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람혼의 자정의 음악실, 사유의 악보, 팟캐스트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청취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http://ramhon.iblug.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Eugène Delacroix, "Méphistopélès dans les airs"(Musée national Eugène Delacroix).

 

 

 

Le méphistophélès d'Eugène Delacroix, qui se réjouit de flotter et voleter dans le ciel.
들라크루아(Delacroix)의 악마는 하늘을 즐겁게 부유하듯 날아다닌다.

 

 

단순히 이론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멀리서 어떤 '거리'를 두고 보게 되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어떤 특정한 관계의 상황들이 매우 적확하게 포착되고 명확하게 정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심지어 그런 '적확한 포착과 명확한 정리'라는 관념들마저도 또 다른 환영이자 함정일 수 있다는 점을 역시나 적확하고도 명확하게 느끼고 분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말이다(그리고 오직 이 뒤의 문장만이 가장 중요하며, 이 문장이 없다면 앞의 첫 문장은 결코 그 어떤 의미도 갖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말을 지어내고 서로 오해하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렇게 즐긴다고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그들의 가장 지질하고 치졸한 생존의 방식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생존의 방식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내게 추호도 없다. 그것은 그저 그들의 호구지책일 뿐이고, 그들도 그렇게나마 어쨌든 살아가야 할 테니까 말이다. 예를 들어 '문단'이라고 하는 곳은 사실 그러한 부당한 호구지책의 부조리한 구조에 대해 가장 격렬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대항하는 시공간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지질하고 치졸한 구조의 모습을 오히려 가장 격렬하게, 때로는 초과해서 닮으려고 발악하는 시공간이기도 하다(역설적인 것은, 바로 이렇게 역전되고 전이된 부조리함이 또한 많은 이들에게 글쓰기 그 자체를 추동하는 부정성의 힘이 된다는 사실이다). '적확한 포착과 명확한 정리'라는 것, 그것이 일단은 그저 환영이거나 함정이어도 좋다. 복수는 나의 것이기에.

 

Paris에서,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개의 복음서들이 모두 기록하고 있는 바대로,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마르코 복음서에서만 특별히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세 번 부인했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고 슬피 울었다(마태 26, 69-75; 마르 14, 66-72; 루카 22, 54-62; 요한 18, 15-18; 25-27). 공관 복음서들은 물론이고 요한 복음서까지 전하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이만큼 개연성이 확실한 전승도 없을 터, 여기서는 충실하면서도 어눌하고 동시에 용감하면서도 나약한 베드로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어제 김재원 새누리당 대변인 내정자가 아버지 박정희를 부인할 수밖에 없는 딸 박근혜의 입장을 저 베드로의 입장에 비유했다. 성경에 대한 지독한 무지의 소치이자 기독교 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대변인을 시켰더니 대변(代辯)은 하지 않고 외려 대변(大便, 똥물)을 쏟아붓는 '팀킬'을 한 셈인데, 대변인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수사(rhetoric)의 기본적 능력조차 결여한 저 자가 더 이상 대변인 자리에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대변인'은커녕 아예 '원수'가 돼버린 저 자를 향해 '원수마저 사랑하는' 도덕적 완벽함을 기대하기에는 오히려 저 너무나 '기독교적인' 새누리당 무리들이 역설적으로 '기독교 정신'에 가장 완벽하게 무지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김재원 대변인 내정자의 저 비유의 어법에는 무의식적인 진실이 있다. 구조적으로 봤을 때, 박정희 시대의 반민주적/반인류적 과오를 사과하는 박근혜의 말은, 마치 닭이 울기 전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말처럼, 다급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할 수밖에 없었던 완전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저 대변인의 대변이 매우 '쾌변'스럽게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저 대변인을 포함하여,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스스로 속으면서 살고 있다. 말하자면, 여전히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루카 23, 34) 전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하의 글은 '1만 사회주의자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http://blog.jinbo.net/wethesocialists에 올라와 있는 글이다. 동참과 지지와 응원을 강력히 표명하며 전문을 옮겨놓는다. 1만 사회주의자 선언. 혹자는 이러한 [단순한] 선언이 [현실적인] '실용주의'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에 얼마나 큰 효과를 가질 수 있을 것인가를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념의 종언을 발언하고 유행시키려는 이들 자신이 지닌 저 커다란 '이념적 편향성'에 대해서 이미 나 또한 언급했던 바 있거니와(『사유의 악보』, 「종곡」 참조), 소위 '제도적 민주주의'와 '현실적 선거공학'이라는 참혹한 '미명' 아래 '이념의 타협'를 구가하고자 했던 '정치적' 행동들의 한계는 이미 불을 보듯 명백해졌다. 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고루한 유물이겠지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무기이다. 이대로라면 우리의 상황은 더 악화되면 악화됐지 결코 더 나아지지는 않을 것이다. 반동의 피로 붉게 도색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도래하고 있는 현재로서의 사회주의를 지금 바로 여기에 함께 소환하기 위해, 타협 가능한 조직이 아니라 환원 불가능한 단수(單數)의 이름으로,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알리바이 아래 희석되는 복수(複數)의 이름이 아니라 절멸 (불)가능성의 미덕/악덕을 꿈꾸는 복수(復讐)의 이름으로, 함께 선언하자.

