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6월 조선에서 동학농민전쟁이 확대되자, 청과 일본 양국은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간주하면서 내정에 직접 개입하려고 했다. 때마침 초토사 홍계훈 휘하의 장위영 병정들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하자, 6월 3일 밤 조선 정부는 당시 정권 실세였던 민영준의 주도 아래 청에 병력 파견을 요청했다. 

일본은 1884년 갑신정변을 둘러싸고 청과 군사적 충돌의 위기를 겪었지만, 양국은 톈진조약을 맺고 청과 외교적으로 타협했다. 청이 원병을 파견하자 일본도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일본은 ‘동학란’ 속에서 자국 거류민을 보호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갑신정변 이후 체결된 제물포조약과 톈진조약을 파병의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두 조약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할 때 상호 통지한다는 절차상 규정에 불과했을 뿐, 양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 시민의 한국사2 P53


"지금의 형세를 살피건대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 없다. ... 권력을 쥐고 있는 대신들은 모두가 외척이고, 밤새도록 하는 일은 단지 자기를 살찌우는 방법만을 궁리할 뿐이다. 자기 당파의 무리를 각 고을에 나누어 퍼뜨려 백성들을 해롭게 하는 짓을 일삼케 했으니, 백성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초토사 홍계훈은 사람됨이 무식할 뿐만 아니라, 동학의 위세에 겁을 내면서도 어쩔 수 없이 출병하였다. ... 가장 애석한 일은 3년 안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귀속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까닭에 우리 동학이 대대적으로 의병을 일으켜 백성들을 편안케 하려 한다." - 대한계년사 2권 P26~27



교과서에서 청일전쟁을 다루거나 한국 근대사에서 청일전쟁을 다룰 때 서술 시각은 대체로 위와 같다. 동학농민전쟁을 필두로 전으로는 배경을, 후로는 전개 과정부터 결과까지 일사천리로 훓치듯 지나간다. 그나마 <시민의 한국사2>에서는 풍도 해전, 평양 전투, 황해 해전 등 주요 전투가 포함된 지도와 간단한 전개를 언급하고 있지만 세부적인 내용을 알기는 어렵고 ‘이 과정에서 한반도의 피해가 컸다’라는 것만 짐작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일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선 출병을 결정했는지 배경은 짐작할 수 있지만 누가 결정했고 어떤 과정에 의해서 결정되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당시 천황가와 일본 내각 다수는 조선 출병이 시기상조라 보았다. 그러나 1894년 6월 2일 참모본부 차장인 가와카미 소로쿠가 외무대신 무쓰의 관저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하야시, 무쓰, 가와카미 세 사람이 출병에 동의했고 다음 날 내각회의에서 야마가타 아리토모 중장에 허락을 받아 출병 결정이 내려진 것이다. 




일본은 왕궁을 점령하고 일본의 뜻을 따르도록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이틀 후에는 인천 근처의 풍도 앞바다에서 청과 교전에 들어간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던 것이다. 정부 내부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쯔 무네미쯔였다. 

무쓰 무네미쯔는 능력을 평가받아 외무성에는 지금도 동상이 세워져 있지만, 청일전쟁에서 학살사건이 벌어진 중국 뤼슌의 기념관에는 초상이 악인으로 묘사돼 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49


무쓰는 7월 19일 외부 내각 의견에 따라 오토리 공사에게 조선 왕궁과 서울 포위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지시했으나 오토리는 군부의 의견에 동조하여 결행을 감행했다.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을 읽으며 놀란 부분은 일본이 청일 전쟁을 위한 결정적인 명분을 찾고 있었을 뿐 사전에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일본은 도성 내외 수색과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도 차단했다. 가와카미 소로쿠는 1893년 조선에 입국해 신분을 숨긴 채 비밀리에 조선과 청국을 정탐하며 고종과 흥선대원군을 만나기도 했고 이를 바탕으로 청일전쟁에서 조선지도를 만들어 배포한다. 6월 5일 천황 직속의 통수기관인 전시 대본영을 설치된 것은 경복궁 점령 전 이미 전쟁 준비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청은 직예제독 예지차오,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기명제독 장치캉, 유격 판진산을 리더로 하여 부대를 구성했다. 추가로 웨이루쿠이, 마위쿤, 쭤바오구이 등이 인솔하는 군사를 평양에 파견하여 아산과 평양 일대에 약 14,000여 명의 청군이 주둔하게 된다.

