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ch this interview with Angela Davis in 1972.

The situation has never changed, but is getting even worse.

Is this nor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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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gardez cet entretien avec Angela Davis en 1972.

La situation n'a jamais changé, mais s'aggrave encore.

Est-ce que c'est norm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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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 있었던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와의 이 인터뷰를 보라.

상황은 전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악화되고 있다.

이것이 정상적인 일인가?

#angeladavis #blacklivesmatter


https://www.youtube.com/watch?v=HuBqyBE1Ppw&fbclid=IwAR1iFealF_L71jdm2jVG3FL8eW85YjhqInmQiWyDLvcQ-nF0HmNmc6qc63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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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월 12일 수요일자 <경향신문>, '김규항의 좌판' 22번째 편에 제가 속해 있는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의 인터뷰가 실렸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올해는 또한 레나타 수이사이드가 결성된 지 정확히 10주년이 되는 해, 하여 지난 9월 2일에 레나타 수이사이드는 10주년 기념 공연을 장장 3시간에 걸친 마라톤 공연으로 잘 마무리했습니다. 지금까지 10년의 활동 기간 동안 레나타와 함께했던 예술가들 중 많은 분들이 게스트로 무대를 빛내주셨습니다. 시인 강정, 안무가 공영선, 플라멘코 가수 소니아, 거문고 연주가 오경자, 안무가 장은정, 소설가 황정은 등 모든 게스트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레나타의 10년은 아마도 '요약될 수 없는' 무엇이 아닐까 합니다. 이제 또 다음 10년, 20주년의 그날까지 느리지만 뚜렷한 행보를 이어가볼까 합니다. 레나타 수이사이드는 앞으로도 반국가주의적이고 반자본주의적인 행보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미학과 정치를 서로 흘레붙이고 교배시킬 수 있는지, 암중모색을 계속해 나가겠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함께 더듬고, 함께 걸어주시길. 

 

- 襤魂, 合掌하여 올림.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9112105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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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의 좌판](22)

반국가주의·반자본주의 음악집단 3인조 밴드 ‘레나타수이사이드’

 

 

“앨범 한 장 안 내고 10년간 밴드 활동…  

우린 비전을 강요하지 않아요”

람혼(최정우), 파랑(이용창), 반시(유가영) 세 사람이 ‘레나타수이사이드’라는 밴드를 만들어 활동한 지 막 10년이 되었다. 근래 한국에는 10년 넘은 인디밴드가 적잖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들처럼 애초 멤버 그대로, 그것도 앨범 한 장 내지 않고 10년을 맞은 경우는 거의 없다. “부부관계에 비유하면 우리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같은 관계”(파랑)라고도 하고 “우리는 밴드로서 비전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반시)이라고 한다. 그들의 10년과 그들의 삶을 도란도란 들어보았다.


 

밴드 레나타수이사이드 멤버들. 왼쪽부터 드럼 파랑(이용창), 베이스 반시(유가영), 보컬 람혼(최정우). | 김정근 기자 jeongk@kyunghyang.com

 


▲ 어떤 사운드만 중요시하지 않고 연극·무용 등 다른 장르와 협업도
매이지 않아 관객들은 친구가 돼


▲ 과거엔 밴드들 저항성 선언부터… 지금은 지향성보다 현장을 중시
공연 취지 맞으면 함께 모이게 돼… 음악의 정치성 다양하게 진화 중


▲ 사회 전반 진보적 담론 확대 추세… 실은 우파체제 지탱 수준에 그쳐
왜 이럴까 질문 좀 더 치열해져야
 



김규항 = 레나타는 사운드가 독특한 편입니다. 말로 표현하기가 쉽진 않은데, 하드하면서도 깔끔하고 마치 테크노처럼 끊임없이 이어져가는 느낌도 있고….

