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얼굴.

1) 아는 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ㅡ이 얼마나 과도한 '자기지시적' 문장인가ㅡ나는 한두 달 전 한 명예훼손 사건으로 고소를 당했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의 책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La haine de la démocratie)』 국역본에 대한 비판(?)을 문제 삼아, 이 책의 번역자는 스스로 고소인이 되었고 나를 비롯한 몇 명을 피고소인으로 만들었다. 이 사건은 아직 경찰과 검찰에 계류 중인 사안이므로 사건의 정확하고 자세한 개요에 대한 서술은 후일 다른 자리로 미룬다. 다만 내가 '피의자 조사'를 받은 날로부터 며칠 후, 원래는 구입 계획이 전혀 없었던 이 국역본을 한 권 구입했다는 사실만을 밝혀두고자 한다. 곧, 이하의 글은 이 사건의 법적인 측면과는 전혀 관계 없이ㅡ'피의자 조사' 과정에서 내가 펼쳤던 법적인 근거들에 관해서는 차후에 따로 자세히 정리해 이야기해볼 자리가 있을 것이다ㅡ오직 불어본과 국역본에 대한 '정밀 독해'만을 그 주제로 삼는다. 개인적인 일정에 따르자면 사건이 완전히 마무리된 이후 천천히 저간의 사정과 함께 국역본에 대한 '꼼꼼한' 비판을 써볼 계획이었으나, 가급적 번역자의 '명예'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이 국역본의 번역은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가장 시급하고 적절하게 대답할 수 있는 방법은, 단지 피상적으로 그것이 '오역'임을 주장하는 것보다 그 번역의 내용을 '정밀하게' 독해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에서, 이 책의 '해독'ㅡ실로, 이는 암호를 푸는 작업으로서의 '解讀'일뿐만 아니라 독을 제거하는 '解毒' 또한 되고 있는 것인데ㅡ을 시도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써야 할 글들과 번역해야 할 책들과 작곡해야 할 음악들이 산재해 있는 상태에서 이런 시도는 시도 그 자체가 일종의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더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의 번역이 지닌 문제점들을 보다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보고자 하는 것. 여기서는 일단 서론의 번역만을 정밀 독해해보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서론에 대한 독해를 정리한 글만으로도 이미 분량은 장난이 아니게 되었지만). 하지만 사건의 추이와 시간의 허락 여하에 따라 지금까지 정리해 놓은 다른 장들의 번역에 대한 분석도 가능하다면 차후에 올려보도록 하겠다(불어본을 기준으로 볼 때 이 책은 서론 5단락, 1장 33단락, 2장 21단락, 3장 22단락, 4장 22단락으로 이루어진, 그리 많은 분량의 책은 아닌데, 일전에 이미 불어본을 일독해둔 덕분에 비교 독해가 그리 지난한 작업만은 아니었지만, 혹시라도 이것이 저 국역본의 '센세이셔널리즘적'인 판매 전략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공상을 하는 재미도 있었다는, 고백 아닌 고백 한 자락, 지나가는 길에 첨언해둔다). 다만 이러한 글쓰기가 그 작성의 노고에 비할 때 그리 '생산적'이지도 않고 '발전적'이지도 않은 작업에 속한다는 '자조' 섞인 감상을 고려하자면ㅡ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자조'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이러한 이유가 번역 비평의 '무용론(無用論)'을 조장하는('舞踊論'이라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일부 번역계의 주장으로 환원되어서는 결코 안 되기 때문이다ㅡ, 되도록 이 글의 후속편은 작성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도래하기를 바라는 심정이지만 말이다(더불어 이러한 글은 별로 '대중적'인 것도 되지 못하는데, 번역 비평에 많은 관심을 두고 적극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독자들조차 이런 '까칠한' 글을 끝까지 꼼꼼하고 정밀하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내지 노파심 또한 개인적으로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저 다만, 읽어 내려가고 써 내려갈 뿐이다. 나의 이 글 역시 마찬가지로 꼭 그만큼의 '비판적인' 관점에서 꼼꼼히 읽히고 정밀하게 독해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 Jacques Rancière, La haine de la démocratie, Paris: La Fabrique, 2005.

2) 고소인으로서 번역자가 제기한 주장들 중에서 딱 한 가지는 정당하다고 본다. 곧 자신의 번역을 비판하는 이들이 영어 번역본의 문장들을 그 '증거'로서 제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번역자 자신은 영어 번역본을 중역한 것이 아니라 불어 원본을 직접 번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므로(그런데 이 말은, 이하의 분석에서 살펴보겠지만, 말 그대로 정말 '사실'에 기초한 주장인데, 이 말이 '진실'이 되는 이유는 이하에서 함께 확인해보도록 하자). 물론 이 주장은 그 자체로 정당하다. 단, 오로지 '형식적'인 측면에서만 그렇다. 불어의 번역에 있어서 그 어떤 언어보다도ㅡ물론 이탈리아어나 에스파냐어만큼은 아니겠으나ㅡ영어라는 번역어가 원문으로서의 불어에 더욱 '근친적'이고 '상동적'이라는 '상식'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자. 단, 번역자가 형식적으로 정당한 주장을 하고 있으므로 나는 그의 주장에 답할 뿐이다, 오로지 불어와 국역의 비교 독해를 통해서. 따라서 이하에서는 오로지 불어 원본만을 참고하여 번역의 정당성 여부를 따져보고자 한다. 단, 내용의 정확한 의미 파악을 위해ㅡ그리고 때로는 불어본과 영역본 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지적하기 위해, 혹은 심지어 영역본 자체의 '오역' 또한 지적하기 위해ㅡ때때로 영역본의 내용도 함께 비교 분석해보겠다(이와는 별개의 맥락에서 한 마디만 첨언하자면, 이론 저작의 번역에 있어 번역자가 직접적 번역의 대상이 되는 원문 이외에 영역본이나 독역본 등 다른 언어로 된 번역본을 함께 참조하지 않는다는 것은ㅡ특히나 인구어(印歐語)가 문제가 되는 경우에ㅡ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인데, 한 나라와 문화의 '국어'가 지닌 의미와 위치와 뉘앙스 전달에 그 '일차적인' 책무가 있는 문학 작품의 번역이 아닌 이상, 의미의 명확한 전달과 번역어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라도 타언어로 된 번역에 대한 참조는 거의 필수적이라는 개인적인 신념 때문이다). 불어 원본을 통한 번역 비판이라는 방법이 일종의 '정공법'에 해당한다고 한다면, 둘째로는 일종의 '우회로'를 따라가는 길, 곧 일종의 '귀류법'을 적용하는 '심정적' 번역 비판의 방향이 있을 수 있겠다(단, '심정적'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이것이 '심리적'인 방법론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데, 이는 오히려 번역에 대한 일종의 '정신분석'에 해당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는 '전체적'이고 '중립적'인 관점에서ㅡ특히 여기서는 이것이 '중립적'인 관점이라는 사실이 강조되어야 할 텐데ㅡ'어떻게 이런 번역이 나올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을 설정한 후 그러한 구체적인 정황을 '이해'하고 '해명'하는 방식으로 비판을 진행하는 것이다. 지극히 '역설적인' 비유를 통해 이를 다시 말해보자면, 이는 곧 내가 '선의의 비판자(devil's advocate)'라는 입장에 서서 번역 비판을 수행하겠다는 뜻이 될 것이다. 크게 이러한 두 가지 비판 방식을 취하게 되는 이하의 분석에서 불어 원문은 La Fabrique 출판사에서 2005년에 간행된 『La haine de la démocratie』를, 영역본은 Steve Corcoran의 번역으로 Verso 출판사에서 2006년에 간행된 『Hatred of Democracy』를, 국역본은 백승대의 번역으로 인간사랑 출판사에서 2007년에 간행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그 저본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노파심'에서 미리 밝혀둔다(따라서 이 '연년생' 책들로부터 인용을 할 경우, 해당하는 책의 서지사항은 생략하고 오직 그 언어와 쪽수만을 부기하겠다). 이하에서는 보다 '정밀한' 독해를 위해 단 한 문장도 건너뜀 없이 모든 문장들을 불어본과 대조하기로 한다.

   

▷ Jacques Rancière, Hatred of Democracy(trans. by Steve Corcoran), 
    London/New York: Verso, 2006.
▷ 자크 랑시에르, 『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백승대 옮김), 인간사랑,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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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첫 번째 단락은 모두 다섯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문장씩 차례로 꼼꼼히 살펴볼 텐데, 먼저 첫 문장의 원문과 국역을 비교해보도록 하자:

"Une jeune femme qui tient la France en haleine par le récit d'une agression imaginaire; des adolescentes qui refusent d'enlever leur voile à l'école; la Sécurité sociale en déficit; Montesquieu, Voltaire et Baudelaire détrônant Racine et Corneille dans les textes présentés au baccalauréat; des salariés qui manifestent pour le maintien de leurs systèmes de retraite; une grande école qui crée une filière de recrutement parallèle; l'essor de la télé-réalité, le mariage homosexuel et la procréation artificielle." (불어본, p.7)

