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분위기를 돋우며 내리는구나.

시간 참 빠르다.
벌써 올해가 다 가고 마는데,
내일모레면 이제 수능 날이다. 

나름대로 준비한다고 고생이 많았는데,
이왕이면 좋은 결과가 있으면 좋겠다. 

진인사 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사람이 자기 할 노릇을 다 하고 나면, 하늘의 운명을 기다려도 좋다는 말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만' 도우니 말이다.  

오늘은 수능 전 마지막 시를 한번 읽어 보자.
뭘 뽑을까 하다가 김영랑의 시를 두 편 읽어 보기로 했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잡지

진양조 중머리 중중머리
엇머리 자진머리 휘몰아보아

이렇게 숨결이 꼭 마저사만 이룬 일이란
인생에 흔치 않어 어려운 일 시원한 일

소리를 떠나서야 북은 오직 가죽일 뿐
헛 때리는 만갑(萬甲)이도 숨을 고쳐 쉴밖에

장단(長短)을 친다는 말이 모자라오
연창(演唱)을 살리는 반주(伴奏)쯤은 지나고
북은 오히려 컨닥타--요

떠받는 명고(名鼓)인데 잔가락을 온통 잊으오
떡 궁! 동중정(動中靜)이오 소란 속에 고요 있어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김영랑, 북)

이 시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주로 '판소리' 용어임을 알겠지?
판소리는 1고수2명창으로 이뤄지는데,
첫째가 고수(북치는 사람)이고 둘째가 명창이란 이야기야.
고수가 주로 스승님이었나봐.  

자네 소리 하게, 내 북을 치지 

이 말이 처음과 끝에서 딱, 마주보고 있어서 시를 짝 들어맞게 하고 있단다. 

판소리는 그날 공연장의 모임의 분위기에 따라서 창자가 '판'을 짜서 부른다고 해서 판소리란다.
젊은 남정네들이라면 '흥부가에서 박타는 대목'이나 '춘향가에서 사랑가 대목'을 부를 게고,
할머니들 상대라면 '심청가에서 심청 팔려가기 전날 밤 대목'이나 '춘향의 옥중가'처럼 눈물 철철 나는 대목을 부르기도 할 게다. 

혼자서 진행을 해야 하기때문에
노래하는 부분(창)과 말하듯이 사설을 엮는 부분(아니리)로 이뤄지지.
몸동작도 하곤 하는데 그걸 '발림'이란 용어로 부른대. 

창은 슬프고 처량한 대목에선 '진양조'를,
보통 빠르기는 '중모리(중머리, 중몰이 : 표준어가 없단다. 판소리는 전라도에서만 불렀기 때문이야.)'
조금 빠르게 부를 땐 '중중모리'인데, 주로 누가 등장하는 대목이나 제비몰러 나가는 대목처럼 흥미를 돋우는 부분이지.
아주 빠르게 부르는 건 '자진모리'나 '휘모리'라고 하는데, 전쟁터처럼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에서 부르지. 

김영랑은 고향이 전남 강진으로,
원래 전라도가 "예향"으로 불릴 정도로 예술에 조예가 깊은 동네지. 

판소리에선 고수와 명창의 <숨결이 꼭 맞아야만 이뤄지는 일>인데,
그런 일은 인생에 흔치 않다고 하는구나.
그래서 그 어려운 일이 딱맞게 되면 시원한 일이 되고 말이야. 

소리와 어울리지 않았을 때의 북은 그저 가죽에 불과하대.
그만큼 북과 '고수'는 판소리와 어울려야만 존재 의미가 증폭된다는 강조지. 

장단이 틀리면
만갑이(당대 최고의 판소리 대가. 동편제의 대가)도 숨을 고쳐 쉴 수밖에 없대.
즉, 아무리 이름난 고수라 할지라도 소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지. 

그래서 판소리에선 장단을 친다는 말로는 부족하대.
판소리의 <고수>는 장단을 맞춰주는 부차적 존재가 아니야.
판소리 연행과 가창을 살려주는 반주를 지나서
북은 오히려 컨닥타(지휘자)이 경지라고 일컫는 것이 옳을 거다.

<1 고수, 2 명창>이란 말을 이 시만큼 잘 표현한 시도 드물어.
훌륭한 명 고수는 잔가락 따윈 온통 잊고서,
떡, 꿍!
북의 울림 소리가 울려나는 가운데 고요가 깃들어 있는 동중정이요.
우렁찬 명창의 소리 속에 감겨드는 고요가 있어
판소리를 듣는 일은
마치

인생이 가을같이 익어 가오 

이런 느낌이라는구나. 
가을같이 익어가는 인생이라...
북과 소리의 조화로움이 무르익어가는 가을처럼 온갖 붉고 노란 단풍으로 가득한 산수화처럼 아름답게 표현되었다. 

이 시는 표현상으로도 묻고 답하는 형식, 수미상관의 구성
시행이 단정하게 가지런히 놓인 모습이 두드러진데,
특히나 시인의 삶에 짙게 묻어든 판소리란 장르의 구성지고도 기름진 맛이 가득 묻어나는 내용이 압권이야. 