람혼 = ‘너희는 장르가 뭐냐’ 물으면 대답하기가 애매해서 제가 만든 말이 있는데요. 빠르(PPAR)입니다.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아트록.(웃음)

파랑 = 누가 보든 형식은 밴드고 장르는 록이겠지만 어떤 사운드가 대세라거나 어떤 사운드를 만들어내겠다거나 하는 걸 별로 중요시하지 않는 편입니다. 깔끔하다고 하셨는데, 간편하고 명료하게 우리가 준비한 걸 들려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결과인 것 같아요.

김규항 = 대개의 경우 밴드는 사운드를 궁리하고 만들어내는 게 일인데요. 곡은 람혼이 만들죠?

람혼 = 예. 그런데 제가 작곡했다고 하면 오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통은 편곡 개념이라 생각하는 것이 저희는 작곡인데요. 제가 리프나 코드 같은 걸 만들어 오면 셋이 곡을 완성해가는 거죠. 때로는 악상이 아니라 형식적 개념이나 구조 같은 걸 가지고 토론하면서 작업하기도 합니다.

반시 = 저희는 곡이 선율에서 시작하는 게 아니라 패턴에서 시작해요. 테크노 같은 느낌도 아마 그래서일 거예요. 연주곡이 먼저 나오고 멜로디가 되고 그 다음에 가사를 붙이는 방식이죠.

김규항 = 이름 설명 좀 해주세요.

람혼 = 저는 누더기 람(襤) 자에 넋 혼(魂) 자입니다. 남루한 영혼이죠. 반시(banshee)는 사람이 죽으면 혹은 죽기 전에 울음을 운다는 아일랜드의 요정… 귀신인가?(웃음) 파랑은 물결 파 자에 물결 랑 자입니다.

김규항 = 파랑 빼곤 참으로 어둡군요.(웃음) 노래 제목들도 그런 게 많아요. ‘병든 것’ ‘독의 노래’….

람혼 = 반시 가족의 결혼식 연주를 부탁받았는데 결국 남의 노래를 했었죠.(웃음) 하지만 어둡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단지 결혼식에 안 맞을 뿐이라 생각합니다.

김규항 = 10년차 밴드가 결혼식에서 연주할 곡이 한 곡도 없기는 어려워요.(웃음) 특별히 염세적 세계관을 갖거나 드러내려는 건 아니라는 뜻으로 알겠습니다. 사실 제목은 그래도 곡은 밝아요. 반복해서 틀면 레이브 파티에 써도 될 만한 곡들이죠. 각자 악기를 선택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반시 = 베이스는 무대에서 주목받지 않아 편해보였고 또 조용하다는 게 좋았어요. 기타는 주파수가 높아서 부담스러웠거든요.

람혼 = 그러나 레나타에서 베이스는 주목받는 플레이가 많죠.(웃음)

반시 = 저희는 기타 솔로가 있을 부분에 베이스 플레이가 많아요. 멜로디를 많이 치는 편이고요.

파랑 = 고등학생 때 대학 가면 드럼 치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드럼은 우리 악기는 아닌데 전 이상하게 내셔널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도 같아요. 록 드럼에서 레드제플린과 레인보우를 비교해 본다면 레드제플린의 존 본햄은 문학적이고 시적이라면 레인보우의 코지 파웰은 힘과 원초적인 에너지가 느껴져서 단연 그쪽이었고요.

김규항 = 파랑의 스네어드럼 소리는 대쪽 같아요. 그런데 때론 어떤 곡이든 홀로 대쪽 같다는 느낌도 들어요.

파랑 = 인정합니다.(웃음) 밴드의 사운드에 대한 집착은 없지만 사운드에 대한 제 개인적인 탐구는 강한 편인데요. 말씀하신 건 그와 관련된 부분이고요. 다른 연주자와의 조화에 대한 노력은 그보다는 적었던 것 같아요.

김규항 = 람혼은 어릴 적 가야금을 배웠다고 들었는데 어떤 도움이 되었나요.

