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의 역사
크리스토프 르페뷔르 지음, 강주헌 옮김 / 효형출판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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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가 생각하는 역사는, 적어도 시공간 속에 숙성이 되어 우리앞에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이런 면에서 단재의 "'我와 非我의 투쟁' 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기록"이라는 정의는 명확하다고 봅니다. 즉 단재가 지니는 원초적 세계관의 한계-일제시대라는 정신적 육체적 압박과 학문의 연속성상에 벗어날 수 없는 사고의 틀-를 지닌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제는 이 보다 더 낳은 의미를 지니는 "역사"에 대한 정의를 접하지 못했습니다. '아와 비아'의 단순함이 아닌 '시간과 공간을 아우러는 심적활동'의 투쟁을 역사라 하였습니다.

그는 어느 것이라도 너무 쉽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흔히 말하는 비판적인 성찰을 통해, 아와 비아의 투쟁을 한 다음에 문(門)을 열었습니다. 항상 열린 자세가 있지만, 스스로 계속적인 성찰을 통한 의지는 더 낳은 앎으로 향해가는 진리적 도구라 생각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아와 비아의 투쟁은 한 사람의 개인적 성찰일 수 밖에 없는가라는 의문이 듭니다.

분명, 단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역사 속의 일부분, 주체자로서 인식하기에 그의 사고관이 역사관이 됩니다.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그의 내면적 아와 비아의 투쟁이 공간적으로는 사회에 울리고, 시간적으로는 역사적 기록이 되어 하나의 "역사관"이 됩니다.

여기서 다른 문제, 개인적 성찰이 아닌 문화나 사회의 조류 등은 어떻게 볼 것인가? 저는 단재의 역사관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와 비아의 계속적인 투쟁은 한 곳에 머무르게 하지않고 굽이굽이 물결쳐 흐르는 강물처럼, 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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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카페의 역사는 이러한 의미 전달에는 상당히 미약하게 보입니다. 카페의 역사라는 의미 전달의 목적을 지니는 책인가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라고 단호히 말 합니다. 카페가 존재하는 나라가 유독 프랑스라는 한 나라에 그치는 것이 아닐텐데 지은이의 눈은 여기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두번째로 자기만의 명확한 역사관이 있는가에 대해서도 상당히 의구심이 듭니다. 일화성(性) 위주의 이야기는 깊이 있는 성찰이나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소설에 비쳐진 장면을 군데군데 불러오고 있습니다. 사진을 잘 찍는 사진사인지는 몰라도, 역사적 사료를 세밀하게 모아서 정렬하는 편집은 없습니다. 카페의 역사를 말하면서 현재의 사진은 나열하는 것은 상당히 편협하며 무슨 의미를 지니는 궁금합니다.


카페라는 생소한-서기 1644년 터키에 온 배가 일확천금의 부를 가져다 주지 못하고, 1672년 파스칼이라는 사람이 파리의 두 곳, 생제르맹 광장과 케 드 레콜에 커피 전문점을 열면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 구체적인 사건이 서술되지 못하고 있다. 분명 아와 비아의 투쟁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이 관계는 무척 중요합니다. 1664년의 커피가 들어온 마르세유의 공기가 어떠했으며, 사람들은 왜 외면을 했는가? 30여년이 다 되어서 커피 전문점이 들어설 수 있었던 배경과 그 사이에 일어났던 수많은 사건 중에 의미를 지니는 일화 등등은 놓칠 수 없는 재미와 의미를 지니게 될 것이지만 지은이는 이러한 추적을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근 300여년이 넘는 동안 카페와 우리 삶과의 관계를 추적하는 것도 남다른 의미를 지닐 것입니다. 다만 책의 전체적 이미지는-지은이의 시선은 프랑스라는 나라, 근대를 벗어나지 못한 공간, 소설에 나타난 분위기만 간혹 전해준다. 즉 몇 몇 작가의 입맛에 길들여진 색체를 자기 것인냥 아무렇지도 않게 내밀어 놓고 이것이 역사다라고 말한다.

카페의 순례라는 목차가 있어, 여러 카페를 둘러보는 느낌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들고 펼쳤는데, 의미 모를 낱말들만 줄줄히...

제가 책을 읽으면서 먼 뫼(山)를 봐서인지 책을 읽어도 머리에 정리가 되지 않고, 머리에 정리가 되지 않으니 무엇을 읽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분명 저는 정독을 한다고 읽었는데... 문체의 낯설음인지 의미의 애매모함인지 잘 들어오지가 않네요.

