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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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철학'이란 딱딱한 것을 충분히 물에 불린다음 독자에게 슬며시 내민다.
독자는 그 말랑한 것이 원래 책받침처럼 딱딱하던 악어 등딱지인줄도 모르고,
그 졸깃한 맛을 즐기며 씹는맛을 즐기곤 한다. 

오죽하면 '철학'은 인문대학 '금속공학과'라고 할 만큼 딱딱하단 느낌을 갖게 하는데,
이 책은 전혀 딱딱한 느낌을 받지 않게 한다.
그리고 읽고 나면 알게 되지만, 이 책은 <서평집> 내지는 <독서 가이드>로 기획된 책이다. 

그렇지만, 이 책을 읽는 나는 계속 바둑의 <묘수풀이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바둑을 배운다는 일은 끝없는 반복과 망각의 과정을 온몸으로 거쳐가는 일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바둑의 '정석'은 너무도 변화무쌍한 '변주'의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바둑을 배우면서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보다 먼저 들어왔던 것이 튕겨져 나가는 속도가 빠를 때도 있다.
그래서 간혹 접하는 퀴즈 타임이 바로 '묘수 풀이'란 것이다.
바둑의 '묘수 풀이'는 전체적인 바둑의 행마나 계가를 염두에 둘 필요가 없어 일단은 마음이 홀가분하다.
전체를 볼 필요 없이, 그저 이 순간의 '사활'만이 문제가 된다.
어떤 곳이 사는 점이고 어떤 곳이 죽는 점인지를 콕 집어 내는 일만이 중요하다.
중앙에서 벌어진 일이 변에서나 귀퉁이에서 벌어진 일과 맞물려 울려퍼지게 하는
환희의 합창이나 비극의 곡성을 떠올릴 필요 없다. 
그저 가볍게 주어진 몇 칸의 가능성들을 머릿속에서 반복해 진행하다보면 어느 순간 통쾌한 해법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신영복의 <나의 동양 고전 독법 - 강의>를 동양 고전 입문서로,
강유원의 <인문 고전 강의>를 서양 고전 입문서로 소개하곤 했다.
그렇지만 철학에 대해서는 어떠한 개론서나 입문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학생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철학 통조림'이나 고딩 대상으로 만들었다는 '철학, 역사를 만나다' 같은 책도 철학에 대한 이야기로는 쉽지 않았다.  

아니, 쉽기는 한데, 과연 그것이 전체적 그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것인지,
더 깊은 독서를 이끌어줄 가이드로서 도무지 맥락을 얻지 못했던 것 같다. 

며칠간 쉬면서 그간 있었던 복잡한 학교 문제와 새학기 준비의 짜증에서 나를 빼냈다.
학교의 구조적인 문제를 얄팍한 해법으로 풀어내려는 다양한 시도의 틈바구니에서 나는 늘 허우적거렸다.
일을 떠맡아 허우적거렸고, 남들이 '너는 잘 하잖아~' 이런 칭찬 사이에서 발로 뛰어 다녔다.
그런 일들과 사람들과의 연락을 끊고, 텔레비전도 만나지 않고 그저 즐겁게 며칠을 보냈다.
그저 바보가 되어 산 것 같다. 한 이틀 남짓인데도... 

그런 내 곁에서, 히히덕거리며 내 마음을 만져준 책이 바로 이 책이다.
묘수풀이처럼 통쾌하면서도 간단하게,
또 복잡한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간단한 논리로 다 설명이 가능하게,
아무리 두꺼운 책이거나 난해한 이론이라도 비유적 이야기 한 편으로 알기 쉽게 들려주는 책이다. 

물론, 철학에 다이제스트란 있을 수 없다.
초등학생용 철학이 있고 철학가용 전문 철학이 있을 수 없다.
삶이 있다면 영아용이나 노인용이나 모두 <인생>에 대하여 공손한 태도를 갖춰야 함과 같다.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이순재가 "호상은 무슨 호상, 니미럴~" 이런 대사를 던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죽음은 모두 나름의 아픔을 가지듯,
삶은 모두 나름의 의미를 가지겠다. 그게 철학이 선 자리다. 

제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제목의 한 글자만한 크기에 들어간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도 문제가 아니었다.
카운슬링은 문제가 있는 내담자가 카운슬러의 안내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인데,
이 책에서 강신주는 카운슬러가 되어 내담자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인생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타자>와
인생의 봄에 만나게 되는 <자아>와,
이 둘이 겪게 되는 <우리>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특별한 구도 없이 이야기를 풀고 있다. 

화자는 프롤로그에서 이 이야기들이 독자를 향한 <유리병 편지>였으면 좋겠다고 희망사항을 밝혔다.
결국 <유리병 편지>는 존재하지만, 그 병을 발견하고 그 편지를 읽는 이의 마음에 그 편지의 존재 의미는 달려있다.
발견하고도 무시하는 독자이거나,
편지를 읽고도 웃어 넘기는 독자라면,
유리병 편지는 참 바보같은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그 유리병을 발견한 사실을 소중하게 여기는 이에게,
그 편지의 내용과 편지를 쓴 사람의 처지를 곰곰이 씹어보는 이에게는 그 편지가 특별한 효용을 발휘할는지도 모른다. 

