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Band 1, Mainz: Schott, 2007.
▷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Band 2, Mainz: Schott, 2007.
György Ligeti, Eckhard Roelcke, Träumen Sie in Farbe?, Wien: Zsolnay, 2003.


3)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는, 나를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모두 알고 있다시피,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가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작곡가임에 변함이 없다(리게티에 관해서는 일전에 두 개의 짤막한 글을 쓴 바 있는데, 리게티에 대한 간략한 소개(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39)와 그의 두 작품에 대한 분석(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61)이 그것). 이 책의 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어 2007년에 리게티가 쓴 글을 모두 모은 그의 '전저작집'이 두 권으로 출간되었다. 거의 악보만을 전문으로 출판하는 쇼트 출판사에서 나온 '활자본'이라 오히려 생경할 정도였는데, 1권의 압권은 '물론' 이른바 '신음악(neue Musik)'에 관한 그의 가장 '첨예한' 글들을 수록하고 있는 1부의 2장일 것이다. 「음악적 형식의 변화들(Wandlungen der musikalischen Form)」, 「오늘날의 음악에 있어서 공간의 기능(Die Funktion des Raumes in der heutigen Musik)」 등의 논문들은 작곡가 리게티가 지닌 '음악미학자' 또는 '음악이론가'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또한 1권에서는 리게티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던 '같은 국적의' 작곡가 벨라 바르톡(Béla Bartók)에 대한 글들(1부 4장)ㅡ바르톡과 리게티에게 공통의 문제의식으로 작용하고 있는 저 '민족성(ethnicity)'을 떠올려보라ㅡ, 그리고 불레즈(Boulez) 역시 하나의 전범으로서 연구하고 '숭배'했던 안톤 베베른(Anton Webern)에 대한 글들(1부 5장)도 찾아볼 수 있다. 2권의 백미는 리게티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썼던 코멘트들을 모아놓은 6부일 텐데, 특히나 음악적이고 철학적인 '사유'가 고도로 응축된 리게티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데에는 그 자신의 코멘트만한 것이 없다는 점에서 또한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일전에 리게티를 소개하는 글에서도 잠시 그의 작품 세계 입문에 유용한 책들을 몇 권 거론했었지만 2003년에 나온 위의 대담집(에크하르트 뢸케(Eckhard Roelcke)와의 대화) 또한 일독을 추천하는 바이다. 음악과 음향이 지닌 '색채적'이고 '시각적'인 특성에 가장 민감했던 작곡가들 중의 하나였던 리게티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자리.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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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 정도 미뤄 두었던 2007년의 책 정리 글 '삼부작'의 마무리를 이제서야 짓는다. 최근 몇 편의 서평들을 정리해 집필할 생각으로 본의(!) 아니게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몇 가지 잡다한 주제의 많은 책과 글들을 분류하고 재검토하게 되었는데(단적인 예를 들자면, 이 방에서는 벤야민(Benjamin)을 읽었고, 저 방에서는 무페(Mouffe)를 읽었으며, 그 방에서는 데리다(Derrida)를 읽고, 지하철에서는 트로츠키(Trotsky)를 읽고 있었다), 이제는 예전보다 성격이 많이 느긋해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순간 돌아보면 '원점'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2008년에는 그러지 말자고, 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작업해보자고, 그렇게 굳게 다짐해본다. 굳게 다짐해보지만, 작심삼일이 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면, 편리한 자기기만의 환상조차 버리고 나면, 저 '예상된 실패'를 머금은 다짐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신년의 다짐이란 어쨌든 '다짐'이라는 형식으로서는ㅡ어쩌면 그러한 형식으로서만ㅡ의미와 의의가 있을 것이라는 구차한 변명 한 자락을 슬쩍 흘리며, '강박'과 '반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신년 덕담처럼 진부하고 남루한 질문 한 자락을 다시금 첨부해둔다. 올해 말에는 이 글을 다시 읽으며 즐거운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외국 저자의 저서 다섯 권을 뽑아본다:
1.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7.
2.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3.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Band 1, 2, Mainz: Schott, 2007.
4. Lorenzo Chiesa, Subjectivity and Otherness: A Philosophical Reading of Lacan,
    Cambridge/London: The MIT Press(coll. "Short Circuits"), 2007.
5. Maurice Blanchot, Chroniques littéraires du Journal des débats
    Paris: Gallimard(coll. "Les Cahiers de la NRF"), 2007.

▷ Jacques Rancière, Politique de la littératur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7.

1) 21세기에 들어 랑시에르(Rancière)의 학자적 역량과 그 영향력은 점점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는 느낌이다. 무엇보다도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출간된 그의 저서들이 지닌 양과 질이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된 위의 책은 이러한 랑시에르의 이론적 여정, 특히나 그가 꾸준히 지속해온 '문학론'을 일단락 지어주는 저서라는 인상이 강하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문학의 정치[학]'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우선 두 개의 제한규정이 필요할 것이다. 첫째, '문학의 정치학'은 작가의 사회참여론, 곧 '참여문학론'과는 거리를 둔다. 랑시에르가 사르트르(Sartre)와 '대결'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둘째, 또한 이러한 작업은 이른바 문학의 사회성에 대한 담론, 곧 '문학사회학'을 겨냥하지 않는다. 랑시에르의 문학에 대한 관점은ㅡ『불화(Mésentente)』의 연장선 위에서ㅡ여러 체제들과 여러 정치[학]들 사이의 긴장, 그 긴장이 산출하는 충돌(heurt)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문학은, 간단히 말해서, 글쓰기의 예술이 취하는 동일시의 새로운 체제(régime)이다. 하나의 예술이 지니는 동일시의 체제란, 실천들, 그러한 실천들이 갖는 가시성의 형식들, 그리고 지성의 양태들이 이루는 관계의 체계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정의하는 것은 감각적인 것의 분배(le partage du sensible) 안에 개입하는 어떤 특정한 방식이다."(위의 책, p.15, 번역: 람혼) 이 문장에서 우선 주목해야 할 곳은 크게 두 부분으로 보인다: 첫째, '역사성'의 한 형식으로 도입되는 "체제"라는 용어는 비단 랑시에르의 논의 안에서뿐만 아니라 그것이 딕키(Dickie) 등의 '예술제도론'에 대해 갖고 있는 관계를 검토함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둘째, 랑시에르 정치학의 '전매특허'라 말할 수 있을 저 "감각적인 것의 분배" 개념은 바움가르텐(Baumgarten)과 칸트(Kant) 이후로 실로 변화무쌍하게 전개되어온 '감성학' 또는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의 영역이 어떻게 효과적이고도 전략적으로 정치학의 영역과 접합할 수 있는가를 가장 성공적으로 예시하고 있는 사례이다. 벤야민과 루카치(Lukács)의 여러 언급들에서 이미 '예언적으로' 드러나듯이, 현대에 이르러 미학은 그 '어원'에 맞게ㅡ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근대의 미학'이 전개했던 이론적 장면들의 전체적 풍경을 떠올려본다면, 이 '어원에 맞게'라는 현상은 미학에 있어서 오히려 역설적인 것이라 말할 수 있는 '희비극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인데ㅡ일종의 '감각학(Ästhetik)'에 근접해가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을 텐데,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랑시에르의 '미학적-정치학적' 논의를 검토할 때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감각학' 또는 '감성학'으로서의 미학이 지닌 위치와 지위이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어떻게 '감각적인 것'이라고 하는 미학적 범주가 '분배'라고 하는 정치학적 범주와 연결되고 결합되는가 하는 물음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근대적', '학문적' 위치를 숙지함으로써만 비로소 그 '진가'가 드러나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장 '근대적인' 학문 영역으로서 미학이 지닌 '사상사적' 위치를 염두에 두고 랑시에르의 글을 읽을 때, 그가 푸코(Foucault)에 이어 '미학'을 통해 '존재론적' 영역에 접근하는 또 하나의 '다른' 길을 열어 보여주고 있는 철학자임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독을 권한다.

