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1) 『한국연극』 2009년 9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이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자 했던 것은 역시나 지극히 역설적인ㅡ그러므로 내 경우에 있어서는 대단히 '일반적인'ㅡ주제인데, 이 주제는 이하의 글 안에서 그만큼이나 역설적인 하나의 모토로 요약되고 있다.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이 바로 그것. 말하자면 나의 질문은, 연극음악 안에서, 그리고 연극음악을 통해서,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그리고 웅성거리는 침묵은 또한 어떻게 들리게 되는가, 하는 일견 모순적인 문제들인데, 나는 이러한 지극히 역설적 형식의 질문들이 연극음악을 위한 핵심적인 물음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이렇게 '생각'한다는 데에 아마도 나의 가장 큰 '역설'이 있을 것이다. 연극음악은 '기형적 공감각'의 산출을 목표로 해야 하며, '연극적 실재'를 [찰나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가 생각하고 상상하고 추구하는 연극음악의 '역설적 존재론'임과 동시에 '이상적(理想的/異常的) 방법론'이기도 하다. 고로, 환면(幻面)을 어떻게 내파(內破)할 것인가.

2) 내 글을 읽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기대되는 어떤 역설적 효과를 배가시키기 위해, 사족(蛇足)이 아니라 일종의 사두(蛇頭)를 붙여보자면, 나는 얼마 전에 김온 작가 덕분에 새러 케인의 「4. 48 정신이상」의 불역본을 구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는, 이하의 글에서 내가 문제 삼고 있는 영어 원문과 독일어 번역에 '임상적 증례'를 하나  더 덧붙일 수 있는 기회가 된 것. 불역본에서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이 옮겨지고 있었다: "la capture/ la brûlure/ la rupture/ d'une âme" 이것이야말로 실로 최고의 번역적 '사치'ㅡ혹은 최고의 번역적 '무위'ㅡ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러한 상황을 보다 적극적으로, 곧 '[연극]음악적'으로 다시 '번역'해보자: 그러므로 문제는 '리듬'인 것이다, '의미'가 아니라. 또한 문제는 '사유의 전이'인 것이다, '주제의 이식'이 아니라.

(2010. 2.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소리 없는 비명은 어떻게 들리는가
— '기형적 공감각'으로서의 음악과 '연극적 실재'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Maurice Blanchot, Le livre à venir, Paris: Gallimard(coll. "Folio essais"), 1986[1959¹].

 
모리스 블랑쇼(Maurice Blanchot)가 말하듯, 창조적인 경험의 일기는 그 은밀한 움직임이 심화될수록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l'impersonnalité de l'abstraction)"에 접근하는 경향을 보입니다(『도래할 책(Le livre à venir)』). 제가 연극 안에서 음악을 생각하는 방식, 혹은 저 추상성의 음악적 '번역어'로 즐겨 선택하는 구절은 '정적(靜寂)의 비명, 다성(多聲)의 침묵'입니다. 이것은 어떤 일반적 사실에 대한 서술이 아니라 제가 음악에 대해 지극히 개인적으로 지니고 품게 되는 일종의 다짐이자 고백이기도 합니다. 비명은 소리 지르지 못한 채 속으로 파열하고, 침묵은 여기저기서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 다른 목소리로 울려옵니다. 하지만 물론 말은 음악이 아니고 음악 또한 말이 될 수 없겠죠. 하지만 음악과 연극은 지극히 '번역적'인 관계 안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극명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는 새러 케인(Sarah Kane)의 희곡 「4. 48 정신이상(4. 48 Psychosis)」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the capture/the rapture/the rupture/of a soul." 저는 이 구절 앞에서 일종의 '번역 불가능성'을 감지하게 됩니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 말들은 '옮겨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여기서 말하는 '번역 불가능성'이란 단순한 번역상의 좌절감이나 당혹스러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그것은 근대와 현대, 유럽과 아시아, 혹은 지금의 이곳과 그때의 저곳을 가르는 묘한 '현기증'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번역을 되씹고 곱씹고 있는 저의 눈에 이 문장에 대한 독일어 번역("die Verhaftung/die Verzückung/die Zerreißung/einer Seele")은 하나의 사치로까지 느껴지기도 합니다. 인구어(印歐語)와 알타이어 사이의 간극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저 구절에 대한 번역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은 무엇보다 한국어가ㅡ독일어와는 다르게ㅡ그 구절의 선율과 리듬을 '번역'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물론 그 逆도 마찬가지입니다). 

 

       

Sarah Kane, Complete Plays, London: Methuen, 2001.
Sarah Kane, Sämtkiche Stücke, Hamburg: Rowohlt, 2002.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러한 불일치와 어긋남 속에서 연극과 음악 사이의 관계가 지닌 독특한 일면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극 안에서 음악은 언제나 넓게는 이러한 '번역'과 '번안' 사이를, 좁게는 '독주'와 '반주' 사이를 오고갑니다. 이러한 현기증의 해결은 요원하며, 우리가 흔히 '해방'이라고 부르는 것(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또한 이에 대한 적절한 해답이 되지 못할 겁니다. 결국 지금 여기의 문제는, 다시 한 번 새러 케인의 구절을 차용하자면, 일종의 "독주 교향곡(solo symphony)"을 만들어내는 일,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단성의 합창'을 배반하고 위반하며 그것을 '다성의 침묵'으로 은밀하게 확장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소리 지르지 않는 비명', '다성의 단선율'이라는 지극히 역설적인 표현은 어쩌면 '불가능한 번역'으로서의 연극음악의 자리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연극음악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의 조건으로부터 비로소 '가능'해지는 무엇입니다. 연극음악은 무엇보다 연극에 대한 단순한 번역이 아니라 그 어조와 선율과 리듬을 어긋나게 옮겨오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하나의 역설적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 하나의 현기증: <4. 48 정신이상>의 한 장면.

 

장 주네(Jean Genet)의 연극 <발코니(Le balcon)>을 떠올려보죠. 그 작품의 장소를 이루는 매음굴, 그 공간의 바깥은 없습니다. 실제의 혁명도, 실제의 여왕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단, 존재라는 것이 고집스럽게 '실존'만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이 여전히 순진한 솔직함으로밖에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렇습니다. 그것들이 '진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의 시뮬라크르(simulacre)로서 축조된 이 고급스러운 매음굴 속에서, 오직 그 안에서만 그렇게 존재한다는 뜻일 겁니다. 진짜 없는 가짜, 원본 없는 모사. 세상의 모사화(模寫畵)인 이 매음굴은 자신의 원본을 모르는 공간입니다. 이 공간은 세상의 '거울'이자 욕망의 '텔레비전'으로 기획되었지만, 그 환면(幻面)이 비춰 보여주는 어떤 세상이 바깥에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온전한 세상, 어쩌면 그 밖에서는 어떤 것도 실존할 수 없는 단 하나의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 매음굴 안에서 욕망되고 있는 저 모든 이미지들은 언제나 실존의 지위를 초과하고 잠식합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그러한 이미지가 '욕망의 수요'를 조절하고 '실존의 가격'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지표로서 기능하는 것이죠. 영원히 반복해서 들려오는 연극 속의 저 총탄과 폭탄의 소리들은, 그래서 단순한 폭발(explosion)의 소음이 아니라 어떤 내파(implosion)의 징후들이기도 합니다. 

 

 

Jean Genet, Le balcon, Paris: L'Arbalète, 1983.