이에 대한 국역본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가상의 침략 이야기를 꾸며내서 프랑스를 조마조마하게 하는 젊은 여인,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 적자에 허덕이는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폐위시키면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에게 왕관을 씌운다; 봉급생활자들 현행 연금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위를 한다; 초등학교는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 동성결혼, 인공수정은 비약한다." (국역본, 13-14쪽)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번역은 "가상의 침략 이야기"라는 구절이다. 여기서 "가상의 침략"이란 부분은 불어의 "agression imaginaire"을 번역한 것으로 보이는데, 먼저 'agression'을 '침략'으로 옮긴다면 이 문장의 의미는 이해하기가 어려워진다. 여기서 이 단어는 개인에 대한 폭행이나 공격을 의미하는 것인데 '침략'이라고 하면 집단 간의 공격을 뜻하는 것으로 오해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둘째, 이는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지적된 부분인데,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는 구절은 문제가 있다. 먼저 번역자는 로베르(Robert) 불어 사전에 나오는 'voile'에 대한 설명 중 특히 두 번째 항목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겠다: "종교적인 이유에서 여성들의 얼굴이나 이마, 머리카락 등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는 천 조각"이라는 설명이 그것. 친절하게도 예문까지 싣고 있다. 결국 이 "가면"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히잡인 것이다. 또한 단순히 "청소년들"이라고 옮겨진 "adolescentes"는 불어에서 여성 복수 형태의 명사로 "여학생들"(혹은 "여자 청소년들")로 옮기는 것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문맥에 비추어 볼 때도 더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사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학교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지 않으려는 청소년들"이라는 번역이 원문과는 다르게 지극히 '비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위험이다. '가면을 벗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여기서 그 의미가 청소년들이 학교에서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가면' 밑으로 감추고 숨기려 한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셋째, "바칼로레아 시험에 출제된 문제는 라신과 코르네이유를 폐위시키면서 몽테스키외, 볼테르, 보들레르에게 왕관을 씌운다"라는 번역은 '너무나 충실한' 직역이 거꾸로 '너무나 화려한' 의역이 되어버린 역설적인 경우로서, 오히려 이 경우에는 "바칼로레아 시험 제시문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가 지녔던 권위를 찬탈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와 보들레르"로 '단순 직역'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넷째, "봉급생활자들 현행 연금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시위를 한다"에서 "봉급생활자들" 다음에 조사 '~은'이 누락된 것은 편집자의 사소한 실수로 넘어가도록 하자. 다섯째, 이 역시 앞서 "가면"의 경우처럼 이미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부분이지만, 그랑제콜은, 결코, 절대로, 초등학교가 아니라는 점만을 밝히고, 이 역시 살포시 '즈려밟고' 넘어가도록 하자. 이어 "평준화에 근거한 평범화 교육을 창조하고 있다"고 옮긴 부분은 일종의 '창조적' 번역으로 보이는데, 원문을 그대로 옮겨보자면 "[기존의 입시제도와] 병행하는 학생 선발 과정을 창안한 한 그랑제콜" 정도로 번역될 수 있겠다. 뒤에서 또 보겠지만, 이 부분을 영역본에서는 "a Grande É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이라고 옮기고 있는데, 의미적으로 그렇게 큰 차이는 없지만, 분명 불어 'parallèle'과 영어 'alternative' 사이에는 약간의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점만을 첨언하고자 한다(따라서 영어본으로 중역했을 때 이 부분을 "대안적 입시 제도"로 옮기는 것은 의미적으로는 큰 차이가 없지만 분명 불어 자체의 뉘앙스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여섯째,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이란 역자 자신이 주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듯이, 단순히 말해서 '리얼리티 TV 쇼'를 뜻한다. 번역에 "각본 없는"이라는 구절이 꼭 들어갔어야만 했나 하는 의구심도 들지만, 무엇보다 리얼리티 TV 쇼가 비단 "생존경쟁"으로만 소급될 수 있는 개념인지도 의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번역은 "비약한다"라는 구절이 아닐까 한다. 이는 원문의 "essor"를 옮기는 과정에서 '동사화'한 것으로 보이는데, "각본 없는 생존경쟁 방송, 동성결혼, 인공수정은 비약한다"고만 하니, 어디로 어떻게 비약한다는 것인지 사뭇 궁금해지기까지 한다. 이 부분은 "리얼리티 TV 쇼와 동성 결혼과 인공 수정의 비약적인 증가" 정도로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해 보인다. 농담 삼아 몇 줄 더 덧붙이자면, 나는 개인적으로 이 열거들의 목록에 "국역본이 오역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쓸데없이 딴죽을 거는 번역 비판자들"이라는 구절을 첨가하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욕망에 시달리게 되는데, 이야말로 여러 '번역 비판자들'을 "가상의 침략 이야기"로 불편하게 만들었던 번역자가 고소라는 법적 행위를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 싶었던 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참고로 같은 문장을 영역본은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A young woman keeps France in suspense with her story of a make-believe attack; a few adolescents refuse to take their headscarves off at school; social security is running a deficit; Montesquieu, Voltaire and Baudelaire dethrone Racine and Corneille as texts presented at the baccalaureate; wage earners hold demonstrations to defend their retirement schemes; a Grande École creates an alternative entrance scheme; reality TV, homosexual marriage and artificial insemination increase in popularity." (영역본, p.1)

이 영어 번역에서 주목할 점은 본래 불어 원문에서 관계사를 포함한 명사구 형태로 되어 있는 열거들을 모두 문장 형태로 다시 바꿔서 옮겨놓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열거의 형식에서는 무엇보다도 '형태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데, 불어 원문과 영어 번역에서는, 서로 그 형태는 다르지만, 각각 그 안에서ㅡ불어 원문에서는 명사구의 형태로, 영어 번역에서는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ㅡ모든 열거들이 일관된 통일적 문법 형식을 갖고 나열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국역은 어떠한가. "[...] 하는 젊은 여인", "[...] 않으려는 청소년들", "[...] 허덕이는 사회보장제도" 등은 명사구로 되어 있지만, "[...] 왕관을 씌운다", "[...] 시위를 한다", "[...] 창조하고 있다", "[...] 비약한다" 등의 구절에서는 '완벽한' 문장 형태가 출몰한다. 게다가 쉼표와 쌍반점의 사용에 있어서도 전혀 일관성이 없다(명사구 사이에서는 쉼표를, 문장 형식 사이에서는 쌍반점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일관성'이라고 한다면야 할 말은 없다). 열거라는 형식에 있어서 이러한 일관성과 통일성의 결여는 번역문을 읽는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림과 동시에 그 번역의 수준을 의심케 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덧붙여 영어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할 것은ㅡ앞서 지적했던 '병행'과 '대안' 사이의 '뉘앙스' 차이를 제외하자면ㅡ마지막 부분 "increase in popularity"라는 구절에 대해서인데, 이를 중역하자면 "대중화되어 간다" 정도로 될 수 있겠지만, 보다 정확한 번역은 이미 앞서 밝힌 바대로 "비약적인 증가"일 것이다. 자, 이제 두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자:

"Inutile de chercher ce qui rassemble des événements de nature aussi disparate." (불어본, p.7)

국역본에서 이 문장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고 있다:

"어떤 본질에서 파생된 현상들을 그 본질의 범주 내에 묶어두려는 것은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 (국역본, 14쪽)

여기서 "어떤 본질에서 파생된 현상들" 운운하면서 번역된 구절은 아마도 "des événements de nature aussi disparate"를 옮긴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간단한 구절이다. 그러므로 이어지는 "그 본질의 범주 내에 묶어두려는"이라는 번역은 앞서 "nature"를 "본질"이라고 옮겼던 '깊고 무거운' 번역에 비례해 탄생하게 된, "rassembler"라는 단어에 대한 번역자 나름의 '친절한' 의역이자 해석에 다름 아닌 것. 하지만 이 '간단한' 문장은 다음과 같이 옮기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으로 보인다: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는, 앞서 열거한 여러 현상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다는 말일 뿐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질"이라는 번역어와 그 본질의 "범주"라는 번역어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찾아보려는 행위야말로 정말 쓸데없는 짓이 될 것이다. 아니, 그보다는, "쓸데없다(inutile)"고만 하면 될 말을 굳이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고까지 '확장'해서 옮긴 국역을 그대로 차용하자면, 그 말 그대로가 될 것이다. 세 번째 문장으로 넘어간다:

"Déjà cent philosophes ou sociologues, politistes ou psychanalystes, journalistes ou écrivains nous ont fourni, livre après livre, article après article, émission après émission, la réponse." (불어본, p.7)

이 문장의 국역본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 및 사회학자, 정치학자 및 정신분석가, 기자 및 작가들은 서적, 기사, 방송을 통해서 각자의 논평과 그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 (국역본, 14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언론인들, 작가들이 우리에게 책과 기사와 방송을 통해 계속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이 부분을 넓은 관점에서 보자면 국역본의 번역과 내 번역의 차이는 거의 없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앞서 "쓸데없다"를 "무모한 행위일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다"고 옮기는 어떤 번역의 '과잉'을 염두에 두자면, 단순히 "우리에게 답변을 제시했다([...] nous ont fourni [...] la réponse)"라고 옮기면 되는 구절을 "각자의 논평과 그에 대한 반박을 제시하고 있다"로 번역하는 어떤 '과도함'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이견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니,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에게 맡긴다. 다음으로 네 번째 문장을 검토해보자:

"Tous ces symptômes, disent-ils, traduisent une même maladie, tous ces effets ont une seule cause." (불어본, p.7)

국역본은 이 문장을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이 모든 징후들은 동일한 병증에 관한 이야기이며, 그 병증으로 인해 나타나는 모든 결과의 단 한 가지 원천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국역본, 7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 "그들은 이 모든 증상들이 동일한 병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즉 이 모든 결과들은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떤 차이가 있는가. 역자가 '이야기를 하다'라는 동사구를 사용해 번역함으로써 이 문장이 띠고 있는 '간접적 인용'의 의미를 살리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문장 자체로만 본다면 이 말이 "그들"ㅡ철학자와 사회학자와 정치학자와 정신분석가와 언론인과 작가들ㅡ의 어법이라는 뉘앙스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다. 바로 "그들"이 "동일한 병증"과 "단 하나의 원인"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 랑시에르 자신이 그렇게 단정적으로 규정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불어 원문의 삽입구 "disent-ils"의 뉘앙스, 이것이 번역 안에서 살아나야 하지 않겠는가. 첫 번째 단락의 마지막 문장인(이제 겨우!) 다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Celle-ci s'appelle démocratie, c'est-à-dire le règne des désirs illimités des individus de la société de masse moderne." (불어본, p.7)