람혼의 보유(補遺):

그러나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의 전문을 옮겨놓기 전에, 나는 여기에 내 나름의 보유(補遺)를 덧붙인다(그러므로 일견 집단적 본문에 앞서 개인적 보유를 덧붙이는 이러한 행위 자체는 매우 착종되고 모순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무엇보다 먼저 이것은 이론으로 투쟁하고 예술로서 실천하고자 하는 나의 가장 소박한 몸짓일지도 모른다).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문이 제시하고 있는 복지, 노동, 교육 등에 관한 처음 세 가지의 기본적 선언들을 넘어 더욱 발전시켜야 하는 것은 오히려 네 번째 선언이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스스로 '사회주의자'임을 두려워한 사회주의자는 없었지만, 이념을 두려워했던 이론가들은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실천적' 문제란 어쩌면 이념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장 '이론적'인 일일지도 모른다. 이와 관련하여 함께 생각해봐야 할 몇 가지 쟁점들을 제시한다:

1. 나는 현행 양당제(말이 좋아 '양당제'이다)의 철옹성이자 그들만의 리그인 '제도적 민주주의'와 그 기형적/기생적 파생상품인 '민주적 선거'를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는 항상 차악과 최악 사이에서 고민해야 하는 것인가? 그들이 스스로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 시대와 모순되게도, 왜 우리 정치-소비자들은 항상 차악의 상품과 최악의 상품 사이에서 불합리한 선택만을 강요받고 있는가? 고로 현재의 가장 '반민주주의적 민주주의'를 어떻게 전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에게 가장 '이념적'이고 가장 '실용적'인 절체절명의 문제로 제기된다. 우리가 스스로를 국민의 지배자라고 생각하는 권력의 개들에게 표와 세금까지 바쳐가면서 그들의 살을 찌워줘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2. 나는 국가보안법의 철폐를 '현실화'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고로 가장 전략적이고 전술적인 이론과 실천들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헌법의 정신으로 적시된 '사상의 자유'라는 보편적 특수성은 소위 '국가 안보'라는 특수한 보편성의 미명 아래 무시되어 왔고, 따라서 소위 '한국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라는 정체성은 일반적이고 대중적인 문법 속에서 사상의 '차이'라는 측면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사상의 '위계'라는 측면으로 '차별'되어 왔다. 그러므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한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동어반복적 주장은 떼려치우고 국가보안법을 전략적으로 철폐할 수 있는 정치-미학적 은유들을 창궐시키자. 예를 들어, 나는 현재 '대한민국' 정부를 이롭게 하는 모든 행위들, '국익'을 위한다고 말하는 모든 담론과 행동들이야말로 최악의 '이적(利敵) 행위'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국가 자체를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하라! 