판소리에 대하여 친밀하기 그지없으면서
고수와 명창의 찰떡 궁합에 대하여 말하는 듯 궁글리고 있어서
인생과 예술이 하나로 어우러진 경지를 잘 표현하고 있지.

일반적으로 판소리에서 <창>이 주인공이고 <북>은 종속적이라는 통념이 있는데,
실제로 판소리는 북에 의해 창이 예술로 완성되는 경지의 음악임을 강조하고 있는 시란다.  

이런 예술의 세계를 그린 김영랑의 시, 거문고를 한 편 더 읽어 보자.

검은 벽에 기대선 채로
해가 스무 번 바뀌었는데
내 기린(麒麟)은 영영 울지를 못한다.

그 가슴을 퉁 흔들고 간 노인(老人)의 손
지금 어느 끝없는 향연에 높이 앉았으려니
땅 우의 외론 기린이야 하마 잊어졌을라.

바깥은 거친 들 이리 떼만 몰려다니고
사람인 양 꾸민 잔나비떼들 쏘다니어
내 기린은 맘둘 곳 몸둘 곳 없어지다.

문 아주 굳이 닫고 벽에 기대선 채
해가 또 한 번 바뀌거늘
이 밤도 내 기린은 맘 놓고 울들 못한다.  (김영랑, 거문고)

이 시는 당연히 일제 강점기의 울분을 노래한 것이란다.
해가 스무 번 바뀌었단 것은 나라를 잃은 지 20년이 되었단 말이겠지.
검은 벽도 왠지 어두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구나.  

 

(그림을 찾다 보니 이 그림이 이뻐서 넣었는데, 줄 수를 보니 가야금이구나. 거문고는 6현이야. 가야금은 12현이고.
아래 그림이 거문고란다.) 

기린은 전설 속 상상의 동물이야.
성인(聖人)이 이 세상에 나올 징조로 나타난다는 상상 속의 동물이지.
화자의 '기린'은 바로 거문고란다. 

거문고를 퉁~ 흔들고 간 노인.
이 구절의 '퉁' 한 글자는 <북>의 '떡 궁'과 마찬가지야.
거문고의 예술혼이 가득 담긴 소리지. 

거문고를 황홀하게 연주하던 노인의 손은
이제 어느 연주석에 높이 읹았는지,
땅의 외로운 기린 따위야 하마 잊고 만 것인지... 

이십 년이 넘도록 울려 퍼지지 못하는 예술의 한이 가득 담겨있는 시다.
거친 들에는 이리 떼가 가득 몰려다니고,
사람처럼 보이는 잔나비(원숭이)들이 끽끽거릴 뿐,
북소리 떡 궁, 울리며 소리를 하고,
점잖게 앉아 거문고 연주하던 아름답던 예술혼이 울려퍼지던 평화로운 날들은 기약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은 조선의 문화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을 몹시 질투했어.
그래서 민요와 모든 풍악을 금지하고,
오로지 기생들만 노래할 수 있게 했단다.
그래서 지금도 국악이라면 술집 여자들이 계승한 것처럼 보일 뿐이지. 

해가 한 해 더 가는데도,
희망은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시를 닫고 있어.
억압된 시대, 절망의 시대를 전통 악기 거문고를 들어서 이야기하고 있지. 

화자가 희구하는 세상은 거문고 소리 퉁~ 울려나는 높고 아름다운 곳인데,
세상에서 끽끽대는 소리는 이리떼와 잔나비떼의 상스런 문화 뿐이란 상실의 비애가 가득하다.  

오늘은 김영랑의 시 두 편을 읽었어. 
두 편 모두 전통 음악을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그 상실감을 짙은 애수와 함께 풀어내고 있지.
전라도 사투리(맘놓고 울들 못한다)도 화자의 비애를 더 짙게 만들고 있지. 

시험이야 늘 치는 것이라도,
또 시험마다 긴장감이 따른단다. 

시험장에서 마음 속에 느린 거문고 소리라도 퉁 울리듯 이런 시를 읽어보는 일도 좋겠다.
판소리 명창의 마음에 꼭 맞는 떡 꿍, 북소리라도 들리듯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이 필요하니 말이야. 

시험 마치고 하고 싶은 일들도 많지?
그건 시험 마치는 시간까지는 잠시만 더 미뤄두렴.
사람 마음이란 참 간사해서 그런 생각으로도 금세 흔들거리는 거란다.
오로지 시험 시간엔 시험에만 집중하고,
또 너무 걱정같은 건 하지 말기 바란다. 

네가 한 몫만큼 얻을 테니까 말이야.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이 도와주시는 것이고.
착하게 살았으니 행운도 함께 따라줄 거다. 

날씨도 푸근하니 크게 떨릴 일은 없을 듯해서 다행이다.
아무튼, 고생한 만큼 행운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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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바람 2011-11-27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여기 참 좋네요.
저도 문학을 좋아하긴 하는데... 생활에 쪼달려 책읽을 시간이...
종종 놀러올게요.

글샘 2011-11-28 01:28   좋아요 0 | URL
책읽을 시간은 만들기 나름 아닐까요? ^^
종종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