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inoza, Œuvres IV «Ethica/Éthique», PUF, coll. "Épiméthée", 2020.


Enfin dans mes mains ! J’ai attendu tellement longtemps pour voir la publication de ce livre… Cette édition (dont le texte latin établi par Fokke Akkerman et Piet Steenbakkers, traduit en français par Pierre-François Moreau) de l’«Éthique» de Spinoza est enfin arrivée aujourd’hui !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리고 기다리던 피에르-프랑수아 모로(Pierre-François Moreau) 번역의 스피노자(Spinoza) 저작집 4권 <윤리학(Ethica/Éthique)>이 드디어 출간되어 오늘 내 손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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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수이사이드 앨범 «Renata Suicide»가 발매된 지 어느덧 한 달 반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무려 결성 17년만의 첫 앨범, 그리고 녹음/믹싱/마스터링에서 발매에 이르기까지 3년 이상의 시간을 공들여 만든 앨범, 그래서 그 동안 저희의 모든 음악적 시도와 노력들이 함축되고 농축되어 담긴 이 앨범을, 만약 이러한 표현이 가능하다면, 저는 감히 '마스터피스(masterpiece)'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 앨범을 아껴주시는 음악애호가 여러분의 열렬한 청취와 뜨거운 사랑에 힘입어 발매 후 한 달 반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Renata Suicide» 앨범은 예스24 록 부문 2위, 알라딘 록 부문 3위, K-인디 차트 7위 등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여전히 고공 비행 중입니다. 네이버, 벅스, 멜론 등 국내 음원 사이트는 물론이고 Apple music, Google music, Spotify 등 해외 유수의 음원 사이트를 통해서도 여전히 열렬히 청취되고 있는 중이며, 또한 경인방송 라디오 "성우진의 한밤의 음악여행"을 통해 이 앨범을 소개하며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방송을 하는 영광도 얻었습니다.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짙은 성원에 깊이 감사 드립니다. 이쯤 되니 왠지 한 번 록 부문 1위를 찍어보고 싶은 마음도 생깁니다. 현재 저희의 앨범은 Amazon 등을 통해 유럽과 미국, 일본 등에서 발매를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아직 들어보시지 못한 분들은 아래의 다양한 링크를 통해 청취해보시기를, 그리고 이미 들으신 분들도 더더욱 아름답고 깊게 감상해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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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나타 수이사이드, 17년만의 '데뷔' 앨범 «Renata Suicide» !

2002년 람혼 최정우(보컬/기타), 반시 유가영(베이스), 파랑 이용창(드럼)의 3인조로 결성된 록 그룹으로 지금까지 홍대/신촌 인디 신에서의 그룹 공연과 다양한 연극/무용 공연과의 협업을 통해 예술적 지평을 끊임없이 확장해 온 레나타 수이사이드(Renata Suicide).

그들의 지난 17년의 활동 기간을 결산하며 그동안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연주되었던 8곡의 노래들을 오롯이 담아낸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역사적인 첫 앨범, <Renata Suicide>가 드디어 발매되었습니다.

이번 앨범은 록과 여타 장르들을 다양하게 혼합한 사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 록을 지향하며, 수록곡들의 가사가 지닌 시적인 지향성과 함께 2000년대 이후 레나타 수이사이드가 줄기차게 추구했던 새로운 록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는 앨범입니다.

향후 한국 대중 음악의 음악성과 문학성에 있어 일대 중대한 지표로 남을 레나타 수이사이드의 <Renata Suicide>.

아래 링크를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판매처

알라딘 : https://hoy.kr/MXhvT

YES24 : https://hoy.kr/DRErb

인터파크 : https://hoy.kr/C4ahK

쿠팡 : https://hoy.kr/aPazx

11번가 : https://hoy.kr/9bD2G

+

국내 음원 서비스

멜론 : https://hoy.kr/9bwM9

네이버뮤직 : https://hoy.kr/RM97G

벅스 : https://hoy.kr/vuR6r

소리바다 : https://hoy.kr/UvVGW

지니뮤직 : https://hoy.kr/UGOqR

+

해외

Apple Music, Spotify, Google Music, Amazon Music, YouTube Music

Bandcamp : https://hoy.kr/HMe4Z







#레나타수이사이드 #renatasuicide

#람혼 #ramhon #반시 #banshi #파랑 #p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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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 article qui s'intitule "Dans le musée, pour le vingt et unième siècle qui n'est pas encore venu, du vingtième siècle qui n'est pas encore parti" est publié en pages 44-45 dans le magazine coréen «Public Art». Il est le premier écrit pour ma nouvelle série "Lettres de la haine et de l'amour esthétiques pour mes contemporains" qui continuera dorénavant pendant quelques mois dans le même magazine.

