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제가 『사유의 악보』 이후 거의 10년만에 출간하는 저의 두 번째 저서 『드물고 남루한, 헤프고 고귀한 ― 미학의 전장, 정치의 지도』(문학동네, 2020)가 지난 주에 드디어 세상에 나왔고, 이번 주부터 여러 도서 구입 사이트와 전국의 오프라인 서점에서 본격적으로 판매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책에서 지난 2000-2010년대, 우리가 '우리'의 동시대, 혹은 '포스트모던'의 시기라고 부르는 시간 동안 우리에게 일어난 여러 가지 일들을 '미학-정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넓게 말하자면, '우리'라는 이름의 주체가 사는 현재, 그 시간의 로고스(logos)와 에토스(ethos)를 구성하는 건, 다름 아닌 바로 지금 우리가 위치한 파토스(pathos)와 아이스테시스(aisthesis)의 지도라는 것을,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보완적이면서도 동시에 길항적인 작용을 통해 '보여'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저의 첫 책이 텍스트의 구조와 구조적 음악성 사이에서 '사유의 악보'라는 길 없는 길을 내고자 했다면, 저의 새 책은 바로 그 길 없음(aporia)로부터 다시 출발하여, 텍스트의 진정성/허구성과 이미지의 현시성/환시성 사이에서 '미학-정치의 지도'를 제작하고자 했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라고 불리는 동시공간적 공동체가 속해 있고 동시에 벗어나 있는 이 모든 정치-사회-문화적 풍경들의 '불가능한 미학적 지도 제작법'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독자 제현의 많은 관심과 뜻깊은 일독, 차가운 논의와 따뜻한 질정을 기대하면서, 지나온 시간과 나아갈 시간을 위해, 다시 말해 바로 '우리'의 지금-시간(Jetztzeit)을 위해, 저의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해올립니다.




현재, 알라딘, 교보문고, 예스24, 인터파크 등등 한국의 여러 도서 구입 사이트에서 이 책의 구입이 가능합니다.




부디 이 책이 지금의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삶과 미와 사유와 실천의 조건들과 풍경들을 다시금 '오래된 미래'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설게, 새롭고도 깊이 함께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되어드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굳건히 아름다운 나날들 보내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襤魂 최정우, 合掌하여 올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름과 호명의 미학, 고유명과 국적의 정치 (1)

 


1.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가사

1) 하나의 지도에서 시작해보자. 한국과 일본 사이에 펼쳐져 있는 저 바다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 우리, 한국인들은 이 바다를 '동해(東海)'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동쪽에 있는 바다'라는 뜻으로, 그렇게 부른다(당신은, 나의 저 주어를, 말 그대로, 잘 읽어야 한다, 나는 저 '우리'라는 주어에 언제나 기시감 같은 경기와 구토증 같은 혐오를 일으킬 정도의 경계심을 품고 있으므로). 주지하다시피, 일본인들은 같은 바다를 '일본해(日本海)'라고 부른다(또한 당신은, 나의 저 부사어를, 말 그대로,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주지하다시피'라는 말이 드러내고 행사하는 가장 근본적인 폭력성에 매혹되는 동시에 압살되므로). 이는 말 그대로, '말 그대로' 말하자면, '일본의 바다'라는 뜻이겠는데,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을 '말 그대로'라는 말 그대로 지나치는 말로 부연해서 설명하려고 할 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이 문제는 무엇보다 이름의 문제이다. 이 '일본해'라는 이름은 '말 그대로' 일본의 바다라는 뜻을 갖는가? 여기서 소유격 조사 '의'의 뜻은 무엇인가? 그것은, 말 그대로, 어떤 소유의 관계를 나타내는가(그리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 이름이 이렇듯 어떤 실제적이고도 실효적인 '소유 관계' 혹은 '지배 관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열을 올리지 않는가)? 혹은, 여기서 '소유'라는 말은 법적이거나 경제적인 권한의 문제가 아닌 단순한 문법적 관계를 가리키는 규정어인가(그런데 우리는 그 말이 이렇듯 '단순한 문법적 규정'이 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곧 하나의 이름은 '단순한 이름'의 지위를 넘어 어떤 신비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인정하면서 또한 그렇게 열을 올리고 있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질문들 때문에[라도], 하나의 바다를 '동해'라고 부를 것인가 혹은 '일본해'라고 부를 것인가 하는 문제는 민족적이고 국가적인 자존심이나 자긍심 따위의 문제를 훨씬 상회하는 문제, 곧 근대 국민국가라는 체제 그 자체의 미학적 이데올로기라는 문제가 된다. 하여 나는 이 바다의 이름(들), 하나의 바다를 가리키는 두 개의 이름을 일종의 화두로 삼고자 한다, 국가라는 괴물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에 대해 말하기 위하여.

2) 여기까지 되물었을 때, 이 문제들은 단지 '일본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지적'인 문제이기를 그치고, 우리가 매우 당연한 듯 지나친 저 첫 번째 이름, 곧 '동해'라는 이름을 둘러싼 '국가적'인 문제로 옮겨간다. '동쪽에 있는 바다'라니, 어디의 동쪽, 누구의 동쪽이란 뜻일까? 이거 왜 이래(우리가 남인가), 어디라니, 소위 '대한민국'의 동쪽이라는 뜻이지 않은가? 왜 당연한 걸 몰라?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하여 다시 묻자면, 이러한 이름은, 그리고 우리가 그 바다를 그러한 이름으로 부르는 이유는, '말 그대로', 당연한가? 하지만 나는 여기서 지극히 상대적일 수밖에 없는 방위의 개념을 바다의 이름에 포함시킨 이러한 명명법의 어떤 자기본위적 성격을 문제 삼으려는 것이 결코 아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말 그대로, 지극히 당연하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자기본위적 성격을 지닌 일견 '중립적'인 것으로 보이는 이름에 담겨 있는 어떤 '편향성'이다(그리고 '우리'란 이러한 편향성 안에 지극히 '편향적'으로 묻혀 있는 주체, 매몰된 주어이다). 여기에는 어떤 하나의 미학이, 그것도 눈먼 미학이 놓여 있다. '동해'라는 이름이 우리에게 일견 '중립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우리가 그 이름을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부를 때 그 이름이 감추고 있는 어떤 중요한 것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이름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잘 생각하지 못한다고 [누군가에게서] 질책을 받는 '애국심' 따위가 아니라(여기서 잠시 친절한 금자 씨의 명언을 빌리자면, '너나 잘하세요'), 지극히 중립적이면서 동시에 편향적인 방위의 개념을 통해 하나의 지명을 규정하고 있는 어떤 미학적인 이데올로기이다. '동해'라는 이름은 사실 '한국해'라는 이름을, '한국의 동해'라는 '본명'을 숨기고 있는 이름인 것. '우리'라는 주체/주어는 '동해'가 '일본해'라는 이름으로 불릴 때 '국적의 침탈'을 느끼며 불쾌해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동해'라는 이름 자체가 지닌 저 국적의 성격과 저 침탈의 성격을 보지 못한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는 '아름다운' 가사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우리가 다시금 눈여겨보고 귀 기울여 들어봐야 하는 이유이다. 그 지극히 당연하며 진부하게까지 느껴지는 가사는 바로 이러한 '아름다움'의 정서와 국적의 이름을 둘러싼 하나의 미학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지중해(Mediterranean Sea)'라는 또 다른 바다의 이름: 그렇다면 왜 세계의 모든 '지-중(地-中, medi-terranean)해'들은 그 고유명의 고유성을, 혹은 그 보통명사의 보편성을 주장하거나 기소하지 않는가?


