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부러워하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달리기 잘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춤을 출 수 있는 것. 나는 숫기가 없는 편이라 무대에 서는 걸 잘 못한다. 무대에 오르면 다리가 후덜거리고 눈앞이 아득하다. 작년부터 수필낭송회에서 활동하며 작은 무대에 몇 차례 서곤 했지만 어지럽고 휘청거리는 걸 견뎠던 것이다. 표현력도 부족한 부끄럼쟁이가 뭐하러 그런 걸 했는지 모르겠다. 아무짝에 쓸모없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된다. 내 선의와 열심이 어이없게도 남에겐 조롱거리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과시욕은 인정하지 않고 내가 드러나는 걸 마뜩치않아 하는 사람의 말도 내겐 스트레스다. 난 그저 조용히 혼자 소리내어 읽는 게 적성에 더 잘 맞다. 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삼천포로 빠졌다. 아무튼 무대체질은 아니란 얘긴데 내면엔 무대에 오르고싶은 욕구가 잠재되어 있는 건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런 허영기, 조금은 가지고 있을 거다. 춤 얘기 하다가 삼천포로 빠진 이유는 '무대' 때문이다. 한마디로 무대체질은 아니란 말.
아무튼 난 온몸으로 우는 춤사위를 보면 전율이 인다. 언젠가 전생테스트를 재미삼아 해 본 적이 있다. 전생에 무희였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이 참 좋다. 그래서 그 이후로 전생 얘기가 나오면 나는 무희였더라고 말하곤 한다. 내 속의 감춰져있는 끼와 에너지가, '무희'라는 말 하나 떠올렸을 뿐인데도, 폭발할 것 같아 짜릿해지는 것이다. 그리곤 행복한 상상을 하곤 한다. 특히 나는 부르카 속의 아라비아 여인, 아니트라가 되어 상상의 춤을 추는 꿈을 꾸어보기도 한다. 음악회에서 '아니트라의 춤'을 들으며 그런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무희였다면 이생에서 난 왜 그렇게 춤이 안 되지? 하다못해 재즈댄스도 에어로빅도 조금하다 그만 두었던 전례가 있다. 전생과는 반대로.. ^^
무희의 꿈! 그저 꿈일 뿐이지만 그래서 난 무용수들을 보면 한없이 부럽고 탄성이 나온다.
희령이와 친구 둘을 데리고 부산시립무용단 제60회 공연 <연산, 동백꽃 붉은 눈물이 되어>를 보러갔다.
객석은 꽉 찼고, 학생들의 공연예절은 말이 아니었다. 막이 올랐는데도 웅성거리고 무용보다는 문자질에 열중하며 떠들고.. 그래도 차츰 몰입할 수 있었던 건 화려하거나 단조로운 무대미술과 한국미에 현대적으로 해석된 멋진 의상, 무용수들의 열정적인 몸짓 때문이었다. 연산이 고뇌로 몸부림치는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몸짓에 가장 몰입되었다. 우리네 감정 중 즐거움도 그렇겠지만 괴로움이야말로 특히 저렇게 몸으로 요동치며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웅장하고 감각적인 음악도 한 몫을 하였다. 프롤로그와 5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구성된 내용을 팜플렛에서 미리 조금 읽혀두고 무용을 보게 했다. 그래도 다보고 나오며 희령이 친구 하나가 하는 말 "대사가 없으니까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어요." - "괜찮아 보고 느꼈으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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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 의도>
서른... 제왕이었으나 역사에서는 버림 받고... 군주였으나 시대에 의해 지워져 버린... 그 서른이라는 짧은 나이에... 마치 동백꽃처럼 붉은 꽃잎을 후드득 땅에 떨구었던 연산을 그린다. 수많은 피를 바람처럼 몰고 다녔고, 그래서 폭군의 상징으로 후대에 회자될 수밖에 없었던 그에 대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떠올리며, 회환과 절망과 통탄의 눈물을 흘렸을 인간 '연산'을 그리고자 한다. 근자에 들어 연산은 통념적인 이미지가 아닌 다른 인물이었을 수 있다는 학계의 연구 결과물들이 세상 밖으로 그 모습을 내밀고 있고, 그 시점에 맞춰 무대에 '연산'을 올리게 됨 또한 다행스레 생각한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관료 세력과 격렬하게 충돌했고, 급진적인 변화를 시도하다 기득권과 마찰을 일으켰으며... 왕권강화의 지나친 집착이 피바람을 불러일으킨 임금이었으나 임금이 아니고... 영국안민(寧國安民)... 나라와 백성의 안녕을 추구하기도 하였으나 폭군으로만 후세에 전해질 뿐인 인간 '연산'을 찬찬히 들여다보고자 한다. - 부산시립무용단 예술감독 겸 수석안무자 홍기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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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회한을 보듬다 (연산의 회상과 맞물려 폐비 윤씨의 죽음을 상징으로 함)
제1장 역사, 그리하여 (연산의 왕위 등극과 안정된 치세, 평화로운 서정을 중심으로 구성됨)
제2장 시. 시와 여인 (인간 '연산'에 대한 성찰. 왕권강화를 빌미로 臣權과 마찰이 생기기 전의 연산은 시와 풍류를 즐겼으며, 가장 사랑했던 여인 '녹수'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맞이한다)
제3장 비운의 함구령 (반목과 대립. 왕의 지위에 쉼없이 도전 받던 연산에 대한 고뇌에서 출발하여, 폐비 윤씨의 사건을 접한 후, 파괴되고 함몰해가는 자아에 대한 구체적이며 섬세한 묘사)
제4장 폭정. 폭정과 사화 (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에서 가장 끔찍하고 처참한 사화로 기록된 갑자사화에 대한 묘사)
제5장 연산. 연산의 눈물 (연산의 회한과 중종반정에 의해 강화도로 유배되는 고초에 대한 이미지)
epilogue 폐왕 (130여 편의 시를 남긴 연산군은 30세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도 영화와 드라마, 소설의 화두가 될 만큼 연산군의 실체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셈이다. 이 scene은 그런 연산에 대한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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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은 하나의 이미지로 시작해서 그 이미지로 이어지며 끝을 맺었다. 시종 붉은색 이미지는 이어진다. 사모, 사랑, 정열에서 피와 눈물로 그리고 사멸하는 동백꽃잎으로... 연산이 폐위 직전에 쓴 詩를 덮고 있던 붉은 동백꽃잎들이 한 장 한 장 떨어져 내리는 장면이 길게 이어지고 막이 내렸다. 정염과 분노의 눈물로 그려진 붉디 붉은 색감이 추락과 소멸의 이미지와 더불어 강렬했다. 마치 묘비석을 덮은 이슬이거나 먼지이거나 눈물이거나 바람 몇 줄기이거나...
희령이랑 아래 시를 읊조리며 나왔다. 의미를 알겠다는지 고개를 끄덕이는 우리 통통공주^^ 공연 오기 직전에, 처음 친 토익 점수 성적표를 받아봤는데 625점 나와서 지금 자신감 충천이다. 아자아자! 990만점에 도전해보고 싶어하는 애살맞은 여우.^^ 엄마에겐 네가 또 하나의 힘이고 위로다. 고마워.
人生如草露 (인생여초로)
會合不多時 (회합부다시)
인생이란 풀잎에 맺힌 이슬과 같아
만나고 또 만나는 날이 많지 않으리
- 폐위 직전 쓴 연산군의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