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3장

초기의 동양 애호가 중 상당수는, 그들의 유럽인으로서 지성과 정신의 습관에 건전한 착란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 동양을 환영했다. 동양은 그 범신론, 정신성, 안정성, 항구성, 원시성 등등으로 인하여 과대평가되었다. 예컨대 셀링은, 동양의 다신교 속에서 유대-기독교적인 일신론에 통하는 길을 발견했다. 곧 브라흐마를 아브라함의 원형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대평가의 다음에는 예외 없이 그것에 대한 반동이 초래되었다. 그래서 동양은 갑자기, 불쌍하게도 비인간적, 반민주주의적, 후진적, 야만적인 등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일방적인 시계추의 운동은 그것과 똑같은 반대방향의 반동을 초래했다. 곧 동양은 과소평가되었다. 직업으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은 이러한 두 가지의 대립, 곧불평등성에 근거한 보상과 수정으로부터 성장하여 왔으며, 그 사고방식은 널리 문화 일반 속의 유사한 사고방식에 의해 함양되었고, 또 다른유사한 사고방식을 함양했다. - P266

오리엔탈리즘의 학문이 구축하고, 그것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온 ‘동양에 관한‘ 지식(예컨대 서동시집》)의 지지를 얻어 이미 절대적인 것이 된 정의와 만나, (마르크스의) 동정적인 감정의 파도는 사라졌다. 또 오리엔탈리즘적 학문의, 나아가 오리엔탈리즘적 예술의 사전상의 의미통제에 굴복하여 이 감정을 나타내는 어휘는 소멸되었다. 사전적인 정의에 의해 개개의 경험은 제거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마르크스의 인도론에서도 생겨났음은 누구라도 분 - P274

명하게 알 수 있다. 마르크스의 인도론에서 결국 어떤 힘이 그를 강제하여 괴테에게 서둘러 달려가게 했고, 거기에서 그는 자신을 옹호해 준 동화된 동양 속에 자리했다.
물론 마르크스는 사회경제적 변혁에 관한 그 자신의 여러 명제를 입증하는 점에도 부분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오리엔탈리즘의 내부에서 견고한 것이 되어, 그 분야의 외부에까지 뻗쳐 나온,
이미 동양에 관한 모든 진술을 지배하게 된 방대한 저술의 집합체에도안이하게 의존한 것으로 생각된다. - P275

유럽인으로서 동양에 산다는 것은, 주위 환경으로부터 초연하며, 글위와는 동등하지 않은 하나의 의식으로 그곳에 산다는 의미를 언제ㄴ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 의식이 어떤의도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무엇을 추구하여 동양에 존재하는것인가, 또 스콧, 위고, 괴테와 같은 작가들처럼 그 의식은 늘 유럽의 현실을 떠나지 않은 그대로이면서 왜 지극히 구체적인 경험을 추구하여동양을 여행하며, 동양에 있을 때조차 왜 그들은 서양에 있고자 하는가하는 이유가 문제된다. - P278

레인은 두 종류의 중요하고도 긴박한 방법으로 학문적인 신뢰성과 정통성을 확보한다. 첫째는인간생활에 대한 보통의 설화적인 경과를 방해하는 방법이다. 이는 그가 행하는 무수한 양의 세부묘사가 수행하는 기능이고, 그 세부묘사 속에서 한 사람의 외국인으로서 관찰하는 지성은 대량의 정보를 소개할수 있고 나아가 그것들을 종합할 수 있게 한다. 이집트인은 그야말로를 갈라서 그 속을 보여 주었는데, 그 뒤에 레인에 의해 설득되어 그것을 봉합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이집트인-동양인의 생활에서 자손증식과정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방법이다. 이 기능은 레인이 자기의 동물적욕구를 억제함으로써 수행된다. 그 결과 주어진 정보는 이집트 속에서이집트를 위하여 보급되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학문 전반 속에서 유럽의 학문 전반을 위하여 보급된다. - P288

동양은 용감한 여행가나 거주자들의 개인적인, 종종은 왜곡된 증언이었으나, 이제는 그것이 학문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의 협력에 의해 얻어진 비개성적인 정의로 전환하게 되었다. - P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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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장하는 바는, (현대 오리엔탈리즘의 근본이 된) 근대 오리엔탈리즘의 이론과 실천을 가장 중요한 국면에서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것은동양에 관한 객관적 지식에 별안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상속되어 왔고, 세속화되어 왔고, 재배치되어 왔으며 나아가 문헌학과같은 학문 분야에 의해 변형된 한 세트의 구조물로 이해하여야 한다는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학문 분야도 기독교적인 초자연 신앙이 자연화되고 근대화되며 세속화된 대체물(또는 변형)에 다름 아니었다. 동양은새로운 텍스트나 관념의 형태를 취하여 이러한 구조에 순응하였다. - P220

