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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평점 :
이 세상 그 어느 나라에도 / 애국 애족자가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 것이다.// (중략)
이 세상 모든 젊은이들이 / 결코 애국자가 안 되면/ 더 많은 것을 아끼고/ 사랑하며 살 것이고//
세상은 아름답고/ 따사로워질 것이다
권정생 선생의 2000년 작, 시 '애국자가 없는 세상'의 일부다. 이 시를 보면 나는 존 레논의 'Imagine'을 떠올린다. 평화주의자의 노래이지만 반역과 혁명의 노래다. 1996년 녹색평론사 개정증보판 산문집 <우리들의 하느님>에 실린 유일한 시다.
1996년 12월 <우리들의 하느님> 책머리에 선생은 "오늘날 이 지구 위엔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아직도 끔찍한 살인과 약탈은 끊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도의 지능으로 속임수를 써가며 죽이며 빼앗습니다. 그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기 때문에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 분간이 잘 되지 않습니다.(10쪽, 우리들의 하느님)" 라고 직접 쓰고 있다. 선생이 흙집 댓돌에 흰 고무신 한 켤례를 남기고 저 세상으로 가신 지 5주년, 그 정신을 기려 산문집 <빌뱅이 언덕>이 나왔다. 당연히 머리말을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고 안상학,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사무처장이자 시인이 나섰다. 권정생 선생은 손수 산문집을 내지 않았고 낼 뜻도 없었던 분이다. 1986년 산문집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와 1996년 <우리들의 하느님>에 이어, 세번째 산문집 <빌뱅이 언덕>은 평소 전집 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선생의 뜻을 지켜 전집으로 엮어도 좋았을 시 일곱 편과 동화 한 편까지 부록으로 안는다.
그 중, 전에도 보았던 시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는 선생의 인간적인 면을 꾸밈없이 보여주어 웃음을 머금게 한다.
인간성에 대한 반성문 2
도모코는 아홉 살/ 나는 여덟 살/ 이 학년인 도모꼬가/ 일 학년인 나한테/ 숙제를 해 달라고 자주 찾아왔다.//
어느 날, 윗집 할머니가 웃으시면서/ 도모코는 나중에 정생이한테/ 시집가면 되겠네/ 했다.//
앞집 옆집 아웃 아주머니들이 모두 쳐다보는 데서/ 도모꼬가 말했다./ 정생이는 얼굴이 못생겨 싫어요!//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린다.
- [사람의 문학] 1997
(p335, 빌뱅이 언덕)
선생은 자신의 반성만을 형식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 도모꼬, 그보다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를 갈고 있는 못생긴 정생이 모두를 반성한다. 이 시는 어쩔 수 없이 비루한 인간성에 대한 참회이자 연민이다. 작정하고 하는 참회가 아니라 도모꼬 생각만 나면 이가 갈리고 그럴 때마다 불쑥 튀어나오는 반성이다. 그만큼 진실하고 강하다. 미사여구나 사족, 변명이나 미화도 없다. 이런 특징은 말할 것도 없이 선생의 산문 전반에서 두루 나타난다.
두 번의 전쟁 속에서 겪은 죽음의 공포, 가난과 병마, 유랑걸식, 가족과의 이별 등 기구한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려고 하기보다 그 모든 걸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가난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며 세상과 사람, 이웃과 자신에 대한 가감없는 성찰로 반역과 혁명의 꿈을 오로지 펜으로 펼쳐 주장한 그의 글은, 여전히 우뚝하다. 정치, 경제, 환경, 미제국주의의 횡포를 보는 정확한 눈과 농민의 삶과 어린이의 삶, 우리말과 글이 행복할 수 있는 방안 등에 대한 제언 또한 거침없다. 그때의 세상이나 지금의 세상이나 달라진 게 없고 더 나빠진 면도 많지만 선생이 지향하는 진심이 세월이 간다고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풍요와 발전을 추구하는 세상에 어쩌면 천연기념물이 될지도 모를 그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산문과 동화, 시작품들이 하나의 브랜드가 될지라도 지켜야할 가치가 충분하다.
특히 다섯살 때 성경이나 강독에서가 아니라 예수상의 그 헐벗고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보고 기독교신자가 된 선생이 훗날 예수를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부분과 우리나라 기독교에 대한 냉철한 비판과 나아갈 바를 주장하는 글은 매섭다. "약한 자가 가장 강한 자가 될 수 있다"는 선생의 역설을 간과해선 안 될 일이다. 선생은 하느님이 철저히 자유로운 몸을 주신 걸 은혜로 알며 살았고 "불가능한 것을 되도록 속히 포기하는 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더 쉽게 하도록 만든다(작은 이야기, 2001)"며 가난한 사람에게도 우주는 그만큼 너그럽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꼴찌는 그만큼 떳떳하다"고도 강변했다.
화려하게 치솟은 교회의 건물은 하느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릴 장소가 못 된다. 거기에는 인간의 사치와 낭비와 교만이
도사리고 있을 뿐이다. ....... 성서는 불의와의 타협에 쓰이는 병법서가 아니다. 우리 모두 어떤 신분이나 지위보다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참모습을 볼 줄 알자. 그래서 가난한 세상을 만들어야만 평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 [경향잡지] 1987
(빌뱅이 언덕, p221)
선생의 정신은 한 마디로 가난의 정신이다. '가난' 위에 서있다. 빌뱅이 언덕 두 칸 오두막집처럼 철저히 외톨이로 꼿꼿이.
"풍요와 편리 때문에 결국 우리는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p178)" 고 쓴 선생은 사람이 자연과 공생하며 본래의 가난으로 돌아가 산다면 욕심으로 인한 전쟁도, 욕망으로 인한 상실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찮고 더러운 강아지똥에서도 피어나는 한 송이 민들레처럼 생명이 있는 낮은 곳의 이야기, 비나리 달이네집과 몽실언니처럼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의 이야기는 선생의 삶만큼이나 눈물겹다. 우화나 동화를 빌어와 알기쉽게 가르치는 산문은 어른이나 아이 모두에게 읽히기 쉽고 받아들여지기 쉽다. 삶이 글이고 글이 삶이었던, 선생의 유산은 오롯이 '어떤 지향점'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