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페트로그라드의 병사들은 "불만을 품은 농민이나 도시 거주자였다." 병사들이 지내는 병영은 "노역의 쉰내"가 진동하는 "벽돌로 지은 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2월 23일 국제 여성의 날은 혁명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었다. 몇 주간 이어진 먹구름과 혹한 끝에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고 해가 나자 페트로그라드의 거리에는 더 만은 사람이 몰려나왔다. 미리 계획한 대로 여러 여성 단체들이 시위에 나섰다.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이날의 일을 일기에 기록했다. "아니치코프 다리에 사람들이 꽤 많이 모였다. 대부분 짧은 겉옷을 입고 높은 부츠를 신은 노동자들이었다. 창을 든 카자크 기마대는 열 명이 한 조를 이루어 다녔다. … 나는 아니치코프 다리를 건너 리테이니 대로로 향했다. 여기가 집회의 중심지였다. 그곳에는 수많은 노동자가 모여 있었고 거리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했다. … 카자크 기마대는 말을 이용해 사람들을 살짝 밀고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으면 가끔 보도 위로 올라가 구경꾼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날 아침 시위대는 볼린스키 근위연대는 자신들이 검거한 병영 바로 옆에 있는 타브리 체스키궁의 국가 두마로 향했다. 반역자들은 거대한 건물군에 같같이 포함된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의 전열로 이동해 이들에게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그리고 두 연대는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 노동자들에게 건네주기 시작했다. 바로 이 순간 사람들은 봉기가 갑자기 혁명이 되었음을 직감했다.

"무혈혁명"의 신화는 수도 내에서만 양측에서 100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6천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는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싸움은 아스토리아 호텔 습격으로 끝났다. 이곳에 많은 장교와 장군들이 몸을 피하러 왔지만, 호텔 지붕에 배치된 경찰 저격수들이 군중을 자극해 학살에 말려들게 되었다.

전제군주제의 몰락에 크게 기뻐했던 지식인 집안의 한 노부인에게 시장에서 어떤 노점상이 말을 걸었다. "기독교인이세요?" 노점상이 물었다. "어때요, 삶이 좀 나아질 것 같나요?" 노부인이 답했다. "물론이죠." 노부인이 답했다. "오, 이봐요." 여자가 말했다. "유대인 놈들이 다 없어질 때까지는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을 거예요. 평범한 사람들이 겪는 문제는 다 유대인 놈들 때문이니까요."

제정의 붕괴는 무엇이든 제대로 작동하는 것에 붙어 있는 조작 장치를 임시정부 측에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임시정부는 정치적 무인지대에 세워졌다.

레닌은 계급적 적의 도움을 받는 것에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게다가 혁명 선전을 위해 독일 정부의 비밀 자금을 받으려고도 했다. 그래서 레닌은 자신이 타도하려 애쓰는 대상인 제국주의자의 도움을 받아 혁명가 서른 명과 프로이센 장교 두 명의 호송을 받으며 ‘봉인 열차’에 탔다.

마르크스가 말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단계를 거칠 필요는 없었다. 레닌은 부르주아와 임시정부가 너무 약해서 소비에트가 즉시 권력을 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경찰과 군대, 관료제를 폐지하고 토지와 은행을 모두 국유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중들은 레닌의 주장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며 경악했다. 레닌은 위선을 경멸했고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 굳게 믿었다.

입헌군주제 성립에 실패한 밀류코프는 차르의 몰락이 적어도 병사들의 애국심과 전쟁에 승리하겠다는 결심을 부활시키기를 바랐다. 병사 대부분이 3월에는 전쟁이 계속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듯 보였지만, 임시정부가 깨닫지 못하는 사이 병사들의 태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4월이 되자 패전국은 배상금을 물고 영토를 빼앗기게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전쟁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케렌스키는 자신의 미사여구에 심취해 자신만이 러시아군을 승리와 평화로 이끌 수 있다고 확신했고, 많은 대중이 그렇게 믿게 했다.

당시 러시아 전역에 걸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로 장교뿐 아니라 중산층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했다. 7월 7일 케렌스키가 황제 일가를 차르스코예셀로에서 시베리아의 토볼스크로 보내는 운명적 결정을 내린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케렌스키는 지난 며칠간 벌어진 극좌 세력의 봉기로 군주제 지지자들이 반격에 나설까 봐 두려워했다.