"현대 사회의 대중, 사회 속의 개인이 지닌 무한 욕구를 기저로 작동하는 지배체제, 세칭 민주주의가 그 근원인 것이다." (국역본, 14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원인은 곧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 다시 말해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욕망들이 지배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먼저 지적할 것은 앞 문장의 "원인(cause)"과 그것을 이어받고 있는 대명사 "celle-ci"의 경우, 국역본에서 이를 굳이 각각 "원천"과 "근원"으로 다르게 번역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또한 "무한 욕구를 기저로 작동하는"이라는 번역 역시 다소 과도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두 가지이다: 첫째, 앞서 네 번째 문장에서 지적했던 문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간접적 인용'의 뉘앙스가 전혀 살아나지 못하고 있다. 곧, "근원인 것이다"라고 확정적이며 규정적인 어미를 쓸 것이 아니라 "체제라[고 말하]는 것이다"처럼 이 말이 "그들"의 어법임을 번역 안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야 하는 것이다. 둘째, "현대 사회의 대중, 사회 속의 개인"이라는 번역은 두 가지 의미에서 오역이다. 먼저 이 부분에서 "현대 사회의 대중"과 "사회 속의 개인"을 동격으로 번역했다는 것은 곧 불어 원문에서 "de"가 지닌 의미 관계를 잘못 해석했다고밖에는 볼 수 없는, 가장 초보적인 실수라고 할 수 있겠다. "individus de la société de masse moderne"은 그 자체로 단순히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라고 옮기면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이와 관련하여, 불어 "c'est-à-dire"가 서로 동격으로 연결시켜 주고 있는 것은 "현대 사회의 대중"과 "사회 속의 개인"이 아니라, "민주주의(démocratie)라고 불리는 것"과 욕망이 지배하는 "체제(règne)"인 것이다. 참고로 영역본에서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다음과 같다:

"This cause is called democracy, that is, the reign of the limitless desire of individuals in modern mass society." (영역본, p.1)

영역본에서도 일견 사소해 보이는 문제가 있다. 불어 원문에서 랑시에르가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는 부분을 전혀 강조 없이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이 바로 그것인데(이 점에 있어서만은 국역본이 원문의 강조를 잘 따르고 있다), 여기서도 "that is"라는 어구가 강조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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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다음으로 두 번째 단락을 살펴보겠다. 이 단락은 모두 여덟 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하, 경우에 따라서는 편의상 몇 개의 문장들을 한 번에 묶어서 검토해볼 것이다. 먼저 첫 번째 문장:

"Il faut bien voir ce qui fait la singularité de cette dénonciation." (불어본, p.7)

① "우리는 무엇이 이같은 비난의 기괴함을 생성시키는지 제대로 식별해야 한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러한 비난의 특이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 명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singularité"에 대한 번역어인데, 이 문장은 앞에서 서술한 민주주의에 대한 고발과 비난이 갖는 '독특한' 성격을 살펴보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맥락이므로, 이를 단순히 사전적 의미에 대한 도착적인 일대일대응에 가까운 방식으로 "기괴함"이라고만 옮긴 것은 내게 그 자체로 '기괴한' 번역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문장을 한 번에 묶어서 살펴보자:  

"La haine de la démocratie n'est certes pas une nouveauté." "Elle est aussi vieille que la démocratie pour une simple raison: le mot lui-même est l'expression d'une haine." "Il a d'abord été une insulte inventée, dans la Grèce antique, par ceux qui voyaient la ruine de tout ordre légitime dans l'innommable gouvernement de la multitude." (불어본, p.7)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신선한 화두는 아니다." "단순한 존립근거에 기반한 민주주의만큼이나 이에 대한 증오 역시 오랜 세월 쌓여왔다. 그렇기에 이 용어는 생성과 동시에 용어 자체에 증오심이 내재되어 있었던 것이다." "최초에 이 용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는데, 거기에는 극천박한 대중정부에 의해서 정당한 위계질서가 철저히 붕괴되는 것을 목도한 그리스인의 경멸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국역본, 15쪽)

이 부분 역시 계속해서 문제가 속출하는 번역이다.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오는 민주주의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증오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지배라는 천박한 형태를 통해 합법적인 모든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욕설이었던 것이다." 국역본의 두 번째 문장에서 "화두"라는 멋진 표현은 그대로 음미하면서 넘어가도록 하자. 세 번째 문장에서 "단순한 존립근거"라고 옮겨진 것은 아마도 불어 원문의 "simple raison"의 번역으로 보이는데, 이는 말 그대로 "단순한 이유"라는 뜻이다(이러한 '단순한 이유'에도 엄청난 '철학적' 무게를 부여하는 역자의 습관을 우리는 앞서도 "nature"의 번역에서 보았고 앞으로도 종종 목격하게 될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민주주의 자체만큼이나 오래되었다는 것, 그 이유는 단순하다는 것, 그것뿐이다. 왜냐하면 본래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인들에게는 일종의 욕설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단순한 이유"를 국역본의 번역을 통해서 과연 알 수 있을까. 이러한 '단순한 이유'에 "존립근거"라는 '무게감' 넘치는 단어가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 네 번째 문장에서는 역자가 '한국어 문장'을 만들어내는 방식 자체에 개인적으로 불만이 있지만, 지금 이러한 논의의 맥락에서 그러한 '미학적' 고려는 오히려 사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바로 다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겠다:

"Il est resté synonyme d'abomination pour tous ceux qui pensaient que le pouvoir revenait de droit à ceux qui y étaient destinés par leur naissance ou appelés par leurs compétences." (불어본, pp.7-8)

"또한 이 용어는 사람의 권능에 비례해서 호칭되고 출신가문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던 사람들의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부터 제시해본다: "권력이란 그러한 권력을 가질 운명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나 그러한 권력에 걸맞은 능력으로 인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었다." 이와 비교하여 국역본의 번역을 살펴보자. 국역본의 번역 중에서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는 구절은 원문 중 어떤 부분으로부터 '추출'된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는데, 굳이 애써 역자의 입장에서 추측해보자면, 역자가 동사 'revenir'에 연결되는 전치사를 'à'가 아니라 'de'로 잘못 파악하여 그것을 '탈피하다'로 해석한 것이라고밖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불어 원문에서 "de droit"는 하나의 부사구로 파악하여 '당연히' 또는 '권리상' 등의 의미로 해석해야 하며, 동사 'revenir'는 전치사 'à'와 연결하여 '주어지다' 또는 '속하다', '귀속되다' 정도의 의미로 새겨야 한다. 이러한 문법적 측면을 파악하지 못한 역자가 그 당연한 귀결로서 전치사 "pour"의 의미를 '~에게'가 아니라 '~에 대한'이라는 뜻으로 오해하여 민주주의에 대한 저 '어원론적'인 증오를 엉뚱하게도 "권한으로부터 탈피하는 것만이 진정한 권력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 대한 혐오"(강조는 람혼)라고 옮기는 웃지 못할 희극이 발생한 것이다. 나 같은 '비전문 번역가'도 간단히 지적할 수 있는 부분을 '전문 번역가'가 오역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실로 하나의 얄궂은 모순이 아니겠는가. 참고로 이를 번역한 영역본의 부분을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It remained synonymous with abomination for everyone who thought that power fell by rights to those whose birth had predestined them to it or whose capabilities called them to it." (영역본, p.2)

영역본에서도 'revenir à'를 'fall to'로, 또한 'de droit'를 'by rights'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어서 여섯 번째 문장으로 넘어가보자:

"Il l'est encore aujourd'hui pour ceux qui font de la loi divine révélée le seul fondement légitime de l'organisation des communautés humaines." (불어본, p.8)

"그런데도 이 용어는 인간 공동체 편재의 유일한 합리적 근거로서 인정받는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국역본, 15쪽)

나의 번역: "신성한 계시적 법만이 인간 공동체를 조직하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이에 대한 국역본의 번역은ㅡ지금까지 살펴본 대부분의 번역과 마찬가지로ㅡ상당히 부정확하다. 먼저 "조직(organisation)"을 "편재(遍在)"라는 단어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데, 이렇게 번역한 합당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다(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수 있는, '어이 없지만' 가능한 경우는, 이 번역어가 "편재"가 아닌 "편제(編制)"일 경우인데, '遍在'라고 당당히 한자까지 병기해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단순한 '실수'라기보다는 오히려 번역자나 편집자의 어떤 '오해'에서 빚어진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신성한 율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니? "율법"은 "loi"의 번역어라고 생각한다 해도, 여기서 '공부하다'라는 의미가 어떻게 도출되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마지막으로 역자가 단순히 "지금까지도 존속하고 있다"라고만 번역한 부분은 불어 원문에서 "il l'est encore aujourd'hui"라는 구절로, 여기서 생략된 부분을 '복원'해보자면, 'il est [resté] synonyme d'abomination encore aujourd'hui' 가 될 텐데, 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라는 뜻이 되는 것이다. 영역본(p.2)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생략 용법을 쓰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일곱 번째 문장과 여덟 번째 문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⑦ "La violence de cette haine est certes d'actualié.""Ce n'est pourtant pas elle qui fait l'objet de ce livre, pour une simple raison: je n'ai rien en commun avec ceux qui la profèrent, donc rien à discuter avec eux." (불어본, p.8)

