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 article qui s'intitule "Dans le musée, pour le vingt et unième siècle qui n'est pas encore venu, du vingtième siècle qui n'est pas encore parti" est publié en pages 44-45 dans le magazine coréen «Public Art». Il est le premier écrit pour ma nouvelle série "Lettres de la haine et de l'amour esthétiques pour mes contemporains" qui continuera dorénavant pendant quelques mois dans le même magazine.

<퍼블릭 아트(Public Art)> 2013년 7월호 44-45쪽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culture letter' 연재의 일환인데요, 앞으로 '동시대인을 위한 미학적 증오와 연애의 편지'라는 전체 제목으로 제가 몇 편의 편지 글들을 <퍼블릭 아트>를 통해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 편지의 제목은 "아직 오지 않은 21세기를 위해 아직 가지 않은 20세기로부터, 미술관에서"입니다. 일독을 권하며, 무엇보다 <퍼블릭 아트>의 예쁜 지면으로 읽으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소중한 지면을 제안해주신 안대웅 기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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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인을 위한 미학적 증오와 연애의 편지 (1)

아직 오지 않은 21세기를 위해 아직 가지 않은 20세기로부터, 미술관에서.
 

최정우 (비평가, 작곡가)
 

무엇보다 내가 이 편지를 하나의 용서(pardon)를 구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려는 점을 미리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당신의 성별도, 당신의 사회적 위치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는, 당신이 20세기 말에 태어나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띄우는 것은, 아마도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라는 미약한 확신과 불확실한 연대감 때문입니다. 백 번 용서해서, 만약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시간을 '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물론 '시대'라는 말을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의식이나 기억이 필요할 겁니다. 나와 당신이 공유하고 있는 의식 혹은 기억이란 아마도, 20세기에 상상했던 무언가 대단히 신나고 왠지 무척이나 찬란할 것만 같았던 21세기에 대한 꿈, 그리고 그 20세기 말의 꿈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이상하게 좌절돼버린 21세기 초의 어이없을 정도로 무참한 현실, 바로 이러한 꿈과 현실에 대한 의식 혹은 기억일 겁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앞으로 당신을 동시대인(contemporai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여 이 편지는 나의 동시대인인 당신에게 띄우는 우정의 편지이자 동시에 절교의 편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이 편지가 이러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관계의 편지라는 사실에 대해 또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편지는 나와 당신을 향한, 그리고 나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향한, 그런 용서의 편지,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만 하는, 그런 굴욕의 편지, 그런 역사이자 동시에 이야기(histoire)를 위한 편지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왜 절교의 편지일까요. 나는 동시대인인 당신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나는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당신을 다른 시간으로 떠나보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척이나 이중적입니다, 나처럼 말입니다. 나와 당신은 민주화라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정치적 과정이 그 어떤 시대보다 확고하게 안착된 것처럼 보이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민주화라는 여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행보를 보이며 전례 없는 (비)가시적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대를 그저 침묵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와 당신은 예술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태에서 향유되고 권장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술 그 자체가 가장 큰 의심을 받고 가장 널리 위험을 당하며 가장 많은 문제들에 봉착해 있는 사회를 그저 타성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과, 그런 나와 절교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이것은 왜 우정의 편지일 수밖에 없을까요. 나는 우리의 이러한 시대와 사회를 그저 손쉽게만 떠나보내거나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와 당신은 이 시대와 사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최종의 - 것으로 '최종적으로' 상정된 - 정치경제적 제도로부터의 이탈을 결코 쉽게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한 발짝도 떼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나와 당신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구속적 우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나와 당신은 이런 시대와 이런 사회 안에서 서로 언제나 충돌할 위험에 노출돼 있는 일종의 잠재적이고 영원한 적(敵)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지극히 단단하고 끈끈한 우정으로 묶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정과의 절교를 함께 실행할 수 있는 우정, 그런 우정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이 물음은 또한 내가 다시금 힘주어 당신을 동시대인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와 이러한 절교의 우정을 나눌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절교를 통해 저러한 우정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동시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편지가 그런 불가능과 그런 역설들의 편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 편지는 하나의 용서를 구하는 일로부터 시작됐고, 다시금 다른 용서를 구하는 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고 헤어질 것이며, 헤어지며 다시 만날 것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미술관에서 당신에게 절교를 선언하고자 합니다. 