람혼 = 중학생 때 가야금 소리가 좋아서 배우게 되었는데요. 기타에는 밴딩과 초킹이 있잖아요. 가야금에는 농현이 있고 꺾는 게 있다는 말이죠. 기타도 가야금도 현악기인데 현의 다양한 느낌을 알게 되었죠. 그리고 국악 박자가 재미있잖아요. 엇모리는 5박이고 7채도 있고. 저희 곡을 보면 4박과 3박을 당연시하는 게 없어요. 7박 갔다가 4박 갔다가 11박 가보면 어떨까 그런 시도들을 하기도 하죠. 뭔가에 매어있지 않을 수 있다는 게 소득이었던 것 같아요.

김규항 = 레나타는 클럽 공연이라든가 밴드로서의 활동은 많은 편이 아닙니다. 반면에 연극이나 무용, 미술 같은 다른 장르와의 협업은 무척 활발한데요. 언제부터 한 건가요.

람혼 = 처음 한 건 2006년에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사라 케인의 ‘4.48 사이코시스’라는 작품이었어요. 제가 개인적으로 연극음악을 해오다가 셋이 라이브로 하면 재미있겠다 싶어서 시작하게 되었죠.

김규항 = 밴드 활동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람혼 = 밴드는 관객을 향해 꽉 차 있는 최대 사운드를 지향한다면 연극이나 무용음악은 얼마나 비우는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어떻게 개입하고 어디에서 침묵이나 휴지를 통해 빠지는가. 그리고 배우, 무용수 심지어 조명 등의 무대장치와 어떻게 조응하는가를 생각하게 되거든요. 밴드음악은 깔끔하고 완결성 있게 가지만 협업에선 즉흥적인 면도 많고요. 파랑은 드럼 아닌 다양한 퍼커션들, 반시는 베이스로 내는 다양한 소리들을 시도하죠.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파랑 = 저도 아까 말씀드렸듯이 밴드에서 드럼이라는 생각보다는 드럼으로서 어떤 보편적인 것을 찾아보겠다는 욕구가 늘 우선인 편이라서인지 협업 작업들이 흥미롭고 재미있습니다.

반시 = 저는 좀 달라요. 저는 기본적으로 밴드음악을 좋아하고 다른 형태를 탐구해보겠다는 생각도 없었거든요. 사실 4박 갔다, 7박 갔다, 11박 갔다 하는 걸 적응하는 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협업은 저에게 스트레스가 심하고 어려운 일이었어요. 그러나 자꾸 하다보니까 이제 어느 정도는 즐길 수 있게 되었죠.(웃음)

김규항 = 밴드 공연과 실험적인 연극, 무용과의 협업은 관객이 좀 다른데요. 그런 단절에 대한 아쉬움은 없나요.

람혼 = 교집합이 조금씩은 생겨나는 것 같아요. 교집합이 아니라 지인들인가?(웃음)

반시 = 저희는 관객으로 만나서 지인이 되고 친구가 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팬이 없어요. 팬이 되는 순간 지인이 되는, 그 이후로는 이 사람이 팬인지 친군지, 우리 공연을 보러 오는 건지, 우리와 이야기하러 오는 건지 모르는….(웃음)

파랑 = 이번 10주년 공연 때도 관객이 꽤 많았는데 대부분 지인들이고 대부분 공연을 통해 만난 분들이죠. 연극배우나 무용가들도 많고요. 제 친구가 그날 그러던데요. ‘다 예술하는 사람들 같다, 너만 빼고.’(웃음)

김규항 = 반시는 외국계 회사에서 임금노동을 하고 있고 람혼은 비평가, 번역가, 연구자로서 활동을 하는데요. 파랑은 드럼 외엔 안 하고 살고 있어요. 스스로 선택한 거죠?

파랑 = 고3 때부터 일을 하지 않고 살겠다, 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근래 생각이 조금 바뀌고 있어요. 그렇게 사는 게 이 미국식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거부인가, 자기만족인가 하는 의문이 생겼달까요. 저도 곧 임금노동을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 안 하고 사는 방식을 내세운 적이 없듯이 앞으로도 일하고 사는 걸 합리화할 생각도 없습니다. 결혼하고 싶은 여성이 생긴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요.(웃음)

김규항 = 레나타 멤버들은 급진적인 분들인데 정치적인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우리 사회에서도 한참 록의 저항성, 정치성에 대한 담론이 무성하던 시절이 있었고 지금은 씻은 듯이 없고 그렇죠. 실제 현장의 맥락에서는 어떤가요.

