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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
김민수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선 반 만 올립니다. 조만간에 후반부를 올리겠습니다.
제 1장 디자인과 문화의 혈(穴) 짚기
디자인의 의미는 라틴어 '디세뇨'에 있습니다. 디세뇨는 '계획, 의도, 목적, 모델, 그림' 등을 의미합니다. 불어 어원으로써는 '미술의 계획'에 있습니다. 즉 사전적으로 디자인의 현대적인 의미는 "마음에서 인식되고 후속적인 실행을 위해 의도된 계획 또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채택(5쪽)"을 말합니다. 하지만 라티어 어원의 '데시그나레'에서 유래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는 '지시하다 또는
의미하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해석해서 새로운 기호를 창조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지은이는 두번째의 의미로서,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로 정의를 내립니다.(4~6쪽) 또한 "디자인은 바로 우리의 일상 삶 자체를 담아내고 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형성시키고 기록하는 중요한 역활(11쪽)"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삶 자체를 담아내고 규정하기 때문에 정체된 것이거나 지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은이는 몸과 삶의 총체적 모습으로 디자인을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구성 요소 내에 파고 들 듯, 보이지 삶의 의미들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는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강물처럼 다양한 이견을 담으면서 흘러갑니다. 이렇지 않고 디자인이 틀에 묶이게 된다면, 일상의 삶을 유기체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제된 삶(변수)으로 규정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의 행동 양식들은 배제됩니다. 여기에서 비인간적이다는 의미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 아닌 자연과의 열림을 지향하는 뜻입니다.
지은이가 보기에,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의 확산으로 인간성이 상실되며 가치관의 변질을 느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이라는 인공물 생산과 소비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당연시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품이라는 물질적인 재화가 소비되는 과정을 통해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해가는 동안, 디자인은 상품 생산과 소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 재생산하고,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체계(34쪽)"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문화 인류학자 더글라스의 말을 빌린다면 "상품은 중립적이지만 그 사용은 사회적(34쪽)"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논의를 한다면 "디자인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또는 공유해야 할 의식과 가치를 배양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고 유지하며, 자아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변화를 창조(35쪽)"한다고 정의를 내립니다. 즉 디자인은 지배적인 생산자이고 소비자는 일방적인 수혜자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디자이너는 무감각하거나 부도덕한 대중을 이끄는 선지자도 아닙니다. 대중들은 자기들의 자아로서 "선택과 저항"을 통해 의사 결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광고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이 80~90% 실패하거나 충무로의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광고비자 건지지 못하고 실패의 쓴맛을 보게 하는 현상", 자동차에 대한 리콜제 도입(49쪽/50쪽) 등은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소비자 독재 시대'로 옮아 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제 견해는 이와 반대입니다. 위의 35쪽 정의는 지은이가 세우고자하는 이상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80년 대 말, 흰색 자동차의 선호도(35쪽) 등은 무의식적(혹은 고도의 전략적) 경향이 짙습니다. 즉 "일상 삶의 상식적인 사물에 가려진 이데올로기의 실제 양상은 차별화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반영(38쪽)"하기 때문입니다. 아드리안 포티가 그의 저서 [욕망의 사물]에서 말하였듯이(38쪽) 사람들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계급을 형성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옷에만 한 하는가는 의문이 듭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말을 빌리자면 디자이너들은 부르조아의 장벽 역할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디자인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 다가서려고 합니다.(교량) 이는 프로이트의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흉보면서 닮는다'는 의미서, 처음에는 자기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욕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 자리에 본인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합리화합니다. 즉 물질의 욕망(見物生心)이 인간이 지는 공통점이라 할 수가 있기에, 디자이너들의 부르조아들(디자이너는 부르즈아의 부가가치를 지적 노동력으로 쉽게 획득하기에, 부르조아적 디자이너들이 쉬이 될 수있습니다)이 만들어 내는 그럴듯한 헤게모니가 정체성을 얻으며, 자본주의의 축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부르조아의 헤게모니 생산) --> 재생산하고(유행과 기술의 발달, 장벽을 가르기 위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는 재생산) -->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 체계(부르조아는 장벽을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는 교량을 잇기 위해 탐색을 계속)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재생산의 반복이 과연 효율적인가? 대중에게 큰 도움이 되는가는 점은 근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디자이너가 프롤레타리아나 대중의 편에 서지 못하고(이는 생태적인 한계를 지닌다.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을 다시 빌려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장벽을 만들어 남들보다 더 높아 보일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인정하고 고용할 수 있는 계급과 동맹을 맺는 것이 무엇보다 유리하다. 아울러 디자이너들은 힘들이지 않고 쉽게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경험을 통해서 인지하고 있다. 부르조아들은 디자이너들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며, 프롤레타리아나 다른 부르조아들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약간의 지적 노동으로 엄청난 부(副)를 거뭐지기 위해, 부르조아의 편에 쓴다면 이는 분명 "디자이너에 대한 의미를 재설정" 해야합니다.