고전을 만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는 내게 이 편지는 단비와도 같았다.
밤새 운전을 할 때 그 단비는 자동차의 제동 능력을 떨어뜨리기도 하지만,
조심 운전을 하거나 자신의 스피드를 조절할 수 있는 이에겐 봄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저 비가 내린다는 사실을 충분히 즐길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지금 인생은 완전히 똑같이 살아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할 것도 없이,
삶 앞에 놓인 철학은 '참을 수 없이 가벼움'으로 다가온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부터 시작되는 철학의 그럴싸함에 비하면,
밥벌이 앞에 놓인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철학'을 <개똥 철학>으로 명명하면서부터
철학은 늘 삶 앞에 무릎꿇곤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개똥이 민들레 꽃의 생명력의 근원이 되듯,
그 가벼움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는 '일체유심조'를 개똥철학이라면 어쩔 수 없다.
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시키지 마라는 말도 개똥철학이라고 폄하하면 할 수 없다.
철학이란 배고픔 앞에서 늘 굴복하는 우스개에 불과하니깐. 

그렇지만, 조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인간은 개똥 철학이 필요하다.
이지보다 니체보다 김수영보다 우리는 배가 부르지만, <솔직하지> 못하다.
그 솔직함 안에 철학이 담겼다면, 배가 고프고 부르고를 따지기 이전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이들의 생각에 그들의 개똥 철학에 관심을 가질 법 하다. 

주희의 성리학이 내세운 기본 원리, 인과법칙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렇게 의문부호를 던진 정약용 이야기를 듣는 나는 행복했다.
무엇보다 강신주가 나보다 젊다는 이유로 행복했다.
그의 앞날이 멀고 멀기에, 그의 책들을 얼마든지 더 기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새학기를 앞두고 복잡한 머리를 잠시 정지하고 있던 나에게,
한나 아렌트처럼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던져주는 이를 만나는 일은,
괴로우면서도 반가운 일이었다.
아이히만처럼 관료제 아래서 수백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처럼,
교사인 나의 판단에 따라서 천여 명의 학생과 육십 여 명의 교사가 이렇게 저렇게 움직일 수 있음을 고려하면,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죄악임을 툭, 알려주곤 한다. 

교사로서 해야할 일을 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자세.
아무 생각없이 타성에 의하여 그저 밥벌이의 지겨움 속에서 살아가는 자세.
이런 사이를 미꾸라지처럼 헤엄치며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이런 독서>라면 반갑기 그지없다. 

물론 강신주의 이 책은 깊지 않다.
철학을 공부하고자하는 초심자에게 기본적인 개념조차 제대로 설명하기엔 지나치게 한 꼭지에 배당된 면수가 적다.
그렇지만, 철학이 필요한 시대,
앎과 실천, 아무 생각없이 소나 돼지를 파묻다 과로로 죽어가는,
생각없는 공무원들에게 아무 생각없이 죽음이나 애도하는 또다른 나에게,
생각하는 삶과 소통과 관계의 역학을 곱씹게하는 책으로 이 책은 재미있게 다가왔다.
묘수풀이집은 역시 짧은 시간 머리를 식히는 데는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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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3-01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예상대로 좋군요.
님의 서재에서 오랫만에 만나는 별 다섯개예요.^^

글샘 2011-03-01 12:59   좋아요 0 | URL
예상보다 좋았습니다. ㅎㅎ
제가 요즘 별에 인색했나요? 옛날엔 너무 후하단 소리도 들었는데...

잘잘라 2011-03-08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브르의 식물 이야기』를 읽고 사계절출판사에 반했어요.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책 검색하다가보니 또 글샘님 서재예요 ^ ^
알라딘에서 책구경하다보면 글샘님 닉네임을 자연스럽게 만나게되요.
'글샘'이라는 닉네임에 갖게되는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시는 리뷰,
님의 서재 글들..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읽습니다.


글샘 2011-03-08 21:56   좋아요 0 | URL
저는 '임꺽정'때부터 좋아했던 출판사랍니다.
멋진 출판사죠.

제 서재 글을 좋게 보아 주셔 고맙습니다.
제 글에 대한 기대감보다 책이 나을 때가 많겠지요. 속았을 경우도 있을 거구요. ㅎㅎ
아무래도 취향은 사람 수만큼 많으니 말입니다.

2011-04-08 21: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샘 2011-04-10 11:1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어쩌다 당선이 되었군요.
철학, 좋아하면 이 책을 좋아할 겁니다. ^^
저도 주변 분들께 막 홍보할 만큼 좋은 책이니까요.

드팀전 2011-04-08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잘 지내시지요.

글샘 2011-04-10 11:1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영 소식이 뜸하시군요. ㅎㅎ
예찬이도 잘 자라죠? 곧 학교갈 나이가 됐겠는데...

세실 2011-04-10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홋 축하드려요^*^ 아 읽어야지, 읽어야지....
묘수풀이집이라~~~ 리뷰가 참 맛깔스러워요.

글샘 2011-04-11 13:03   좋아요 1 | URL
리뷰가 맛깔스럽다니... 칭찬이 과하시네요. ㅎㅎ
이 책은 어렵지도 않습니다. 한번 읽어 보세요.

starover 2011-04-22 19: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삶에서 철학을 자주 적용해보아야 겠습니다. 철학이 아니더라도, 한 번이라도 더 생각해보며 살아야겠네요.

글샘 2011-04-23 19:26   좋아요 1 | URL
오로지 경쟁뿐인, 철학적 사고는 통용되지 않는 사회에 사는 사람의 하나로서,
철학은 인간이 되기 위한 몸부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