<퍼블릭 아트(Public Art)> 2013년 7월호 44-45쪽에 제 글이 실렸습니다. 'culture letter' 연재의 일환인데요, 앞으로 '동시대인을 위한 미학적 증오와 연애의 편지'라는 전체 제목으로 제가 몇 편의 편지 글들을 <퍼블릭 아트>를 통해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첫 편지의 제목은 "아직 오지 않은 21세기를 위해 아직 가지 않은 20세기로부터, 미술관에서"입니다. 일독을 권하며, 무엇보다 <퍼블릭 아트>의 예쁜 지면으로 읽으시기를 권하는 바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소중한 지면을 제안해주신 안대웅 기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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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대인을 위한 미학적 증오와 연애의 편지 (1)

아직 오지 않은 21세기를 위해 아직 가지 않은 20세기로부터, 미술관에서.
 

최정우 (비평가, 작곡가)
 

무엇보다 내가 이 편지를 하나의 용서(pardon)를 구하는 일로부터 시작하려는 점을 미리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당신의 성별도, 당신의 사회적 위치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아는 유일한 정보는, 당신이 20세기 말에 태어나 21세기 초를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내가 당신에게 편지를 띄우는 것은, 아마도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을 것이라는 미약한 확신과 불확실한 연대감 때문입니다. 백 번 용서해서, 만약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시간을 '시대'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면 말입니다. 물론 '시대'라는 말을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의식이나 기억이 필요할 겁니다. 나와 당신이 공유하고 있는 의식 혹은 기억이란 아마도, 20세기에 상상했던 무언가 대단히 신나고 왠지 무척이나 찬란할 것만 같았던 21세기에 대한 꿈, 그리고 그 20세기 말의 꿈이 기이하게 뒤틀리고 이상하게 좌절돼버린 21세기 초의 어이없을 정도로 무참한 현실, 바로 이러한 꿈과 현실에 대한 의식 혹은 기억일 겁니다. 성급한 일반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고백하자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앞으로 당신을 동시대인(contemporain)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하여 이 편지는 나의 동시대인인 당신에게 띄우는 우정의 편지이자 동시에 절교의 편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엇보다 이 편지가 이러한 이중적이고 역설적인 관계의 편지라는 사실에 대해 또한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편지는 나와 당신을 향한, 그리고 나와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를 향한, 그런 용서의 편지, 그러나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해야만 하는, 그런 굴욕의 편지, 그런 역사이자 동시에 이야기(histoire)를 위한 편지이기도 할 겁니다.

그러나 왜 절교의 편지일까요. 나는 동시대인인 당신과 다른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나는 나와 같은 시간을 살고 있는 당신을 다른 시간으로 떠나보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척이나 이중적입니다, 나처럼 말입니다. 나와 당신은 민주화라는 일견 당연해 보이는 정치적 과정이 그 어떤 시대보다 확고하게 안착된 것처럼 보이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민주화라는 여정이 그 어느 때보다도 불안한 행보를 보이며 전례 없는 (비)가시적 위협을 당하고 있는 시대를 그저 침묵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와 당신은 예술이 그 어떤 시대보다도 문화적이고 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된 상태에서 향유되고 권장되는 사회 안에서 살고 있지만,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술 그 자체가 가장 큰 의심을 받고 가장 널리 위험을 당하며 가장 많은 문제들에 봉착해 있는 사회를 그저 타성 속에서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당신과, 그런 나와 절교하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동시에 이것은 왜 우정의 편지일 수밖에 없을까요. 나는 우리의 이러한 시대와 사회를 그저 손쉽게만 떠나보내거나 폐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나와 당신은 이 시대와 사회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최종의 - 것으로 '최종적으로' 상정된 - 정치경제적 제도로부터의 이탈을 결코 쉽게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로부터 한 발짝도 떼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나와 당신은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구속적 우정으로 묶여 있습니다. 나와 당신은 이런 시대와 이런 사회 안에서 서로 언제나 충돌할 위험에 노출돼 있는 일종의 잠재적이고 영원한 적(敵)이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지극히 단단하고 끈끈한 우정으로 묶여 있는 존재들입니다. 이러한 우정과의 절교를 함께 실행할 수 있는 우정, 그런 우정이 가능할까요. 그리고 이 물음은 또한 내가 다시금 힘주어 당신을 동시대인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유에 대한 대답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와 이러한 절교의 우정을 나눌 수밖에 없는, 이러한 절교를 통해 저러한 우정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그런 동시대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이 편지가 그런 불가능과 그런 역설들의 편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한 번 용서를 구합니다. 내가 이미 말했듯이, 이 편지는 하나의 용서를 구하는 일로부터 시작됐고, 다시금 다른 용서를 구하는 일로 마무리될 것입니다. 이 점은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나고 헤어질 것이며, 헤어지며 다시 만날 것입니다.

