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밖으로 동이 터 오는 책상 앞에서. 『에로스의 눈물』의 세 가지 판본들.

1) 코스모폴리탄(cosmopolitan)의 '국어'란,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읽기의 편집증. 나라는 인간은,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조르주 바타이유(Georges Bataille)의 『에로스의 눈물(Les larmes d'Éros)』의 불어본(1판과 2판)과 영역본과 국역본을 동시에 펼쳐놓고 비교 독해하기. 이러한 병증(病症)은 사실 어떤 하나의 원칙,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발현되고 발설되고 있는 가장 개인적인 징후이자 증상의 장소일 터. 그 원칙과 이데올로기란 아마도, 불어와 영어와 '국어'가 만나 그 중간의 어디쯤에선가 '형성'되는, 형성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는, 하나의 '진의(眞意)'에 대한 순진하리만치 '독실한' 믿음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란, 프로이트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타협[절충] 형성(Kompromißbildung)'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도 벤야민(Benjamin)이 말했던 저 '순수 언어(die reine Sprache)'의 가장 철저한 신봉자, 지독히도 철저하고 처절한 일종의 '텍스트주의자'에 다름 아닐 것, 그런 것, 그런 곳으로, 몇 자락의 잡설들이, 흘러든다. 예를 들자면, 에스페란토(Esperanto)라는 '인공적' 언어의 창안자들에 대한 나의 오래 묵은 애틋한 심정 또한 저 '순수 언어'에 대한 '동병상련'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 공통의 병인(病因)이란 아마도 에스페란토의 '창안'이라는 움직임이 지닌 저 '형이상학적' 운동성 안에 있을 것. 말하자면 언어는, 나의 안과 밖에서, 다시금, 반복되고, 또한 매번 다르게, 반복된다. 이 원환(圓環) 안에서 내가 느끼는 것, 그것은 소박한 '인류애'임과 동시에ㅡ이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의 표현을 차용하자면, '희망의 원리'일 것인가ㅡ그에 못지않은 하나의 거대한 '공포증'ㅡ말하자면, '대중들의/에 대한 공포'ㅡ일 것.

 

▷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IV-1: Kleine Prosa. Baudelaire-Übertragungen,
    Frankfurt am Main: Suhrkamp, 1991.
▷ Walter Benjamin, Selected Writings, Volume 1: 1913-1926
    Cambridge/London: The Belknap Press of Harvard University Press, 1996.
▷ 발터 벤야민, 『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반성완 편역), 민음사, 1983.

2) 하나의 집착. 예를 들면,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그러므로 번역(Übersetzung)은ㅡ아이러니컬하게도ㅡ원문을 적어도 보다 더 결정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옮겨 심는(verpflanzt) 것이다. 왜냐하면 원문은 더 이상 이 이외의 그 어떤 중계(Übertragung)를 통해서도 옮겨질 수 없으며, 항상 오직 이러한 언어의 영역 안에서만 새롭고 다른 부분으로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독어판, p.15) 이를 일종의 '전도된' 낭만주의로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이어 벤야민은 이렇게 쓰고 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원문의 성립과 같은 시대에 있어서는, 번역의 언어가 원문처럼 읽힌다는 것은 번역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문자 그대로의 번역에 의해 보장 받게 되는 충실한 번역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작업에서 언어의 보충(Sprachergänzung)에 대한 거대한 갈망(Sehnsucht)이 드러난다는 점이다."(독어판, p.18)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보충'으로서의 번역/중계, 곧 원문 전체에 대한 포괄이 아니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원문보다 더 '결정적인' 어떤 언어의 영역, 이식과 이행의 영역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집착이란 내게는 '언어' 자체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일종의 '교통(Verkehr)'에 대한 이론에 더 가까워 보인다. 이러한 집착이 내게 단순히 '아집'으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순수 언어는, 바로 그 순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지점에서, 비로소 작동하기 시작하는 것. 그러므로 순수 언어란, 하나의 확고한 동일성으로서,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이행과 이식의 행간에서, 언뜻, 순간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터. 그런데 잡설의 범람이 여기까지 이르고 보면, 나의 '공간'이란, 그 이행의 순간들과 이식의 지점들을 포착하고자 하는, 무수히 헛되거나 헛되이 무수한, 그런 덩어리들이 비우고 있고 그런 틈새들이 채우고 있는 하나의 장소에 다름 아닐 터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나의 이야기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다름 아님'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내 정원의 오래 된 이름, 'Anarchiv' 혹은 '襤魂齋'. 나는 가끔 이 정원의 이곳저곳에 물을 주지만, '잡초'를 솎아내지는 못한다. '잡초'따위는 없다고 하는 서투른 연민의 감정과 '시혜의식' 때문이 아니라, 모든 것이 '잡초'라고 생각하는 나의 어설픈 '범신론(汎神論)' 때문이다.