       

▷ Jacques Rancière, 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
    Paris: La Fabrique, 2000.
▷ Jacques Rancière, L'inconscient 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1.
▷ Jacques Rancière, Malaise dans l'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4.

랑시에르의 다른 책들에 관해서는 일전에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의 그림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짤막하게나마 언급했던 적이 있었다(http://blog.aladin.co.kr/sinthome/1840680). 얼마 전 그의 책이 한 권 국역되어 나온 바도 있고(벌써부터 엄청난 욕을 먹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니, 장수할(?) 번역본임에 틀림없다), 또 몇 권의 번역본이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된다. 번역 비평의 '흑심(黑心)'을 잔뜩 키우게 되는 실로 '풍성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번역되었으면 하는 랑시에르의 책은, 바로 앞에서도 그 개념의 중요성을 이미 강조했던 바 있거니와, 2000년에 출간된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정치학(Le partage du sensible. Esthétique et politique)』이다. 랑시에르의 '미학-정치학' 논의를 가장 압축적이고도 집약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작지만 좋은 책이다(후주를 합해도 75쪽 분량밖에 되지 않는 소책자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 책은 가브리엘 록힐(Gabriel Rockhill)의 번역을 통해 'The Politics of Aesthetics'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영역된 바 있는데, 특히나 책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는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명쾌한 후기를 읽는 즐거움도 놓칠 수 없는 백미이다. 더불어, 이 후기에서 간략히 정리되고 있는 정치[학]의 분류법에 대한 설명, 곧 랑시에르가 『불화』에서 구분하고 있는 '정치한' 세 가지 정치[학]의 분류법(archi-politique, para-politique, méta-politique)에 한 가지(ultra-politics)를 더 추가한 지젝의 네 가지 분류법에 대한 해설은 『불화』 읽기의 입문으로도 아주 유용할 것이라는 팁(tip) 한 자락도 첨언해둔다(그렇다, 사실 저 『감각적인 것의 분배. 미학과 정치학』과 함께 가장 먼저 번역되어야 할 랑시에르의 책은 바로 이 『불화』이다).



▷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2) 아르노 부아니슈(Arnaud Bouaniche)가 쓴 이 들뢰즈 철학 입문서는 일전에도 한 번 지나가는 길에 언급한 적이 있었는데(http://blog.aladin.co.kr/sinthome/1731219), 그 서술에 있어서 다소 '도식적인' 감이 없지는 않지만, 들뢰즈 철학에의 입문에 있어 이처럼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책도 드물다는 생각이다. 일독을 권한다. 이러한 양질의 '입문서'로서의 책은 사실 '거인'과도 같은 저작들의 숲 사이로 나 있는 일종의 매력적인 '샛길' 또는 '틈새'라고도 할 수 있을 텐데, 발빠른 편집자와 번역자가 어서 나서서 '소리 소문 없이'ㅡ하지만 '제대로'ㅡ번역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드는 책이다(특히나 들뢰즈 전공자가 '비판적' 역자 후기를 달아 번역했을 때 더욱 유용한 국역본이 될 가능성이 높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들뢰즈 철학에 이미 익숙한 독자라면 일종의 '총정리' 차원에서, 들뢰즈 철학에 처음 입문하고자 하는 독자라면 압축적이면서도 내실 있는 '길잡이' 차원에서 읽어볼 만한 책이다. 전체 2부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의 압권은 바로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1부인데, 이른바 '들뢰즈가 새롭게 구성한 철학사'를 다루고 있는 1장 '사유'에서 시작해 2장 '정치학'과 3장 '미학'을 거쳐 4장 '철학'에로 나아가는 구성이 사뭇 안정적이다. 이 책의 매력은 특히 책 사이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상자 기사들인데, 들뢰즈 철학의 형성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던 중요한 인물들(예를 들어, 장 이폴리트(Jean Hyppolite), 조르주 캉길렘(Georges Canguilhem), 장 발(Jean Wahl), 질베르 시몽동(Gilbert Simondon), 야콥 폰 윅스퀼(Jacob von Uexküll),ㅡ그리고 물론 말할 것도 없이ㅡ펠릭스 과타리(Félix Guattari), 퍼스(Peirce), 화이트헤드(Whitehead) 등등)과 그들의 책에 대한 간략하지만 긴요한 설명들을 담고 있다. 다만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들뢰즈의 '반(反)-플라톤주의'에 대한 강조가 조금 지나쳐 들뢰즈의 '플라톤주의'를 간과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

       

Gilles Deleuze, L'île déserte et autres textes. Textes et entretiens 1953-1974,
    Paris: Minuit(coll. "Paradoxe"), 2002.
Gilles Deleuze, . Deux régimes de fous. Textes et entretiens 1975-1995,
    Paris: Minuit(coll. "Paradoxe"), 2003.
▷ 질 들뢰즈, 『 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박정태 편역), 이학사, 2007.

2007년에 번역된ㅡ실은 '편역'이지만ㅡ『들뢰즈가 만든 철학사』 또한 들뢰즈 '입문'과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책이다. 이 책의 주요 저본이 된 책은 들뢰즈 사후에 간행된 두 권의 저작/대담 모음집인데, 다비드 라푸자드(David Lapoujade)의 편집으로 미뉘 출판사를 통해 각각 2002년과 2003년에 출간된 바 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해보자면 플라톤 이후의 모든 서양 철학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언제나 어떤 '철학사'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긴 했지만, 헤겔(Hegel)과 하이데거(Heidegger) 이후로 들뢰즈만큼이나 이토록 다시금 우리를 '전면적으로' 철학사에 집중하게끔 만들었던 철학자가 또 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의미에서도 이 번역본은 더욱 더 시간을 두고 곱씹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François Dosse, Gilles Deleuze et Félix Guattari. Biographie croisée
    Paris: La Découverte, 2007.

들뢰즈와 관련하여 요즘 '열독(熱讀)'하고 있는 책은 바로 프랑수아 도스(François Dosse)가 쓴 위의 전기이다. 이 역시나 2007년에 출간된 '따끈따끈한' 책이다. 6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이라 독서 자체가 일종의 '대장정'이 될 것임은 현재로서도 불을 보듯 뻔하지만, 때로는 아장아장, 때로는 성큼성큼, '묵직한 잰걸음'으로 걸어가보는 수밖에. 견고하고 우직한 '하이킹' 장비들을 챙길 일이다. 들뢰즈와 과타리를 동시에 다룬 '교차 편집'의 전기로서는 도스의 이 책이 처음이 아닐까 하는데, 최근 한 지인의 소개로 을유문화사에서 출간되고 있는 '현대 예술의 거장' 시리즈에 한 번 '맛'을 들인 이후로 전기 장르가 예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고백 한 자락 덧붙여본다(이 시리즈의 쳇 베이커(Chet Baker) 전기에 이어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전기까지 읽고 말았는데, 아마도 다음에는 서점에서 빌 에반스(Bill Evans)의 전기를 들고 계산대로 가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약간 걱정이 앞선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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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8-01-16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초부터 진수성찬을 차려놓으셨네요.^^ 랑시에르의 <문학의 정치>는 저도 얼마전에 발견하고 영역본이 나오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책들은 번역서들이 하나둘 나오는 대로 같이 읽어볼 계획이구요. <감각적인 것의 분배>도 번역본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미학의 무의식>은 러시아어본도 나와 있습니다...