람혼 = 저도 레나타 전에 ‘이반’이라는 밴드를 했었고 메이데이나 이스크라 같은 급진적인 밴드들이 있었죠. 이런 형식에 이런 내용을 담으면 대중적인 파급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식이 있었어요. 나름의 의미와 성과도 있었죠. 그런데 음악의 정치성이 옮겨가는 것 같아요. 이를테면 두리반에 저희를 비롯한 많은 밴드들이 참여했잖아요. 그 대부분의 밴드들이 사회적인 밴드라고 하기는 어려운데 사회성이 강하게 표출되었죠. 과거처럼 각자 밴드들이 직접적 메시지를 전달하려 하기보다는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양한데 어디에 모이는가 그 공간이 어떤 곳인가로 정치성이 표현된다고 할까요.

반시 = 과거처럼 정치성을 표방하는 밴드는 잘 보이지 않는 반면에 “거지 같은 세상” 같은 가사는 어느 밴드에서나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죠. 브로콜리너마저 같은 밴드는 저항적인 밴드라고 할 순 없지만 ‘졸업’이라는 노래에는 “팔려가는 서로를 바라보며”라는 가사가 나와요. 과거의 저항성은 선언된 것이라면 이젠 그런 선언 없이도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그것이라면, 심지어 내 음악 중에 그런 게 없어도 두리반 같은 상황에 내가 동의한다면 공연하는 거죠. 진화라고 생각해요.

김규항 = 정치성의 이행, 진화. 좋습니다. 보통의 시민과 노동자들은 어때 보입니까?

람혼 = 제가 최근에 갖고 있는 문제의식이랄까 하는 게 ‘청춘’에 관한 현상인데요. 예를 들면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책이라든가 힐링이니 멘토링 같은 것들이오. ‘88만원 세대’론을 비롯해서 청춘세대의 삶과 노동에 대해 사회 구조적으로 포착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에 아프니까 청춘이고, 청춘이란 사서 고생하는 거고, 천번 흔들려야 어른이 되고 식으로 너무나 쉽게 안이하게 봉합하고 있어요. 그런 강연에 사람들이 몰리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규항 =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책 제목부터 현재 청년들의 현실로 보면 몰매를 맞아도 싼데 베스트셀러가 되고 저자는 떠받들어지죠.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개인의 책임과 태도의 문제로 돌리는 건 전형적인 우파의 사고인데 마치 기존 질서와 보수를 넘어서는 비전처럼 여겨지고 있죠. 안철수씨는 3시간밖에 안 잤다는 이야기를 즐겨 하던데 3시간만 자면 누구나 안철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일까요?(웃음) 싱거운 사람들입니다.

파랑 =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보면 공부할 만큼 했고 좌파적 교양도 있고 전반적으로 사회의 ‘진보율’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취향과 안목 차원에서요. 그런데 근본적으로 별로 나아가고 있지 않은 느낌이에요. 이 많은 진보적 담론들이 실은 우파 체제를 한편으로 지탱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거죠. 이게 왜일까 하는 질문을 좀 더 치열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규항 = 그렇게 머물고 있는 현실에 비해선 인터넷이나 트위터 같은 데선 참 어울리지 않을 만큼 시끄럽죠. 그 부조화가 우습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합니다.

반시 = 전에는 이른바 보수언론들이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한달까, 권장한달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실제로 정치적 무관심이 쿨함의 일종이던 시절이 있었고요. 그런데 이젠 놀이의 영역에서든, 음악의 영역에서든, 수다의 영역에서든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쿨함인 사회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돌고 도는데도 아무 것도 바뀌지 않죠. 가장 큰 이유는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김규항 = 깊이 동감합니다. 바뀔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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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2-09-13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하 람혼님.
안그래도 어제 저녁 먹고 경향신문 팔랑팔랑 넘기다가 제가 람혼님의 모습이 실린 사진과 이 기사를 봤다는거 아니겠습니까! 저 혼자 막 반가워했어요. 히히히.

