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숫자는 내게 늘 아리송한 활물이다. 그래서인지 현실감 제로에 속세를 떠난 인간이라는 말을 친구한테 듣는다. 연도와 날짜 같은 건 기억수첩에 자명하게 남을 때가 많다. 올해 2020은 7080 뭐 그런 것처럼 느낌 좋은 운율을 준다. 새해 해맞이는 지인들이 보내준 일출 사진으로 대신하며 상상에 맡겼다. 기억에 찍힌 몇 개의 역시 자명한 상으로 가능하다. 나쁘지 않다.
2. 다들 해맞이하러 나갔는지 나갔다 귀가해 늦잠을 자는지 새해 첫날엔 공항으로 가는 길이 차도 별로 없이 슝슝 뚫려 있었다. 연말에 태어난 큰딸아이가 며칠 휴가 와 있었다. 그전날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았는데 급히 처방책을 써서 좀 괜찮은 상태로 돌아가서 다행이다. 혼자 떨어져 출근도 해야 되는데 아프면 마음이 안 좋을 뻔했다. 에구.
오후에 고양이숨숨집을 찜해 놓은 분이 가지러 오겠다고 연락이 왔다. 급히 커다란 비닐에 포장하여 버스정류장으로 들고 나갔다. 우리집 냥이는 반기지 않는 물건인데 필요한 곳에서 쓰이게 되었다. 어떤 분이 나오실까. 20대 여자분일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보다 나이 드신 인상 좋은 여자분이 자기는 캣맘이라며 인사했다. 집에 냥이 10마리에 바깥에서 돌보는 냥이까지 더하면 80마리 정도가 된단다. 가방에 물과 사료를 늘 넣어다닌다며 보여주셨다. 이 숨숨집도 추위를 견뎌야 하는 냥이들을 위해 곳곳에 놓아주려고 구하는 거란다. 핫팩도 깔아주고 캣맘들끼리 모여 활동도 하고 중성화 수술 건으로 구청에도 엊그제 다녀왔다고. 나는 들기 좋게 테이핑하여 손잡이를 만든 걸 건네주고 되돌아가시는 반대편 버스정류장을 가르쳐 드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밝은 얼굴로 돌아서 총총 뛰어가는 뒷모습을 일분 정도 바라보았다. 내 등이 다 훈훈해졌다.
3. 미셸 투르니에의 사진에세이 <뒷모습>을 좋아한다.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도 투르니에의 글도 생경하고 아름다운 책이다. 어떤 언어는 연달아 반복적으로 내게 온다. 마치 나 좀 얼른 알아채고 느끼고 담으라고 말하듯.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는데. 여울님이 쓰신 <화영시경> 리뷰를 통해 미셸 투르니에가 언급한 점자책 관련 문장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2019 마지막 날, 겨울특강 첫 시간에 투르니에의 이 글을 다시 자료에서 만나게 되었다. 반가웠다. 그리고 투르니에 산문집을 바로 주문했다. 원제에 더해 번안제목에는 “긴 침묵”이 보태졌다. 번역자 김화영 님의 서문처럼 “그의 산문은 방만한 수필이 아니다. 그것은 등푸른 생선이다. 구워서 밥상에 올려놓은 생선이 아니라 이제 막 아침 빛을 받으며 바다위로 튀어오르는 생선이다.” 그리고 “그의 시적 산문은 때로는 의식속에 도전적인 불을 켜고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때로는 일단 책을 접어놓고 깊고 멀리 몽상의 길로 접어 들며 이미지의 신선함에 참가하기를 독자에게 요구한다.” 투르니에는 24년생이다. 2016년 91세를 일기로 영면하였다.