람혼 2008-01-16 17:08   좋아요 0 | URL
'진수성찬'으로 말하자면, 그건 제가 로쟈님 서재에서 항상 얻어 먹는 '메뉴'의 이름으로 알고 있는데요.^^ 러시아어도 못하는 제가 <미학적 무의식>의 러시아어본에 가장 큰 관심이 가는 것은 왜일까요? ^^; 그나저나 랑시에르의 여러 책들이 번역 대기중이라는 사실은 일단 그 자체로 많은 기대를 갖게 하는 것 같습니다.

yoonta 2008-01-16 1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들뢰즈의 플라톤주의"라..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구절이네요.
무슨 이야긴지 간략하게 말씀해주실수 있으신지...^^(제가 요즘 플라톤을 보고있어서요.)

람혼 2008-01-18 10:01   좋아요 0 | URL
아직 저로서도 정확한 '해법'을 얻은 문제가 아니기에 단지 제 개인적인 '문제의식'만을 간략히 적을 수밖에는 없겠지만, '들뢰즈의 플라톤주의'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예를 들어 들뢰즈가 '초월론적 경험론'으로 칸트의 인식론적 체계를 계승함과 동시에 극복하고자 했던 것과 비슷한 '경로'로ㅡ저만의 표현으로 말씀드리자면ㅡ그가 저 '이데아'의 자리에 '시뮬라크르'를 가져다놓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데아의 자리가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점을 논파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들뢰즈는 '반플라톤주의'의 입장에 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ㅡ적어도 <차이와 반복> 안에서는ㅡ'이데아/이념'의 입장을 포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차이와 사건 위에서의 정초 작업에 천착하며 자신만의 '형이상학' 체계를 한 벌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단순히 니체적 의미로 '역-해석'된 들뢰즈로부터 '반플라톤주의'를 읽어내는 일보다 오히려 '변혁된 플라톤주의'의 어떤 형태를, 곧 '전복적인 형이상학'의 한 형태를 읽어내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오고 있습니다. 언제 기회가 되면 플라톤 읽으시는 이야기 부탁드리겠습니다.^^

lefebvre 2008-01-1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차 전기"와 관련해 한번 전화드릴까 했는데 이렇게 "자진납세"를 하셨네요 ^^ 혹시 필요하신 "하이킹" 장비 있으시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

람혼 2008-01-18 10:04   좋아요 0 | URL
사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전화는 바로 그런 전화가 아닐까요? ^^; 하이킹을 넘어 '등산' 장비까지 후원해주시는 그 마음, 언제나 감사히 가슴 속에 새겨두고 있습니다.^^

yoonta 2008-01-23 0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라톤을 보고 있긴 한데..지금 고전중입니다..ㅜ.ㅜ 근대철학자들의 화법과는 다소 생소한 글들이라 이해하기가 쉽지 않군요. 플라톤의 경우 해석도 분분하기도 하고..

말씀하신 "이데아/이념의 입장'이라는 말씀은 그 이데아가 가지는 일원론적 성격을 말씀하시는건가요? 바디우도 이런점에서 들뢰즈의 플라톤과의 친화성을 지적하기는 했죠. "들뢰즈의 사유가 일자로서의 존재에 대한 존재론적 선이해의 기반 위에서 행해진다"라거나 "들뢰즈는 플라톤으로부터 일자의 일의적 통치는 물려받지만 이데아는 언제나 현실적이어야 한다는 점은 버림. 말하자면 들뢰즈가 자기 고유의 방식에 의거하여서 플라톤적 이데아를 잠재적인 전체성으로 대체하고 있다는 것임....바디우는 들뢰즈의 잠재적인 것은 결국 하나의 초월성으로 남게 된다고 주장함"(존재의함성 10~11쪽)등과 같은 분석과 맥락을 같이 하는 말씀이신것 같네요.

이에 반대해서 바디우는 플라톤적 일자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분산된 다수"를 이야기하면서 잠재적인 것이란 존재치 않고 그 순수하게 분산된 다수(바디우는 집합론에서 그것의 개념을 취하는 것같던데 저는 아직 그 개념의 유효성에 대해서는 판단유보입니다.)는 언제나 현실적이며 들뢰즈적인 잠재성은 존재하지 않는것으로 비판한다고 합니다.(같은책 12쪽) 이에 대해 들뢰즈는 잠재성이 가지는 시간의 측면을 바디우는 보지못한 것으로 비판하는것 같은데 크로노스의 시간 대 아이온의 시간등과 같은 개념등으로 또 이어어지는 것같고..여기까지는 저도 아직 정리가 덜된 상태라 뭐라고 판단내리기 어렵내요. 좀더 시간을 두고 공부를 해봐야 할듯합니다. 바디우의 경우 들뢰즈의 철학을 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플라톤적이다."라고 보는 측면은 매우 탁월한 것 같으나 정작 그의 철학이 말하고자하는 플라톤적인 다수적"현실성"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

바디우의 철학 그리고 그의 들뢰즈 비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람혼 2008-01-23 10:25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바디우에 대한 '본격적인' 독서는 아직 후일로 미뤄두고 있는 상태라,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에 대해서 제게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오히려 말씀하시는 것으로 파악해 볼 때 yoonta님이 더 잘 답해주실 수 있지 않을까요? ^^; 어쨌거나 저의 '착상'과 바디우의 들뢰즈 논의에 유사점이 있다고 말씀하시니, 앞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바디우의 저작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기억'과 '재현'의 장소로서의 국립현대미술관, 그리고 백남준의 <다다익선>. [사진: 襤魂]

1) 며칠 전 실로 오랜만에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녀왔다. 이 '거대한' 미술관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두 가지가 떠오른다. 열네 살 무렵의 어느 여름 나는 이 미술관의 [똑같이] 거대한 정원 한 구석에 앉아 그림 한 장을 그리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서양화가 조덕현 선생, 동양화가 김호석 선생, 그리고 만화가 이희재 선생을 강사로 모시고 대략 일주일 동안 열렸던 '청소년을 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었다. 그날 정원에 앉아 내가 그리고 있던 그림은 거친 채색화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 소재는 그곳의 풍경 안에는 있지도 않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거지의 모습이었다! 그 그림은 당시 김호석 선생으로부터 '경악에 찬', 그리고 '우려를 담은' 호평을 받았는데, 그 시절의 어린 나는 나름대로는 미술 수재라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풍의, 고풍스러운 어느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같은, 이야기 한 자락이 그 첫 기억이다. 두 번째 기억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림을 그리는 일을 업으로 삼고 계신 어머니는, 언제부터인가 국립현대미술관을 가지 않으신다. 내 인생 최초의 기억들이 대부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전시회들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고 보면, 이러한 어머니의 '결심'은 사뭇 격세지감의 느낌을 자아내지 않을 수가 없는데, 하지만 이에 대한 어머니의 변론(辯論)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그렇게 '외따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문제라는 것, 곧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 위치 자체가 문화정책의 한 실패를 방증하고 있다는 것이다(어머니의 비교 대상은 파리 시내 한복판에 있는 조르주 퐁피두 센터에서부터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 한가람미술관, 호암갤러리(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다), 로댕갤러리, 리움, 조선일보미술관, 일민미술관, 그 외 사간동과 인사동의 크고 작은 화랑 등 서울시내의 다른 미술관들과 비교했을 때 분명 '작심하고' 찾아가야 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머니의 주장은 단호하다.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존재가, 가장 근대적이고ㅡ'모던'의 의미에서ㅡ현대적인 도시문화와 동떨어진 곳에 '여유롭고 한가하게'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현대성'에 대한 일종의 무지이자 이율배반이라는 것. 내가 어머니의 의견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간에,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공간이 내게 일종의 '기억'이라는 지위로 남아 있게 된 것을 보면,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2007년 7월, 이 동물원 옆 '현대적' 미술관에서는 세 개의 전시회가 동시에 열리고 있었다. 게오르크 바젤리츠(Georg Baselitz), 베르나르 브네(Bernar Venet), 그리고 정연두의 전시가 그것.