람혼 2012-09-14 04:56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잘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
그런데 신문지면과 인터넷판 기사 모두에 크나큰 실수가 있었어요. 저도 몰랐는데, 경향신문에 정정보도 요청했습니다.
잘못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고3 때부터 일을 하지 않고 살겠다, 이 시스템을 거부하고 살겠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 결혼하고 싶은 여성이 생긴 것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도요.(웃음)"
이 문장은 제가 이야기한 게 아니라 파랑이 이야기한 것인데, 마치 제가 이야기한 것처럼 '람혼'이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수정 요청했습니다. 첫째, 저 문장의 어조는 결코 '람혼스러운' 문장이 아닙니다. 저의 문장이 아닌 문장이 마치 저의 것처럼 둔갑되어 있습니다. 둘째, 이러한 잘못된 표기는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파랑에게뿐만 아니라 파랑이 사랑하고 있는 분께도 매우 큰 결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정정되어야 합니다.
(경향신문이 제 혼삿길을 막으려고 작정했다는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ㅋㅋㅋㅋㅋ)

다락방 2012-09-14 09:54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죄송해요, 람혼님. 이렇게 웃어서요. 그런데 너무 웃음이 나요.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람혼 2012-09-14 13:10   좋아요 0 | URL
미안해하실 필요 없이 마음껏 웃으셔도 됩니다! 저도 사실 너무 웃겨요.^^ 하하하하하!
 

[인문학에 던지는 12가지 질문](12)

SNS시대, 인문학의 과제는 무엇인가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SNS의 ‘소통’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저자 최정우씨의 배경은 미디어 아트의 창시자로서 인터랙티브 예술을 선보인 고 백남준의 작품(서울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이다. | 사진작가 박재찬

ㆍSNS시대 ‘징후’의 해석과 대응은 인문학의 몫

■ 집단지성이라는 알리바이

바야흐로 SNS의 시대, 곧 사회적 네트워크 서비스의 시대다. 나는 물론 이 시대에 대해 지극히 ‘인문학적’으로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아서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 혹은 반대로 인문학은 이러한 시대에 어떤 효과를 미치면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들 말이다. 말하자면, 마치 원래 ‘인문학’이란 것이 이러한 ‘시대적 현상’들에 대한 진단과 소화와 평가를 어쩌면 필연적이고도 의무적으로,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수행하거나 반영해야 하는 학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인문학이 SNS의 시대라고 하는 어떤 ‘거대한 흐름’에 대해 어떤 식으로든 언급을 하거나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한다면, 그것은 인문학이 인간과 사회의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객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메타적인 층위에서 무언가를 규정할 수 있는 ‘당연한’ 위치에 있는 학문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러한 시대적 흐름 또는 현상들 자체가 특정한 인문학적 ‘가능조건’들을 규정하고 또한 그러한 인문학적 ‘효과’들을 산출하기 때문에 그렇다. 따라서 인문학 자체는 SNS 시대를 해명하거나 규정할 수 있는 어떤 불변하는 상수가 아니라 현재의 SNS 시대라고 하는 역사적이고도 기술적인 환경에 내속되어 있는 어떤 종속적인 변수인 것이다.

