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금요일 오전 남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두통약을 찾았기 때문이다. 함께 출근하면서 병원에 가보라 신신당부했다. 역시나 출근하고 얼마 안 되서 "코로나 양성이래." 라는 씁쓸한 메시지가 날라왔다. 수액 주사를 맞고 집으로 간다 했다.

문제는 연이어 일어났다. 오후 4시쯤 시할머님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하필 이 시기에 돌아가시다니 우연 치곤 너무 기가 막혔다. 사실 며칠 전 우리 내외는 시할머님을 찾아뵈러 다녀왔었다. 고령의 나이에 코로나 확진으로 상태가 무척 좋지 않으셨기 때문에 얼마 버티기 힘드실 거라는 판단에서였다. 시할머님을 뵙고 온 뒤에 남편이 확진이 되었고 나도 사실 잠복기일 수도 있어서 결국 시할머니 장례식장에는 가보지도 못했다.

마음은 계속 무거웠고 어디 돌아다닐 수도 없는 형편이라 방콕하며 주말을 보냈다. 책을 읽는 것만이 이 복잡한 기분을 떨쳐버리게 하는 해방구였다.

남편은 토요일에는 괜찮았는데 어제부터 또 몸이 안 좋은지 하루종일 잠만 잤고 오늘도 출근하지 못했다. 점심 먹고 나서 상태를 물어보니 퇴근 때 인후통 약을 사다 달라고 하는 걸 보니 상태가 여전히 별로인 것 같다.
KF 마스크를 쓰고 다시 종일 생활하게 된 것이 좀 어색하다. 기존에도 대중교통 이용할 때는 썼지만 사무실에서는 쓰지 않았는데 혹시나 몰라서 남편이 코로나 기간 끝나기까지는 써야겠다.


#2

토요일에 <여전히 미쳐있는> 이 도착했다. 주말에 유일하게 기쁜 소식이었다.




그리고 <조용한 미국인>을 읽으면서 어제 <베트남 전쟁>을 주문했다. 이 책은 진작부터 읽어야지 했는데 얼마 전에 개정판이 나왔더라. 더는 읽는 것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여전히 소설 읽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아직도 앞부분을 헤매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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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7-17 17: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삶은 언제나 그렇듯 통제할 수 없는
그런 영역이 아닐까 싶습니다 -

‘책이 해방구다‘라는 말씀이 아주
절절하게 다가왔습니다.

모쪼록 힘겨운 시기를 잘 이겨내시
길 기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3-07-17 17:58   좋아요 1 | URL
삶에서 가장 힘겨운 부분이 역시 이별인 것 같습니다.
위로의 말씀 고맙습니다^^

페넬로페 2023-07-1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정말 원하는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요. 할머님의 명복을 빌며,
남편분 빨리 쾌차하시길 바래요~~

겨울호랑이 2023-07-17 1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건수하 2023-07-17 2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분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편분 얼른 완쾌하시고 화가님은 넘어가시면 좋겠구요.. 할머님께 나중에 인사드릴 기회가 있겠지요.

우끼 2023-07-17 21: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다락방 2023-07-17 21: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거리의 화가 님도 남편분도 몸과 마음 모두 잘 추스르시길 바랍니다.

희선 2023-07-18 02: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할머님이 돌아가신 것도 슬프겠지만, 장례식장에 가지 못하는 것은 더 마음 아프겠습니다 할머님 돌아가시기 전에 한번 뵙기라도 해서 다행입니다 나중에 다른 곳으로 할머님한테 인사하러 갈 수 있겠지요 남편분 건강 좋아지시면 거리의화가 님과 함께 가시면 되겠네요 할머님 명복을 빕니다


희선

책읽는나무 2023-07-18 06: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남편분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곁에서 지켜보시는 화가 님도 더욱 힘드실 것도 같구요. 두 분의 몸과 마음 잘 추스리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자목련 2023-07-18 1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가지로 힘든 여름을 보내고 계시네요.
그럴수록 잘 드시고 건강도 잘 챙기시길 바라요.
어떤 시간에는 할 수 있느 걸 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가 된다고 생각해요.

독서괭 2023-07-18 11: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구구 힘드시겠습니다 ㅠㅠ 시할머님의 명복을 빕니다. 코로나가 여전히 도는군요. 요즘 신경을 안 썼는데.. 고생 많이 안 하고 빨리 나으시길, 그리고 화가님 옮지 않으시길!!
 