   

▷ 바젤리츠의 '거꾸로 된' 레닌 점묘 초상, 그리고 그 '기원[Ur-text]'. 

2) 바젤리츠의 문제의식은 '재현(representation)'의 논리에 놓여 있다. 현대의 구상회화에 있어서 이 재현이 문제되지 않았던 적이 있겠냐마는, 이에 대한 바젤리츠의 접근방식은 단순하면서도 자극적이다. 요는, 거꾸로 그리며 거꾸로 본다는 것. 많은 이들이 바젤리츠가 선택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소재들, 그리고 그러한 소재들을 거꾸로 그린 방식에서 일종의 '전복성'이라는 개념을 애써 끌어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바젤리츠의 그림에서 '기억'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역사적' 기억 또는 '회고적' 기억이 아니라 '재현이라는 형식'에 대한 기억일 것이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 거꾸로 그리고 보는 방식에서 오히려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그림들이 소위 '전복성'에 대한 단순하고 순진한 상징이라는 사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거꾸로 된 그림임을 곧 바로 '인지'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 있다. 다시 말해, 바젤리츠의 이른바 '러시안 페인팅' 연작은 우리가 구상회화 속에서 '구상'을 인지하는 방식, 곧 우리가 그림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포착하는 인지 과정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거꾸로 그려졌다는 것을, 혹은 그림이 거꾸로 걸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단박에 알아챈다. '이 그림은 거꾸로 그려져 있다' 혹은 '이 그림은 거꾸로 걸려 있다'는 인식은, 그것이 오직 추상회화가 아닌 구상회화인 한에서만 가능한 그런 종류의 인식인 것이다. 아마도 바로 된 그림 속에서보다 거꾸로 된 그림 속에서 사물들이 '훨씬 더 잘 보인다'는, '곧 바로 보는 이의 눈을 향하게 된다'는 바젤리츠의 말은, 바로 이러한 구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대한 언급으로,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시선에 대한 바젤리츠만의 '회화적' 전략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렇듯 바젤리츠의 '거꾸로'라는 방법론은 시선이라는 현상에 대한 하나의 회화적 질문으로서 이해될 때만이 비로소 재현의 논리에 대한 '반성(reflection)'이라는 지위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 외의 의미, 예를 들어 형상에 대한 즉물적인 전복이라는 의미만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그림은 전혀 새로울 것도, 논의할 것도 없는, 또 하나의 진부한 '회화' 이상은 아닐 것이다.

   

   

▷ '거꾸로' 된 바젤리츠의 그림에서 '형상의 전복' 따위의 의미만을 이끌어내는 이론적 행위는, 역설적이게도, 전혀 '전복적'이지 못하다.

3) 덧붙여, 지나가는 길에 이러한 '재현'의 논리와 체계에 관한 가장 최근의 주목할 만한 미학적 논의를 꼽자면,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책들을 추천하고 싶다. 아래 두 권의 일독을 권한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도] 미학이 하나의 학제(discipline)가 아니라 담론의 체계 혹은 물음의 형식들임은 분명하지만, 그는 부르디외(Bourdieu)와도 '구별(distinction)'되는, 리오타르(Lyotard)와도 '분쟁(différend)'을 일으키는,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게다가 정신분석의 예술적 '기반'과 '기원'에 대해 역으로 '정신분석'을 가하고 있는 『미학적 무의식』의 논의는 특히 흥미롭다. 최근 랑시에르의 책들 몇 권을 지하철을 오가며 재미있게 읽고 있는데,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후일 다른 글로 따로 미루겠다. 바젤리츠의 인상적인 레닌 초상과 관련하여 개인적으로 하나 더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지젝(Žižek) 편집의 레닌 선집인데, 이 책의 후기(Lenin's Choice)에서 지젝은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ly correct)'이라는 것에 대항해 '진실에 대한 권리(right to truth)'라는 각을 세우고 있다(pp.168-178 참조). 개인적으로 이러한 논의를 구상회화의 '비평'에 적용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회화에 있어서 '정치적 올바름'이란 회화의 전복성에 대한 '단면적인' 주장일 것이며, 회화에 있어서 '진실에 대한 권리'란 시선에 대한 일견 '나이브'해 보이는 물음에 해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바젤리츠가 '거꾸로' 그리기의 대상으로 단번에 레닌의 초상을 '선택'한 것에는 분명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Jacques Rancière, L'inconscient 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1.
▷ Jacques Rancière, Malaise dans l'esthétique
    Paris: Galilée(coll. "La philosophie en effet"), 2004.

▷ Slavoj Žižek(ed.), Revolution at the Gates, London/New York: Verso, 2002.



▷ 피아노 위를 배회하는, 레닌의 환영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그림.

4) 더불어, 왜 레닌인가, 왜 '이 시대'에 하필이면 레닌인가ㅡ지젝은 심지어 월스트리트 근무자들 중에서도 마르크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지만 '레닌'이라는 단어 앞에서는 그 어느 누구라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된다는 '유머'를 날리고 있는데ㅡ하는 물음 앞에서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 더 있다. 피아노 위에 떠오른 레닌[들]의 환영을 그린 달리(Dali)의 그림이 바로 그것이다. 실은, 고백하자면, 이 모든 개인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 덕분에, 나는 바젤리츠의 레닌 초상 앞에서, 다소 오랜 시간을, 머무를 수 밖에,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브네의 이른바 '비결정적인 선들'은, 아마도 현대미술의 곤궁(predicament), 그 비결정성과 불확정성에 대한 '현상적' 혹은 '윤리적' 등가인지도 모른다. 