체계적인 서술로서, 카페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로서 권하지 싶지가 않습니다. 제가 권하고 싶은 방법은 먼저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읽으보신 다음에, 그 다음에 선택을 하셔도 늦지 않으실 듯 합니다. 가격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명확한 역사관을 지니지 않고, 이미지로써 다가 간 카페의 역사라고 말하면, 너무 편협할까요?

추신:제가 본 관점은 단재의 역사관에서 출발을 하였기에, 이미 금(線)이 그어져 있을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자칫 "모 아니면 도"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을 취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양한 이견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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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
김민수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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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선 반 만 올립니다. 조만간에 후반부를 올리겠습니다.


제 1장 디자인과 문화의 혈(穴) 짚기

  디자인의 의미는 라틴어 '디세뇨'에 있습니다. 디세뇨는 '계획, 의도, 목적, 모델, 그림' 등을 의미합니다. 불어 어원으로써는 '미술의 계획'에 있습니다. 즉 사전적으로 디자인의 현대적인 의미는 "마음에서 인식되고 후속적인 실행을 위해 의도된 계획 또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채택(5쪽)"을 말합니다. 하지만 라티어 어원의 '데시그나레'에서 유래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이는 '지시하다 또는
의미하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즉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해석해서 새로운 기호를 창조하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지은이는 두번째의 의미로서,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로 정의를 내립니다.(4~6쪽) 또한 "디자인은 바로 우리의 일상 삶 자체를 담아내고 규정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문화를 형성시키고 기록하는 중요한 역활(11쪽)"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삶 자체를 담아내고 규정하기 때문에 정체된 것이거나 지체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은이는 몸과 삶의 총체적 모습으로 디자인을 설명합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사회적 구성 요소 내에 파고 들 듯, 보이지 삶의 의미들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는 유기체로서 끊임없이 강물처럼 다양한 이견을 담으면서 흘러갑니다. 이렇지 않고 디자인이 틀에 묶이게 된다면, 일상의 삶을 유기체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통제된 삶(변수)으로 규정하고, 비인간적인 인간의 행동 양식들은 배제됩니다. 여기에서 비인간적이다는 의미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것이 아닌 자연과의 열림을 지향하는 뜻입니다.


  지은이가 보기에, 현대 사회는 물질주의의 확산으로 인간성이 상실되며 가치관의 변질을 느끼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이라는 인공물 생산과 소비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당연시하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품이라는 물질적인 재화가 소비되는 과정을 통해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해가는 동안, 디자인은 상품 생산과 소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 재생산하고,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체계(34쪽)"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문화 인류학자 더글라스의 말을 빌린다면 "상품은 중립적이지만 그 사용은 사회적(34쪽)"이기 때문입니다. 좀더 논의를 한다면 "디자인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또는 공유해야 할 의식과 가치를 배양하고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하고 유지하며, 자아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 사회 변화를 창조(35쪽)"한다고 정의를 내립니다. 즉 디자인은 지배적인 생산자이고 소비자는 일방적인 수혜자라는 등식은 성립할 수가 없다고 말합니다. 또한 디자이너는 무감각하거나 부도덕한 대중을 이끄는 선지자도 아닙니다. 대중들은 자기들의 자아로서 "선택과 저항"을 통해 의사 결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는 "엄청난 광고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이 80~90% 실패하거나 충무로의 영화 제작자들로 하여금 광고비자 건지지 못하고 실패의 쓴맛을 보게 하는 현상", 자동차에 대한 리콜제 도입(49쪽/50쪽) 등은 보드리야르의 말을 빌리자면, '소비자 독재 시대'로 옮아 가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제 견해는 이와 반대입니다. 위의 35쪽 정의는 지은이가 세우고자하는 이상향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지은이가 말했듯이 80년 대 말, 흰색 자동차의 선호도(35쪽) 등은 무의식적(혹은 고도의 전략적) 경향이 짙습니다. 즉 "일상 삶의 상식적인 사물에 가려진 이데올로기의 실제 양상은 차별화와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한 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반영(38쪽)"하기 때문입니다.  아드리안 포티가 그의 저서 [욕망의 사물]에서 말하였듯이(38쪽) 사람들이 옷을 입는다는 것은 계급을 형성한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과연 옷에만 한 하는가는 의문이 듭니다. 안토니오 그람시의말을 빌리자면 디자이너들은 부르조아의 장벽 역할을 하기 위해, 끊임없이 디자인하고 프롤레타리아는 이러한 장벽을 넘기 위해 다가서려고 합니다.(교량) 이는 프로이트의 '공격자와의 동일시'라는 개념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우리나라 속담에 '흉보면서 닮는다'는 의미서, 처음에는 자기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욕하지만 어느 순간에 그 자리에 본인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하게 합리화합니다. 즉 물질의 욕망(見物生心)이 인간이 지는 공통점이라 할 수가 있기에, 디자이너들의 부르조아들(디자이너는 부르즈아의 부가가치를 지적 노동력으로 쉽게 획득하기에, 부르조아적 디자이너들이 쉬이 될 수있습니다)이 만들어 내는 그럴듯한 헤게모니가 정체성을 얻으며, 자본주의의 축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부르조아의 헤게모니 생산) --> 재생산하고(유행과 기술의 발달, 장벽을 가르기 위해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끊임없는 재생산) -->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 체계(부르조아는 장벽을 만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는 교량을 잇기 위해 탐색을 계속)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재생산의 반복이 과연 효율적인가? 대중에게 큰 도움이 되는가는 점은 근원에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디자이너가 프롤레타리아나 대중의 편에 서지 못하고(이는 생태적인 한계를 지닌다. 프로이드의 '공격자와의 동일시' 개념을 다시 빌려서 이야기를 한다면, 그들은 장벽을 만들어 남들보다 더 높아 보일려고 한다. 그렇다면 그들을 인정하고 고용할 수 있는 계급과 동맹을 맺는 것이 무엇보다 유리하다. 아울러 디자이너들은 힘들이지 않고 쉽게 자본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경험을 통해서 인지하고 있다. 부르조아들은 디자이너들의 색다른 경험을 통해 자기만의 정체성을 만들며, 프롤레타리아나 다른 부르조아들과의 관계를 지속시킨다.) 약간의 지적 노동으로 엄청난 부(副)를 거뭐지기 위해, 부르조아의 편에 쓴다면 이는 분명 "디자이너에 대한 의미를 재설정" 해야합니다. 

