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진실
존 르 카레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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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 이후 마치 암세포처럼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은 존재가 있다. 지난 3년간 한국 사회에서 일어났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 글자, 국.정.원. 대체 이들이 관여되지 않은 사안이 있기나 한 것인지 의구심이 드는 가운데 지난여름 의문의 사건 하나가 세간을 혼란에 빠트렸다. 바로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이다. 공식 발표된 정보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바보가 아닌 이상 도무지 믿어 넘기기 어려운 그 일은 언제나 그랬듯 온갖 가십성 음모론들만 남긴 채 냄비처럼 식어버렸다. 물론 나 또한 그 냄비 중 하나였고. 그리고 얼마 전 이 소설을 읽다 문득 잊혀졌던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부의 기밀 공작, 의문의 자살, 서둘러 화장된 시신. 이것은 비단 소설 속 이야기인가?


르 카레가 SIS(영국 정보국 비밀정보부) 출신 작가라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똑같은 SIS 출신인 이언 플레밍의 소설과는 다르게 그의 작품에서 그려지는 요원들은 대개 평범하며 추레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나는 이쪽이 좀 더 진실에 가깝다 본다. 소설 속 인물 키트 프로빈은 우리가 욕하던, 한국으로 치자면 국정원에 해당하는 부류이자 커리어 통틀어 뭐 하나 제대로 이룬 것 없이 쓸쓸한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다. 그런 그에게 퍼거스 퀸이라는 신임 외부무 차관의 은밀한 제의가 들어온다. 영국령의 작은 섬 지브롤터에서 ‘야생동물작전’으로 명명된 반테러 소탕 작전이 곧 벌어질 예정이고 그는 여기서 차관의 눈과 귀의 역할만 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프로빈은 거진 강제로 이 작전에 투입되지만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난데없는 작전 성공 소식만을 접한 채 강제 귀환한다. 뒤이어 쫓기듯 치러진 정부의 기사 작위 수여와 이어진 달콤한 은퇴 생활. 그의 머릿속에서 의문의 ‘야생동물작전’이 서서히 희미해져 갈 때쯤 당시 작전에 함께 투입되었던 동료 ‘젭’이 찾아오고 그날의 진실이 드러난다.




자네가 무슨 정보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망상이든, 진술이든, 전자장비든, 말하지 마―자네가 파멸하게 전에 파기해. 어리석은 계획들은 화이트홀 구석구석에서 매일 같이 오가다가 폐기돼. 부디, 자네의 미래를 위해서, 이것 역시 그중 하나라는 사실을 받아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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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작품을 읽고 나는 한국 국정원에 대한 막연한 불신과 적대감을 철회했다. 연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해 무조건적인 비난보다는 이제는 조금 더 냉정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사실 여하를 막론하고 눈살부터 찌푸리게 만드는 그들을 말이다. 사실 국정원은 연민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엄연히 그들이 자초한 이미지일 터. 하지만 지난여름의 사건과 이번 독서 경험은 어쩌면 내가 모르는 ‘민감한 진실’이 있을지도 모르며 국정원 그들 또한 소설 속 젭과 같이 정부에게 이용되고 버려질 수 있는 한낱 소모품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불러왔다. 특히 이 소설은 다른 작가도 아닌 바로 그들과 같은 길을 걸어온 존 르 카레가 쓴 이야기이기에 호소력이 더욱 짙다. 


르 카레 소설 속 인물들의 특징은 ‘무모한’ 도전을 반복한다는 점이다. 더불어 그 무모한 도전에 화답이라도 하듯 르 카레는 자신이 창조한 그들에게 기꺼이 실패를 선물한다. 혹자는 의미 없는 작업이라 비난할 것이다. 현실감을 살리는 건 좋지만 너무 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 실패를 주목한다. 만약 그들의 도전이 성공으로 끝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그것은 진실을 가리는 거짓된 작업이다. 포장된 진실. 다만, 르 카레는 몇 백 페이지에 걸친 이들의 실패 역사가 사람들이 노상 미디어로만 접한, 선별되고 잘린 결말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숭고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설한다. 그의 소설은 그런 실패의 자명함에도 굴하지 않는 소수에 대한 찬사와 같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수많은 실패에 하나씩 이름을 붙여주는 작업. 만일 세상 사람 모두가 입을 모아 비난하는 부류의 인간을 어느 개별자의 유일한 삶으로 조명하는 것이 문학의 사명이라면 『민감한 진실』은 그 사명에 대한 가장 명확한 응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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