3) 번역이란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정의(definition/justice)'의 한 형식:
얼마 전에 이제이북스를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완역본이 출간되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물론 이 번역에 대해서도 벌써부터 왈가왈부 말들이 많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이제는 유달리 '도발적'일 것도 없을 하나의 테제는, 흔히 고전 번역의 '위태로운' 기반이라는 '위급한' 정세 진단과 맞물려서 자주 논의되곤 한다. 이러한 논의의 핵심적인 문제 중의 하나는 '[한국어] 그 자체로 읽힐 수 있는 번역본'의 [가슴 벅찬] 가능성이다. 말하자면, 이러한 '가능성'이란, '번역 불가능성'이라고 하는 '거스를 수 없는' 대원칙에 대한 '가장 나은' 차선(次善)을 생각하는 사유로부터 나오고 있는 것. 그러한 번역본의 가능성은 인문학을 향유하는 '대중'의 수효와 수요의 가능성에 곧 바로 연결되고 있다. 인문학이라고 하는 것이 '훈고학(詁學)'이 아닌 다음에야 이러한 번역본의 존재 여부가 바로 '인문학의 위기'를 타파하는 열쇠 중의 하나라는 주장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세계 시민'이라는 존재를 단순히 '조잡한 인류애의 총합'이 낳는 결과물로 이해하지 않는다면, 다언어와 다문화에 대한 이해ㅡ그것도 단순히 '어설픈' 이해가 아니라 '농밀한' 이해ㅡ는 필수적이다못해 필요불가결하다고까지 할 사항일 것이다. 그렇다면 감히 말하건대, 우리 모두는 단순한 '향유자'가 아니라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 적어도 '누구나 읽을 수 있는'이라는 기준을 멋대로 세워서는 안 된다. 이러한 기준은 흔히 '하향 평준화'되기 십상인데, 나는 그런 기준을 설정하는 기존의 연구자 또는 번역자야말로 역설적으로 가장ㅡ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의미에서ㅡ'엘리트적'이고 '부르주아적'이라고 말하고 싶다. 개인적인 기준에서 볼 때, 외국어를 한국어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번역본은 믿을 수 없는 것이다. 한국어로 된 번역본은 무엇보다 그것의 '원문'이 되는 외국어의 존재를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 내게 있어 좋은 번역본이란, 이런 '완벽한' [언어의] 타자를 계속 '환기'시킬 수 있는, 또한 심지어 그러한 유령의 출현을 '조장'할 수 있는 언어의 집합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결국 다시금 가르치기와 배우기가 그리는 어떤 나선형의 선으로 소급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내가 이해하는 바의, 또한 내가 원하는 바의 '순수 언어'일 것이다. 따라서 나는 개인적으로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본'이야말로 성마른 번역에 대한 변명이기는커녕 '최고의 차선'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덧붙여, 최근 인터넷 공간 안에서 생산되고 유통되고 있는 여러 '서평'들을 보고 있자면, 하나의 책을 채 다 읽지도 않고 다만 몇몇 부분의 오류에 대한 인상만을 가지고서 마치 그 책 전체를 평가할 수 있을 것처럼 덤벼드는 행태들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그러므로 이 또한 '몇몇 부분에 대한 인상'이 지닌 편견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된 번역본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역설적이지만, 그 고전을 이루고 있는 타언어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유발'하는, 따라서 번역본 그 자체로서는 어쩌면 '실격'일지 모르는 그런 '불완전한' 번역본을 통해서야 비로소 '완전히' 가능해진다, 라고, 그리고 또한 그러한 번역본[과 그것에 수반되는 '타자'와 '유령']을 미련하리만치 또박또박 읽어나가는 끈질기고 진득한 '독해(讀解/毒解)'의 과정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능해진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고로, 읽는다, 읽을 뿐이다.

▷ 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김진성 역주), 이제이북스, 2007.

   

▷ Aristotle, Metaphysics[Books I-IX](trans. by H. Tredennick),

    Cambridge/Lodon: Harvard University Press(Loeb Classical Library), 1933.

▷ Aristotle, Metaphysics[Books X-XIV], Oeconomica, Magna Moralia

    (trans. by H. Tredennick, G. C. Armstrong), 

    Cambridge/Lodon: Harvard University Press(Loeb Classical Library), 1935.

   

▷ 조대호 역해, 『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 문예출판사, 2004.

▷ Vasilis Politis, Aristotle and the Metaphysics,

    London/New York: Routledge, 2004.

4) 소장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원본은 희랍어-영어 대역본으로, 1930년대에 하버드 대학의 Loeb 문고로 출간되었던 다소 오래 된 판본이다. 사실상 학부 졸업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거의 볼 기회가 없었는데, 조대호 선생의 역해본이 나왔던 2004년에 다시금 오랜만에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열정이 불타 올랐으나 그 뜨거움이 얼마 가지 못해 이내 사그라졌던 기억이 있다. 같은 해에 출간되었던 폴리티스(Politis)의 개설서 또한 읽을 만하다. 일독을 권한다. 올해 완역본의 출간으로 이제 다시 새로운 '무기'를 탑재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하여, 함께 하는 일독을 권커니 잣거니.


▷ 단 한 순간으로서만 남은, 어느 저녁. 창문을 통해 넘어온 노을이 너무 예뻐서, 그리고 그 노을의 조명을 받은 공간이 너무 아늑해서, 문득 사진 속에 담아본 나의 '고요한 전쟁터'. 이 사진을 찍자마자, 저 노을은, 거짓말처럼, 갑자기, 산등성이 너머로, 얄밉게 물러가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결국 저 저녁도, 여느 저녁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단 한 순간만으로서만 남게 되었다. 나를 매료시키는, 저 헤겔적 특수성과 보편성(들).

   