2. "구미(歐)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

3) 왜 그것은 무엇보다 가장 먼저 하나의 '아름다움', 혹은 그러한 '아름다움'을 둘러싼 미학적 투쟁인가? 게다가 그것은 왜 또한 그러한 '이름'들을 둘러싼 투쟁인가? 여기서 잠시 이 문제를 에둘러 가보자(그리고 내가 항상 이렇게 에둘러 가는 길을 선택하고 사랑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 우회의 길에는 급행의 길 안에 없는 어떤 일말의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그 '일말의' 진리야말로, 그 '전체 아닌' 진리야말로, 실은 '전부의' 진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따라서 이러한 길에 대한 선택과 사랑은, 어쩌면 선택할 수 없는 불가능한 것에 대한 지극히 가능한 사랑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일례로 우리에게는 '구미(歐美)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진부하리만치 익숙한 하나의 문형이 있다. 주지하다시피, 이 문형은 이런 식으로 사용되곤 한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인권의 사각지대가 있었다니, 이는 미국 사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수치스러운 일이다" 혹은 "이렇듯 국회 안에서 날치기가 횡행하고 폭력이 난무하다니, 이는 유럽 의회에서는 상상도 못할 해외 토픽감이다" 등등. 그러나 이러한 진부한 문형들을 일거에 각성케 하는 명문이 있었으니, 그 일례로 <뉴데일리>라는 보수반동 언론의 최근 기사 한 토막을 살펴보자. 김진숙 씨가 여전히 크레인 위에 올라가 있고 '희망버스'가 오가는 한진중공업의 영도조선소가 군함 등의 군사 장비를 생산하는 국가 보안 시설임을 강조하면서 이 언론은 이 '가장 중요한' 사실을 모른다고 상정된 '무지한' 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그런데 여기서 진짜 '무지'한 것은 누구인가): "이런 중요시설에 '희망버스'라는 정체불명의 시민단체 차량을 내세우고,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사다리를 이용해 침입한 것이 자랑스럽게 언론에 올라올 정도라는 것은 총체적인 국가 혼란 상태를 의미한다. 공권력의 힘이 강력한 러시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이나 유럽의 어느 국가였더라면 A급 국가 보안 시설에 무기를 들고 난입한 자들은 경비 병력들에 의해 무력 저지(경고 사격 후 실탄 사격)되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의 국가 보안 등급 시설물을 지키고 있는 군과 경찰 병력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뉴데일리> 기사 「한국 공권력은 죽었다?」: http://j.mp/k9AZxL 참조) 이 땅의 우익은 모두 죽었는가, 하고 절규하듯, 마치 탁 하고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그 심정과 그 정서로, 이 실로 거대한 엄살을 떨고 있는 문장을, 우리는 함께 읽는다, 이 시대에, 마치 하나의 진기한 기적처럼, 그렇게 함께 읽게 된다.



 


▷ 프란시스코 고야(Francisco Goya)의 그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1814)과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의 그림 <한국에서의 학살>(1951). 이 절멸의 신화는 왜 역사 안에서 다양한 욕망의 형태로 반복되는가? 그리고 저들의 절멸에 맞서는 우리의 절멸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4) 반복하자면, 그렇게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저 진부한 문형('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을 이 얼마나 참신하게 사용한 경우인가!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면서 저 언론이 부러워하고 있는 어떤 '선진국'의 위용이란, 바로 저 무지하고 무례한 폭도들을 일거에 총살시킬 수 있는 어떤 '용기', 그런 불순분자들을 일거에 절멸시킬 수 있어야 하는 어떤 '애국심'인 것. 그렇다, 나와 당신은 이 글을 함께 읽었다, 그렇게 함께 읽고 있다, 믿을 수 없게도, 말하자면, 다른 나라도 아닌 소위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한 언론의 지면에서, 그렇게 초현실적으로 함께 읽고 있다(그렇다면 그 '자랑스러움'이란 누구를 위한 자랑스러움이었는지 여기서 보다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가). 자, 그렇다면, 만약 정말로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존재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연 어느 쪽일 것인가? 국가 보안 시설을 제멋대로 침탈하는 폭도들을 향해 사격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저 병신 같은 군과 경찰일 것인가, 아니면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라고 종용하며 강권하는 저 대쪽 같고 위엄 어린 자유 언론일 것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 구미에는 있는 것, 그것은 과연 무엇이고 또 과연 어느 쪽인가? 나는 위의 주장과 정확히 정반대에 위치한 하나의 반례를 생각한다. 마이클 무어(Michael Moore)는 그의 다큐멘터리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에서, 어쩌면 오히려 반대로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한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1936년 GM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이 있었을 때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Roosevelt) 대통령은 그곳에 군대를 파견한다. 왜 그는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군대를 파견했을까? 그 노동자들을 진압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그들에게 발포하기 위해서? 전혀 아니었다. 군대의 총구는 노동자들이 아니라 바로 사측의 용역과 구사대를 향했던 것. 말하자면 루즈벨트는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군대를 파견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 자유 언론의 말을 그대로 비틀어 그들에게 다시금 되돌려주자면, 이는 실로, 경찰이 용역 깡패를 비호하고 서민과 노동자들을 폭도로 규정하여 진압하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리하여 나는 다시 묻는 것이다: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또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없고 저들에게만 있는 것, 우리에게만 있고 저들에게는 없는 것이란, 그 부재하는 동시에 존재하는 '아름다움'이란, 그 상상 가능한 것과 상상 불가능한 것이란, 정말 무엇인가?



▷ 마이클 무어 감독,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2009)의 한 장면. 되묻자면, 진정한 '범죄 현장(crime scene)'은 과연 어디인가?


3. "우리가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이라는 당위

5) 그렇다면 왜 저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은 계속해서 다양한 형태로 반복되고 있는 것일까? 어째서 저 모든 '상상 가능한 것'에 관한 담론들이 특정한 장소나 지역을 중심으로 그렇게 '환상적'이고 '허구적'으로 구성되는 것일까? 'orange'를 '아린지'라고만 발음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또한 그러한 발음법만이 세계화 시대의 '진정한' 생존 전략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 식민지 국가 안에서, '구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이 협박과 공갈의 문형은 하나의 영속적인 지배 규준으로 기능한다(그러므로 진정한 '식민지 국가'란, 상상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범위와 경계를 규정하고 제한하는 하나의 미학적 체제이다). 그리고 그 지배적 규준이란 '선진국-개발도상국-후진국'이라는 한 절체절명의 분류법 속에서 작용한다. 그러나 이 땅에서 때때로 발생하곤 하는 일들이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곳으로 설정된 저 '선진국'이란, 언젠가는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발전 단계로 설정된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계속해서 지연되고 유예됨으로써만, 오직 그렇게 계속 연기됨으로써만, 하나의 전범이자 모범이자 규준으로 기능하게 되는 뒤틀린 욕망의 장소이다. '우리'는 '선진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왜 그런가? 죽었다 깨어나도 소위 '한국인의 국민성'은 선진국 진입에 맞지 않는 전근대적 요소들을 다분히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 층위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선진국 진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조건들 그 자체가 아니라, '선진국'이라는 단계가 하나의 허구적 전범으로 기능하고 있는 한, 우리가 그 허망한 욕망의 문법과 지연의 체제를 직시하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노파심에서 반복하자면, 여기서의 문제는 '우리'가 선진국에 '도달'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결코 아니다). 사람들이 볼 수 없도록 누군가를 크레인 위에서 치워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리고 용역이든 경찰이든 동원해서라도 누군가를 재개발 구역에서 몰아내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그들이 오매불망 불철주야 노력하고 경주하는 저 선진국 진입이라는 허상은 여전히 요원하다. 그리고 실은 그들은 바로 그 허상의 '요원함' 자체를 무기로 지배하고 군림한다.


 

 

 

 

▷ 용산의 기억과 망각: 그들이 원하는 '선진국'으로 가는 데 방해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떻게 대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더 적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이 결코 바라지 않는 '선진국'으로 가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어떤 식으로 대하고 있는가를, 우리는 매순간 망각하고 있기도 하다. 아마도 가장 무서운 것은 이러한 망각일 것이다. '이름'의 문제는 바로 이러한 '망각'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어떤 것이다.

6) 그러나 '선진국이 될 수 없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나는 모종의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유포하고 있는가? 전혀 아니다. 전혀 아닌 이유는, 그럼에도 내가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되는 어떤 당위를 이야기하려는 것도 아니고, '선진국'이 되는 어떤 다른 길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소위 '구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문형으로 이 땅의 '후진성'을 진단하고 '선진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그들 자신이 믿든 믿지 않든, 그들은 바로 그 '선진국'이라는 환상의 체제를 통해서, 바로 그 '개발도상국-선진국'이라는 허구의 발전 단계 도식을 통해서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선진국'을 앞당기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모든 과정들을 끊임없이 유예하고 지연함으로써 바로 이 현재의 체제를 공고히 만들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바로 그들의 욕망이 지닌 진짜 모습일 것이며, 그들이 왜 진정한 선진화를 주장하는 다른 많은 목소리들을 그렇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잠재우는가 하는 궁금증이 여기서 풀릴 수 있다. 하여 다시 묻자면, 왜 우리는 어떤 바다를 ['일본해'가 아니라] '동해'라고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제는 단지 '대한민국'에 사는 이들의 자존심과 애국심을 건 사활의 문제가 아니라, 각각 자국의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참칭되고 환원되며 소급되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저 국가라는 괴물을 공동으로 마주하여 함께 생각해야 하는 문제이다(그러므로 당신이 당신 자신의 자생적이고 민족적인 분노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열을 올리고 있을 때, 당신은 어쩌면 저 찬란한 '선진국'이라는 담론에 의해서 가장 '감정적으로' 착취당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한쪽에는 이 땅의 아름다움을 상찬해 마지않는 눈물 나는 국민주의 미학이 존재하며,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는 이 땅이 선진국으로의 진입 따위를 절체절명의 문제로 삼는 국가와는 전혀 별개의 장소임을 깨달은 자들의 미학이 존재한다. 어떤 미학 위에 설 것인가 하는 이 가장 '미학적'인 문제는, 그것이 그렇게 미학적인 문제인 한에서, 다시금 가장 '정치적'인 문제로 연결되며, 결국 그러한 정치의 문제가 궁극적으로 미학적 이데올로기의 문제임을 직시하게 한다.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저 바다를 마주 보며, 그 이름 없는 이름을 부르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에둘러 가는 길을 통해, 시작하고자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8)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달사르 2011-08-0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진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말을 자주 들었던 거 같애요. 특히 식자입네, 하는 사람들에게서요. 그럴때면 괜히 주눅들면서도 뭔가 모를 반항심이 생기기도 했던 거 같애요. 저 사람은 그 말 빼면 할 말이 없지..등이 고작이었는데요. 오늘 이 글 읽으니, 속이 후련! 합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이 화면에 나오신 분인가봐요. 저 영화도 본인이 등장을 했나봐요? 식코처럼.

