, 여전히 '살아 있는' 한 명의 철학자가 아닌가, 그런데 나에게 그 '살아 있음'이란, 데리다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벌써부터[아직도?] 어떤 '유령'의 모습으로, 혹은 지젝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마치 'undead'와도 같은 느낌으로, 그렇게 다가오는 것은 혹여 아닐 것인가, 그런 잡생각에 미치게 되는 것, 이 혼곤한 새벽녘에.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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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7-10-12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절한 타이밍의 유익한 페이퍼입니다.^^

람혼 2007-10-12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의 짧은 댓글이, 지쳐 있는 제게 힘을 주네요.^^

yoonta 2007-10-12 0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람혼님 오랜만의 글이네요. ^^ 벌써부터 기대되는 연재입니다. 데이빗보위도 좋아하시나봐요? 저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할수있습니다만..전 그의 일렉트로니카?계열음반보다는 지기스타더스트같은 초기스타일의 음악이 제일 좋더군요. 한동안 듣고 또 듣고를 무한반복했던 기억이 나네요.

람혼 2007-10-12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학교 때부터 Bowie 오빠의 음악에 완전 빠져서 저 역시나 숱한 '무한반복'의 추억을 갖고 있는데, yoonta님과의 공유지점이 하나 더 생긴 것 같아 반갑습니다.^^
대략 "The Man Who Sold the World" 앨범부터 "Diamond Dogs" 앨범까지를 아우르는 글램록 시기의 Bowie, 저 역시 무척이나 사랑한답니다.^^

2007-11-16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1-22 05:24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너무 반갑습니다.^^ 잘 지내시죠? ^^;
음악 잘 들어주시고 방송까지 봐주셨다니,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2007-11-23 22: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람혼 2007-11-24 04:44   좋아요 0 | URL
연쇄적으로 이어졌던 공연들을 끝내고 최근에야 조금 정신을 차렸습니다. 네이버 블로그도 방문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제가 아무래도 알라딘을 네이버보다는 드물게 방문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댓글이 늦었습니다,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