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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휴가 ㅣ 알맹이 그림책 6
구스티 글 그림, 최윤정 옮김 / 바람의아이들 / 2007년 7월
평점 :
올여름 휴가는 그다지 즐거운 마음으로 근사하게 보내게 될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아이들을 위해 어디론가 데려가주긴 해야 하는데, 아직 어디로 갈지 정하지도 못하고 있다. 걷기 싫어하고 고생스러운 환경도 싫어하는 요즘 아이들, 어디를 데려가든 그곳에 수영장만 있으면 좋다는 식이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전국의 땅이 바캉스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른다. 숙박비는 껑충 뛸 것이고 산과 바다가 인파로 물결칠 것이다. 그런 중에도 사람이 덜 붐비고 청정한 곳에서 유유자적하며 나만의 휴가를 보내고 싶은 게 또 바람이기도 하다. 과연 어디가 있을까? 과연 파리는 어디로 휴가를 갔을까?
내가 최윤정님을 신뢰하는 근거는 뭐라 꼭 집어 말할 순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이가 자주 접하지 못하는 나라의 그림책과 동화를 발굴해 통통 튀는 언어로 번역하여 소개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이가 쓴 '슬픈 거인'을 좋아한다. ‘바람의아이들’에서 나온 알맹이그림책 시리즈 6권 <<파리의 휴가>>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구스티(Gusti)가 쓰고 그린 유쾌한 그림책이다. 4,5세 전후의 아이들이 보면 좋을 듯한 이 그림책은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혐오동물, 파리? 그리고 사람만이 갖는, 설레는 휴가? 어쩐지 얼른 함께 연상되지 않는 두 낱말이 간결한 이야기로 엮이면서 발랄한 웃음을 자아낸다. 능청스럽게 끌고 가는 이야기 들려주기 방식과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글과 그림도 한몫 제대로 한다.
파리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가가 시작되자 수영하러 가기로 결심하고 방을 나선다. 준비성도 뛰어나 바캉스용품을 골고루 챙겨간다. 썬크림까지 챙겨간다니 준비성 없는 나보다 낫다. 조심성도 있어서 물에 첨벙 뛰어들기부터 하지 않고 한 발씩 담구어 물온도를 먼저 본다. 드디어 다이빙! 다이빙 포즈가 멋지다. 배영을 하며 룰루랄라 노래도 잘 부른다. 여기서도 수영을 못하는 나보다 낫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파리다. 그러나 이야기가 이렇게만 이어지면 재미가 없지. 이제 파리에게 뭔가 시련이 덮친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시작하며 축구장만큼이나 어마어마한 게 떨어지고 무시무시한 파도가 인다. "우산도 안 가져왔는데.." 그렇다고 우리의 파리가 여기서 당할 것이냐? 죽을 힘을 다해 폭풍우 속에서 탈출에 성공한 파리의 귀에 들리는 한 마디란! 참, 기가 막힐 노릇이다. 불쌍한 파리 같으니라구. 이일로 파리는 다시는 수영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다니.. 위험을 무릅쓰고 덤벼드는 아이들과는 좀 다른 영악한(아니, 영리한) 파리다. 달아나면서, 가지고 간 수건까지 챙겨왔으니 똑똑하다할까, 야무지다할까.
이야기의 주인공은 파리가 사는 집의 아이가 아니라, 아이가 사는 집의 파리 한 마리다. 물론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가 파리에게 감정이입을 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그런 역할을 맡을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 파리는 현대판 영웅으로 보고 싶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작은 영웅심 같은 게 새까만 파리에게서 보인다. 하지만 영웅에 대한 생각을 전복시키는 점이 매력이다. 이 작은 영웅은 시련에 맞서기보다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긴박한 상황을 재치 있게 피할 줄 안다.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그것을 향유하려는 소시민적 영웅이다. 이야기의 구조도 시련과 극복의 과정이 절정을 이루는 영웅이야기의 구조를 따르고 있다. 누가 도와준다기보다 스스로의 용기와 지혜로 탈출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덩치로 보면 파리보다 엄청나게 큰 아이의 발이 마지막에 보이는데 파리는 이 아이의 말에 어처구니없어 하면서 다시는 자신의 행복이 위험에 처할 일은 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현명하다. 사방에 목숨을 노리는 것들이 포진해 있는 상황에서 파리는 목숨을 이어왔고 이제 느긋하게 휴가 한 번 즐기자는데 그것마저 어려움에 부딪히니 파리 신세가 참 말이 아니다.
파리를 사랑스럽게 그려 놓았을 뿐만 아니라 일러스트레이션이 독특하다. 콜라쥬 기법을 동원하여 천이나 단추, 벽지 같은 걸 이용했고 검고 굵은 윤곽선이 선명한 인상을 준다. 간결한 그림과 어울리게 짧고 쉬운 말로 어린 아이 눈높이에 맞춘 번역어휘도 마음에 든다.
행복!! 그것은 사람이든 파리든 추구하는 것이지만 향유하기란 쉽지 않은 일인가 보다.
나, 오늘 참 좋은 날이었다, 로 맺는 일기를 쓸 수 있다면 그런대로 행복한 하루가 아니었을까. 단순하게, 욕심없이.. 그런 하루의 연속을 기대한다면 너무 안이한가.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진 게 또 사람이고 파리인 것을.
그나저나 휴가계획은 세우셨나요? 가까운 곳에 물놀이나 가지요.
하늘에서 거대한 게 풍덩 떨어질 일은 없을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