람혼 2011-09-11 16:27   좋아요 0 | URL
속이 후련하다고 하시니 저도 기쁩니다.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달사르님. 화면에 나오는 사람은 마이클 무어 감독 본인이 맞습니다. 진정한 범죄현장은 바로 이곳이라며 금융기관 건물 바깥에 폴리스 라인을 설치하는 퍼포먼스를 벌이는 장면이죠. <식코>가 재미있으셨다면(재미있다기보다는 씁쓸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지만) <자본주의: 러브 스토리>도 매우 흥미롭게 보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가합니다.^^

굿바이 2011-08-03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바다를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갖는 것 자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는 그래서 이미 질문 자체가 나쁜 선택이 되어버리는 분위기가 답답합니다.
더 나아가 네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어,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진행되는 그들의 나쁜 버릇도 참기 힘든 시절입니다.

람혼 2011-09-11 16:28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질문 자체가, 그런 질문 자체를 던지는 일 자체가 의심스러운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상황, 그 자체가 저도 불만이고, 이 글도 그러한 불만의 연장선상에서 쓰인 글입니다. 결을 따라 섬세하고 꼼꼼히 잘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비로그인 2011-08-03 16: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에서야 올려주신 연재글을 모두 정독했습니다. 읽기 전엔 휴우 이 긴 걸 언제 다 읽나 싶다가도 다 읽고 나면 어, 벌써 끝났나? 싶어 늘 아쉬운 것이 람혼님의 글입니다ㅋㅋ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도 3편으로 끝나고 나니 아쉽네요. 람혼님을 계속 쪼아대면 '노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나 '평가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평론'은 제가 잘 모르니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설'은 마치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소금을 만들어내는 맷돌처럼 무궁무진하게 해주실 것 같네요. 유난히 비가 많은 여름인데 건강 잘 챙기시구요^^

람혼 2011-09-11 16:30   좋아요 0 | URL
언제 다 읽나, 그럼에도 벌써 끝났나, 이 말은 제가 들었던 찬사 중 최고의 찬사인데요.^^ 잘 읽어주셔서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유난히 비가 많았던 여름을 거의 살아남듯 통과했더니 아주 짤막한, 그만큼 잔뜩 찌푸린 가을이 기다리고 있었네요. 후와님도 이 힘든 계절(들), 무탈히 나시길 바랍니다. (연재는 네이버 자음과모음 카페에서 계속 되고 있습니다.^^)

2011-09-10 15: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16: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3)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3. 세 개의 시각:
삼위일체, 환영과 출현, 제3의 눈, 그리고 다시 외눈박이


 

▷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십자가형(Crucifixion)>.

1) 그리하여 나는 세 개의 그림, 세 개의 시각으로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다. 왜 나는 하나에서 둘로, 그리고 둘에서 다시 셋으로 가려 하는가? 곧, 나는 왜 하나의 시점에서 두 개의 시선으로, 그리고 다시 세 개의 시각으로 옮겨 가려고 하는가? 십자가에 못 박힌 대속(代贖)의 희생자를 목격하기 위하여, 곧 그의 충실한 '증인'이 되기 위하여, 그리하여 틀에 박힌(못에 박힌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 대립과 극성(極性)으로부터 잠시 한쪽으로 비켜나, 가장 기이하나 동시에 가장 미적인 하나의 삼위일체(trinity)에 다다르기 위하여, 다시 말해, 2가 아닌 3을,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2가 있기에 비로소 어떤 '의미'를 지닐 3을 숭배하기 위하여. 따라서 이 글은 숫자에 대한 일종의 '형이상학', 혹은 형이상학적이며 종교적인 성격을 띤 일종의 '수론(數論)'이라는 길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모든 기독교인들은 아마도 실망을 금치 못할 텐데(그리고 나는 여기서 실로 그러한 실망을, 심지어 하나의 절망까지를 기대하고 기원하고 있다고 고백해야겠는데), 내가 예찬하고 숭상하고자 하는 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항들 사이의 임시변통과도 같은 신비주의적인 봉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원이라는 이름 아래 지극히 자의적이고 임시적으로 봉합된 3이 아니라, 순간이라는 현재 안에서 무한하게 출현하는 3, 바로 그 세 개의 시각, 세 개의 존재/부재를 위하여, 나는 저 세 개의 그림들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2) 그러므로 이쯤에서 당신은 아마도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한 명의 유물론자로서 기이하게도 어떤 종류의 신성(神性)에 천착하고자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동시에 그 신성에는 신이 부재한다는 사실을, 곧 이것이 신(Dieu) 없는 신성(divinité)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동시에 역설적으로 그러한 신학은 일종의 유물론에 가닿고 있으며 또한 가닿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따라서 이 신성이란 피가 뚝뚝 듣는 고기가 지닌 어떤 육화(肉化, incarnation)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정신의 유물론, 물질의 관념론이라는 사실을.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하나의 질문을 물을 수 있고 또 물어야 한다, 저 세 개의 시각을 향해: 프랜시스 베이컨은 왜 거의 언제나 세 개의 그림을, 세 개의 시각을 보여주는가(그리고 동시에 묻자면, 왜 그는 거의 언제나 이 '셋'으로써 '하나'를 제시하는가)? 답하자면, 증인/목격자의 시선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러나 그 증인/목격자의 시선이 대상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대상과 함께, 틀이 나눠져 있으나 또한 서로 그 경계들이 연결되고 있는 하나의(세 개의) 프레임 안에, 그렇게 하나의(세 개의) 리듬과 운동으로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세 개의 시선, 제3의 시선은 그림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있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바로 그 그림들에 속해 있다. 이에 관해 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세 그림은 분리되어 있지만, 더 이상 서로 고립되어 있지 않다. 한 그림의 틀과 가장자리는 더 이상 각각의 제한적인 통일성(l'unité limitative de chacun)을 가리키지 않고, 세 개의 분배적인 통일성(l'unité distributive des trois)을 가리킨다."(Gilles Deleuze, Logique de la sensation, tome I, Paris: Éditions de la Différence, 1981, p.56) 이 통일적/동일적이지 않은 통일성, 이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셋(하나)을 나는 종합(Synthese) 없는 총체성(Totalität)으로 부르고 또 그렇게 이해하려 한다(우리는 후일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를 다시 읽게 될 것이다, 곧 중독(重讀)하게 될 것이다).

3) 자, 이제, 내가 간절히 원했던, 하지만 당신은 어쩌면 결코 원하지 않았을, 저 소소하면서도 거대한 실망과 절망의 정체가 밝혀졌는가? 3이라는 숫자는, 그 외면적 안정성과는 정반대로, 직선적인 발전의 서사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고, 중심과 주변(좌우)의 균형 잡힌 대칭성을 재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여기서 모든 '신비주의'들을 배격하고 거부하는 또 다른 '신비한' 언어로 이를 표명할 생각이다(그러므로 이러한 표명의 시도는 그 자체로 불가능하며, 그러나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 위에서 또한 일종의 역설적 수행성을 갖는다): 3은 불안이며 안정이다, 3은 안이며 바깥이다, 3은 완성이자 미완이다, 고로 3은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따라서, 이미 언급하고 경고했듯이, 이는 [거의] 종교적인 수론, [거의] 수적인 형이상학의 자리를 연다). 그렇다면 여기서 십자가형을 당한 대속의 희생자가 스스로 자신을 '알파(Α)'이자 '오메가(Ω)'라고 이야기했던 저 이유와 사정이 더욱 분명해지고 명징해지지 않는가(그리고 또한 여기서 저 3이라는 숫자에 대한 내 모든 언설들이 단순히 숫자에 대한 신비주의적 담론으로만 환원될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음이 또한 확실해지지 않는가)? 스스로 '알파'이자 '오메가'이고자 하는 그 말은, 부동의 균형점에 위치한 채 죽어 있는 신화가 되기 위한 단언적 규정이 결코 아니다, 또한 고착되고 퇴행하는 어떤 신학의 정점에 서기 위한 절대적 선언이 결코 아니다. 3은 동요하는 세계를 포착하기 위한, 그러나 그 포착의 행위 자체가 지닌 동요를 또한 자기지시적으로 드러내고 포함하는, 하나의 상징이자 동시에 실재인 것, 곧 상징에 나 있는 결정적 '상처'로서 실재가 지니는 하나의 도식(Schema)이다. 나는 3을 이렇게 형식적으로(그러나 '내용[알맹이]'의 반대말로 상정된 '형식[껍데기]'으로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 자체가 '전부'인 하나의 '형식'으로), 1에서 2에서 3으로의 이행을 이렇게 구조적으로(또한 '순행적 시간성의 직선'이 아니라 '발생적 역사성의 나선'으로) 이해한다. 