나는 무엇보다 먼저 미술관에서 당신에게 절교를 선언하고자 합니다. 나와 당신을 함께 설레게 했던 그 수많은 시각적이고 시간적인 약속들에 대해 이별을 고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미 부드럽게 경고했듯이(그러나 경고가 얼마나 부드러울 수 있을까요), 이러한 이별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이별이 그러한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제작하고 향유하고 있는 미술은 여전히,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미술관 속에 갇혀 있고 닫혀 있습니다. 미술관이라는 공간 바깥으로의 탈출을 외치고 그러한 공간의 생산적 해체를 종용하는 모든 미술들 역시 더욱 광범위하게 확장된 '미술관'이라는 개념적이고 사회적인 틀 속에 묶여 버립니다. 세계는 미술관이 되었고 미술관은 세계가 되었습니다. 말로(Malraux)가 의미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의미에서, 세계는 '상상의 미술관(le musée imaginaire)'이 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미학적 유사(流砂)'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미술관은 세계의 유사(類似)임과 동시에 세계라는 유사(流砂)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저 흐르는 모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체제, 나와 당신은 그 체제 안에서 그 모래를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미학적 체제라고 하는 우리 세계, 우리 시대의 가장 부정적이고 불가능한 얼굴일 겁니다. 우리의 시대에 미술과 미술관은 그런 모래 속에서, 그토록 너무나 가깝고 밀접한 우정 속에서, 근친상간과도 같은 사랑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유사(流砂)라는 명명과 유사(類似)하게, 나는 이러한 관계를 또한 '미술관 속 동물원'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의할 점은, 그 동물원 안에서 구경거리가 되는 동물은 결코 미술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파리 속 동물들은 바로 나와 당신입니다. 나와 당신은 미술관 안에서 예술작품들을 경험하는 동물들로서 표상되고 재현되며 따라서 전시됩니다. 미술작품들은 오히려 그렇게 전시되는 우리 동물들을 말없이 바라봅니다. 우리가 그저 침묵 속에서 시대라는 전시품을 그저 타성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동시대인, 동물들. 미술을 관람하는 나와 당신, 우리 동시대인들이 전시품이 되는 공간, 그곳이 바로 21세기의 미술관이자 동물원의 형태, 20세기에 우리가 꿈꿨던 낙원이자 동시에 지옥의 모습입니다. 나는 이러한 낙원과의 우정에 절교를, 이러한 지옥과의 사랑에 이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시 묻자면,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요.

그래서 나는 또 묻습니다. 떠나보낼 수 없는 것을 떠나보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요. 유행가 가사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그러나 동시에 나는 바로 그 유행가의 스쳐 지나치듯 간과되는 바로 그 가사를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별할 수 없는 것과 이별한다는 것, 하여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니, 데리다(Derrida)의 말처럼, 용서란, 어쩌면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 바로 그것만을 말한다는 사실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내가 미술관 안에서, 미술관을 떠나며, 미술관 밖으로, 당신을 떠나보내며, 그렇게 묻고 싶은 물음입니다. 나를 용서하지 말고, 당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타성 속에서 침묵하는 나와 당신을 용서하지 마십시오. 진정 용서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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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13-07-09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입니다.람혼님. 외국에 계셨던 것 같은데...들어오신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네요. 세계가 단말기 속으로 들어간 인터넷 공간인지라 파악이 어렵군요.ㅋㅋ

아감벤이 말한 동시대성- 거리를 두면서도 들러붙음-과 동시대인, 즉 펜을 현재의 암흑에 담으며 써내려 갈 수 있는자 라는 문장이 떠오는 글입니다.

그렇게 보면 동시대인으로 산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삶의 모든 인지와 감각을 총동원하여 이성적 판단과 윤리적 결단을 총합해내는 거대한 일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솟아오를 수 있는 용기와 가벼움까지 끌어 안으려면...

오랜 만에 만나 무거운 이야기를 하네요. 장마철이라 구름이 너무 많이 밀려와서 그런가 봅니다.
ㅎㅎ

어디에 계시더라도 무탈하게 정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람혼 2013-07-09 15:14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오랜만입니다, 드팀전님.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저도 그간 알라딘 서재와는 격조하다가 오랜만에 글 하나 남겨봅니다. 저는 아직 계속 파리에 있습니다.
저 또한 '동시대인'이라는 말을 아감벤의 개념을 염두에 두면서 썼는데, 역시 드팀전님이 적확하게 지적해주셨네요. 그 가장 '사소하면서도 거대한' 일을 잘 읽어주셔서 언제나처럼 깊이 감사드립니다. 밑이 과연 어디까지 내려갈 수 있는지 시험하는 듯 무겁기만 한 이 세계에서, 어쩌면 우리의 환담은 오히려 깃털처럼 가벼운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드팀전님 또한, 그 언제 그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시고 건필하십시오. 장마 구름이 내리는 비를 뒤집어, 오히려 비를 하늘을 향해 올리시길.
 

 
 
최근 한국어로 번역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2012)에 대해 제가 쓴 서평이 프레시안에 실렸습니다. 서평의 제목은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특히나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음악에 죽고 못 사는 저 같은 '지독한' 바그네리안들에게는 더더욱 필독을 요망합니다(이 책의 원제는 "Five Lessons on Wagner"/"Cinq leçons sur le 'cas' Wagner"입니다).