  아울러 엄청난 광고에도 불구하고 신제품이 실패하는 이유는 상품의 과다성(過多性)에 찾아야지, 소비자의 현명한 선택으로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쪽으로 치우져 있습니다. 즉 프로이트의 개념을 빌려서 이야기하는 저의 논의가 '대중은 어리석다'라는, 지은이의 논의는 '대중은 현명하다'는 전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중은 일방적이지 않으며,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음 사람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실을 보는 시선이 지은이와 제가 조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은이는 '소비자의 독재 시대'에 대한 믿음을 통해, 디자인을 위한 디자이너나 어설픈 작품이 사회에 성공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지는 물질적인 욕망이 과(過)하고, 이미지의 홍수로 인해 깊은 사고를 하지 않는 것에 안타까움을 드러낸 것입니다. 아울러 이러한 견해에 의해 지은이와 일방적인 토론을 이끌고 가겠습니다.

  논외(論外)로 지은이의 언어 쓰임이나 세계관이 조금 협소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그가 말한 "비인간적이다"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아마도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종합적인 '생활 감각'을 반영'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합니다. 하지만 자연의 일부로서 사람을 본다면 지은이가 말하는 비인간적인 의미는 너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나타냅니다. 이는 몇 몇 보기와 도심의 계획에속한 교통망(13쪽)을 이야기 하는 부분에서 나타납니다. 즉 교통이 편하다는 것은 인간적인 삶이 편하다는 것이 아닌 지은이가 말한 눈에 보이지 않는 다양한 의미를 수용해야 합니다. 공기나 자연에서 살아 숨쉬며 느끼는 물질적인 것으로 보상을 얻지 못하는 부분에 까지 논의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부분의 논의는 쉽게 찾기는 힘들 듯 합니다.

 