  

▷ 빌 비올라(Bill Viola), <낭트 삼면화(Nantes Triptych)>.

4) 이렇게 형식적이고 구조적으로 이해되는 시간성이란 어떤 것인가? 여기 또 다른 세 개의 시각, 그리고 세 개의 시간이 있다. 나는 이 계속되는 시작들 속에서, 새삼스레 자리를 고쳐 잡으며, 이 또 다른 세 개의 시각, 세 개의 연계된 이미지들로부터 다시금 출발할 것이다(그러므로 이 글은, 말 그대로 끝이 없는, 적어도 세 개[이상]의 출발들로 이루어져 있는, 그런 시작(始作)이자 시작(詩作)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빌 비올라가 <낭트 삼면화>라는 영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하는 편리하고 직선적인 시간 분류법이 아니다. 그 '삼면화'는 시작으로 상정된 탄생과 끝으로 상정된 죽음 사이에 어떤 이질적인(hétérogène) 형상을 배치한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빌 비올라의 저 사이-형상의 의미와 무의미를 빌려 이렇게 질문해야 한다: '사이'에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우리는 세 개의 시각과 세 개의 항들 안에서 언제나 하나의 중간이자 중심점으로서의 '사이'를 상정하지 않는가)? 탄생과 죽음 사이에, 마치 어울리지 않게 들어가 있는 듯한, 제자리를 잡지 못한 듯한, 저 중간, 저 형상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진행'으로서의 '중간 과정'인가? 그러나 과연 무엇이 그러한 진행과 과정과 그 지속을 '재현'할 수 있을 것인가? 확정되지 않는 세 개의 시간성,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분류되고 사용되고 있는 삶의 유용한 도구로서의 이 구획된 시간성, 이 세 개의 시각과 시간들이야말로 실로 '세계의 시각/시간'이라는 또 다른 동음이의의 이름에 부합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다시 다른 불가능한 이야기로 이 모든 시작들을 가능하게 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이 아편 같은 '환상'의 시간성을 어떤 유령 같은 '환영'으로 다시 통과하고 관통하기 위하여(그러므로, 다시 보자면, 저 사이의 영상/형상은, 중간도 과정도 이행도 아닌, 어쩌면 말 그대로 하나의 유령이 지닌/지녀야 할 모습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가).


 

▷ 귀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경우: '환영' 혹은 '출현'으로서의 'apparition'.

5) 그러므로 나는 이 '사이-존재'를 환상에 반대되는 하나의 환영으로 받아들인다. 그 '환영'이란, 곧 시작과 끝 사이, 탄생과 죽음 사이에 가로놓인 이 '환영'이란, 또한 어쩌면 하나의 통일성을, 곧 세 개의 시간으로 나눠져 있지만 또한 그렇게 나눠지지 않는 어떤 세계의 통일적 시간성을, 삶과 죽음 사이에서 ─ 앞서 언급했던 들뢰즈의 말처럼 일종의 "분배적인 통일성"을 이뤄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 환영의 의미를 귀스타브 모로의 그림 <L'apparition>을 통해 해석해볼 수 있을 것이다. 살로메 앞에 홀연히 등장한, 그렇게 '다시 돌아온' 세례 요한의 목. 이 세례 요한의 목은 무엇보다 산 것과 죽은 것, 존재와 부재 사이에 놓여 있게 되는 어떤 것, 하여 죽은 것(부재)으로부터 다시 산 것(존재)에게로 끊임없이 다시 '되돌아가는(revenant)' 어떤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세례 요한의 목은 무엇보다 하나의 '환영'이자 '허깨비'(apparition)일 테지만, 그리하여 그것은 무엇보다 한 '유령(revenant)'의 모습을, 되돌아오는 자의 모습을 띨 테지만, 또한 그렇기에 동시에 그것은 결정적으로 하나의 '출현(apparition)'이기도 하다. 이러한 출현의 사건성 앞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나눠져 있는 세 개의 시간성은 새로운 분류법을 원하고 있는 것, 감각적인 것의 새로운 분할 방식을 요구하고 있는 것. 유물론이 단지 경제적이고 물질적인 결정론이나 위계 구조가 아니라 어떤 물질적 관념성과 동시에 어떤 관념적 물질성을 띠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데올로기를 하나의 '환상'이라고 단정 짓기는 쉽지만, 그것을 이러한 '환영'으로써, 이러한 '유령'으로써, 이러한 '사건'이자 '돌발'이자 '출현'으로써 돌파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동시에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경우: 송과선, 제3의 눈(『인간론(De Homine)』의 63번 도판).

6)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하나의 은유로서, 혹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어떤 '사이의 눈'을, 어떤 '제3의 눈'을 상정한다. 데카르트가 추측했듯이, 그리고 한참 이후 조르주 바타유(Georges Bataille)가 집착했듯이, 만약 송과선(松果腺, pineal gland)으로부터 [퇴화되었던] 하나의 눈이 다시 자라나, 이마를 뚫고, 정수리를 뚫고 자라나, 우리가 단지 두 개의 눈을 갖고는 결코 마주할 수 없었던 것들을, 예를 들어 태양과 죽음을 비로소 마주하게 된다면(최정우, 『사유의 악보』, 자음과모음, 2011, 29쪽, 243쪽 참조), 그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완벽히 부재하는,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존재할 수 있는, 또한 그렇게 존재해야 하는 눈이 불현듯 우리의 몸 안으로부터 몸 밖으로 돌출하고 출현한다면? 그러나 이러한 눈의 비유가 단순히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닌, 어떤 중립적이고 간편한 (혹은 간편하게 중립적인) '제3의 길' 같은 것을 전제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송과선 눈에 대한 상상과 추구는 대칭성과 중립성의 담론과 결정적으로 결별한다. 이 제3의 눈이란, 일단 '사이'에 있고 '가운데'에 있는 눈이지만, 그러나 그 자체로 전혀 '대칭적'이거나 '중립적'인 눈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편향적이며 당파적인 눈이며, 또한 무엇보다 그 자체가 단지 한 곳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외눈'인 것. 가운데에서 솟아난 그 하나의 눈은 모든 것을 보는 눈, 곧 편재(遍在)하는 눈이겠지만, 동시에 결코 공평무사한 시선을 뿌릴 수만은 없는, 그런 가장 절실하며 절박하며 치열한 눈, 가장 커다란 각도로 꺾어지고 치우쳐 바라보는 눈, 그 자신이 관찰자이며 목격자이고 증인이지만, 그 눈이 마주할 수 있고 또 마주해야 하는 것들이 명백하다는 점에서, 곧 편재(偏在)할 수밖에 없는 눈이기도 하다. 이러한 은유가 단순히 새로운 수사법을 하나 창안하는 일을 초과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지 눈의 개수가 변하는 상황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 새로운 감성의 정치, 새로운 지형의 미학을 짜 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어떤 개안(開眼)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제3의 눈은 어떻게 열리는가? 아니, 과연 열릴 수 있는가?
 

 

 

▷ 1달러의 뒷면, 모든 것을 보는 눈(All-Seeing Eye).

7) 그러므로 다시금, 이 가장 불가능한 '하나의 눈'이 문제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저 김진숙의 눈, 그가 위에서 아래의 '모든' 풍경들을 목격하고 증언했던 하나의 눈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한 생각한다, 그 자신은 보이지 않고 이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 있[다고 이야기되]는, 그렇게 모든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상정되]는 또 다른 하나의 눈, 파놉티콘의 눈을. 말하자면, 하나의 눈이 멀 때, 그리고 대신 또 다른 하나의 눈이 떠질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눈뜸과 눈멂이 교차할 때,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외눈박이-파놉티콘의 눈을 어떻게 멀게 할 수 있는가? 혹은,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그 전지적 시점의 무능성, 그 무능함의 전능성, 그 거리의 관계성을 우리는 저 폴리페모스의 외눈에 어떻게 마주 서게 할 것인가? 따라서 실은, 우리가 하나의 시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결코 하나가 아니었다.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오디세우스의 시점은, 실은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였으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그는 폴리페모스 앞에서 자신의 이름을 '아무도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어쩌면 이 가장 적나라한 무능성이 우리에게 가장 깊은 힘을, 이 가장 불가해한 익명성이 우리에게 가장 정확한 이름을 부여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나는 묻는 것이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부리부리한 외눈으로 당신을 감시하며 당신에게 관등 성명을 요구하는 폴레페모스가 아니라, 그저 또 다른 '아무개'로서, '아무것도 아닌' 또 다른 이로서, 나는 당신의 이름을 묻는다, 나와 '같은' 이름을 지닌 당신에게, 그런 '아무것도 아닌 아무개'에게, 그러나 동시에 그 '모두'에게, 그렇게 묻는다, 나와 같은 그 이름(들)을 부르기 위해.
 