나도 루쉰의 유물이다 - 주안전
차오리화 지음, 김민정 옮김 / 파람북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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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루쉰이 '문학가∙사상가∙혁명가'로 규정되면서 주안의 지위가 어정쩡해졌다. 루쉰은 문학혁명의 선구이자, 외치는 자이자, 신문화운동의 기수였지만, 그의 혼인이 중매결혼이었던 것이다. 루쉰 세대에게 중매결혼은 보편적이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루쉰이 이미지를 훼손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1949년 이후 루쉰 연구가 전례 없이 중시되며 연구자들이 자료 발굴과 정리 작업에 많은 공을 들였지만 유독 주안만큼은 배제되어 관심을 끌지 못했다. 특히 극'좌'의 시대에 루쉰이 신단(神壇)에 오르며 우상으로 봉해지자 주안은 더욱 기피 대상이 되어 루쉰 연구의 금기(禁忌) 중 하나가 되었다. 모든 루쉰 전기에서 주안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녀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 P36

최근 들어서야 주안의 이름은 알려졌을 뿐 그 전까지는 그녀의 이름은 잊힌 존재였다. 루쉰의 문학, 사상적 위치 때문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녀는 왜 그동안 잊힌 존재여야 했을까.


중국 다섯 개 왕조의 옛 도읍이었던 베이핑(北平)도 떠들썩해서 고관대작이 구름처럼 모여 있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이 곳곳에 널려있다. 하지만 베이핑 궁먼커우(宮門口) 시쌴타오(西三條) 골목은 떠들썩한 세상의 적막한 구석이다. 이곳은 연탄을 실어 나르는 차가 오가는 푸청먼(阜成門) 성벽 부근에 있으며 인력거꾼과 장인, 빈민이 뒤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 시싼탸오 21호의 작은 사합원(四合院)에 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몸집이 왜소하고 얼굴이 좁고 길었으며 광대뼈가 튀어나왔다. 전족(纏足)을 하고 있어서 걸을 때 조금씩 비틀비틀헸다. 그녀는 명목상의 남편과 각방을 썼고 하루에 거의 세 마디만 나누었다. 아침에 일어나라고 부르면 '응'하고 대답하고, 자기 전에 북쪽 방 통로의 중문을 닫을지 말지 물으면 '닫아라' 또는 '닫지 말아라'로 대답했다. 간혹 생활비를 요구하면 '얼마나 필요한가?' 하고 묻고는 달라는 대로 주었다. 되도록 불필요한 말을 줄이기 위해 명목상의 남편은 갈아입을 옷을 버들고리의 뚜껑 위에 놓고 자신의 침대 밑에 넣어두었다. 그녀는 하인을 시켜 깨끗이 세탁한 후 버들고리 안에 잘 개어놓고 위에 흰 천을 덮어 자신의 침실 문 옆에 두었다. 이 여성은 바로 루쉰(魯迅)의 본처 주안(朱安)이다. - P6


주안의 주변의 사람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부인은 태어날 때부터 총명하고, 바느질과 자수에 능숙했으며, 예법을 잘 지켜 부모가 손바닥 위의 구슬처럼 사랑했다." 주안 집안의 여자아이들은 책을 읽고 글자를 익히는 것이 권장되지 않았으며, 기껏해야 규훈(조선 시대 '가훈' 같은)을 조금 읽을 뿐이었다. 1916년, 주안의 처가가 있던 사오싱에 간 쑨중산(孫中山)은 "사오싱에는 세 가지가 많다"라고 개탄했는데, 석패방(관아에서 절부와 열녀를 표창하기 위해 세우는 것)이 많고 무덤이 많으며 분뇨통이 많다고 했다. 신해혁명 이후에도 주안이 살던 사오싱에는 여전히 많은 여성들의 희생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루쉰은 친한 친구인 쉬서우창에게만 다음과 같이 침통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는 어머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라네. 나는 그를 잘 부양할 뿐 사랑 따위는 모르는 일이네."
가문과 사회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기 위해 루쉰은 주안과 결혼했지만 그는 며칠도 되지 않아 둘째 동생 저우쭤런을 데리고 일본으로 가고 주안은 독수공방 처지가 된다.


루쉰의 어머니인 루 부인은 그들 사이에 정이 없고 부부 같지 않음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아들이 왜 며느리를 탐탁치 않아 하는지 궁금해 했다. 루쉰은 "그 사람과는 대화가 안 통합니다"라고 말했다.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었던 가치를 지닌 환경에서 살아온 주안과 일본 유학을 하는 등 당시 신문물을 받아들이며 개혁과 진보를 외치던 루쉰은 맞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주안 입장에서는 외부의 잘 모르는 이야기만 하는 루쉰에게 제대로 된 답을 할 수 없었을 테고 열등감은 커지지 않았을까.