5) LP를 듣는 시간, 감싸는 먼지들의 소음 속에서. 일종의 망중한, 혹은 의도하지 않은 어떤 '준비'의 시간. 나는, 한 인간을 '아는' 척도란, 시간에 비례하는 것이라는, 지극히 '일반적인'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얼마나 서로 부대꼈는가, 얼마나 서로 살을 맞닿았는가, 라는 질문들에 대한 나름의 대답들, 차라리 또 다른 한 무더기의 질문들. 한 인간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이런저런 담화가 항상 경솔하게 느껴지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런 '시간'에 대한 물음과 믿음 때문이다. 그 시간이 커지고 깊어짐에 따라, 오히려 언어는 줄어들고 축소되기 마련이다. '이심전심', '불립문자'라고 완곡하고 범박하게 말해도 좋다. 어쨌든 그럴수록 언어는 침묵에 더욱 근접해간다. 견딜 수 없는 침묵ㅡ언어는 부재하고, 급기야는 실종된다ㅡ이 있는가 하면, 모든 말을 하는 침묵ㅡ연타(連打)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무(無), 곧 하나의 연속체(continuum)에 도달한다ㅡ도 있다. 앎을 포장한 언어들의 수다스러움, 마치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취약한 단어 몇 줌에 담을 수 있을 것처럼 구는 저 모든 규정의 몸짓들이, 지겹고도 두려우며, 천박하면서도 척박하며, 또한 시시하면서도 서럽다. 조도(照度)를 한껏 낮추고, 실로 오랜만에 존 콜트레인(John Coltrane)의 <A Love Supreme>을 턴테이블에 올려놓는다. 가사가 없어도, 가사가 들려온다, 그런 점이 좋다(그런데, 이와는 조금 다른 맥락에서, 콜트레인은 굳이, "a love supreme"이라는 어구를, 입을 떼어, 그렇게 반복해서 읊조릴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하나의 아쉬움, 이 느낌만은 역시나 오롯이 그대로인데, 하지만 유독 오늘따라 저 부정관사 하나가, 자꾸 마음에 걸리는 건, 왜일까).

   

▷ Martin Heidegger, Zur Sache des Denkens,

    Tübingen: Max Niemeyer, 1988³(1969¹).

6) 다시, 선물에 대하여: 일본에 다녀온 친구로부터 몇 달 전에 선물받은 앙증맞은 회중시계 하나. 귀를 기울이면, 책상 위에서 항상 째깍째깍, 나의 시간에 '메터(Meter)'를 부여해주고 있다. 말하자면, 선물은 그가 내게 준 것이었으나, 다시 말해서, 그가, 내게, 선물을, 준, 것이었으나, 이 모든 주어와 술어와 목적어의 구조를 넘어서서, 다만, '그것은 준다'. 인칭과 비인칭, 그리고 [어쩌면] '3인칭'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금 주워 담으며, 오랜만에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Zeit und Sein)」 속 몇몇 구절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차라리, 선물(gift/don)이란, 그러므로 하나의 '문형 연습'이랄까, 혹은 외국어 습득하기에 준하는, 어설픈 걸음마와도 같은 하나의 힘겨운 '격설(鴃舌)'이랄까: '있음'을 서술하고 있는 [서구의] 여러 형식들. '직역'하자면, "그것이 준다(Es gibt)", 혹은, "그것이 거기에 갖고 있다(Il y a)". 그러니까, "비가 온다(Es regnet/It rains/Il pleut)". 아니, 차라리, "그는 운다(Il pleure)". 그러므로 사실 '형이상학'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름으로 포장된 하나의 물음이 묻고 있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있음'이란 무엇인가? 이에 나는 다시금 '번역'과 '정의'의 형식으로 되돌아온다.


   

▷ Jacques Lacan, 
    D'un discours qui ne serait pas du semblant. Le séminaire, livre XVIII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2006.

▷ Jacques Lacan, 

    Le moi dans la théorie de Freud et dans la technique de la psychanalyse.
    Le séminaire, livre II
    Paris: Seuil(coll. "Le Champ freudien"), 1978.

7) 정신의 단련, 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소모: 출간은 작년부터 예고되었지만 얼마 전에야 비로소 도착한, 따끈따끈한 라캉의 세미나 18권(그러니까 전체 25권 중에서 이제 모두 열네 권이 공식 출간된 것!). 라캉이 이제는[이라고 해봤자 이미 1971년!] 한자(漢字)에도 손을 대는군, 하고 혀를 차며 읽고 있다가, 예전에 폭소를 터뜨리며 읽었던 세미나 2권의 한 구절이 갑자기 떠올라 살짝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라캉의 대사: "어디, 「도둑맞은 편지」 읽어 온 사람들 있으면 손 좀 들어봤으면 좋겠는데... 이런, 절반도 안 되는군!"(세미나 2권, p.228 참조)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곳에서나 이곳에서나, 날로 먹으려는 사람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는 아마도, 내가 종종 라캉을 게 눈 감추듯 읽으면서도, 할 수 있는 한 항상 그로부터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이기도 할 터.

▷ Arnaud Bouaniche, Gilles Deleuze, une introduction, 

    Paris: Pocket(coll. "Agora"), 2007.