아울러 엄청난 광고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이 실패하는 이유는 상품의 과다성(過多性)에 찾아야지,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으로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져 있습니다. 즉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저의 논의가 '대중은 어리석다'라는, 지은이의 논의는 '대중은 현명하다'는 전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음 사람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실을 보는 시선이 지은이와 제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은이는 '소비자의 독재 시대'에 대한 믿음을 통해, 디자인을 위한 디자이너나 어설픈 작품이 사회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물질적인 욕망이 과(過)하고, 이미지의 홍수로 인해 깊은 사고를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견해에 의해 지은이와 일방적인 토론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논외(論外)로 지은이의 언어 쓰임이나 세계관이 조금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비인간적이다"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종합적인 '생활 감각'을 반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을 본다면 지은이가 말하는 비인간적인 의미는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나타냅니다. 이는 몇 몇 보기와 도심의 계획에속한 교통망(13쪽)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즉 교통이 편하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이 편하다는 것이 아닌 지은이가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의미를 수용해야 합니다. 공기나 자연에서 살아 숨쉬며 느끼는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을 얻지 못하는 부분에 까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의 논의는 쉽게 찾기는 힘들 듯 합니다.
제 2장 디자인과 커뮤니케이션
"비언어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커뮤니케이션(62쪽)"의 하나로 '디자인의 언어'를 정의합니다. 즉 디자인 언어라고 불리는 것은 언어적인 의미를 쓰이는 것이 아닌 비언어적인-이미지나 은유, 상징 등으로 쓰입니다. 지은이는 좀 더 나아가 '디자인 언어'는 3가지의 속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즉 사인(sign), 행위(action), 사물(object)언어로 분류합니다. 비언어적인 '디자인 언어'는 "가지각색의 여러 감각 양식을 요구"합니다. 이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게 되면-광고에서 보여지는 행위, 슈퍼 모델이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것을 보고 그 화장품을 찾거나 드라마에 이쁜 여자가 나온 옷을 찾는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쫓아가게 된다. 즉 이미지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의미가 지니는 함축적 내용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정신분석학자 라캉[j. Lacan]과 철학자 데리다[j. Derrida]로 대변되는 후기 구조의에서는 기표가 연쇄적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의미가 발생하고 해석된다고 한다. 이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지시 대상인 기의는 떨어져 나가고 기표가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75쪽)" 물론 이러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자기들만 잘한 체 한다고 말 할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사물의 기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기표만 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람은 무조건 선(善)하다는 감정론적인 점에 많이 치우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티비나 영화의 이미지가 양상하는 무수한 기표들이 사회의 문화나 유행을 창조하는 것은 기표가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즉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경향이 일방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일반 대중들이 쫓는 이미지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에 많이 치중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 할 수가 있다. 얼마 앞서 치루어진 4.15 선거에서도 보여집니다. 민주노동당의 원래 진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과연 무엇을 놓고 투표를 했는가 스스로 묻는다면 해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라디오 진행자의 물음에 쫓기어 정책 제시를 못하고 "싸움"을 하자느냐고 농담어린 반문을 하는 대표자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 그리고 투표를 하는 이들. 열린 정당을 지향하지만 제대로 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탄핵으로 선거를 이용한 이들에 표를 던져 준 일련의 행위들은 이미지가 얼마만큼 현실에 짙게 드리워졌는가는 말해줍니다.)
"사물의 형태를 단지 구조를 감싸는 비본질적인 '외피 또는 모양새'로만 파악하지만 형태는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을 유발하고 사물의 존재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행위로서 우리들은 간혹 '의미의 부적절성'을 유발하게 됩니다. 첫째 사용자가 형태를 식별하거나 구별할 수 없을 때, 둘째 형태가 사용자로 하여금 의도된 방식으로 조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초래할 때, 셋째 사용자가 형태를 통해 사물과 이미지의 성격을 탐색할 수 없거나 다른 부차적인 도움 없이는 파악이 어려울 때, 네째 형태가 조작 또는 행동해야 하는 상징적 환경에 부합하지 않을 때(93쪽/ 부연 93쪽~96쪽) "무엇보다도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은 사물과 이미지에 취해진 정보에 대해 사용자가 '대화'하기 위해 스스로 '동조'하는 방식을 유도(96쪽)"하는 것이라 지은이는 정의합니다.