루쉰은 일기에서 단 두 차례 주안을 직접 언급했는데(앞서는 1914년 11월 26일자 일기) 모두 그녀를 '부인[婦]'이라 지칭했다. '婦'의 본래 의미는 '결혼한 여자'로, '아내', '며느리' 등을 지칭하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여성을 가리킨다. 전통적인 맥락에서 '婦'는 복종의 뜻을 지닌다. '婦'에도 아내라는 뜻이 있지만, '妻'가 가리키는 것보다 더 광범위하다. 루쉰은 편지나 글에서 주안을 언급하며 '우처[賤內](천한 안사람)', '안사람[內子]', '부인[太太]', '큰마님[大太太]' 등의 호칭을 사용했는데, 이는 제3자에게 주안을 언급할 수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사용했던 자조적인 말투였다. - P185


루쉰은 초기 소설에 '신여성'에 대해 별로 쓰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이런 부류의 여성과 교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20년대의 베이징은 신문화의 발원지로서 수많은 지식인이 이곳으로 몰려들었으며, 그중에는 각지에서 배우기 위해 베이징으로 온 여학생들도 포함되었다. 이 시기는 5∙4신문화 운동 초기보다 '자유연애', 남녀의 사교에 대한 사회적 포용이 더 커졌다. 이때의 루쉰은 더 많은 여성과 접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루쉰이 베이징여자고등사범학교의 강사를 맡은 후에는 여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는데, 그녀들은 주안과는 사뭇 다른 신여성들이었다. 이 중 루쉰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게" 한 여성은 쉬광핑이었다. 그는 1926년 8월 26일 베이징을 그렇게 떠나 쉬광핑과 동거를 시작했다.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쉬광핑은 다음과 같이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남녀가 함께 살면서 당사자 외에는 그 어떤 부분도 구속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서로 의기투합해서 동지처럼 대하며, 서로 친밀하고 서로 존중하며, 서로를 신뢰한다면 어떤 상투적인 격식도 필요 없다. 우리는 일체의 봉건 예교를 타파해야 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 자신은 항상 자립해서 먹고살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으니, 함께 살 필요가 없어진다면 곧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다.


주안은 예상을 하고 있었지만 마음 아파했고 주변 사람이 그녀에게 앞으로 어떡할 것인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답한다.
"그분 뜻대로 따르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좋아질 날이 올 줄 알았단다. 나는 담장 밑에서 조금씩 조금씩 위로 기어 오르는 달팽이처럼, 느리긴 해도 언젠가는 담장 위로 오를 수 있을 거로 생각했어. 하지만 지금은 어쩔 도리가 없구나. 더 이상 기어오를 힘이 없어." - P233


루쉰은 상하이에서 쉬광핑과 10여년 간 동거한 끝에 1936년 10월 19일 사망한다. 루쉰의 장례식은 상하이에서 거행되었다. 그의 유해는 사망 당일 오후 만국(萬國) 장례식장으로 이송되어 빈소가 마련되었다. 각계 인사들이 루쉰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찾아왔으며, 22일 오후 수천수만 명으로 구성된 장례 행렬이 그의 영구가 만국공묘로 운구되어 천천히 매장되는 것을 목송했다. 베이핑 집에도 20일부터 빈소를 마련해 조문 온 친지와 친구들을 맞이했다. 주안은 소복을 입고 향을 피우며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푸른 연기 속에서 남편의 영혼을 추모했다. - P269


루쉰이 세상을 떠난 후 쉬광핑은 루쉰 전집의 출판과 편집에 전력을 다하여 그의 작품과 사상을 널리 알리는 데 열과 성을 다했다. 이를 위해서 루쉰 전집을 출판하기 위한 저작권을 자신에게 위임해달라고 부탁했고 루 부인은 동의했다. 주안은 쉬광핑이 저작권 수입의 일부를 부쳐 자신의 생계를 부양하는 것에 고마워했으며, 문제가 생기면 그녀를 찾아 상의하는 등 가족으로 여겼던 것 같다. 쉬광핑도 전쟁 막바지 화폐 가치가 하락하고 물가가 상승하면서 모든 사람의 형편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방법을 강구해 생활비를 부쳐 그녀의 생활을 보장했다. 두 여성은 다른 삶을 살았으나 루쉰에 대한 애정만큼은 공통적이었다.


1947년 6월 29일 주안은 69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유언으로 남편 곁에 묻히기를 원했으나 시즈먼 밖의 보복사에 임시 묘소에 묻혔다. 쉬광핑은 "노부인의 묘소 옆에 땅을 사서" 그녀를 루쉰의 어머니와 함께 반징촌에 있는 묘지에 매장하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남편 곁에도, 시어머니 곁에도 묻히지 못한 그녀의 묘는 더군다나 '문화대혁명'의 '사구(四舊)'(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의 타파 운동 때 훼손되었다. 죽어서도 이런 취급을 받다니 참 너무한다 싶다.