"그런데 이 체제 증오에 대한 반발성 맹위는 분명히 현안문제가 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이 맹위를 본서의 대상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필자는 이 맹위를 비방하는 사람들과 공감대를 갖고 있지 않으므로 그들과 논쟁할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국역본, 15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물론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은 현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성이 이 책의 대상은 아닌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과 함께 토론할 것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la violence de cette haine"의 번역인데, 국역본에서는 이를 "이 체제 증오에 대한 반발성 맹위"라고 옮기고 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일단 "반발성 맹위"를 "violence"에 대한 번역어로 본다면, 이것은 "체제 증오"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는 뜻이 될 텐데, 여기서는 오히려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잠시 해당 부분을 영역본에서 참조해보자면(p.2) 이를 "the violence of this hatred"로 번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당연한 말이겠지만, 특히나 이런 경우에 있어서는 더욱 영어가 불어 번역에 참 '적합한' 언어라는 점을 새삼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되는데, 'de'를 단순히 'of'로 바꾸기만 하면 되니 오죽 편하겠는가, 이런). 또한 영역본에서는 불어의 "avec ceux qui la profèrent"를 "with those that spread it"라고 옮기고 있는데, 나는 이를 불어에 기준하여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로 번역하였다는 점을 첨언해둔다. 또 하나 지적하자면, 여기서 국역본의 역자는 "simple raison"을 "이유는 단순하다"라는 구절로 잘 번역하고 있는데, 왜 앞의 문장에서는 "존립근거"라는 엄청난 말을 썼던 것일까. 이 부분과 그 부분을 다른 뜻으로 생각했다는 말인가.

 

▷ 아메리카 합중국 헌법의 저 '악필'이 나를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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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다음으로 세 번째 단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단락은 모두 열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첫 번째 문장부터 검토해보자:

"À côté de cette haine de la démocratie, l'histoire a connu les formes de sa critique." (불어본, p.8)

"역사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즉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 형국을 경험해 왔다." (국역본, 15-16쪽)

나의 번역: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증오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의 형식들 또한 경험했다." 여기서 국역본의 번역이 문제가 되는 것은 전혀 동격이 될 수 없는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민주체체에 관한 비판"을 서로 동격으로 놓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의 의미는, 앞서 서술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와 나란히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형식들에 대해서도 또한 말하고자 한다는 점이다. 이 차이점은 섬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두 번째 문장과 세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La critique fait droit à une existence, mais c'est pour lui assigner ses limites.""La critique de la démocratie a connu deux grandes formes historiques." (불어본, p.8)

"민주체제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역사적으로 볼 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이 체제의 두 가지 주요 양상을 혹평한 것이다." (국역본, 16쪽)

이 역시 치명적인 실수를 안고 있는 번역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본다: "이러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에는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한계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어 왔다." 이와 국역본의 번역을 비교해보라. 먼저 "민주체체를 비판할 수 있는 권리는 존재했었지만 그 한도는 있게 마련이었다"라는 번역을 보면 역자가 '역사적' 민주주의의 '역사성' 그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지극히 '민주주의적'인 이데올로기 안에 속한 채로 이 문장을 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문을 보면,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 행위 자체에 어떤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 그 자체의 정당성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다만 그렇게 민주주의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은 오직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한계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국역본의 번역은 완전한 오독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문장도 오역이기는 마찬가지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민주주의 체제가 지닌 두 가지 양상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봤을 때 그러한 비판의 형식에는 크게 두 가지가 존재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조금 길지만,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Il y a eu l'art des législateurs aristocrates et savants qui ont voulu composer avec la démocratie considérée comme fait incontournable.""La rédaction de la constitution des États-Unis est l'exemple classique de ce travail de composition des forces et d'équilibre des mécanismes institutionnels destiné à tirer du fait démocratique le meilleur qu'on en pouvait tirer, tout en le contenant strictement pour préserver deux biens considérés comme synonymes: le gouvernement des meilleurs et la défense de l'ordre propriétaire." (불어본, p.8)

"거부할 수 없는 실세로 인정받고 있던 민주주의와 타협하길 원하던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의 계략이 그 한 양상이다.""또 다른 양상은 미국 헌법제정에 관한 것인데, 이는 민주주의라는 실제로부터 짜낼 수 있는 최선의 개념 추출을 지향하는 제도적 메커니즘의 전형으로서,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 미국 헌법의 토대를 이루었는데, 양대 축이란 최선정부와 소유자 위계질서의 수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역본, 16쪽)

이쯤 되면 이것이 정말 '번역'인지 '반역'인지 헷갈리는 지점까지 오게 된다.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의 비판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현실로 여기고 이와 타협하고자 했다. 미국 헌법의 작성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을 끌어내고자 힘들을 구성하고 제도적 기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러한 시도의 고전적 사례일 텐데, 이는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개의 선(善), 곧 최선의 정부와 소유 질서의 수호라는 두 개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와 비교해볼 때 국역본의 번역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내용적인 측면에 있다. 앞의 문장들을 제대로 번역하지 못하니 어쩔 수 없이 이어지는 이 문장들 역시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인데,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이 대표하는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지닌 두 "양상"이 결코 아니다. 단지 이 네 번째 문장과 다섯 번째 문장은 앞서 수정한 번역에서 이야기했던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두 가지 역사적 형식 중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이다(두 번째 비판의 형식은 이에 뒤이어 마르크스와 함께 등장하게 되는데, 곧 함께 살펴보자). 국역본의 번역 중 다섯 번째 문장에서 "추출된 개념 모두 두 가지 축을 보존하기 위해서 엄정한 심사를 거친 후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러한 표현이 원문의 어느 부분에서 "추출"되었는지를 가늠하기란 "엄정한 심사"를 거친다 해도 지극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네 번째 문장의 영어 번역만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There was the art of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 who strove to make a compromise with democracy, viewed as a fact that could not be ignored." (영역본, p.2)

영역본에서 이 문장만을 인용한 이유는 불어의 "législateurs aristocrates et savants"와 그 영어 번역인 "aristocratic legislators and experts"를 비교하기 위해서인데, 개인적인 관점으로는 나의 번역("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도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 부분을 영역본을 통해 중역해 본다면, "귀족으로 이루어진 입법자들과 전문가들" 정도로 옮길 수 있을 텐데, 불어를 통한 번역과 영어를 통한 번역이 서로 차이가 날 수 있는 이유는 불어 원문의 "savants"을 독립된 복수 명사로 볼 것인가 아니면 앞의 "législateurs"를 꾸미는 형용사의 복수 형태로 볼 것인가에 따라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전자의 경우를 선택하여 "귀족으로 이루어진 입법자들과 학자들" 정도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일반적'일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국역본의 번역 또한 "귀족출신 의원들 및 학자들"이라고 옮김으로써 이러한 '해석'을 따르고 있음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다소 긴 문장들이지만, 여섯 번째 문장부터 열 번째 문장까지의 번역을 한 번에 살펴보도록 하자:

"Le succès de cette critique en acte a tout naturellement nourri le succès de son contraire.""Le jeune Marx n'a eu aucun mal à dévoiler le règne de la propriété au fondement de la constitution républicaine.""Les législateurs républicains n'en avaient fait nul mystère.""Mais il a su fixer un standard de pensée qui n'est pas encore exténué: les lois et les institutions de la démocratie formelle sont les apparences sous lesquelles et les instruments par lesquels s'exerce le pouvoir de la classe bourgeoise.""La lutte contre ces apparences devint alors la voie vers une démocratie "réelle", une démocratie où la liberté et l'égalité ne seraient plus représentées dans les institutions de la loi et de l'État mais incarnées dans les formes mêmes de la vie matérielle et de l'expérience sensible." (불어본, pp.8-9)

"이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관한 비판은 성공을 거두었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민주주의 세력의 성공 자양분이 되어왔던 것이다.""젊은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체제의 기본 원리인 소유권 지배구조를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여하튼 마르크스는 지금도 소진되지 않고 있는 표준 이념을 확립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형식에 얽매인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행사 매개체에 불과하며, 이런 영향력 하에서 법과 제도는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파악했었다.""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겉치레에 대한 투쟁은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한 방안이 되었지만,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 (국역본, 16-17쪽)