 

인물들이 매음굴 안에서 펼치는 놀이는 주인과 노예의 은밀한 변증법을 따르고 수행합니다. 이들의 '가학-피학(SM)' 관계가 의미하는 것은 '사드(Sade)'와 '자허-마조흐(Sacher-Masoch)'의 이름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먼저 '노예(Slave)'와 '주인(Master)'의 이니셜일 겁니다. 그곳에서 사고파는 것은 단순한 성(性)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 진짜 몸이 아닌 기호(sign)로서의 몸이며, 그들은 그 기호와 이미지를 소비하고 유통시키면서 욕망이 언제나 무엇보다 타자(他者)의 욕망임을 증거하고 상기시킵니다. 우리의 무대는 욕망의 시장인 매음굴인 동시에 '죽음의 왕궁'이자 '삶의 감옥'입니다. 그들은 그렇게 이미지 속에서 죽음의 '절대성'으로 나아갑니다. 죽음으로 완성되는 존재, 이는 주네가 이미 『장미의 기적(Miracle de la rose)』(1946)에서 아르카몬에 대한 동경과 그와의 '신성한' 합일을 통해 보았던 악(惡)의 절대성에 대한 또 하나의 변주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향유하는 놀이는 무엇보다도 죽음의 놀이이며, 이 놀이는 때로는 다른 이름을 달고 때로는 다른 역할의 의상을 입고 영원히 반복되는 것입니다. 음악과 연극 역시 이러한 '놀이' 안에 위치합니다. 그 안에서 음악은 연극의 '다른 이름', '다른 의상'이 되고자 합니다. 

 

 

▷ 환면의 환면: <발코니>의 한 장면.

 

따라서 연극 속에서 일어나는 혁명이란 어떤 직선적인 전복이나 찬탈 또는 일회성의 단절이 아닙니다. 혁명은 오히려 하나의 갱신(更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차이를 지어내며 계속 반복되는 나선형의 순환 구조 속에 삽입된 하나의 후렴구일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절망'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오히려 그 반대이지 않을까요? 혁명의 노래는 매번 다른 이름을 위해 그리고 매번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불릴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발코니>에서 우리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기존 권력의 부패나 혁명의 진정성과 같은 지극히 '상상적'인 문제가 아니라, 혁명과 권력이라는 이미지가 갖고 있는 환상성과 허구의 힘, 곧 '실재'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구조를 비춰봅니다. 우리는 이미지를 쫓고 뱉고 먹고 싸며 살고 있으며, 어쩌면 우리가 살고 죽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잠을 자고 또한 이미지가 깨어나서 걸어 다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연극 속에서 이미지의 삶과 죽음을 봅니다. 환면의 환면, 이것이 바로 '연극적 실재'입니다. 어쩌면 연극음악은 이토록 '시각적'인 은유 속에서 지극히 '청각적'인 무언가를 기획하고 실천하는 형식일 겁니다. 거울은 다른 거울 속으로 제 자신을 복제하고 연극은 또 하나의 연극을 배 밖으로 잉태합니다. 배보다 더 큰 배꼽, 배 밖으로 비집고 나온 또 하나의 배, 사실 그것은 어떤 유별난 기형이나 변종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살아내고 있는 이미지의 '전형적'인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연극과 음악은 이렇듯 배보다 더 큰 배꼽의 형태로, 그런 기형 아닌 기형의 모습으로, 서로를 향해,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무엇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일 수밖에 없는 감각의 영역에서 출발하는 음악이 저 블랑쇼의 말처럼 "추상성이라는 비개인성"을 획득하는 길은, 이렇듯 그 자신의 역설을 바로 그 역설 자체로 통과하는, 이미 그 자체가 가장 역설적인 하나의 길밖에는 없을 듯합니다. 소리 지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비명을 들리게 할 것인가, 혹은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소리를 어떻게 보이게 할 것인가, 이 지극히 역설적인 질문들은 연극음악이 언제나 근본적으로 묻고 품어야 할 청각적이며 시각적인, 따라서 지극히 공감각적인 물음이 되고 있습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푸른바다 2010-02-22 1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재 구조를 많이 바꾸셨네요^^ 연극에 대한 글들이 많이 올라 온 것 같은데, 찬찬히 읽어 보려고 합니다. 연극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연극에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설은 잘 보내셨는지요? 시간이 되신다면 조만간 한번 뵙고 싶네요^^

람혼 2010-02-22 20:19   좋아요 0 | URL
네, 많은 분들이 이곳 알라딘을 떠나셨거나 떠나고 계신 와중에 생각한 바가 있어 대폭 개편해 보았습니다. 글이 많이 올라온 것은 아닌데요(그런 점에서 저는 '블로거'로서는 거의 0점에 가까운 인간인 듯합니다), 최근에는 연극에 관한 글 두 편과 음악에 관한 글 한 편을 올렸는데, 사실 이 '~에 관한'이라는 한정어는 제 글에는 다소 '과분'하거나 '과소'한 설명인 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든 연극에 많은 애정을 갖고 계시다니 저로서는 무척 기쁜데요. 아무쪼록 흥미롭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저 또한 조만간 뵙게 된다면 참 좋겠습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라 케인의 광팬입니다.
저도 극작가의 꿈을 안고 사는 이로써
제 우상이지요.
장주네 다음가는...

람혼 2010-04-27 02:59   좋아요 0 | URL
문제적 작가들만을 사랑하시는군요! ^^
극작가를 꿈꾸신다니 작품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반갑습니다, 모딜리아니님~!
 

*) 『한국연극』 2009년 8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역시나 뒤늦게 옮겨놓는다. 당시 이 글을 쓰면서 내가 잠시 인용했던ㅡ그러나 또한 이 글의 중심적 선율 중 하나가 되고 있는ㅡ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연극에 관한 테제들(Thèses sur le théâtre)」은 그의 책 Petit manuel d'inesthétique에 수록되어 있는 글인데, 이 책의 국역본이 바로 얼마 전인 2010년 1월에 바디우 전공자인 장태순 선생의 번역을 통해 간단히 『비미학』이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었다(그러니까 이 국역본은 원서가 나온 지 10년이 조금 넘어 번역된 것인데, 내가 "연극-관념"이라고 옮겼던 "idée-théâtre"를 장태순 선생은 플라톤적 의미에 따라 "연극-이념"으로 옮기고 있다). 일독을 요하는 책이다. 특히나 바디우의 '비미학'을 랑시에르의 '미학/감성학'과 접속시켜볼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대체적으로 철학자들은 춤의 문제에 대해ㅡ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ㅡ철학적 담론을 제기하기를 꺼려하거나 그러한 담론을 산출하는 데에 무능한 경향이 있는데(아마도 이에 관해서는, 춤의 문제를 철학적 문제로 '강림'하게 했던ㅡ혹은 철학의 문제를 춤의 문제로 '승화'시켰던ㅡ니체(Nietzsche)가 거의 유일한 '예외'일 것이다), 이 책에 실려 있는 「사유의 은유로서의 춤(Le danse comme métaphore de la pensée)」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 소중하게 느껴지는 글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일독을 권한다. 그러나 어쨌든 이하의 글에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역시나 연극과 그 음악, 음악과 그 연극에 관해서이다, 모두 알다시피 말이다. 어쨌든 이 글은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공연ㅡ그 공연은 사실 내가 쓰고 내가 연출하고 내가 작곡하며 내가 연주하고 연기하는 공연이 될 텐데ㅡ에 관한 '상상'의 일단과 일말을 '고백'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개인적으로 의미가 있는 글이다. 그 공연을 언젠가는 꼭 할 수 있을 것이란 희미한 희망을 동력 삼아, 오늘도 펜을 든다.
(2010. 2. 16.)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연주하는 배우, 연기하는 악사
— '사건'과 '관념'으로서의 연극, '잔향'과 '이명'으로서의 음악

 

최 정 우 (작곡가/번역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는 「연극에 관한 테제들」에서 사건(événement)과 관념(idée)의 관점에서 연극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첫째, 연극은 반복되는 상연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대에 오르는 그 순간 하나의 단독적인(singulier) 사건이 됩니다. 바디우는 이러한 연극적 혹은 무대적 사건을 "사유의 사건(événement de pensée)"이라는 말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연극이라는 가장 '물질적'이며 '실제적'인 장르 안에서 일견 가장 낯설게 보이는 '관념'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사유 형식'이기 때문입니다. 연극은 그 자체로 배열과 조합의 행위에 기초한 하나의 복합적 작업을 뜻하는 것, 곧 다양한 구성요소들 사이의 특정한 '배치(agencement)'를 뜻하는 것입니다. 연출이라는 작업이 뜻하는 첫 번째 의미는 아마도 이러한 '배치'의 행위가 될 겁니다. 또한 이러한 배치의 작업이 산출하는 것을 바디우는 "연극-관념(idée-théâtre)"이라는 독립적인 조어(造語)로 부르고 있습니다. 연극은 여러 구성요소들의 배치를 통해서 연극에 고유한 특정한 관념을 산출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둘째, 연극은 무엇보다 하나의 관념이지만, 그러한 관념이란 오직 상연이라는 형식 안에서만 출현하는 어떤 것, 무대화라는 과정 없이는 미리 존재할 수 없는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연극만이 생산할 수 있는 독특하고도 단독적인 의미에서의 '연극-관념'이란, 오로지 연극적 배치라는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작업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가능한 사유의 형식들 중에서도 연극이 유독 특별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유가 배우의 몸, 무대, 빛과 소리 등 물질성의 다양한 형식들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유에서일 겁니다. 