 

 

▷ 루이스 부뉴엘(Luis Buñuel)과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영화 <안달루시아의 개>의 장면들.

8) 아마도 이러한 복수의 '우리'의 이름(들)을 부르는 이유, 이 이름(들)이 지닌 하나의 눈을 소환하고 요청하는 이유를 묻는 물음에 대해서 나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한 문장을 빌려 대답해야 할 것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쓴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설 또는 오히려 우리가 택한 입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곧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가 아닌 정신이 존재하며, 하나 이상의/더 이상 하나가 아닌 정신이 존재해야 한다(Car ce sera notre hypothèse ou plutôt notre parti pris: il y en a plus d'un, il doit y en avoir plus d'un)."(Jacques Derrida, Spectres de Marx, Paris: Galilée, 1993, p.36 / 진태원 옮김, 『마르크스의 유령들』, 이제이북스, 2007, 41쪽) 우리는 이 '사이'에 복수의 형태로 존재[부재]할 뿐이다, 마치 [하나의] 유령(들)처럼. 아마도 이러한 '탈존재론화'의 모습이 바로 마르크스에 대한 데리다의 탈구성/해체가 목표로 하는 지점일 텐데, 아마도 또한 이렇듯 '탈물질화'하는 해석의 시도야말로 '속류' 유물론이 아닌 '진정한' 유물론, 곧 존재론적이고 실체론적인 유물론이 아닌 유령적이고 해체적이며 전복적인 유물론을 구성해줄 것이다(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로 바타유의 저 '낮은 유물론(bas matérialisme)'을, 곧 그가 그렇게 명명했으나 결코 그 이름으로 체계화하지는 않았던 '이질학(hétérologie)'의 시도를 떠올린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기존에 존재하는] 존재론(ontologie)에 대비해 [도래하고 있는/되돌아오고 있는] 유령론(hantologie)이라는 새로운 이름과 새로운 분할 방식을 제기하는 근본적인 이유일 것.

9) 하여 나는 이 '유령 이야기' 앞에서 쉼 없이 절멸의 문제를 묻는다. 아마도 우리는 계속해서 절멸할 테고 또한 절멸시킬 것이다, 그러나 순간으로, 그 매순간에서 발현되고 출현하는 하나의 유령 혹은 허깨비 같은 의지로, 오직 바로 그 의지로서/써만, 가장 순간적으로, 유한하게, 그러나 동시에 바로 그 유한한 순간 안에서, 찰나적으로, 매번, 무한하게, 끊임없이. 아마도 절멸은 그 자체로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성 위에서 우리는 절멸 그 자체의 가능성을 꿈꾸고 실행하며 다시금 실패한다, 반복한다(그렇다면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베이컨의 저 <십자가형> 삼면화의 한 패널이 어째서 나치(Nazi)를 그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슬쩍 예감해 보게 되는 것, 따라서 이렇게 실패하고 반복되는 절멸에의 의지란 'revolution'과 'final solution'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채 위태로운 경계의 줄타기를 감행하는 어떤 '사이-존재'의 의지에 다름 아닌 것). 여기서 나는 다시 나의 저 예의 선택 가능한 듯 보이는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환기하고 반복한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는 선택하고 있으며 또한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획책하는 '자유', 그 소위 '자유로운' 선택의 테제로부터 벗어나서, 말하자면,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감시한다고) 말하는 저 외눈박이에 맞서, 역시나 모든 것을 바라본다고(목격하고 증언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눈, 단 하나의 눈을 선택하는 것.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하나를 '초과'하는, 더 이상 '하나가 아닌', '하나 이상의' 눈을, 그 선택 불가능한 선택지를 선택한다는 것. 이 모든 실천들이 아포리아에 봉착했음을 고지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실천의 아포리아들을, 아포리아(들) 그 자체를 선택하고 수행하며 실천한다는 것. 마치 예리한 면도칼로 하나의 눈을 자르듯, 그렇게 눈을 감듯, 하지만 불가능하게도, 그렇게 또 다시 다른 눈을 뜨듯.


 

▷ 2011년 7월 28일 저녁, 명동 3구역, 카페 마리(Mari)에서: 선언문을 낭독 중인 유채림 소설가, 심보선, 진은영 시인(사진: 람혼).

10) 그리하여 이렇게 뜬/감은 또 다른 하나의 눈은, 아마도 세 개[이상]의 시각을 가질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우리는 우리 각각의 삶에 대해, 각자의 생활방식에 대해, 각자의 호구지책에 대해, 모두 제3자일 수밖에 없으므로(그러므로 우리의 법 체계는 얼마나 세심하고도 감사하게도 '제3자의 개입'을 원천적으로 금지해주고 있는 것인지, 얼마나 섬세하게도 이 모든 개인적인 영역들을 그리도 잘 보존해주려고 애쓰는지!). 우리 모두의 문제인 '공공성'의 영역은 왜 언제나 소위 가장 '사적'이며 '전문적'인 영역으로 그렇게 축소되고 환원되고 있는가? 개별적인 사유 재산의 권리와 전문성의 추구라는 일견 매우 정당하고 공평한 것으로 보이는 하나의 미학이 어떻게 우리를 공공성의 영역으로부터 격리시킨 채 자본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장 충직한 노예로 만들고 있는가? 그러므로 나는 정체성과 주체화와 공공성에 관한 이 하나의 명제를 여기서 다시금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제3자이고, 또한 그러한 제3자이기에, 우리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그러한 아무개이며, 그래서 또한 우리는, 모든 것들이 서로에 대해 관계 맺고 있는 모든 이, '거리의 관계성'을 지닌 모든 것이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이다.

11) 만민을 호혜와 평등으로 대한다고 하는 시혜적이고 인류애적인 의식이 중요한 것도 아니고, 범윤리적이고 초도덕적인 세계관이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단언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국위를 선양하는 민족주의자(nationalist) 따위가 아니라 국가 자체로부터 벗어나는 공산주의자(communist)가 되어야 하며, 반대로 ─ 또는 마찬가지로 나는 또한 세계화 시대에 가장 적합한 세계시민(cosmopolitan) 따위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대에 가장 시대착오적인 국제주의자(internationalist)가 되어야 한다(그리고 여기서 는 이 문장의 주어를 우리로 치환해 본다, 이 가장 쉽고도 어려운 하나의 주어, '우리'로). 따라서 이 '우리'가 하나의 눈을 가질 수 있다면, 그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보지만 동시에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눈이 될 것이다. 이 역설을, 가장 적극적으로, 마주할 수 있을까? 이 하나의 눈이, 이 하나의 선택적 시점이, 선택 불가능하면서, 그렇게 필연적으로 선택 가능할 수밖에 없다는 것, '우리'라고 명명된 이 모든 아무개들인 '나'는 과연 이 역설적 선택의 지점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나와 당신 앞에 놓인 하나의 눈, 하나의 질문이다. 그 눈과 그 질문은 무엇보다 무언가를 바라보고 목격하는 증인의 시점이지만, 그러나 이 증인은 그림의 틀 바깥에서 그 그림의 대상들을 단지 관조할 수 있는 외부적 존재가 결코 아니다. 우리는 모두 제3자인 증인이자 목격자로서 이 그림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한다, 곧 그렇게 편재하듯 부재한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러한 편재와 부재의 불가능성 안에 어떤 가능한 힘이 있을 것이다.

12) 바로 이 불가능성이, 단순히 동일한 정치적/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것으로 전제된 사적 개인과 집단들의 연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불가능한 연대를, 제3자들만의 연대를, 아무개이자 동시에 모두인 사람들의 연대를 가능케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게다가 그것이 가장 '미학적'이라는 의미에서, 곧 아직 주체로 이름 불리지 못한 '아무개'들의 주체화 과정을 현재 감각적인 것의 분할 방식 안으로 가져온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바로 그런 의미에서만, 또한 가장 '정치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세 개로 나눠진 시각들은, 세 개로 조각난 틀들은, 우리에게 이러한 연대에 내기를 걸 것을 요청하고 종용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연대는, 그것이 '불가능한 우정'이라는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 가장 나약하고 불안정한 이유 때문에, 아니, 그것이 바로 그렇게 가장 제3자적인 시각들이 구성하는 어떤 '총체성'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에,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은 아닌가? 자,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저 모든 기독교도들을 실망시키고 절망시킬 또 하나의 욕망을 품어 보는 것이다: '나중에'라고 말하지 말라, '이후'는 없다, 당신이 꿈꾸고 있을지 모르는 저 고진감래(苦盡甘來)의 황홀한 약속의 미래(futur)는, 없다. 따라서 '지금, 여기(ici et maintenant)'를 사유하고 실천한다는 것은, 단순히 현재주의나 현실주의를 올곧게 추종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속해서 도래하고(à venir) 있는 시간과 장래(avenir)를 끊임없이 인식하고 포착하고 수행하는 우리의 저 불가능한 미학적 태도, 우리의 저 불가능한 정치적 연대, 우리의 저 불가능한 이론적 실천, 바로 그 모든 것들의 가능성들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무엇을 '절망'이라고 부르고 무엇을 '희망'이라고 부를지는, 이로써 매우 자명해지지 않는가(또한 왜 어떤 이들은 단순한 버스 몇 대를 '희망'이라고 부르며, 반대로 또 어떤 이들은 똑같은 버스들을 '절망' 또는 '훼방'이라고 부르는지, 이로써 매우 명백해지지 않는가)? 하여, 나는, 당신을, 바라본다, 하나의 시점으로, 두 개의 시선을 맞세우고, 세 개의 시각을 증언하며, 그렇게, 마주보듯, 어쩌면 그 너머를 보듯.

