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키설키 하나가 된 고려 이야기 딱 20장면
한정영 지음 / 가교(가교출판)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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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일기와도 같다고 한다. 역사는 기록이지만, 일어난 모든 일을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기억해야할 중요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후삼국과 고려의 500여년 역사를 중요 사건 중심으로 엮었다. 사건을 두고 이야기식으로 엮으면서 전체 흐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5학년 쯤의 아이들이 크게 부담스러워 하지 않으며 흥미롭게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다소 위험해 보이는 부분들이 있어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을 보다 비판적인 눈으로 보아야하는 힘을 길러줄 수 있을지, 우려된다. 궁예는 포악하고 미치광이에 가까운 인물같이 그려진 점이 우선 그렇다. 궁예를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견해가 있음에도, 이 책에서는 여전히 그런 여지는 보여주지 않고 있다. 궁예는 왕건의 세력에 의해 무참히 평가절하된 비극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아닐까?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강에서 거둔 승리인 것처럼 그려져있는 부분도 그렇다. 쇠가죽으로 강의 상류를 막았다가 일시에 놓아 적군을 섬멸한 기록은 흥화진에서의 일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수세에 몰린 거란은 개경을 거쳐 귀주로 와서 완전히 패배의 결말을 보았다고 한다.

거란의 1차 침입은 993년 고려 6대 성종 때의 일인데 여기선 시종일관 현종으로 나온다. 흥화진도 홍화진으로, 위화도 회군은 1388년인데 1288로 오자인 것 같다. 막간의 한 꼭지로 '이 무렵 고구려에서는'은 '이 무렵 고려에서는'으로 되어야할 것이 잘못 인쇄된 것 같다. 좀더 정확하게 정성을 들여 한 권의 책이 나와야하지 않을까? 역사공부를 이제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혼란을 주거나 흑백논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먼저 들어서진 않을까 조바심이 난다. 반드시 다른 역사책을 두루 보고 나름의 시각을 기른다면, 이 책은 좀더 쉽고 흥미롭게 보기엔 눈 감아 줄 만하다 하겠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사 편지 2>는 후삼국에서 고려까지의 이야기를 잘 담고 있어,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 꼭 함께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 이 책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들(벽란도 같은...)과 함께 사진과 그림도 생생하고, 좀더 편중되지 않은 예리한 눈을 기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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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아뽀아가 가져다 준 행복 - 이그저어느 숲 이야기 중앙문고 35
오카다 준 글.그림, 이선아 옮김 / 중앙출판사(중앙미디어)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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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보면 우선 뽀아뽀아가 뭔지 무척 궁금해진다. 표지에 있는 남자아이의 이름인가? 하지만 다시 들여다보면 한손엔 편지, 한손에 무슨 열매를 들고 갸우뚱하고 있는 고슴도치 머리의 남자아이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열매의 이름이 뽀아뽀아인가? 이쯤이면 이야기로 들어가기 전 출발은 꽤 괜찮은 편이다. 이런 열매가 있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도를 예견해보는 것도 괜찮다.

오카다 준이란 일본동화작가는 이 책으로 처음 만났다. 이야기를 따라가다가 참 신기하고 기발하다는 생각에 이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 앞 책날개에 있는 작가약력과 사진으로 다시 돌아갔다. 동그랗고 까만 눈동자에 전체적으로 동안(童顔)을 하고 있는 작가라, 역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만화를 잘 그리는 작가답게 이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가지 기상천외한 집들에 탄성을 질렀기 때문이다. 주전자가 옆으로 눈 속에 파 묻혀있는 모양의 집, 고둥 모양의 집, 나무 위의 집, 유리병이 옆으로 누워있는 것 같은 집, 그리고 주인공 스키퍼가 사는 성게호(성게모양의 뾰족뾰족한 안테나가 솟아있는 집), 모두모두 겉모양도 멋지지만, 내부는 더 멋지다. 꼼꼼하게 집안의 모든 걸 그려놓고 필요한 부분은 설명도 달아놓았다. 실속도 있고 아름다우면서 집주인의 생활패턴에 맞게 효율적으로 꾸며져 있다.