주안은 자신과 루쉰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우 선생은 나한테 결코 나빴다고 할 수 없어요. 서로 다투지도 않았고 각자의 삶을 살았을 뿐이죠. 저는 선생을 이해해야 해요." 그녀는 쉬광핑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쉬 선생은 제게 정말 잘해주었어요. 제 생각을 이해하고, 저를 부양하기 위해 끊임없이 돈을 부쳐주었죠. 그녀는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주안이 루쉰과 차라리 붙들고 싸우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아니, 어쩌면 둘은 애초부터 맞지 않았던 사람이었는데 억지로 맺어진 연인지 모르겠다. 집안의 명에 따라 결혼을 한 주안은 평생을 시부모를 봉양하며 외롭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 루쉰은 형식적으로만 그녀를 대했을 뿐 애당초 그를 부인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안타까운 그녀의 운명에 가슴이 쓰라린다. 이런 여성들이 당시에 얼마나 많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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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7-17 09: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주안의 삶이 역시나 처연합니다. 봉건적인 결혼제도는 참 여러 가지로 문제가 많은 것 같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나저나 쉬광핑 저 여자도 꽤 괜찮은 사람이었군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4   좋아요 2 | URL
저희 부모님도 중매결혼이셨어요. 몇 십년전만 해도 중매결혼이 흔했던 걸 보면 그 당시 분들은 참 결혼생활을 이어나가기가 힘들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저도 어렸을 적 보고 자란 경험 때문인지 꽤 오랜동안 독신을 꿈꿨답니다.

청아 2023-07-17 10: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성의 변증법>에서 ‘사랑‘에 대한 대목을 읽다가 이 글을 보니 화도 좀 나고 마음이 복잡하네요.

거리의화가 2023-07-17 17:26   좋아요 1 | URL
이 책 읽는 동안 저도 좀 마음이 복잡해지더라구요. 같은 여성으로서 감정적이 될 수밖에 없는? 어쨌든 이 책 덕분에 루쉰의 주변 인물들과 가정사 등에 대해서 알게 되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희선 2023-07-18 0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국도 다르지 않았겠습니다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해도, 공부한다면서 다른 데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 많았겠죠 남성은 그렇게 하는 건 비난하지 않아도 여성이 그러면 비난했겠네요 이런 건 지금도 아주 달라지지 않았군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3-07-18 13:35   좋아요 0 | URL
네. 누군가가 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게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여성이 꿈을 가지는 것이 불가능했던 시절이 너무 길었네요.
 
중국의 역사 : 송대 중국의 역사
스도 요시유키 외 지음, 이석현 외 옮김 / 혜안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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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 시기의 역사를 훓어 읽다가 당, 송 시기의 역사를 좀 더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확인해보니 번역되어 나와 있는 책들 중 마땅한 것이 없었다.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나 <신당서>, 송나라의 역사인 <송사>는 당시 쓰인 한문이나 오늘날의 중국어 번역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지만 차마 도전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래도 당나라의 태종과 고종은 한국 사람에게도 익숙한데 고구려와의 외교 관계를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이번에 당나라의 문학 주요 장르였던 당시를 잠시나마 엿보았던 것은 수확이었다.
하지만 송나라의 역사는 뭐 하나 짚히는 것이 없이 두루뭉술했다. 그래서 찾아보다 만난 것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의 저자는 스도 요시유키와 나카지마 사토시다. 스도 요시유키는 1907년 생으로 동경대 문학부 교수를 거쳐 동양대 교수를 역임했다. 나카지마 사토시도 1907년 생으로 동경교육대 교수를 거쳐 대동문화대 교수를 역임했다. 둘 다 같은 해에 태어나 같은 학교 출신이어서 연이 닿은 것인지 같은 책을 썼다는 게 공교롭게 느껴졌다. 일본 저자가 쓴 책이라 끌리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이 책은 2004년도에 현지에서 출간되었으나 번역은 2018년에 되었다. 2004년 한국을 생각해봐도 책에 고어나 한문이 들어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쉽게 쓰여진 책을 찾는 것이 드물던 시기다. 이 책도 그 무렵 편찬이 되었으니 짐작이 갈 것이다. 대부분의 역사 용어들이 해석되어 있지 않고 한문 그대로 적혀 있는 경우가 많아 읽기가 까다롭다. 그래도 한글 옆에 한문이 있으니 원문의 뜻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는 있다.


송나라의 역사를 생각 이상으로 세세히 다루고 있어 만족스러웠는데 특히 경제 파트가 그렇다. 송이 성립하고 남송 정권이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정치, 외교, 군사, 경제, 문화 등 다양한 파트로 나누어 설명한다. 이 중 압권은 지방 지주층들의 토지 점유 과정, 화폐 경제의 구조에 대한 설명, 왕안석의 신법에 대한 개혁 내용이다. 기존에 읽었던 책들로는 부족했던 부분을 채워 넣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다양한 지도와 표, 이미지 등을 제공하여 이해를 돕는다. (처음에 별점 3을 생각하다가 4를 준 이유)


송은 문인관료체제였다. 문인관료는 주로 과거시험을 통해서 발탁된 자들로 응시자는 지주층 자제들이 많았다. 이들은 황제의 권력 기반이었으므로 황제는 그들의 바람에 따라 (굳이 필요하지 않은) 관료들의 숫자를 늘렸고 다른 때보다도 관료에게 주는 대우가 후한 편이어서 국가 재정에 문제를 일으켰다. 문관 중심의 정치로 군사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는데 요와 서하, 뒤이은 금과 원까지 대응하는 동안 병사 수가 급증하여 국가 재정에 심한 압박을 가하게 된다.