현재 밝혀진 증거에 따르면, 소련 역사가들이 줄곧 주장한 것과 달리 코르닐로프는 쿠데타를 모의하지 않았다. 코르닐로프의 주요 목표는 임시정부를 강화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게 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 내외부의 많은 코르닐로프 지지자는 갈수록 불안정해지는 케렌스키를 몰아내고 그가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확신했다.

레닌이 몸을 숨기고 있는 동안 볼셰비키에 막 입당한 트로츠키는 당시 스탈린이 더 유리한 위치에 있었음에도 당의 지도자 역할을 맡았다. 트로츠키는 고압적 태도 때문에 동료들, 특히 카리스마가 덜한 스탈린의 환심을 사지 못했다. 타고난 웅변가였던 트로츠키는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예리하고 재치 있는 연설로 거대한 시르크 모데른 같은 페트로그라드의 커다란 홀을 가득 매운 청중들을 흥분시켰다. 트로츠키는 군중 사이에 누가 봐도 부르주아 혹은 ‘부르주이’ 같은 옷차림을 한 사람이 눈에 띄명 조롱하기를 즐겼다.

크라스노프가 진격할 때 이른바 ’구국혁명위원회‘(주로 우파 사회혁명당원으로 이루어진 조직)는 지지자들에게 볼셰비키 독재에 맞서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봉기에 합류한 제국군 장교는 놀라울 정도로 적었고, 반란군은 교관들에게 이끌려 나온 몇몇 사관학교의 사관생도들로 구성된 ’소년 십자군‘이었다. 일부는 갓 열네 살이었고 자기 키만 한 소총을 다뤘다.

볼셰비키는 지지율이 급격히 상승하기는 했지만 총득표수의 4분의 1도 안 되는 1000만 표밖에 얻지 못해 크게 실망했다. 하지만 이 결과는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나뉘어 분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회혁명당의 분열은 선거가 임박했을 때 일어나 대부분의 투표용지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그리고 당시 좌파 사회혁명당 다수는 볼셰비키와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 반유대주의는 계급과 지역을 막론하고 깊이 뿌리박혀 있었고 볼셰비키에도 침투해 있었다. 하지만 차르 시대의 검은 백인대의 포그롬과 같은 극단적인 반유대주의가 분노한 유대인 젊은이들을 볼셰비키의 품에 떠민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그 결과 내전에서 우익 장교, 카자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더 만은 포그롬을 일으켰고 증오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키예프의 러시아인들은 우크라이나 군대가 잘 싸울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러시아인들은 의도적으로 우크라이나의 실제 문화와 역사를 무시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우스갯소리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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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휴에는 푹 쉬면서 하루는 친가 식구들과 외식만 했다.

아버지는 비니를 쓰고 나오셨는데 빠진 머리가 다시 나지 않으신다는 이유에서였다.

나는 "보온성 챙기고 좋죠 뭐." 하고 답했다. 

3차까지 진행된 항암 치료는 아버지가 견디시지를 못했다. 부작용이 심해서 구토 및 식욕 부진 등이 생겼고 잘 먹지를 못하니 온 몸에 힘이 없으시다고 했다. 결국 약물로 치료 방법을 바꾸었고 비보험이라 약값은 많이 들지만 부작용이 없고 암 수치도 좋아져서 일단은 이 방식으로 몇 달 지켜보면서 가기로 했다.

남동생이 결혼할 때가 지나서인지 부모님 걱정이 크다. 그런데 내 생각은 본인이 결혼할 마음이 있어야 하고 자신과 잘 맞는 상대를 만났을 때 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 결혼 적령기가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하고 진지한 고민 없이 시작하는 결혼은 후회만 남을 뿐이다.


#2

아직 노안이 온 것 같지는 않은데 예전만큼 책 읽기에 집중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가끔 앞이 뿌연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노안 전 증상인지는 모르겠다. 아니면 이미 노안?ㅎㅎ)

어쨌든 책을 예전처럼 오래 잡고 있지를 못한다.

스트레칭도 자주 해주고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3

필테 개인 PT는 어느새 마무리하고 20회를 더 연장했다.  

습관화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혼자 운동을 하면 아무래도 선생님과 함께 할 때보다 운동을 더 열심히 안하는 것 같다.

'조금 더!'해야 운동 효과가 있는 것인데 힘드니까 그만 두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도 몇 개월간 한 필테는 내 몸에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바디를 운동 시작하기 전 받고 얼마 전 확인해보니 체지방이 많이 감소하고 근력량이 조금 늘었다고 한다. 