襤魂, 合掌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사랑 2011-09-18 1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오랜 기다림의 시작?인가요. 심신을 추스렸다니 선생님의 분발을 기대해봅니다.

2011-11-19 09: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0 0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20 2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2)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2. 두 개의 시선: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는 눈(들)
 

1) 그러나 아무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 되기란 어떻게 가능한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계속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드는 동어반복적 재생산의 장치(파놉티콘), 그 유일무이한 절대적 시점으로부터 벗어나, 위에서 아래를, 아래에서 위를, 그렇게 함께 보는 또 다른 하나의 시점은, 그 또 다른 유일무이한 (그러나 '절대적'이지 않은) '전능한 무능'의 시선은, 그 '거리의 관계성'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앞서 밝혔던 하나의 알레고리를 통해 말하자면, 오디세우스와 동류(아무개)인 우리는, 어떻게 저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을 찔러 '눈멀게' 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침소봉대(針小棒大)와는 정확히 반대되는 의미와 몸짓으로, 그렇게 '축소'하여 빗대자면, 마치 '양식화'하듯 비유하자면, 이는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거나 낙타를 바늘 구멍 안으로 빠져나가게 하는, 실로 '마법'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다시 말하자면, 마지막으로 묻자면, 나와 당신은 이 하나의 근본적 '불가능성'을 어떻게 마주하여야 하는가? 하여 나는 이번에는 두 개의 이미지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주 예전부터 몰래 짝사랑해 오고 있는(그런데 '짝사랑'이란 언제나 '몰래'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일 텐데, 그리고 이미 오래 전에 죽은 이가 나의 사랑에 응답할 리가 만무하므로, 나의 이 짝사랑은 그렇게 '불완전'하기에 무엇보다 가장 '완벽'한 것일 텐데, 게다가 나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직 17세기 이탈리아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는데)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가 그린 두 장의 그림, 부재하면서 동시에 존재하는 두 장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 카라바조가 마태오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2) 이 두 장의 그림은 모두 마태오(Ματθαίος)가 그의 복음서(마태오 복음서)를 기술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그리고 있음에도 이 두 그림은 서로 전혀 다른 그림이다. 이 두 그림 사이의 '결정적' 차이를 열아홉 살의 내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책은 에른스트 곰브리치(Ernst Gombrich)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였다. 이 그림들에 대한 그의 문장을 읽으면서 볼을 타고 뜨겁게 흘러내리던 그때의 눈물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왜 나는 시나 소설이 아니라 소위 '이론서'를 읽을 때 엄청난 눈물을 흘리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내게 개인적으로 하나의 '변태적 신비'이지만, 이러한 '신비'는 단순히 내가 지닌 어떤 '변태적' 취향만으로는 [그렇게 쉽게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을 것이란 묘한 확신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여 곰브리치의 그 문장을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열아홉 살 때의 열정을 그대로 추억하며, 하지만 동시에 그때와는 전혀 다르게 읽히기를 또한 희망하며: "사실상 성서에 나오는 사건들을 마음속에 전혀 새롭게 그려보기 위해 비상한 정열과 주의력을 가지고 성경을 읽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미술가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이 과거에 보아온 모든 그림들을 잊어버리려고 노력했으며, 아기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목자들이 그를 찬미하러 찾아들고, 한 어부가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하는 당시의 정경이 과연 어떠했을까 하고 상상하려고 노력했다. 오래된 성경을 아주 참신한 안목으로 해독하려는 위대한 미술가들의 그러한 노력이 분별없는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분노케 한 경우가 수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물의의 전형적인 예로서 1600년 전후로 작품 활동을 한 매우 대담하고 혁명적인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있다. 그는 로마의 한 교회 제단을 장식하기 위한 성 마태의 그림을 부탁받았다. 그가 받은 주문은 성 마태가 복음서를 기술하고 있는 장면과, 그 복음서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을 보이기 위해 그가 글을 쓸 때 영감을 불어넣어주는 한 천사를 그려넣는 것이었다. 매우 상상력이 풍부하고 타협을 거부하는 젊은 화가 카라바조는 한 늙고 가난한 노동자이며 단순한 세리(稅吏)가 갑자기 책을 저술하려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을 그리기 위해 깊이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대머리에 먼지 낀 맨발로 커다란 책을 어색하게 붙들고 있으며 손에 익지 않은 필기(筆記)를 하기 위해 애써 이마를 찡그리고 있는 <성 마태>[첫 번째 그림]를 그렸다. 마태의 옆에 있는 젊은 천사는 방금 천상으로부터 날아와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처럼 그 노동자의 손을 우아하게 인도하고 있다. 카라바조가 이 그림을 제단에 모실 교회로 가져가자 사람들은 이 작품 속에 성 마태에 대한 경의가 들어 있지 않다고 분개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카라바조는 성 마태를 다시 그려야 했다. 이번에는 그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는 천사와 성자의 모습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엄격하게 준수했다[두 번째 그림]. 그 결과로 나온 작품은 카라바조가 생생하고 흥미있게 보이도록 노력했으므로 지금도 명화에 속하지만, 우리에게는 이 작품보다는 첫번째 그림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인다."(곰브리치, 『서양미술사(上)』, 열화당, 23-24쪽)

3) 하여 나는 당신과 함께 다시 저 두 개의 그림, 두 개의 시선을 마주 바라본다. 그림이라는 것에 대해, 곧 하나의 '재현 방식'[에 불과한 것]에 대해 우리는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도덕적' 술어의 형식들을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말하게 만드는 힘, 어떤 재현이 더 정직하고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힘의 효과는 무엇인가? 이 일견 가장 '도덕적'으로 보이는 물음들은 사실 가장 '미학적'인 질문들이며, 또한 일견 이 가장 '미학적'으로 보이는 질문들은 오히려 가장 '정치적'인 물음들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점이 가장 예민하게 인식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무엇이 더 '진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 진리의 물음이 아니라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의 물음이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의 정치란 바로 그러한 미추(美醜)의 분류법과 판단법 위에 위치하고 있는 지극히 감성적이며 감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카라바조의 저 두 그림, 두 시선을 마주하며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하나의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게다가 그 진실 역시 '구성된' 진실인데) 치열하게 자신의 작업에 임했던 한 예술가의 영혼이라기보다는, 왜 당시 사람들은 저 첫 번째 그림을 거부했는가, 그들은 무엇을 더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무엇을 더 옳다고 생각했는가 하는, 미학-정치의 고고학과 계보학이라는 문제이다. 천사의 손에 이끌려 어물쩡 어설프게 펜을 잡는 마태오의 어리어리한 모습은 어째서 그 시대의 그들에게 전혀 아름답지도 옳지도 않다고 여겨졌는가, 그리고 그 같은 모습이 어째서 이 시대의 '우리'에게는 어떤 시작의 설렘을 간직한 지극히 진실하고 정당하며 심지어 '아름다운' 것으로 보이는가? 우리가 관통해야 하는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4)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마치 여담처럼, 하나의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다시 저 두 시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아주 슬픈 이야기로 시작할 생각이다(그러므로, 당신은 각오해야 한다, 슬퍼할 것을 미리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슬픈' 이야기 앞에서 오히려 전혀 슬퍼하지 않을지도 모를 당신 자신에 대해,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 중에 첫 번째 것이 흑백 사진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는 데에는 아주 슬픈 이유가 있다. 그 그림이 컬러 사진으로 찍힐 기회를 갖기 전에 전쟁 중 불타서 파괴되어버렸기 때문이다(하여, 넘겨짚자면, 우리의 시대는 만약 '우리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는 시간성이 있다면 바로 우리 시대에 가장 결정적일 아름다움을, 미리, 앞서, 파괴하는 기이한 시대일지도 모른다). 왜 두 번째 것이 아니라 첫 번째 것이 파괴되[어야만 했]었을까: 나는 이렇게, 가정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되는 역사를 향해, 실로 지극히 가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질책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을 향해? 누구를 향해? 역사를 향해? 가정 자체를 용납하지 않는다고 이야기되는 견고한 하나의 역사, 대문자로 쓰인 역사(History)를 향해? 그 역사라는 거대서사, 그 거대한 바퀴에 매달리고 짓이겨지는 무수한 벌레들로 비유되곤 하는, 우리들, 아무개들, 아무것도 아닌 자들을 향해? 나는 인격적 실체로서의 신(神)을 믿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러나 분명 '신적 질서'에 관한 일종의 '믿음'은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텐데(또한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이러한 의미에서만, 나는 내 자신을 '무신론적 신학자' 혹은 '종교적 유물론자'라는 자기-모순적인 언사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일 텐데), 이는 분명, 곰브리치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이른바 "분별없는 사람들"에 대한 신의 경고이자 분노라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생각하고 믿는 것이 나의 종교-유물론적 양생술, 무신론적 신학의 건강법이기도 하다.