등장인물들의 이름도 특이하고 재미있어 잊혀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씨, 정말로 씨, 사과와 레몬, 설마와 과연, 토마토 씨와 주전자 씨, 무뚝뚝 씨와 제비꽃 씨, 이들은 모두 웃을 줄 모르는 스키퍼에게 다른 행복의 맛을 알게 해 준다. 좋은 번역의 장점일까? 등장인물 이름뿐만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맛깔난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은 여러번 소리내어 읽고 싶다. '열매가 점점 커지고 점점 무거워질수록 낭창낭창한 가지가 휘늘어졌고, 발갛게 익은 열매가 땅에 닿을 무렵에는 달콤한 냄새가 감돌았어요.'

동화를 읽으면 좋은 점들 여러가지 중에, 이렇게 아름다운 문장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점이 크다. '낭창낭창한'이란 느낌과 '휘늘어졌고'의 느낌을 설명해주기 전에는 모르고 있던 아이들에게 말을 덧붙여주니 좋아했다. 스피드를 즐기고 즉흥적인 요즘 아이들, 스토리도 좋지만 구절구절 아름다운 우리말의 맛을 느끼며 동화를 읽으면 더 좋겠다.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문장들이 마음에 스미는 느낌이 참 좋기 때문이다. '이그저어느 숲'에서 벌어지는 조용한 듯 떠들석한 이야기들이 가져오는 파장이, 뽀아뽀아 열매로 만든 뜨거운 잼을 넣어 마시는 홍차 한 모금의 맛과 같기 때문이기도 하다.

'모두들 준비를 마치고 고갯짓으로 서로 신호를 보낸 다음, 다 함께 눈을 감고 한 모금씩 마셨어요. 아, 이렇게 맛있을 수가! 달콤하고, 산뜻하고, 은은하고, 행복했어요.'

이 책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다. 혼자 차 마시고 혼자 생각하고 화석을 들여다보며 혼자 상상하는 걸 즐기는 스키퍼는 행복한 느낌을 가지고 산다. 부끄럼도 잘 타고 말도 잘 못하고 웃는 일도 좀해서 없는 스키퍼에게 어느 날 뽀아뽀아 열매의 조리법을 알아내야 하는 일이 일어나고, 그 열매를 들고 이웃을 찾아다니면서 열매를 나눠주고, 도움도 받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숲속에 자신의 발자국을 남기는 일이 많아지면서 스키퍼의 행복은 예전의 것과는 좀 다른 종류로 다가온다. 숲 속 사람들이 자신의 상상 속에 자주 등장하고 모험이야기가 나오는 책을 많이 읽게 되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차를 대접하며 다소 분주한 시간을 보낸다. 이제 고슴도치 스키퍼가 느끼는 제일 큰 행복은, 사람들이 찾아와 성게 호에서 차를 마시고 돌아간 뒤에 혼자 서재에서 책을 읽고 화석이며 조개를 볼 때의 그 '느긋한 기분'이 몸 속으로 사르르 퍼질 때로 바뀌었다.

행복은 균형에서 오는 게 아닐까! 우리의 의식을, 감정을 지배하는 생활의 균형. 타인과 만나 따스한 정과 마음을 나누고 자신만의 시간으로 돌아와 하루의 경험을 내면화하여, 충만함으로 행복의 열매를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린드그렌만큼 신선한 감동과 재미를 준 동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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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릭터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48
토미 웅게러 글, 그림 | 장미란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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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 웅게러의 그림책은 내 꽉 막힌 생각을 여지없이 뒤집고 깨어주는 특별함이 있다. <제랄다와 거인>이 그랬고 <세 강도>가 그랬다. 무섭고 흉칙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쉬운 것들에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선악과 미추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따스한 시선으로 비틀어준다.

