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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멀 크래커스
한나 틴티 지음, 권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평점 :
미국작가 한나 틴티를 처음 만나게 된 단편소설집 ‘애니멀 크래커스’는 상당히 강렬한 인상으로 남는다. 작가의 말을 빌자면, 그녀가 동물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그들은 인간과는 달리 본성과 불화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짧고 단호한 한 마디가 이 소설집의 열한 가지 이야기들이 독자와 공감의 현을 켤 수 있는 코드라고 생각한다.
심상치 않은 동물냄새(동물원에 갔을 때의 그 누린내와 축축하고 키퀘한 냄새들을 기억하는 한)가 코를 찌르는 이야기들을 마주하기 전에, 시커먼 그림자의 형상으로 그려놓은 책표지의 여러 가지 동물들을 들여다보면 어느 한 가지도 정적으로 보이는 것이 없다. 꿈틀거리거나 물구나무를 서거나 울부짖거나, 아니면 묘한 동작으로 춤을 추듯 몸을 비틀고 한 손에 전화기를 다른 한 손에는 해골을 들고 있는 털복숭이 짐승도 있다. 그리고 가장 아래에 놓여있는 한 자루의 권총은 한 방에 이 모든 걸 잠재울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동물의 본성은 천생적으로 어느 한 곳에 혹은 어느 한 때에 정착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겉보기에 아무 문제가 없거나 행복해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동물과자 상자가 하나씩 들어가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지만 맛은 다 똑같은 과자들을 와삭와삭 씹으며 즐거워했던 어린시절의 기억 뒤로, 누구나에게 감추어져 있음직한 일들을 불러온다. 그 상자를 열면 닫아서 눌러두었던 온갖 불쾌한 경험들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데 그것은 주로 유년의 상흔들이며 성장의 통과의례 혹은 인간의 천형과도 같은 열등감, 외로움, 끝 모를 곳을 향한 그리움 같은 것이다. 여기서 그리움이란 인간의 본성을 잊은 척하며 살아야 하는 우리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감정일 것이다. 사랑하고 싶고 사랑 받고 싶은 본성을 어찌 숨길 수 있단 말이냐.
작가가 현미경의 눈을 갖다 대고, 해부하고 메스를 가해서 들어내려고 하는 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고통의 한 자락인데, 그것들은 여태껏 의도적으로 숨겨졌거나 왜곡되었거나 괴물처럼 돌연변이 하여 현재의 삶을 굴절시켰다. 다양한 부류의 인물들은 너나 없이 괴기스러운 취미와 불유쾌한 습관을 갖고 있으며 어딘가 텅 비어있거나 비틀려있었다. 그들 현재의 삶를 규정하는 것들은 어쩌면 불명확한 외부조건들이고 이것들은 아무런 선택을 할 수 없게 하는 무력함으로 비친다. 혈육, 부부, 연인이라는 인연의 관계에서 빚어진 애증의 양상이 그로테스크한 삶의 성질을 보이지만 작가는 그들 미래의 삶을 그나마 절망적으로는 두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희미하나마 희망의 빛 같은 게 보인다는 점에서 길고 어두운 터널의 출구를 찾아내는 작가의 눈에 한 번 더 눈이 간다.
각각의 단편마다 동물들을 등장시켜 인간의 변이된 내면심리와 비뚤어진 욕구를 강력한 이미지의 구체물로 선사한다. 그것들은 지고한 관념이거나 호흡하지 못하는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서 꿈틀거리고 숨쉬고 팔딱대는, 목숨 있는 것들이다. 우리 안에 욕망이 살아서 호흡하고 자란다는 전제는 그것을 달래어 잠재우거나 얼러서 몰아내는 데에 이성적인 면보다는 감정적인 요소가 훨씬 호소력을 띤다는 말처럼 들린다. 다소 구토가 일 것 같은 묘사들이 적나라하게 나오는데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같은 느낌과 비슷하면서, 인간의 본성을 이보다 더 적절히 표현하기 위한 상징도 없지 싶다. 고딕풍의 음산함이 감도는 포우와 다른 점은 짐승 같은 본성을 마주하는 작가가 갖는 연민의 시선이 이야기를 읽고 나면 온기로 남아 여운을 준다는 사실이다. 내 안의 고름을 보는 것처럼 그것을 툭 건드렸을 때 온몸으로 전율이 번지며 잠시 불편한 심기를 감출 수 없지만 결미에서 보여주는 애틋한 여백의 정서와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 충분히 공감을 불러온다.