이 부분의 번역을 한 번에 살펴보는 이유는, 첫째, 이 문장들이 앞서 살펴본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의 두 형식 중 두 번째 비판을 이루고 있는 것들이며, 둘째,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이 문장들을 맥락과 연결을 파악해 함께 독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도 국역본은 몇 가지 치명적 오역을 행하고 있는데, 일단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을 제시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이러한 실제적 비판이 거둔 성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른 비판의 성공 또한 북돋웠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헌법을 토대로 하는 소유의 지배 체제를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고갈되지 않는 사유의 한 전범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작동하는 허울뿐인 도구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번역은 국역본의 번역과 비교했을 때 몇 가지 결정적 차이점을 드러낸다. 첫째, 여섯 번째 문장에서 국역본이 너무나도 쉽게 "반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son contraire"는 꼭 그렇게까지 번역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미국의 헌법이라는 사례가 민주주의 비판의 한 형식이라면, 마르크스의 '민주주의 비판'은 그와는 다른 '두 번째' 형식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른 [쪽의] 비판" 또는 "반대 쪽의 비판"이라고 번역하면 될 것을 굳이 "반민주주의 세력"이라고 다소 '강한' 어조로 옮기고 있는 것은 마르크스에 대한 역자의 개인적 '편견'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그런데 만약 이것이 정말 역자가 지닌 '선입견'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랑시에르의 책을 번역하는 '전문 번역가'가 품을 법한 견해라고 하기엔 너무도 '나이브'한 것이 아니겠는가). 둘째, 역시나 여섯 번째 문장에서 국역본이 "이 같은 구도 속에서 행해진 민주체제에 대한 비판"이라고 다소 풀어서 의역한 구절의 원문은 "critique en acte"인데 이는 간단히 말해 '작동/진행 중인 비판'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나는 이를 단순히 "실제적 비판"으로만 옮겼지만, 보다 더 좋은 번역어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이는 '뉘앙스'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일곱 번째 문장에서 "파헤치는 작업에 거리낌이 없었다"고 옮긴 국역본의 문장은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다" 정도의 마무리로 바뀌는 것이 더 적절할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국역본의 번역대로 이러한 마르크스의 비판 형식은 미국 헌법의 비판이라는 전자의 형식으로부터 '자양분을 얻고[nourrir]' 있기 때문이다. 넷째, 여덟 번째 문장에서 "게다가 공화국 의원들 누구도 이 사실을 은폐할 수 없었다"고 '수동적으로' 옮겨진 문장은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좀 더 '능동적인' 문장으로 대체될 필요가 있겠는데, 이 부분이 의미하는 바가 그들이 '은폐하고 싶었으나 은폐하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전혀 숨기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아홉 번째 문장의 번역과 관련하여 한 가지 '충고'하고 싶은 것은, "매개체"라는 단어가, 특히나 그 번역이 철학적이고 이론적인 저작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경우에는 더욱 더, 쉽게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번역어라는 점이다. 하물며 "매개체"로 '직접' 번역될 수 있는 단어를 원문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음에야. 여섯째, 이것이 이 부분의 번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일 텐데, 열 번째 문장의 번역은 완전히 뜯어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다시 나의 번역으로 돌아가보자면, 이는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로 옮겨져야 할 것이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국역본의 번역대로 "자유와 평등의 민주주의가 더 이상 국가 및 법에 근거한 체제를 대표하지 못했을 때", 바로 그때, 투쟁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향하는 길로 바뀌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국역본의 역자가 "~하지 못했을 때"라고 마치 부정적인 조건처럼 옮긴 이 부분은, 사실 원문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의 내용 중 하나인 것이다. 곧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민주주의란, 첫째,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 안에서 대표[표상]"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둘째, 또한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역본에 나오는 "감각적 경험법칙과 금전본위의 생활양식에 의해서 민주주의는 정형화되었다"는 문장은 원문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말이 되고 있다. 결국 역자는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고 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구현 '조건'을 오히려 민주주의가 지닌 '부정적' 결함으로 거꾸로 해석해내고 있는 것이다.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이와 관련하여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갈 것은, 영역본이 이 마지막 열 번째 문장 중 "dans les institutions de la loi et de l'État"를 [단지] "in the institutions of law and State"로[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불어에서는 "법"과 "국가"가 "제도들"을 수식하고 있는 구조가 명확하지만 영어 번역으로만 봤을 때 이는 다소 불명확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는 영어 번역 그 자체에서는 별 문제가 안 되지만 이를 중역해서 한국어로 옮길 경우에는 사소한 것이긴 하나 자칫 문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곧 이 부분은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로 번역되어야지 "법 제도와 국가 안에서"로 번역되어서는 안 된다.

 

   

▷ 어머니가 중학생인 내게 선물해 주셨던 저 책은, '청년 마르크스' 하면 떠오르는 기억들 중의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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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어서 서론의 네 번째 단락을 검토해보도록 하자. 네 번째 단락은 모두 열 개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장:

"La nouvelle haine de la démocratie qui fait l'objet de ce livre ne relève proprement d'aucun de ces modèles, même si ells combine des éléments empruntés aux uns et aux autres." (불어본, p.9)

"이 책의 화두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민주체제의 어떤 모델에 대해서도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 비록 각각의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을지라도." (국역본, 17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비록 그것이 앞의 두 모델들[미국 헌법의 사례와 마르크스의 사례]로부터 차용한 요소들을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두 모델 중 그 어디에도 정확히 귀속되지는 않는다." 이와 비교했을 때 국역본의 번역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무엇인가? 첫째 질문, 'nouveau/nouvelle'이라는 형용사를 "미숙한"이라고 옮기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민주주의에 대한 증오가 '미숙한' 것이 아니라 정작 '미숙한'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둘째 질문, "관대하게 기술하진 않을 것이다"라는 또 하나의 '창조적'인 번역의 원문은 어디에 있는가. 셋째 질문, "어색하게 결부되어"라는 번역의 원문을 애써 찾아보자면 그것은 아마도 "empruntés"가 될 듯 한데, 이것이 "차용한"이라는 뜻으로 번역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정말 역자는 몰랐던 것일까(그러므로 또한 이 역시도 "증오들이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작 '어색하게 결부되어' 있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다음 문장들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Ses porte-parole habitent tous dans des pays qui déclarent être non seulement des États démocratiques, mais des démocraties tout court.""Aucun d'eux ne réclame une démocratie plus réelle.""Tous nous disent au contraire qu'elle ne l'est déjà que trop." (불어본, p.9)

"민주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민주체제가 급조된 국가들을 포함해서 이들 국가에 존재하는 민주주의의 대변자(혹은 대변기관) 모두 민주주의를 공언한다.""그런데 그들 중 누구도 진정한 민주주의를 강변하지는 않는다.""그럼에도 우리 모두 민주주의가 이미 넘쳐난다고 말한다." (국역본, 17쪽)

상당히 짧은 문장들이지만, 이들 역시나 오역을 품고 있었으니.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이 새로운 증오의 대변인들은 모두, 민주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고 말한다." 이를 국역본과 비교해볼 때 가장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불어 "des démocraties tout court"에 대한 번역일 텐데, 국역본은 이를 "민주체제가 급조된 국가들"이라고 옮기고 있다. 하지만 불어 "tout court"는 '간략히', '간단히' 또는 '갑자기' 등의 뜻을 갖는 부사구이다. 따라서 이는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합당해 보인다. 둘째, 동사 'réclamer'를 굳이 '강변하다'로 번역해야 했을까 하는 물음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자. 셋째, 이 문제는 문법에 있어서 가장 초보적인 실수를 노출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텐데, "tous nous disent"를 "우리 모두 [...] 말한다"로 번역하고 있는 국역본의 번역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국역본의 번역처럼 옮겨지려면 불어 원문은 "tous nous disons"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곧 "disent"가 동사 'dire'의 3인칭 복수 현재 형태이므로, 주어는 "우리(nous) 모두"가 아니라 "그들 모두(tous)"가 되어야 하는 것이며 "nous" 또한 여격으로 봐야 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이미 충분하며 넘쳐나기까지 한다고 '우리 모두'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모두'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어서 다섯 번째 문장을 살펴보자:

"Mais aucun ne se plaint des institutions qui prétendent incarner le pouvoir du peuple ni ne propose aucune mesure pour restreindre ce pouvoir." (불어본, p.9)

"그래서 그 누구도 대중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 체제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며, 이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방안도 제시하지 않는다." (국역본, 17쪽)

이 부분에 관해서는 크게 할 말은 없다(이런 문장은 서론을 통틀어 거의 처음이 아닐까). 다만, 나의 번역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인민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들에 대해 불평을 하지도 않고 그러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제안하지 않는다." 다음 문장들로 넘어간다:

"La mécanique des institutions qui passionna les contemporains de Montesquieu, de Madison ou de Tocqueville ne les intéresse pas.""C'est du peuple et de ses mœurs qu'ils se plaignent, non des institutions de son pouvoir.""La démocratie pour eux n'est pas une forme de gouvernement corrompue, c'est une crise de la civilisation qui affecte la société et l'État à travers elle." (불어본, p.9)

"몽테스키외, 메디슨, 토크빌과 그 동시대인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가 현대인들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고 있는 것이다.""세인들이 불평하는 것은 사람들의 품행과 그 사람들일 뿐, 이 체제의 권력구조를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또한 민주주의에 기반한 부패정부의 존립양상이 문제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 문명의 위기가 세인에게 문제되고 있는 것이다." (국역본, 17-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 "이들은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과 그들의 습성이지 인민 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그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겪게 되는 문명의 위기인 것이다." 이와 비교해 국역본의 번역에서 지적할 것은 마지막 여덟 번째 문장이다. "민주주의에 기반한 부패정부의 존립양상"이라는 이 '창조적'인 번역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원문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저 "존립양상"이라는 번역어는 앞서 살펴보았던 "존립근거"라는 번역어만큼이나 깊고 무거워 보인다). 또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민주주의라는 미명 하에 사회와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문명의 위기"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여기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가 '저들'에게 "문명의 위기"를 의미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점이며 번역에서도 역시 그 점이 부각되어야 하는 것이다. 참고로 이 여덟 번째 문장을 영역본에서는 다음과 같이 옮기고 있다:

"For them democracy is not a corrupt form of government; it is a crisis of civilization afflicting society and through it the State." (영역본, p.3) 

이 영어 번역에서 지적할 것은 두 가지인데, 첫째, 불어 동사 'affecter'의 번역어로 'afflict'를 사용한 것은 너무 '협소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점을 먼저 이야기하고 싶다. 둘째로, "through it"을 마치 "국가(State)"에만 걸리고 "사회(society)"에는 걸리지 않는 것처럼 번역함으로써 의미에 다소 차이를 가져오게 되었다는 점 또한 첨언하고자 한다. 이어서 다음 문장들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D'où des chassés-croisés qui peuvent à première vue sembler étonnants." ⑩ "Les mêmes critiques qui dénoncent sans relâche cette Amérique démocratique d'où nous viendrait tout le mal du respect des différences, du droit des minorités et de l'affirmative action sapant notre universalisme républicain sont les premiers à applaudir quand la même Amérique entreprend de répandre sa démocratie à travers le monde par la force des armes." (불어본, p.9)