 

 

▷ 강연 중인 알랭 바디우: 연극은 '배치'이며 또한 '사유의 사건'이다.

 
이러한 물질적 요소들의 배치란 무엇보다 먼저 하나의 '건축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가장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연극의 건축술이 궁극적이고 최종적으로 목표로 하는 것이 거의 언제나 그러한 건축의 '해체'라는 사실입니다. 연극이 하나의 구조물을 건축함과 동시에 해체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이 연극이기에 지닐 수밖에 없는 숙명이자 마력일 겁니다. 연극은 고착이 아니라 유동이며, 또한 나타남과 동시에 사라집니다. 오히려 연극은 어쩌면 이러한 시간성, 이러한 덧없음, 이러한 물질적이고 시간적인 유한성 그 자체를 가장 적극적으로 껴안고 보듬으며 나가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음악의 시간성이 연극과 만나게 되는 지점이 바로 이곳입니다. 음악의 시간은 연극의 시간과 때로는 포개지고 때로는 어긋나기도 하며, 또한 연극과 음악은 서로를 통해 자신이 그 스스로는 갖고 있지 못했던 특정한 '공간'을 얻기도 합니다. 그 시간과 공간은 구축됨과 동시에 해체되는 어떤 것, 쌓임과 동시에 닳아 없어지는 어떤 것입니다. 이러한 해체의 이미지는 연극이 끝나면 철거되고 사라지는 무대의 이미지와 겹쳐집니다. 공연이 끝나면 무대와 배우와 조명과 음악 등의 모든 물질적인 요소들은 사라지고, 오직 하나의(혹은 여러 개의) 관념만이 남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러한 '관념'이란, 저 '물질'의 존재가 없었다면 결코 남을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관념, 물질성의 형식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산출될 수 없었던 그런 종류의 사유입니다. 연극이 우리에게 선사하고 우리 곁에 잔존케 하여 그 영향을 지속시키게 하는 관념이란, 이렇듯 연극의 '물질성' 혹은 '유물론적' 연극성에 기반하고 있는 어떤 것입니다. 

 

     

Alain Badiou, Petit manuel d'inesthétique, Paris: Seuil, 1998.
▷ 알랭 바디우, 『 비미학 』(장태순 옮김), 이학사, 2010.

 

음악 또한 이러한 '물질성'을 통해 '관념성'을, 유한한 '시간성'을 통해 무한한 '영원성'을 얻고자 합니다. 무대 곳곳과 그곳을 스쳐간 배우들의 몸에 들러붙어 있던 소리의 흔적들은 어느 순간, 음악이 하나의 '유령'으로서 '본래적'이고 '근본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어떤 확정적 무형성(無形性)으로부터 잡힐 듯 말 듯 눈에 보이지 않는 불확정적인 유형성(有形性)으로, 그리고 시간 속의 존재로부터 다시 시간 밖의 비존재로, 그렇게 이행하고 이탈합니다. 이 과정의 끝에 남겨지는 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을 '잔향'이라는 말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것은 또한—전혀 부정적이거나 병리적인 의미에서가 아닌—일종의 '이명(耳鳴)'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잔향'과 '이명'은 또한 무엇보다 하나의 '울림'이며, 이 울림은 또한 '들리지 않는 소리', 이미 지나간 소리들이 남겨놓은 '관념의 음(音)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잔향'은, 이 '울림'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이 됩니다. 곧 음악은 하나의 사유와 관념이 마치 '잔향'처럼 퍼지고 '울림'처럼 남겨지기를 기대하고 또한 의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음악이 자신의 '무형성'으로부터 '유형성'을 긷고 일구는 방식, 자신의 유한적 '시간성'을 통해 오히려 무한적 '영원성'을 약속할 수 있는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형성은, 이러한 영원성은, 어떤 실체를 지닌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연극은, 가정을 통해 사실을, 허구를 통해 진실을, 무형을 통해 유형을, 순간을 통해 영원을, 그리고 특수를 통해 보편을 약속하는 것이기에, 언제나 그 자신의 약속을 배반함으로써만 오히려 그 약속을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역설을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설은, 연극음악이 하나의 독립적인 음악이 아니라 연극적 배치의 한 구성요소로서 드러나고 경험될 때에만 오히려 가장 성공적인 '총체성'을 띤다는 또 다른 역설로, 다시금 반복되고 변주되고 있습니다. 

 

         

▷ 파트리스 파비스: 텍스트성은 무엇보다 하나의 '물질성'으로, 하나의 '음악'으로 온다.
    Patrice Pavis, Le théâtre contemporain, Paris: Nathan, 2002.
 

파트리스 파비스(Patrice Pavis)는 『현대 연극』의 논의를 통해서 드라마 텍스트의 분석을 텍스트성(textualité)에 대한 천착으로, 곧 텍스트의 '물질성'과 '음악성'으로의 침잠으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에게 연극 텍스트에 대한 이해란 곧 그 텍스트의 물질성을 이해하는 일, 다시 말해 그 텍스트를 이루고 있는 기표들의 '소리'와 '리듬'과 '유희'를 이해하는 일이 되고 있는 것이죠. 텍스트를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음악의 '선율'과 '템포' 안으로 침잠하는 일, 반복하자면 이것은 곧 연극적 '배치'의 작업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답이 되고 있습니다. 연극적 텍스트를, 그리고 그 텍스트가 지닌 물질성을, 무엇보다도 하나의 '음악'으로 이해하고 수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여기서 '연극적' 배치란 또한 일종의 '음악적' 배열이기도 하지 않을까요? 

 

 

▷ 연기자는 또한 어떻게 한 명의 연주자가 되는가: 2008년 대관령 국제음악제 중 얼 킴(Earl Kim) 작곡의 <린다에게(Dear Linda)>에 출연한 배우 윤여정의 모습.

 
제가 언젠가 꼭 한 번 무대에 올려보기를 꿈꾸는 하나의 '연극'이 있습니다. 배우가 무대에 오릅니다. 단, 그는 '연기'를 하는 연기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주'를 하는 연주자로서 무대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와 함께 악기를 든 연주자들이 같이 무대에 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연극이 뮤지컬이거나 음악극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악기를 든 연주자들은 '연기'하는 배우를 위한 반주자들이 아닌 것이죠. 여기서 배우는, 오히려 그 자신이 하나의 '악기'가 됩니다. 그의 목소리는 하나의 '선율'과 '음색'을 이루고, 또한 그의 몸짓은 하나의 '리듬'을 만들어냅니다. 연극이 끝난 후, 무대에 불이 꺼지면, 그때 비로소 남겨질 하나의 사유, 하나의 관념을 상상해봅니다. 그 사유와 관념은, 딱딱하게만 들리는 그 이름과는 전혀 다르게, 결코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닙니다. 물질과 시간이 떠난 후에 남겨진 어떤 비물질성과 비시간성, 그것은 오직 그러한 물질과 시간이라는 유한한 조건들을 거쳤기에 가능해진 하나의 무한입니다. 음악은 하나의 관념이겠지만, 그것은 오직 '물질'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그러한 한에서의 '관념'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러한 물질과 관념의 교차와 공존 속에서, 배우는 한 명의 악사가 되고, 연기는 또 다른 연주가 되며, 연출은 일종의 작곡이 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와 음반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 극단 풍경 <마라, 사드>의 공연 포스터: 2009년 10월 8~18일,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