제 2장 디자인과 커뮤니케이션

  "비언어적인 메세지를 전달하고 이해시키기 위한 커뮤니케이션(62쪽)"의 하나로 '디자인의 언어'를 정의합니다. 즉 디자인 언어라고 불리는 것은 언어적인 의미를 쓰이는 것이 아닌 비언어적인-이미지나 은유, 상징 등으로 쓰입니다. 지은이는 좀 더 나아가 '디자인 언어'는 3가지의 속성을 지닌다고 합니다. 즉 사인(sign), 행위(action), 사물(object)언어로 분류합니다. 비언어적인 '디자인 언어'는 "가지각색의 여러 감각 양식을 요구"합니다. 이는 텍스트가 아닌 이미지를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를 일방적으로 수용하게 되면-광고에서 보여지는 행위, 슈퍼 모델이 화장품 광고에 나오는 것을 보고 그 화장품을 찾거나 드라마에 이쁜 여자가 나온 옷을 찾는 행위를 무비판적으로 쫓아가게 된다. 즉 이미지는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그 의미가 지니는 함축적 내용에 대해서는 나몰라라 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이러한 비판은 "정신분석학자 라캉[j. Lacan]과 철학자 데리다[j. Derrida]로 대변되는 후기 구조의에서는 기표가 연쇄적으로 치환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의미가 발생하고 해석된다고 한다. 이 견해에서 중요한 것은 의미의 지시 대상인 기의는 떨어져 나가고 기표가 주된 역할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75쪽)" 물론 이러한 후기 구조주의자들은 자기들만 잘한 체 한다고 말 할 수가 있다. 모든 사람들이, 사물의 기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기표만 쫓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은 사람은 무조건 선(善)하다는 감정론적인 점에 많이 치우쳐져 있을 수 있습니다. 티비나 영화의 이미지가 양상하는 무수한 기표들이 사회의 문화나 유행을 창조하는 것은 기표가 지니는 의미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즉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경향이 일방적인 모습이 보이지만 일반 대중들이 쫓는 이미지는 기의가 아니라 기표에 많이 치중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로 접근 할 수가 있다. 얼마 앞서 치루어진 4.15 선거에서도 보여집니다. 민주노동당의 원래 진출이라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지만 일반인들이 과연 무엇을 놓고 투표를 했는가 스스로 묻는다면 해답을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라디오 진행자의 물음에 쫓기어 정책 제시를 못하고 "싸움"을 하자느냐고 농담어린 반문을 하는 대표자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 그리고 투표를 하는 이들. 열린 정당을 지향하지만 제대로 된 정책이나 이념을 제시하지 못하고, 탄핵으로 선거를 이용한 이들에 표를 던져 준 일련의 행위들은 이미지가 얼마만큼 현실에 짙게 드리워졌는가는 말해줍니다.)

  "사물의 형태를 단지 구조를 감싸는 비본질적인 '외피 또는 모양새'로만 파악하지만 형태는 사물을 인지하는 감각을 유발하고 사물의 존재 의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원치 않는 행위로서 우리들은 간혹 '의미의 부적절성'을 유발하게 됩니다. 첫째 사용자가 형태를 식별하거나 구별할 수 없을 때, 둘째 형태가 사용자로 하여금 의도된 방식으로 조작할 수 없는 무능력을 초래할 때, 셋째 사용자가 형태를 통해 사물과 이미지의 성격을 탐색할 수 없거나 다른 부차적인 도움 없이는 파악이 어려울 때, 네째 형태가 조작 또는 행동해야 하는 상징적 환경에 부합하지 않을 때(93쪽/ 부연 93쪽~96쪽) "무엇보다도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은 사물과 이미지에 취해진 정보에 대해 사용자가 '대화'하기 위해 스스로 '동조'하는 방식을 유도(96쪽)"하는 것이라 지은이는 정의합니다.

  과연 이미지를 이해한다는 것이 쉬운 일인가? 지은이는 여기에 7가지의 개념(맥락 또는 환경, 제공성, 마음의 모델, 마음의 지도 그리기, 선호와 차이, 동기와 자기 정체성, 은유)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충고합니다. 이 전제는 '사용자가 이미지에 결합한다'는 조건을 묵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칼을 설명하면서 칼이 쓰여지는 용도에 따라서 다르게 디자인을 해야 한다고 설명을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음식점에 놓인 자기 양념통처럼 똑같은 모양새(91쪽)를 취한다면 우리는 두껑을 열어보고 눈이나 혀로 인식을 하고 나서 그것이 소금인 설탕인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음식점에 가서 아무런 양념을 넣지 않고 먹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양념통은 어지럼증만 가중시키는 부과물입니다. 버스나 택시에 붙은 광고물을 읽지 않는 나에게, 광고물은 차를 지저분하게 하는 낙서에 불과합니다. 즉 지은이는 근본적인 물음에 다가가지 않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수많은 이미지나 디자인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에게, 디자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디자인에 불과하다는 점을 놓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논의를 더 지속시켜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후기 구조주의자들의 기표에 대한 논의가 책상물림을 하는 지식인의 언어적 유희가 아닙니다. 패션에 대한 유행 등이 과연 어떠한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가는 풀어야 할 문제입니다. 지은이가 말하는 디자인의 의미는 이런 점에서 한정적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즉 '실생활에 꼭 필요한 부분'에 대해서 논의를 지속시키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라는 것은 실생활적 환경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전반에 걸쳐서 행해진다는 점에서 지은이의 논의는 협소하기만 합니다.