중국에서는 청일전쟁의 전황을 풍도해전->평양 함락->황해 해전->뤼순다롄 전투->웨이하이 전투->시모노세키조약의 6단계로 보고 있다. 

출동 초기 청군은 동학농민군 토벌보다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는 데 치중했다. 게다가 청국군은 전쟁 초반 승기를 잡아야 했음에도 안일하게 대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예지차오는 리훙장에게 패주 과정에서 청주, 충주, 금화를 경유해서 평양에 도착할 때까지 전력을 다해 싸워 승리했다고 보고했으나 날조였고 실제로 전투를 하지도 않은채 평양으로 도망쳤다. 성환과 아산 전투의 패배에도 전면전이 아닌 완만한 작전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리훙장은 전략적 판단이라 생각했지만 이는 결과적으로는 판단 미스였고 반면 일본군은 조선에 계속 증파되면서 평양 전투를 제대로 준비했다. 


청일전쟁에서 조선인들의 등장은 일반인들보다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한 민병들의 기술에 주로 치우쳐져 있었다고 본다. 이는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비중을 상대적으로 높이 가져가는 영향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련하여 국내에서는 이이화 선생님을 비롯한 연구자들의 많은 대중서가 나와 있기도 하여 그 전개 과정과 영향, 결과를 살펴볼 수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그 배경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사이에서 총을 쏘아 댔다. 농민군은 끝내 우금재 너머 언덕으로 물러나 산등성이에서 쏘아 대는 대포와 총의 사격거리를 피했다. 이때 관군 수십 명이 산을 내려가 작은 언덕배기를 장애물로 삼고 총을 쏘았다. 패색이 짙어진 농민군은 보루를 버리고 달아났다. 일본군과 경리청군 50여 명은 달아나는 농민군을 남쪽으로 십여 리를 추격했다. 이 우금재의 싸움에서 "쌓인 시체가 산을 가득히 메웠다"고 할 만큼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11일, 능치를 지키던 관군은 빼앗은 농민군의 옷과 수건을 착용해 농민군 모습으로 위장했다. 관군은 산을 기어올라 농민군에 근접했다. 농민군은 위장한 관군을 동료로 오인하였는데 위장 관군이 근접해서 불의에 총을 쏘아 댔다. 기습을 받은 농민군은 놀라 흩어졌다. 관군은 대포를 노획했고 많은 연환을 빼앗았다. 이 능치전투를 끝으로 농민군은 12일부터 점차 흩어져 갔다. - 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8권 P276~277


"대국이 왜눔한테 항복을 했이니, 그게 망조라 말이다. 왜눔들이 개미떼맨쿠로 기어올 긴데, 벌써 항구에는 왜놈들 장사치들이 설친다 카는데, 허수애비 같은 임금 있으나 마나, 총포 든 놈이 제일 아니가." - 토지 1권 P123


또한 <조선인들의 청일전쟁>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일본군이 조선에 들어오면서 일본인 선부의 고용, 파견 기준과 조건, 서약서 제출 등에 관한 기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 기준과 조건은 예비,후비의 적에 있는 자 혹은 징병 당첨자, 신체 강건한 자, 연령은 21세 이상 45세까지, 주벽이 없는 자, 절도 혹은 도박범의 실결을 받지 않은 자, 폭행사건으로 형을 받지 않은 자로 한정했다. 공무상 다치거나 유행병에 걸린 자는 급료를 감하고(?), 스스로 건강에 주의하지 않아 걸리는 질환 또는 술에 취해 광기를 부리거나 싸움으로 얻은 외상은 휴업 중 일급 2분의 1 이내로 급료를 감할 것이라는 사항도 있다. 공무상 다치는데 급료를 감하는 것은 좀 지나친 것 같다. 선발 기준도 꽤나 엄격한 듯 싶다. 이들은 서약서도 제출해야 했는데 한마디로 ‘규칙에 절대 복종하며 (왠만하면) 불만을 품지 말라’는 것이다. 문제는 군량과 말먹이 등 대부분이 현지에서 징발 형태로 조달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군 뿐 아니라 청군도 마찬가지다(청은 재조지은을 이름 삼아 조정에 요구받으면서도 백성들을 못살게 군 것이 더 괘씸하기도 하다).  