i) 연극 <마라, 사드>가 엊그제 10월 8일 처음 무대에 올랐다. 공연은 10월 18일까지, 대학로 아르코 예술극장 소극장에서 쉬는 날 없이 계속된다. 이 연극 역시 내가 음악을 작곡한 작품인데, 악단이 실황 연주를 통해 직접 연극 안에 참여하는, 국내에서는 그리 흔치 않은 형태의 작품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밴드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의 全 멤버가 2006년에 공연했던 새러 케인(Sarah Kane)의 연극 <새벽 4시 48분>(원제: <Psychosis 4. 48>) 이후로, 밴드가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하는 연극 공연은 내게도 실로 오랜만이다. 이번에 나는 직접 연주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조민기, 허철주, 김윤호라는 어리지만 걸출한 세 명의 연주자들을 만난 것은 이번 공연이 내게 선사해 준 소중한 인연들 중 하나이다. 이들 연주자들이 없었다면 내 음악은 지금의 이 형태로 '실현(實現)/실연(實演)'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친구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덕분에 내 음악이 더욱 풍성해졌다. 이 연주자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것도 관극의 재미를 더욱 톡톡히 배가시킬 수 있는 '관전 포인트'임을 지나가는 길에 꼭 언급해둬야 할 터, 또한 올해 중순에 있었던 박근형 연출의 <마라, 사드>를 보았던 관객이라면 이 두 연극의 연출과 음악을 서로 비교하고 대조해보는 것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일 것이라는 점을 첨언해둔다. 

 

▷ 사드와 마라: 배우 남명렬 선생(左)과 홍원기 선생(右)[사진: 정형우].

ii) 개인적으로 연극 음악 작업을 지금까지 대략 7년 동안 해오면서 언제나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멋진 배우들과의 소중한 만남이다. 이번 연극을 통해 얻게 된 소중한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배우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과의 만남을 말해야 할 것이다. 특히나 개인적으로 이번 공연을 통해 나는 남명렬 선생의 '사드'에게 완전히 '반해버렸는데', 연극에 임하는 그의 자세와 예술에 대한 태도를 통해 많은 것들을 듣고 보고 배울 수 있었다. 하여 이 자리를 빌려 또한 남명렬 선생과 홍원기 선생, 두 배우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밝혀둔다.

iii) 덧붙여 한 마디 첨언해둔다. 이 연극의 드라마투르그(혹은 드라마터그)는 팸플릿에 수록한 자신의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연출가 박정희는 프로덕션을 정식으로 구성하기 이전에, 더욱 분명히 말하자면, 프리-프로덕션(pre-production)의 초기 단계에서부터 필자를 드라마터그로 섭외하였다. 덕분에 필자는 공연의 시의성과 의미를 탐구하고,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어 '드라마투르그'와 영어 '드라마터그'의 차이점을 각주를 통해 세밀히 밝히면서까지 자신의 위치와 입장에 대한 장문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이 '드라마터그'의 '실제' 작업 안에서, 이른바 그가 쓰고 있는 문자 그대로 "연출 개념을 결정하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실체가 정작 목격되지 않고 실종되어 있다면? 작품에 대한 전체적인 개념 설정이 동요하고, 작품의 '시의성'이 지니고 있는 철학적 의미에 대한 신중한 고려가 부재하며, '연극'이 어떤 정치성 위에 있으며 또한 어떤 정치성을 담보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이 결여되어 있는 채로, 무언가에 대해 '아니다'라는 정해진 답변만을 남발하고 권위만을 세우는 '나이브한' 태도는, 그 자체로 비겁하고 치졸하다. 곁가지를 치자면, '드라마투르그'는 한국의 연극 판에서 너무도 자주 '드라마트루그'라고 잘못 표기되곤 하는데, 이러한 오기(誤記/傲氣)에는 '트루(true)'에 대한 어떤 종류의 뒤틀린 '강박관념'이 결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해보게 되는 것이다. 진정성이란 단순히 확고한 '이론'에서만 오는 것이 결코 아니다(그러므로 이론 자체가 '확고하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는 더 더욱 자명하지 않은가). 연극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단지 '무대 위의 결과'만이 아니라, 오히려 '배우와 배우의 관계', '배우와 연출의 관계'이듯이,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기반이 되었을 때에만 궁극적으로 '연극과 관객의 관계'가 설정되고 결정되듯이. 

iv) 이 연극은 말 그대로 배우와 연주자들의 힘이 전적으로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작품을 함께 하고 있는 모든 배우들과 연주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다른 작품보다 배로 힘든 연습의 과정이었을 텐데, 여러 가지 어려움들 속에서도 좋은 작품을 이루어준 이들에게, 그 감사의 인사를 소중히 담아 전하는 마음으로, 이하에서는 연극 팸플릿에 수록한 작곡의 글을 옮겨놓는다. 더불어, 당연하게도, 관극(觀劇)과 일람(一覽)을 권하는 바이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마라, 사드>의 극작가, 페터 바이스(Peter Weiss)의 모습.

 
혼돈 혹은 축제: 말하기와 노래하기 사이에서
 

최 정 우 (작곡/음악감독)

1) '사드'와 '연극'의 만남? 『소돔 120일』, 『쥐스틴 혹은 미덕의 불행』, 『규방철학』 등 사드(Sade)의 외설스럽고 잔혹한 소설들에 익숙한 분들에게는(혹은 떠도는 풍설로만 사드의 '악명'에만 익숙한 분들에게는), 이 두 단어의 조합은 어쩌면 지극히 생경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이는 사드가 말년에 샤랑통(Charenton) 병원에 수용되어 환자들에게 연극을 지도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또한 사드가 『옥스티에른』, 『에르네스틴』 등 스무 편에 달하는 연극 작품들을 남기고 있는 '희곡 작가'이기도 하다는 사실 역시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포베르(Pauvert) 출판사의 전집판을 기준으로 할 때도 그 분량은 책 세 권에 달합니다). 

 

▷ 하나의 '익숙한' 시선: 다비드(David) 作, <마라(Marat)의 죽음>.

2) 바이스(Weiss)의 '상상력'이 빛을 발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입니다. 작가는 사드가 마라에 대한 희곡을 쓰고 그것을 환자들과 함께 연극으로 무대에 올린다는 역사적 상상, 역사적 가정을 합니다. 이러한 상상과 가정 안에서 서로 대면하고 논쟁하는 마라와 사드, 그리고 그 둘을 둘러싼 인간군상이 직조하는 하나의 '총체성'은 극중극의 형태로 우리에게 '혁명'의 자리와 '정치'의 자리를 새삼 되묻습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3: théâtre I, Paris: Pauvert, 1991.

3) 작곡의 측면에서는 이 '음악극'이 결코 '뮤지컬'이 아님을 먼저 말씀드릴 필요가 있습니다. 배우들은 노래할 때 노래만 하고 말할 때 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우들은 노래하듯 말하며 또한 말하듯이 노래합니다. 이러한 '말하기-노래하기'의 형식이 오페라의 레치타티보(recitativo)와 다른 점은 사실 이 작품이 '연극'이며 또한 '연극'일 수밖에 없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에 있습니다. 제가 이 작품을 대하면서 작곡자로서 품었던 기본적인 생각은, 병원에서 이루어지는 극중극의 형태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정상성의 표면 아래에 숨어 있는 비정상성의 카오스적 에너지를 포착하기 위한 음악적 언어는 결코 말과 노래의 엄밀한 구분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이는 또한 '연극 안에서 노래는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말과 노래 사이의 모호한 구분은 어쩌면 제가 음악적으로 이 작품의 내재적 혼돈과 대면하고 대화하는 하나의 '상동적' 전략일 것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4: théâtre II, Paris: Pauvert, 1991.
 