5) 브네의 작품이 제기하는 문제는 실로 '재현'만큼이나 오래 된 개념미술의 문제, 곧 예술에 있어 쾌(快)의 측면과 지(知)의 측면 사이의 대립이다. 전시회 한 구석에 마련된 공간에서 브네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동시에 개인적으로 어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브네는 그 자체로 현대미술이 봉착했던 하나의 막다른 골목, 곧 'predicament'라는 영어 단어가 정확히 가리키고 있는 바로 그 사태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브네의 작품들과 그에 따르는 연혁을 일별하면서ㅡ이러한 '일별'이야말로 바로 '회고전(retrospective)'이라는 형식에 가장 적합하고 알맞을 전시와 관람의 방식이 아니겠는가ㅡ곧 바로 현대미술에 관한 단토(Danto)의 논의를 떠올렸던 사람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리라. 브네의 '시행착오'가 결국 다다른 지점은 어디였던가. 그것은 바로 '비결정적/불확정적 선(indeterminate line)'의 지점이었다. 왜 이것을 '비결정적/불확정적'이라고 부르며 또한 '선'이라고 부르는가, 그것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해석학적 지평은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물음은 바로 이것이다. 왜냐하면ㅡ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ㅡ'현상적으로' 그 선들은 결코 비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ㅡ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그렇게 결정된' 하나의 형상이기 때문에ㅡ또한 그것은 이미 '선'조차도 아니기 때문이다(면을 선으로 치환하는 하나의 '환상', 예술의 지극히 당연한 과정과 일환으로 인식되었던ㅡ그래서 '인식' 그 자체조차 되지 않았던ㅡ그 환상의 추상화 과정에 대한 반발과 문제의식이야말로, 개념미술이 취했던 가장 '급진적인' 입장이 아니었던가). 이러한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내게는 아래 사진의 퍼포먼스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도 쉽게 '동양화의 기법과 정신'을 연상시킨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너무도 쉽게' 말이다. 이 '너무나도 손쉬움'은 현대미술의 저 '위대했던 곤궁'에 비할 때 정말 비겁하고 단순한 회피이자 도피는 아닌가, 우연성과 수동성을 가장한 가장 '필연적이고 적극적인' 회피, 동양을 가장한 가장 서양적인 '오리엔탈리즘'으로의 도피, 그런 것은 아닌가, 아닐 것인가, 그런 물음이 꾸역꾸역 자꾸만 내 머리 속을 채워만 가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저 무쾌(無快)의 지(知)는 '거꾸로' 쾌(快)의 무지(無知)로 귀착하는 것이 아닌가, 혹시 그런 것은 아닌가, 그런 우려의 물음과 함께. 그러니까 요는, 이 작품들의 기괴하리만치 '심각함'과 '진지함'은, 이제 나에게는 오히려, 실소에 가까운 웃음을 자아내고 있었다는 것, 만약 저 작품들이 나의 이러한 '선적(禪的)인' 웃음을 의도했던 것이라면, 당신의 예술은 성공했다!

▷ 이 '선적(禪的)인' 퍼포먼스는 혹시, 현대미술의 '손쉽고 고매한' 도피가 아닐까, 무쾌의 지가 아닌, 혹시라도, 쾌의 무지는 아니겠는가.

6) 정연두의 작품은 유쾌하다. 전시장 초입의 '보라매 댄스홀'에서부터 그러한 유쾌한 '키치'의 미는 십분 발휘되고 있었다. 이어지는 그의 <로케이션> 연작을 보면서 머금었던 나의 웃음은, 실로 오랜만에 터져나오는 이미지에 대한 순수한 웃음이었다는 고백 한 자락. 정연두 전시의 압권은 그 후반부에 있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전시되고 있는ㅡ혹은 어쩌면 '상영'되고 있는, 이라고 말해야 할ㅡ'응접실'과 작품 제작에 쓰였던 세트가 있는 전시 공간이 바로 그것. 정연두가 '미술의 시간성'을 이해하는 방식은 그만의 'long take' 기법 속에 녹아 있다.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가 만들어내는 '정지된 장면'들은 그 자체로 각각 응접실을 장식하는 화폭들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 '고정된' 화폭 사이에 '시간'이 개입하고 침범한다. 너무나 '당연하게' 보여지고 있던 '자연'과 '풍경'은, 저 시간의 개입과 침범 앞에서, 이제는 더 이상 결코 '자연스러운' 장면도, '풍경이 있는' 화면도 아닌 것이 된다. 배경이 되는 정경은 단순한 인쇄물이었고, 나무라고 생각했던 자연물은 이리저리 옮길 수 있는 인공물이었으며, 눈부신 햇살이라고 여겼던 빛은 단순한 조명의 효과였다. 최근 몇 년 간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보여준 키치에 대한 전반적인 경도 속에서도, 정연두만의 유쾌함, 그만의 키치가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이러한 '공간에 대한 시간의 침투' 속에 있다. 그러나 한 가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 모든 '유쾌함'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무엇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인가, 그런 '고루한' 물음들을 동시에 마냥 놓치고 있을 수만은 없는 내가 지닌 일종의 '천형'이랄까. 이러한 정연두 식의 '키치' 전시에 대해 또한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작품 제작 세트 앞에서 사진을 찍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었는데, '작품에 손대지 마시오' 또는 '작품 앞에서 사진 찍는 것은 금지돼 있습니다' 등의 클리셰가 왜 이런 종류의 전시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나는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여! 물론 나는 직원들의 감시를 용의주도하게 따돌리고 남몰래 나의 이러한 사진에 관한 '지론'을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했지만 말이다(그 '아슬아슬한 미학'의 사진들을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는 않으련다).







▷ 정연두, <다큐멘터리 노스탤지어>의 몇몇 '장면들', 고정된, 그러나 고정되어 있지 않은.

7) 앞서 국립현대미술관에 대한 두 개의 기억을 이야기했지만, 그 개인적인 기억의 장에서 백남준이 빠질 수 없을 것이다. 원통형의 중앙부에 우뚝 서 있는 백남준의 'monolith'ㅡ어쩌면 'poly-lith'라고 해야 할 것인가ㅡ, 어린 시절 처음으로 보았던 이 백남준의 작품 <다다익선(多多益善)>의 충격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러한 '부자유'야말로 기억의 대표적인 속성 중의 하나겠지만, 떠오르는 여담 한 자락 풀어놓자면, 얼마 전 나는 한 후배로부터 무조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자성어를 순서대로 두 개만 말해야 하는 일종의 심리 테스트를 받았는데, 내 대답은 각각 차례대로 '암중모색'과 '다다익선'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사자성어는 자신의 '인생관'을 의미하며 두 번째 사자성어는 자신의 '애정관'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후배의 답변이 되돌아왔으니! 말 그대로 '암중모색'하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 '충격'이라 이름할 것에는 보다 개인적인 이유가 있었으니, <다다익선>의 화면에 등장하였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의 모습이 바로 그 이유를 구성하는 두 인물이라 하겠다. 물론 보위라는 뮤지션 자체가 지닌 예술적/경계적 성격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때의 나는 나의 이 오래된 우상이 백남준의 작품에 등장하였다는 사실에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던 것, 조금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인생에서 거의 첫 번째라 할 '미학적' 물음에 봉착했던 것인데, 지금 다시 떠올려보자면 그 물음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의 경계에 대한 가장 초보적인 물음, 조금 더 한정하자면 이른바 '키치(Kitsch)'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물음이었던 것이다. 물음은 오늘이라고 해서 달리 없어지진 않는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다다익선>, 그 거대한 구조물 사이로 보이는 몇몇 작동되지 않는 텔레비전들이, 마치 이가 몇 개 빠진 '태고의' 유적처럼, 조금은 을씨년스럽게 서 있는 곳, 바로 그곳 동물원 옆 놀이동산 옆 국립현대미술관은, 여전히 내게 '현대'인가, 아직도 내게, '현대'일 수 있을까, 하는 그런 물음. 그런데 이 물음은, '여전히' 하나의 미학적 물음일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하나의 역사적 물음일 것인가, 하는, 또 하나의, 그렇고 그런, 물음. 그 몇 겹, 몇 자락의 물음, 물음들.

2007. 7. 7.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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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yörgy Ligeti, Streichquartett No.2, Mainz: Schott.
▷ György Ligeti, Kammerkonzert für 13 Instrumentalisten, Mainz: Schott.