바디우의 이 책은 또한 슬라보이 지젝(Slavoj Žižek)의 매력적인 발문/후기(afterword)를 싣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가끔씩 제 스스로를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저만의 조어를 통해 규정하곤 하는데요, 아마도 철학계의 내로라하는 또 다른 두 '반-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들일 바디우와 지젝이 함께 일종의 대위법처럼 구성하고 있는 철학적 이중주를 감상하는 재미도 이 책의 장점일 겁니다. 단, 이 책은 바그너의 음악이나 서양 오페라/악극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을 것이란 단점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어쨌든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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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 알랭 바디우의 <바그너는 위험한가> 서평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아마도 나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와 연관된 문제에 관해서라면 결코 ‘객관적’으로 글을 쓸 수 없는 사람들 축에 속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아주 오랫동안 아주 ‘심각한’ 바그너주의자(Wagnerian)였고, 지금도 그렇기 때문이다. 왜 나는 이 말을 일종의 고백처럼 발설할 수밖에 없을까. 바그너 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을 위해 이에 대해서는 다소 해명이 필요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바그너주의’라는 말은 단순히 음악적인 취향이나 신념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모차르트주의’나 ‘베토벤주의’는 존재하지 않으며, 비록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바그너주의’만큼의 광범위한 효과를 갖지 못한다). 이 말은 어떤 확정적인 정치적 편향성을 드러내는 단어로 매우 자주 쓰이기도 하고(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파쇼나 나치에 근접해 있다는 어떤 ‘역사적’이고 ‘경험적’인 편견들), 또한 때로는 심지어 어떤 윤리적인 선택까지를 포함하는 단어로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다(바그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반유대주의와 인종주의의 입장에 서 있을 거라는 어떤 ‘몰역사적’이고 ‘초월적’인 예단들). 비록 나는 에드워드 사이드나 가라타니 고진 등이 지나가면서 언급했던 이른바 ‘비(非)-유대인적 유대인(non-Jewish Jew)’이라는 정치적/윤리적 정체성에 빗대어 내 스스로를 ‘비(非)-바그너주의적 바그너주의자(non-Wagnerian Wagnerian)’라는 일견 지극히 모순적으로 보이는 조어로 부르곤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고백과 변명의 언어적 환경 속에서 포착해야 할 중요한 징후는 따로 있다. 왜 ‘바그너주의자’라는 자기규정에 대해서만큼은, 이처럼 일종의 ‘해명’이, 심지어 일종의 ‘사과’마저 필요한 것일까. 이러한 사과나 해명은 비단 예술적인 입장의 소명이 아니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단지 음악이나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 더 나아가 철학과 정치의 문제가 되어왔던 어제와 저간의 사정이 바로 이 하나의 징후적인 물음 안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과 그것을 둘러싼 대답들의 관점에서, 최근 번역된 알랭 바디우의 책 <바그너는 위험한가>(김성호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바로 저 ‘바그너 문제’가 지니고 있는 지극히 익숙한 선입견들에 관해 가장 적극적인 도발을 감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가 ‘바그너의 경우’를 이야기하며 바그너에 대해 뚜렷한 대립각을 세운 이래로, 바그너 음악에 대한 입장의 선택은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태도의 선택과 밀접한 관련을 띠어 왔다.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이른바 ‘바그너 효과’는 음악과 철학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기능에 관한 문제, 미학과 정치 사이의 관계라는 보다 일반적인 문제 등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매우 광범위한 문제 지형으로 기능해 왔던 것이다.

 