<동물과 대화하는 티피>라는 사진첩의 티피가 생각났다. 야생동물사진촬영을 위해 아프리카 야생의 동물을 따라 카메라렌즈를 들고 다니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 살았던 티피는 뱀을 목에 두르고 무심에 가까운 순진한 표정으로 있었다. 뱀의 몸에 있는 무늬가 참 예쁘다고도 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악어를 집에서 왜완용으로 기르는 아주머니도 생각난다. 커다란 악어가 침대며 욕조며 마음대로 기어다니고 있었다. 난 글쎄, 좀,...

크릭터는 아프리카에서 파충류를 연구하는 아들이 프랑스의 어머니에게 소포로 배달한 보아뱀이다. 소포포장부터 심상치 않다. 둥글게 말려있는 커다란 뭉치다. 보아뱀은 성질이 순해 비교적 사람과 친해지기 쉽다고 한다. <크릭터>는 선명한 초록색이 책을 온통 차지하고 간간이 보이는 빨간색이 악센트다. 간결한 스케치로 그린 그림에 보색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 색상이 보기에도 깨끗하다. 그래서 더욱 뱀이라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겉표지에서부터 뱀이 만드는 갖가지 글자모양과 다른 여러가지 모양들을 보는 것도 재미난다. 남자아이들을 위해 미끄럼틀이 되어주고(놀이를 굳이 남자, 여자로 구분한 건 맘에 좀 들지 않지만), 여자 아이들을 위해 줄넘기를 할 수 있도록 줄이 되어주고, 할머니를 따라 학교에 가선 온갖 알파벳과 숫자를 몸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여섯 살 작은 아이는 혼자 이 그림책을 먼저 보고 나한테 뛰어오더니, 엄마, 참나무를 영어로 뭐라 해?, 라고 물었다. 오크,라고 했더니, 음... 하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이다. Oak의 첫자 O를 크릭터가 몸으로 만들어 보여준 거다. 아이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한마디 더 던졌더니, 크릭터는 참 쓸모가 많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종알댄다. 할머니 집에 몰래 들어와 할머니를 꽁꽁 묶은 도둑을 자기 몸으로 꽁꽁 묶어 잡았다며, 마치 아이 자신의 무용담이라도 되듯 신나하며 떠든다. 처음엔 징그러운 뱀이라며 약간 거부하더니, 금세 크릭터는 아이에게 남다른 친구가 되어버렸다.

눈위를 따라 경쾌한 몸짓으로 기어가는 크릭터는 할머니가 털실로 정성껏 짜준 기다란 털옷을 입고 있다. 침대는 또 얼마나 길다고. 우유병을 물려 아이를 키우듯 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웃음을 자아낸다. 뒤에 크릭터 기념동상을 만들고 하는 건 오히려 수선스런 어른들의 오버액션 같아 더 우습다. 작가는 혐오스러운 대상을 과장할 만큼 과장해 뒤집어 보여주어, 우리의 편견이 싹을 새로 틔울 자리를 여지없이 싹 잘라버리려는 것 같다.

자기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대상에게 거의 전적인 지지를 보내며 용감한 행동을 한 크릭터와 아이들을 위해 놀이기구가 되어준 크릭터는 아이들에게 친밀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엄마가 신나게 잘 안 놀아준다는게 우리 아이의 불만인 걸 내가 알고 있으니, 좀 미안했다. 아이들은 저랑 놀아주는 대상을 제일 좋아하는데 말이다. 엄마도 점수 좀 따려면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애완견 대신 장난감 퍼피를 안고 좋아하는 아이 얼굴이 사랑을 먹고 자라는, 천상 욕심꾸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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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대장부 프란츠 이야기 1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 지음, 김경연 옮김 / 비룡소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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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대장부>는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프란츠 이야기 시리즈 첫 권이다. 손에 꼭 잡히는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와 크기, 튼튼해 뵈는 하드커버, 아기자기한 표지 그림이 한눈에 쏙 들어온다. 초등 저학년이 읽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아주아주 재미있다. 아이들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재미도 솔솔하고, 여기저기 풋풋한 웃음이 묻어난다.

