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성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3월
평점 :
절판


 

작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오르한 파묵. 그가 쓴 수상연설문을 읽고 나서 평소 '바늘로 우물을 파듯' 글을 쓴다는 터키의 한 작가에게 더욱 호감이 생겼다. 하나의 글로서도 완성미를 갖춘 긴 연설문의 제목은 ‘내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었다. 작가에게는 영감(靈感)의 보고이기도 했던 그 가방에 파묵은 자신의 수상에 대한 헌사를 드렸다. 수상한 사람의 글을 찾아 읽는 편이 아니지만 지적이며 인간적인 매력을 풍기는 이 작가의 작품을 몇 가지 골라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마음 가는 제목으로 ‘새로운 인생(1994)’, ‘내 이름은 빨강(1998)’, ‘눈(2000)’ 그리고 1985년 작인 <하얀 성>을 맞이했다. 연대순으로 읽어보려고 했지만 <하얀 성>의 책표지가 먼저 마음을 끌었다. 소리를 삼켜버린, 백설로 덮인 것 같은 미지의 성 위로 침묵의 병사들이 줄을 지어 오르고 있고 탑의 꼭대기는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계단은 뫼비우스의 띠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저 아래로 계단 한 자락에는 병사 한 명이 일행과 떨어져 앉아있다. 성 아래의 어떤 풍경을 보며, 무슨 상념에 빠져있는 것일까.


흔히 파묵의 작품이 다루는 주제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견에 작가는 ‘아니다’라는 말로 일축하고 있다. 작가의 말에서 ‘이제 언급할 때가 온 것 같다. 인간과 문화를 서로 구분하기 위해 행해졌으며, 앞으로도 행해질 분류 중 하나인 동서양 구별이 실제 얼마나 적합하냐는 것은 물론 <하얀 성>의 주제가 아니다.'라고 밝혀두었다.(p261) 하지만 하나의 작품은 다양한 프리즘을 통해 해석할 수 있고 그 활동 자체가 독자의 즐거운 권리이기도 하다. 작가가 부인하는, 그러한 주제에 대한 독자의 인식이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는 표식이 작품 전반에 나타나 있다. 터키인과 이탈리아인의 두 인물을 오랜 세월 함께 지내게 한 구도가 먼저 그런 해석을 낳게 한다.


부분적으로 혹은 전반에 걸쳐 동서양의 종교, 문화, 학문을 넘어, 동양과 서양이라는 소우주 간의 대립과 교류, 화합이 취하고 나아가는 양상들을 조합해 볼 수 있다. 호자(터키인)와 나(베네치아인)는 일별로도 서로가 닮았음을 알지만 쉽게 마음을 트지 못하고 적대시하며 서로를 탐색하고 긴장한다. 서로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내심 상대를 이용하려는 마음도 버리지 못한다. 이들이 책상을 마주하고 앉아 그들의 지난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글로 쓰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들의 사소하고 순연한 유년생활, 심층의 죄의식과 욕망, 꿈이 쏟아져 나오고 그속에는 과장과 환상이 섞여 존재한다. 작가는 이들의 오랜 동거와 몇 번의 이별이라는 긴긴 인연의 고리를 보여주며 이들은 결국 필연으로 맺어진 관계임을 말한다. 상대를 닮아가려는 건 몰락을 의미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은 시나브로 동일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 쪽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서양의 문제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작가의 긍정적이고 균형 잡힌 세계관과 동시에 동양에 대한 자부심을 비추어 봄직하다.