 

제3장 분석....시작^^

  키치(kitsch)는 쓰레기 내지 싸게 하다 혹은 덤핑으로 판매하는 의미와 동일합니다. 키치는 물질적인 풍요가 가져다준 예술적 선물(?)입니다. 즉 "현대 산업 소비 사회가 파생(177쪽)"시킨 문화입니다. 물질적인 풍요는 사물과 이미지의 통속화 현상을 낳았으며, 이러한 현상은 디자인에서 평가 가치가 부재하는 사물과 이미지의 범람을 초래했습니다. 디자인의 본래 기능이 유실된 선물은 대량 이미지 복제로 인한 의미 작용의 빈곤과 과잉의 기호 만연, 하찮은 것들에 대한 과장된 예찬을 남발하게 만들었습니다.

  키치는 19세기 산업 혁명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사조로, 19세기 말까지는 극히 제한된 일부 특수 계층에게만 미적 감수성 개발의 기회가 제공되었습니다. 하류 계층이 향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예술 형태는 '민속미술'이였으며, 공예적인 전통 뿐입니다. 그러던 산업 산업 혁명 이후, 백화점의 등장으로 값싼 미술 작품을 향유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들 공장 노동자 계층과 중류 계층은 순수 미술에 대한 미적 기준을 갖지 못했고, 새로운 산업 사회의 미적 감수성도 개발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의 집을 장식하길 원했고 순수미술품과 같은 사물들을 통해 자신들을 과시하고(184쪽)" 싶어했기에, 백화점의 판매행위는 '값싼 미술품 같은 사물들의 전시장'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키치 미술은 종래의 고상한 소위 '뮤지옴' 미술이 추구했던 것과는 달리 대중적 삶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함으로써 '삶과 같은 예술[life-like art]'추구"합니다. 즉 "키치를 산업적 산물과 광고에 끌어들이는 사람들의 태도 속에는 마치 그것이 자신들에게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련된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고 믿는 어떤 '진지한 태도'가 드러(195쪽)"나며 이에 호응하여, 키치를 "자신들의 삶 속에 끌어들여 탐닉하는 사람들은 '높고 고귀한 기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어떻게 비난하든지 상관없이 마치 자신들에게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려됨의 분위기'를 부여해준다고 생각하는 어떤 '진지한 태도'를 지니고(178쪽)" 있습니다.

  생산자와 소비자는 하나의 생각을 공유합니다. 그들은 비록 어떤 특수 계층이 비하하더라도, "풍부함, 우아함 또는 세련된 분위기"를 제공해 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논의는 제가 보기에 지은이의 환상으로 보여집니다. 지은이는 앞서서 산업의 발달로 인하여 키치가 생산된 경우를 대량 복제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 주의 사회가 가지는 물질에 대한 욕망을 현 사회의 키치를 논하는 점에서 예외로 합니다. 자본 주의를 시대를 지나면서 더욱 공고해졌는데, 지은이는 아무런 언급이 없습니다. 대량 복제가 흔한 세상에 과연 "진지한 태도"를 유지하는가는 상당한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문제되는 것이 지은이는 순수 미술과 민속 미술에 대한 어떠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순수 미술은 고귀한 것이고 민속 미술은 천한 것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백화점의 등장으로 인하여, 미술품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왜 미술품에 눈독을 들이는가에 대한 의문은 앞서서 말한 공격자와의 동일시, 즉 상류 계급층에 귀화 내지 동급화하고 싶은 욕망 다름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지은이는 순수 미술이 고귀하기 때문이라는 억측을 내립니다. 즉 순수 미술을 이해하려면 "순수 미술에 대한 미적 감각(184쪽)" 내지 "미적 감수성 개발(183쪽)"이 뒤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모든 노동자나 중산층 계급은 미술품에 목을 놓았는가라는 점은 실증적인 논증이 더 필요한 부분이라 생각을 합니다.

  지은이는 대중들이 순수 미술에 대한 동경을, 고급 저급이라는 이분법적인 예술지상주의로 논의합니다. 그러면서 끝에 가서는 키치를 생산하는 자나 소비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언어를 구사합니다. 앞서서 맹목적으로 중산층이 무지하다고 판단을 내리고, 지금에 와서는 진지한 태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상당한 모순을 지닌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하여, 내용에 일관성이 부족하지 않나 생각을 가져봅니다.

 

제 4장은 수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적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궁금하신 분은 개인적으로 물어 봐 주세요^^;

  제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우선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올립니다. 다 읽기에 쉽지만은 않은 글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하였느냐고 묻는다면, 재미있게 읽은 글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헌사라 하겠습니다. 분명 이 책은 쉽게 쓰여져 있으며,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합니다.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생각은 거미줄을 지향합니다. 다양한 지식들이 거미줄처럼 넷을 형성한다면 전혀 엉뚱한 곳에서 새롭고 멋진 아이디어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경영학도는 경영서(書)만, 디지이너는 디자인서만 고집하는 닫힌 사고를 버리고 다양한 색을 입힐 수 있는 열린 사고를 지향해야 할 것입니다. 다시한번 끝까지 읽어 주신 분들께 고마움을 표합니다. 좋은 책 많이 읽으시길 바랍니다.