5) 진정한 '여담'이란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술사'라는 것은 하나의 개념이다. 그리고 개념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우리 모두 목격하고 주지하다시피, '미술사'라는 개념은 '미술'과 '역사'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다(마치 '세계문학'의 개념이 '세계'와 '문학'이라는 두 개의 개념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처럼, 그렇게 당연한 것처럼 보이지만 또한 전혀 당연하지 않은 것처럼). 문제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사가 일견 선사시대 미술부터 현대의 미술까지를 아우르고 또 그렇게 아우를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미술'이라는 개념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또한, 말할 것도 없이, 그 '시대'에는 '역사'라는 개념조차 불분명한 것으로 남아 있다). 이것이 바로 미술사라는 체계의 허상이고 빈틈이다. 다시 말해서 선사시대에는 우리가 현재 '미술'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사'라고 부르는 것도 없었다(따라서 흥미로운 것은, [문헌화된] 역사 이전의 시대를 의미하는 '선사(先史)시대'가 소위 '역사'라는 [문헌적] 술어와 체계 안으로 포섭되고 포착되는 몸짓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그것들을 우리 시대만의 역사적인 개념인 '미술(fine arts)'로써 아우르고 그렇게 쉽사리 '미술사'라는 근거 없는 역사 속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상정한다. 그러므로 사실 미술사는 바로 자신의 존재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 조건 자체, 곧 자신의 서술 방식과 방법론에서부터 일종의 불가능한 문제를 끌어안고 있는 것(따라서 미술사 또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이다). 이 불가능성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이 있다: 하나는 그 불가능성을 '없는 문제'로 덮으며 완전한 체계와 닫힌 역사를 꿈꾼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그 자신의 존재조건이자 가능조건 자체인 그 불가능성을 열어젖힌다. 미술사의 대표적인 '교과서'로 오랜 시간 인정받고 있는 잰슨(Janson)의 『미술사(History of Art)』는 바로 그러한 미술사의 아킬레스건, 그 불가능한 가능조건을 아무런 회의 없이 그대로 안고 가는 책이다. 그런데 곰브리치 '미술사'의 원제는 'Story of Art'이다. 곰브리치 또한 이미 언급했던 그릇된 전제로부터 출발하는 미술사의 서술 방식으로부터 크게 자유롭지는 못하다(그러나 우리는 이후 아비 바르부르크(Aby Warburg)와 관련하여 다시 이 문제로 돌아올 것이다). 하지만, 다소 부박하게 말하자면, 그는 역사(History)라는 체계로 도배하려 하지 않고 단지 담담히 이야기(Story)를 전해줄 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 두 개념의 차이는, 어쩌면 카라바조의 저 두 개의 마태오 그림들 사이의 차이, 그 두 개의 시선들 사이의 차이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넘겨짚는다, 가정이 불가능한 곳에서, 그렇게 가정적으로, 확언한다.

 

 

▷ '예술작품'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얼굴을 조각한 러시모어(Rushmore)산과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새겨넣은 바위가 있는 금강산, 이 두 개의 사진, 두 개의 시선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본다. 이 두 개의 '예술작품'들은, 양각과 음각이라는 조각 방식의 차이를 제외한다면, '미학적'으로 서로 어떤 차이를 지니는가(최정우, 『사유의 악보』, 자음과모음, 2011, 500-501쪽 참조). 예를 들어, 어떤 이가 금강산 바위에 붉은 글씨로 새겨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자연에 대한 만행'이라고 비난하면서 러시모어산에 웅장하게 조각된 미국 대통령들의 얼굴에는 침을 뱉지 않는 이유란 과연 무엇인가. 다시 묻자면, 이 둘 중에서 무엇이 더 "정직하고 진실해" 보이는가, 아니, 무엇이 더 '아름답게' 보이는가.

6) 이 두 개의 시선은, 말하자면, 그 각각, 모든 것을 볼 수 없는 눈(들)이다. 아마도 그리하여 우리는 두 개의 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과 진화에 대한 목적론적이고 인과론적인 전제 때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라는 원인의 문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또는 '그럴 수 있기 위해서'라는 목적의 어법으로 이야기되는 모든 것들 때문에 우리가 두 개의 눈을 갖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여기서 완벽한 아름다움의 동의어로 상정된 '대칭성'의 테제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곧, 왜 하나의 절대적인 시점에서 벗어나 두 개의 상대적인 시선으로 내려가는 길이 결코 대칭성에 대한 소위 '보편적'이고 '균형적'인 추구와는 다른 것이 될 수밖에 없는가를 밝히고 물어보고 있는 것. 조화와 비례에 대한 심미적/미학적 태도에 기반한 대칭성은 그것이 어떤 진리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오히려 대칭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미학적 태도 자체가 우리의 진리와 정치를 구성하는 것이다. 나와 당신은 다시 카라바조의 두 그림을 함께 바라본다. 저 두 개의 시선은, 그 시선들이 각각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는 바로 그 불완전성과 불가능성 때문에, 오히려 전체에 대한 비-전체(pas-tout)를 가능케 한다. 하여 저 두 개의 시선이란, 둘 중의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 가능한' 대상들이 아니라, 우리가 그 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고 왕복해야 하는 두 개의 극, 그 자체가 일종의 가능조건이 되는 불가능한 하나의 극성(polarity)이다. 우리는 바로 이 두 극, 하나의 극성 안에서 가장 불완전하게 완전하며 매순간 그렇게 미완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완성한다. 그러므로 양생술과 건강법에 대한 나의 말들이 단순한 농담이나 여담은 아니었음이 여기서 [쑥스럽게] 다시 확인되는바, 어쩌면 나는 그런 농담과 여담들로 나의 진담과 본심을 토로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것도, 도래할 것으로 기대되는 다른 어떤 시간에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도래하고 있는 중인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우리의 두 눈은 모든 것을 바라볼 수는 없는 눈(들), 일견 대칭적이고 균형적으로 보이는 그 두 개의 눈은 실로 당파적이고 편파적이며, 그렇게 당파적이고 편파적인 불균형 위에 설 때에만 우리의 두 눈은 비로소 바로 그렇게 '두 개'로 기능한다. 그리고 우리가 이 두 개의 시선을 실제로 '선택'하는 지점과 방법은, 이렇듯 가장 불균형적인 어떤 선택 불가능성의 지점, 가장 생물학적인 비유를 통해 오히려 가장 물질주의적이지 않은 어떤 곳에 가닿는, 역설적 유물론의 방식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1)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하나의 시점: 모든 것을 보는 눈    

 

▷ 모든 것을 보는 첫 번째 눈: 타워크레인 위에서 이불 빨래를 널고 있는 김진숙.
(ⓒ<경향신문>, 정지윤 기자)

1)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 사진에 덧붙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지면서: 저 높은 곳(위)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아래)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나는 이 물음을 통해 전지적 능력을 지닌 신(神)의 시점을 경외롭게 전제하거나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 투쟁'을 한 지 174일째가 되었던 지난 2011년 6월 28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6월 10일 희망 버스가 올 때 용역을 투입해서 조합원들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이후로 지금까지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프레시안> 기사 「"회사에 버림받고 노조에 버림받아 죽고 싶은 생각뿐"」 참조: http://j.mp/jUkFsT) 이 말들의 마지막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저 마지막 문장을 진하게 강조한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저 위에서 이 아래의 그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싶어진다, 그 위에서 저 아래의 모든 움직임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이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란 또한 얼마만큼의 절대적 고독을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며, 또한 그렇기에, 알고 싶어한다.