신종 대 왕안석의 신법 개혁은 생산력을 증진하고 재정난을 타개,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시행되었다. 신법은 주례 정신으로의 복귀를 표방하였으나 내용적으로는 사회진보의 방향과 합치되는 것들이 많았고 고위 관료와 결탁한 대지주, 대상인의 힘을 억제하고 군주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왕안석은 우선 청묘법을 시행하여 농민과 소작인에게 낮은 이자로 청묘전을 빌려주어 보릿고개 기간 동안 농민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지주의 고리대적 수탈을 방지하였다. 다음으로 면역법을 실시하여 차역의 무거운 부담으로 농민이 파산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면역전을 징수하여 차역 담당자를 모집하고 지주들로부터도 조역전을 징수하여 겸병을 억제하고자 했다. 또 보갑법을 시행하여 농촌에서 보갑을 조직하고 도적을 잡아 농촌의 치안을 유지하고, 중요 지역에서는 교련을 실시하여 향병으로 활용했다. 보마법을 실시하여 말을 사육하여 군마로 이용했다. 조세 불평등에 대해서는 방전균세법을 시행하여 토지를 측량하고 그 비옥도에 따라 등급을 나누어 과세함으로써 불균형을 시정하고자 했다. 또 농전수리법으로 강남에서 수리전을 대규모로 개발하고 제방을 축조하여 농업생산의 증대를 꾀했다. 북방에서는 어전법을 시행하여 많은 척박한 땅을 옥토로 바꾸었다. 균수법은 대상인이 상품값을 조작해서 이익을 챙기는 일을 막고 운수비를 줄여 물가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같은 목적으로 실시된 시역법에서는 상인에게 낮은 이자로 자금을 빌려주는 방법을 시행했다.


하지만 채경의 악정은 금나라의 침략으로 인해 북송을 멸망으로 이끈다. 송의 황족은 포로가 되어 금나라로 끌려갔고 포로 신세를 면한 강왕이 송의 부흥을 지향하는 이들을 이끌고 남송을 세운다. 남송의 중심 세력들은 구법당 정치가들이었다.
남송시대가 되면 금과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주전파와 주화파 간에 의견 대립이 정치 주요 의제가 된다. 송은 종래 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오랑캐라 천시했던 여러 국가들에게 압박을 당하고 여러 차례 화해를 해야 하는 굴욕을 겪으면서 한쪽에서는 변화해야 한다는 이들, 다른 한쪽에서는 민족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이들로 나뉘게 된다. 서하, 금이 망하고 몽골이 등장하면서 남송도 멸망한다.


송대는 중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유교는 전통유학에서 새로운 유학인 신유학(송학)이 생겨났다. 송학은 동아시아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친다. 또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인쇄술이 발달하고, 나침반을 항해술에 사용하였으며, 화약을 병기로 사용하는 등 세계사적 의의를 갖는 과학기술의 발달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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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의 맹은 양국의 주장을 타협 절충한 외교교섭의 산물이다. 거란은 관남 땅을 포기하는 대신 실리를 취했으므로 송군을 결정적으로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던 실정을 염두에 두면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은 연운지방의 회복이라는 숙원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거란을 복종시키지도 못해 중화적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겨우 아우에 대한 형이라는 명목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72

송과 서하 사이에 화평이 실현된 직접적인 계기는 송·거란 - P87

관계의 추이였다. 거란은 송이 서하와의 전투에 국력을 쏟고 있는것을 틈타, 송에게 관남 10현의 땅을 요구하여 결국 세폐을 증액시키는이익을 보며 화친을 회복했다.
이러한 행보는 서하에게 바람직하지 않았다. 거란이 우호국인 서하의 혈전을 이용하여 혼자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요 사이에 화평이 실현된 상황에서 서하 역시 국내상황에 비추어 송과의 화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평은 말할 것도 없이 송으로서도 바라던 바여서 화평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 교섭에서의 걸림돌은 서하가대등외교를 기대한 데 비해 송은 서하를 신하로 보려고 한 점이었다.
1044년(송 경력慶曆 4, 서하 천수예법연조天授禮 이원호가 송에 신하의예를 취하여 하국주로 책을 받고 국경을 획정하였으며, 매년송으로부터 세폐로서 비단 13만 필, 은 5만냥, 차 2만 근을 받고나아가 매년 다음과 같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총계 은 등 7만 2천냥,
비단 등 15만 3천필, 차 3만 근). - P88

관호형세호는 장원을 소유하고 농노적인 전호의 경작에 바탕하고 있었다. 즉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위는 장원과 거기에 나타나 있는 봉건적인 지배.종속관계인 지주전호관계를 기반으로해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관료로서 정치를 움직이고지방에서는 호족으로서 향리를 지도하여 지배계급으로 활동하였다.
더욱이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서 기술한 지주전호관계가 이후 원·명·청대를 통하여 전호의 지위 상승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생산관계로서 지속되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송대에 성립한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 P95