1)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의 폴리메터/폴리리듬 작곡은, 무질서를 질서화하는, 곧 질서의 무질서 혹은 무질서의 질서를 보여주는, 가장 뛰어난 형상화의 한 사례일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가장 먼저 두 작품을 살펴볼 수 있다. 연이은 해에 작곡된 <현악사중주 2번>(1968)의 3악장과 <13명의 연주자를 위한 실내협주곡>(1969-1970)의 3악장이 바로 그것이다. 두 작품의 악보는 모두 쇼트(Schott) 출판사의 '우리 시대 음악(Musik unserer Zeit)' 총서를 통해 출판되었다. 말 그대로 '일독'을 권한다. 다만, 여기서의 일독이란, 필시 '일청'과 함께 이루어져야 할 이른바 '공감각적인' 작업이겠지만 말이다.



▷ György Ligeti, Streichquartett No.2, ⓒSchott, p.17.

2)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사이에서 서로 교차하는 이러한 잇단음들의 증가와 중첩은, 연주가들에게는 고도의 집중력과 정확한 연주력을 요하는 것이겠지만, 청자에게는 하나의 덩어리로서의 '감각'을 선사할 뿐이다. 이런 식의 '분리된' 경험의 구성은 대편성 오케스트라를 위한 관현악곡인 1967년 작품 <론타노(Lontano)>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인데, 일단 권하고 싶은 것은, 먼저 악보 없이 들어보라는 것, 그 다음에는 악보와 함께 '듣고 보라는' 것이다. 감각은, 무엇보다 일단, 연주와 감상의 분리, 청각과 시각의 분리 사이에서 오는 무엇이지만, 또한 무엇보다도 그러한 분리의 '감산'이 만들어내는 '가산' 혹은 '합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György Ligeti, Streichquartett Nr.1/Nr.2, Arditti String Quartet(Wergo).
▷ György Ligeti, Ligeti Edition 1: String Quartets and Duets,
    Arditti String Quartet(Sony).



Neue Wiener Schule: Streichquartette
    LaSalle Quartet(Deutsche Grammophon)[4 CDs].

3)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현악사중주 2번>의 음반은 모두 두 종류인데, 둘 다 아르디티 현악사중주단(Arditti String Quartet)이 녹음한 것이다. 첫 번째 음반은 베르고(Wergo) 레이블에서 출시된 1978년 녹음판, 두 번째 음반은 소니(Sony)에서 <리게티 에디션> 연작의 첫 번째 음반으로 출시된 1994년의 녹음판이다(소니의 <리게티 에디션>은 오페라 <Le Grand Macabre>의 영어판을 포함하여 총 9장이 나온 상태에서 중단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전자의 투박하고 거친 느낌이 더 좋지만, 객관적인 음질에 있어서는 후자의 녹음이 더 뛰어나고 연주도 더 안정되어 있다(그런데, 묻자면, 도대체 여기서 '안정'의 기준이란 무엇일까). 이 곡은 원래 라살(LaSalle) 현악사중주단을 위해 작곡되었던 곡이며, 초연도 이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지나가는 길에 개인적으로 라살 사중주단의 절창(絶唱)이라 생각하는 음반도 하나 소개하자면, 쇤베르크, 베베른, 베르크의 현악사중주 곡들을 모아놓은 저 훌륭한 4장짜리 음반의 일청 또한 강권한다.



▷ György Ligeti, Kammerkonzert für 13 Instrumentalisten, ⓒSchott, p.79.

4) 리게티가 앞서 <현악사중주 2번>의 3악장에서 보여주었던 저 '무질서'의 방식은 <실내협주곡>의 3악장에서 현악기뿐만 아니라 금관과 목관, 피아노와 쳄발로에 이르기까지 확장된다. 처음에는 호른과 트롬본에 의해 시작되었던 '작은' 무질서가 피콜로, 오보에, 클라리넷이 내는 새된 고음들의 합세에 의해 '큰' 무질서로 바뀌는 이 부분은, <실내협주곡> 중에서도 압권이자 백미에 해당한다는 개인적인 생각이다. 여기서 악기마다 상이하게 전개되는 박자들은, <현악사중주 2번>처럼 증가되지는 않는 대신, 반복되면서 중첩되고, 뒤로 밀려나거나 앞으로 당겨진다. 개인적으로 처음 들었던 순간 경이와 전율을 경험했던 부분이라는 고백 한 자락.

   

▷ György Ligeti, Kammerkonzert/ Ramifications/ Lux aeterna/ Atmosphères(Wergo).
▷ György Ligeti, Clear or Cloudy: Complete Recordings on Deutsche Grammophon
    (Deutsche Grammophon)[4 CDs].

   

▷ György Ligeti, Cello Concerto/ Piano Concerto/ Chamber Concerto
    Ensemble Modern(Sony).
▷ György Ligeti, 
    Ligeti Project I: Melodien/ Chamber Concerto/ Piano Concerto, etc.(Teldec).

5)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실내협주곡> 음반은 모두 네 종류이다(내가 이 곡을 네 종류의 음반으로 갖고 있다는 사실에서 눈치 빠른 이는 이미 눈치 챘겠지만, <실내협주곡>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리게티 곡들 중의 하나이다). 녹음된 순서대로 따라가보자면, 첫 번째는 이 작품의 초연자인 프리드리히 체르하(Friedrich Cerha)가 지휘한 베르고 레이블의 1970년 녹음판, 두 번째는 피에르 불레즈(Pierre Boulez)가 지휘한 도이체 그라모폰(Deutsche Grammophon)의 1982년 녹음판, 세 번째는 앙상블 모데른(Ensemble Modern) 연주의 1992년 녹음판(소니), 네 번째는 텔덱(Teldec)의 <리게티 프로젝트> 연작(총 5장) 중 첫 번째 음반인 라인베르트 데 레우(Reinbert de Leeuw) 지휘의 2000년 녹음판이다. 이 중 불레즈의 녹음은 리게티 사후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출반한 4장짜리 컴필레이션 CD에 수록되어 있는 것이다(이 컴필레이션 음반의 제목은 "Clear or Cloudy"인데, 리게티의 작품군에 붙이기에는 다소 '가벼운' 제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그의 작품을 총괄하여 요약하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은 '일기예보'라는 느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리게티가 <실내협주곡> 3악장을 헌정했던 체르하의 음반과 텔덱의 <리게티 프로젝트 I>, 이렇게 둘을 추천하고 싶다. 물론 불레즈의 연주는 언제나 최고를 들려주는 완벽주의자의 것이지만, 일단은 제외한다. 그냥 그러고 싶어졌다. 일단 블레즈가 지휘한 3악장의 템포가 개인적으로 그렇게까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를 대겠다, 꼭 이유를 대라고 한다면 말이다.



▷ 리게티, 그리고 100개의 메트로놈[들].

6) <현악사중주 2번>의 3악장과 <실내협주곡>의 3악장의 예에서 볼 수 있었던 이러한 잇단음의 증가ㅡ(2)-3-(4)-5-6-7... 여기서 필히 감지해야 할 저 괄호들의 의미작용이란, 2분음과 4분음은 '잇단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오는 하나의 필요악일 텐데ㅡ는, 그리고 또한 이러한 잇단음의 증가분들이 어긋나게 포개진 기이한 중첩들은, 수학적 수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왜냐하면, 수없이, 매우 빠른 속도로 진동하는 '무수한'ㅡ계량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질서'에 대비되는 '무질서'라는 의미에서 '무수한'ㅡ음들의 연속체는, 앞서 잠시 언급했던 바, 매우 '아이러니컬'하게도, 청각적으로 단 '하나의' 클러스터(cluster)로 '수렴'하기 때문이다. 