비근한 예로, 바그너의 반음계 작법과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어법들은 조성의 파괴와 연속성의 재해석이라는 현대음악의 길을 열었으며, 그가 주창했던 예술적 이상들과 신화적 관념들은 예술지상주의와 민족주의/국가주의 양쪽에 이념적인 자양분을 제공했다. 게다가 바그너의 이름은 언제나 독일의 신화적이거나 국가적이거나 민족적인 통일성, 혹은 나치 치하 독일제국의 예술적 대표이자 반영으로서 이해되어 왔다(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바그너 음악의 연주가 금지되기도 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에서부터 아도르노를 거쳐 라쿠라바르트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반(反)-바그너주의 철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바그너를 동일성과 통일성과 연속성을 ‘시끄럽게’ 추구한 음악가로, 곧 차이와 파편과 불연속적 다양성 등의 전복적 요소들을 ‘폭력적으로’ 등한시하고 추상해버린 예술가로 비판했던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는 <바그너는 위험한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강의들을 통해 이러한 바그너에 대한 편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전복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현대철학의 핵심어들 중의 하나인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 바디우는 반-바그너주의 철학자들과는 전혀 다른 판단을 내리고 있다. 바그너는 연속성의 추구 속에서 불연속성을 제거하고 사장시킨 작곡가가 아니라 오히려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맺는 새로운 관계를 담을 수 있는 전혀 다른 체제를 창안해낸 음악가라는 것이다. 무한선율과 반음계, 라이트모티프 등의 음악적 기법들을 통해서 압도적으로 드러나는 바그너 음악의 일견 ‘폭력적’인 연속성이 사실은 불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표현하는 전혀 다른 형상화 방식임을 주장함으로써 바디우는 바그너를 변호하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국지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 사이의 관계라든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관계라는 문제, 또는 이행의 본질이라는 문제는 철학의 모든 분야에서, 그리고 특히 (말이 난 김에 언급만 하자면) 정치에서 하나의 중요한 문제다. 사실상 불연속성이 더 이상은 혁명의 전통적 형상 안에 정치적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체 어떻게 표현되는가? 더 이상 그 어떤 불연속성도 없다고 결론지어야 하는가? (그것은 결국 역사의 종말이라는 관념과 유사한 관념이 될 것이다.) 아니면 불연속성이 연속성의 압도적 현현 뒤에 숨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내 생각에 후자는 전형적인 바그너적 문제다. 사실 바그너는 일반적으로 불연속성을 연속성 안에 묻어버린 사람으로 이해된다(라쿠라바르트의 또 다른 라이트모티프). 반면 나는 바그너가 불연속성을 심오한 방식으로 전치시켜서 그것이 서사극과 음악 간의 결정 불가능성의 새로운 형상으로 기능하게 되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연속성과 불연속성 간의 새로운 모델을 발명했다고 생각한다.”(107~108쪽)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다시 한 번 바그너의 이름은 좁게는 예술의 문제를 가리키는 음악(가)의 이름임과 동시에 넓게는 철학적 이행의 문제를 가리키는 개념과 실천의 이름이기도 하다. 연속성과 불연속성 사이의 이러한 새로운 관계가 문제시될 때, 다시 한 번 등장하게 되는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총체성(totality)’과 ‘미학화(aesthetization)’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바디우가 바그너에 대한 재해석을 통해 조금 다른 형태로 반복하고 있는 저 벤야민의 정치적이고 역사철학적인 몸짓을 다시금 호출하고 기억해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벤야민처럼 바디우도 여기서 정치나 예술의 ‘미학화’가 아닌 미학의 어떤 ‘정치화’를, 기존의 총체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어떤 ‘총체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디우가 바라보는 바그너는, 미학화된 예술지상주의를 추구했던 음악가가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미학화를 가장 예민하게 경계하면서 미학의 정치화라는 미래 예술의 도래를 예고했던 예술가이다. 지젝이 <바그너는 위험한가>의 발문에서 쓰고 있는 “사건의 여파 속에 살아가기, 결과를 이끌어내기의 열려 있음”(318쪽)이라는 어구 역시 이러한 예술적 ‘구원’의 상태를 두고 하는 말이다. ‘미학화’란 또한 어떤 의미에서 불가능한 사건의 정치화와 가장 대척되는 지점에 서 있는 일종의 ‘마취(anaesthetization)’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디우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는 바그너의 초상은 바로 이러한 ‘미학의 정치화’와 ‘총체성 없는 총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형상이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바그너는 악극이라는 종합예술의 이상을 통해 순수예술을 가장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표상으로 그려져 왔지만, 사실 ‘바그너 효과’란 오히려 그 반대로 그러한 순수예술의 경계 자체를 문제시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그너가 생각했던 저 ‘순수예술’이란 오히려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이라는 일견 모순된 형식, “새로운 형태의 위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도래할 미래의 예술적 형식이라는 의미를 띠게 된다. 이에 관해 바디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표명하는 입장은 우리가 순수예술의 부활 직전에 와 있다는 것이겠는데, 바로 이 지점에서 바그너가 호출되어야 한다. 내 가설은 순수예술이 다시 한 번 우리 미래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나는 이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한다. 위대함은 더 이상 우리 과거의 일부만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미래의 일부이기도 한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그것은 예전과 똑같은 종류의 위대함은 아니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위대함인가?/ 그것은 확실히 순수예술이지만, 총체성에서 분리된 순수예술, 즉 총체성의 미학화로서의 순수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총체성에서 분리되는 한에서의 순수예술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명 새로운 유형의 위대함이다. 가령 이것은 영웅화 없는 영웅주의, 또는 전쟁의 패러다임에서 빠져나온 위대함이나 그 비슷한 것으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125~126쪽)

 

그러나 이러한 총체성 없는 총체성, 위대함 없는 위대함이 과연 가능할까. 혹은, 미학화라는 마취의 기제를 벗어나는 비미학적 사건의 도래와 실천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또한 바꿔 말하자면, 바디우가 그의 다른 책 <비미학>의 도입부를 통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과연 “미학적인 사변에 반대하여 비미학은 몇몇 예술 작품들의 독립적인 실존에 의해 생산되는 엄밀한 철학 내적인 효과들을 기술”할 수 있을 것인가. 아마도 바디우는 바그너가 바로 그의 작품 <파르지팔>을 통해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곧 바그너의 현재적인 의미란 ‘종교적 초월이 결여되어 있는 의식(儀式)이 현대에도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 안에서 그의 마지막 악극 작품 <파르지팔>은 그 기독교 신비주의의 종교적 성격 때문에 원래부터도 매우 문제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이었지만, 이러한 ‘의식’의 물음과 관련하여 특히 <파르지팔>은 매우 징후적인 중요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나는 <파르지팔>의 주제는 현대적 의식(儀式)이 가능한가에 관한 문제라고 말하고 싶다. 주제는 의식의 문제이고, 이 문제는 <파르지팔>에 본질적이다. 그것은 종교의 문제와 구별된다. 왜 그런가? 의식은 한 집단, 또는 심지어 공동체의 자기 재현양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초월은 그 의식의 본질적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파르지팔>이 제기하는 문제는 초월 없는 의식이 가능한가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209~210쪽)