송초 이래 국내산업의 발달, 상품유통·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진종(997-1022) · 인종 이후 국가 재정수입은 해마다 늘어나고 국고에는 막대한 잉여가 쌓였다. 한편, 재정지출 부문에서는송나라 군대의 허약성을 병사 수의 증가로 보충하려 한 데서 나온군사비의 급증, 문치정치에 따른 용관의 중대, 요와 서하에 대한세계 지출 등으로 크게 팽창하여 결국 세출이 세입을 웃돌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종 말부터 영종대(1063-1067)에 걸쳐 재정은 적자로 돌아서고, 이는 중소 농민과 중소 상인을 보호할 필요성과 맞물려 신종 때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었다. - P96

송대 화폐의 특징적인 현상으로서 전황(동전의 부족, 돈 기근)이 있다.
전황의 원인은 상업이 현저하게 발전하여 유통액이 크게 늘고 외국무역이 성행하면서 동전의 국외유출이 증가한 데 있었다. 거기에다 동전을 녹여서 불상이나 동기를 만들기도 하고 동전 가치가 등귀하자 부호들이 이것을 쌓아두게 된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조장했다. 전황은 지리적으로는 물산이 풍부하고 부유한 상인이 많은 동남의 여러 로와, 소비경제가 발달한 변경 부근이 심했고, 시대적으로는 주조액이 가장많았던 희령·원풍 시대가 심했다. - P120

송 초부터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될 때까지 국가재정은 삼사가관할하고 있어서 재상이라 해도 여기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청묘법, 면역법 및 여기에 부속된 방장·하도전河의 법, 농전수리법, 시역법 등 신법의 재정관계를 모두 사가 관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 새로운 재정은 모두 재상 왕안석이 장악하였다. 따라서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면서 국가재정은 종래처럼 삼사가 관할하는 것과, 재상인 왕안석의 지휘를 받는 사시가관할하는 두 계통의 재정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방재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의 전운사(조사)는 종래와 같이 삼사에 속하여 삼사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나, 신법을 시행하기 위해 창설된 제거상평사(사)는 사시에 속하여 신법 관계 재정을 담당했다. 이것이 원풍 관제가 반포되는 큰 요인이 되었다. - P191

휘종 때 재상에 오른 채경은 ‘원우간당비元祐‘를 세우고 구법당을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는 신법을 시행하였으나 이를 악용한 가혹한 정책으로 백성을 괴롭혔는데, 풍류천자 휘종에게 아첨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 환관과 결탁하고 장기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휘종도 정치에는 열의가 없고, 도교를 신앙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국비를 함부로 낭비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폐와 염인등의 유가증권을 남발하고, 절십대전과 협석전 같은 악화를주조하여 화폐제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관의 기강도 자연히 무너져 신법을 시행한다 해도 성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북송이 멸망하게 된 것은 결코 왕안석이나그가 시행한 신법 때문이 아니라, 휘종 같은 정치적 무능력자가 천자가되고 채경처럼 정치적 식견이 부족한 기회주의자가 재상이 되어 정치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 P196

휘종 때의 신법에는 환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있었다. 환관인 동관은 섬서·하동·하북로에서 균적법 시행하여 도시·향촌의 호시행에 곡물을 할당하고 이를 시가로 수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부정이개입되면서 결국 이것은 강제적 할당이 되었다. 또 공전법되어 이것을 환관인 양전과 이언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이언은공전을 늘리기 위해 인민의 토지를 불합리한 방법으로 박탈하고 게다가 무거운 세금을 화폐로 징수하여 천하의 원성을 샀다. 이것은 주면화석 함께 북송 멸망의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화북에과
송강 등의 반란이 속출하고, 양절로에서는(양산박)서는 양산락방랍의 난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화북은 금이 침입하기 전에 이미 수습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 P197

금은 송의 수도 개봉부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점령 후 이것을 어떻게처리할지에 대해 어떤 준비도, 계획도 없었다. 동북의 산속 오지에서튀어나온 여진인이 문화수준도 너무 높고 인구도 많은 한족을 통치할실력을 갖추고 있을 리 없었고, 그들 자신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이에 금이 생각해낸 한지통치책이 괴뢰국가를 세워 송을 - P239

이맡기고 자신은 배후에서조종한다는 방책이었다. 이 방책 아래 세워진 것이 장방창張邦의 초楚였고, 유예劉豫의 제齊였다. - P240

진회는 논공행상을 하겠다며 장군들을 임안부로 불러들여 한세충과 장준을 추밀사로, 악비를 추밀부사로 임명하여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중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는 여러 장수들 사이의불일치를 이용한 것도 있고 해서 의외로 수월하게 성공하였다(1141년4월). 이렇게 하여 남송 초 이래 군벌세력을 형성하고 항전을 주장하며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던 무장들의 힘은 약화되고 문관에 의한남송의 중앙집권정치가 회복되었다. 특히 여러 장군들 가운데 가장강경파였던 악비를 모반을 구실 삼아 옥에 가두면서 화평의 기반이마련되었다. - P256

