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올해 구순이고 천식이 있지만 총기와 다른 건강은 괜찮고
시아버님은 82세를 일기로 얼마전 추석연휴를 며칠 앞두고 세상을 뜨셨다.
남은 날이 그리 많지는 않다는 걸 어른들을 뵈며 다시 생각하게 된다.
노인으로 사는 삶과 그 삶에서 떠나버린 노인의 마지막 얼굴은 모두
삶이 소중하다는 걸 잊을 만하면 깨우쳐 준다.
92세의 나이로 2년 전 영면하신 고교친구의 아버지이자 원로작가였던 선생님을 추모하며
평생 교육자로서 수필가로서 순한 삶을 살다가신 선생님의 세계를 발표했던 글이다.
잘 살아가는 삶, 잘 죽기 위한 삶에 대해 부쩍 생각해 보게 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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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0회 수필낭송회 / 이병수 수필가 작품세계 _ 2019.06.07. 금 _ 배혜경 발표원고
한 편의 수필이 완결되는 순간
수필은 어느 문학장르에서보다 작가의 가치관과 인생관이 잘 드러나는 글쓰기 방식이다. 작가의 삶과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태도도 여실히 드러낸다. 사람 따로 삶 따로 글 따로인 경우가 허다하지만, 글이 사람을 속일 수 없고 사람이 글을 속일 수도 없다는 쪽에 믿음을 두고 싶다. 그러한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또 다른 일이라 삶을 이어나가는 중에는 정확히 말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삶은 도덕적으로 올바르기를 본능적으로 채찍질하지만 방심의 순간에 곳곳에 도사린 유혹이 손을 뻗친다. 열심과 욕심의 경계가 모호하고 겸손과 교만의 경계도 교활하게 눈웃음친다. 그러니 수많은 수필가가 수필을 쓰며 숨을 쉬고 있는 중에는 결코 완결될 수 없는 글이 수필이 아닐까.
현봉 선생의 글을 다시 읽으며 시간을 거꾸로 돌려본다.
올해 2월 초 장례식장에서 뵌 영정 이전, 1월에 병원에서 정갈하게 환자복을 입고 계신 모습을 뵈었다. 그보다 한 해 전 2018년에는 望百기념문집이 내게 왔다. 증정이라는 도장을 꽝 찍어서 보내오신 그 책에는 가족사진과 여러 행사에서 찍은 사진들이 실려 한 사람의 역사를 축약해 주었다. 특히 오래된 흑백사진 속 청년 이병수의 형형한 눈빛과 맑은 얼굴이 애잔해 한참 들여다보았다. 2017년 8월에 친구는 아버지가 망백을 앞두고 책을 내고 싶어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장외손녀(친구의 맏딸)의 결혼식에서 선생님을 뵈었는데 온화하고 다감하게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늘 그렇듯 깊은 감명을 받았다. 기뻐하시던 얼굴이 어제 뵌 듯 생각난다. 일찍이 2008년 8월 통영에서 열린 제1회 연암수필문학상 시상식에 선생님은 사모님과 동행하셨다. 그때는 여고 3년을 한반에서 공부한 친구의 아버지인 줄 몰랐으니 모든 것은 나중에 드러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병수 수필가의 수필은 미사여구나 과시, 허방을 짚는 감상주의를 경계한다. 이는 그의 삶이 그러하듯 성실하게 주어진 임무를 다하고 깨어있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성찰하며 살아가는 인생길과 나란하다. 겸허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매사 베풀고 살아가려는 마음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최근작 <인생 하산길>은 “나의 산행 이력을 회고하면 40년이 넘는다.”로 첫 문장을 시작해 “나의 인생 하산길은 무언가를 베풀면서 올바른 사회발전에 한 줌의 부엽토가 되고 마지막 인생에 향기 나는 여운을 남기는 과정이고 싶다.”로 종결문을 짓는다.
<내 이름에 서린 사연>(2003년6월)에서는 네 가지 이름 – 아명(증도), 호적명(병수), 자(화열), 아호(현봉) -을 들어 자신에게 주어진 이름대로 인생을 살아내려는 정성을 피력한다. 특히 가장 마음에 들어 하신 ‘和烈’을 두고 이렇게 쓴다. “밖으로는 부드럽고 안으로는 매섭게 대하라는 처세훈을 암시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아버지의 숨은 소망이 DNA로 전달되었음인지 나는 평소에 남에게는 될수록 부드럽게 하고 나에게는 엄격하게 대한다는 생활방식을 나름대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런 태도는 단수필 <잔디와 클로버>에서도 “격앙된 거센 말 한마디는 평생 원수를 낳고 부드러운 말 한마디는 천냥 빚도 소멸시켜 준다.”고 쓰며 자신을 다잡는다. 40대 초에 성전암에서 삼천 배를 드리고 성철스님에게 얻은 법명 ‘현봉’을 정년퇴임 동기회에서 얼떨결에 아호로 쓰시기 시작하고는 ‘큰 봉우리’라는 뜻도 담긴 이름에 부끄러워하였다. 그리고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이름에 얼마나 부응하였나 되돌아보기를 반복하였다.
