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3월28일 시작, 총 28시간 소요 녹음완성.

2012년 7월24일 1차 편집 시작.

 

 

녹음 속도가 빨라 편집할 도서가 많이 밀려있다.

지난 주 김훈 장편소설 <흑산>(총 19시간) 1차 편집을 마치고 오늘 <화차> 편집에 들어갔다.

 

미야베 미유키가 장치해놓은 복선들이 다시 눈에 띄었다. 혼마의 시선으로 표현된,

사람을 묘사하는 섬세한 눈과 사람을 꿰뚫는 예리한 눈은 동시에 작가의 것이리라.

소비자금융규제법과 개인파산에 대한 것까지 오늘 편집한 부분에서 나왔는데,

작가의 치밀한 자료조사를 엿볼 수 있다.

 

 

 

특히 이 책의 주제로 통하는 '거울'에 대한 복선이 아주 초반부터 눈에 띈다.

 

다리 부상으로 휴직을 하고 있는 형사 혼마는 불현듯 옛날 일이 떠오른다.

상습절도범 소녀에 대한 기억인데, 솜씨가 좋았던 그 소녀는 훔친 고급 브랜드의 옷과 시계나

액세서리까지 한번도 밖에 나갈 때 착용하질 않았다.

 

대신 아무도 못 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커다란 전신거울 앞에서 이것저것 번갈아 입어보았다.

오로지 자기 방의 거울 앞에서만. 그러면 어울리지 않는다는 핀잔을 들을 염려도 없으니까.

......

아무도 없는 곳에서만 자기주장을 한다.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다 그렇게 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 소녀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벌써 이십 년도 더 지난 옛날 일이다. 어쩌면 당시의 자기 나이 또래 아이의 엄마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 입을 굳게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는 그녀에게 설교를 늘어놓으려 애쓰면서 변변히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풋내기 형사의 얼굴 따윈 잊은 지 오래겠지만. (p9)

 

 

우리는 착각 속에 산다. 행복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정작 무언가를 손에 쥐면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 모든 건 순간이다. 그 느낌마저 순간의 착각이다.

가즈오의 약혼자, 한순간에 사라진 여인 세키네 쇼코는 "나는 그저 행복해지고 싶었다"고 말한다.

어떤 게 행복일까? 크고 아름다운 집이 있으면 행복해질 것 같았던 쇼코, 우리의 다른 이름이 아니고 무얼까.

 

이 세상에는 다리를 원하지만 허물벗기에 지쳐버렸거나 게으름뱅이거나 벗는 방법을 모르는 뱀이 수없이 많다는 거죠.

그래서 그런 뱀들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을 파는 뱀도 있다는 말씀. 그리고 뱀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 거울을 사고 싶어하는 거예요. (p347)

 

거울은 당연히 있는 그대로 비춰줄 것 같지만 거울마다 약간은 다른 느낌을 준다. 확실히 어떤 거울은 실제보다

이쁘게 보이게 한다. 옷가게 거울 앞에 서면 모델처럼 날씬한 내가 서있어 기쁘고 놀라운 경험이 다들 있을 거다.

그러면 당연히 그 거울을 사고 싶지만 대신 옷을 사고 만다. 집에 와서 입어보면 실망하겠지만.

우리는 뱀에게 다리가 있는 것처럼 비춰주는 거울 하나를 사기 위해, 행복이라는 이름의 착각을 사기 위해

결국 행복을 놓치고 있는 건 아닌지.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비유가 <화차>를 더 무게 있게 한다. 

이 책 편집하며 한 번 더 읽게될 거라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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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7-24 2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차는 영화만 보고 책은 못 읽었어요.
이 페이퍼만 읽어도 좋으네요~~~

프레이야 2012-07-25 23:57   좋아요 0 | URL
오기언니, 영화도 좋았는데 책으로 읽어보면 더 좋을 거에요^^

맥거핀 2012-07-25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인용하신 일부분만 보고도 미야베 미유키가 상당히 날카로운 관찰자라는 걸 알겠습니다. 아마 소설에서는 혼마 형사와 관련하여서도 재미있는 부분이 꽤 있는 것 같군요. 소설을 읽고 싶도록 만드는 글이네요.