진회는 화평을 실현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고, 반대자를 무너뜨렸으며,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독재정치를 강행했다. - P258

그러나 그가 주장한 화평은 송이 가진 국력의 한계를 높은 견지에서판단하고, 금의 내정을 제대로 살펴 금송 양국의 역학관계를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고 신념이었다. 그리고 이 결론을 실현시키기위해 그가 가진 모든 정치력을 쏟아부었다. 진회가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P259

강남개발은 진한秦漢 시대 이후 차츰 진행되지만, 역사상 특히 획기적인 진전을 보인 시기는 전후 두 차례다. 첫 번째가 육조시대고,
두 번째가 남송南宋시대다. 이 두 시기에는 모두 북방민족이 화북을점령 지배하면서 한족왕조가 강남으로 쫓겨 내려와 도읍을 강남에 두고 그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강남개발의 진전은 시대의 큰 흐름이었다. 남조시대의 비약기를 이어받아 수·당·북송 때 발전을 거듭하고남송 때 다시 비약기를 맞이하였다. - P316

송은 국경의 요지에 관영 무역장을 설치하고 이것을 각장権場이라고불렀다. 무역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관이 직접 무역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상인의 무역은 통제하고 세금을 부과하여 수입을 올렸다. 각장은 요를 대상으로 해서는 웅주州(하북성 웅현)·패주州(하북성 패현)·안숙군安肅軍(하북성 서수현徐水縣)·광신군廣信軍(하북성 서수현 서쪽), 서하를 대 - P334

상으로 해서는 진융군軍(감숙성 고원현固原縣)·보안군保安軍(감숙성 지단현志丹縣) 등의 국경지방에 설치하였는데, 무역 규모도 크고 제도도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은 송·금 무역이었다. - P335

송 통일시대에 해외무역은 더욱 번성하는데, 외국 상선의 내항과함께 중국 상선 역시 남해로 진출하여 자바.수마트라로 항해하고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페르시아 만으로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 P339

인쇄술의 발달등의 출판을송대의 학문과 사상의 발달, 종교 활동에 공헌한 것은과 출판사업의 성행이다. 당대의 불경·역본曆자서이어받아 오대 시대에 사천 성도를 중심으로 『구경 『문선文選』등』,
이 출판되었고, 중앙에서도 후당 이후 국자감을 통해 판 구경』이출판되었다. 문교文教를 중시한 송조에 들어와서는 인쇄 출판 문화가더욱 발전했다. 그 원인으로서 나가사와 기쿠야澤規矩는 자신의 저서『일본 한적의 인쇄와 역사』에서 다음의 7개 조항을 들었다. - P348

① 송대 인쇄술의 융성, ② 오대의 경서 관각을 이어받아 정경, 정사의관각을 촉진한 송조의 문치주의, ③학문의 흥륭, ④지묵판목紙墨板의 충분한공급, ⑤ 수험 준비서에 대한 필요성과 출판사업의 영리기업화를 낳은 과거제도, ⑥ 출판서적업의 독립, 7 대장경 등의 불서 출판을 촉진한 불교의 흥성. - P349

송대에 들어 통일정치의 시대가 되자 문치주의 아래에서 유학은 새로운 기운을 만났다. 유학 본래의 목적인 경륜經綸(도의道義에 의거하는 정치)‘ 정명正名(명분을 바로함)·수양의 자각을 심화시키고, 유학을 국가의 정치, - P352

개인 생활의 실제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즉 한·당 시대에 유행한 경전의 주석에 몰두하던 훈고학에서벗어나 불교의 흥륭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전개하였다. 또 외적으로 인한 어려움에 대응하여 정치사상을 진흥시키고, 정명론에 의해 화이의 구별을 바로잡는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이러한 신유학을 송학이라고 불렀는데, 천리와 인성을 명확히 했다고 해서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이학이라고도 한다. - P353

북송 말기에는 휘종이 특별히 도교를 보호하였는데 그것이 부패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도교계의 이 같은 폐해를 타개한 것이 남송 시대로, 금국 영내에서 왕중양王重陽(1112~1170)의 전진교全眞敎, 유덕인劉德의 진대도교道敎, 소포진蕭抱珍의 태일교太-가창시되었다. 유·불·도 3교의 융합사상에 입각한 이 종교들은 실천적이고 서민적이었다. 특히 전진교는 선종의 색채가 짙고 불로장생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후에 크게 발전하여 강남의 정일교正敎와 대립하며 중국 도교계를 양분하는 대세력을 이루게 된다. - P360

송 초에 유개가 한유의 문체를 계승하고, 구양수가 등장하여 고문 부흥의 기치를 올렸다. 이어 증공·왕안석·소순·소식·소철 같 - P364

은 대가들이 나와 송대 문장의 큰 흐름을 구축하였다. 명대에는 이들구양수 이하 6명을 한유·유종원과 합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불렀다. 그들의 문장은 정치적 의견을 충분히 표명할 수 있는 명의통쾌한 것이어서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다. - P365

