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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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그야말로 다양한 종류의 경험을 ‘산다’. 하기야 돈만 많다면 못할 것이 없는 세상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는 예외다. 그것은 바로 고통. 엄밀히 말하자면 죽음의 고통이다. 사무친 외로움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높은 곳에서 몸을 던지는 누군가와 곤궁한 삶에 배를 주리다 죽는 순간마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종이에 써놓고 가는 사람, 편안한 삶을 포기한 채 사회 부조리에 온몸으로 맞서다 공권력의 희생양으로 허망하게 유명을 달리하는 투사까지. 돈으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하는, 그 자리에 서보지 않은 이는 감히 경험이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죄가 되는 죽음의 고통. 소세키는 말한다. 이런 고통을 '맛본' 사람만이 문학자가 될 수 있다고. 




(…) 문학은 말이지요, 학문이나 학문 연구를 방해하는 것이 적이 됩니다. 예를 들면 가난하다거나 바쁘다거나, 압박이나 불행이나 비참한 사정이나 불화나 싸움 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것들을 피해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얻으려고 합니다. 문학자 역시 지금까지는 그래왔습니다. 그래왔을 정도가 아니지요. 여러 학문 중에서 문학자가 가장 여유로운 시간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여겨져왔습니다. 웃긴 것은 당사자들조차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것들이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입니다.

p.100



소세키의 말에 따르면 문학자는 세상의 좋은 것만 느끼고 그것을 책에 담아 먹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다. 함민복의 곤궁함과 김신용의 비행을 느껴본 독자들은 자전거 좋아하는 모 작가가 라면 어쩌고 운운하는 가난에서 어떤 얄팍함을 간파하기 마련이다부실한 경험에 문장이라는 양념을 쳐놔서 분간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지만, 그의 일상 언어(인터뷰 등)를 자주 접하다 보면 단번에 구분할 수 있다. 그게 조미료에 불과하다는 걸. 


영국의 작가 잭 런던은 20세기 초 산업 자본주의가 가져온 호황기 런던 밑바닥 삶을 탐구하고자 거리의 노동자가 되었다. 그곳 곤궁한 사람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런던 이면에 어떠한 인간적 고통이 존재하는지 그는 몸소 체험했고 그 경험이 고스란히 담긴 책이 바로 『밑바닥 사람들』 이다. 이 책은 훗날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에 영감을 주기도 했다.


에밀 졸라는 어떤가? 그는 오늘날 프랑스 인권의 토대를 마련한 '드레퓌스 사건' 당시 선두에 서서 누명을 쓴 대위를 위해 자신의 작가적 지위와 명성을 포기하고 자국 프랑스와 맞선위대한 작가였다. 소세키가 말한 '고통을 맛본' 문학자란 바로 이들인 것일까? 힙합에서는 이것을 흔히 ‘스트리트 크레디빌리티’ 라고 한다. 경험에서만 나오는 일종의 에토스인 것이다. 오늘도 따땃한 방구석에서 키보드나 두들기는 나 같은 사람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작가 정신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그들의 궤적을 훑으며 그저 사색하는 길 외에는 어쩔 도리가 없을 성싶다. 


하지만 정말 나 같은, 그러니까 경험이 없는, 고통을 모르는 사람들은 소세키의 말처럼 진정한 문학인이 될 수 없는 걸까? 하지만 나는 위대한 문학이 반드시 어떤 고통을 동반해야만 탄생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물론 그런 경험이 위대한 문학을 만드는 밑거름임을 부정하진 않겠다. 실제로 지금 우리 삶을 바꾼 몇몇 문학 작품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다만, 그것이 마치 불변의 테제처럼 여겨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쓴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이며 좋은 문학이 될 수 없다. 하지만 진정 ‘안다는 것’ 은 무엇인가? 그것이 꼭 고통 속에서만 얻을 수 있는 산물일까?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고통과 함께 살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이 모두 좋은 글을 써내는 것은 아니다. 또 누군가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비교적 유유자적하며 살다가 몇 세기를 굳건하게 버텨낼 고전 작품을 여러 개나 써내기도 한다.


해서 나는 감히 주장한다. ‘안다는 것’ 이란 반드시 고통의 여부나 경험의 넓이와는 비례하지 않는다고. 안다는 것, 그러니까 지혜란 어느 작은 경험이라도 그것을 사유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질적 향상이 일어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가진 경험의 넓이를 자랑하는 사람은 많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런데 그런 경험은 창고에 쌓아만 둔 채 정리하지 않는다면 한낱 쓰레기에 불과할 뿐이다. 앞서 열거한 좋은 문학가들은 결국 단순히 고통에서 그것을 건져낸 사람이 아니라 그 고통을 부단히 사유했기에, 위대한 작품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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