4) 이 작품의 작곡은 기본적으로 사이키델릭 록의 어법에 기초하여 진행했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음악적 장르가 아니라 극 안에서 그 장르가 형성할 수 있는 '연극적 효과'일 것입니다. 음악을 통해 이 작품이 지닌 지독한 '혼돈'의 성격과 동시에 또한 흥겨운 '축제'의 측면도 포착할 수 있었다면 제 의도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극중에서 사드는 루이 15세 시해미수범 다미엥(Damiens)에 관해 말하는데(이 이야기는 사실 푸코(Foucault)가 『감시와 처벌』의 초입에서 신체형의 '화려함'에 관련해 들고 있는 인상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 처형의 잔혹함은 처형을 하나의 '스펙타클'로 지켜보는 군중의 들뜬 열기와 겹쳐져 역설적으로 하나의 '희생제의', 하나의 '축제'가 되기도 합니다. 혁명이 불러일으킨 수천수만 명의 죽음과 '화려한' 신체형 속에서 드러나는 한 개인의 '아름다운' 죽음 사이의 간극, 아마도 마라와 사드 사이에는 저 죽음의 숫자와 형태 사이에 놓인 간극이, 그러나 또한 단지 숫자와 형태라는 기술적 술어로만 치환되고 소급될 수 없는 그런 심연이 놓여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 연극이 그런 '심연'을 환기시킬 수 있기를, 또한 동시에 그런 '축제'의 자리에 값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Œuvres complètes du Marquis de Sade, tome 15: théâtre III, Paris: Pauvert, 1991.

5) 연극은 '연출의 연극'이며 특히 제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연극은 '배우의 연극'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여기서 새삼 환기하고 싶습니다. 이 사실이 '기본적'인 이유는, 배우가 연극의 필수적 요소라는 기초적이고 소극적인 규정 때문이 아니라, 연극의 시작도 끝도 모두 배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배우에 의해서 구현된다는 가장 적극적이며 숭고하기까지 한 사실 때문입니다. 제가 특히나 이 연극의 배우들에게 개인적으로 큰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가장 '기본적'인 진리를 제게 새삼 환기시켜 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리의 정치'는 어쩌면 가장 낡은 형태의 정치일지 모르지만 동시에 또한 현재 이 자리에서 가장 시급하게 요청되는 정치가 아닐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혁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쩌면 이 연극이 묻는 궁극적 질문은 바로 이것일지 모릅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 또 다른 '생경한' 시선: 보드리(Baudry)가 그린 마라와 코르데(Corday)의 모습.

*) 덧붙여: 마라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단연코 다비드의 그림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그런데 보드리의 그림은 그 장면의 '다른 진실'을 보여준다. 보드리는 마치 카메라를 회전시키듯 다비드의 그림이 '확고하게' 지니고 있던 시선과 관점을 오른쪽으로 이동시켜 마라의 '욕조'를 둘러싸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보드리의 그림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살해된 마라보다는 마라의 암살자, 곧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Corday)의 모습이다. 그녀 자신과 어떤 이들에게 코르데는 그 자체로 '유디트'의 현현이었을 것이다. 연극은 때때로 이러한 '관점의 [동시적] 이동'과 '시차적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그래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극의 정치성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나이브한' 정치적 충정과 울분 혹은 무력감이나 좌절감을 통해서는 대답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질문은 연출이ㅡ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ㅡ가장 치열하게 던져야 할 물음이며, 이 질문을 소홀히 하는 것은 연출에게 거의 '직무유기'에 가깝다는 것이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다. 연극은 이 질문에 연극 그 자신으로써 답해야 하는가? 반드시 '대답할' 필요는 없다('장르' 자체와 그 장르가 빚어낸 어떤 '결과물'이 언제나 하나의 '대답'일 수는 없다). 모든 철학과 예술이 그러하듯, 연극에서도 또한 '질문을 잘 던지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에. '질문을 잘 던지는 것' 혹은 '질문 하나를 모든 관객이 소중하고도 고통스럽게 품게 하는 것'이야말로 모든 '연극적 실천'의 끝과 시작이 아니겠는가?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9-10-14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0-14 1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erial88 2009-11-23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아~ 한수 배우고 갑니다! 님의 글솜씨에 감격해서 실례지만 안면도 없는 제가 한 자 남기고 간다는~:D
역시 순수 문학분야 출신분들은 못 이기겠네요. (__)// 전공이신지 취미신지는 모르겠지만요. 제 졸렬한 글솜씨에 님께 머리가 숙여집니다...;

람혼 2009-11-24 17:00   좋아요 0 | URL
지나친 겸양에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처음 댓글을 남겨주시는 것 같은데요, 무척 반갑습니다.
'출신'으로 따지자면 저는 '순수문학' 분야 출신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글을 잘 읽어주셨다니 깊이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터브룩이 했던 마라 사드를 봤었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람혼 2010-04-27 03:07   좋아요 0 | URL
저는 Peter Brook의 <마라/사드> 전체를 다 보지는 못했습니다. YouTube에서 몇몇 부분들을 확인했을 뿐이죠. 부럽습니다.^^
희곡의 영역본은 읽어보았는데, 당시 공연 때 Brook이 썼던 음악의 악보들도 몇 장 함께 수록되어 있더군요.^^
 

 

*) 최근에는 정말이지 가히 '살인적'인 스케쥴의 연속이다. 지난 주 아르코 소극장에 사카테 요지(坂手洋二) 원작의 연극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위한 음악을 작업해 올렸고, 지난 주말에는 부산으로 무용 공연을 다녀왔다(Trisha Brown 무용단 소속의 젊은 무용가 정현진의 솔로 작품을 위한 라이브 연주였다). 하루에도 두 번씩 서울과 부산을 비행기와 열차로 오가는 힘든 일정이었다. 이번 주말에는 LG아트센터에서 공연을 해야 하고, 다음 주에는 다시 아르코 대극장에서 다른 무용 공연 한 편을 준비해야 한다(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지금 내 마음은, 손오공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아 무수한 분신들을 만들어냈듯, 나의 '미니미'를 대략 열 마리쯤 만들어 이곳저곳에 마구 뿌리거나 심어놓고 싶은 심정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방바닥에서 굴러다닐 그 흔한 머리카락 한 올도 나에게는 없으니(!), 이게 또 문제라면 문제다.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한국연극』지 2009년 7월호에 기고했던 글을 옮겨놓는다. 지난 6월 사카테 요지의 <블라인드 터치> 공연을 위한 도쿄 방문이 이 글의 소재이자 모태이다(나의 '도쿄 공연 여행 이야기'도 따로 쓰고 싶은 마음인데, 현재로서는 언제 쓸 수 있을지 전혀 기약이 없다). 본래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개막에 맞추어 연극의 소개와 함께 이곳에 올리려던 글인데, 예의 저 살인적인 스케쥴 때문에 다소 늦게 올리게 되었다. 연극은 7월 12일 일요일까지, 아르코 소극장에서 상연된다(며칠 안 남았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람(一覽)을 권한다, 아니, 강권한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오뚝이, 자빠졌다, 일어난다
— 보편성과 특수성 사이에서, 연극과 음악의 '정치성'을 다시 생각하기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지난 6월 초 도쿄의 이케부쿠로에 위치한 Owl Spot 극장에서 사카테 요지(坂手洋二)의 <블라인드 터치>를 무대에 올리고 왔습니다. 이 연극을 위한 음악을 작곡한 관계로 방문한 것이었는데, 개인적으로 제게는 일본의 많은 연극인들과 관객들을 만날 수 있는 즐거운 경험이자 새삼 우리 연극계의 상황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계기였습니다. 이 연극은 본래 작년 2~3월에 산울림 소극장에서 국내초연을 했던 작품인데요, 최근 사카테 요지의 작품들이 한국 무대에서 많이 상연되고 있는 상황에서(6월에는 <다락방>의 공연이 있었고, 7월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원제: <오뚝이 아저씨 자빠졌다>)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가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연극과 연극음악의 어떤 '정치성'에 대해서입니다. 