평양에 주둔한 청군은 약탈 수준으로 징발을 자행했다. 베이징 정부는 행군 중 불법을 자행한 병사에게 군법을 따르게 하고 법률과 기강을 엄히 할 것을 지시했고 소란한 민심을 안정시켜 후환을 막게 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잘 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전쟁의 승리를 미화하고 찬양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 언론도 큰 몫을 담당했다. 당시 전리품으로 획득한 것은 야스쿠니 신사 등 일본에 순회 전시되었고 이 중 일부는 물품이 현재도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아니 근데 부녀자의 의복은 왜?). 


청일전쟁과 관련한 현재의 일본 사회과 교과서의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청일전쟁의 원인을 동학농민전쟁에서 구하는 데는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동학난이라 불리는 농민폭동”이라며 단순한 반란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둘째, 청일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대체로 조선이 중국에 출병을 요청했고, 일본도 중국과의 합의를 구실로 군대를 파견하여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농민군의 활동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은 부각시키지만 청일 간섭군에 농민들이 저항했으며 일본군이 이들을 철저히 진압했다는 사실은 생략되어 있다. 또 일본이 처음부터 전쟁을 목적으로 출병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전쟁을 정당화했던 과거의 논리에 대해 비판의식이 결여되어 있다. 셋째, 청일전쟁의 결과에 대해 고대부터 지속되었던 동아시아 중화질서는 이로부터 붕괴되었고 조선의 독립을 인정받았다고 하여 조선을 피동적 입장에서 파악하고 있다. 근대 시기 일본 지식인 대다수는 청일전쟁을 ‘문명전쟁’, 러일전쟁을 ‘인종전쟁’으로 인식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러한 인식은 공유되고 있다. - P340~341


당시 후쿠자와 유키치는 <지지신보>에 <뤼순의 학살은 터무니없는 떠도는 소문이다>라는 논설을 게재하여 사실 자체를 완전히 부인했다.


우리 뤼순의 대승에 대해 외국인 중에는 그 살육이 많다는 것을 듣고 왕왕 말을 만드는 자가 있다. 승리를 틈타 중국인들을 도륙한다는 한 가지 일은 세상으로부터 욕을 면할 수 없다. 이 참혹한 최후의 거동은 모두 전승의 명예를 말살하기에 족하다는 논평으로 한탄스럽다. … 뤼순 시가의 죽은 자 중에는 무고한 인민이 다수 있다는 것은 모두 상상하여 말한 것이다. 인민을 살육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들은 그 터무니없음을 경계함과 동시에 금후에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에는 고려 없이 살육을 행해 조금도 차이 없다는 것을 감히 단언하는 바이다. - P580~581


당시 일본 지식인들은 대부분 이런 정서를 공유했을 것이다. 


청일 전쟁은 한반도를 넘어 진행되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상당수의 조선의 인부가 일본인 인부와 함께 압록강을 넘어 동원되었다고 한다. “후방에서 양곡을 취하여 전방인 청국 안둥현으로 전송했다. … 대체로 황군의 운이 우세하니 한인 인부의 위풍도 한결같다. …” 한 육군 포병 소좌의 기록을 통해 당시 얼마나 많은 조선인이 이런 식으로 끌려갔을지 상상하게 된다. 황군의 운이 좋으면 한인 인부의 위풍이 그에 따르는 것이라니 이 인식도 문제가 심각함을 느끼게 한다. 


양국 해군은 1894년 9월 17일 황해 해전을 벌인다. 이 때 기함 사령관이 상관인 제독 정여창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청의 해군이 피그덕거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포격으로 함교가 무너져 정여창과 영국인 고문이 부상을 당하면서 청의 지휘 라인에 공백이 생겼다. 이에 청군은 웨이하이로 급히 철수하게 되었다. 황해 해전은 청의 뼈아픈 손실이 되었을 것이다. 