8) 코스모폴리스(cosmopolis)를 가로지르거나 훑어내리는 지하철이라고, 아니, 차라리 메트로폴리스(metropolis)를 관통하는 지하철이라고, 그렇게 말해야 할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서울을 살짝 벗어나 살기 시작한 이후로 지하철은 나의 또 다른 '훌륭한' 독서 장소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감사하게 받아들여야 할까. 서울의 어느 곳으로 출타를 해도 책의 한 장(章)쯤 읽어내는 건 유(類)도 아닌 이 '적확한' 거리감과 '적절한' 소외감. 요즘 그 지하철을 오가며 가장 흥미롭게 읽고 있는 책은, 올해 출간된 들뢰즈 철학에 대한 작은 개설서 한 권(특히나 책 사이사이에 포진한 박스 기사(encadré)까지 '게걸스럽게' 읽게 되는 아주 알찬 입문서로서, 역시나 일독을 권한다). 초반부(pp. 29-38)에 끊임없이 강조되고 있는 저 '새로움(nouveauté)'에 대한 강박ㅡ나는 이것을 하나의 '강박'이라고, '강박'일 수밖에 없다고 보는데ㅡ을, 이제는 클리셰가 되어버린 '새로움'의 어떤 그림자일 뿐인 것으로 치부하면서도, 동시에 한편에선 이미 잔잔한 감동을 받고 있는 나는, 이 나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당신은 알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먼저, 나는 당신이 알기를 바라고 있기는 한 걸까, 알 수 없다,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들뢰즈의 철학적 과제 하나를 간단명료하게 요약한 책 속의 어느 한 구절처럼, 다만 "현재를 진단할(diagnostiquer le présent)" 수 있기만을 바랄 뿐(p.32). 그러니, 기껏해야 나는, 나라는 인간은, 코스모폴리탄이 되기는커녕, 메트로폴리탄(metropolitan)이 되기에도 힘에 부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닌가, 생각해보면 그렇다. 물 밖으로 나온, 아니 이제는 숫제 처음부터 물 따위는 없었을 거라고 지레짐작까지 해대는, 호흡만 가쁜 한 마리 물고기처럼,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뭍 만난' 물고기처럼.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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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소개)『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
    from 도서출판 그린비 2008-08-11 14:40 
    ‘생명의 철학’으로 다시 읽는 들뢰즈『시네마』—탈인간의 가능성을 창조하는 예술의 역능 『이미지와 생명, 들뢰즈의 예술철학』클레어 콜브룩 지음 정유경 옮김|도서출판 그린비|갈래 : 철학, 인문발행일 : 2008년 8월 5일 | ISBN : 9788976823151신국판변형(150*220mm)|304쪽리좀 총서의 네 번째 권으로서 들뢰즈의 독특한 이미지론을 통해 철학과 영화 그리고 예술의 역능을 살핀다. 살아 있는 인간 신체가 이미지화하는 능력으로 세...
 
 
마늘빵 2007-11-30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일상을 담은 페이퍼 조차 너무 어려워요. 문단을 나눠주세욤.
그나저나 저 노랗게 물들은 서재는 너무 부럽군요.

람혼 2007-11-30 12:49   좋아요 0 | URL
제가 문단 나누기를 잘 못하는 악습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저도 평소에는 잘 보지 못하는 저녁 노을 풍경이었습니다.

로쟈 2007-11-30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모두는 단순한 '향유자'가 아니라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에서 람혼님의 기본 입장을 읽을 수 있군요. 이것은 '가장 좋은 의미'의 엘리트주의는 아닐까요? 하지만 레이 초우의 말을 빌면 그러한 "발언을 형성하게 한 제도적 조직과 기구에 대한 의식"은 거기서 누락되는 게 아닐까요? 아시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이란 대단한 고전이 있다, 이게 우리말로 번역되었고, 800쪽이 넘는다, 란 발언 자체가 지극히 정치적인 함의를 담고 있습니다(너희가 이 정도 안 읽었으면 아는 체하지 마라). 읽는다는 건 언제나 '여가'의 문제이고 '유한계급적' 토대와 결부됩니다. 내가 책을 읽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대신 설겆이를 해야 하고 허드렛일을 해야 하는 것이죠. 그들에게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액면으로만 따지자면 그렇지 않은 번역이 있나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너희도 '연구자'가 돼 보라, 고 권유할 수 있을지도. 가장 나쁜 의미의 엘리트적, 부르주아적 입장에서 깆게 되는 생각입니다...

람혼 2007-11-30 12:50   좋아요 0 | URL
맞는 말씀입니다. 특히나 계급적이고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장치들에 대한 의식을 누락한 읽기에의 '강요'가, 가장 나쁜 의미에서에의 엘리트적/부르주아적 입장이 될 수 있다는ㅡ살짝 비틀어서 따끔히 지적해주신ㅡ말씀에는, 부끄러움과 불끈거림이 동시에 깃든 동감을 표하게 됩니다. 제 기본적인 생각은 어쩌면 가장 나쁜(?) 의미에서의 '유토피아주의'인지도 모르겠습니다(아마도 그래서 '몽상'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이겠죠^^;). 다만 우리 모두 '연구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 생각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개인적으로는 바로 저 "너희가 이 정도도 안 읽었으면 아예 아는 체도 하지 말라"는 말로 대표되는 지식-권력적 편향성에 대한 의문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희랍어를 알고 <형이상학>의 번역본을 원문과 비교해가면서 읽을 수는 없겠죠(다만 여기서 희랍어를 한다는 것이 일종의 유한계급적 표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잠시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하지만 존재 사태에 대한 이해가 언어적 상황을 벗어나서는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설픈 '하이데거리안(혹은 어쩌면 '안티-하이데거리안'?)'의 입장에서는, 번역자만의 '국어'와 그 번역을 불평하면서도 계속 들춰볼 수밖에 없는 독자만의 '국어' 사이에 가로놓여진 깊은 골에 자꾸만 시선을 주게 됩니다. 로쟈님 같은 분이 있어 많은 번역자들이 자극을 받고 의견을 공유하며 오류를 수정하는, 그리고 독자들이 '좋은' 책과 '나쁜' 책을 구분하고 '양서'의 출현에 일정 부분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분위기는 실로 고무적인 일이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그저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ㅡ영어만 공부해서 취직하기도 벅찰진대!ㅡ단순히 '번안'된 번역본의 '국어'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러한 '국어'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타자들, 다른 언어들에 대한 관심과 의문을 스스로 촉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나은 번역본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으며 또한 존재할 필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저의 '유토피아주의'의 기본적 발상입니다. 개인적인 견해로는, 오히려 외국어와 번역에 대한 어떤 '독점'이 역으로 기존의 "제도적 조직과 기구"를 더욱 공고히 하는 측면 또한 분명히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이 때문에 '국어'의 자리라는, 이 지극히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함의를 담고 있을 수밖에 없는 '국가-언어'의 위치에 대한 의식이 희박해져가는 건 아닐까요? 이는 반복해서 말씀드리자면, 제게는 '희망의 원리'이자 동시에 '공포증'이라는 복합적 감정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개인적인 계기를 마련해줍니다. 번역과 외국어의 문제는 분명 계급적 문제 혹은 사회-교육적 문제와 결부되어야 하는 것이겠으나, 말하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 더욱, 이 '몽상'과 '잡설'의 자리는 바로 그 '계급투쟁'의 지점에 대한 의식과 의문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저 또한 단지 '이 번역은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고만 툭 던지는 번역본이 '면죄부'를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번 번역본도 결국...?'이라는 반복되는 실망, 그리고 독서를 하면서도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는 반복되는 '이물감'에 대해 우리가 취할 수 있는 보다 '적극적인' 해법은 무엇인가, 어쩌면 이 물음이 '유토피아적 몽상'의 시발점이 될 수는 없을까, 혼자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언젠가 지나가는 길에 잠시 말씀드렸듯이, 번역과 외국어에 대한 제 기본적인 발상은 로쟈님께 이렇게 '글'로 고백하기가 부끄러울 만큼이나 지극히 소박합니다: 소통하기 위해서.