일단 근력이 조금이지만 늘어서 다행이다. 다만 살이 오히려 빠져서 다이어트하자고 시작한 운동이 아니었기에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행인 것은 내 기초대사량이 보통 사람보다 높다고 한다. 물론 이를 믿고 운동 안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겠지^^


#4

1월에 사들인 책들이 많기에 당분간은 책 구매는 미루려고 한다.

사들인 책 중 가장 걱정되는 책은 역시 아래의 책이겠지. 그래도 이왕 마르크스 저작을 읽기 시작한 만큼 끝까지는 읽어보겠다.




1월에는 이런 책들을 읽었다. 도스토옙스키 전집 중에서는 <악령>을 읽었다.











한파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 한파가 지나고 나면 따뜻한 봄 기운이 몰려올거라고 한다.

꽃샘 추위도 없다고 하니 돌아다니기에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지난 번 전시회가 참 좋아서 한 번 더 다녀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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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2-05 15: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 전시회가 좋으셨는지 궁금합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5 16:32   좋아요 1 | URL
블랑카 님 안녕하세요.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하고 있는 수묵별미 전시입니다. 기간이 다음주까지인 것으로 알아요. 확인해보시고 관심 있으시면 가보셔도 좋겠죠. 감사합니다^^

blanca 2025-02-05 16:38   좋아요 0 | URL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쟝쟝 2025-02-05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장 걱정되는 책을 저도 획득하였습니다.... ㅜㅅㅜ (약간 참담한 기분) 올해 안에는 힘들 거 같은데 부지런히 먼저 가계세요. 그나 저나 아, 어디로 가시나요 화가님. 그 길 뒤 따라 가려면....ㅋㅋㅋㅋ
암튼 대단하세요! 짝짝짝~

거리의화가 2025-02-06 16:22   좋아요 0 | URL
책 받아놓고 참담한 기분이 드신 것 충분히 공감합니다. 언제 마무리될지는 모르겠으나 몇 쪽씩이라도 꾸준히 읽어봐야죠.
작년에도 어떤 주제를 정해놓지 않고 마구잡이로 읽었던 한 해였는데 올해도 비슷할 것 같습니다. 쟝 님의 길도 화이팅!!!

독서괭 2025-02-05 18: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안 읽힌다고 하셨지만 충분히 많이 읽으신 것 같습니다 ㅎㅎ 운동 꾸준히 하고 계시군요! 필라테스 한 후 키가 1센티 컸다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 ㅎㅎ 아마도 척추가 펴져서? 근육량 늘어난 것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27   좋아요 1 | URL
몇 년전에 비하면 요즘은 그나마 좀 적절히 섞어서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단짠단짠이랄까요^^;)
필라테스하면서 제 몸에게 미안함이 들었어요. 너무 안 써서 여기저기 뻑뻑 소리날 지경이었으니... 일단 목과 어깨, 허리가 많이 펴진 느낌입니다!ㅋㅋ 근육량 조금이지만 늘어서 저도 기뻐요. 괭 님도 운동 화이팅입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께서 더 많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오늘 저의 픽은 이 문장입니다. 저도 이런 말을 누구에게서든 듣고 싶어요~~
거리의화가님, 많이 읽으셨어요~ 많이 부럽습니다^^

단발머리 2025-02-05 19:30   좋아요 0 | URL
참, 눈 앞이 뿌연 증세는.... 저는 몇 년 전 독감을 앓은 이후에 그 증세가 나타났어요. 한달 이상 책을 볼 수 없었습니다. 지금은 나아졌는데 컨디션이 안 좋은 날에는 어김없이 그 증세가 나타나더라구요. 전 안경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그걸 노안이라고 보긴 어쩔지 모르겠지만(안경 쓴 사람에게는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는 편) 아무튼 그렇습니다.
블루베리를 냉동실에 쟁이고 먹고 있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2-06 08:32   좋아요 0 | URL
먹는 양은 평소와 비슷하고 운동량이 늘었으니 체지방이 그만큼 많았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읽기는 했는데 그만큼 쓰지를 못했어요.

저도 안경과 한 몸인지 오래인데 노안이 늦게 온다는 말을 믿고 싶어집니다ㅎㅎ 아무래도 컨디션이 안 좋으면 저도 눈부터 많이 피곤해지더라구요. 블루베리 많이 먹고 조금이라도 노안이 늦게 오기를 바라봅니다^^;

새파랑 2025-02-06 1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읽는 사람은 비타민 A를 드셔야 합니다~!!
어제 악령을 완독했습니다 ㅋ 재미있어서 시간가는줄도 몰랐네요!!!