사실 기존의 소위 ‘인문학’이 인터넷 시대의 도래를 포함하여 현재 SNS 시대의 등장 안에서 유의미한 것으로 생각해온 주체는 통상적으로 ‘집단지성’이었으며 그러한 논의의 틀은 현재도 큰 변함이 없다. 집단지성은 익명적이고 불특정하지만 오히려 바로 그러한 성격들 때문에 특정하게 고정되어 있는 일반적이고 단수적인 주체나 대중적, 여론적인 지성보다 훨씬 더 유동적인 자기갱신이 가능하고 정치적으로 더욱 기동적이며 또한 끊임없이 스스로를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어 왔다. 위키피디아, 구글, 다음의 아고라 등이 형성하고 있는 세계가 사실 그러하며 우리는 거기에 그러한 특성들을 기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지성은 실재하는가, 또는 집단지성이란 그러한 실체로서 그 이름에 합당한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가, 혹은 이 질문을 더욱 ‘인문학적’으로 적확하게 정식화하자면, 인문학은 이 SNS의 시대에 집단지성이라는 주체의 이름을 소환하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할 어떤 정당한 윤리와 적합한 정치를 지니고 있는가. 이것은 어쩌면 우리 시대 인문학의 알리바이, 상이한 형태로 언제나 있어 왔다고 생각되는 ‘시대정신’, 바로 그 이름으로 부여되는 어떤 환상의 알리바이는 아닐까.

■ SNS는 대화가 아닌 독백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의 시대가 SNS 시대라는 저 하나의 선언은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첫째 사회적인 네트워크, 곧 인간관계의 사회적인 망이 단순히 지역적이거나 물리적인 시공간의 제한을 뛰어넘어 다양한 영역과 분과들로 ‘확장’되었다는 의미, 둘째 그러한 사회적인 관계망이 일종의 ‘서비스’로서 제공되고 향유된다는 의미, 셋째 이러한 SNS가 어쨌든 과거와는 매우 다른 방식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세 가지 의미는 그 자체의 표면적인 의의보다는 징후적인 효과로서 독해되어야 하며, 또한 일견 가장 중심적으로 보이는 의의로부터가 아니라 가장 주변적이며 부차적인 의미로부터 독해되어야 한다.

첫 번째로 ‘확장’이란 단순히 양적인 공간의 팽창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관계 안에 ‘비관계의 관계’까지도 포함되고 포착되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트위터에서 단순히 우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사람들만을 따르지/구독하지(follow) 않으며, 또한 페이스북에서 우리가 직접적으로 아는 사람들에게만 친구 신청(friend request)을 하는 것도 아니다. 전통적으로 ‘비관계’ 혹은 ‘무관계’였던 어떤 인간관계가 SNS 안에서는 하나의 실체적인 관계로 등장할 수 있으며, 심지어 그러한 비관계/무관계가 이러한 관계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어떤 전혀 다른 형식의 인간관계가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인간관계는 기존의 관계망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요구한다.

두 번째로 그것이 ‘서비스’로 제공된다는 사실은 그러한 사회적인 네트워크가 근본적으로는 결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질서 바깥에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는 우리가 그 ‘서비스’에 가시적이고도 직접적으로 어떤 가격을 지불하거나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이 그 이름 그대로 하나의 ‘서비스’인 한에서 그것을 통해 어떤 식의 ‘이익’을 얻기를 기대하고 희망한다는 뜻이다. 그 이익의 형태는 인간관계의 구성(페이스북의 ‘친구’나 ‘그룹’)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의견의 확대재생산(트위터의 ‘인용’이나 ‘리트윗’)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든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입장과 위치의 확립과 파괴에 결부된다. SNS를 통해서 인문학이 정치 혹은 정치적인 것에 대해서 다시 사유해야 하는 이유이다.

세 번째로 SNS는 흔히 ‘소통’의 현대적 대명사로 불린다. 그러나 예를 들어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그에 붙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라는 일반적인 이름과 그러한 이름에 걸맞게 예상되는 소통의 기능과는 어긋나게도, 결코 ‘대화(dialogue)’의 형식이라고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트위터는 대화라기보다는 ‘증언(testimony)’의 형식을 띠며, 페이스북 또한 소통이라기보다는 ‘전시(exhibition)’의 형식을 띤다. 다시 말해 SNS의 이 대표적인 두 형태는 대화라기보다는 차라리 ‘독백(monologue)’ 형식에 가까운 모습을 띠는 것이다.