오리엔탈리스트는 상당히 광범위한 비일상적인 체험을 그의 동포가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히브리 민족의 ‘참으로 신성한‘ 시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문학의 일종을 동포의 공유재산으로 삼기 위하여, 더욱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오리엔탈리스트는 멀리 떨어진 동양의 심연으로부터 유익한 보석만을 낚아 올리기 때문에, 또 그 힘을 빌리지 않고는 동양을 알수 없기 때문에 오리엔탈리스트라는 존재가 필요하며, 동양 문헌 자체를 통째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또한 진실이다. 이것이야말로 사시가 도입한 단편이론으로서 이는 당시 낭만주의에 공통된 관심이었다. - P231

르낭은 문헌학으로부터 오리엔탈리즘에 옮겨 왔다. 오리엔탈리즘에가장 중요한 기술적인 여러 특징을 부여한 그 점이야말로, 문헌학이라는 학문 분야의 지극히 풍부하고도 높은 문화적 지위였다. - P235

사물에 관한 르낭의 사고방식이 철저히 역사적인 것이었고, 또 그 자신의 말에 의하면 형태학적이기 때문에, 그가 젊은 날에 종교로부터 문헌학이라는 학문 분야로 옮겨 갔을 때, 과거에 종교로부터 얻은 역사적 세계관을 새로운 세속의 학문에까지 존속시키게 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일이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단지 하나의 작업만이 나의 생활을 충족시키는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인다. 세속의 학문이 나에게 제공해 주는것은 훨씬 광범한 수단에 의한, 기독교에 관한 비판적 연구(기독교의 역사와 기원을 주제로 하는 르낭의 중요한 학문상의 시도를 암시하고 있는)의 수행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르낭은 기독교 신앙의 상실이후 그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을 문헌학에 동화시켰다. - P241

르낭에게 문헌학자라는 것은, 낡은 기독교 신과의 모든 연관성을 완전히 단절하는 것, 그결과 그것에 대체되는 새로운 교의(필경 과학)가 소위 자유롭고 새로운장소를 차지할 것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르낭의 모든 학문 생애는 이러한 진보의 과정을 충실하게 하는 데에 바쳐졌다. - P246

문헌학자는 어떤 언어학적인 사실을 어떤 방법으로 일정한 역사상의 시기대응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분류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러나르낭도 가끔 인정해야 했던 바와 같이 언어학상의 시간성이나 역사에는 결손 부분이나 거대한 불연속성 또는 가정에 불과한 시간 등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언어학상의 사건은 비직선적이고 근본적으로 불연속적인 시간적 차원 속에서 생겨나게 된다. 그리고 그 차원은 언어학자에 의해 지극히 독특한 방법으로 관리된다. 이러한 방법이 바로 비교 - P253

라고 하는 점은, 동양어의 셈 부문에 관하여 르낭의 논문 전체가 왜곡하여 논한 바로 그것이다. 곧 거기에서는 인도-유럽어가 생생한 유기적지표로 사용된 반면, 동양의 셈어는 그것과 비교하여 비유기적인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 P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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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은 농민이나 도시 거주자였다."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은 "노역의 쉰내"가 진동하는 "벽돌로 지은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몇 주간 이어진 먹구름과 혹한 끝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고 해가 나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는 더 만은 사람이 몰려나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여러 여성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아니치코프 다리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대부분 짧은 겉옷을 입고 높은 부츠를 신은 노동자들이었다. 창을 든 카자크 기마대는 열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다녔다. … 나는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리테이니 대로로 향했다. 여기가 집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모여 있었고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 카자크 기마대는 말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짝 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끔 보도 위로 올라가 구경꾼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시위대는 볼린스키 근위연대는 자신들이 검거한 병영 바로 옆에 있는 타브리 체스키궁의 국가 두마로 향했다. 반역자들은 거대한 건물군에 같같이 포함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전열로 이동해 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연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노동자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은 봉기가 갑자기 혁명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혈혁명"의 신화는 수도 내에서만 양측에서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싸움은 아스토리아 호텔 습격으로 끝났다. 이곳에 많은 장교와 장군들이 몸을 피하러 왔지만, 호텔 지붕에 배치된 경찰 저격수들이 군중을 자극해 학살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제군주제의 몰락에 크게 기뻐했던 지식인 집안의 한 노부인에게 시장에서 어떤 노점상이 말을 걸었다. "기독교인이세요?" 노점상이 물었다. "어때요, 삶이 좀 나아질 것 같나요?" 노부인이 답했다. "물론이죠." 노부인이 답했다. "오, 이봐요." 여자가 말했다. "유대인 놈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니까요."