<하얀 성>이 이렇게 명료한 표피만을 드러내는 소설이라면 표지의 그림이 내뿜는 강력한 자성에 어울리지 못할 것이다. 작품 전체에 보석처럼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은유와 상징들 중 몇몇은 이해가 되지만 쉬 이해되지 않는 것들도 있었다. 예를 들자면 17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터키에 돌연히 번진 흑사병 같은 것이 그렇다. 인간이 품는 죽음과 종말에 대한 두려움을 빗대기 위한 소도구로 보인다. 짧지 않은 서문으로 시작하여 이야기의 개연성을 강조하면서, 긴박한 분위기를 만들지도 않고 시종 차분한 어조로 끌고 간다. 이야기에 극적인 구조를 굳이 장치하려고 하지 않고 '나'와 호자, 파디샤가 만들어내는 삼각의 긴장속으로 서서히 빠져들게 한다. 마지막 장에서는 ‘나’와 ‘호자’가 동일시되어 '나'와 '그'가 구분되지 않는 상황으로 휘몰고 간다. ‘호두나무 높은 가지에 긴 끈으로 묶은 그네 하나가 희미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는 것처럼, 앞에서 펼쳐진 기나긴 이야기들의 파노라마를 얼른 감지되지 않는 율동감으로 그리게 되며 내 마음속에 그네 하나가 달강거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 복선이 장치되어 있었지만, 점점 빨려 들어가고 있다는 걸 읽는 내내 체감하지 못했다. '서로의 삶을 바꾼 두 사람 이야기'! 소설의 끝에서 그들이 도치되어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조용히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다’라는 후렴구가 머릿속에서 맴돌아 괴로워하는 호자에게 주인공 ‘나’는 ‘나는 왜 나인가’를 자문하라고 충고하지만, 결국 작가는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나는 나이기도 하고 타인이기도 하지 않던가.  ‘나’라고 하는 자아 안에는 주체와 객체가 공존한다. 주체는 객체를 밀어내기도 하고 끌어당기기도 하면서 우호와 적대의 노선을 끝없이 교차하며 상생한다. 여기서 ‘호자(선생)’와 ‘나’는 하나의 자아인 ‘나’로 통합되면서 각각 주체이면서 객체로 변별되기도 한다. 그들은 역할을 수없이 바꾸어가며 하나의 ‘나’로 가기 위한 울퉁불퉁한 비탈길을 걸어간다. 모호하고 아득하기만 한 '정체성' 이라는 '하얀 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나’가 기다려왔던 고통의 시간은 그것을 찾기 위한 시간이나 다름없다. 즐거웠던 시간도 간혹 있었지만 대체로 얼마나 암울하고 비굴했던 노예(‘나’는 터키 갤리선에 잡혀온 노예의 신분)의 나날이었나.


파디샤의 명령으로 병사들과 행군하는 숲에서 불현듯 ‘하얀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이 성을 보며 ‘그에게도 고요하고 조심스럽게 끝나고 있는 그 어떤 것의 완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서술한다. 이들의 앞에 놓인 '새로운 인생'을 예감하는 이 대목에서 하얀 성을 묘사하고 있는 고고하고 아련한 색채에 취했다. 작가는 인간성의 기품을 믿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새로운 인생'은 다음 차례로 내가 읽을 파묵의 책 제목이기도 하다.

 

-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었다. 깃발이 걸린 탑에 지는 해의 희미한 붉은 빛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성은 하얀색이었다. 새하얗고 아름다웠다. 어쩐지 나는 이렇게 아름답고, 도달하지 못할 어떤 것은 단지 꿈에서만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꿈에서 당신이 어두운 숲속 구불거리는 길에서, 언덕이 있는 밝고 하얀 건물에 도달하기 위해 황급히 뛴다면 마치 그곳에 당신도 참가하기 원하는 축제, 놓치고 싶지 않은 행복이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든다. (p218)


대개의 우리처럼 주인공 ‘나’의 불운은, 그곳으로 가는 비탈길을 도저히 건널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는 일이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모든 것이자 하나이며, 고통과 평화와 어둠을 완벽하게 두루 갖춘 곳임을 깨닫는다. 우연의 경험이라 여겼던 일들이 필연임을, 그럼에도 그 성의 하얀 탑에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자각한다. 중요한 것은, 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는 대목이다. 드디어 자기합일의 경지에라도 오른 것일까. 하지만 쉽사리 이루어낼 수 있는 과제라면 화두도 아니었을 테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에 대한 묘사는 그래서 다소 절망적인 숙명으로 보인다.