거리의화가 2025-02-06 11:18   좋아요 1 | URL
ㅎㅎ 그러게요. 루테인 먹어야 한다고 주변에서 권하기는 하는데 저는 보조 식품은 믿지 않는 편이라 당근이나 블루베리 같은 것으로 많이 보충해야겠습니다.
악령 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재밌게 읽었습니다^^

희선 2025-02-10 0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위가 거의 한주 간 듯하네요 이게 가면 따듯해진다고 하더군요 그건 그것대로 걱정스럽습니다 아직 멀었지만 벌써부터 여름을 걱정했어요 더위보다 비를... 눈 많이 올 때도 그런 거 걱정했지만...

아버님 건강 좋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거리의화가 님 책 즐겁게 만나세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2-10 14:13   좋아요 1 | URL
이번에는 꽤나 오래 가는 추위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 낮에는 볕이 따뜻해서 좀 낫더라구요^^
한국에 4계절도 이제는 옛말인 것 같고... 추위와 더위만 있게 되버린 것 같습니다ㅠㅠ

아버지 건강 걱정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언제나 그렇듯 무탈한 게 제일인 것 같습니다. 희선 님도 행복한 독서 생활하시길!
 

재일조선인의 역사는 일본인에게 ‘타인‘의 역사가 아닙니다. 일본이라는 나라가 직접 관여해서 만든 역사이며, 말하자면 일본 자신의 역사입니다. - P21

‘조선‘이란 원래 ‘베트남‘, ‘멕시코‘와 같이 나라나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고 ‘조선인‘은 ‘베트남인‘, ‘멕시코인‘과 마찬가지로, 어떤사람들의 집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멕시코인을 멕시코인이라고 부르는 것에 그렇게 주저하지는 않겠지요.
일본인에 대한 차별어로 재퍼니즈(japanese)라는 영어를 짧게 만든 ‘재프(jap)‘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이나 ‘일본인‘이라는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가 되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어느 나라나 민족의 호칭이 그대로 차별어라니,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지요. - P52

일본에는 제국헌법이 있었지만, 이 헌법은 식민지에는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도 일본의 영토였고 거기 있는 사람도일본 국적이지만 이들에게는 헌법상의 권리가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대일본제국헌법을 적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 반도나 대만 등 식민지를 가리켜 ‘이법 지역(法)‘ 또는 ‘외지(外地)‘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외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그에 대해 원래의 일본 지역(현재의 일본 영역에 거의 해당됩니다.)은 ‘내지(內)‘, 일본인은 ‘내지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외지‘를 가짐으로써 ‘내지‘는 윤택해집니다. 또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구미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신들이 조선인이나 중국인보다 우수하다는 우월감을 맛보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인이 조선 병합을 환영한 것입니다. - P93

조선에서는 삼권분립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대신 총독 - P94

이 집중적이고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총독은 군인 출신 중에서 선출하여, 천황 직속으로 두었습니다. 즉 조선식민지 지배는 모두 천황을 최고 책임자로 하여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병합에 앞서 1909년의 ‘민적법‘을 통해 조선인의 인구 구성을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던 일본은 1910년 병합 이후, ‘민적법‘을 ‘호적령‘으로 바꾸고, 이에 따라 조선의 모든 사람들을 신민(일본 국적)으로 했습니다. - P95

1933년 만주사변 후, 군은 「조선 동포에 대한 내지인 반성 자료기록(朝鮮同胞忙對寸乙內地人反省資錄)」이라는 책자를 냈습니다. 지금 같은 심한 차별을 계속하면 원활한 통치를 할 수 없다고 하여 만든 것입니다. 서문에는 천황의 단카를 인용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대제(大)‘는 천황을 의미합니다.
・이에 거듭 대제의 ‘자비를 널리 펼치면 다른 나라들판의 호랑이라도 잘 따르지 않을 리가 없다‘는 말씀을 삼가 전하며, 내지인 여러분의 깊은 반성을 촉구한다.…………… - P111

1959년부터 북조선의 귀국 사업이 시행되어, 1980년까지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귀국‘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교가 없는 북조선으로의 귀국 사업을 ‘인도적‘인 입장에서 실행했다고 해왔지만실제로는 재일조선인을 떠넘기려고 했다는 사실이 최근의 연구에서밝혀졌습니다.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조선 반도의 남쪽 출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북조선 이주를 결정한 데는 사회주의 국가에희망을 건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유 외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에서는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렸다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 P142