특정한 수신자를 상정하고 있는 전화 통화나 문자 송신과는 전혀 다르게, 트위터나 페이스북은 비록 제한된 범위 안에서라 할지라도 결코 특정되지 않은 수신자를, 전혀 정해지지 않은 독자를 대상으로 삼으며 그렇게 발설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발설이 적확하게 기대하고 목표로 할 수 있는 수신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전언(message)의 개념을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하며 특징적인 성격이다. 그 전언은 특정한 수신자를 갖지 않고 부유하며, 수신자는 오히려 그 스스로 자발적이고도 임의적으로 그러한 수신자가 되기를 선택한 사람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일견 가장 민주주의적이고 가장 평등주의적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소통’의 구조가 오히려 민주주의와 평등주의 그 자체가 지닌 가장 적나라한 한계의 실체를 가장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할 수 있다. 인문학이 SNS를 통해 물어야 하고 또 인문학 자체가 SNS 안에서 변화해야 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징후에 대한 해석과 대응에 달려 있다. 이러한 지평에서 소위 보편성을 지향하고 객관성으로 통합되며 중립성으로 교정되는 집단지성에 대한 어떤 믿음이나 희망이 합의나 종합에 대한 일종의 ‘지독한 환상’에 근거하고 있던 것은 아닌가 되물어야 한다. 오히려 SNS는 인문학으로 하여금 보편적이지 않고 편파적이 되는 인식의 방법, 중립적이지 않고 당파적이 되는 존재의 윤리, 통합적이거나 체계적이진 않지만 그러한 것을 대체할 수 있는 또 다른 종류의 총체성이 지닌 감각의 정치를 요청하며 또한 종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SNS는 보편성을 해체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이 전제하던 통일성과는 다른 형태의 어떤 총체성, 그 불가능한 가능성에 대한 질문들을 인문학에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 ‘소통’이라는 공허한 지저귐

인문학적인 입장에서 봤을 때 세심하게 경계해야 할 근본적인 지점은 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SNS 시대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행동한다. 그러나 SNS가 그렇게 한 ‘시대’를 대변하는 대표적 현상이라고 말해버릴 때, 우리는 그와 동시에 저 월드와이드웹과 스마트폰이라고 하는, 일견 지극히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매우 특수하고 특정한 물질적 조건의 유물론적이거나 계급적인 의미를 망각하거나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트위터라고 하는 지저귐(twitter)의 형식과 대상은, 잠에서 깨 일어나서 먹고 싸고 일하고 놀고 다시 자는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개인적인 안부의 교환과 소망의 표현, 사회적이고도 정치적인 발언과 의지의 표명을 통과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140자라는 지극히 협소한 공간 안에서 실로 다양하고 방대하게 펼쳐지고 있다. 트위터는 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나요(What’s happening)?’ (최근 이 질문은 무심하게도 ‘새 트윗을 작성하세요(Compose new tweet)’라고 하는 밋밋한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그 질문이 남겨둔 공란에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바로 그 제한적인 140자 안에 적어 넣는다. 이 질문은 그 자체로 하나의 대답을,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대답이 반드시 지녀야 할 어떤 적합한 대답의 형식을 포함한다.

그 대답이란, 대답의 형식이란 ‘무엇(what)’이다. ‘무엇’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그리고 이러한 ‘무엇’이 단순히 하나의 ‘해프닝(happening)’이 아니라 일종의 ‘사건(event)’이 될 수 있기 위해, 우리가 SNS 안에서 물어야 하고 또 대답해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되고 있으며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가. 누군가는 ‘자폐적인’ 이념의 시대는 가고 바야흐로 ‘소통적인’ 실용의 시대가 왔다고, 추상적인 관념의 시대는 사라지고 현실적인 경제의 시대가 등장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저귐만큼이나 공허한 지저귐은 다시 없을 텐데, 왜냐하면 ‘이념의 시대가 끝났다’라고 하는 시대의식만큼 강력한 이념이야말로 존재하기 힘든 것이기 때문이다. SNS는 여전히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인 우리 시대의 투쟁이 개념과 이념을 둘러싼 이데올로기적인 투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 말의 가장 결정적이고도 치명적인 수신자는 바로 인문학일 것이다.

<시리즈 끝>

<최정우 | 비평가·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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