 

그렇다면 바디우가 일견 매우 ‘시대착오적’인 방식으로 새삼 바그너의 경우를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바그너는 위험한가>는 결코 바그너의 음악세계를 ‘미학적’으로 해설하거나 평가하는 책이 아니다. 바그너를 뒤집어보면서 바디우가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은 사실 그의 정치철학적인 본령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말하자면 바디우는 바그너의 ‘경우’ 혹은 바그너라는 ‘효과’를 넘어서 바그너라는 ‘사건’, 곧 ‘바그너’라는 이름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사건의 불가능성을, 그리고 또한 그 불가능성이 지닌 어떤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폭발력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다.

 

“따라서 내가 확고하게 믿는바, 의식은 필요하다. 아마도 그것은 오늘날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사태는 종종 그러하다. 진정한 문제는 그와 같이 필요하고도 불가능하다. 가능성은 더 이상 그것을 기대하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찾아온다. 사건이란 그런 것이다. 오늘날의 사건은 의식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것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파르지팔>은 나름대로 예언적이다—의식을 가능하게 만들 사건이 일어날 것인가? <파르지팔>에서 발생하는 일은 그것이다.”(225~226쪽)

 

그렇다면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돌아가 바그너의 이름을 둘러싼 저 모든 예술적 기호(記號/嗜好)들에 대한 고백과 변명과 해명과 사과의 말들이 어째서 하나의 징후로서 드러나는지를 다시금 되물어야 할 것이다. 바디우의 이 모든 언설들을 단지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로서 그가 어렵게 시도하며 또한 시도할 수밖에 없는 단순한 변명들로 봐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역시나 그만큼이나 지독한 바그너주의자이자 바그너애호가인 내가 여기서 또한 그 모든 변명들을 변호하는 또 다른 변명들을 쓰고 있지 않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반복하여 말하자면, 바그너의 이름은 바로 이러한 자기지시적인 물음들을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예술의 이름이자 정치의 이름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협소한 예술 장르로 이해되는 음악의 이름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이름은 단지 어떤 예술적 사례라는 ‘경우’의 이름도 아니고 그러한 예술이 어떤 사회적 파급력과 영향력을 가지는가 하는 ‘효과’의 이름도 아니며, 바디우에 따르자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을 가리키며 예고하는 이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아도르노는 메시아에 대한 ‘헛된 기다림’을 긍정하며 그러한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메시아에 대한 진정한 기다림을 표현할 수 있는 시간이라고 생각했다(아마도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어쩌면 그의 본령과는 전혀 다르게, 벤야민이 그의 생애 끝까지 결코 완전히 해소하거나 해결할 수 없었던 저 메시아적 시간의 문제를 너무나 안전하고 안일하게 ‘미학화’했던 철학자였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아도르노는 바그너의 음악이 어쨌든 궁극적 해결의 지점을 상정하며 지향하고 있는 어떤 ‘조작된 기다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것은 아도르노에게 ‘거짓 기다림’이었다.

 

그러나 다시금 너무나 새삼스럽게 묻자면, 메시아는 어떻게 오는가. 그리고 가장 ‘비(非)-유대인적’이며 또한 심지어 가장 ‘비유대적(非紐帶的)’으로 보이는 바그너가 바로 이러한 메시아적 시간에 관한 질문에 그의 음악 전체로 응답하고 있다고 한다면 어쩌겠는가(그러므로 또한 지젝이 발문에서 ‘구원’이라는 결말의 문제와 관련하여 ‘바그너와 함께 그리스도를’이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매력적인 설득력이 있지 않은가).

 

바디우는 말하고 있다. 바그너는, 여전히, 하나의 사건이며, 또한 그 이름은 그렇게 사건으로 도래할 때에만, 그렇게 ‘필요하면서도 동시에 불가능한’ 하나의 사건으로 ‘가능’해질 때에만, 비로소 다시금 가장 문제적인 이름일 수 있다고. 따라서 바그너 ‘효과’에서 바그너 ‘사건’으로 이행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단순한 미학적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이러한 정치적 실천의 문제가 되고 있다.