추신: 이 글은 알라딘 리뷰 2000자가 사라졌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알라딘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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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땅 큰 나라 네덜란드 엿보기
최란아 지음 / 학민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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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서 풍차의 나라라고 몇 번 들은 적은 있습니다. 하지만 옆의 프랑스나 독일, 영국 등에 내 마음은 가 있었지,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하멜이 이 곳 출신이고, 어떤 이가 둑을 막았다는 황당한 이야기로 큰 선입관을 차지한 나라. 실로 나는 네덜란드에 대해서 알려고 하지 않았으며, 교과서에 나온 몇 줄로 그 나라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실로 이러한 일이 얼마나 좁은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인지는, 이 책을 읽고 나서 확연하게 느꼈습니다.

 

지은이의 말처럼, 그의 눈을 통해 네덜란드를 엿보면서 전 또다시 그 나라를 몇 개의 단어로 규정하려고 안간힘을 섰습니다. 다양한 문화와 행동 모습을 보면서, 근원적인 공통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은 책을 읽는 내내 제가 품었던 호기심입니다. 책은 하루 만에 읽혀지지가 않았고, 띄엄띄엄 읽은 지라 몇 번의 시간 간격을 두고 정리가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 이 시간적 간격을 두고 네덜란드가 지니는 이미지를 찾으려고 한 노력에, 하나의 공통점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참으로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미지로서 자기를 위장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들어내므로써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옷의 유행에 별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나, 집의 창문을 크게 해 놓은 것 등을 보면 충분히 공감(共感)하시라 생각을 가집니다. 거실이 원히 내다보이는 창문을 내놓고, 커튼을 치지 않는 집!! 아울러 이는 읽는 동안 얼굴을 붉히게도 하면서, 한번쯤 꼭 가보고 싶다는 동경을 불러 일으키는 성(성)에 대한 개방성-티비의 프로와 해수욕장에서 윗가슴을 드러내 놓은 모습-등은 숨김이 없는 선상에서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가졌습니다.

 

자연스러움은 포용력이라는 쌍둥이를 지니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나와 같지 않다고 하여,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다름의 인정! 그들은 어떠한 선을 그어 놓고 "너희는 이 선 밖에 있으니, 나와는 다르다"라는 이러한 규정이 없기에 사람을 대함에 거짓이나 동정이 없으며, 다양한 생각과 환경 속에서 사람들이 같이 숨쉬고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숨기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나와 같지 않다고 선밖에 두는 것이 아닌, 다름을 차별이 아닌 또 다른 모습으로 인식하는 그들에 큰 동경을 가집니다. 맹자가 말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품은 사람들로 보인다고 말하면 과장일까요?

 

자연스러움과 포용력은 회사나 사회 등에 그대로 드러납니다. 이러한 모습이 간혹 낯뜨거움으로 다가오기도 하며, 부러움으로도 다가오기도 합니다(회사에서 회의하는 모습-120쪽)

 

서로의 다른 입장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힘이 강한 나라. 이는 엄격한 규율 속에 자라기만 한 사람에게는 자칫 위험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엄격한 규율 속에 갇힌 이에게 갑자기 자유가 주어졌을 때, 스스로 조절할 수 없다는 것이 제 판단입니다. 네덜란드는 성과 마약에 대해서 상당히 개방적이지만 범죄 때문에,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할 정도는 아닙니다.(네덜란드 마약 범죄율-"오늘날 네덜란드 교도소 수감자의 17%가 마약사범이다. 마약 접속이 이렇게 쉬움에도 불구하고 1997년 암스테르담 대학 마약조사센터의 조사에 의하면 마리화나 사용량은 오히려 미국이 2배 높다166쪽") 이는 문화와 하나씩, 차근히 쌓아올린 자유가 스스로의 규율을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분명 지은이는 네덜란드에 대해 환상 만을 심어주지 않습니다. 네덜란드의 다양한 이면을 보여 줍니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이에게, 이성은 어느 하나 이쁘지 않은 모습이 있겠습니까! 지은이는 분명 네덜란드를 살기 좋은 나라, 아름다운 나라로 봅니다. (이는 간혹 우리나라와 비교하는 모습에서도 우리나라의 아쉬움을 단적으로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반의 장단점으로 네덜란드를 보지는 않습니다. 8할 이상이 네덜란드의 아름다운 모습이네요. 또한 네덜란드의 정책이나 깊이 있는 분석은 드러나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기준으로 네덜란드를 엿보고 있는가에 대한 관점에서도 비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네덜란드를 알고 싶다면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 안에서 정책이나 정치, 생활을 평가하지 말고 넓은 눈으로 세계를 보면서 정말 우리가 보고 담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열린 자세를 지향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잠시 동안의 네덜란드 엿보기를 했지만 제 세계관은 커다란 충격에 휩쌓여 넓은 세계로 항해해 나아갑니다.