제정의 붕괴는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붙어 있는 조작 장치를 임시정부 측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치적 무인지대에 세워졌다.

레닌은 계급적 적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선전을 위해 독일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으려고도 했다. 그래서 레닌은 자신이 타도하려 애쓰는 대상인 제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혁명가 서른 명과 프로이센 장교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봉인 열차’에 탔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부르주아와 임시정부가 너무 약해서 소비에트가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대, 관료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레닌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경악했다. 레닌은 위선을 경멸했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입헌군주제 성립에 실패한 밀류코프는 차르의 몰락이 적어도 병사들의 애국심과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병사 대부분이 3월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임시정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패전국은 배상금을 물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전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미사여구에 심취해 자신만이 러시아군을 승리와 평화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많은 대중이 그렇게 믿게 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로 장교뿐 아니라 중산층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7월 7일 케렌스키가 황제 일가를 차르스코예셀로에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는 운명적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극좌 세력의 봉기로 군주제 지지자들이 반격에 나설까 봐 두려워했다.

현재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소련 역사가들이 줄곧 주장한 것과 달리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를 강화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내외부의 많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레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볼셰비키에 막 입당한 트로츠키는 당시 스탈린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고압적 태도 때문에 동료들, 특히 카리스마가 덜한 스탈린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타고난 웅변가였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예리하고 재치 있는 연설로 거대한 시르크 모데른 같은 페트로그라드의 커다란 홀을 가득 매운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트로츠키는 군중 사이에 누가 봐도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명 조롱하기를 즐겼다.

크라스노프가 진격할 때 이른바 ’구국혁명위원회‘(주로 우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이루어진 조직)는 지지자들에게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봉기에 합류한 제국군 장교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반란군은 교관들에게 이끌려 나온 몇몇 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었다. 일부는 갓 열네 살이었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다뤘다.

볼셰비키는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총득표수의 4분의 1도 안 되는 1000만 표밖에 얻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선거가 임박했을 때 일어나 대부분의 투표용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는 볼셰비키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계급과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볼셰비키에도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차르 시대의 검은 백인대의 포그롬과 같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분노한 유대인 젊은이들을 볼셰비키의 품에 떠민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내전에서 우익 장교, 카자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더 만은 포그롬을 일으켰고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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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휴에는 푹 쉬면서 하루는 친가 식구들과 외식만 했다.

아버지는 비니를 쓰고 나오셨는데 빠진 머리가 다시 나지 않으신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보온성 챙기고 좋죠 뭐." 하고 답했다. 

3차까지 진행된 항암 치료는 아버지가 견디시지를 못했다. 부작용이 심해서 구토 및 식욕 부진 등이 생겼고 잘 먹지를 못하니 온 몸에 힘이 없으시다고 했다. 결국 약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고 비보험이라 약값은 많이 들지만 부작용이 없고 암 수치도 좋아져서 일단은 이 방식으로 몇 달 지켜보면서 가기로 했다.

남동생이 결혼할 때가 지나서인지 부모님 걱정이 크다. 그런데 내 생각은 본인이 결혼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 결혼 적령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지한 고민 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아직 노안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만큼 책 읽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 앞이 뿌연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노안 전 증상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노안?ㅎㅎ)

어쨌든 책을 예전처럼 오래 잡고 있지를 못한다.

스트레칭도 자주 해주고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필테 개인 PT는 어느새 마무리하고 20회를 더 연장했다.  

습관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혼자 운동을 하면 아무래도 선생님과 함께 할 때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안하는 것 같다.

'조금 더!'해야 운동 효과가 있는 것인데 힘드니까 그만 두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도 몇 개월간 한 필테는 내 몸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바디를 운동 시작하기 전 받고 얼마 전 확인해보니 체지방이 많이 감소하고 근력량이 조금 늘었다고 한다. 

일단 근력이 조금이지만 늘어서 다행이다. 다만 살이 오히려 빠져서 다이어트하자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기에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행인 것은 내 기초대사량이 보통 사람보다 높다고 한다. 물론 이를 믿고 운동 안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겠지^^


#4

1월에 사들인 책들이 많기에 당분간은 책 구매는 미루려고 한다.

사들인 책 중 가장 걱정되는 책은 역시 아래의 책이겠지. 그래도 이왕 마르크스 저작을 읽기 시작한 만큼 끝까지는 읽어보겠다.




1월에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중에서는 <악령>을 읽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한파가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 기운이 몰려올거라고 한다.