"전술한 혼란스러움은 일견 놀라워 보일 수도 있다.""우리의 공화주의적 보편성을 갉아먹는 확신에 찬 행위, 소수의 권한, 각각의 입장 차이에 대한 존중을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하는 비평가들조차도 미국이 무력을 이용해서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려는 시도를 할 때 가장 먼저 갈채를 보내는 것이다." (국역본, 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놀랄 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이의 존중, 소수자의 권리, 차별 철폐 조치(affirmative action) 등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惡)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이유로 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동일한 비판자들이, 똑 같은 나라 미국이 무력을 통해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시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다." 먼저 단어에 대한 지적을 하자. 원문에서 랑시에르가 "affirmative action"을 이탤릭체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단어가 '영어'이기 때문이라는 점을 역자는 잘 몰랐던 것 같다. 왜냐하면 역자는 굵은 글씨로 강조하여 이를 "확신에 찬 행위"라고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 미국에서 흑인이나 여성 또는 소수 민족의 교육과 취업을 목표로 하는 '차별 철폐 조치'를 뜻하는 말이다. 둘째로, 아홉 번째 문장에서 역자는 "chassés-croisés"를 "전술한 혼란스러움"으로 옮기고 있는데, 이는 반드시 앞서 서술된 어떤 '혼란스러움'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이들의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어서 셋째로, 열 번째 문장의 번역에서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라는 구절은 '의미적인' 설득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우리의 공화주의적 보편성을 갉아먹는 [...]" 악을 "우리 스스로 철저히 부정하기 때문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을" 우리 곁에 도래하게 했다는 이유로 미국의 민주주의를 비난한다는 해석이 더 적절하고 합당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미국식 민주주의를 비난하던 동일한 사람들이 미국이 군사력으로 민주주의를 확산시킨다는 '이율배반적' 행동을 감행할 때에는 오히려 그를 향해 박수를 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런데 역자는 여기서 이 문장의 주어 부분인 "les mêmes critiques"를 마치 양보 구문처럼 번역하고 있는데, 이는 말도 안 되는 번역이라고 하겠다.

 

▷ 민주주의는 지금,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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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마지막으로 서론의 다섯 번째 단락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 단락 모두 열 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첫 번째 문장부터 다섯 번째 문장까지를 검토해보도록 하자:

"Le double discours sur la démocratie n'est certes pas neuf." ② "Nous avons été habitués à entendre que la démocratie était le pire des gouvernements à l'exception de tous les autres.""Mais le nouveau sentiment antidémocratique donne de la formule une version plus troublante.""Le gouvernement démocratique, nous dit-il, est mauvais quand il se laisse corrompre par la société démocratique qui veut que tous soient égaux et toutes les différences respectées." ⑤ "Il est bon, en revanche, quand il rappelle les individus avachis de la société démocratique à l'énergie de la guerre défendant les valeurs de la civilisation qui sont celles de la lutte des civilisations." (불어본, pp.9-10)

"민주체제에 대한 이중적 견지가 새로운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우리는 여타의 정치체제 중 최악의 정체가 민주주의라고 인식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의식은 보다 충격적인 해석 틀을 제공한다.""민주주의 정부가 모든 입장 차이를 존중하라는, 그리고 모두가 평등해지길 바라는 대중사회 때문에 민주정체가 부패해지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한다면 민주주의 체제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⑤ "반대로, 민주주의 정부가 이 문명의 가치는 문명 간 투쟁 가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수호할 수 있도록 대중사회의 무기력한 개인들에게 전투적 정신을 고취시킨다면 민주주의 체제는 합당한 것이다." (국역본, 18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보다 당혹스러운 형태의 정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정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들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그 스스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무기력해진 개인들에게 문명의 가치들, 곧 문명 간의 투쟁이 지닌 가치들을 수호하는 전쟁의 에너지를 고취시켜줄 수 있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랑시에르가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의 실체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국역본의 번역이 이러한 실체에 대한 입문을 성공적으로 소화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몇 가지 점을 살펴보자. 먼저 "여타의 정치체제 중 최악의 정체가 민주주의"라는 국역본의 번역은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번역으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이는, 주지하다시피,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 저 유명한 말, 곧 "민주주의는 때때로 시도되어 왔던 다른 모든 형태의 정부들을 제외하고서 가장 나쁜 형태의 정부이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from time to time)"라는 말을 거의 문자 그대로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말에 대한 역자 주가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김에 한 마디 더 덧붙이자면, 이 국역본의 역주는 인문학 서적의 역주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완전히 망각한 일종의 '잡학 사전'이 되고 있다는 인상을 갖게 되는데, 이와는 또 다른 맥락에서 국역본 77쪽의 주석("아르케"에 대한 역자 주에는 "철학용어로 원리"라는 '간략한' 설명이 붙어 있는데)과 93쪽의 주석(저자 주에 대한 번역에서 역자는 랑시에르의 주저 『불화. 정치와 철학』의 제목을 "정치와 철학의 부조화"라고 옮기고 있는데) 또한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다음으로 "mauvais"를 "앞뒤가 맞지 않는"으로 '의역'하고 "bon"을 "합당한"으로 '의역'하여 문장 전체의 맥락에 혼란을 가져오는 부분도 바로 고쳐져야 할 것이다. "문명 간 투쟁 가치에 불과하다는"이라는 부분에서 "불과하다는"이라는 '쓸데없는' 번역어를 집어넣어 문장 자체의 뉘앙스를 뒤바꿔버리는 '기괴한' 번역 또한 '지양'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다음으로 여섯 번째 문장을 살펴보도록 하자:

"La nouvelle haine de la démocratie peut alors se résumer en une thèse simple: il n'y a qu'une seule bonne démocratie, celle qui réprime la catastrophe de la civilisation démocratique." (불어본, p.10)

⑥ "이렇게 해서 민주주의에 대한 미숙한 증오는 다음과 같은 간단한 명제로 요약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합당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하며, 이 합당한 체제가 민주주의 문명의 지각변동을 억제한다.>" (국역본, 18-19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이렇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하나의 단순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의 혼돈을 억제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국역본의 번역에서는 "il n'y a que~"의 문형과 "une seule~"의 의미를 잘 구현하지 못하고 있음이 목격된다. "오직 합당한 민주주의만이 존재하며"라는 번역으로는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라는 것이다"라는 이 문장의 구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이다. "민주주의 문명의 지각변동"이라는 번역 또한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없는 표현이다. 이하,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문장부터 열 번째 문장까지를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Les pages qui suivent chercheront à analyser la formation et à dégager les enjeux de cette thèse.""Il ne s'agit pas seulement de décrire une forme de l'idéologie contemporaine.""Celle-ci nous renseigne aussi sur l'état de notre monde et sur ce qu'on y entend par politique.""Elle peut ainsi nous aider à comprendre positivement le scandale porté par le mot de démocratie et à retrouver le tranchant de son idée." (불어본, p.10)

"본서의 지면은 이 명제의 형성과정을 분석하고 그 관계망의 도출을 추구하는 데 할애될 것이다." "현대의 관념체계(이데올로기)를 묘사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현대의 관념체계가 존재하는 양상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정치를 통해서도 이 관념체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확실히 당대를 관통하는 관념체계는 우리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용어가 초래한 추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고, 민주주의 이념 속에 감춰진 칼날을 간파하는 안목을 키워줄 수 있을 것이다." (국역본, 19쪽)

이에 대한 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이하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명제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지닌 쟁점들을 끌어내보고자 한다. 문제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형식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형식은 우리 세계의 상태에 관해, 그리고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스캔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관념이 지닌 단호함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국역본에서 "관계망"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불어는 "enjeu"인데, 이는 주지하다시피 현대 프랑스 사상가들이 공히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쟁점'이나 '논점' 정도로 옮겨지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다음으로, 아홉 번째 문장의 말미에서 "정치를 통해서도 이 관념 체계에 대한"이라고 번역된 원문은 "sur ce qu'on y entend par politique"인데, 이는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의 상태]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로 보다 더 적확히 '직역'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민주주의, 그것은 '최악'의 정부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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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상에서 함께 살펴보았지만, 서론만을 검토해봤을 때도 이 국역본의 번역에서는 거의 모든 문장마다 오역이나 부정확한 번역이 속출하고 있는 셈이다. 그 번역의 전반적인 느낌이랄까, 서론의 한 문장 한 문장을 차례로 검토해보면서 받은 개인적인 인상은, 역자가 단어들의 일차적이고 표면적인 의미에만 얽매여서 그로 인해 기계적인 번역에 빠지게 된 경우가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오히려 무엇보다 슬프고 쓸쓸하고 착잡한 마음을 지울 수 없게 되는 비교 독해의 과정이었다고 할까. 번역본을 포함하여 하나의 책이 독자에게 '진정으로' 다가갈 수 있으려면, 저자/역자와 독자가 모두 함께 그 책에 '진심'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것은 책이라는 존재에 대해 나만이 품고 있는 지극히 '도착적'이고 '이상적'인 몽상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좋아했을, 그리고 현재도 여전히 좋아하고 있을, 존 레논(John Lennon)의 노래 <Imagine> 가사의 한 구절처럼 "나만 그런 것은 아니리라(But I'm not the only one)". 이에, 생각해보면, 번역의 여러 문제점들을 지적하는 독자들을 단지 법적으로 고소할 것이 아니라, 먼저 그들과 논쟁과 토론과 대화를 하면서 함께 문제점들을 풀어가는 것이, 그리고 그렇게 저자/역자가 독자들과 함께 하나의 '온전한' 책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그러한 몽상에 최대한 가깝게 근접해갈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도 합리적인' 행동방식이 아닐까. 거의 모든 번역서의 역자 후기에서 역자들이 "독자 제현의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또는 "번역에서 발견되는 오류가 있다면 이는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이다"라고 밝히는 것은 단순한 상투어(cliché)가 아니다. 번역에서 발견되는 모든 오류는 전적으로 역자의 책임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 사실은 결코 변함이 없겠지만, 그러나 읽어도 또 읽어도 개인적으로 언제나 강렬한 '간절함'을 느끼게 되는 이 상투어가 내게 말해주고 있는 것은, 그 오류를 고쳐 나가는 일은 결국 역자와 독자가 함께 할 수 있고 또 함께 해야 하는 몫이라는 사실이다.