과연 이미지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지은이는 여기에 7가지의 개념(맥락 또는 환경, 제공성, 마음의 모델, 마음의 지도 그리기, 선호와 차이, 동기와 자기 정체성, 은유)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이 전제는 '사용자가 이미지에 결합한다'는 조건을 묵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칼을 설명하면서 칼이 쓰여지는 용도에 따라서 다르게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음식점에 놓인 자기 양념통처럼 똑같은 모양새(91쪽)를 취한다면 우리는 두껑을 열어보고 눈이나 혀로 인식을 하고 나서 그것이 소금인 설탕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음식점에 가서 아무런 양념을 넣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양념통은 어지럼증만 가중시키는 부과물입니다. 버스나 택시에 붙은 광고물을 읽지 않는 나에게, 광고물은 차를 지저분하게 하는 낙서에 불과합니다. 즉 지은이는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가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이미지나 디자인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에게, 디자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디자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논의를 더 지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기표에 대한 논의가 책상물림을 하는 지식인의 언어적 유희가 아닙니다. 패션에 대한 유행 등이 과연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가는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지은이가 말하는 디자인의 의미는 이런 점에서 한정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실생활에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생활적 환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반에 걸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논의는 협소하기만 합니다.
제3장 분석....시작^^
키치(kitsch)는 쓰레기 내지 싸게 하다 혹은 덤핑으로 판매하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키치는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다준 예술적 선물(?)입니다. 즉 "현대 산업 소비 사회가 파생(177쪽)"시킨 문화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사물과 이미지의 통속화 현상을 낳았으며, 이러한 현상은 디자인에서 평가 가치가 부재하는 사물과 이미지의 범람을 초래했습니다. 디자인의 본래 기능이 유실된 선물은 대량 이미지 복제로 인한 의미 작용의 빈곤과 과잉의 기호 만연, 하찮은 것들에 대한 과장된 예찬을 남발하게 만들었습니다.
키치는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사조로, 19세기 말까지는 극히 제한된 일부 특수 계층에게만 미적 감수성 개발의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하류 계층이 향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 형태는 '민속미술'이였으며, 공예적인 전통 뿐입니다. 그러던 산업 산업 혁명 이후, 백화점의 등장으로 값싼 미술 작품을 향유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들 공장 노동자 계층과 중류 계층은 순수 미술에 대한 미적 기준을 갖지 못했고, 새로운 산업 사회의 미적 감수성도 개발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집을 장식하길 원했고 순수미술품과 같은 사물들을 통해 자신들을 과시하고(184쪽)" 싶어했기에, 백화점의 판매행위는 '값싼 미술품 같은 사물들의 전시장'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키치 미술은 종래의 고상한 소위 '뮤지옴' 미술이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대중적 삶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삶과 같은 예술[life-like art]'추구"합니다. 즉 "키치를 산업적 산물과 광고에 끌어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는 마치 그것이 자신들에게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련된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고 믿는 어떤 '진지한 태도'가 드러(195쪽)"나며 이에 호응하여, 키치를 "자신들의 삶 속에 끌어들여 탐닉하는 사람들은 '높고 고귀한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비난하든지 상관없이 마치 자신들에게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려됨의 분위기'를 부여해준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178쪽)"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하나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들은 비록 어떤 특수 계층이 비하하더라도,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련된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제가 보기에 지은이의 환상으로 보여집니다. 지은이는 앞서서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키치가 생산된 경우를 대량 복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 주의 사회가 가지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현 사회의 키치를 논하는 점에서 예외로 합니다. 자본 주의를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해졌는데, 지은이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대량 복제가 흔한 세상에 과연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가는 상당한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지은이는 순수 미술과 민속 미술에 대한 어떠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미술은 고귀한 것이고 민속 미술은 천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백화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미술품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미술품에 눈독을 들이는가에 대한 의문은 앞서서 말한 공격자와의 동일시, 즉 상류 계급층에 귀화 내지 동급화하고 싶은 욕망 다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순수 미술이 고귀하기 때문이라는 억측을 내립니다. 즉 순수 미술을 이해하려면 "순수 미술에 대한 미적 감각(184쪽)" 내지 "미적 감수성 개발(183쪽)"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노동자나 중산층 계급은 미술품에 목을 놓았는가라는 점은 실증적인 논증이 더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지은이는 대중들이 순수 미술에 대한 동경을, 고급 저급이라는 이분법적인 예술지상주의로 논의합니다. 그러면서 끝에 가서는 키치를 생산하는 자나 소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언어를 구사합니다. 앞서서 맹목적으로 중산층이 무지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지금에 와서는 진지한 태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하여, 내용에 일관성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을 가져봅니다.
제 4장은 수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적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은 개인적으로 물어 봐 주세요^^;
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우선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올립니다. 다 읽기에 쉽지만은 않은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재미있게 읽은 글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분명 이 책은 쉽게 쓰여져 있으며,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합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생각은 거미줄을 지향합니다. 다양한 지식들이 거미줄처럼 넷을 형성한다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롭고 멋진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영학도는 경영서(書)만, 디지이너는 디자인서만 고집하는 닫힌 사고를 버리고 다양한 색을 입힐 수 있는 열린 사고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추신: 이 글은 알라딘 리뷰 2000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알라딘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