꽃샘 추위도 없다고 하니 돌아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난 번 전시회가 참 좋아서 한 번 더 다녀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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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2-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전시회가 좋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5 16:32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 안녕하세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수묵별미 전시입니다. 기간이 다음주까지인 것으로 알아요. 확인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가보셔도 좋겠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2-05 16:38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5-02-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걱정되는 책을 저도 획득하였습니다.... ㅜㅅㅜ (약간 참담한 기분) 올해 안에는 힘들 거 같은데 부지런히 먼저 가계세요. 그나 저나 아, 어디로 가시나요 화가님. 그 길 뒤 따라 가려면....ㅋㅋㅋㅋ
암튼 대단하세요!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5-02-06 16:22   좋아요 0 | URL
책 받아놓고 참담한 기분이 드신 것 충분히 공감합니다.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으나 몇 쪽씩이라도 꾸준히 읽어봐야죠.
작년에도 어떤 주제를 정해놓지 않고 마구잡이로 읽었던 한 해였는데 올해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쟝 님의 길도 화이팅!!!

독서괭 2025-02-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안 읽힌다고 하셨지만 충분히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ㅎㅎ 운동 꾸준히 하고 계시군요! 필라테스 한 후 키가 1센티 컸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ㅎㅎ 아마도 척추가 펴져서? 근육량 늘어난 것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27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비하면 요즘은 그나마 좀 적절히 섞어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단짠단짠이랄까요^^;)
필라테스하면서 제 몸에게 미안함이 들었어요. 너무 안 써서 여기저기 뻑뻑 소리날 지경이었으니... 일단 목과 어깨, 허리가 많이 펴진 느낌입니다!ㅋㅋ 근육량 조금이지만 늘어서 저도 기뻐요. 괭 님도 운동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의 픽은 이 문장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누구에게서든 듣고 싶어요~~
거리의화가님, 많이 읽으셨어요~ 많이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30   좋아요 0 | URL
참, 눈 앞이 뿌연 증세는.... 저는 몇 년 전 독감을 앓은 이후에 그 증세가 나타났어요. 한달 이상 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그 증세가 나타나더라구요. 전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걸 노안이라고 보긴 어쩔지 모르겠지만(안경 쓴 사람에게는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는 편) 아무튼 그렇습니다.
블루베리를 냉동실에 쟁이고 먹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32   좋아요 0 | URL
먹는 양은 평소와 비슷하고 운동량이 늘었으니 체지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그만큼 쓰지를 못했어요.

저도 안경과 한 몸인지 오래인데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ㅎㅎ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저도 눈부터 많이 피곤해지더라구요. 블루베리 많이 먹고 조금이라도 노안이 늦게 오기를 바라봅니다^^;

새파랑 2025-02-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사람은 비타민 A를 드셔야 합니다~!!
어제 악령을 완독했습니다 ㅋ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2025-02-06 11:1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게요. 루테인 먹어야 한다고 주변에서 권하기는 하는데 저는 보조 식품은 믿지 않는 편이라 당근이나 블루베리 같은 것으로 많이 보충해야겠습니다.
악령 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희선 2025-02-10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가 거의 한주 간 듯하네요 이게 가면 따듯해진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것대로 걱정스럽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여름을 걱정했어요 더위보다 비를... 눈 많이 올 때도 그런 거 걱정했지만...

아버님 건강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2-10 14: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가는 추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낮에는 볕이 따뜻해서 좀 낫더라구요^^
한국에 4계절도 이제는 옛말인 것 같고... 추위와 더위만 있게 되버린 것 같습니다ㅠㅠ

아버지 건강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언제나 그렇듯 무탈한 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희선 님도 행복한 독서 생활하시길!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일본인에게 ‘타인‘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직접 관여해서 만든 역사이며, 말하자면 일본 자신의 역사입니다. - P21

‘조선‘이란 원래 ‘베트남‘, ‘멕시코‘와 같이 나라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고 ‘조선인‘은 ‘베트남인‘, ‘멕시코인‘과 마찬가지로, 어떤사람들의 집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멕시코인을 멕시코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렇게 주저하지는 않겠지요.
일본인에 대한 차별어로 재퍼니즈(japanese)라는 영어를 짧게 만든 ‘재프(jap)‘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민족의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라니,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요. - P52