  

▷ 坂手洋二, 『 戱曲集 I: 屋根裏 みみず 』, 東京: 早川書房, 2007.
▷ 坂手洋二, 『 戱曲集 II: 海の沸点 / 沖繩ミルクプラントの最后 (外) 』, 東京: 早川書房, 2008.

사카테 요지는 일본 사회에 대한 철저한 '자기비판'으로 무장하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속해 있는 일본의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는 많은 작품들을 써오고 있죠. 반면 동시에 사카테는 자신의 작품이 일본 내에서의 공연보다 오히려 외국 공연을 통해서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거라는 요지의 발언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이 두 입장은 제게는 일종의 '발전적 모순'처럼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사카테 자신이 말하는 이 연극의 의미, 곧 '커뮤니케이션의 부재 혹은 어려움'이라는 일종의 보편적인 주제는, 예를 들어 '전공투(全共鬪)', '천황제(天皇制)', '전향(轉向)' 등 지극히 일본적인 문맥에서 이루어진 여러 운동들과 제도들과 정세들의 세부적인 사항에 무지한 대부분의 한국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곧, 공통의 구체적인 특수성 혹은 역사성을 결여하고 있는—그리고 사실 어쩌면 이렇듯 결여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외국' 관객에게 드러나고 느껴지는 저 주제의 '보편성'이란, 이러한 특수성과 역사성을 결여하고서도, 과연 여전히 '연극적 보편성'이라 이름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이러한 질문은 이미 처음부터 그 대답이 정해져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특수성의 추상과 사장 안에서도—어쩌면 바로 그 안이기에 더욱 더—우리는 어떤 보편성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야만 한다는 지극히 진부한 정답 말이죠(각자 자신이 외국 관객 앞에 선 작가라고 상정하고 대답해보시길, 모두 '정답'을 도출할 수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은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 과연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 걸까, 그렇게 묻는 질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그런 당연한 '정답'이 아니며 차라리 어떤 '오답'에 가깝습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따위의 코즈모폴리턴을 가장한 지극히 도착적인 국수주의로써는, 시정잡배 정치가들이 염원해마지 않는 저 '세계화'는 물론이고, 이른바 '한국성'과 '세계성'이라는 개념이 진정 뜻하는 바를 모두 놓치게 될 테니까요. 연극음악은, 그리고 그 음악을 담고 있는 연극은, 지극히 폭력적인 '민족주의적' 감수성으로써만 그러한 특수성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허울 좋은 세계화라는 미명하에 마치 '국운'을 걸듯 그러한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도 아닐 겁니다. 오히려 우리는 '한국성'과 '세계성'이라는 이 지극히 국민[민족]국가적인 개념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는 형식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러한 의미에서도 역시나 연극과 연극음악은 하나의 '실천'이 되고 있습니다. 

 

▷ 坂手洋二, 『 最後の一人までが全体である / ブラインド・タッチ 』, 東京: れんが書房新社, 2003.

이러한 질문으로써 제가 겨냥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 가장 기본적으로는 보편성에 대한 일종의 '신화'에 다름 아닙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외국인'으로서의 한국 관객에게는 하나의 보편적 '연극 예술'로 다가갈 수 있을 <블라인드 터치>는, 어쩌면 일본 국내에서는 '예술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일 수 있습니다. 번역극을 할 때마다 느끼게 되는 제 개인적인 딜레마 내지는 아포리아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번역극이 자신의 본래 '국적' 안에서 지니고 있는 '정치성'을, 우리는 너무도 쉽게 하나의 '예술성'으로서만 느끼고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물음이 바로 그것이죠. 우리는 '당연히' 하나의 연극 속에서 어떤 보편성을 바라고 기대하며 또한 그러한 보편성을 필요로 하고 요청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하나의 연극이 지닌 '국적' 또는 그러한 국적에서 오는 어떤 '역사성'이 이해되지 못하고 추상되어버린 보편성이란, 일종의 '감정이입의 번안' 내지는 단순한 '구조의 대입'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얄궂은 것은, '소통'이란 이러한 '번안'과 '대입'의 단순한 과정 안에서조차 또한 존재한다는 것, 아니, 보다 적극적으로 말해서, 어쩌면 가장 넓은 의미에서 [외국어의] '소통'이란 바로 이러한 간극과 거리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보편성의 획득이란 어쩌면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하고 사장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이 지극히 '외국적'이고 '이국적'인 어떤 상황에 대한 다른 이름이 아닐까 하는 것이죠. 노파심에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구체성과 특수성을 추상한 결과가 바로 보편성이라고 말하는 저 지극히 '보편적인' 결론이 아닙니다. 오히려 문제는, 보편성이란 개념 자체가 '외부'의 존재를 상정할 때에만, 곧 '이국'과 '외국'이라는 타자, 그리고 그러한 '외국[어]들 사이의 소통과 간극'이라고 하는 실로 '번역적인' 상황을 전제할 때에만 성립될 수 있는 개념이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일본 내에서보다 외국에서 나의 연극이 더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카테의 말은, 사실 바로 저 일본 사회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과 '구체성'을 외국인인 한국 관객이 더 '보편적으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의 한 표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카테의 작품을 통해 우리가 봐야 할 것은 '일본의 연극'이 아니라 '우리의 정치'가 되고 있습니다. 

 

▷ 사카테 요지, 『 다락방 / 오뚝이 아저씨 자빠졌다 / 공연되지 않은 "세 자매" 』
    (기무라 노리꼬, 성기웅 옮김), 연극과인간, 2009.

그런데 이것은 찬사임과 동시에 하나의 저주이기도 합니다. 왜 찬사일까요? 그것은 표면적으로 한국 관객의 '예술적 이해력'에 대한 상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 왜 저주일까요? 그것은 '정치적 몰이해'를 '예술적 감동'으로 손쉽게 치환하는 어떤 무지를 상찬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소통'이라는 보편적 주제를 이해하고 내재화하려는 저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실천'은, 아니 오히려 언제나 바로 이 '실천' 앞에서 머뭇거리게 되는 저만의 이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현기증'은, 이렇듯 제게 언제나 저 착종된 '역사성'의 문제를 환기시킵니다. 조금 더 넓은 범위에서, 우리가 우리의 '근대'를 생각할 때, 그리고 그 '근대'를 생각하며—저로서는, 거의 언제나—일본과 한국을 서로 연결시키게 될 때 제가 느끼게 되는 이러한 '위화감'이 단지 저만의 것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실로 간절하다 못해 절실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하나의 연극을 통해 이해할 수 있고 또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어쩌면 연극의 '예술성'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정치성'일 것이며, 또한 특수한 상황과 정세들을 통해 도출할 수 있는 어떤 '연극적 보편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보편성이라는 폭력적 문법 아래 묻혀버리는 어떤 '삶의 특수성'일 것입니다. 이는 '모든 것이 정치적이다'라고 말하는 몰정치적 '범신론'을 뜻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모든 예술 안에는 정치가 있다'고 말하는 비예술적 '음모론'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연극과 연극음악은 오히려 일견 '중립적'으로만 보이는 어떤 보편성으로부터 우리만의 '편향적' 특수성을 추출하고 고민하는 어떤 작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연극과 연극음악이 추구해야 할 '내용'이란 어쩌면 이러한 실천의 '형식'일지 모릅니다. 