특히 여성 특유의 섬세한 '인간 읽기'가 미려한 감정의 공감대를 포착할 수 있어서 잔인한 묘사가 오히려 위악의 도구처럼 보일 정도다. 예를 들어 ‘애니멀 크래커스’에서는 장애가 있는 딸을 위해 쓰러져서 묻혀버리고 싶은 자기 자신을 추슬러 삶의 용기를 갖는 불운한 남자가 코끼리와 나란히 나온다. ‘보존’에서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곰에 빗대며 아버지에 대한 절절한 정을 보이는 딸이 감동을 준다. 그리고 ‘홈 스위트 홈’에서는 모든 걸 잃은 외로운 여인이 자신 안에 잠재하고 있는 모성애로 고통을 극복한다는 사실이 눈물 난다. 그 외에도 각 이야기마다 자신 속의 황량한 벌판을 스스로 돌보고 개척하는 인물들의 모습이 형용할 수 없이 쓸쓸하고, 진실하다.
작가가 특히 초점을 두는 것은 현대의 ‘가족’이다. 어딘가 온전치 못한 가족, 비밀스럽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가족들의 양태를 통해 가족이란 이름으로 추구해야할 것들에 대해 질문한다. 광기의 사랑, 질투, 외도, 아버지의 부재 혹은 부모의 정신적 부재, 사랑으로 인힌 애증의 갈등, 정신적이며 육체적인 폭력 같은 것들이 한 인간의 정신세계를 얼마나 비틀어놓을 수 있는지, 섬뜩하다. 그래서 작가는 동물의 이름을 빌려 본성을 이야기하려 한다. 낯설고 납득하기 어려운 인간들의 이야기가 어찌 보면 우리네 감추어진 이야기들을 은밀히 담고 있어, 그것들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우리 얼굴을 강타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은 때로 비뚤어져있고 난폭하고 기묘하기도 하여 상대에게 투영될 때 예상치 못한 형태를 띠며 부메랑처럼 반격을 해오기도 한다. ‘폭력의 집’에서처럼 현대인의 가정에는 ‘방이 너무 많’다. ‘미스 월드론의 붉은 콜로부스 원숭이’를 보면 해답은 어느 정도 보이는 것 같다. 자연으로 찾아들어간 미스 월드론은 내재하던 야성의 본성과 손잡고 행복해 보이는 방랑을 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숲으로 들어온 후 미스 월드론은 크게 변했지만, 윌로비는 사람들이 야생의 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하도 많이 보아서 익숙했다.(p281)" 미스 월드론처럼 적극적으로 아프리카의 숲을 찾거나, 도심의 동물원에서 일하거나 혹은 집에서 동물을 키우거나, '당신 삶의 뱀을 다시 살아나게 하기' 위해 뱀을 튀겨서 변심한 애인에게 먹이는 등, 인물들의 기괴한 행동들을 통해 작가는 직접적인 자연이거나 자연적인 본성만이 인간의 상처 난 자국을 꿰맬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니 본성과 불화하며 살 수밖에 없는 현대인들에게 비극은 필요충분조건인지도 모른다.
열한 편의 단편들이 모두 기묘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서술은 시간의 역순에 충실하다가 현재로 돌아온다. 양파껍질을 벗기듯 한 꺼풀씩 드러나는 인물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들의 상처와 고통에 놀라게 되고 심각한 연민이 뒤따른다. 반전의 묘미 또한 흥미롭다. 그런데, 단 한 군데의 오자를 지적해야겠다. “상당히 좋은 소리군요. 하지만 우리 수탉의 목소리 톤이 더 놓아요. 오, 하는 부분에 비브라토가 더 들어가고요.”(p226)에서 ‘놓아요’가 아니라 ‘좋아요’일 것이다.
한나 틴티의 어조는 강직하고 건조하고 스타카토 같지만 가는 비브라토가 결미마다 들려 메마른 바람소리를 내며 울린다. 우리는 비브라토 그 너머의 작은 희망을 보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