3. 나는 청년 실업 문제를 단순히 사회적 세대의 문제나 경제적 고용의 문제로 파악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청년 실업 문제를 단순히 예술적/음악적 희화나 풍자의 대상만으로 삼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회적 문제를 예술적으로 발언하는 예술가들 대부분은 사실 그러한 문제를 '소재적'으로만 채택하고 있으며 사실 이 문제와 별 상관도 없다. 그러니, 한국의 예술가들이여, 조금 더 노력을, 조금 더 분발하라. 문제는 단순히 프티부르주아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에 기생하는 예술가들과 그 '공범적' 행위들이다. 문제는 '인디'라는 '자랑스러운' 꼬리표가 아니라, '인디' 자체를 문화의 한 지형으로 허용하고 흡수하는 자본주의 그 자체, 그 감각적인 것의 분할 방식 자체이다. 그러니, 예술가들이여, 예술 안에 정치를 담으려 하지 말고, 예술로서/써 정치를 행하라.

— 이하, 예고한 대로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제안문을 옮겨놓으며,
    襤魂, 合掌/合葬하여 올림.

 

--------------------------------------------------------------------------------
 

1만 사회주의자 선언 

 


이 선언을 하고자 하는 우리는, 조직과 결합하지 않았으나 변혁을 갈망하며 진지하게 고민하는 개인들입니다. 이 선언의 목적은, 합당국면에서 규모있는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이들이 사회주의자로써 스스로를 인식하고, 선언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서로의 공간을 터나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든다는 취지에서 기획되었으며, 온라인-오프라인상의 홍보와 활동을 통해 선언에 동의하는 이들과 함께 다듬어나가며 변혁운동의 장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오롯이 설 공간을 터나가고자 합니다.

온라인에서는 선언 포스팅의 블로그로의 펌글을 통해, 그리고 blog.jinbo.net/wethesocialists의 해당 선언 포스팅에 대한 댓글을 통해 참여를 받고 있으며, 오프라인에서는 매주 월요일(3/28) 고려대학교 학생회관 생활도서관에 모여 선언의 구체적 의미와 방향에 대해 논의합니다. 활동과 스스로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나아가는 당신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

얼마 전 민주노동당 강령에서 ‘사회주의 원칙’을 삭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사회주의 원칙이 진보세력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고, 무엇보다 이를 삭제하는 것이 기층 당원들의 눈높이에 맞춘 처사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그리고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이런 저런 구실로 사회주의 원칙을 퇴색시키려는 시도들은 단지 민주노동당 내에서의 현실만은 아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어느 곳에서든 우리 자신의 원칙과 노선을 명확히 표현하는 것조차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무엇보다 현실 정당 내부에서 우리들은 여러 가지 유혹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우리의 구호와 강령을 약간만 완화하고 약간만 타협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협박과 회유에 직면해 있다. 우리들은 변혁에 대한 우리들의 열망을 제대로 수용할 수 있는 현실 정당과 조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사회주의를 내세우는 조직들에서조차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 무엇인지에 관해 자유롭게 토론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들은 우리가 처한 어려운 현실에 대해 어떤 손쉬운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노회한 진보적 어른들이 말하는 사회주의란 단지 겉치레에 불과했다. 지난 역사는 ‘진보’라는 저 막연한 관념이 사회주의 원칙을 얼마든지 판돈으로 걸 수 있는 것을 몸소 실증해 주었다. 사회주의를 말하는 여러 조직 역시도 의회정치의 의제에 끌려 다니면서 젊은 사회주의자들을 정치적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 이제 환상은 끝났다. 그러므로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우리가 생각하는 바를 명확히 말할 것이다.