‘특별영주‘라는 자격은 긴 세월 동안 투쟁한 결과 1991년에 생긴비교적 안정된 자격입니다. 1965년의 한일조약까지는 재일조선인을대상으로 하는 ‘영주‘ 자격 규정 자체가 없었고, 1965년 이후에는앞서 말한 것처럼 ‘협정영주‘라는 자격이 생겼는데, 이것은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는 불공평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특별영주‘는 정말로 ‘영주‘를 보증하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에는 법무성이 이 자격을취소할 수 있습니다.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다면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일본 국민 누군가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본국적을 취소당할까요? 일본에서 형을 살아야겠지만 일본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3세대, 4세대에 걸쳐 일본에서 태어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쫓겨날 수 있는 것이 ‘특별영주자입니다. - P147

유럽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 여권이 없었습니다. 그런 개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딘가에 가는 데 국가의 허가 등은 필요 없었으며, 어디든 가도 좋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점점 많은 신청서를 써야 했는데 그런 움직임은 20세기 들어서 수많은 전쟁을 겪고, 근대 국민국가가 태어난역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근대 이후 한 명, 한 명의 인간은 어딘가의 국민이 아니면 대단히불편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국가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국민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안정된 상태임과 동시에, 그만큼 국가에 구속되어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구속되지 않으려면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또국민은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 P173

‘조선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은 한일조약으로 해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선 한일조약의 상대는 한국뿐이지만, 식민지 지배의 피해자는북조선이나 재일조선인도 포함하는 조선 민족 전체입니다. 게다가일본 정부는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입장이기 때문에당연히, 한일조약 체결 때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보상 문제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 한일조약을 맺으면서 일본에서 - P209

한국에 무상 공여 3억 달러와, 정부 차관 2억 달러를 지불했는데, 이것은 결코 배상금이나 보상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독립 축하금‘이라는 명목의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것이 일본 정부의 입장입니다.
식민지 지배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사죄하거나 보상할 수없다는 것입니다.
한일조약 체결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있었습니다.
1965년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쟁 중으로 돈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는 군대를, 평화 헌법 때문에 군대를 파견할 수 없는일본에는 돈을 요구했습니다. 일본은 오키나와의 가데나(手) 기지를 비롯해 많은 미군 기지가 베트남전쟁의 전선 기지로 활용되었고, 일본 국내에서는 네이팜탄이라는 폭탄을 만드는 등의 일로 기업이 이익을 냈습니다. 그런 미국에서 보면 일본과 한국이 대립 관계에있는 것은 곤란한 상황입니다. 그래서 조기에 조약을 맺도록 양국에강한 압력을 가했습니다. - P210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존재, 그것이 재일조선인이다. 머조리티에게는 그런 고민이 없다. 그러나 마이너리티의 고민에는 귀중 - P236

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국가라는 것을 뛰어넘어 다음 시대를 통찰하는 인간이 갖는 고민이기 때문이다. 재일조선인이란 국가나 머조리티의 횡포에 복종하지 않는 인간을 가리킨다." - P237

당사자인 세대가 직접 과거 행위를 솔직히 인정하고 ‘미안하지만우리 세대가 남긴 부채가 여기 있다. 그것을 함께 짊어지고 가주기바란다‘ 하고 젊은 세대에게 부탁하는 것이 이 문제의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그러나 윗세대는 젊은이들에게 역사의 진실을 가르치지 않고, 그 결과 그들이 품고 있는 ‘우리는 알지도 못하는 비난‘이라는 감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것으로 해석하고는, 오히려 그 감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 P243

타자를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하는 사고방식 때문에, 자신도 피해를 당하는 입장임에도, 계속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나보다 더 낮은 존재‘를 마음속에 만들어, 그들보다는 내가 낫다고 자신을 위로하고 싶기 때문은아닐까요. 차별 구조의 하위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을 차별하는 상위의 사람들을 향해 항의하고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더 하위에 있는사람을 차별하고 공격하는 것, 그럼으로써 차별 구조 그 자체가 흔들림 없이 유지되는 것은 고금의 역사에 얼마든지 예가 있습니다. - P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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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사슬의 양쪽 끝이 있다. 경제가 역사Hitoire의 경로를결정한다. 그러나 최종 심급에서 그러하다. 최종적으로 결정적이라고schlieBlich entscheidenden 엥겔스는 기꺼이 말한다. 그러나 이 경로는 - P199