 

추신: 네덜란드를 3가지 단어로 규정한다며, 자연스러움, 포용력(자유), 절약이라 생각을 가집니다. 즉 절약이 가장 밑 바탕이 되고 그 속에 자연스러움과 포용력이 녹아 있다고 생각을 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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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해ABC북 1
스테판 멜시오르 외 지음, 박혜영 옮김 / 창해 / 2000년 12월
평점 :
절판


어떤 대상물을 다른 것과 비교한다는 것은 정말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만은 넓은 아량을 부탁드립니다.

우리나라 근대화 초기에 박영희와 김기진이 내용형식 논쟁에 관하여 열띤 토론을 벌린 적이 있습니다. 오늘에서는 책의 편집에 관한 비평을 추가하여야 하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은지는 며칠 전이지만 아직도 책을 펼치면 머리가 아픕니다. 우선 눈앞에 지도 한장이 있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정하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에 대한 여정을 살펴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에 관한 정보, 그곳 명승지의 정보나 교통정보, 경비 등에 대한 자세한 정보도 중요하지만 간결하고 쉬운 길찾기를 설명해 놓아야 할 것입니다. 길찾기가 어렵다면 과연 그 지도를 계속 볼 수가 있을까요? 저는 다른 지도를 보고 말 것입니다. 창해ABC북 시리즈인 [차] 역시, 쉽지만은 않은 알림을 해 주었습니다.

차에 대해서 조금 알고 싶은 욕심에 들은 책은, 다양한 정보를 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간단한 정보의 단순 나열과 복잡함은 책을 과연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상당한 의문을 들게 했습니다. 아울러 다른 분이 말씀을 한 것처럼 우리나라도 차에 대해서는 무심하지 않은데, 소홀하게 다루고 있었습니다.

대원사에 펴내는 빛깔있는 책들 시리즈인 [다도]는 외부적인 즉 우리나라에 한하여, 차를 어떻게 타야 하는가와 다기에 대해서도 상세한 그림이 나와 있어 읽기가 편했습니다.

창해 ABC북 시리즈인 [차]를 앞서의 다른 분은 "사전식으로 된 구성이 사람을 아주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그리고 칼라 삽화들"에 대한 감탄을 드러냅니다. 전, 저와는 많이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가집니다.

적어도 제가 읽기에는 너무나 단락적인 내용에 의해 큰 흐름을 쫓을 수가 없었으며 혼란스러웠습니다. 아울러 우리나라에 관한 점이 너무나 안타깝게 비춰지는 작품입니다. 다시 책을 펼쳐보지만 쉬이 읽기지지는 않을 듯합니다. 물론 사전식 구성과 다양한 삽화를 좋아하신다면 좋은 책이 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추신: 내용에 관한 평 보다는 편집에 관하여 몇 자 적어 보았습니다. 참고로 차를 좋아하신다면 [다도]라는 책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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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수일기
목수 김씨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일기를 쓴다는 것은 부러운 일이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검사용 일기라도 쓴 기억이 있고, 사춘기 시절에는 세상에 대한 울분으로, 대학을 다닐 때에는 연애편지를 쓰 듯 일기를 끄적 그린 적... 징검다리마냥 띄엄띄엄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일상의 힘겨움이라는 핑계를 통해, 내 일기 적지 않음을 합리화한다. 일기를 적는 사람에게 경의를 표한다.

사춘기 시절 잠시나마 비밀일기를 적은 적이 있었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비밀일기에 대한 흔적은 퇴색되어만 간다. 일기를 적는다는 것은 사소한 일상에 대한 기록이며,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개인적 성찰이자 은근슬쩍 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뒤섞인 글쓰기가 되어간다. 은근쓸쩍, 누구처럼 먼 훗날 내 일기를 봐 줄 사람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기교며, 사회 문제나 삶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적을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하지만 세상이 가장 무거운 것이 잠오는 눈꺼풀이며 가장 힘든 일이 일기를 꾸준히 적는 것임을 어설프게 안 오늘에는 쉬이 적히지 만은 않을 듯하다. 하하 모든 것이 내 게으름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고, 더 이상의 합리화는 비겁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목수일기. 지은이는 나무를 조각하면서 일기를 적는다. 그 시간이 하루 이틀이 아닌 긴 시간을 통해 일기를 적어 내려갑니다. 한달에 한 번(?) 쯤 적는 일기에는 나무와 나무를 조각한 이야기와 그림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냥 장작불을 지피기 위한 불살개로 밖에 비취지 않든 나무가 목수에게로 가니, 그 만의 꽃이 되어 활짝 피어납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것을 시나브로 느낍니다. 그리고 책에 대해 욕심을 내 듯, 좋은 나무를 보면 욕심을 내는 지은이의 모습은 어딘가 나와 닮았다는 모습에 피~씩 웃음이 머뭅니다.