‘진보’니 ‘통합’이니 하는 저 막연한 이름으로 우리가 견지하는 원칙들에 더 많은 힘이 실릴 것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 둘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견해와 의도를 감추는 것을 경멸받을 일로 여긴다. 대신 우리가 생각하는 진실이 무엇인지를 공공연하게 말하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우리가 무엇을 지지하는지 정직하고 분명하게 말하자. 우리의 신념을 선언하고 어디에서든 가르치자. 현재 운동이나 정당의 규모가 작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전체 진실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말할 것이며, 우리들이 말하는 이 진실이 어느 곳에서도 ‘합의’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원칙이란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치적 권리’를 다루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협할 수 없는 사회주의적 원칙에 관한 우리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우리는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복지’가 시혜의 대상이나 선심성 정책이 아니라, 모두의 ‘보편적인’ 사회적 권리라는 사실을 무조건적으로 단언할 것이다. 복지는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 교육권, 주거권, 행복 추구권, 그리고 사회적 국가를 실질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복지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소수 기술관료들이나 카리스마적인 정치인의 즉흥적인 판단에만 맡겨놓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복지는 무엇보다 예산주권의 문제이다. 이제라도 사태를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시민들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보육문제, 교육문제, 노동문제 등에 관해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판단’은 이제 ‘우리’들이 한다. 이에 관한 ‘정치적 책임’은 당신들, 예산을 멋대로 주무르던 정치인들과 관료들이 져야 한다. 시민들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기 위한 실질적 방안을 마련하는 데 예산을 우선 배분하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그 나머지 예산으로 당신들이 원하는 (각종 불필요한 토목사업과 같은) 소꿉놀이를 하라. 무엇보다 복지의 혜택을 이 사회의 구성원들이 부자이든 빈자이든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돌아가게 하라. 우리는 ‘보편적’ 무상급식 정책을 강력히 지지한다. 이제 복지에 관해서 ‘누가’ ‘더’ ‘불쌍한’ 사람인지에 관한 모욕적인 판단을 국가와 관료들이 내리는 시대는 끝났다. 복지는 이 사회의 시민 구성 모두가 당연히 누려야 할 자랑스러운 권리이다. 국가와 관료의 책임은 이러한 권리를 보장하는 데 있다.

두 번째, 노동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중요한 자원이다. 그럼에도 헌법에 보장된 노동권은 여전히 명목상의 문구에 불과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다 노동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며, 노동권이 단순히 몇몇 소외받는 사람들의 사회적 권리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정치적’ 권리라는 사실을 단언할 것이다. 우선 차별받고 억압받는 자들이 노조의 자유로운 결성을 방해하는 저 흔한 폭력적인 시도들은 그 정의상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철거민들에게 용역폭력을 동원하는 자본가들을 구속하라! 그리고 우리는 노동자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노동은 단순한 상품이 아니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그들로 하여금 임금결정에 참여하도록 하라. 근로조건에 관한 그들 자신의 요구는 노동의 분할(정규직과 비정규직의 분할)을 강제하는 자본의 공세를 무력화하는 수준까지 허용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과도’해질 것을 걱정하고 있다. 우리는 저들의 한가한 ‘걱정’을 공유하는 어떤 정치세력과도 함께 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최저임금이 아닌 ‘생활임금’을 지지한다. 모든 노동자들은 그들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그 사회가 이룩한 문명을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들이 받아야  할 ‘최저한’의 임금은 바로 그러한 권리를 척도로 산정되어야 한다.