웨이하이웨이로 불리던 19세기, 이곳에는 청왕조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설치되고, 류꿍따오에 제독의 청사가 세워졌다. 1880년대 무렵까지는 동양의 제1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전쟁에서 패하고 만다. 일본군이 이 바다를 습격하자 북양함대는 투항했다.  - 동아시아를 만든 열가지 사건 P54


첫째, 이 전쟁은 민족주의를 통해 정부와 국민이 하나의 목표로 굳게 단결해 근대 국가를 건설하려던 나라와 정부와 백성이 전체적으로 완전히 따로 놀았던 나라 사이의 전쟁이었다. 전쟁에 나선 일본은 거국적인 역량을 총동원한 반면 청의 일반 백성들은 전쟁과는 거의 동떨어져 있었으며 조정은 거의 전적으로 북양 함대와 이홍장의 회군에게만 의지했다. 둘째, 청은 명확한 지휘 체계가 서 있지 않아서 명령이 일사불란하지 못했고 거국적인 동원도 없었다. 총리아문, 지방 당국, 무책임한 청류파 관료들의 상충된 건의들은 청조의 우유부단함만 초래했을 뿐이다. 조선의 외교와 군사 업무를 관장하고 있던 이홍장은 정책 결정권이 없었으며 자기 관할 밖에 있는 전함과 군대에 대한 통제권도 없었다. 셋째, 조정과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는 처음부터 청의 노력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서태후가 여름 별궁인 이화원 건축을위해 해군 기금에서 수백만 냥을 전용한 것, 그녀의 환관 총애, 사회전반의 도덕성 타락도 패전의 원인이 되었다. 이홍장이 정직성보다는 개인적 충성심과 복종심에 따라 인선한 북양 함대의 사령부에서 특히부패가 만연했다. 많은 군관들이 태감 이연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으며 공금을 빼돌려 그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러면 그는 이들의 불법 행위를 비호해주었다. 외형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였지만 북양 함대는 사실상 약체였다. 이홍장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번지기 전에 먼저 외교적 수단을 총동원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홍장의 외교는 국제 정치에 대한 이해 결여, 개인의 협상 능력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 구태의연한 이이제이 정책에의 의존 등으로 말미암아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다. 러시아의 중재가무산되자 이홍장은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구했으나 양쪽 다 일본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없었다. - <캠브리리 중국사> P188~189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조약 체결로 양국 간 전쟁은 끝이 났다. 전쟁은 상당 부분 한반도에서 전개되었으며 이로 인해 피해를 본 것은 조선의 물자와 인부들, 병사들, 무고한 백성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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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개성 문제는 공산군 측이 38선이 아니라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하는 문제를 수용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38선을 고수하면, 개성을남측에 돌려주거나 최소한 비무장지대 안에 두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기때문이었다. 개성은 그 대부분이 38선 이남에 위치했기 때문에 개전 이전 남한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판문점에서 정전회담이 진행되던 당시에는 북측이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정전회담 제2의제 분과위원회 회의록은 양측이 얼마나 개성을 차지하고 싶어 했는지, 그리고 왜 북측이 개성을 유엔군 측에 돌려주지 않기 위해 접촉선안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 P112

비무장지대는 정전의 필요조건으로서, 또 정전을 유지하기 위한 측면으로서 기획되었다. 정전협정문이 ‘정전‘(停戰), 즉 싸움을 멈추기(Stop the fighting), ‘정전의 유지‘(Keep the fighting stopped), ‘항구적인 평화의 실현‘(Establish permanent peace)이라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면, 229 비무장지대는 앞의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한 핵심 사항이었다. 비무장지대 설치는 바로 싸움을 멈추기 위한 조건이었고, 비무장지대의 역할은 정전을 유지하기 위한 ‘물리적 거리두기‘였다. 남북의촉을 막으면 적대행위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을 바탕으로 한것이었다. 물론 정전협정문 제60항에서 정치회담을 통한 외국군 철수및 항구적 평화 실현을 명시하기는 했지만, 미래에 실현될 평화의 조건으로서 비무장지대의 존속이나 존재 여부가 고려된 것은 아니었다. - P154