 

- 나는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한 길을 생각했다. 모든 것이, 새들이 날아다니는 하얀 성처럼, 갈수록 어두워지는 바위투성이의 비탈과 잠잠하고 어두운 숲의 모습처럼 완벽했다. (p219)

문학에서 숲은 무의식의 세계를 보여주는 장치로 쓰인다. 숲의 탐색은 무의식의 탐색을 은유한다. 불온하고 은밀한 어둠의 숲을 뚫고 나오는 여정은 짧지도 순탄하지도 않다. 차가운 바람 속, 야생동물이 노리는 눈빛과 독버섯 가득한 유혹의 숲을 지나 부르튼 발을 질질 끌며 숲을 빠져나오는 순간, 피로에 지친 두 눈 가득 여명이 쏟아져 들어온다. 하얀 성으로 가는 길은 그러니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그것은 완벽한 어둠과 동시에 완벽한 밝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물은 삼각의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파디샤는 호자와 ‘나’를 조이고 당기는 역할을 한다. 그는 이들에게 있어서, 서로 자기 것이라면서 싸우는 형제에게 이건 네 것이고 이건 내 것이라고 구별 지어 주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아홉살에서 스무살이 넘기까지, 파디샤는 상대적으로 어리지만 지략과 담대함을 갖추었고 학문에 대한 호기심 또한 강한 인물로 나온다. ‘나’는 파디샤의 능력력을 간파했고 그와 같은 '아이'가 되고 싶어 하며 적어도 그의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어린아이다운 통찰력과 직관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호자도 ‘나’와 다르지 않은 마음이지만 드러내 보이는 행동은 적대적이어서 파디샤에 대한 열패감을 반영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은 파디샤의 위엄이 두려워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만, 후반부에서 파디샤가 이들이 만든 부풀린 이야기에 매료되는 것을 보고 나(호자와 동일체)는 실망감과 함께 분노감을 느낀다. 이들은 이미 자신의 이야기를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거리낌없이 쓰고자 했고 그럼으로써 자신과 자신의 나라에 대해서도 이전보다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이다. 이들은 정체성을 잃지 않는 방법을 희미하게나마 알게 되었고 그것이야말로 이야기로 가득 찬 거대한 세상에서 하나하나의 살아있는 빛이 된다는 진리를 얻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여 우리의 인식을 뒤집어준다. 어느 날 호자와 ‘나’를 아는 다른 타인이 오고, 호자가 된 ‘나’, ‘나’가 된 호자는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명백한 사실에 놀라며, 오히려 기뻐한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하면서 서로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타인에게 도리어 감명을 준다. 그는 그렇게 많은 세월을 같이 살았던 두 명이 어떻게 이렇게 서로 닮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그는 ‘나’(이 사람은 호자인 ‘그’와 동일인물일 수 있다)가 쓴 책을 읽으며 하얀 성의 이름을 소리쳐 말했고 허공의 끝없는 부분, 존재하지 않는 초점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그가 ‘나’가 쓴 책을 즐겁게 읽으며 책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찾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는 ‘우리 집 뒤뜰이 보이는 그 창문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을 보았다.’ 그가 본 것은 실패한 무기에 대한 무용담이나 학자연하는 거만한 태도, 명성과 부를 위한 위선적인 행동들이 아니라, 자기 취향대로 가꾼 뒤뜰,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어 점성술을 보러 찾아온 사람들과의 즐거운 대화, 자기 자신에 대한 속수무책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나는 ‘그’를 사랑했다.(p238) 일흔이 된 '나'는 이렇게 생의 마지막 고백을 한다.  ‘나’와 ‘그’는 동일자아다. 내 속에는 타인의 얼굴이 다분히 투영되고 그 속에도 여러 가지의 얼굴들이 괴물처럼 언제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 그 모습 속에 투사되는 갖가지 감정들은 불쾌하거나 유쾌한 종류로 이분되겠지만 그 뒤에 그늘처럼 드리워지는 건 늘 연민의 감정이다. 때로는 땅속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생이 지리멸렬하거나 생명의 연약함에 태생적인 열등감이 들 때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나’의 곁에 있는 ‘그’를 쳐다보고 어쩔 수 없는 사랑의 눈짓을 보내는 것이다.

