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터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48
토미 웅게러 글, 그림 | 장미란 옮김 / 시공주니어 / 199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토미 웅게러의 그림책은 내 꽉 막힌 생각을 여지없이 뒤집고 깨어주는 특별함이 있다. <제랄다와 거인>이 그랬고 <세 강도>가 그랬다. 무섭고 흉칙하다는 느낌을 가지기 쉬운 것들에 유머러스한 방식으로 정감을 느끼게 한다. 선악과 미추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을 따스한 시선으로 비틀어준다.

<동물과 대화하는 티피>라는 사진첩의 티피가 생각났다. 야생동물사진촬영을 위해 아프리카 야생의 동물을 따라 카메라렌즈를 들고 다니는 엄마와 아빠를 따라 살았던 티피는 뱀을 목에 두르고 무심에 가까운 순진한 표정으로 있었다. 뱀의 몸에 있는 무늬가 참 예쁘다고도 했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악어를 집에서 왜완용으로 기르는 아주머니도 생각난다. 커다란 악어가 침대며 욕조며 마음대로 기어다니고 있었다. 난 글쎄, 좀,...

크릭터는 아프리카에서 파충류를 연구하는 아들이 프랑스의 어머니에게 소포로 배달한 보아뱀이다. 소포포장부터 심상치 않다. 둥글게 말려있는 커다란 뭉치다. 보아뱀은 성질이 순해 비교적 사람과 친해지기 쉽다고 한다. <크릭터>는 선명한 초록색이 책을 온통 차지하고 간간이 보이는 빨간색이 악센트다. 간결한 스케치로 그린 그림에 보색으로 대비되는 두 가지 색상이 보기에도 깨끗하다. 그래서 더욱 뱀이라 징그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겉표지에서부터 뱀이 만드는 갖가지 글자모양과 다른 여러가지 모양들을 보는 것도 재미난다. 남자아이들을 위해 미끄럼틀이 되어주고(놀이를 굳이 남자, 여자로 구분한 건 맘에 좀 들지 않지만), 여자 아이들을 위해 줄넘기를 할 수 있도록 줄이 되어주고, 할머니를 따라 학교에 가선 온갖 알파벳과 숫자를 몸으로 만들어 보여준다.

여섯 살 작은 아이는 혼자 이 그림책을 먼저 보고 나한테 뛰어오더니, 엄마, 참나무를 영어로 뭐라 해?, 라고 물었다. 오크,라고 했더니, 음... 하며 뭔가 알았다는 표정이다. Oak의 첫자 O를 크릭터가 몸으로 만들어 보여준 거다. 아이의 말을 더 듣고 싶어 한마디 더 던졌더니, 크릭터는 참 쓸모가 많고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고 종알댄다. 할머니 집에 몰래 들어와 할머니를 꽁꽁 묶은 도둑을 자기 몸으로 꽁꽁 묶어 잡았다며, 마치 아이 자신의 무용담이라도 되듯 신나하며 떠든다. 처음엔 징그러운 뱀이라며 약간 거부하더니, 금세 크릭터는 아이에게 남다른 친구가 되어버렸다.

눈위를 따라 경쾌한 몸짓으로 기어가는 크릭터는 할머니가 털실로 정성껏 짜준 기다란 털옷을 입고 있다. 침대는 또 얼마나 길다고. 우유병을 물려 아이를 키우듯 하는 할머니의 모습도 웃음을 자아낸다. 뒤에 크릭터 기념동상을 만들고 하는 건 오히려 수선스런 어른들의 오버액션 같아 더 우습다. 작가는 혐오스러운 대상을 과장할 만큼 과장해 뒤집어 보여주어, 우리의 편견이 싹을 새로 틔울 자리를 여지없이 싹 잘라버리려는 것 같다.

자기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대상에게 거의 전적인 지지를 보내며 용감한 행동을 한 크릭터와 아이들을 위해 놀이기구가 되어준 크릭터는 아이들에게 친밀감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 같다. 엄마가 신나게 잘 안 놀아준다는게 우리 아이의 불만인 걸 내가 알고 있으니, 좀 미안했다. 아이들은 저랑 놀아주는 대상을 제일 좋아하는데 말이다. 엄마도 점수 좀 따려면 에너지를 충전해야겠다. 애완견 대신 장난감 퍼피를 안고 좋아하는 아이 얼굴이 사랑을 먹고 자라는, 천상 욕심꾸러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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