현재 랑시에르의 책들이 하나둘씩 국역되고 있는 추세인데, 개인적으로 아무쪼록 좋은 번역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물론이지만, 혹시 번역상의 문제점들이 발견되는 경우에라도 그것을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역자와 독자가 함께 좋은 책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또한 간절히 기대해보는 것이다. 역자와 독자들은, 그 자신이 책을 읽고 또 쓰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명예'란 것이 과연 무엇이며, 또 그 '명예'란 것이 어떻게 함으로써 지켜질 수 있는가에 대해 숙고해야 할 것이다. 명예가 진정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망각한 이에게, 자칫 그 '명예'란 쉽게 '멍에'가 될 수도 있는 것이기에.

이상의 비판적 논의들을 통해 수정하여 제시하였던 번역을 아래에 다시 정리하여 옮겨본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 미약하나마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폭행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상상으로 꾸며내 프랑스를 불안에 떨게 만드는 어느 젊은 여자, 학교에서 히잡을 벗기를 거부하는 여학생들, 재정적자에 빠진 사회보장제도, 바칼로레아 시험 제시문에서 라신과 코르네이유가 지녔던 권위를 찬탈한 몽테스키외와 볼테르와 보들레르, 자신들의 연금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시위에 참가하는 봉급생활자[임금노동자], [기존의 입시제도와] 병행하는 학생 선발 과정을 창안한 한 그랑제콜, 리얼리티 TV 쇼와 동성 결혼과 인공 수정의 비약적인 증가. 이토록 잡다한 성격의 사건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공통]점을 찾는다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이미 수많은 철학자들, 사회학자들, 정치학자들, 정신분석가들, 언론인들, 작가들이 우리에게 책과 기사와 방송을 통해 계속해서 이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그들은 이 모든 증상들이 동일한 병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즉 이 모든 결과들은 오직 단 하나의 원인을 갖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원인은 곧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것, 다시 말해 현대 대중 사회의 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무한한 욕망들이 지배하는 체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난의 특이함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봐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증오는 민주주의만큼이나 오래된 것인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주의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증오를 표현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원래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에서 대중의 지배라는 천박한 형태를 통해 합법적인 모든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목격한 이들이 만들어낸 일종의 욕설이었던 것이다. 권력이란 그러한 권력을 가질 운명을 태생적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나 그러한 권력에 걸맞은 능력으로 인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이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혐오와 동의어로 남아 있었다. 신성한 계시적 법만이 인간 공동체를 조직하는 유일한 합법적 토대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혐오와 동의어이다. 물론 이러한 증오가 지닌 폭력성은 현재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폭력성이 이 책의 대상은 아닌데, 그 이유는 단순하다: 나는 그러한 폭력성에 대해 크게 떠벌리는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으며, 따라서 그들과 함께 토론할 것도 전혀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증오와 더불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여러 비판의 형식들 또한 경험했다. 이러한 비판은 [민주주의라는] 존재에는 정당성을 부여하지만, 그것은 그 존재의 한계를 정하기 위한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에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 가지의 형태가 있어 왔다. 먼저 귀족과 학자들로 이루어진 입법자들의 비판 방식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민주주의를 불가피한 현실로 여기고 이와 타협하고자 했다. 미국 헌법의 작성은 민주주의라는 현실로부터 얻을 수 있는 최선을 끌어내고자 힘들을 구성하고 제도적 기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이러한 시도의 고전적 사례일 텐데, 이는 동의어로 간주되는 두 개의 선(), 곧 최선의 정부와 소유 질서의 수호라는 두 개의 선을 보존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엄격히 한정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실제적 비판이 거둔 성공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른 비판의 성공 또한 북돋웠다. 청년 마르크스는 공화주의 헌법을 토대로 하는 소유의 지배 체제를 별 어려움 없이 폭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화주의 입법자들 또한 이러한 점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여전히 고갈되지 않는 사유의 한 전범을 확립할 수 있었는데, 형식적 민주주의의 법과 제도란 부르주아 계급의 권력이 작동하는 허울뿐인 도구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허울뿐인 제도에 대한 투쟁은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로 향하는 길이 되었는데, 여기서 민주주의란, 자유와 평등이 더 이상 법과 국가라는 제도들 안에서 대표[표상]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 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책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비록 그것이 앞의 두 모델들[미국 헌법의 사례와 마르크스의 사례]로부터 차용한 요소들을 서로 결합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두 모델 중 그 어디에도 정확히 귀속되지는 않는다. 이 새로운 증오의 대변인들은 모두, 민주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간략히 말해 [그 스스로] 민주주의 자체라고 공언하는 나라들에서 살고 있다. 그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보다 진정한 민주주의 같은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들 모두는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이미 너무나 충분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인민의 권력을 구현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제도들에 대해 불평을 하지도 않고 그러한 권력을 제한하기 위한 어떠한 조치도 제안하지 않는다. 이들은 몽테스키외, 매디슨, 토크빌의 동시대인들을 열광시켰던 제도적 장치에는 관심이 없다이들이 불평하는 것은 인민과 그들의 습성이지 인민 권력의 제도들이 아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는 타락한 정부의 형태가 아니라 바로 그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와 국가가 겪게 되는 문명의 위기인 것이다. 따라서 오락가락하는 그들의 모습은 일견 놀랄 만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다. 차이의 존중, 소수자의 권리, 차별 철폐 조치 등 우리[프랑스]의 공화주의적 보편주의를 위협하는 모든 악()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었다는 이유로 저 민주주의의 나라 미국을 끊임없이 비난하는 동일한 비판자들이, 똑 같은 나라 미국이 무력을 통해 전 세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확산시키고자 시도할 때에는 가장 먼저 박수를 보낸다

물론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담론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른 모든 통치 체제를 제외하고서 최악의 통치 체제라는 말을 듣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새로운 반민주주의적 정서는 보다 당혹스러운 형태의 정식을 제공한다. 그러한 정서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모든 이들이 평등하고 모든 차이들이 존중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그 스스로 타락하게 된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나쁘다는 것이다. 반대로 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가 민주주의 사회 때문에 무기력해진 개인들에게 문명의 가치들, 곧 문명 간의 투쟁이 지닌 가치들을 수호하는 전쟁의 에너지를 고취시켜줄 수 있다면, 그러한 민주주의적 통치 체제는 좋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증오는 하나의 단순한 명제로 요약될 수 있다: 좋은 민주주의란 오직 단 하나밖에는 없는데, 그것은 민주주의 문명의 혼돈을 억제하는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하의 본문에서는 이러한 명제의 형성 과정을 분석하고 그것이 지닌 쟁점들을 끌어내보고자 한다. 문제는 현재의 이데올로기가 지닌 형식을 묘사하는 것만이 아니다. 또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형식은 우리 세계의 상태에 관해, 그리고 정치를 통해 우리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바에 관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준다. 그러므로 이는,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말이 불러일으킨 스캔들을 정확히 이해하고 민주주의라는 관념이 지닌 단호함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번역: 람혼)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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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랑시에르,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 번역의 문제점
    from 하늘 받든 곳 2008-04-16 00:35 
    람혼님, 애쓰셨네요. 이 번역본은, 실제로 읽어보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문제가 많더군요. 람혼님의 마지막 코멘트가 가슴에 와닿는군요.
 
 
로쟈 2008-04-13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네요.^^; 아직 검찰에서 최종 통지를 못 받으셨나요?(저는 종료됐습니다.) 실상 번역서라고도 하기 어려운 '난감한' 책을 하나 내놓고 무엇으로 명예를 추스리려고 했던 것인지 참 알기 어렵네요. 이 또한 '민주주의에 대한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한 가지 사례라고 해야 할지...

람혼 2008-04-14 15:33   좋아요 0 | URL
잘 마무리되셨군요?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 번역을 꼼꼼히 살펴보면서도 새삼 '새롭게' 든 생각이지만, 번역이란 참으로 섣불리 해서는 안 되는, 한 사람의 '이름'을 거는 각오로 임해야 하는, 그런 살벌하도록 치열한 작업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설렘과 동시에 살짝 소름까지 돋았습니다. 성찰의 계기를 마련해준 번역본에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이 됩니다...

드팀전 2008-04-13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길어서 다 보지는 못했고,제일 앞쪽에 영어판과 비교해 놓은 것까지만 봤습니다.그리고 건너뛰어서 람혼님의 마지막 번역문만...^^

그 분 참 생뚱맞네요.불어는 아예 모르니까 모르겠구 영어판정도의 친절함(?)도 없군요.갑자기 동네 문방구에서 파는 파워레인저 '가면'이 생각났습니다. 번잡스러우셨겠습니다...정말 사람 피곤하게 하는 것들은 거대한 사건보다는 그런 번잡스러움일지도 모르니까요.

