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2월에 읽은 책들 그리고...

 

 

12월 30일은 큰아이 생일인데 이번에는 유난히 그 애를 낳았던 19년 전이 생각나 괜스레 울컥했다.

이래저래 답답한 마음에 원래도 그렇지만 소화가 안 되고(위와 장이 게을러 움직이질 않아ㅎㅎ) 심장도 조이고

원래 기혈이 허한 체질에 약을 먹고 있는데도 하지정맥류 증세가 한 닷새 동안 갑자기 심해져 다리도 잘 못 쓰고..

마음엔 심화가 차오르고 예민해져서 휘둘려 있었다.

 

굳이 큰아이를 낳았던 날을 소급한 건 아니었지만, 아이 생일날 미역국은 안 끓여주고 대신 내가 먹을 한약을 지었다.

20대초에 엄마 손에 끌려 한의원에 가보고는 처음이다. 마음부터 편안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처방.

아무튼 좋은 약재로 잘 지어줬을 거라고 믿고 신년초부터 그 쓴 약을 하루 세 번 어렵지않게 커피 마시듯 먹고 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쓴 약, 쓴 음식이 술술 잘 먹힌다는 것이다.

 

어쩌면 기대와 믿음이 자만에서 온 것도 있지 않나 돌아봤다.

예정된 것이고 예상한 것인지도 모른다.

본질적으로 관계와 세상살이에 불화한 이런저런 일들로

결국 내적 외적 갈등과 충돌 끝에 자성과 비움과 평화의 순간이 왔고 또 잠시 물러나길 반복, 끓어오르다 가라앉고,

그러는 중에 계속 책을 놓지 않았다. 그 안에서 나는 무얼 얻고 싶었고 무어라도 내겐 쓴 약이 될 만했다.

게다가 여러 벗들이 보내준 칭찬과 응원과 염려와 나에 대한 무한긍정의 메시지는 주술의 힘까지 발휘해

바닥에 엎드린 나를 조금씩 일어서게 해 주었다. 나를 참아주고 견뎌주는 이들 모두, 눈물나게 고맙다.

사람만이 아니라,

책도 인연이다.

 

 

1.  웃음 / 베르나르 베르베르 / 열린책들

 

  이 책으로 나는 베르나르를 다시 좋아하게 됐다.^^

가볍지 않은 주제를 한 개그맨의 의문사로 시작된 미스테리 안에 풀어놓았다.

그 스토리를 좇아가는 중에 만나게 되는 약간의 로맨스와 인류종의 기원과 진화, 세계사,

특히 희극의 문학사를 웃음을 소재로 비틀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웃음의 기원과 진화,

웃음의 권력과 역사가 병행한다.  

'우리는 왜 웃는가'는 '우리는 왜 슬픈가'를 먼저 자문하면 답이 나올 거라며,

두 권의 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하고 대단한 유머.

 

엄청난 비극들이 대개는 소박한 사랑 이야기로 시작되죠.

이것 역시 인생이 우리에게 던지는 농담 아니겠어요? (2권, 385쪽)

 

나는 유머가 가장 높은 수준의 영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웃게 되는 것이니까요. (2권, 444쪽)

 

나쁜 유머, 어둠의 유머는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지식의 최고 목적은 유머"라고 했던가.

 

 

 

2. 박찬욱의 몽타주 / 박찬욱 / 마음산책

 

  박찬욱은 똑똑하고 세련되고 여유 있고 글도 잘 쓴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유머를 자유롭게 활용하고, 유쾌하고 매력적인 사람이다.

철학을 전공한 그는 '철학자'라는 글에서 베토벤의 말을 인용하며 이런 말을 한다.

"스물여덟 살에 벌써 철학자가 되어야만 하는 것, 좋은 일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예술가에게는

훨씬 더 가혹한 일이다." 베토벤의 이 말씀에 그는 '

세계와 인간에 대한 체계를 바로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일'을 꼭 그렇게 중늙은이들만 차지하라는 법은

없다고, 철학자가 할 노릇이란, 그 체계를 가지는 일이 아니라 가져보려고 노력하는 일이기 때문이라고.

그 노력은 무릇 악착같아야 해서, 어떤 생각이든 래디컬하게, 즉 뿌리까지 깊게 파내려가지 않으면 별로 가치가 없다고.

 

 

3. 사랑에 빠진 영화, 영화에 빠진 사랑 / 강유정 / 민음사

 

"세대와 성별에 따라 고유명사는 달라지겠지만 사랑 영화들이 가리키는 추억의 질감은 유사할 것이다.

격정적 순간, 후회와 질투, 하얗게 지샌 밤들이 가득한 그런 영화들"에 대한 저자의 이야기를 내가 이미

봤던 영화들이 대다수로 더 공감하며 편안하게 읽었다.

저자는 들어가는말에서 "사랑에 대해 늘 옳은 답만 낸다면 그야말로 지리멸렬한 인생의 끝 아닐까?

오답이야말로 진짜 사랑을 찾아가는 가장 빠른 길일지도 모르겠다. 내 생의 시간을 빌려 내 몸을

관통했던 기억, 사랑이라는 것, 언젠가 태어날 아이들도 견뎌야 할 미래의 상처, 사랑, 사랑에 대해

묻고, 답해본다." 고 다부지게 썼다.