로쟈 2007-11-30 13:38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람혼님의 식견과 열정이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되기를 기대하는 쪽입니다. 조금 다른 얘기로 둘러보면, 똑똑하고 글 잘쓰는 젊은 문학평론가들이 많은데, 안타깝게도 문학평론집은 거의 팔리지 않고 그들에게 주목하는 독자들도 거의 없습니다. 저는 이 '사이'에, 이 '중간'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죠. 전에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학습'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것도 그런 문맥인데, 공부 잘하고 열심히 하는 학자들 적지 않습니다. 다만 학생/대중/독자들과 소통되지 않고 있고 이게 저는 더 시급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발견되지 않은 새로운 지식'을 찾는 게 아니라 이미 발견된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하는 것, 그게 더 중요한 현안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람혼 2007-12-01 14:07   좋아요 0 | URL
'발견된 지식을 보다 널리 공유하는 것'은 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그 '사이'와 '중간'의 문제가 어떻게 해결/해소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야말로 '인문학의 위기/기회'와 가장 밀접하게 결부되는 질문이겠지요. 무엇이 '소통'인가라는 물음을 끈질기게 가슴 속에 품고 느린 걸음이나마 정진해보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yoonta 2007-11-30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말씀에도 동의하고 람혼님말씀에도 고개를 끄떡이게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로쟈님말씀처럼 외국어공부나 번역이라는 것이 누구나 쉽게 접근할수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점에서 일부 지식인들에게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현실적 판단..그리고 그처럼 번역이라는 것이 누구나 가능하지 않다고 전제하는 엘리트의식아래에서 하향평준화된? 번역본을 내놓는 번역자들의 태도를 비판하는 람혼님의 다소 유토피아적인 관점..둘 다 수긍할만한 일면이 있다고 봅니다. 다만 "원전과 함께 읽을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부분에서는 약간 갸우뚱하게 되는 측면이 있는데..원전을 환기시키는 번역이라는것이 과연 무엇일까하는 부분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때문입니다. 위에 말씀하신 "하향평준화된 번역"이란 것이 한국어로 읽을때의 가독성부분에만 촛점을 맞춘 번역을 지칭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에의 대안으로 아마도 원어의 뉘앙스와 느낌을 그리고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린 번역이 이상적인 번역이라고 말씀하시는것 같은데..그것이 꼭 한국어로 읽을때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일일까하는 부분에서는 그렇지도 않을수 있을텐데하는 의문때문입니다. 원어의 느낌과 저자의 의도를 최대한 살리면서 한국어로 번역했을때도 쉽게 이해할수있도록 번역하는 것이 원래 번역이 지향하는 "유토피아"아니었던 가요? 로쟈님이 생각하는 좋은 번역도 결국 그것을 말씀하시는걸로 저는 이해합니다.

람혼 2007-12-01 14:07   좋아요 0 | URL
의견을 잘 정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yoonta님(사실 제가 항상 yoonta님을 '윤타'님이라 부르지[쓰지] 않고 'yoonta'님이라 부르는[쓰는] 것에서도 제 [편집증적] '언어관'이 드러납니다^^;). 말씀하신 대로,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번역"이란 어구는 제 생각에도 '구별 짓기'와 '대립각을 세우기'라는 측면에 있어 문제의 소지가 많은 부분이긴 합니다. 제가 벤야민의 '순수 언어'를 언급한 것, 그리고 제 생각의 시발점이 다분히 '유토피아적'이고 '몽상적'이라고 전제한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인데요, 분명 '하향 평준화'된 번역본이 지칭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가독성의 영역, 거칠게 말하자면 곧 '의역'의 영역입니다(그러므로 '하향'이라는 것이 꼭 질적인 저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저 역시나 '이상적인' 번역의 정의(definition/justice)에 대해서는 yoonta님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이는 조금 다른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예를 들어, 인구어의 구조는 한국어의 구조와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가 흔히 '번역문 투'라고 부르는 어투가 존재하고 또 이는 우리에게 상당히 익숙한 상황이기도 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잘 아시는 바입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문장이 비문인가 아닌가를 점검하기 위해 주어와 술어의 호응, 주절과 종속절의 호응을 따지는 것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우리식'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인구어의 교육과 번역이 낳은 결과겠지요. 확장해서 말하자면 번역에 있어서는 쫓아야 할 두세 마리 토끼들이 존재하는 것일테지요. 흔히들 이러한 언어적 '구조'의 문제만을 집중적으로 좇다가 저들말도 우리말도 아니게 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되지만, 그래서 또한 가장 훌륭한 '의역'의 가능성을 찾곤 하는 것이지만, 저는 오히려 '직역'의 영역에서 더욱 치밀하게 파고들어갈 부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또한 제게는 이 점이 바로 벤야민의 수수께끼(?)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 다시 읽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곧, 말하자면 '번역문 투'의 정교화와 첨예화라는 형식이 어떻게든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설픈 '직역'을 택하여 차마 읽을 수도 없게 되는 번역본들을 여럿 봐왔지만, 그래서 그러한 길이 위험한 길이라는 생각 또한 결코 떨쳐버릴 수 없지만, 동시에 '이상적인' 번역의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펼쳐보게 되는 생각의 한 자락은 바로 이러한 '직역'의 어떤 가능성과 결부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능성이 제가 생각하는 번역의 이상적인 조건, 곧 원문의 언어가 가진 구조와 성격을 '환기'시키는 '이상적인' 번역의 한 조건이 될 수 있겠죠. 다만 이러한 결과물이 '여전히' 한국어인가 하는 점이 의문으로 제기될 수는 있겠지만, 이는 '국어'의 문제, '국가-언어'로서의 '한국어'의 문제와 결부되어 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코스모폴리탄의 '국어'라는, 일견 형용모순으로 보이는 언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도, 제게는 사실 이러한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어쩌면 이는 일종의 'eidos'에 대해 품고 있는 제 개인적인 '집착'으로[만], 또는 말 그대로 지극히 '이상적인' 조건들로[만] 소급해가는 측면이 있겠으나, 뭐랄까, 이러한 번역에 대한 상상과 몽상, '간극' 속에만 존재하는 '순수 언어'에 대한 공상은, 어떤 구체적인 번역에 대한 비난이나 비판이라기보다는, 제 스스로에게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다짐을 두는, 일종의 '채찍'이자 '신발끈 매기'의 측면이 강하다는, 그런 고백 아닌 고백을 해봅니다.^^