하지만 조금은 아쉽기만 합니다. 시간이 흘러감에 나이를 쌓아가는 것이 필시, 성숙에 대한 탐구가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진 내게 지은이는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습니다. 재목(材木)이 보이면 욕심을 내는 모습은 한 해 두 해가 바뀌어도 변함이 없 것 만, 계속 다듬는 조각에 대한 성찰도 없습니다. 즉 재목에 대한 욕심과 삶에 대한 성찰이 변화가 없습니다. 물론 글이라는 것이 어떠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쓰기를 한다면, 주입식 성찰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은근슬쩍 바란 것은 일상에서 녹아나는 자연스런 지은이의 성찰이였습니다. 지은이는 이런 모습이 비밀일기가 되든가 혹은 아무런 성찰을 하지 않았음인지, 살짝 비켜가고 있습니다. 건조한 나무 다듬기 글은 계속적인 반복이 되며, 이러한 글을 읽는 제게는 조금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한 지은이의 자존심은 너무나 도도합니다. 지은이는 개울가에서 통가리는 물고기를 잡아서 어항에 넣어 둡니다. 그런데 물고기들인 어항 밖에서 죽어 있는 것(또는 어항 속에서)입니다. 지은이는 이런 이상야릇한 일에 궁금증이 일어나 유심히 관찰하던 중에, 모든 것이 통가리 때문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통가리는 다른 물고기가 자기 몸을 슬쩍 스치기만 해도 강한 독침을 쏘며, 이 독침을 맞은 물고기들이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안타까움을 어여삐 여긴 지은이는 통가리를 엄벌에 처한다는 명분으로 저녁에 찌개를 해먹습니다. 애초에 통가리를 어항이라는 좁은 공간에 잡아 넣지 안았다면 전혀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텐데... 지은이는 또다른 창조주가 되어 세상을 평가하는 시선이 책을 읽는 내내 군데군데 보였습니다. 이는 자연의 일부가 아닌 자연을 뛰어넘는 또다른 창조주로 착각하는 오만함이 거북스럽습니다.

위와같은 시선은 다른 부분에서 보입니다. "모르던 바는 아니지만, 예전에 집안에서 쓰이던 목물들이 그렇게 순하고 소박한 모양새를 가지게 된 이유는 서민들의 질박한 품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무들이 그런 모양으로 만들 수밖에 없게 생긴 까닭이 더 컸을 것이다. 단순하고 투박하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던 목물들이 후대에 와서 소박한 자연의 미학으로 치장되는 것은 다시 생각해볼 일이다.(191쪽)" 지은이는 몇 년 동안의 목수생활로서 우리 선조들의 생활을 단정지어 버립니다. 물론 후대에 와서 미화되었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미화되었다면 이러한 근거를 밝혀야 할 것이며, 단순 소박하다는 앞 연구자들의 견해를  아무런 근거없이 무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글쓰기가 합리화를 위한 틀로 쓰여져 있습니다. 분명 지은이도 확실한 근거도 없이, "소박한 모양새를 가지게 된 이유는 서민들의 질박한 품성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자기만의 생각을, "미학으로 치장"되는 것은 생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가정을 사실화하여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글쓰기는 위험하게 다가옵니다.

삶에 대한 시선이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가 않다면... 우리의 삶이 여기까지는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은이의 글쓰기는 어제 일기와 오늘 일기에 다름이 없으니, 큰 성찰이 없는 느낌을 많이 받습니다. 목수일기는 기계적인 말투에, 어설픈 생각으로 자기 합리화하는 이야기, 만물 위에 존재하는 조물주의 시선으로 보는 듯 해 많은 아쉬움을 남깁니다.

추신: 제가 본 시선은 삶에 대한 성찰을 엿보는 글쓰기였습니다. 이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찰이기에 저의 견해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이 아니라, 열린사회의적이라는 개인의 시선이라는 것으로 봐 주십시오^^ 아울러 이 책은 통독(通讀)하지 않았으며 부분적 정독(精讀)으로 하였기에 제가 못 본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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