1953년 7월 27일 22시 이후 총 48일 동안 비무장지대 내에서의 무장 부대 철수와 위험물 청소 작업이 이루어졌다. 양측은 비무장지대 위험물 제거와 안전통로 표식물 작업 등에 비교적 성실하게 임했다. 정전 직후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선전의 요소나 분위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양측이 모두 통로의 위험물과 지뢰밭 제거를 서두르고자했고, 안전통로가 표시된 지도를 건넸으며, 위험물 제거가 완료되지 않았을 때는 상대의 안전에 대해 주의를 환기하였고, 이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비록 비무장지대 전역에서 위험물이 제거된 것은 아니었고 수많은 지뢰와 사용 가능한 텅 빈 진지가 남아 있었지만, 45일간 우선순위로삼았던 영역에서 위험물을 가능한 한 제거하고, 양측이 군사분계선에서만날 수 있는 통로를 정비했다는 점은 그 의미가 절대 작지 않다. - P179

군사분계선 표식물은 7피트 높이의 금속이나 목재로 만들어진 말뚝 형태였다. 여러 유형의 토양에서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도록 콘크리트로 지지되거나 암석을 기반으로 세워졌다. 어느 방향에서도 군사분계선 식별이 가능하도록 말뚝 꼭대기에 ‘군사분계선 표시물‘이라고쓰인 표지판이 고정되었다. 처음에는 원형 표지판이 제안되었으나, 직사각형 모양으로 바뀌었다. 표식물 사이의 거리는 한 곳에서 다음 표식물을 볼 수 있도록 직선 500m, 곡선 300m를 넘지 않았다. 군사분계선이 도로, 산길, 강, 개울과 같은 곳을 지날 때는 이로부터 10m가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북쪽과 남쪽 건너편으로 번갈아 설치되었다. 그리하여 총1.292개 지점에 군사분계선이 표시되었다.
그런데, 군사분계선은 말뚝 형태로만 표시되는 데 그치지 않았다.
흔히 군사분계선은 선이 아니라 1292개의 점이라고 알려졌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는 말이다. 300~500m 간격으로 표식물이 있다고 해도 월경의 가능성은 충분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곧 표식물과 표식물을 잇는 가는 선이 곳곳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이때의 선은 오늘날 - P192

철책처럼 공고하게 전면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고, 말뚝과 말뚝을단순히 잇는 정도였다. 더구나 말뚝도, 말뚝과 말뚝을 잇는 선도 관리가되지 않으면서, 군사분계선을 표시했던 선은 없어지고 말뚝도 훼손되어갔다.
군사분계선과 더불어 비무장지대 남북 경계선도 식별이 가능하도록설치되었다. 비무장지대의 남쪽. 북쪽 경계에 접근하고 있음을 경고하기 위함이었다. 이 역시 표지판 형태로 설치되었고, 성근 철조망을 이어서 비무장지대 경계선이 곳곳에 표시되었다. - P193

민정 경찰의 무기 휴대 규정은 이후 비무장지대 무장화의 시작이 되었다. 더 위험한 무기를 제안한 것은 공산군 측이었다. 북·중은 민정 경찰의 휴대 무기와 관련하여 토미건이 미군의 카빈총에 상응하는 북측 무기라고 덧붙이며, 카빈총 또는 소형 기관총의 휴대가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유엔사 측은 처음에는 권총만을 휴대할 것을 주장하면서, 소형 기관총은 전쟁 무기 또는 가장 폭력적인 폭도를 향해 사용하는무기라는 이유로 반대했다. 나아가 권총과 소총 사용으로 타협할 것을제안했다. 298민정 경찰의 무기 소지 문제는 군사분계선 표식물의 필요성 문제로이어졌다. 무기를 소지한 군사 경찰이 군사분계선을 우발적으로 혹은고의로 넘거나, 상대측을 향해 사격을 가할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경계선 표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 P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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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한국전쟁, 그리고 비무장지대의 탄생

미국과 유엔의 서방국 사이에서 처음 논의되었던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정치적인 해법‘으로서 제기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의도를 고려하고, 한반도 밖으로의 확전을 방지하는 방안이었다. 정전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 비무장지대는 ‘군사 작전 지대‘로 인식되고 규정되었지만, 사실 비무장지대 구상은 한국전쟁을 정치적으로해결하려는 차원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 P69