프란츠 이야기는 몇 년 전에 읽고 중요한 걸 깨달았던 심혜련의 <약이 되는 동화, 독이 되는 동화>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동화 속에 들어있는 독에 대하여 예리한 시선을 보내며 약이 되는 동화란 어떤 것이라고 처방하고 있는 그 책에서, '프란츠 이야기'는 약이 되는 동화로 언급되어 있다. 뇌스틀링거의 또 다른 동화 <세 친구 요켈과 율라와 예리코>와 함께 프란츠 이야기는 성역할의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던져버리고 양성평등으로 가는 바람직한 길을 보여주는 것으로 권장하고 있었다.

프란츠 이야기에는 일상의 언어와 행동 속에서 성고정역할의 편견을 보여주는 대목이 군데군데 나온다. 독일이나 우리나라나 다르지 않은가 보다. 하지만 신나게 펼쳐지는 프란츠의 좌충우돌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그런 편견은 자연스럽게 깨어지고 없다. 딱딱한 어조로 가르치려들지 않고 꾸밈없이 보여주는 이야기 속에서 그런 걸 느끼게 해 주는 작가의 역량이 참 부럽기도 하다. 뇌스틀링거는 <깡통소년>에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발상의 전환을 유도하여 동화 읽기를 즐겁게 하는 작가다.

'프란츠 이야기'는 7살의 프란츠가 8살, 9살이 되어서까지의 이야기다. 낱권으로도 괜찮지만, 1권부터 연이어 보면 더욱 재미있겠다. 프란츠가 자라면서 겪게 되는 사소한 이야기들 속에서 생각의 자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내대장부>에서는 여자아이처럼 생긴 7살의 프란츠가 14살의 형에게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서 여자아이라는 오해를 받고 속상해한다. 그렇다고 바지를 홀랑 벗어보이다니... 프란츠는 정말 귀여운 말썽꾸러기다.

프란츠는 가비라는 여자친구랑 있는 걸 편안해 하고 나중에 시리즈의 다른 책에서는 명예소녀가 되어 여자팀에 들어가 축구를 하기도 한다. 가비의 마음에 들려고 요리사놀이도 하고 가비가 준비한 크리스마스선물을 슬쩍 바꿔치기하여 자기가 갖고 싶은 시계를 받고 질투의 대상인 남자친구를 혼내줬다고 흐뭇해 하기도 한다. 곱슬거리는 금발머리 때문에 더욱 여자아이로 오해 받는다고 생각하는 프란츠는 머리 모양을 바꾸어도 보지만, 결국 원래의 그 머리모양으로 돌아와, 자신의 외모를 그대로 사랑할 줄도 안다. 힘으로 약한 친구를 괴롭히려드는 친구는 프란츠의 밉지 않은 꾀에 당하기도 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또 밖에서 겪는 여러가지 프란츠의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시원한 생수 한 모금처럼 시원하고 건강한 맛이다.

<사내대장부>의 표지에서 프란츠가 쓰고 있는 멋드러진(?) 모자는 엄마를 위해 특별히 프란츠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모자였다. 가비에게 부탁해 이것저것 얻은 소품들 - 장미, 못쓰는 천, 염소깃털, 초코릿 상자를 묶었던 리본 같은 것들 - 로 화려하게 꾸민 모자를 당당하게 쓰고 거리를 활보해주는 엄마에게 박수 보낸다. 부끄러워 같이 못 나가겠다고 슬슬 꽁무니를 빼는 아빠와 형 요제프와는 다른 태도로, 프란츠를 제대로 사랑하시는 엄마는 멋쟁이다. 그런데 이걸 어째, 모자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다음엔 만들어드리겠다고 굳은 약속을 하는 기특한 프란츠라니. 엄마의 인내심은 어디까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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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의 빨간 외투 비룡소의 그림동화 75
애니타 로벨 그림, 해리엣 지퍼트 지음,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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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 아이가 입고 서 있는 빨간 외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나, 이 그림책의 표지만 보면 그런 것들이 마구 궁금해진다. 요즘 아이들은 옷 하나에 그리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아이가 얼마나 많을까 싶지만, 나의 기억만 들추어봐도, 몇가지 기억들이 살아난다. 겨울 교복치마 밑에 입으라고 손뜨게로 짜주신 노란 속바지, 민소매 원피스의 하늘거림, 발등에 가는 끈으로 연결된 검정색 에나멜 구두, 얇은 레이스가 달린 발목까지 오는 하얀 양말의 기억이 그렇다.