일본에는 제국헌법이 있었지만, 이 헌법은 식민지에는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도 일본의 영토였고 거기 있는 사람도일본 국적이지만 이들에게는 헌법상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반도나 대만 등 식민지를 가리켜 ‘이법 지역(法)‘ 또는 ‘외지(外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외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대해 원래의 일본 지역(현재의 일본 영역에 거의 해당됩니다.)은 ‘내지(內)‘, 일본인은 ‘내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지‘를 가짐으로써 ‘내지‘는 윤택해집니다. 또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신들이 조선인이나 중국인보다 우수하다는 우월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이 조선 병합을 환영한 것입니다. - P93

조선에서는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총독 - P94

이 집중적이고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총독은 군인 출신 중에서 선출하여, 천황 직속으로 두었습니다. 즉 조선식민지 지배는 모두 천황을 최고 책임자로 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병합에 앞서 1909년의 ‘민적법‘을 통해 조선인의 인구 구성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던 일본은 1910년 병합 이후, ‘민적법‘을 ‘호적령‘으로 바꾸고, 이에 따라 조선의 모든 사람들을 신민(일본 국적)으로 했습니다. - P95

1933년 만주사변 후, 군은 「조선 동포에 대한 내지인 반성 자료기록(朝鮮同胞忙對寸乙內地人反省資錄)」이라는 책자를 냈습니다. 지금 같은 심한 차별을 계속하면 원활한 통치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서문에는 천황의 단카를 인용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제(大)‘는 천황을 의미합니다.
・이에 거듭 대제의 ‘자비를 널리 펼치면 다른 나라들판의 호랑이라도 잘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는 말씀을 삼가 전하며, 내지인 여러분의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 P111

1959년부터 북조선의 귀국 사업이 시행되어, 1980년까지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교가 없는 북조선으로의 귀국 사업을 ‘인도적‘인 입장에서 실행했다고 해왔지만실제로는 재일조선인을 떠넘기려고 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에서밝혀졌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조선 반도의 남쪽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북조선 이주를 결정한 데는 사회주의 국가에희망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유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는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 P142

‘특별영주‘라는 자격은 긴 세월 동안 투쟁한 결과 1991년에 생긴비교적 안정된 자격입니다. 1965년의 한일조약까지는 재일조선인을대상으로 하는 ‘영주‘ 자격 규정 자체가 없었고, 1965년 이후에는앞서 말한 것처럼 ‘협정영주‘라는 자격이 생겼는데, 이것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영주‘는 정말로 ‘영주‘를 보증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법무성이 이 자격을취소할 수 있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본 국민 누군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본국적을 취소당할까요? 일본에서 형을 살아야겠지만 일본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3세대, 4세대에 걸쳐 일본에서 태어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쫓겨날 수 있는 것이 ‘특별영주자입니다. - P147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권이 없었습니다.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딘가에 가는 데 국가의 허가 등은 필요 없었으며, 어디든 가도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점점 많은 신청서를 써야 했는데 그런 움직임은 20세기 들어서 수많은 전쟁을 겪고, 근대 국민국가가 태어난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근대 이후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어딘가의 국민이 아니면 대단히불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안정된 상태임과 동시에, 그만큼 국가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구속되지 않으려면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또국민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P173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 한일조약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한일조약의 상대는 한국뿐이지만,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는북조선이나 재일조선인도 포함하는 조선 민족 전체입니다. 게다가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당연히, 한일조약 체결 때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상 문제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일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에서 - P209

한국에 무상 공여 3억 달러와, 정부 차관 2억 달러를 지불했는데, 이것은 결코 배상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의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죄하거나 보상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한일조약 체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있었습니다.
1965년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 중으로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군대를, 평화 헌법 때문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일본에는 돈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가데나(手) 기지를 비롯해 많은 미군 기지가 베트남전쟁의 전선 기지로 활용되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네이팜탄이라는 폭탄을 만드는 등의 일로 기업이 이익을 냈습니다. 그런 미국에서 보면 일본과 한국이 대립 관계에있는 것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기에 조약을 맺도록 양국에강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 P210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다. 머조리티에게는 그런 고민이 없다. 그러나 마이너리티의 고민에는 귀중 - P236

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것을 뛰어넘어 다음 시대를 통찰하는 인간이 갖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국가나 머조리티의 횡포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킨다." - P237

당사자인 세대가 직접 과거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미안하지만우리 세대가 남긴 부채가 여기 있다.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가주기바란다‘ 하고 젊은 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윗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않고, 그 결과 그들이 품고 있는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비난‘이라는 감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해석하고는, 오히려 그 감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P243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자신도 피해를 당하는 입장임에도, 계속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보다 더 낮은 존재‘를 마음속에 만들어, 그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은아닐까요. 차별 구조의 하위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을 차별하는 상위의 사람들을 향해 항의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하위에 있는사람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 그럼으로써 차별 구조 그 자체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 얼마든지 예가 있습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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