yoonta 2007-12-01 1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을쓰면서 약간은 람혼님의 글을 거칠게 요약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위의 댓글을 보니 불분명하게 다가왔던 람혼님이 생각하시는 '이상적 번역'이 무엇인지 인제 감이 좀 잡히네요. 결국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번역'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견해이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번역본을 보다 보면 "이런 구절은 차라리 직역하는게 더 좋았을 텐데"하는 구절이 많은데 그런 점에서 번역가들의 지나친 의역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적절한 직역과 의역의 접점을 찾는 일은 참 힘든 일이다라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의심없이 올바른 어떤 상으로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소위 "國-語"라는 언어에 대해서 그 속에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개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과 동시에 그렇다면 보다 이상적인 "코스모폴리탄"적 언어 혹은 "순수언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것인가라는 고민을 번역이라는 작업을 통해서 하시는 람혼님의 "신발끈 매기"에 대해서는 저도 동참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아직까지 저는 능력미달입니다..^^;;

그건 그렇고 님의 본업은 작곡이신가봐요? 네이버블로그 가보니 작곡작업도 손수하시는것 같네요..책보시랴, 작곡하시랴..눈코뜰새 없으시겠습니다.^^

참 글고..John Coltrane의 a love Supreme 앨범은 Blue Train과 더불어 제가 가장 좋아하는 Coltrane 앨범이랍니다..^^

람혼 2007-12-03 03:03   좋아요 0 | URL
아마도 yoonta님의 블로그에 들어가보신 분이라면 "능력미달"이라는 이 '과도한 겸양'을 아무도 믿지 않으실 게 뻔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수학과 철학, 혹은 수학과 음악 사이의 점접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일천하고 미약하나마 지속적으로 사유를 계속해오고 있지만, 가끔씩 올려주시는 yoonta님의 글에서 많은 도움과 아이디어를 얻곤 한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이 작은 댓글의 자리를 차용해, 새삼 감사의 마음을 전해봅니다.

눈코 뜰 새 없을 정도로 부지런한 편은 못 되지만, 본의 아니게(?) 작곡과 연주를 본업으로 삼고 있네요. 작업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좋아하시는 Coltrane의 앨범이 저랑 일치하시네요.^^ 그에겐 많은 음반들이 있지만, 저 역시나 말씀하신 저 두 장의 음반, 그리고 Ballads 앨범을 가장 좋아한답니다. 언제 시간이 되면 yoonta님과 음악 이야기도 실컷 나눠봤으면 합니다(Bowie도 좋아하신다는 말씀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qualia 2007-12-02 0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 님, 안녕하십니까? 처음으로 인사드리게 되는군요.

람혼 님께서 올리신 번역에 관한 흥미로운 사색의 글, 잘 읽었습니다. 로쟈 님과 yoonta 님의 댓글도 흥미롭군요. 그런데 번역의 정의, 직역과 의역의 상호관계와 그들 간의 차이점 따위와 관련하여 몇 가지 람혼 님께 의문이 생깁니다. 람혼 님께서는 이상적인 번역은 (일종의) 직역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하십니다. (람혼 님의 핵심 주장을 윗글에서 따오되, 편의상 약간의 어구를 가감하고, 문장 구조를 약간 변경하고, 토씨 따위를 몇 개 바꾸어서 다음처럼 제시해 봅니다.)

좋은 번역(혹은 이상적인 번역)이란, 외국어를 한국어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게 해주는 번역이 아니라, 한국어 번역의 ‘원문’이 되는 외국어의 존재를 ‘가리키고’ ‘완벽한’ 언어의 타자를 계속 ‘환기’시킬 수 있는, 또한 심지어 그러한 유령의 출현을 ‘조장’할 수 있는 번역이다.