 

▷ 도쿄(이케부쿠로) Owl Spot 극장에서의 리허설 장면. 배우 윤소정과 이남희, 그리고 연출가 김광보의 모습. [사진: 리나짱] 

저는 현재 한국 연극이 처한 어떤 단면을 '정치극의 부재'라는 고색창연한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하는 '정치극'이란 단지 일차원적 의미에서의 풍자극이나 세태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흔히들 연극이 '배우의 연극'이라고 말합니다. 지극히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연극은 또한 무엇보다 '연출의 연극'이기도 하며, 특히 제게는 '음악의 연극'이기도 합니다. 단, 이 모든 것들이 '삶의 정치'를 환기시키고 창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말이죠. 오랜 시간 힘들여 얻어왔던 것들을 너무도 쉽게 잃게 되는, 따라서 맞서 싸워야 할 것들이 나날이 너무나 많아지는, 그런 우울한 세상입니다. 오늘날 연극을 하고 연극을 본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교과서적' 질문이 전혀 '교과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의 불행이 있겠지만, 동시에 우리의 결의 또한 거기에 있습니다. 이는 이 글을 쓰고 있는 저와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곧 우리가 함께 연극 안에서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어야 할 질문이 되고 있습니다. 팔과 다리가 다 떨어져나가도 꿋꿋이 칠전팔기(七顚八起)하는 저 오뚝이처럼 말이죠.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 음악 리허설 중에, 작업 노트를 펼쳐보는 람혼. [사진: 리나짱]

*) 글을 마치기 전에, 도쿄에서 만났던 소중한 인연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야 한다. 네이버 블로그를 통해 만났던 이웃 리나짱님이 바로 그 주인공(리나짱님 또한 자신의 블로그에 <블라인드 터치> 도쿄 공연에 관한 소중한 감상을 올려주셨다: http://blog.naver.com/ynsohn51/40072633234). 귀중한 시간을 내어 훌륭한 리허설 사진들을 찍어주셨고, 새벽 늦게까지 영업하는 도쿄 구석구석의 알짜 서점들을 소개해주셨다. 여러 감사한 일들 중에서도, 특히나 8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시부야의 고전음악다방 '라이온(ライオン)'을 내게 소개시켜주신 기억은 아주 아주 오래 갈 것 같다. 부족한 말이지만, 이 자리를 빌려 리나짱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09-07-10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간 뜸하신 이유가 바로 살인적인 스케쥴 때문이었군요! 안그래도 어, 요즘 람혼님이 뜸하시구나, 생각하는 며칠이었는데 말입니다.

람혼 2009-07-11 07:05   좋아요 0 | URL
사실 거의 빈사 직전입니다. 그래도 꿋꿋이 버티고 있죠.
원래 글을 거의 매일 올리다시피하는 '부지런한' 블로거는 못 되지만,
다락방님께서 제 생각 해주셨다니 무척 기쁜걸요!
덕분에 큰 힘을 얻습니다.^^

[해이] 2009-07-10 1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글 잘 읽을게요 살인적인 스케쥴에도 몸관리 꼭 하시고요ㅋ

람혼 2009-07-11 07:06   좋아요 0 | URL
글도 다 읽으시기 전에 댓글부터 다신 겁니까?! ^^;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몸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해이]님~!

무해한모리군 2009-07-10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휴 더운 날씨에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일자가 얼마안남았네요..
내일한번 짬을 내어 보아야겠습니다.
건강하시기를 빌어봅니다.

람혼 2009-07-11 07:07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말씀대로, 날씨 또한 '한 몫' 했습니다.^^;
(나날이 더 더워지니, 살인적인 건 따로 있는 것 같습니다...)
공연 가신다니, 저로서는 참 기쁘고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건강 빌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힘 내겠습니다!

모딜리아니 2010-04-25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제일 좋아하는 연출가가 김광보씨인데...넘 반갑네요.

람혼 2010-04-27 03:08   좋아요 0 | URL
김광보 연출을 제일 좋아하시는군요? ^^
저 역시나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연출가 중의 한 분입니다.
함께 작업할 때면 언제나 저 또한 충만한 에너지를 받게 되죠.^^
 

*) 『한국연극』지 2009년 6월호에 기고한 글을 옮겨놓는다. 실로 오랜만에 쓴 콜테스에 관한 글이다. 이와는 그리 상관 없는 이야기 같지만, 나는 여기서 이 나라의 문화부 장관이라는 작자에 대해서 한 마디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인간의 언행과 작태가 날이 갈수록 가관에 접임가경이다. 아무한테나 반말을 찍찍 내뱉는 이 인간의 품성이야 지극히 기본적인 인성 부족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이겠지만(이런 인간이 '문화'부 장관을 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정부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 인간이 문화부 앞에서 일인시위를 하는 학부모를 욕보이고 학생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퍼붇는 장면을 보고 있자면 주민등록증을 반납하고 납세를 거부하고 싶어진다(불필요한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다). 나는 이런 인간이 문화부 장관을 해먹을 수 있는 나라의 '국민'이고 싶지도 않고 또 내가 내는 세금이 이런 인간의 뒤를 닦는 데에 쓰이는 것을 용납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간들에게 우리가 사는 나라를 맡겨야 하는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인간들이 소위 '문화' 정책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둬야 하는 것인가. 무식하면 용감하다고들 말하지만, 이 인간의 무식함은 무례함을 훌쩍 넘어 후안무치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지 않는가. 고로 이 인간의 무식함은 용감함을 담보하기는커녕 오히려 가장 비열하고 치사한 비겁함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시민의 광장을 전경 버스로 둘러싸고 '아늑하다'고 말하는 나라, 헌법이 보장하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반국가적 불법의 온상으로 몰고가는 나라, 용산 참사에 희생된 '국민'은 국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게 되어버리는 나라, 이런 나라가 '지옥'이 아니라면 무엇인가. 우리는 지옥에 아주 가까이 있다. 어쩌면 단지 모를 뿐이다, 이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사실을, 너무 가까 있다고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지옥이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여기가 바로 지옥이기에, 단지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이다. 그러나,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곳은 지옥이다. 하지만 그 지옥을 탄생하게 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자문하고 자답하고 또 자문해야 할 것이다. 당신 자신이 그 지옥 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민중의 고혈을 빨아먹는 흡혈귀가 아니라면 말이다. 저 흡혈귀들이 빨아들인 피를 어떻게 회수할 것인가.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하리라.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지옥으로 아주 멀리, 또는 지옥에서 아주 가까이
ㅡ '불가능한 소통'의 형식으로서의 연극음악

최정우 (작곡가/번역가)

 
'소통'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장소, 곧 가르치기/배우기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진정한 타자(他者)의 장소는, 서로 다른 언어들 사이에 있습니다. 타자의 문제가 가장 직접적이고 육체적으로 드러나는 장소는 이러한 '사이'로서의 언어라는 장소이며, 무엇보다 바로 이러한 '언어-사이' 속에서야말로 소통할 수 없는 타자의 문제는 역설적으로 '소통'의 문제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도, 언어는 하나의 텍스트(text)이기 '이전에' 이미, 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콘텍스트(context)가 됩니다. 연극음악은 언어와 몸짓이라는 텍스트에 대한 콘텍스트의 '개입'과 '침입'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입니다. 

         

▷ Bernard-Marie Koltès, Combat de nègre et de chiens, Paris: Minuit, 1989.
▷ Bernard-Marie Koltès, La fuite à cheval très loin dans la ville, Paris: Minuit, 1984.
 
