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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SNS의 ‘소통’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저자 최정우씨의 배경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인터랙티브 예술을 선보인 고 백남준의 작품(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이다. | 사진작가 박재찬 |
ㆍSNS시대 ‘징후’의 해석과 대응은 인문학의 몫■ 집단지성이라는 알리바이바야흐로 SNS의 시대, 곧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의 시대다. 나는 물론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인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혹은 반대로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에 어떤 효과를 미치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말하자면, 마치 원래 ‘인문학’이란 것이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소화와 평가를 어쩌면 필연적이고도 의무적으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수행하거나 반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SNS의 시대라고 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메타적인 층위에서 무언가를 규정할 수 있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 또는 현상들 자체가 특정한 인문학적 ‘가능조건’들을 규정하고 또한 그러한 인문학적 ‘효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인문학 자체는 SNS 시대를 해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어떤 불변하는 상수가 아니라 현재의 SNS 시대라고 하는 역사적이고도 기술적인 환경에 내속되어 있는 어떤 종속적인 변수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소위 ‘인문학’이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포함하여 현재 SNS 시대의 등장 안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해온 주체는 통상적으로 ‘집단지성’이었으며 그러한 논의의 틀은 현재도 큰 변함이 없다. 집단지성은 익명적이고 불특정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성격들 때문에 특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이고 단수적인 주체나 대중적, 여론적인 지성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자기갱신이 가능하고 정치적으로 더욱 기동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위키피디아, 구글, 다음의 아고라 등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가 사실 그러하며 우리는 거기에 그러한 특성들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지성은 실재하는가, 또는 집단지성이란 그러한 실체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가, 혹은 이 질문을 더욱 ‘인문학적’으로 적확하게 정식화하자면, 인문학은 이 SNS의 시대에 집단지성이라는 주체의 이름을 소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정당한 윤리와 적합한 정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 인문학의 알리바이, 상이한 형태로 언제나 있어 왔다고 생각되는 ‘시대정신’, 바로 그 이름으로 부여되는 어떤 환상의 알리바이는 아닐까.
■ SNS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시대가 SNS 시대라는 저 하나의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적인 네트워크, 곧 인간관계의 사회적인 망이 단순히 지역적이거나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역과 분과들로 ‘확장’되었다는 의미, 둘째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망이 일종의 ‘서비스’로서 제공되고 향유된다는 의미, 셋째 이러한 SNS가 어쨌든 과거와는 매우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의미는 그 자체의 표면적인 의의보다는 징후적인 효과로서 독해되어야 하며, 또한 일견 가장 중심적으로 보이는 의의로부터가 아니라 가장 주변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로부터 독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확장’이란 단순히 양적인 공간의 팽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 안에 ‘비관계의 관계’까지도 포함되고 포착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트위터에서 단순히 우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따르지/구독하지(follow) 않으며, 또한 페이스북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친구 신청(friend request)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비관계’ 혹은 ‘무관계’였던 어떤 인간관계가 SNS 안에서는 하나의 실체적인 관계로 등장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비관계/무관계가 이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전혀 다른 형식의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인간관계는 기존의 관계망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두 번째로 그것이 ‘서비스’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근본적으로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질서 바깥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 ‘서비스’에 가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어떤 가격을 지불하거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그 이름 그대로 하나의 ‘서비스’인 한에서 그것을 통해 어떤 식의 ‘이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 이익의 형태는 인간관계의 구성(페이스북의 ‘친구’나 ‘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의견의 확대재생산(트위터의 ‘인용’이나 ‘리트윗’)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입장과 위치의 확립과 파괴에 결부된다. SNS를 통해서 인문학이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SNS는 흔히 ‘소통’의 현대적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예를 들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그에 붙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일반적인 이름과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예상되는 소통의 기능과는 어긋나게도, 결코 ‘대화(dialogue)’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트위터는 대화라기보다는 ‘증언(testimony)’의 형식을 띠며, 페이스북 또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전시(exhibition)’의 형식을 띤다. 다시 말해 SNS의 이 대표적인 두 형태는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monologue)’ 형식에 가까운 모습을 띠는 것이다.
특정한 수신자를 상정하고 있는 전화 통화나 문자 송신과는 전혀 다르게,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특정되지 않은 수신자를, 전혀 정해지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게 발설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발설이 적확하게 기대하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수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언(message)의 개념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며 특징적인 성격이다. 그 전언은 특정한 수신자를 갖지 않고 부유하며, 수신자는 오히려 그 스스로 자발적이고도 임의적으로 그러한 수신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소통’의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의 실체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인문학이 SNS를 통해 물어야 하고 또 인문학 자체가 SNS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징후에 대한 해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소위 보편성을 지향하고 객관성으로 통합되며 중립성으로 교정되는 집단지성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희망이 합의나 종합에 대한 일종의 ‘지독한 환상’에 근거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되물어야 한다. 오히려 SNS는 인문학으로 하여금 보편적이지 않고 편파적이 되는 인식의 방법, 중립적이지 않고 당파적이 되는 존재의 윤리, 통합적이거나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러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총체성이 지닌 감각의 정치를 요청하며 또한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는 보편성을 해체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이 전제하던 통일성과는 다른 형태의 어떤 총체성,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을 인문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통’이라는 공허한 지저귐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세심하게 경계해야 할 근본적인 지점은 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SNS 시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SNS가 그렇게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해버릴 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저 월드와이드웹과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일견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매우 특수하고 특정한 물질적 조건의 유물론적이거나 계급적인 의미를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라고 하는 지저귐(twitter)의 형식과 대상은, 잠에서 깨 일어나서 먹고 싸고 일하고 놀고 다시 자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개인적인 안부의 교환과 소망의 표현,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발언과 의지의 표명을 통과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140자라는 지극히 협소한 공간 안에서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트위터는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 (최근 이 질문은 무심하게도 ‘새 트윗을 작성하세요(Compose new tweet)’라고 하는 밋밋한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질문이 남겨둔 공란에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로 그 제한적인 140자 안에 적어 넣는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대답이 반드시 지녀야 할 어떤 적합한 대답의 형식을 포함한다.
그 대답이란, 대답의 형식이란 ‘무엇(what)’이다. ‘무엇’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무엇’이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라 일종의 ‘사건(event)’이 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SNS 안에서 물어야 하고 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추상적인 관념의 시대는 사라지고 현실적인 경제의 시대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저귐만큼이나 공허한 지저귐은 다시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라고 하는 시대의식만큼 강력한 이념이야말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SNS는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우리 시대의 투쟁이 개념과 이념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수신자는 바로 인문학일 것이다.
<시리즈 끝>
<최정우 | 비평가·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