상부구조의 다양한 형태들, 지역적 전통들이, 국제적 정황들의 세계를 통해 "관철된다". 나는 이 검토에서 최종 심급, 즉 경제에 의한결정과, 상부구조들, 국민적 전통들, 국제적 사건들에 의해 부과되는 고유한 결정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엥겔스가 제안하는 이론적해법은 제쳐 두려 한다. 여기서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경제적인 것에의한 최종 심급에서의 결정에 대한 상부구조들로부터, 국내적·국제적인개별특수적 particulières 정황들로부터 야기된) 효력 있는 결정들의 축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을 취하는 것으로 족하다. 내가 제출한 과잉결정된 모순이라는 표현이 바로 여기서 명확해질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과잉결정의 존재는 더 이상 순수하고 단순한 사실이 아니기때문이고, 우리는 이 과잉결정의 존재를, 그 핵심에서, 비록 우리의설명이 아직 지시적인 것에 머문다 하더라도, 그것의 토대jondemen에연관시켰기 때문이다. - P200

마르크스의 역사적 이론의 수준, 그것은 구조 개념, 상부구조 개그리고 이 개념들의 모든 특수화들 spécijfications의 수준이다. 그렇지만 동일한 과학적 학문 분야가 자신의 수준과는 다른 수준에서, 어떠한 과학적 인식의 대상도 아닌 수준에서(우리의 경우 무한한 상황들로부터 개인적 의지들이 발생하고, 무한한 평행사변형으로부터 최종적 합력이 발생하는수준에서) 자신의 고유한 대상의 가능성과 이 대상에 상응하는 개념들의 가능성을 생산하려 한다면, 그 학문 분야는 인식론적 공백 속으로, 또는 인식론적 공백의 혼미로서의 철학적 충만 속으로 떨어진다. - P224

어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적 의식도 자기 자신의 내부적 변증법에 의해 자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 무엇을 자신 속에 지닐 수없다는 원리, 엄밀한 의미에서 의식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원리, 즉 자기 자신의 모순들의 힘에 의해 현실 자체에 이르는 의식의 변증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일체의 헤겔적 의미의 "현상학은 불가능하다는 것인데, 왜냐하면 의식은 자신의 내적인 전개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와 별개인 것에 대한 근원적 발견에 의해서 현실에 가닿기 때문이다. - P250

우리는 일반 이론, 즉 실천 일반의 이론을[대문자로 시작하는] 이론Théorie‘이라 부를 것이다. 이 실천 일반의 이론 자체는 기존의 "경험적" 실천들(인간들의 구체적 활동)의 이데올로기적 생산물을 "지식들" (과학적 진리들)로 전화시키는 기존의 이론적실천들(과학들)에 대한 이론의 기초 위에서 정교제작된다. 이 이론은변증법적 유물론과 동일한 것인 유물론적 변증법이다. 이 정의들은, 이미 실천적 상태로 존재하는 해법을 이론적으로 진술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질문에 이론적으로 근거를 갖춘 대답을 제공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 P290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을 헤겔 변증법과 구별하는 고유한 차이란 무엇인가? 제기된 이 문제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실천에 의해서든 계급투쟁의 정치적 실천에 의해서든 간에, 마르크스주의적 실천에 의해 이미 해결되었다. 따라서 그 해법은 마르크스주의의 저작들 속에 실존하는데, 그러나 그것은 실천적 상태로 실존한다. 이제 그 해법을 이론적 형태로 진술해야 한다. - P312

우리는이데올로기가 그 속에서 자신이 현실적인 것에 관여한다고 믿는 그런 영역을 포기하는 조건하에서만, 즉 이데올로기적 문제설정을(이데올로기의 근본적 개념들의 유기적 전제를, 그리고 이 체계와 더불어, 이 개념들의 대부분까지를 포기하고, "또 다른 요소들 속에", 새로운 과학적인 문제설정의 장 속에 새로운 이론의 활동을 기초 짓는 데로 나아감으로써만, 과학을 획득할 수 있다. - P333

단순한 것은 복잡한 구조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하나의 단순한 범주의 보편적 실존은 결코 기원적인 것이 아니며, 역사적인 긴 과정의 끝에, 극단적으로 분화된 사회구조의 산물로서 등장한다. 따라서 현실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단순한 본질이 됐든 단순한 범주가됐든 간에 단순성의 순수한 실존이 아니라, 복잡하고 구조화된 존재들 및 복잡하고 구조화된 과정들의 "구체성들"의 실존이다. - P341