7) 이 '감각적' 현상은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이는 단순히 감각의 '한계'인가, 아니면 감각의 '가능성'이라고까지 명명해줄 수 있는 하나의 축복일까. 이러한 현상을 하나의 미(美)로 파악한다는 것은 근대 미학적 사고의 발로일까. 이 감각의 쾌락에 합당한 이름과 법률을 부과하려는 시도는, 그 자체로 근대 미학의 고유한 기도(projet)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는, 근대 미학이라는 저 지독한 세리(稅吏)가 매기려고 하는 피할 수 없는 어떤 추징금 같은 것일까. 문제는, 일단, 수렴값을 찾는 것이다. 단, 근사치가 아닌 정확한 하나의 값을. 여기서 상기해야 할 점은, 오일러 상수이든 원주율 π이든, 어쨌든 이렇게 '정해진' 수, 곧 수학적인 의미에서 '닫힌 형식(closed form)'을 갖게 된 수는 '정확한' 수렴값이라는 형식을 띠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다수의 음들로 이루어지는 연속체는 어떤 [하나의] 클러스터로, 어떤 [하나의] 값으로, 어떤 [하나의] 음가(音價)로 수렴하는가, 이것이 하나의 물음이다. 

8) 하지만, 수렴값이 결정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그 수렴값 속에서, 바로 그 숫자, 그러니까 한갓 숫자 속에서, 나는 미를 찾아내고 감별해낼 수 있을까. 이것이 두 번째 물음이다. 이 두 번째 물음 앞에서는 길을 잘 들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ㅡ나쁜 의미에서, 라고 말하고 싶지만, 의미라는 것이 어떻게 하면 '나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되는데,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데ㅡ수(數)에 대한 신비주의로 가느냐 아니냐, 이 선택지가 바로 저 두 번째 문제가 직면하게 되는 첫 번째 갈림길이다. 보르헤스(Borges)의 비유ㅡ그의 소설은 정말 비유일까, 비유일 뿐일까ㅡ처럼, 어쨌든 그 선택지는 끝없이 다른 길로 이어지는 길이거나 앞뒤가 꽉 막힌 막다른 길이겠지만. 그런데, 그 첫 번째 갈림길은, 과연, 정말로, 첫 번째였던가.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것은 과연, 갈림길의 '기원'에 값하는 길이었던가, 어쩌면 이것이, 다시금 샛길을 내고 가지를 치는, 세 번째 물음이 될 것이다.

2007. 7. 4.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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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inuum이 흐른다. 그것을 연주하는 악기는 물론 쳄발로이지만, 그 악기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쳄발로의 소리가 아니다. 죄르지 리게티(György Ligeti)의 음악을 처음 들었던 때는 15살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폴리포니(polyphony)'라는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내게 처음으로 '알려주었던' 것은 바흐친의 글이 아니라, 아이러니컬하게도, 리게티의 음악이었다(이 사실이 내게 '아이러니컬'할 수 있는 이유는 '폴리포니'라는 말이 갖는 저 희랍어 어원의 직접성과 그에 대한 배반에서 찾아져야 한다). 

처음으로 들었던 그의 작품은 아마도 「진혼곡(Requiem)」이었거나  「영원한 빛(Lux aeterna)」이었을 것이다. 그 이후 나는 독일의 현대음악 전문 레이블인 Wergo에서 나온 그의 음악 CD들을 미친 듯이 사모으기 시작했다.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Sony에서 리게티의 전작을 기획하여 발매하기 시작했지만, 소니의 그 성의 없고 치졸한 디자인은 베르고 레이블의 저 아우라 넘치는 음반들에 전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내게는 언제나 리게티와 베르고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강력한 연상의 고리로 엮여 있었으며 아무것도 그 강한 고리를 깰 수 없었다(물론 중간에 출시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소니의 리게티 프로젝트 시리즈가 Teldec의 리게티 에디션 시리즈와 함께 리게티 음악의 면모를 일별해볼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음반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최근 몇 개의 우연의 선들이 겹쳐져 다시금 리게티가 내게로 다가오게 된 계기가 있었다. 음렬주의에 대한 열광 또는 음렬주의에 대한 회의라는 화두는 내게 학문적이거나 이론적인 문제라기보다는 하나의 '감각'에 관한 문제였다. 이러한 교양(독일어 'Bildung'이 지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의 문제는 아마도 쇤베르크와 리게티의 음악을 처음으로 들었던 저 유년기의 경험과 모종의 관련이 있을 것이다. 쇤베르크-베베른-베르크-아도르노를 잇는 [탈]구축의 선 하나, 그리고 불레즈와 슈톡하우젠이라는 양극을 갖는 팽팽한 긴장의 선 하나(이 두 선들은 서로 공시적으로도, 또한 통시적으로도 비교 가능하다). 

그리고 세 번째 선.
이 선은 유별나게 애착이 가는 선인데, 왜냐하면 이 선이 실은 가장 근대적인(modern)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르톡-(코다이)-리게티의 선이 그것. 혹자는 이 세 번째 선이 어떻게 앞의 두 선들과 대등한 위치에 나란히 혹은 수직적으로 놓일 수 있는지 의구심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여기서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의 선과 존 케이지(John Cage)의 선에 할당된 공간을 따로 떼어 말해야 할 필요를 느낌에도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 그는 주목해야 한다. 이 세 번째 선은 멀게는 우리가 흔히 '국민(주의)음악'이라고 부르는 어떤 괴물 같은 것, 곧 '내셔널 뮤직(National Music)'ㅡ소문자가 아닌 대문자 '국민음악'ㅡ이라고 하는 것까지 소급이 가능하다. 그러나 소급만이 가능할 뿐 환원되지는 않는 선이다. 예를 들어, 가장 극명한 예를 들어, 바르톡의 조성을 보라, 듣지 말고 보라. 그것은 음렬주의를 넘어서지 않고 음렬주의의 외부를 끊임없이 간지럽히고 지분댄다. 좀 더 들어가 바르톡의 현악4중주 6번을 보라, 특히 마지막 악장을, 듣지 말고 보라.

'내셔널리즘'이라는 것이 어떤 때에는 '민족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하였고 또 어떤 때에는 '국민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하였지만, 그리고 또한 그렇게 각각 번역되었을 때 그 번역어들 나름이 갖는 포지티브와 네가티브가 있는 것이고, 또 있었던 것이었겠고, 또 있어야 했던 것이겠지만. 그리고 또한 이것은 내가 18살 여름에 고산메 선생과 함께 보았던 펜데레츠키와 안익태 곡들의 저 '민족주의적이고도 국민주의적인' 공연에 대한 경험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것이겠지만.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바르톡과 리게티가 걸어갔던 저 내셔널리즘에 대한 어긋남과 어깃장의 선들은 얼마나 통쾌하고 시원했던가. 그 사실이 다시 내 머리 속에 상기되었을 때 나는 피아노 앞으로 달려가지 않고서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기타가 아닌 피아노 앞으로.

나는 피아노를 '잘' 치지 못한다. 물론 그 어느 누구도 작곡가에게 고도의 연주력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이 세상은 그만큼 '전문화'되어 있고 '프로화'되어 있는 것이므로. 하지만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내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음들 속에서 쇤베르크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고 리게티를 발견하기도 할 것이다. 가능한 일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좋게 말해 가장 미니멀한, 나쁘게 말해 아무런 스킬도 테크닉도 없는, 그런 연주 스타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이것도 물론 가능한 일이다. 나는 물론 '전문가'도 '프로'도 아니다. 음악깨나 들어봤다는 사람이라면, 어쩌면 피에르 불레즈의 「구조들(Structures)」 같은 작품이나 스티브 라이히의 영향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리 넓지 않은 인간관계 때문에 가장 가능성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이 역시 가능하긴 한 일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한 인간을 전체적으로 이해하기란,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 이 사실이 나를 찌른다, 건드린다.