세 번째, 우리들은 모두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한다. 우선적으로 공교육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사교육을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할 것이다. 오늘날 의무교육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수많은 학생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라. 그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필요한 교육을 제공하라. 공교육 내부의 경쟁과 폭력에 시달렸던 수많은 학생들이 ‘대안학교’를 찾아 전전하는 불행한 일이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공교육 자체가 그들에게 ‘대안’을 제공하도록 요구하자. 그것이 국가가 응당 져야 할 책임이다. 학력 신장을 명목으로 학교에서 자행되었던 흔한 사적 폭력들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라. 학교는 시민 양성소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시민적 권리를 우선적으로 교육하라! 무엇보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공교육을 넘어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에 강력히 동의한다. 제 정신을 가진 대학생들은 이제 ‘대학 선진화’라는 미명 하에 캠퍼스를 화려하게 꾸미고 값비싼 상점들을 학내에 들이며 등록금을 인상하는 저 술책들에 더 이상 기만당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대학과 자본이 상아탑 위에 쌓아올린 이윤은 우리들에게 외설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명문 대학이든 비명문 대학이든 그들이 쌓아올린 이윤은 단지 이 땅의 파행적인 학벌제도와 차별적인 노동시장 구조를 이용하여 갈취한 지대(rent)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저 위선적인 소수의 명문대학들은 명문대학으로서의 자신들의 특권적인 ‘지위’를 선전하는 저 역겨운 행위를 통해 그들이 제공하는 교육이 단순히 시장에서 제공되는 상품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반증해 주었다. 대학은 자본이 아닌 학생들이 요구하는 교육을 제공하라! 그리고 대학은 그들이 갈취한 이윤을 학내 구성원들, 학생들, 노동자들 모두에게 되돌려라!

네 번째,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청년들이야말로 이 사회의 ‘재생산’의 ‘책임’을 지고 있는 ‘주체’들이라는 것을 선언하며, 그들의 사회적 독립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역설할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어느 정치적 세력도 청년들을 단순한 ‘동원’의 대상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오늘날 청년들 사이에서 만연한 정치적 냉소주의는 단순히 그러한 현실인식의 반영에 지나지 않는다. 청년들이 청년에게 요구되는 ‘패기’와 ‘야성’을 잃어버린 것은, 어디까지나 정치적 공간을 점유해왔던 기성세대 자신의 책임이다. 이제라도 위선적인 방식으로 청년들에게 사회적 참여할 것을 훈계하는 짓은 중단되어야 한다. 시위와 집회에 나가고 투표를 하는 등의 사회적 참여의 진정한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는 ‘우리들’이 ‘결정한다.’ 무엇보다 청년들이 무한정 유예된 사회적 독립과 독자적 생존을 보장받기 위해 각자의 사적영역 속에서 자기계발과 노동에 매진하는 상황에서는 어떠한 정치적 대의도 사상누각에 불과하다는 점을 직시하라. 그들이 노동권, 주거권, 교육권 등의 사회적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현실을 진지하게 고려해야 한다. 더 이상 부모가 그들을 무한적 부양할 필요가 없어질 때,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과 더불어 그들의 제반 권리를 위해 투쟁의 당위성이 비로소 ‘의미’를 얻는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서슴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거리에 나서는 유럽의 청년들을 부러워하기 이전에, 각 정치세력들은 그들이 청년들의 사회적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하라.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진보니 뭐니 하는 공허한 정치적 미사여구에 속지 않을 것이며, 청년들을 본연의 사회적 주체로 진지하게 인정하는 정치세력들만을 진지한 연대의 상대로 고려할 것이다.