마르크스주의적 모순의 특유한 차이는 모순의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이며, 이 "불균등성" 또는 "과잉결정"은 모순 속에 모순의 존재 조건을, 즉 모순의 실존인 항상-이미 주어진 복잡한 전체의 특수한 (지배 관계를 갖는) 불균등성의 구조를 반영한다. 이처럼이해된 모순은 모든 발전의 동력이다. 모순의 과잉결정에 기반한 전위와 압축은 그것들의 우세 dominance 여하에 따라, 복잡한 과정의 실존, 즉 "사물들의 생성"의 실존을 구성하는 (비적대적·적대적·폭발적)국면들을 설명한다. - P375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자신이 그것에 대해 진술한 그 영역을 넘어서는지, 따라서 이론적으로 단련된 보편성을 주장할 수 있는지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 정의를 다른 구체적 내용들, 다른 실천들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예컨대, 자연과학의 이론적 실천의 시험에, 과학들 속에서 아직도 문제가 야기되는 이론적 실천들(인식론, 과학사, 이데올로기들의 역사, 철학사 등)의 시험에 부쳐 봐야 한다. 이 정의를 이런 시험에 부치는 것은 이 정의의 유효범위를 확고히 하기 위한 것이요, 경우에 따라, 의당 그래야 하듯이, 이 정의를정정하기 위한 것이며, 요컨대 우리가 검토한 "개별특수적인 것"particulier 내에서 이 "개별특수적인 것"을 개별특수적인 것으로 만든보편적인 것 자체를 제대로 파악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 P377

다른 민족을 착취하는 민족이 자유로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사용하는 계급 역시 그 이데올로기에 구속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의 계급적 기능에 대해 말할 때에는,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라는 것, 지배적 이데올로기는 피착취 계급을 지배하기 위해서 소용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세계에 대한 자신의 살아지는 관계를 현실적이고 정당화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면서 자신을 지배계급으로 구성하게 하는 데 소용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더 멀리 나아가서 계급들이 사라진 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되는가 자문해야 한다. - P411

마르크스는 인간 본성 또는 인간본질이라는 관념이, 쌍을 이루는 가치에 대한 판단을, 아주 정확히말해서 인간적-비인간적이라는 쌍을, 감추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그는 ‘비인간적인 것‘도 ‘인간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의관계들의 산물이다. ‘비인간적인 것‘은 현재의 관계들의 부정적 측면이다......"라고 쓴다. 인간적-비인간적이라는 쌍은 모든 인간주의의 숨겨진 원리이며, 인간주의는 이 모순을 살고짊어지고-해소하는 방식일 뿐이다. - P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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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텍스트들은 어떤 저작에 대한 고찰, 비판이나 반박들에 대한대답, 공연에 대한 분석 등으로서 거의 모두가 어떤 정세 속에서 탄생했다. - P43

각기 어떤 특정한 계기에 탄생한 이 텍스트들은 그렇지만 하나의 동일한 시대와 동일한 역사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각기 나름의방식으로, 마르크스 속에서 사고하고자 한 내 나이 또래의 모든 철학자들이 겪어야 했던 하나의 특이한 경험, 즉 역사가 우리를 몰아넣은 이론적 궁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수 불가결했던, 마르크스의철학적 사고에 대한 탐구에 관한 증언들이다. - P44

철학한다는 것은 청년 마르크스의 비판의 오디세이 여정을 우리 스스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었으며, 우리에게서현실을 훔쳐 간 환상들illusions의 층을 뚫고 나간다는 것이었고, 비판의 영원한 감시 아래 서로 조화하는 현실과 과학이 주는 휴식을 마침내 찾기 위해 유일한 고향 땅인 역사의 땅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이독해 속에서 철학의 역사라는 질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소산된 환영 fantasme의 역사, 통과된 암흑의 역사가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오직 현실의 역사만이 존재한다. 현실의 역사는 잠자는 이에게 앞뒤가 맞지 않는 꿈들을 꾸게 할 수 있지만, 이 심연의 유일한연속성에 정박하고 있는 그 꿈들은 그 자체로 결코 역사의 대륙을 구성할 수 없다. - P59