 

 

- 襤魂, 合掌하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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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50120601111425

 

지난 6월쯤에 <프레시안>에 썼던 서평이 하나 있었는데, 링크 해둔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네요. 피터 버크(Peter Burke)의 <문화 혼종성(Cutural Hybridity)> 한국어 번역본에 대해 제가 썼던 서평입니다. 서평과 책 모두 일독을 권합니다.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 따위의 허울 좋은 이데올로기와 싸우기 위해서라도, '잡종(hybrid)' 개념의 이론적 전유와 실천적 발명은 매우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잡종'이 사라진 '잡종의 시대'

- 피터 버크, <문화 혼종성> 서평

 

 

소위 혼종(hybrid)과 혼합(fusion)의 시대라고들 말한다. 아무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현대 세계라는 시공간이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어떤 절정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러한 이름들로 '우리'의 시대가 규정되고 소비되며 유통된 지 이미 오래라는 의미에서, 혹은 조금 더 세밀하고 적확하게 말하자면, '우리'의 시공간이 그러한 규정적 개념어들이 지닌 '다양성'을 통해 오히려 반대로 매우 '단일하게' 규정되어 오고 있는 지가 벌써 오래라는 의미에서, 그리고 어쩌면 오직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만, '우리'의 시대와 세계는 말 그대로 혼종과 혼합의 시공간이다.

 

'우리'의 시공간은 혼종과 혼합이라는 어떤 '객관적' 현상으로 파악될 수 있는 시공간이 아니라 어쩌면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개념들로 인해 매우 '상상적으로' 작동되고 조작되는 시공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혼종과 혼합의 상상적 시공간 한복판에서, 아니 그러한 한복판이 도래한 듯 보인지도 이미 한참 된 어떤 한복판에서, 한 책의 번역은 좀 새삼스럽게 느껴지거나 심지어 뒤늦은 감마저 있다(이러한 '지연'의 감각은 이 책의 출판 연도인 2009년과 한국어 번역본의 출판 연도인 2012년 사이의 물리적인 시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피터 버크(Peter Burke)의 책 <문화 혼종성>(강상우 옮김, 이음 펴냄)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우리'가 (혹은 바로 그 '우리'라는 이름으로 규정되는 어떤 집단적 정체성이) 속해 있는 남한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다문화(多文化)'라는 또 다른 폭력적 용어가 소위 '한국적 관용(tolérance)'을 의미하는 지극히 어용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전가의 보도로 사용되면서부터, '우리'에게도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이데올로기적 작용은 그리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여기서 "우리에게도"라는 저 가장 익숙한 듯 보이는 어구의 맥락 자체가 문화적으로 그리고 혼종적으로 가장 이데올로기적이며 따라서 가장 문제적이라는 사실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여전히 가장 낯선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따라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문화 혼종성에 대한 전형적이고 중립적인 (혹은 그렇게 전형적이고 중립적으로 보이는) 교과서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읽으라는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일차적인 미덕은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매우 영미적인) 교과서적 서술에 있으므로. 그러나 이 책은 그러한 문화 혼종성이 현재 어떤 첨예한 위기에 놓여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개념과 현상이 어떤 민감한 기로에 서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정보'를 과연 다른 책들로부터는 기대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책은 각 장의 제목을 이루고 있는 저 "각양각색의"라는 혼종적인 꾸밈말에 걸맞게 실로 각양각색의 사례와 예시들을 통해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포괄적 지도를 보여주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부분들은 차후 더 진행될 수 있는 비판적 독해의 단서들을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구인은 음악의 영역, 특히 대중음악의 영역에서 중앙아프리카의 피그미족과 같은 다른 문화로부터 음악을 차용한 뒤에, 결과물의 저작권은 자신이 갖고 본토 음악가들과 저작료를 공유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들은 제3세계 음악을 유럽이나 북미에서 '가공'되는 일종의 원자재처럼 취급해왔다.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지난 500여 년간 서구 학자들은 자주 세계 다른 지역들의 식물이나 치료법 등에 대한 토착적 지식들을 이용해왔지만, 그 원천에 대해 항상 인정하지는 않았다." (19쪽)

 

또한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 이른바 문화적 '덧쓰기(palimpsest)'에 대한 풍부한 사례들과 그에 대한 분류에 바쳐지고 있다는 점 역시 높게 평가해야 할 대목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란 쓰고 지우며 그 지움의 흔적을 지닌 채 다시금 덧입히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 터이므로. 그러나 이 책의 전반적인 서술의 특징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의 다양한 예시들을 따라 그 개념을 매우 정확하게 규정해보려는 욕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으며, 어쩌면 바로 이러한 특성은 이 책이 지니고 있는 양날의 검일 것이다. 따라서 문화 혼종성에 대한 어떤 날 선 문제의식과 날카롭게 벼려진 비판 의식을 얻고 또 되묻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아마도 거의 쓸모가 없거나 아주 기본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이 책 말미에 수록된 이택광의 해제를 오히려 피터 버크의 본문보다 더 주의 깊게 읽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택광의 해제 역시 다소 교과서적으로 작성된 감이 없지 않지만(그리고 예상외의 그 논문 식 어투가 계속해서 독해를 방해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이택광은 피터 버크가 그 자신의 주제인 '문화적 혼종성'에 대해 할 이야기를 다 하고 있지 못하고 있음을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암시하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은밀하면서도 확실한 불만으로부터 자신의 해제를 위한 시동을 걸고 있다.