우리, 청년 사회주의자들은 현재 사회주의라는 대의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직시할 것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위기는 ‘조직’의 위기일 뿐만 아니라 ‘개인’ 양자의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말이다. 그 동안 진보적 이념을 내세우는 각종 조직과 정치세력들은 그들을 떠받쳐 왔던 개개인들에 대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등한시 해 왔다. 조직들이 진보적 개인들을 추수하기에 급급한 상황 속에서, 반대로 진보적 개인들은 자신의 대의에 대한 무력감과 냉소주의에 빠져들었다. 지난날 촛불시위는 과거의 조직들에 절망한 개개인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를 통해 정치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최후의 시도였다. 촛불시위 이후 우리는 더 이상 개인의 자발적인 내면과 의식만으로는 무엇도 할 수 없다는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반대로 각 조직들은 조직의 재생산이라는 장벽에 부딪히며 대중 동원능력을 급격히 상실해 가고 있다. 그들이 하나 둘 의회전술과 진보 대연합이라는 유혹에 굴복해 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럼에도 조직들은 자신의 책임과 과오를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관성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문제상황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이러한 문제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다시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과 정파를 떠나, 우리들은 진보적 이념을 내거는 각 정치세력들에게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질 것을 다시 한 번 요구할 것이다. 진보대연합이나 각종 선거공학에 기초한 망상들로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그만두자. 대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앞서 말한 사회주의적 원칙을 분명하게 내거는 세력들만 지지하고 연대함으로써 우리의 의사를 분명히 하자. 그리고 그들에게 그들이 대중들에게 진 정치적 책임을 자각하게 하자. 조직들로 하여금 그들이 할 일을 하도록,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혹자는 이념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들은 여기에 대해, 이념을 분명히 함으로써만 비로소 무엇을 할 수 있는지가 분명해질 것이라는 말로 대답할 것이다. 지금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 사회가 재생산의 한계에 부딪혔다는 공통인식이 공유되고 있다. 말하자면 지금의 계급 사회가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공통감각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만연한 위기의식과 당혹스러운 망설임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이념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서 당당하게 선언하자. 혹자가 말했듯이, "사회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이다!" 

 

 

알라딘 서지 검색을 위한 이미지 모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집트 혁명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
문제는 '탈(脫)-정치'가 아니라 '포스트(post)-정치'이다! 

 

 

▷ 타흐리르 광장의 한 순간: "People demand removal of the regime." 우리는 '다른' 체제를 원하는가, 아니면 체제 자체의 '제거'를 원하는가? 바꿔 말하자면, 우리는 단지 정권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니면 보다 근본적으로 '정권'이라는 개념 자체의 교체를 원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이집트의 인민들 앞에서, 그들과 함께, 가장 먼저 이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다.

 
1) E(verybody) G(reets) Y(our) P(eople's) T(riumph)! 이것은 이집트 시민혁명의 승리를 축하하는, 이집트 인민들을 위한 나만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그 '승리'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문제를 가장 철학적이고 정치적으로, 따라서 가장 실천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많은 이들이 이집트 '시민'혁명의 성과를 칭송하고 찬양하며, 동시에 포스트-무바라크, 곧 혁명 이후 '권력'의 향방에 주목한다. 그러나 그 주목의 방식은, "과연 다음 '대권'을 누가 잡을 것인가"라고 하는 지극히 환원적이고 협소한 정치[주의]적 질문에 결박되듯 제한되어 있다. 그들에게 시민혁명 이후의 '정치'라는 문제는 결국 '대권'을 잡을 '권력자'라는 개념에 한정되어 있는 것이고, 여전히 그런 협소한 의미의 정치-사유 구조 안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 그들의 어떤 '연대 의식': 사이좋게 손을 꼭 잡고,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이, 해맑게.

 
2) 한국에서 87년 '시민혁명'의 결과가 결국 '대권'의 차원에서(그리고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노태우 체제'라는 기이한 절충(타협)형성으로 결론[결딴]났던 과거를 돌이켜본다면, 무바라크 이후 누가 대권을 잡을 것인가 하는 권력-환원적인 제한적 사유로부터 벗어나 권력과 정치의 형태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시 사유해야 할 어떤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진다. 우리는 지금 바로 이 지점으로부터 우리의 사유와 실천을 추동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전두환 이후에 노태우가 [그것도 소위 '직선제'로] '권력'을 잡았던 한국의 기이한(?) 전례를 떠올리며, 이집트에서 무바라크 이후에 [오히려 소위 '민중'들 혹은 '우민'들에 의해] 그를 계승하는 반동적인 정권이 다시 출현하게 될 상황을 걱정한다. 곧 어떤 정권이 등장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정치적으로 가장 중요한 문제로 보는 것이다. 