2) 그러므로 이러한 어떤 '무지'에서 촉발되고 또 그에 바탕하는 이 '선망 아닌 선망'이란, 신의 시점을 갖고 싶다는 전능함에 대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것, 그러한 전지적 시점에 대한 갈망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여전히 '현재적'인 소설일,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불행한' 소설이기도 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한 제목을 빌리자면,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선망 아닌 선망은 이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 위의 전지적 시점이 지닌 어떤 절대적 고독감, 그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 지닌 절대적인 무력감을 '선망'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왜 이러한 감정을 '선망 아닌 선망'이라는 역설적 언어로 표현했는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우리는 여럿이다(이러한 수적(數的) 대비는 [단순히 '연대의 열정과 포부'를 표현하는 일 외에]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가닿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아래의 우리들을 바라본다(이러한 위계적 대비는 [단순히 '전능한 무력감'을 노출하는 일 외에] 또한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 아래의 우리가 그에게 개미들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저 위의 그가 우리에게 한 마리 개미 같은 존재일까(그리고 이 생물적 은유의 물음은 [단순히 '존재의 절대적 왜소함'을 비유하는 일 외에] 또한 과연 무엇을 뜻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그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하게도', 그저 이불 빨래를 널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저 위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살아가야만 하는 것. 삶은 저 위에서도, 아래의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저 높은 전지적 장소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어떤 것, 삶은 저 위에서라고 해서 결코 유예되거나 지연되거나 면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라는 문장이 전해주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의 가장 중요한 정체는 바로 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지속성이며, 또한 그가 저 위에서 고독하게 맞서 싸우는 동시에 또한 바로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끈질긴 삶의 지속성인 것. 이러한 삶의 성격을 우리가 새삼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전도된 전지적 능력 때문, 곧 그 능력이 전지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단순히 '신적(神的)'일 수만은 없는, 바로 저 무능의 전능성 때문이다.  

 

▷ 모든 것을 보는 두 번째 눈: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의 설계도.

3)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익숙한' 전능의 시점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단 하나의' 시점이, 저 크레인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이 시점은 일견 위계적 상하를 나누지 않는 수평적인 시점인 듯 보이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위와 아래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말하자면, 그 힘은 '알아서 기게' 만드는 힘이다). 게다가 이 단 하나의 시점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시대 자체를 규정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또 다른 절대적 시점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눈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중심부에서 모든 주변부들을 일별하고 감시하는 또 하나의 전지전능한 시점인 것. 그 시점은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의 시점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구상했던 이 파놉티콘, 곧 '일망(一望) 감시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감자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영속적 상태로 이끌려 들어간다. 비록 감시 작용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영속적이 되도록 하며, 또한 권력의 완성이 그러한 감시가 실제로 행사되는 일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권력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한 기계가 된다. 요컨대 수감자 스스로가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 '일망 감시 장치(le Panoptique)'는 '봄-보임(voir-être vu)'의 짝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기계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aris: Gallimard, 1975, pp. 202-203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나남, 2003[개정판], 311-312쪽, 번역은 일부 수정) 파놉티콘은 그 말 그대로 '모두를 볼(pan-opticon)'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감시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시선만을 느낄 뿐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감시의 장치(dispositif)인 것.

4) 이러한 파놉티콘의 시점과 기능은 통상 권력 작용의 내면화로 해석되고 또한 그러한 점에서만 강조되거나 반대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내면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흔히 논의되듯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또한 바로 그 스스로가 저 권력적 시선의 전달자이자 담지자이자 실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근대적 권력의 작용은 가장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 그러나 이 개인은 어떻게 '그러한 개인'이 되는가? 다분히 자기-관음증적 시점을 통해, 곧 가장 뒤틀린 나르시시즘의 시점을 통해, 다시 말해 일종의 폐안(閉眼)에 기초한 또 다른 개안(開眼)을 통해, 눈멂에 의한 눈뜸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내면화는 소위 권력자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들에게 가하는 인격화된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력적 시선의 작용이 권력을 실행하는 자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를 명확하게 가르는 표층적 '정치'와 표피적 '권력'의 층위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푸코가 파놉티콘이 지닌 이러한 '시선'의 성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권력을 실행하는 자가 권력이 적용되는 자에 비해 갖는 어떤 실체적인 우월성이 결코 아니다. 그 시선은 장치와 구조의 효과이다. 이 기계-장치의 바깥은 없으며, 그것을 '위'에서 조종할 수 있는 메타적인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푸코는 지나치듯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기야 이 건축적 장치의 한복판에 감금되어 있는 셈인 관리자 역시 이 장치와 연결된 부분적 존재가 아닐까? 전염이 확산되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한 의사나, 서투른 관리를 하는 감옥이나 작업장의 관리자는, 전염병이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일망 감시 장치의 경영자는 말한다. "나의 운명은 내가 고안할 수 있었던 모든 속박에 의해 그들(수감자들)의 운명과 함께 묶여 있다." 일망 감시 시설(le Panopticon)은 일종의 권력의 실험실로 기능한다."(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 206 /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316-317쪽, 번역은 일부 수정) 이 부분은 파놉티콘의 정의와 기능에 대한 푸코의 가장 유명한 언급들에 비할 때 우리가 결코 자주 인용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한다. 크레인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난감하고 착잡한 마음을 품었던 김진숙의 저 시점과, 주변부의 모든 것들을 감시하며 정작 그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는 파놉티콘 중심부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괴리에 주목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둘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과 차이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감성적 거리와 대립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5) 왜 이 둘은 구조적으로 상동적인가?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는 '일망(一望)'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 둘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가? 파놉티콘의 중심부는 모든 것을 보면서 그 자신은 보이지 않는 반면, 우리 모두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다시 묻자면, 우리는 과연 그를 바라볼 수 있는가, 그의 모습과 정말로 마주할 수 있는가). 이 둘의 차이란 정치적인 감성의 차이가 아니라 감성의 정치라는 차이의 모습을 띤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정치를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미학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 이 두 미학적 시점은 공히 '모든 것을 보는 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파놉티콘의 시점은 그 자신은 마치 '중립적'으로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흩뿌리며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체를 관음증적 주체로 만드는 반면, 크레인 위의 시점은 그 모든 아래의 것들을 그저 관조할 수만은 없는, 위의 눈과 아래의 눈들이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만약 신의 시점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러한 시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신의 시점이란 이 둘 중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아마도 답할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아마도 분명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한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이 두 개의 선택지가 마치 '선택 가능한' 것처럼 말했지만, 이 선택은 정말로 그 자체로 '선택적'인가? 우리는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선택 가능한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

6) 따라서 우리는 선택이 자유로운 두 가지 미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나는 여기서 김진숙이 올라가 있는 저 크레인 자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겠다는 사측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미학' 위에서 가능했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저 크레인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바다 쪽으로 옮기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한겨레> 기사 참조: http://j.mp/oYdoZP) 그러한 발상을 떠올리게 한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는 미학적 의식과 무의식은 무엇인가? 감시할 수 없는 것, 오히려 모든 아래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그 자신 역시 아래에 의해 보여지는 단 하나의 눈, 단 하나의 시점을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 바다 쪽으로 보내서 그 역시 아래를 내려다 보지 못하게 하고 아래의 사람들 역시 그 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곧 저 위와 이 아래의 모든 '거리의 관계성' 자체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은 말 그대로 단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 비록 그 눈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중심, 공동화된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자신 외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다른 눈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아래를 볼 수 없는 위와 위를 볼 수 없는 아래는 서로에 의해 잊힌다는 것, 그러한 망각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시하고 규율하겠다는 것.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오히려 저 파놉티콘의 눈에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취약한 하나의 결정적 약점이 생기지 않는가? 마치 오디세우스에 의해 박탈당하는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처럼. 오디세우스 스스로가 폴리페모스에게 들려줬듯, 그는 '아무도' 아니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도, 그 아래에 있는 우리도, 파놉티콘의 시점에서는 정말 '아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썼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Ich bin nichts, und ich müßte alles sein)."(Karl Marx, "Zur Kritik der Hegelschen Rechtsphilosophie, Einleitung", Marx Engels Werke, Band 1, Berlin: Dietz, 1981, p.389 / 『칼 맑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1권, 박종철출판사, 1991, 13쪽) 우리는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모든 것이 되고, 또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댓글(2)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달사르 2011-08-07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점, 시선, 시각. 눈이 매개체지만, 셋은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듯한 소제목들입니다. 그 첫번째인 하나의 시점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그네들은 왜 저 높은 곳에 있는 김진숙을 끌어내리지 못해서 안달일까, 심지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려고 할까 궁금했었는데 유일해야 의미가 있는 파놉티콘 이야기를 읽고 나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파놉티콘이란 개념은 너무 무시무시한데 얼마전 슬프게 읽었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이런 개념이 들어 있는듯해서 서늘해집니다.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김진숙의 시점과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보는 다수의 눈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의 관계성이란 말에 작은 희망의 씨앗이 있는 것인가..생각해봅니다.

람혼 2011-09-11 16:33   좋아요 0 | URL
달사르님, 제 글의 결을 너무 섬세하고 꼼꼼하게 읽어주셔서 어떻게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바로 그 '거리의 관계성'이야말로 제가 희망 아닌 희망을 걸게 되는 정확한 지점입니다. 그 작은 희망을, 커다란 내기를, 함께 걸어주셔서 깊이 감사드립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 7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