서두 또한 지극히 개인적이었지만, 이하, 소장하고 있는 책들 중에서 리게티를 '듣기' 위해 '읽기' 좋은 책들 몇 권을, 역시나 지극히 개인적으로 소개해본다:



▷ 이희경, 『 리게티, 횡단의 음악 』, 예솔, 2004. 
  
이 책은, 리게티에 관한 논문·번역·음반해설 등 리게티 음악의 학문적 전도사 역할을 정력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이희경 씨가 저술한 책으로 2005년 대한민국학술원의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기도 한 책이다. 2006년 생일에 파랑에게서 받은 선물인데, 선물을 받은 기쁨도 기쁨이었지만, 한달음에 달리며 읽어내려갔던 즐거운 경험을 안겨주었던 책으로 기억하고 있다. 무엇보다 한글로 된 리게티 관련 자료를 읽는다는 즐거움에 책 읽는 즐거움이 배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알타이어 '네이티브 스피커'의 괴로움이여...). 책의 구성은 전기적 사실들과 작곡가들과의 관계, 작곡기법과 악기별 연구, 작곡법의 음악사적 의의 등으로 비교적 평범하지만, 리게티의 음악을 듣는 데에 있어 아주 유용한 해설과 자료들을 담고 있는, 일독을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또한 이희경 씨의 논문 「90년대 이후 리게티 작품에서 '국지성(locality)'의 문제」(『서양음악학』, 9-3호(통권 12호), 2006) 또한 일독을 권하는데, 90년대 리게티의 음악, 특히 피아노 협주곡 이후 그가 보여주는 음악적 '국지성'이 어떻게 '세계성'과 '보편성'을 얻고 있는가라는 다소 진부한 주제에 대한 진지한 의의 정리를 담고 있다. 다만 이 논문은 음악이나 작곡법에 대한 논문이라기보다는 리게티 음악의 '인문학적' 의미에 보다 치중한 것이라는 점만을 덧붙여두자(음악학자들의 인문학 '차용'은 어찌 이리도 기초적인 '세계화' 수준에 머무는가, 하는 물음을 한 번쯤 던져볼 수 있겠다).

   

▷ Richard Toop, György Ligeti, London: Phaidon, 1999.
▷ Richard Steinitz, György Ligeti. Music of the Imagination
    Boston: Northeastern University Press, 2003.

영어로 된 리게티 해설서는 이 두 권의 책을 추천한다. 먼저 리차드 툽의 책은 일단 굉장히 활력 넘치는 문체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유독 독서의 즐거움을 많이 선사하는 책이다. 또한 책의 구성을 보면, 전기적인 서술과 음악적인 문제의식을 병행·통합시키는 장의 구분과 서술방식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에, 리게티 음악의 면모를 파악해볼 수 있는 '종합적인 저술'이라는 인상을 준다. 한 가지 더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은ㅡ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출판사가 Phaidon이라는 사실에서 간파하였겠지만ㅡ감칠맛 나는 도해들을 다수 수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조금 더 음악에 치중한 전문적인 해설을 보고 싶다면 리차드 슈타이니츠 책의 일독을 권하고 싶다. 시기별 대표 음악을 그 당시 리게티가 지니고 있던 작곡의 문제의식과 함께 분석한 책으로서, 해당 악보와 함께 자세한 곡 해설, 작곡·연주의 배경 상황 등을 세밀하게 서술하고 있는 책이다. 다만 두 책 모두 리게티 사망 이전에 출간된 책들이기 때문에 '결정본' 전기로서의 자격은 '태생적으로' 상실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은 지적해둘 수 있겠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생존작가의 '전집'도 나오는 마당에(대표적인 예를 들어주마, 김승옥과 김지하). 어쩌면 '이미 죽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전집 출간이라는 애도(Trauer)를 바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정말 우리는ㅡ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ㅡ그들을 애도했는가, 애도한 적이 있었던가, 애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멜랑콜리에 걸려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여담 한 자락, 풀어놓아본다.

▷ György Ligeti, Gesammelte Schriften, Mainz: Schott, 2007.

물론 리게티 자신의 저술을 빠트릴 수 없겠다. 이 책은 말 그대로 리게티의 '저작 전집'인데, 그가 작곡 틈틈이 저술했던 음악 관련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여기서 [작곡가에게 있어 그의 작곡보다 그의 글을 더 부차적으로 취급한다는] 관습에 기대어 '틈틈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약간 어폐가 있는데, 리게티의 글들을 직접 읽어보면 그가 작곡가임과 동시에 또한 한 명의 훌륭한 [음악]이론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리게티가 '서방' 음악계에 데뷔하던 시기의 주류였던 음렬주의에 대한 생각들을 비롯하여 각 시기별 자신의 작곡에 있어서 가장 첨예하고 품고 있던 문제의식이 무엇이었나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이 책만한 참고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물론 개인적으로 완역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책이지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 보인다. 번역을 한다면 현재로서는 이희경 씨가 가장 적임자로 보이지만.  

리게티의 음반은 크게 세 종류로 구분해볼 수 있다. Wergo 레이블에서 출반한 음반들, Sony의 리게티 프로젝트 총 8장(오페라 Le Grand Macabre가 2장이므로 정확히는 9장), Teldec의 리게티 에디션 총 5장이 그것이다. 물론 개별적인 곡을 녹음한 음반들도 여럿 있다. 피아노 연습곡 음반들도 이미 몇 종류가 출시되어 있는 상태이며, 또한 얼마전에는 도이치 그라모폰에서 녹음한 곡들만 따로 모아서 4장의 기획 음반이 출시되기도 했다. 이 모든 음반들에 대한 소개를 다 쓴다면, 팔이 아플 테니, 그리고 너무나 귀찮은 일이 될 터이니, 이 음반들에 대한 소개는 기회가 있을 때 Anarchiv 코너 등을 통해 슬금슬금 풀어놓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덧붙여두고 싶은 말은, 특히 20세기의 곡들은 악보와 함께 보고 들을 때 그 '보기'에 의해 '듣기'의 즐거움이 배가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러한 '읽기'의 행위는 즐거움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더 잘 '듣기/이해하기(불어 'entendre'의 두 가지 의미에서)' 위해서, 그리고 어쩌면 라캉적인 의미에서ㅡ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고통을 수반하는 기이한 즐거움이라는 의미에서의ㅡjouissance를 위해서, 라고 해두자. 리게티의 악보 대부분은 독일 Mainz의 Schott사에서 출판되어 있으며 편집 또한 아름답다.

얼마전 한양대 음대에서 컴퓨터 음악을 가르치는 Richard Dudas 선생과 리게티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우리는 얼마 전에 서울에서 열렸던 리게티 추모 음악회 자리에 같은 날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하며 즐거워했다. 그리고 리게티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함께 이야기하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경험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한 리게티의 Atmosphères를 실황으로 듣는다는 경험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ㅡ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날의 공연이 그 곡을 라이브로 듣는 '첫 경험'이었다ㅡ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우리는 낸캐로우(Nancarrow)의 음악에 대한 농담까지 주고 받았다. 그리고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내 가슴에 와닿았다. 나는 연신 마음 속으로 그 말에 대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 또한 그렇다고:

"I think I am his son, though I couldn't meet him while he was alive."

2007. 5. 7.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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