- 내가 벌레처럼 손과 팔을 무심히 움직이는 것에 익숙해진 것처럼, 내 머릿속 벽에서 매일 메아리치며 사라지는 내 생각을 아는 것처럼, 가여운 내 몸에서 나오는 독특한 땀 냄새처럼, 생기 없는 머리칼, 못생긴 입, 연필을 쥐고 있는 내 분홍빛 손에 익숙한 것처럼 그렇게 ‘그’를 사랑했다.(p238)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무슨 일을 하는가이다. 행복은 높고 아득한 하얀 성에 있지 않고 바로 저 창문 밖, 살랑 바람 불어대는 나무 아래서 그네를 타며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이 시인했듯이 거울을 보는 행위가 상징하는, 두 가지 얼굴의 자아가 상충과 화해를 거듭하는 과정은 문학작품의 빈번한 소재가 되어왔지만 파묵은 그 위에 자신만의 고아한 색채를 입혔다. 인간이 추구하는 궁극의 목표, 행복에 관해서도 이 책은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결론을 재현해 내고 있지만, 작가는 영민한 눈을 반짝이며 진실된 이야기꾼답게 낮고 맺힌 목소리로 조근조근 풀어놓고 있다. 호자의 말처럼 우리의 뇌가 쓰레기로 가득찬 서랍 같은 것일지라도 그의 서랍은 뭔가 다른 종류의 것으로 가득할 것만 같다. 이제 우리에게는 거울을 보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려야하는 의무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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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2-11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솔직히 어렵다는 소문이 들려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는데...^^; 역시 봐야겠어요.

소나무집 2007-02-12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저는 내가 누구인가가 가장 중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네요.

프레이야 2007-02-1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늘사초님/ 보시면 후회하지 않으실 듯합니다.
소나무집님/ 내가 누구인가는 풀리지 않는 해답이지만 그 해답을 찾아 고민하고
나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또 진실이겠지요.

짱꿀라 2007-02-14 2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르한 파묵의 작품은 소설의 한 작품을 읽는 것이 아니라 한편의 철학 작품을 읽는 것 같이 너무 어려워요. 혜경님의 리뷰를 보니 완전히 소화하신 듯 하네요. 잘 읽고 갑니다.

프레이야 2007-02-16 1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산타님, 제가 읽은 파묵의 첫작품인데 상당히 매료되었습니다. ^^

산도 2007-03-04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 성' 아주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상하리만치 다음 작품에 손이 가질 않고 있네요. 어려웠던가... 어쩐지 내게는 이제 하나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어요. '호자와 '나'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리지르며 동화되어갔던 어두운 밤, 집 밖에서 창틀로 빼꼼이 얼굴을 내밀고 내가 훔쳐보는 것' 같은, 표현하자면 조금 오싹해지는 느낌.. ^^;

프레이야 2007-03-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드님/ 이미지가 바뀐 것 같네요. 참 아름다운 밤하늘입니다. 그리고 반가워요.
후반으로 갈수록 그런 오싹한 느낌이 들더군요. 이미지로 남아있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 저도 그래요^^

오우아 2007-04-10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읽으려고 몇 번 망설였을 뿐 아직도... 멋진 리뷰....

프레이야 2007-04-10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아님, 감사합니다. ^^ 저의 글쓰기도 현재진행형이에요!

책속에 책 2007-05-07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저 이거 읽고 정신이 혼미해져서 오르한 파묵은 완전히 포기했는데, 배혜경님 리뷰 보니 다시 도전하고 싶어지네요

프레이야 2007-05-07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Daydreamer님, 네 읽어보시면 괜찮을 거에요.^^ 저도 다른 오르한파묵 작품들을
사두고 아직 못 읽고 있어요. 얼른 읽고는 싶은데 또다른 책들이 쌓여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