손끝으로 만져서 온몸으로 느끼는 문자화된 언어, 그 육감적 독서를 물론 투르니에의 문학적 은유의 표현으로 볼 수도 있지만 실제로 점자읽기와 점자쓰기는 그리 낭만적인 일이 아니다. 여울님과도 잠시 이야기 나누었지만 신비스러운 읽기라 보기에는 그 고충이 중노동에 버금간다. 텍스트 이해 이전에 문자 자체를 판독하기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아주 어릴 때 점자를 배워 오래 훈련해온 경우는 좀 낫지만 후천적 장애로 나이 들어 점자를 배워 활용하기에는 끈기와 노력이 요구된다. 나는 실제로 두툼한 점자 자료물의 볼록한 점을 양 손으로 더듬어 더듬더듬 글자를 해독하는 그분들의 지극한 얼굴과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처음 어떤 생각을 했던가. 경이로웠다. 두려웠다. 감각을 다해 더듬듯(투르니에는 애무,라는 표현을 썼지만) 시를 읽는데, 그 목소리가 한 발 한 발 어둠 속을 조심스레 나아가는 발걸음 같았다.(실제 그럴 때에도 주변 사물이나 벽을 손으로 더듬어 나아가신다.) 두 눈으로 읽어도 오독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점자는 읽을 때의 방향과 쓸 때의 방향이 좌우 반대다. 점자도서관에는 점역봉사를 오래 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나같은 낭독봉사자보다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파묵이 말한 “바늘로 우물을 파듯”이 비유가 아닌 실제다.
더구나 김화영 번역의 이 책에는 '장님'이라는 단어가 쓰여있다. 초판 1998년도에는 그렇다해도 2018년 2판9쇄에서는 '시각장애인'으로 썼어도 되지 않았을까. 실제로 나는 그분들과 하는 옛이야기 스토리텔링 수업에서 '장님'이라는 단어를 책에 있는 대로 발화했다가 낭패를 당한 적이 있다. 부끄럽고 아팠다. 수업은 그대로 녹음되어 강의실로 나오지 못한 많은 회원들이 온라인을 통해 들을 수 있게 업로드되는데 한 분이 어느 회차 녹음분을 듣다가 그 단어에 그만 가슴을 찔려 눈물을 쏟았다는 것이다. 그분은 60대 남자분으로 30대에 실험실에서 비이커가 폭발하는 바람에 눈에 박혀든 유리파편으로 시력을 잃은 분이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늘 소년같고 열정적으로 읽고 쓰며 자신을 채찍질하시는 분이었다. 그 학기에는 나올 사정이 안 되어 집에서 듣는 걸로 내 목소리와의 만남을 이어오던 중이었다. 내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오셨고, 나는 실수를 깊이 사과 드리고 마음을 풀어드렸다. 이메일로 솔직한 마음을 전해 주신 것도 고마웠지만 나를 이해하시고 내 진심을 알아주셔서 감사했다. 내게 여러가지로 깨달음을 준 사건이었다. 책에 그렇게 쓰여 있어도 내가 다른 말로 바꾸어 들려드렸어야 했다. 사실 입 밖으로 그 단어를 내놓던 순간, 잘못을 알았는데 즉시 바로잡지 못했다. 그분들의 표정을 얼른 살폈고 희미하게 웃고 계셔서 그만 이해해 주시는 걸로 받아들이고는 슬쩍 넘어가버렸는데 정작 현장에 계시지 못한 분으로서는 화나고 아팠을 것이다. 그래서 투르니에의 이 좋은 산문집은 음성도서로 낭독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듣다가 그 단어에 가슴 찔려 덮어둔 눈물샘 터져버릴 분이 있을 것이기에. 정**님, 새해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받으세요.
4 장락무극
2019 12월 라이카클럽 열번째 전시회가 서울에서 열렸다. 이번엔 2020년 2월 중순부터 뉴욕에서도 열릴 거라 포스터가 두 가지 언어로 나왔다. <화영시경>의 사진작가가 출품한 사진은 아래, 나무문이다. 김화영 님이 투르니에의 산문집을 일러 "시적 몽상이 개간해놓는 침묵의 넓이와 자유로움을 유감없이 드러낸다"고 했는데, 이 사진은 꾹 다문 입술처럼 닫힌 문과 그 틈으로 비추이는 햇살의 시적 몽상이 침묵의 넓이 만하다. 그 빛의 언사가 성성하다. 올해 내게 올 이미지들도 장락하고 무극하길^^
수구꼴통 노문우님이 새해 인사로 자필 “長樂無極”을 보내주셨다. 옳고 그름의 잣대에 한치 흔들림이 없는 그분들을 보면 한편 다른 생각이 든다. 부디 즐거이 오래 건강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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