한대의 문, 당대의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대의 대표적 문학이 사다. 사는 당 중기에 일어나 오대에 번영하고 송대에 유행한 장르로서, 절구에서 발원한 노래하는 문학이다. 절구는 오언 또는 칠언의 네 구절로 이루어진 단문장으로, 변화가 적고 가창의 정취가 옅은 편이다. 그래서 이것을 축소하거나 또는 늘려 억양과 완급을 가하여 일정한 보식을 만들고, 보에 따라 글자를 채워 장단구를 배열하였는데 이것이 ‘사‘다. - P365

송대에는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농업의 진보가 눈부셨다. 농업생산의 향상은 수리전의 조성에 힘입은 경지면적의 증가, 이를 경영하는 장원제의 보급, 벼의 품종개량, 벼·밀의 이모작, 농기구의 개량보급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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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사랑

사랑에 대한 어떤 위협에도 느끼게 되는 공포는 사랑의 정치적 중요성에 대한 좋은 실마리가 된다. 사랑이 여성 또는 성심리에 관한 어떤 분석에서도 중심적이라는 또 다른 징후는 그것이문화 자체에서 누락되어 있고 ‘사생활‘로 격하되었다는 사실이다.(침실에서의 논리에 관해 들어본 사람 있는가?) 그렇다, 그것은 소설, 심지어 형이상학에까지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사랑은 묘사되어 있거나 더 낫게 재창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분석되어 있지는 않다. 사랑은 충분히 경험되어 왔고 그 경험이 전달되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이해된 적은 없다. - P183

상대방에 대한 존경(선망)은 상대방의 특질을 받아들이려는(소유하려는) 소망이된다. 자아의 충돌은 상대방의 커져가는 지배력을 물리치려는개별적 시도로 이어진다. 사랑은 상대방과 최종적으로 마음을터놓는 것(혹은 상대방의 지배에 굴복하는 것)이다. - P186

우리는 사랑이불평등한 권력 상황에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으로 상호 간의 상처를 요구한다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므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이상화, 신비화, 찬사를 통해서 여성의 계급적 열등감을 무화시키는 남성의 시각이 교체하는 과정일 뿐이다. - P191

상대방의 진정한가치에 대한 감수성이 증가하는 것은 ‘맹목적‘인 것이거나 ‘이상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시야가 더 깊어지는 것이다. 파괴에 책임이 있는 것은 우리가 앞서 기술한 허위 이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은 사랑의 과정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정치성, 즉불평등한 권력관계다. 누가, 왜, 언제 그리고 어디서 하느냐가 지금 사랑을 그러한 대참사로 만드는 것이다. - P192

구속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많은 남성들은 구속이 격해지기 시작할 때마다 나가서 우발적인 연애를 즐긴다. 그러나결국 사랑 없이 사는 것은 여자에게 그렇듯 남자에게도 견딜 수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그러면 모든 정상적인 남성에게 남겨진물음은 어떻게 동등한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것인가다. - P199

여성을 열등하고 기생적인 계급으로 정의하는 남성이 운영하는 사회에서는, 어떤 형태로든지 간에 남성의 승인을받지 못한 여성은 불행하다. 여성은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하기위하여 여자 이상more than woman이어야 하며, 자신이 열등하다는정의‘에서 벗어나기 위한 출구를 끊임없이 찾아야만 한다. - P200

그녀는 결코 근거 없이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은 안전성을 보장받아야만 한다.
1) 우리가 보아온 대로, 그녀가 요구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감정적 안정성.
2) 일과 인정을 통해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그녀에게는 거부된, 그래서 남자를 통해 그녀의 정의definition를 찾도록 강제하는감정적 정체성.
3) 이 사회에서 남자를 ‘낚는‘ 그녀의 능력과 결부된 경제적 계급의 안전성.
세 요구 중 두 가지는 사랑에는 부당한 조건들이지만 사랑을이용하고 압박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에서 여성들은 자발적인 사랑의 사치를 누릴 여유가 없다. 그것은 너무나 위험하다. 남성의 사랑과 승인은 지극히 중요하지만 남성의 헌신을 보장받기 전에 생각 없이 사랑하는 것은 그 승인을 잃게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이다. - P202

그는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미리 가지고 있던 환상에 맞게 그녀가 연기를 너무 잘했기 때문에 그녀를 들여보낸 것이다. - P205

‘해방된‘ 여성들은 남성들이 따르고 모방할만한 ‘훌륭한 사내들‘이 절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남성의 성적 패턴을 모방함으로써(여기저기에 추파를 던지고, 이상을 추구하고, 육체적 매력을 강조하는 등), 해방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그들이 포기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쁜 것에 빠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의 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도 아닌 질병을 스스로 주입했다.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멋‘이 천박하고 무의미하다는 것, 그 뒤에서 그들의 감정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것, 그들이 나이 들고 퇴폐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P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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