 

 

 

4. 웃음과 망각의 책 / 밀란 쿤데라 / 문학사상사

 

 

 

 민음사 판이 있지만 난 영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에서 꿈의 양식으로 등장한 장면과 비슷한

그림이 표지에 있는 이 책으로 골랐다. 벌거벗고 원을 그려 춤을 추고 있는 사람들.

저자는 전통적인 소설 기법에서 벗어나 일곱개의 독립된 이야기가 변주하며 조국을 그리워하며

'웃음과 망각'을 주제로 그 역사를 회고하고 뒤집는다. 그는 1963년 이후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침공으로 좌절될 때까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고,

1968년 공직에서 해직되며 모든 저서 또한 압수 소각당했다.

나는 그중에서도 제5부 '리토스트'가 제일 인상적이다.

 

리토스트(Litost)란 다른 나라 말로는 정확히 번역할 수 없는 체코 말이다. 그것은 벌려진 아코디언처럼 무한한 느낌을

나타내며 비탄, 동정, 후회와 말할 수 없는 그리움 같은 감정을 모두 뭉뚱그려 넣은 말이다.(180쪽)

 

이 책은 사유와 통찰의 영역을 넓게 이끌어주면서 이야기와 인물이 반전하는 매력이 있다.

가령 '리토스트' 안에는 저자의 시학이 드러나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웃음은 우리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고 우리를 얼어붙은 고독 속에 떨어뜨리는 폭발이야.

농담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가로놓인 장멱이요, 농담은 사랑과 시의 적이야. 그러므로 되풀이 하네만 잊지 말게.

보카치오는 사랑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작자야. 사랑은 웃음거리가 아니네. 사랑은 웃음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어."

(218쪽)

이는 시인들의 모임에서 시인 페트라르카가 "사랑은 시요, 시는 사랑이라네." 에 이어 부연한 말이다.

 

 

 

5. 올리브 키터리지 /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문학동네

 

이슬람교도에 대한 약간의 편견만 빼면 너무나 좋은 소설.

단편 형식이지만 다 읽고 나면 마치 장편을 읽은 느낌이다.

13개의 이야기 모두에 올리브 키터리지가 나오는데 다 읽고 나면

결코 쉽지 않았지만 충분히 이해되는 그녀의 일생이 그려진다.

섬세하고 아름다운 문체에 과감한 생략과 함축, 소소한 사건들의 인과성과

세월을 몸으로 새기고 살아온 평범한 사람들의 개성있는 묘사, 쓸쓸하면서도 가슴 뜨뜻한 생의 이면,

그리고 생의 느즈막에 찾아오는 놀라운 발견.  조용필 노래가사처럼, 착한 당신 외로워도 인생이란 따뜻한 거야. 

13개의 단편 이야기에 푹 빠졌다.

 

작가는 "일상적인 매일의 삶이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존중할 만한 것이라는 점"을

독자들이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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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11 08: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1 21: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hnine 2012-01-11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 5위 상품이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
지난 번에 아이와 투탄카멘 전시 다녀오고 나서 이집트 여행을 꿈꾸고 있는 중이라 읽어보고 싶던 책이랍니다.
받아서 직접 보니 기대보다 더 재미나고 아름답기까지 한 책이네요. 따뜻한 말씀도 정말 좋고요 ^^
고맙습니다.

프레이야 2012-01-11 21:01   좋아요 0 | URL
우와~ 다린이랑 이집트 여행, 생각만 해도 제가 다 설레네요. 꼭 이루시길요.
나인님 덕분에 아름다운 책을 저도 알게 되었어요.^^

라로 2012-01-1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 아직 안 읽으셨더랬어요???
웃음,,,은 나도 읽어 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페이퍼에요.>.<
그나저나 책 많이 읽으셨구나,,,ㅎㅎㅎ
갑자기 생각한건데,,(늘 갑자기 한 생각은 결실을 못 맺지만,,)
우리 한 달에 한 권은 같은 책을 읽으면 어떨까요???아니면 말구요,,,ㅎㅎㅎㅎ

프레이야 2012-01-11 21:08   좋아요 0 | URL
네, 아껴두고 있었지요. 전 그 책 표지도 참 마음에 들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필기체도.
올해는 안 읽어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책들을 만날 생각이랍니다.^^ 나랑 인연맺자 뭐 그런.ㅎㅎ
꼭 때에 맞춰서 마음 가고 손이 가는 책이 있더라구요.

갑자기 한 생각, 좋아요. 어떤 방식으로 할까요?

라로 2012-01-11 23:36   좋아요 0 | URL
우리 둘이 책 하나를 골라야지요, 뭐,,,ㅎㅎㅎ
추천해서 서로 의견이 조율되면 그 책을 읽는 걸로???

프레이야 2012-01-12 08:13   좋아요 0 | URL
나비님, 바뀐 대문이미지 이뽀~
그럼 이번달엔 우리 둘 다 갖고 있는 '걸작의 공간' 어때요? ~~~~

숲노래 2012-01-11 18: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도 책도 아이들도
이웃도
내 보금자리도
좋은 나무와 풀과 꽃도
모두 아름다운 인연이구나 싶어요

프레이야 2012-01-11 21:09   좋아요 0 | URL
얼마나 많은 '인'이 겹쳐야 '연'이 되겠는지요.
사람도 책도 그 모든 것들이.. 새삼 모든 인연을 귀히 돌아봅니다.

2012-01-14 23: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1-15 14: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