이병수 수필가는 60대부터 여생을 깊이 생각하고 정갈하게 죽음을 준비하였다. 웰 다잉Well-dying의 길은 웰빙Well-being이 아니라 웰 리빙Well-living에 있다. 평균수명이 연장되었지만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인간의 건강과 수명은 생활자세와 마음자세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매사 감사하는 마음, 사랑을 나누고 베푸는 삶에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
최근작 <나의 ‘92세 생존수명론’을 되돌아보며>에서 선생님은 “나는 이제 정말 ‘살 만큼 살았다’는 만족감을 느끼고 있으니 염라대왕에게 감사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고 밝혔다. 가야 할 때를 예측하고 받아들이는 유순한 마음자리에 존경심이 인다. 현자의 자세가 아닐까. 일찍이 1991년에 쓰신 <고사목을 바라보면서>에서는 “이제 인생의 정리기에 접어든 나는, 여기에서 우리 사람도 저 고사목처럼 자연의 섭리를 좇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주어진 분수대로 성실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라고 썼다.
현봉 선생은 1946년 1월 15일 이후 1992년 2월 29일 40여 년의 교직생활을 퇴임한 후 수필가로 등단하여 ‘이모작 삶이 아름답다’고 여겼다. 2009년 같은 제목의 글에서 “하잘것없는 쑥부쟁이 한 송이도 폭염과 풍우를 견딘 끝에 꽃을 피우고 맺듯, 우리 인간도 청장년 시절의 일모작 인생도 값지지만 그 이후 이모작의 삶에서 보다 알찬 결실로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이니 이모작의 삶이 더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로 맺으며 글쓰기의 열망과 인생 후반기 삶의 열정을 피력했다. 그러면서도 늘 욕심이 아닐까 자신을 절제하고 현실적으로 돌아보며 과하지 않은 삶의 양식으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
선생이 글을 쓰는 시간을 얼마나 행복해 했는지는 <내가 글을 쓰는 시간>에 잘 드러난다. 2010년의 이 글에는 “내가 글을 쓰는 시간은 마음을 비우고 나를 성찰하고 참회하는 시간이다. 내가 어디로 어떻게 걸어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상념을 가다듬는 시간이니 경건한 시간이요, 자신과 소리없이 싸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어쩌면 나에게 있어 가장 진실한 시간이요, 값진 시간이기도 하다. (중략) 특히 수필은 몸소 자신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욕구의 발로로 쓰는 것이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문자로 표현해 독자에게 공감을 주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으니 즐거움과 보람을 함께 누리는 시간이다.”라고 썼다. 건망증으로 정신이 종종 흐려지는 자신을 인지하며 <문인의 절필에 대하여>에서 문인의 절필은 계획적인 게 아니라 자연발생적으로 하게 되니 지금 당장 아예 절필을 택하기보다 원고의 양을 조금씩 줄이고자 했다. 선생은 ‘자기 체험의 아름다운 서정과 지성을 조화롭게 표현하는 문학’이 수필이라고 생각했고 그런 점에서 당신의 글이 독자에게 누가 되지 않기를 바랐다.
단수필 <노래방 갑시다>에서 “사명감적 인생관에서 낭만적 인생관으로 전환”한 노년의 자신을 짚으며 이마저도 노탐이 아닌가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겸손함을 잃지 않던 현봉 선생, 3대째 훈장이었지만 고리타분하게 가르치려 들지 않고 오로지 자신에게만 회초리를 드신 선생은 이제 시간을 거꾸로 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고향 산청 생비량면의 느티나무처럼 넉넉한 인품과 순수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마무리’를 실천한 이병수 선생님의 수필은 비로소 완결되었다. 살아오신 삶의 궤적이 그것을 빛나게 완결시킨 것이다.
“나도 이제 공직생활에서 물러나 희수도 팔순도 지나고 이제 백수를 바라보면서 의젓하고 포용력 있고 베풀면서 살아가는 느티나무처럼 살다 가기를 희구하면서 여생을 마무리했으면 하는 간절한 소망을 가져본다.” - 이병수, <느티나무처럼> 201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