 

 

▷ '개발도상국'들이여, 그저 '도상'에만 있지 말고, 부디 '선진국'이 되거라(될 수만 있다면 어디 한 번), 그렇게 멍청히만 있지 말고, 소위 '녹색 성장(Green Growth)'을 해보란 말이다, 그것도 무럭무럭!

 
3) 하지만 우리가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이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장 근본적으로 걱정하고 또 사유해야 할 것은, 이집트 시민혁명 이후 권력의 형태가 다시금 환원적으로 '최종적 권력자'라는 개념 틀만을 고집스럽게 추구하게 되는 정치-환원주의의 현상일 것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세계시민들에게 열어젖히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원주의로부터 벗어나 정치를 새롭게 사유하고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의 지점이다. 이집트 시민혁명의 '이후'를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러한 사유의 실험대 위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집트 시민혁명이 어떤 '역사성'을 갖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과거 유럽사회나 아시아의 소위 '개발도상국' 일부가 겪었던 시민혁명의 뒤늦은 '반복'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렇듯 앞으로 새롭게 전개되고 사유되며 실험되어야 할 '정치'의 장소와 향방에 있을 것이다. 이 가장 미묘하면서도 절실한 문제의 지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집트는 서구 중심의 민주주의 개념과 헤겔주의적 정치-역사의식의 개념 아래에서 소위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에 마치 당연히 통과해야 할 역사적 경험처럼 부과되었던 어떤 과정, 곧  '마땅히 가야 할' 어떤 것으로 상정된 '정치의 정도(正道)'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집트는 그들 자신의 혁명 자체가 지니고 있는 어떤 독특성(singularité)이라는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로운 정치의 길을 열며 동시에 그 가능성을 되묻고 있는 것이다. 

 

 

▷ 아마도 레닌을 바라보고 있을, 트로츠키의 모습: 영구 혁명(permanent revolution)은 여전히 가능한가?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여전히' 가능하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가 그것을 계속하여 '영구' 혁명이라고 부를 이유는 전혀 없지 않은가?

 
4) 우리는 어쩌면, 저 이집트 인민들이 열어놓은, '영구 혁명이 가능한가'라는 일견 지극히 트로츠키주의적으로 보이는 하나의 질문을, 혁명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둘러싼 현재의 모든 정치경제학적 의미나 상황들과 더불어, 다시금 재-사유하고 재-정립해야 할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에 문득, 저 흔하디흔한 자동차의 백미러에 각인되어 있는, 일견 무심하게만 보이는 한 '유명한' 문구를 다시 읽어보게 된다(참고로 나는 운전면허가 없다): "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집트의 상황도 우리에게 정확히 이렇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문구와 정확히 '상동적'인 의미에서 말이다. 그들은,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리고 아마도 바로 이런 의미에서, 그들은 우리의 또 다른 '거울'일 것이다(그리고 이는 동시에,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는 그들을 위해, 우리가 어떤 '상상적 거울상'을 깨트려야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집트가 던진 이 사유의 물음들에 답해야 한다. ['자랑스러운 한국인' 따위로 환원되어 버리는 국민국가의 노예로서가 아니라] 한 명의 세계시민(cosmopolitan)으로서,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또한, [소위 '책임 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스스로 강조하는 '국격(國格)'에 전혀 걸맞지 않게 이 이집트 혁명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않고/못하고 있는 저 모든 '한국적'인 것을 부정하고] 가장 '국제적으로(internationally)'!

— 襤魂, 合掌하여 올림. 

 

 

▷ "사물들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더 가까이 있습니다(Objects in the mirror are closer than they appear).": 이 문장이 더 이상 단순한 '경고문'이 아니라, 익숙하면서도 낯선 하나의 깨달음을 위한 어떤 '격언'이 되기 위해서. 

 

 

 

 

 

 

서지 검색을 위한 알라딘 이미지 모음: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1-02-13 14: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3 14: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17: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02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