바로 이런 의미에서 콜테스(Koltès)의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은 서로 다른 언어가 만났을 때 어떤 '비극'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백인 여자 레온의 독일어와 흑인 남자 알부리의 월로프(Ouolof)어는, 서로 번역되고 추측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완전한 번역'이 불가능한 역설적 관계에 있는 언어들인 것이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또한 그 두 언어는 공통적으로 프랑스어에 대해 '외부적 타자'의 위치를 갖습니다(콜테스의 연극들 안에서 이러한 '다른 언어들 사이의 소통가능성'이라는 문제 또는 심지어 '같은 언어 안에서의 소통불가능성'이라는 문제는 거의 언제나 가장 핵심적인 주제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두 이방인 사이에서, 그만큼이나 서로 이질적인 언어들로 이루어지는 대화들, 그 속에서 그 둘은 서로에 대해서도 역시나 '이방인'이 됩니다. 레온은 알부리를 향해 마치 일종의 '언어 연습'을 행하듯 괴테의 시 「마왕(Erlkönig)」을 읊조리기도 하고, 그에게 물을 찾으러 같이 가자고("Komm mit mir, Wasser holen") 제안하기도 합니다. 한편 알부리는 레온에게 "당신에겐 여자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라고 묻지만, 그녀에게서 그에 합당하고 적절한 대답을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레온은 마치 무엇으로부터 도망치듯 구원의 '물'을 찾는 것이지만, 알부리에게는 회수되지 못한 시체 때문에 자기 부족의 여자들이 흘리는 '눈물'이 더 중요한 것이죠. 반면 '식민지의 공식언어'인 프랑스어는 그들에게 공히 폭력적인 '동일자의 언어'입니다. 그 사실을 확실하게 또는 어렴풋이 의식하고 있는 알부리와 레온에게만이 아니라, 심지어 프랑스인인 오른과 칼에게도, 그것은 그 '자신의 언어'조차 되지 못하는 하나의 폭력적인 언어일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언어란 '필수불가결한 것'임과 동시에 또한 한편으론 '불가능한 것'이기도 합니다. 어긋난 타자들의 언어가 지닌 비극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독일어와 월로프어가 프랑스 관객에게 주는 문화적이고 심리적인 효과는 우리가 받는 느낌과 많은 부분에서 다를 수밖에 없을 테죠.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특수한 언어들이 지닌 비극성에서 드러나고 있는 소통불가능이라는 어떤 '보편적' 상황입니다. 그 언어들은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고 객지에서 산화되고 휘발됩니다. 콜테스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서쪽 부두』에 나오는 스페인어와 케추아(Quechua)어, 『사막으로의 회귀』에 나오는 아랍어 등을 떠올려봅시다. 그 언어들은 모두 '제자리에 있지 못한' 언어들,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 먼 곳에 떨어져버린 언어들, 국적과 장소를 잘못 찾은 언어들, 하지만 또한 그 객지와 타지에서 여전히 헛되이 발음된다는 바로 그 사실을 통해 '가까스로 소통되는' 언어들인 것입니다(지극히 역설적이지만, 이 언어들이 이러한 타자의 장소에 있지 않다면, 오히려 그 언어들은 '소통'의 문제를 이토록 극명하게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우리의 인물들은 모두 제각각, 바로 이 뒤틀리고 어긋난 언어들을 통과해서, 콘래드(Conrad)의 저 두렵고도 마력적인 제목을 빌리자면, 곧 '어둠의 심장(Heart of Darkness)'으로 나 있는 길을 향해, 서로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거나 멀어집니다. 또는, 콜테스의 첫 소설에 붙은 몽환적인 제목을 다소 변형시켜 말하자면, 그 언어들은, 지옥으로 아주 멀리, 말을 타고 달아납니다. 말을 타고 달리는 아버지와 아들에게 마왕이 바람처럼 따라붙습니다. 그들은 말[馬]을 타고 달아나려 하지만, 말[言]이 그들을 구원해주지는 못합니다. 연극음악이란 어쩌면 이 말[言]의 말[馬]이 되어주고자 하는 '대체'와 '보충'의 형식, 따라서 일종의 '구원 없는 구원'의 형식일 겁니다. 

         

▷ 연극 <검둥이와 개들의 싸움>의 몇몇 장면들: 인물과 언어들의 '불가능한' 만남.

콜테스에 대해서 '텍스트의 부활'과 '작가의 부활'을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문학계 쪽의 '자위'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베르스펠드(Ubersfeld)의 말을 빌리자면, 희곡은 이미 애초부터 '구멍 난 텍스트(texte troué)'일 뿐입니다. 이러한 희곡에 대한 정의는,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하나의 구조물로 여겨지는 시나 소설 등 여타 문학 장르에 대비해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규정된 '소극적' 정의이기도 하지만, 이는 그 자체로 희곡과 연극이 지닌 '비(非)텍스트적 텍스트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향유하는 정의이기도 합니다. 콜테스 작품의 중요성은 물론 '읽는' 희곡으로서의 텍스트가 지닌 문학성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저 '구멍'이라고 하는 연극성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사유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의 작품은 텍스트의 여백과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으로서의 구멍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깊은 심연으로서의 구멍 또한 활짝 열어놓습니다. 우리가 굴착해 들어가야 할 구멍은 아마도 그곳일 겁니다. 콜테스는 이 작품이 아프리카에 대한 것도, 흑인에 대한 것도, 네오콜로니얼리즘에 대한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이 작품은 '정치적인' 작품도 아니고 '참여적인' 작품도 아니라는 말이죠. 그의 말을 충실히 따를 때, 아마도 우리는 이 작품 안에서 사르트르(Sartre)적인 의미에서의 "흑인성(négritude)" 같은 것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가 19세기식의 고루한 의도주의 비평을 완고하게 고수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작품에 대한 작가의 발언을 외형 그대로 곧이곧대로 따라갈 결심을 한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우리는 이 작품의 정치적이고 미학적인 진폭을 우리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생각해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치가 아닌 정치'에 대하여, '텍스트가 아닌 텍스트'에 대하여.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도상에 표시되는 영토를 지배하는 외면적 식민주의가 아니라 내면과 의식을 지배하는 내재적 식민주의에 대하여, 오히려 작가의 의식적인 말이 비껴간 곳에 숨어 있는 작가의 무의식적인 '말'에 대하여. 아마도 바로 그 자신이 '영원한 타자'이기도 했던 콜테스를 이해하는 '지금, 여기'를 사는 독자와 관객의 몫은 오히려 그런 식민주의와 그런 언어를 사유하는 일인지도 모르니까요. 그 내면의 풍경은 어쩌면 어둠이거나 고독일 수도 있고 또한 타자라는 지옥이자 소통과 번역의 불가능성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물론 어디에서나 문제가 되고 있는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주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보편성' 안에서 유독 깊이 사유해 보아야 할 것은, 그 보편적 교집합에 포섭되지 않는 또 다른 가능성, 하나의 여집합입니다. 연극음악은 어쩌면 이러한 '여집합' 속에서 '교집합'을 찾으려는 역설적 형식일 겁니다. 

         

Bernard-Marie Koltès, Quai ouest, Paris: Minuit, 1985.
Bernard-Marie Koltès, Le retour au désert, Paris: Minuit, 1988.
 
아마도 사르트르의 저 유명한 경구처럼, 타자는 지옥일지 모릅니다. 콜테스는 어쩌면 우리에게 그 지옥의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지옥을 벗어나 달리 달아날 다른 곳은 없습니다. 최소한 콜테스는 그런 손쉬운 도피처를 제공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근본적인 '절망'일까요? 하지만 쉽사리 희망을 이야기하고 쉽사리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 오히려 그 자체로 절망적인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사는 이곳이 그 자체로 하나의 '지옥'일지 모르지만, 또한 이곳은, 우리가 오직 이곳 안에서만 이곳을 벗어나려는 의지를 갖고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따로 떨어진 곳에 다른 천국을 갖고 있지 않은 지옥, '불가능'하며 동시에 '필수적'이기까지 한 지옥이기도 합니다. '이곳'이 지닌 저주와 축복의 양가적 성격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콜테스의 공간은 흑인들의 아프리카도 아니고 프랑스인들의 공사장도 아닙니다. 그의 공간은 바로 여기, 이곳입니다. 우리에게는 각자 우리만의 서로 다른 추억과 시간들이 있습니다. 그 기억의 시간들은 서로 겹치기도 하고 서로 헤어지기도 합니다. 이 일견 지극히 당연하게 들리는 이야기를 새삼 꺼내는 것은, 이 우울한 시대에, 우리가 본래 품어 갖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잃고 빼앗긴 것은 무엇인가, 이런 더욱 지극히 당연한 질문들을 다시 묻고 던지기 위함입니다. 연극음악이 가장 간접적이면서 동시에 가장 직접적인 '회상'과 '환기'의 형식인 것처럼 말이죠.

ㅡ 襤魂, 合掌하여 올림.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