미국은 영국, 인도 등과 함께 중국과 정치적으로 정전문제를 협상하려고 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했다. 군사적으로 전황이 유리하던 중국은 정전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의 정전 시도는 실패했으나, 비무장지대 설정을 통해 정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미국, 기타 서방국, 중국 사이에 인식이 공유되었다. 이때 논의한 38선 기준의 비무장지대, 정전 감독 기구의 설치 등은 이후 정전회담의 토대가 되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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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합체‘ collective라는 말을 사용하여 인간들과 비인간 존재들 간의 연합을 묘사할 것이고, ‘사회‘society라는 말로는 우리의 집합체의 한쪽 부분만을, 즉 사회과학이발명해 낸 분할의 한쪽 편만을 지칭할 것이다. 맥락과 기술적 내용은 매번 재정의되는 것으로 드러난다. - P26

이 글의 가설은 다음과 같은 것인데, ‘근대성‘이라는 말이두 가지의 완전히 다른 실천을 지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실천은 그 효과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구분되어야만 하지만 최근에는 이것들이 혼동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실천의 첫 번째 집합은 ‘번역‘translation인데 이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존 - P41

재들 간의 혼합, 즉 자연과 문화의 하이브리드들을 만들어낸다. 두 번째는 ‘정화‘purification로서, 전적으로 구분되는 존재론적 지대를 창출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비인간 존재들의 존재론적 지대이다. 첫 번째 집합이 없다면 정화의 실천은 헛되고 무의미해질 것이다. 두 번째 실천이 없으면 번역의 작업은 느려지고 제한되거나 심지어 불가능해질 것이다. 첫 번째 집합은내가 연결망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응하며, 두 번째는 근대적인 비판적 입장이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한다. 전자는 예를들어 고층대기의 화학과 과학적, 산업적 전략, 그리고 국가의정상들의 관심사, 그리고 생태주의자들의 근심 모두를 단일한 연속적인 사슬로 연결시킬 것이다. 후자는 언제나 거기에있어 온 자연세계와, 예측가능하고 안정적인 이익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회, 그리고 지시대상과 사회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담론들 사이에 분할을 수립할 것이다. - P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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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이득‘을 준 이상 이는 노동이다. 그러나 그이득이 스스로에게 돌아갔고 그 보상 역시스스로가 얻은 것이므로 ‘무료‘ 노동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로부터 ‘무료 노동‘이라고 불릴 수있는 유일한 노동은 지불받지도 보상을 얻지도 않은, 다른 이를 위해 행해지는 노동이라는 점을 도출할 수 있다. - P41

가사노동의 특징적인 생산 관계가 가사노동에만 해당하지 않고 혹은 가사노동에만 한정되지 않고 다른 종류의 과업과 노동역시 특정 지으므로, 우리는 가정 내 노동이 - P46

라는 개념으로 가사노동의 개념을 대체하기를 제안한다. 연구 대상은 분명 사회학적이고 광범위한 의미의 집에서 무료로 실시되는 노동이기 때문이다. - P47

토착 이론은 개인의 신장과 그의 신체 기관에 필요한 음식의 양 사이에 상관관계가 성립한다고 전제한다.‘ 그러나 이 전제가 분배의 원칙이 아니라 합리화에 불과하 - P86

다는 것은 이 상관관계에서 드러나는 예외의 수만 봐도 명백해진다. 남편, 사장, 아버지, 장자는 그 자신이 아무리 왜소하더라도자신과 신장이 비슷한 여성이나 노동자, 아이, 동생에게 특권을 양보하지 않는다.
필요 편차 이론은 또한 에너지 소비의 차이라는 세 번째 논거를 포함한다.
이 주장은 실제 개인이 소비하는 에너지 측정값에 근거하지 않으며, 활동과 에너지 소비 사이에 개인과 무관한 관계를 설정한다. 이 관계는 기본적으로 활동을 ‘큰일‘과 ‘작은 일‘로 분류한다. 하지만 이 분류는해당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 소비에 따른 것이 아니라 활동의 성격에 기초한다.
이때 기술적인 수행 자체는 분류의실질적 기준이 아니다. - P87

소비는 재화만이 아니라 서비스도 포함하는 문제다.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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