서문에서 보이는 주제의식은 제 관심을 끌어모으는데..저 책을 읽고 싶지는 않아지네요.이러면 로쟈님 서재에서 본 글처럼 "봐라.너희들이 번역비판이 '인문학 위기'를 가속화하고 있다.책 안 산다고 하잖니.."라고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ㅋㅋ
저의 자문자답은 이거였어요 ."워워...다른 인문학 서적 두권 사서 인문학을 망가뜨리지는 않을께요.그러니 걱정마세요..ㅎㅎ ."

람혼 2008-04-14 15:37   좋아요 0 | URL
드팀전님 말씀대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자잘한 번잡스러움이 아닌가 합니다.^^ 그나저나 '인문학의 위기'라는 주장ㅡ사실 이 주장은 여기서는 '인문학의 경제적 위기'라는 말일 테지만!ㅡ을 실로 '인문학적으로' 돌파하는 드팀전님의 자문자답에 한 표를 던집니다.^^ 그런 주장을 한 사람은 사람들이 책을 안 사는 일을 걱정할 게 아니라 '왜 책을 안 살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먼저 스스로 답해야겠지요.

yoonta 2008-04-13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람혼님의 문체에 적응해서인지 이상하게도 술술 읽힌다는..^^
번역본비판은 절반쯤 보다가 맨 밑의 람혼님번역으로 넘어갔습니다만 저 문제의 번역본은 도무지 읽을 수가 없는 번역이네요. 번역자스스로도 번역하면서 과연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하면서 번역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이런 말 했다고 저도 고소당할까봐 두렵군요.-_-)

그건 그렇고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려 한 책의 내용이 참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 혹은 증오가 가진 이데올로기적인 성격들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민주주의란 과연 무엇인가를 고민해 보자는 것인데 그것이 람혼님이 번역한 서문에서도 간략하게 나온 것 처럼 "물질적 삶과 감각적 경험이라는 형식자체 안에서 구현되는 체제"라는 것이 그가 하고 싶은 말인 것 같군요.

오늘날 한국의 현실에 랑시에르의 고민의 지점을 대입시켜보면 이명박정부출범을 가능하게 한 대중의 욕망들에 대해서 단지 혐오하고 증오만 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무엇이며 또 이러한 민주주의(아니 더 정확하게는 변덕스러운 대중들의 욕망)에 대한 증오로부터 오히려 "진정한" 민주주의의란 무엇인가를 반추해 보자는 내용의 책인 것 같네요. 가능하다면 책의 나머지 부분에 대한 람혼님의 번역도 보고 싶지만 지나친 욕심이겠죠?^^

영역본이나 구해서 한번 읽어봐야겠습니다..

람혼 2008-04-14 15:47   좋아요 0 | URL
너무 이런 문체에 적응하시면 일상생활이 좀 어려우실 텐데요...^^; 사실 저도 번역본을 검토해보면서 가장 먼저 품게 되었던 걱정스러운 반문이 '역자는 이 책을 이렇게 이해했다는 말이 아닌가'였습니다(그리고 yoonta님과 마찬가지의 '노파심'에서, 이는 정말 '순수한 걱정과 우려'였다는 점을 첨언하고 넘어갑니다!). 나머지 부분의 번역도 '정서'해보고 싶지만, 그것은 새 번역본이 나오게 될 때ㅡ만약 나오게 된다면ㅡ그 역자의 몫으로 남겨두는 게 좋을 듯 합니다.^^

paviana 2008-04-16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balmas님 서재에서 넘어왔습니다.로쟈님 서재에서도 가끔 뵈었지만 놀러오기는 처음이었는데 오기를 너무 잘했네요.
지금은 좀 바빠서 정독하기 힘들지만, 출력해서 잘 읽어보겠어요.^^
감사합니다.

람혼 2008-04-17 03:31   좋아요 0 | URL
paviana님, 반갑습니다. 잘 읽어주신다니 너무 감사합니다. 종종 뵙죠~ ^^

누에 2008-05-07 0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읽으려고 기회를 찾고 있는데 그만한 긴 호흡의 여유가 통 찾아오지 않네요. 람혼님의 글을 읽으면 부족한 제모습이 부끄러워지며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다짐하게 된답니다. 푸훕~

람혼 2008-05-09 03:08   좋아요 0 | URL
제가 오히려 부끄러워지는 말씀이군요. 저야말로 더욱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겠습니다.^^ 누에님이 꼼꼼히 읽어주실 기회가 있으면 좋겠고, 또 누에님의 고견을 들을 기회 역시 제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Jenaer Systementwürfe III. Gesammelte Werke, Band 8, Hamburg: Felix Meiner, 1976.
▷ G. W. F. 헤겔, 『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 』(서정혁 옮김), 이제이북스, 2006.  

1) 1격 혹은 주격의 이데올로기
 
우선 독일어의 번역, 아니 사실 거의 모든 인구어(印歐語)의 번역에 따르는 문제로서 '1격' 혹은 '주격'의 이데올로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기로 하자. 예를 들어 <헤겔 예나 시기 정신철학>의 84쪽에서 원문 p.186의 "Schatze"는 "Schatz"로, 85쪽에서 원문 p.188의 "Meinen"은 "Meiner"로 바꿔져 병기되어 있다. 첫 번째의 경우는 복수 단어를 단수로 표기한 경우이고, 두 번째의 경우는 2격을 1격으로 바꿔 표기한 경우이다. 
  
① 먼저 두 번째 경우를 살펴보면, 이는 주격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내주는 대표적 사례라 할 수 있다. 번역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이러한 '주격'의 신화 앞에서 잠시나마 머뭇거릴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화' 또는 '일반성의 제시'라는 환상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격지배를 기본으로 하는 인구어로부터 교착을 기본으로 알타이어로의 이행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고민이기도 하다. 따라서 1격 또는 주격으로의 변형 병기는 일종의 용단, 용감한 선택, 과감한 번역과 '번안'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여기서 '용감하다'와 '과감하다'라는 형용사에 어떤 긍정적인 부가가치가 따로 매겨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 가지 착각해서는 안 되는 문제는, 번역이 아니라 '단순한' 병기가 문제가 될 때 오히려 이러한 표기법의 이데올로기적 문제가 돌출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병기 또한 전혀 단순할 수만은 없는 것이며 중립적이지도 않다는 사실의 새삼스럽다면 새삼스러울 발견과 인식,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또 하나의 '부가적인' 문제를 제기하자면 이렇다: 예를 들어 "Meinen"을 "Meiner"로 [격]변형시켜 병기하는 것은 'Ur-text'의 문제를 야기하지 않는가?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원문 그대로' 표기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나는 원문주의자, 텍스트지상주의자는 아니다. 뭐, 어쩌면, 혹은 그런지도 모르고. 하지만 이러한 '부가적인' 문제가 원문주의자의 주변을 감싸며 제기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② 첫 번째의 경우 역시 기본적으로 '주격'의 신화 또는 '기본형'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이다. 복수형태의 기본형은 단수라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하지만 물론 이데올로기의 이러한 작동이 베일을 벗을 때 그것은 이미 더 이상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이 역시, 조금은 다른 층위에서이긴 하지만, 두 번째 경우와 동일한 문제들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역시 '부가적인', 그러나 보다 더 메타적인 문제 하나를 더 야기시킨다: 두 번째의 경우, 곧 격지배의 '기본형'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첫 번째의 경우, 곧 단/복수의 '기본형'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기본형'인가?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사례들은 어떤 위계로 구획되고 조직되어 있는가, 혹은 있어야 하는가? 다시 한 번 곁가지를 치자면, "있어야 하는가?"라는 당위적 물음은, 다시 한 번 독일어를 차용해볼 때, 'sollen'의 물음이어야 할 것인가, 혹은 그래야만 하는가? 

 
2) 다산과 공포: 생산적이거나 혹은 무시무시하거나
 
이 책에는 중대한 오역이 하나 있다. 국역본 84쪽 17행의 "생산적일 수fruchtbar 있는 밤"은 원문(p.187:8)의 "furchtbar"에 대한 오독(誤讀) 또는 실독(失讀)인 것이다. "무시무시한 밤" 혹은 "무시무시하게 된 밤"([...] die furchtbar wird)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 문자에 대한 잘못된 판독으로 "생산적인 밤", "생산적일 수 있는 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단순한 오역이라는 지적을 넘어 이러한 번역 또는 번안을 징후적으로 독해해보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무시무시한 '세계의 밤(die Nacht der Welt)'에 대한 저 유명한 헤겔의 문장이 이토록 '생산적'으로 보이는 사례는 다시 찾기 힘들지도 모른다.
 
질문들은 이렇다: 'furchtbar'를 'fruchtbar'로 잘못 판독하는 것, 곧 '오인'하는 것은 단순한 환시인가, 아니면 어떤 종류의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치환인가? 이것은 어쩌면 하나의 강박일까? 이러한 강박증은 가역적일까 비가역적일까?
 
재미있는 것은, 과실(果實)이 많다는 것, 그것은 곧 생산적이라는 사실, 하지만 동시에 또한 그것은 무시무시하다는 사실이다. 과실(果實)이 많다는 것은 또한 과실(過失)이 많다는 말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무시무시하면서 또한 동시에 생산적인 밤이야말로, 헤겔의 저 '세계의 밤'에 대한 가장 합당한 설명이자 해석이 아니겠는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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