교조주의의 종언은 우리를 다음과 같은현실에 대면하도록 했다. 자신의 역사 이론을 창설하는 행위 바로그 속에서 마르크스에 의해 창설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레닌이 그주춧돌만 놓였다고 말한 것처럼, 대부분 앞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현실. 교조주의의 어둠 속에 우리가 겪으면서 논쟁한 이론적 난점들은 그 모두가 작위적인 난점들이 아니었으며 대부분 마르크스주의철학이 정교제작되지 않은 데 기인하는 것이었다는 현실. 더적절히 말하자면, 우리가 감내하고 유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경직되고 희화화된 형태들, 두 개의 과학이라는 이론적 기괴성을 담고있는 그 형태들 속에 모종의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눈멀고 괴기한모습으로 현존하고 있었다는 현실 - 그 증거로는 최근에 재간행된이론적 좌익주의의 저서들(젊은 루카치와 코르쉬)만 들어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에 약간의 이론적 실존과 정합성이 부여되기를 원한다면 오늘날 우리의 운명과 임무는 아주 단순하게도, 백일하에 이 문제들을 제기하고 이 문제들에 대면하는 것이라는 현실이 그것이다. - P61

포이어바흐는 청년 헤겔주의 운동의 이론적 발전에서 등장한 위기의 증인이자 동인지이다. 1841년과 1845년 사이 청년 헤겔파의텍스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포이어바흐를 읽어야만 한다. 특히우리는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 포이어바흐의 사상이 어느 정도까지 스며들었는지 볼 수 있다. - P89

한인간이 자신의 연계들을 통해서만큼이나 자신의 단절들을 통해서자신을 드러낸다면, 마르크스처럼 엄격한 사상가도 자신의 이후 진술들을 통해서만큼이나 포이어바흐와의 단절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고 드러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마찬가지 방식으로, 포이어바흐에 대한 지식이 또한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해주리라고 말하려 한다. - P94

마르크스가 보기에 포이어바흐는 헤겔의 땅에 머물러 있었으며, 비록 그가 헤겔의 땅을 비판했더라도 그 포로로 남아 있고, 헤겔 자신의 원리들을 헤겔에게 되돌려 들이댈 뿐이었다.
포이어바흐는 "요소"를 변화시키지 않았다. 헤겔에 대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은 요소를 바꿀 것을, 즉 포이어바흐가 그것의 반항적 포로로 남아 있던 저 철학적 문제설정을 포기할 것을 전제한다. - P95

이데올로기적 역사의 진리는 그것의 원 - P132

리(원천) 속에 있는 것도 아니며, 그것의 결말(종말) 속에 있는 것도아니다. 그것은 사실들 자체 속에, 이데올로기적 의미들. 주제들. 대상들을 그것들의 문제설정 그 자체로 현실적 역사에 종속되어 있는 "매여 있고" 유동적인 이데올로기적 세계의 기반 위에서 생성되는 문제설정의 은폐된 기반 위에 결절적으로 구성하는 것 속에 있다. - P133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그들 자신의 시작으로 인해 갖게 된 저 환상의 베일을 찢어 버릴 실제적 경험을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로부터 현실로의 이런 뒤로 돌아오기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독일 철학"의 텍스트들 속에서 어떠한 반향도 찾아볼 수 없었던 근원적으로 새로운 현실에 대한 발견과 일치하기 시작했다. 마르크스가 프랑스에서 발견한 것은 조직된 노동자계급이었다. 엥겔스가 영국에서 발견한 것은 발전된 자본주의였고, 철학 그리고 철학자들과는 관계없이 자기 자신의 법칙들을 따르고 있던 계급투쟁이었다. - P150

마르크스 자신의 시작이 부과한 이 이론적 "장정"에서 마르크스는 무엇을 얻었는가? 그가 결말로부터 그토록 먼 곳에서 시작함으로써, 철학적 추상 속에 그토록 오래 체류함으로써, 현실을 다시 발견하기 위해 그런 공간들을 편력함으로써 얻은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그것은 그가 개인으로서 비판적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게 되었다는 것과 계급투쟁과 이데올로기들에 대한 역사적으로비견할 수 없도록 주의 깊은 "임상적 감각을 취득했다는 것일 터이요, 그뿐 아니라, 특히 헤겔과 접촉함으로써, 모든 과학적 이론의 구성에 불가결한 추상화의 감각과 실제, 즉 헤겔 변증법이 그에게 그추상적이고 "순수한" "모델"을 제공한 이론적 종합 및 과정의 논리의 감각과 실제를 익힌 것일 터이리라.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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