즉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자연스러운 한국어’로 된 번역(즉 의역)이 아니라, 오히려 번역 그 자체로서는 어쩌면 ‘실격’일지 모르는 그런 ‘불완전한’ 직역이 좋은, 이상적인(*불완전하기 때문에 이상적이라는 람혼 님의 이 함축!), 번역의 한 조건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외국 고전을 ‘원전과 함께 읽을 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직역(본)’이 좋은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직역본을 끈질기고 진득하게 ‘독해(讀解/毒解)’하는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외국 원전에 대한 ‘진정한’ 이해에 이를 수 있다.

람혼 님의 기본적 주장/견해는, 제 생각에, 위와 같이 요약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은 번역에 대한 일종의 ‘유토피아적 몽상가’ 혹은 ‘순수언어주의자’(이런 개념이 있다면)의 지고지순한 천명/선언 같아서 오히려 기존의 원론적 번역 담론에 신선한 자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듭니다. 원래 순수주의자나 근본주의자가 그 누구보다도 전복적일 수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람혼 님의 윗글과 댓글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몇 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즉 람혼 님의 직역 개념 자체는 무엇인가? 람혼 님께 의역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과연 다른 독자님들은 람혼 님의 번역 개념, 직역 개념, 의역 개념, 그리고 이것들 사이의 상호관계를 윗글/댓글을 읽고 구체적으로 잘 파악할 수 있을까? 직역/의역 각각의 적법성 혹은 그 우열관계를 이야기하면서, 어떻게 그 논의의 전제 조건이자 성립 조건인 각각의 개념 제시는 없는 것일까? 그저 언중이 상식적으로 공유하고 있는(혹은 공유하고 있으리라고 막연히 짐작되는) 사전적 의미의 직역/의역 개념만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이런 물음들이 계속해서 글을 읽는 내내 맴돌았습니다.

제 기본적인 생각은 이렇습니다. 어차피 번역이란 그 시초부터 ‘의역’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모든 번역은 그 본질/본성/탄생에서부터 의역이며, 진정한 의미의(다시 말해 순수언어주의자적 개념의) 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제 주장 또한 제 자신의 의문 제기에 대해 응답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개념 규정 문제는 매우 복잡하고 심층적인 사안이기 때문에 일단은 임시방편으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즉 직역/의역 개념은 형식적인 혹은 ‘개념적인 개념’(이런 말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요)으로서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의 번역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언어 옮기기 작업’은 의역이며, 이 의역이라는 것은 서로 이질적인 언어/사고/문화 따위의 암호를 ‘상호 이질적으로’ 해독하는 과정이며, 이 이질적인 상호 해독 과정은 근본적으로 원전을 왜곡/변형/변환/재창조할 수밖에 없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밀고나가 말한다면, 역설적으로 가장 잘 왜곡/변형/변환/재창조하는 것이 가장 잘 번역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물론 이것이 오독/오역/오도를 말하는 것이 아님은 두말할 나위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에 제가 말씀드리는 번역/직역/의역 개념을 설득력 있게 구체화하여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한다면, 람혼 님의 문제 제기는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현재로선 섣부른 생각이긴 하지만요).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에서, 그러니까 어떤 특정한 직역 개념이나 의역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 견지에서, 위에서 람혼 님께서 거론하신 직역/의역의 가독성 문제 건에 관해 간단하게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컨대 우리 한국어 번역문이 주술 호응 관계, 주절과 종속절의 호응 관계 따위의 문장의 구성 측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문법적 완성도를 보여준다면, 그것이 의역이든 직역이든 독자들에게는 충분히 잘 읽히리라고 생각합니다. 즉 원전 내용의 과학적 전문성, 철학적 심오함, 이론 전개의 치밀함, 배경 지식의 방대함 따위에서 기인하는 난해함도 번역가가 그 내용을 정확히 독해하여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매끄러운 번역문으로 바꿔놓기만 한다면, 그것은 직역이든 의역이든 독자들에게 쉽게 읽힐 수 있다는 것이죠(게다가 올바르게 내용을 파악하고 번역하는 번역가는 독자들을 위해 옮긴이 주나 해설로 원전의 난해함을 덜어줄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런데 여기에서 상식적 의미의 직역과 매끄러운(잘 읽히는) 번역문은 서로 대립하거나 역비례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흔히 읽기 뻑뻑하고 전혀 요령부득인‘번역투’나 ‘직역투’를 구사한다고 비판받는 번역자/번역가들이 변명을 늘어놓을 때, 원전의 원의미나 뉘앙스를 손상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하기 위해 직역을 했노라고 곧잘 강변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변명에서 (대개의 경우)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치명적인 약점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문장, 즉 비문이나 원전의 내용을 한참 빗나가는 오역 범벅을 수도 없이 저질러 놓고 ‘그것을 직역이라는 개념으로 얼버무리려 한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애초에 우리가 직역/의역의 개념에 관한 한 아직도 상식적이고 사전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으며, 올바른 한국어 문장 형식과 그 구성, 한국어 문장과 외국어 문장들 간의 유사점과 차이점, 비문의 각종 유형과 그 폐해 따위를 철저히 학습하지 않았다/못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요컨대, 제 생각에, 소위 직역과 가독성 사이에는 역비례 관계가 거의 없다고 봅니다(있다면 그것은 직역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원전의 난이도에서 기인하는 것이겠죠). 뒤집어 말하자면, 소위 의역이라고 해서 가독성이 더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죠. 즉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구성적으로 튼실하기만 하면, 직역이든 의역이든 얼마든지 통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따라서 번역가들은 자신의 오역이나 부실한 번역문들을 ‘직역이라는 애매모호한 개념’으로 변명하거나 합리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제 생각의 한 자락이 어느 정도 논리가 닿는 것이라면, 람혼 님의 견해와 어느 정도 대립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공감/동의하는 측면도 많기는 하지만요. 혼란스런 와중에서 두서없이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제 자신, 앞으로 생각을 더 공글려 나가야 할 줄 압니다. 고맙습니다.