이 그림책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아름답게 살려 놓았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유태인 핍박을 피해 도미한 여성그림책작가이다. 개구리와 두꺼비 시리즈로 기억되는 아놀드 로벨의 부인이란다. <안나의 빨간 외투>는 전쟁의 폐허를 보여주는 뿌연 그림으로 시작한다.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다친 사람들이 거리에 뒹굴고 먹을 것도 없고, 온통 '없음'이라는 단어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 안나와 엄마는 황량한 가슴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불행할 것 같다.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나와 아이들이지만, 이런 극한 상황을 이해하기엔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그리 부족하진 않다.

그러나 불행할 것만 같은 안나와 엄마는 행복을 가꾸는 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기다림! 작은 소망을 가슴 속에 안고 키우며 설레며 기다리는 마음! 겨울이 되어 안나는 거울 앞에서 파란 외투를 입어보지만, 쑥쑥 자라는 아이에게 그 외투는 작기도 하고 따스해 보이지도 않는다. 이런 때 엄마라면 얼른 넉넉하고 따뜻한 외투를 장만해주고 싶어진다. 안나의 엄마는 안나에게 썩 괜찮은 외투를 장만해주려고, 가지고 있는 귀중한 물건들을 팔 생각까지 하며 사람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양털을 깎기 위해 봄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말은 엄마가 처음 들은 말이다. 아무래도 올 겨울은 작은 외투를 억지로 끼어입고 보내야 할 것 같다. 이듬해 봄, 양털을 얻고 여름엔 산딸기를 얻어 실을 염색하고 그리고 옷을 짜고... 꼬박 사계절을 보내고 여섯 개의 귀여운 단추가 달린 빨간 외투가 완성된다. 다른 아이도 입고 있는 똑같은 외투가 아니라, '안나를 위한 빨간 외투'라고 특별하게 적힌 푯말과 함께 쇼윈도우에 걸려있는 외투는 한 면을 꽉 채우게 눈에 확 들어온다. 빨간 색상이 참으로 곱다. 아이의 소망과 엄마의 사랑, 다른 어른들의 배려가, 오래 기다렸다 받은 선물의 값을 무한대로 하는 것 같다.

안나는 빨간 외투를 입고 서 있는 자기의 모습을 두고두고 잊지 못하겠다. 난 어릴 적 엄마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조그만 양철 함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분홍색 플라스틱 손잡이가 위에 달렸고 직사각형의 함에 파스텔톤 그림이 있는 건데, 그리 비싸거나 화려한 건 아니지만, 엄마의 애정이 담긴 작은 선물이다. 크리스마스면 으레 하는 선물, 백화점에 가면 온통 똑같은 형형색색 근사한 선물들보다 아이에게 잊지 못할 특별한 기억을 주는 선물을 하고 싶다. 그 선물의 이름은 '기다림과 사랑'이다.

<안나의 빨간 외투>는 원하는 것이 있으면 얼른 손에 넣고 싶어 참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에게, 두근두근 기다렸다 얻는 커다란 기쁨을 보여준다. 그 기쁨은 무르익혀서 얻은 달디 단 맛이다. 어릴 적 잊지못할 특별한 기억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되살려 놓은 이 한 권의 그림책으로 마음의 풍요를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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