나와 당신을 함께 설레게 했던 그 수많은 시각적이고 시간적인 약속들에 대해 이별을 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부드럽게 경고했듯이(그러나 경고가 얼마나 부드러울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이별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별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작하고 향유하고 있는 미술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미술관 속에 갇혀 있고 닫혀 있습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 바깥으로의 탈출을 외치고 그러한 공간의 생산적 해체를 종용하는 모든 미술들 역시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된 '미술관'이라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틀 속에 묶여 버립니다. 세계는 미술관이 되었고 미술관은 세계가 되었습니다. 말로(Malraux)가 의미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세계는 '상상의 미술관(le musée imaginaire)'이 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미학적 유사(流砂)'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미술관은 세계의 유사(類似)임과 동시에 세계라는 유사(流砂)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저 흐르는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체제, 나와 당신은 그 체제 안에서 그 모래를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미학적 체제라고 하는 우리 세계, 우리 시대의 가장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얼굴일 겁니다. 우리의 시대에 미술과 미술관은 그런 모래 속에서, 그토록 너무나 가깝고 밀접한 우정 속에서, 근친상간과도 같은 사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사(流砂)라는 명명과 유사(類似)하게, 나는 이러한 관계를 또한 '미술관 속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 동물원 안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동물은 결코 미술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파리 속 동물들은 바로 나와 당신입니다. 나와 당신은 미술관 안에서 예술작품들을 경험하는 동물들로서 표상되고 재현되며 따라서 전시됩니다. 미술작품들은 오히려 그렇게 전시되는 우리 동물들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저 침묵 속에서 시대라는 전시품을 그저 타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동시대인, 동물들. 미술을 관람하는 나와 당신, 우리 동시대인들이 전시품이 되는 공간, 그곳이 바로 21세기의 미술관이자 동물원의 형태, 20세기에 우리가 꿈꿨던 낙원이자 동시에 지옥의 모습입니다. 나는 이러한 낙원과의 우정에 절교를, 이러한 지옥과의 사랑에 이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자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나는 또 묻습니다.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행가 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바로 그 유행가의 스쳐 지나치듯 간과되는 바로 그 가사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별할 수 없는 것과 이별한다는 것, 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데리다(Derrida)의 말처럼, 용서란,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바로 그것만을 말한다는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내가 미술관 안에서, 미술관을 떠나며, 미술관 밖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며, 그렇게 묻고 싶은 물음입니다. 나를 용서하지 말고, 당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타성 속에서 침묵하는 나와 당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진정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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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3-07-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람혼님. 외국에 계셨던 것 같은데...들어오신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세계가 단말기 속으로 들어간 인터넷 공간인지라 파악이 어렵군요.ㅋㅋ

아감벤이 말한 동시대성-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과 동시대인, 즉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으며 써내려 갈 수 있는자 라는 문장이 떠오는 글입니다.

그렇게 보면 동시대인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의 모든 인지와 감각을 총동원하여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결단을 총합해내는 거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솟아오를 수 있는 용기와 가벼움까지 끌어 안으려면...

오랜 만에 만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네요. 장마철이라 구름이 너무 많이 밀려와서 그런가 봅니다.
ㅎㅎ

어디에 계시더라도 무탈하게 정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람혼 2013-07-09 15:14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오랜만입니다, 드팀전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저도 그간 알라딘 서재와는 격조하다가 오랜만에 글 하나 남겨봅니다. 저는 아직 계속 파리에 있습니다.
저 또한 '동시대인'이라는 말을 아감벤의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썼는데, 역시 드팀전님이 적확하게 지적해주셨네요. 그 가장 '사소하면서도 거대한' 일을 잘 읽어주셔서 언제나처럼 깊이 감사드립니다. 밑이 과연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 무겁기만 한 이 세계에서, 어쩌면 우리의 환담은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팀전님 또한, 그 언제 그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장마 구름이 내리는 비를 뒤집어, 오히려 비를 하늘을 향해 올리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