프레이야 2012-07-26 00:00   좋아요 0 | URL
저는 미미여사의 다른 작품은 그다지 당기지 않아 피했는데 다른 것도 읽어보고 싶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이야기는 혼마의 힘으로 시종 끌고가는데, 혼마를 비롯해 다른 등장인물도
그녀(작품 속 쇼코)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해요. 그녀 안에서 자신들을 본 거겠지요.
원작의 엔딩이 전 영화보도 더 좋았어요.
그치만 변감독의 영화도 좋았어요.^^

라로 2012-07-25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미여사는 돈으로 생기는 인간의 탐욕과 퇴락을 아주 잘 표현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책을 읽을 자신은 없어요,,,전 그녀의 [이유]읽고 무서워서 잠을 설쳤;;;
하지만 영화는 볼만 하더군요..오히려 영상이 어쩔 땐 더 쉬워요, 제겐.ㅎㅎㅎ

프레이야 2012-07-26 00:00   좋아요 0 | URL
ㅎㅎㅎ 무서운 거, 잔인한 건 잘 못보는 뤼야님.
'화차'는 그런 장면은 없어요. 영화도 좋았어요.^^

blanca 2012-07-25 2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녹음하시는 중이군요. 저는 미야베 미유키가 이 소설이 처음이었는데 정말 기대 이상이어서 너무 탐닉하며 읽었던 기억이 나요. 가벼운 책인 줄 알았는데 읽으며 소름이 돋더라고요. 자본주의의 한켠에서 몰락해 가는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나 절절하게 그렸던지... 나중엔 슬프더라고요. 프레이야님이 편집 작업도 하시는군요!

프레이야 2012-07-26 07:51   좋아요 0 | URL
블랑카님, 녹음은 마쳤고 1차편집 중이에요.^^
저도 미미여사 소설은 이게 처음이에요. 님의 멋진 리뷰도 기억나구요.
여러가지 생각이 드는 작품이었어요. 오늘 편집분 중, 미조구치 변호사의 말,
개인파산을 한 쇼코에 대해 "그건 꼭 그녀만의 잘못이 아니니까요.
현대사회의 신용대출 파산은 어떻게 보면 공해 같은 겁니다." 기억나시죠? ^^
눈의 무서움, 이런 짧은 단어 두 개로도 비유되고요. 겉은 멀쩡하고 화려하고 순백해도
덮여있는 슬프고 비루한 현실과 욕망이란 무서워요. 자본주의 거탑 아래 서서히 몰락해 가는...
네, 절절하면서도 참 담담하게 그리고 있구나, 생각 들었어요.

라로 2012-07-26 17:12   좋아요 0 | URL
저 치매 맞나봐요,,ㅠㅠ
저 위의 댓글 달면서 블랑카님이 한, '자본주의'니'몰락'이니 뭐 그런 단어가 생각이 안 나는거에야요,,흑흑
그래서 돈, 퇴락,,,이런걸로 썼다는,,,도대체 돈, 퇴락,,수준차이 나게 이게 뭐랍니까???ㅠㅠ
인간의 탐욕만 제대로 기억이 나더라는,,ㅠㅠ
명사를 잊어버리는게 먼저라더니,,ㅎㅎㅎㅎㅎㅎㅎ맞는 말이에요.훌쩍

프레이야 2012-07-26 19:15   좋아요 0 | URL
뤼야님, 저도 그래요.ㅠ 단어가 생각 안 나고 뭐든 깜박하고 그래요.ㅋㅋ
근데 자본이나 돈이나, 퇴락이나 몰락이나 그게 그거죠.ㅎㅎ

2012-07-28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거울을 사야 하는 거였군요. 옷이 아니라.
여튼 굉장히 섬뜩하고도 와닿는 비유입니다. <화차>는 역시 좋은 책이군요..
그나저나 녹음하면서 좋은 책들을 천천히 읽을 수 있는 프레이야님의 독서가 부럽습니다.^^

프레이야 2012-07-28 12:54   좋아요 0 | URL
섬님, 화차, 역시 영화도 좋지만 원작이 좋았어요^^
거울아,거울아, 하던 백설공주랑 계모 생각도 나네요.ㅎㅎ
사람관계도 그런 것 같아요. 내 보기에 좋은 거울을 만드는 일,
그게 행복한 관계를 만드는 일 같구요. 그러고 보니 거울이 다시 보입니다^^

2012-07-31 0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31 0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