람혼 2007-12-03 03:48   좋아요 0 | URL
우선 정성과 열정이 느껴지는 댓글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한 문장 한 문장을 즐겁고도 흥미롭게 읽었음을 고백합니다.^^ qualia님 반갑습니다, 저 역시 첫인사를 올립니다.

일단 제가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바로 저 벤야민의 '순수 언어'가 서 있는 지점입니다. 특히 근래에 들어 상당히 많은 분들이 벤야민의 삶과 저작에 큰 관심을 갖고 지속적이거나 간헐적으로 독서를 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나 일차적으로 벤야민의 글을 사랑하는 한 명의 독자로서, 그의 이론적 지점, 학문적 위치에 대해 여러 번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아마도 그의 '순수 언어'에 대한 이론은 이러한 그의 학자적 '입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거라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벤야민의 '순수 언어'란 것이, 우리가 그 말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순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개념인가, 바로 이 질문이 사실 저로 하여금 벤야민의 저 잠언과도 같은 글 <번역가의 과제>를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추동력입니다. 이는 벤야민의 이론적 입지와 연계시켜본다면 더욱 흥미로울 것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벤야민이야말로 '주변적'이며 '파편적'인 글쓰기에 있어 가장 큰 성과를 보여주었던 작가/철학자였습니다. 당연하게도(!) 그의 글은 독일 고전 철학과 괴테 이후의 독문학, 또한 당대의 유럽 문학/문화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지만, 그의 글쓰기는 동시대의 다른 비판 이론가들과 비교했을 때도 오롯이 도드라지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의 글은, 가장 극명한 예를 들자면, 후설(Husserl)의 것과도 다르고 아도르노(Adorno)의 것과도 다릅니다. 이 '변방'의 글쓰기 이론가에게 있어 도대체 '순수 언어'란 무엇인가, 어떤 관점에서 본다면, 저의 '직역'에 대한 생각은 바로 벤야민의 이 '순수하지 않은' 순수 언어, 가장 '주변적인' 중심 언어에 대한 물음의 형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따라서 다소 사변적인 색채를 띨 수밖에 없게 되는 듯도 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것처럼, 가장 순수주의적이면서 근본주의적인 것이 가장 전복적인 힘을 갖는 경우가 많지만, 벤야민의 '순수 언어'가 과연 그러한 조건에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의 물음이 될 듯합니다. 오히려 제 생각에는, 그러한 순수주의적, 근본주의적 번역론을 고수할 때 낭패를 겪게 되는 경우를 더 많이 봐왔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셨던 바, 모든 번역은 '숙명적으로' 일종의 '의역'일 수밖에 없다는 점, 아마도 벤야민의 출발 지점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하게 직역을 주장한다는 것, 그것은 우리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이미 하나의 실패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헤겔/라캉 식의 '오인'의 지점이 중요해지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벤야민에 대한 제 일천한 생각을 중심으로 에둘러서 말씀 드렸지만, 제 생각에는 사실상 qualia님의 번역에 대한 생각과 제 생각이 크게 대립된다고는 느껴지지 않습니다. qualia님이 쓰신 글에서 이미 함축하신 바, 정말 '제대로 된' 직역이라면 그것은 아마도 '가장 훌륭한' 의역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저는 벤야민의 '신비주의'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저 '직역'의 영역과 '의역'의 영역이 상충되지 않고 양립가능하게 만나게 되는 '신비한' 지점, 바로 그 번역의 지점이 '순수 언어'의 자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게는 아마도 이러한 접근이 벤야민의 저 '신비주의'를 이해하는 가장 '합리적인' 방식이 아닐까 생각해오는 중입니다. 그렇게 보면, '순수 언어'라고 하는 것이 동일성에 기반한 하나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번역과 이행과 이동의 사이, 그 틈새의 간극, 그 안에서만 존재할 것이라는, 따라서 그 '순수 언어'란 그 말 자체와는 다르게 '순수주의적'이거나 '근본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주변적이고 매개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순수 언어'란 곧 '타자의 언어'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는 것이지요. '순수 언어'와 '직역' 혹은 '원문을 환기시켜줄 수 있는 번역'에 대한 제 생각의 시발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그것은 가장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오인/왜곡/변형/재창조'의 길을 따르는 것이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저 '순수 언어'는 사실 가장 '불순한' 언어로서의 가장 '훌륭하고 이상적인' 번역어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qualia님이 갖고 계신 문제의식과 저의 것이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용어의 용법과 함의에 대해서 적확하게 잘 지적해주셨듯이, 기존의 단순한 '직역'과 '의역'의 구분법으로써는 저의 이 '몽상'은 잘 해결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야말로 제 생각을 더욱 공글려 가야겠지요. 감사의 말씀을 올려야 할 사람은 저인 것 같습니다.^^

일천하고 미약한 단상의 한 자락을 펼친 글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 놀랍고 또 한편으로 감사한 와중에서 또한 새롭게 느끼게 된 것은, 정말로 많은 분들이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 각자의 자리에서 많고 깊은 상념들을 하고 계시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번역의 문제에 대해서 우리 모두가 옳은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이 결코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 모든 방향과 생각들이 하류에서 함께 만나는 물처럼, 그렇게 '신비롭게' 만날 '불가능한 가능성'을 고대하고 또 그것을 위해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입니다.

푸하 2007-12-08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며 제 이해력의 한계의 지점들이 아릿아릿 전류를 일이키네요.^^ 앞으로 또 몽상보여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도 꾸벅~

람혼 2007-12-09 00:05   좋아요 0 | URL
푸하님, 이러한 만남의 반가움이 지닌 전류에 비할 것이 있겠습니까? ^^ 귀한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종종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