 

따라서 이 해제를 단순한 '해설'로 읽지 않고 오히려 문화적 혼종성을 일견 매우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듯 보이는 피터 버크의 기만적인 방식에 대한 일종의 '반발'로서 읽어낼 때 우리는 이 해제의 의미와 위치와 맥락을 더욱 확실하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왜 (피터 버크의)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서술이 언제나 어떤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점을 더욱 예리하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이 책을 읽는 전략과 목표는, 단순히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정보의 습득에 멈춰서는 안 되며, 피터 버크 그 스스로가 오히려 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주제에 대해 지극히 보수적이고 안일하게 접근하고 있는 저 서술 방식 자체에 대한 비판과 해체라는 더욱 적극적인 독해 행위에까지 다다라야 한다. 아마도 이러한 독해의 방식이 이 책을 가장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어쩌면 가장 '다문화적으로' 읽는 전략이 될 것이다(그러므로 독서란 무엇보다 하나의 전략인 것).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우리'의 포스트모더니즘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철 지난 유행의 이론 혹은 일의적이고 동일적인 세계화의 숨겨진 전략이자 이데올로기였음을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그리고 그러한 순간이 지난 지는, 지났다고 생각된 지는, 실로 오래되었는데), 오히려 우리는 저 가장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름, 포스트모더니즘의 (아직 죽지 않은) 유령을, 그 유령의 (아직 지워지지 않은) 이름을 다시 부르고 다시 소환해야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냉전 시대 이후 경제적 신자유주의가 지닌 가장 정치적이자 이론적인 알리바이였다고 한다면, 문화적 혼종성이란 세계화와 전지구화가 지닌 가장 국가적이자 국지적인 알리바이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정주에 반대하는 유목이란, 다시 말해 정착과 영토화를 거스르는 노마드(nomad)의 개념이란, 현재 그 정치적 파괴력을 잃고 얼마나 '낭만화'되고 '안전화'되었는가. 말하자면, 그와 마찬가지의 일이 저 문화 혼종성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실로 똑같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가. 'hybrid'라는 개념은 '혼종성'이라는 지극히 점잖은 용어로 옮겨지는 동일성의 다른 가면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본래' 뜻에 걸맞게(그러나 또한 'hybrid'에 있어 '본래'라는 기원과 시작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잡종'이라는 보다 잡스러운 의미로, 종잡을 수 없는 파괴적인 날것의 의미로 되새겨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아마도 이 책이 지닌 한계와 문제점을 통해서, 이 책이 지닌 서술 방식에 대한 비판 의식을 통해서, 아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시작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이 말미에서 말하고 있는 "세계의 크레올화"(169쪽)이라는 개념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것은 실로 양가적인 개념이어서, 때로는 수구적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통합적 질서 구축을 위해 쓰이기도 하고, 때로는 반대로 가장 파편적이면서도 당파적이고 급진적인 논의들을 위한 이론적 근거로 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쩌면 ('그들'이 아닌) '우리'는 작가의 (영문판) 서문으로 새삼 다시 돌아가 작가 그 자신의 변명 혹은 자기변호를 재차 되새겨 읽을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종의 고백임과 동시에 하나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이 에세이에서 자연스럽게 논의되는 주제이기도 한 문화적 전지구화(cultural globalization)는 작가인 나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쳤다고 (혹은 일종의 복수를 했다고) 할 수 있다." (11쪽)

 

문화적 전지구화가 작가 자신에 미친 '영향'이 정말 '복수'였는가 하는 문제(혹은 그것이 외부의 '복수'라는 이름을 가장한 지극히 내밀한 어떤 '욕망'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이러한 '영향' 혹은 '복수'가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은 쓰일(作/用) 수조차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민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일종의 폭력적 단순화 작업, 잡종의 문화 현상에 대한 일종의 이론적 동일화 작용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 책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말해 이 책의 존재 자체가 문화적 혼종성이라는 한 가능성의 주제가 근거하고 있는 어떤 근본적 불가능성의 지점을 매우 징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러한 책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책의 주제인 문화 혼종성이 지닌 어떤 불가능성의 조건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의 미덕, 혹은 '우리'에게 이 책의 '번역'이 주는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것일 터, 아마도 우리가 '우리'라는 이름의 의미에 대해 대답하고 되물어야 하는 시작점이 바로 여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시작은 결코 기원이나 원천이 아닌 끊임없이 갱신되고 또 갱신되어야 할 어떤 문제적인 시발점일 것이며, 이 책은 '우리'에게 바로 그 '우리'라는 개념의 의미를 되물으며 이렇듯 끊임없이 문제적인 방식으로 다가올 때에만 어떤 의미를 산출하게 될 것이다. 유목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시대에 유목의 정치적 가능성을 새삼스럽게 다시 되물어야 하듯, '우리'는 아마도 이 책을 통해 잡종이 불가능한 시대의 잡종이 지닌 의미를 되새겨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최정우 | 비평가, 작곡가, <사유의 악보>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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