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칠 줄 모르는 전사는 무려 18년에 걸쳐 시리아와 이라크땅을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진창에 빠지지 않으려고 짚단 위에서 잠을자고, 어떤 이들과는 싸우고, 어떤 이들과는 우호조약을 맺는 등 모두를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광활한 영지 곳곳에 널려 있는 궁전에서 편히 머무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비위 맞추기에 연연하는 간신들이 아니라 그에게필요한 연륜 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바그다드는 물론, 이스파한, 다마스쿠스,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심지어 자신의 영지인 알레포와 모술에까지 퍼져 있는 촘촘한 정보망 덕분에 지속적으로 정보를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다른 군대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 P169

언제든지 배반하거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던 에미르들의 자율적인집단지도체제를 따르지 않았다. 군기는 엄격했으며 지극히 사소한 과실도 엄하게 다스려졌다. … 알레포의 통치자는 다른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머무를 수 있는 그 많은 성들을 무시하고 늘 성 밖에 있는 자신의 막사에서 묵었다. - P170

단 몇 주만에 장기는 동방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 특사를 보내 다니슈멘드의 후계자들이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하도록설득하였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로 선동가들을 보내 1111년에 이븐 알카샤브가 일으켰던 것 같은 소요를 조직하여 술탄 마수드가 샤이자르로군대를 급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시리아와 자지라의 모든 에미르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서신을 보내 새로운 침략에 맞서 힘을 모을것을 명했다. 적의 군대보다 수가 적었던 아타베그의 군대는 전방에 나서지는 않으면서 작은 교란 작전을 펼쳤다. 아타베그는 바실레이오스와프랑크 지휘관들한테 긴밀히 전갈을 보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일단은 그가 황제였으니까-에게 자신은 이 연합군이 두려우며 그들이 시리아 땅을 조속히 떠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면서데사의 조슬랭과 안티오케이아의 레몽 같은 프랑크인들에게는 이런 전 - P184

언을 보냈다. 일단 룸인들이 시리아 땅의 요새 한 군데를 점령한다면 머지않아 당신네 도시들을 전부 손에 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페르시아와 이라크,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엄청난 무슬림 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사기를 저하시키라는 임무를 띤 첩자들이 비잔티움과 프랑크의 일반 전사들 틈에 잠입했다. - P185

누르 알 딘은 선전선동을 몸소 관장했다. 그는 시와 서신, 책을 쓰게 하였으며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만한 적당한 때를 골라 퍼뜨리게 하였다.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간단했다. 단일 종교, 곧 이슬람 수니파로서모든 ‘이단들‘에 맞서는 격렬한 싸움을 의미하였다. 이어 단일 국가. 이것은 프랑크인들을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단일 목표. 이것은 빼앗긴 땅을 되찾고 특히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지하드를 의미했다. 권좌에 머무른 28년 동안 누르 알 딘은 여러 울라마들을 부추겨 조약을 쓰게 했고, 이슬람 사원들과 학교에서는 대중 강독 - P208

집회를 통해 성지 알 쿠드스의 가치를 선전하게 하였다. - P209

누르 알 딘은 승리자다운 아량으로 아바크와 그 측근들에게 홈스지역의 봉토를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재산을 갖고 피난하는 것도 허락했다.
전투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르 알 딘은 무기가 아닌 설득 - P221

으로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4반세기 전부터 아사신이건, 프랑크인들이건, 장기이건 간에 자신들을 예속하려는 누구에게나 격렬히 저항해 왔던 이 도시는 안전과 자주성을 존중해 주겠다는 한 왕자의 너그러움에손을 들고 만 것이다. 다마스쿠스인들은 그 점을 후회하지 않았다. - P222

살라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작고 가냘픈 몸에 단정하게 수염을 길렀다고.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살라딘은 사색적인 표정에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그는 늘 손님에게 상냥했다. 음식을 자꾸 권했으며 그들의 요구는 되도록 들어주려 했다. 비록 불경을저지른 자들일지라도 모든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실망스럽게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그의 이런 성격을 때로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 P25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 금은보화가 탐이 나서도 아니요. 복수 삼아 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다만 신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무에서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살라딘이 거둔 승리의 의의는 성지를 침략자 무리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뿐 아니라, 피와 파괴를 동반하지 않고, 증오 없이 행해졌다는 데 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무슬림은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이 성지에서 무릎을꿇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흡족할 따름이었다. - P284

아크레, 아스칼론, 또는 예루살렘 등 도시나 요새를 점령할 때마다살라흐 알 딘은 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티레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했다. 현실적으로 이 도시를 완전히 함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불구하고 말이다. 연안 지대의 프랑크인들은 바다 저편에 있는 자들에게 연달아 전령을 보냈고 이들은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살라흐 알 딘이야말로 자신의 군대에 대항하는 방어군을조직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 P288

사실 성지 예루살렘은 알 카밀의 세력권에 있지 않았고 얼마 전에 사이가 틀어진 동생 알 무아잠의 수중에 있었다. 알 카밀은 자신의 벗인 프리드리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서 알 무아잠의 야심을 저지하는 완충국을 건설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길게 보면 다시 힘을 회복한 예루살렘이 이집트와 그 위협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아시아의 호전적인 전사들(몽골을 말함-옮긴이) 사이에서 효과적인 중재역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열렬한 무슬림이라면 결코 냉정하게 성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겠으나 알 카밀로 말할 것 같으면 백부인 살라딘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무엇보다 정치적이자군사적인 사안이었다. 종교적 입장은 여론을 상대할 때에나 고려할 문제였다. 한편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도도, 이슬람 교도도 아니라고 느끼고있던 프리드리히도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그가 성지를 탐냈던 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묵상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동방으로의 출발을 늦춘다고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의 싸움에서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P320

당시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을다스리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의 소국 왕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칭기스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침략자들과 손을 잡아서 왕조의 적이기도 한 이집트 맘루크들과 대적할 생각을 할 만큼 정신 나간 자들도 있었다. 서유럽과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의 입장도 가지가지였다. 하이톤이 통치하던 소아르메니아는 몽골인 편을 들었다. 하이톤의 처남이었던 안티오케이아의보에몽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오히려 무슬림 쪽에 유리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물론 동방에서도 - P339

몽골 군의 원정을 프랑크인들의 원정처럼 무슬림에 대항하는 일종의 성전으로 보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 P340

아크레를 정복하고 나자 신께서는 시리아 연안에 아직 남아 있던프랑크인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이다와 베이루트, 티레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도 서둘러짐을 싸기 시작했다. 술탄은 그 어떤 술탄보다도 좋은 운을 타고난사람이다. 그 지역을 그처럼 수월하게 정복해서 즉각 파괴시켜 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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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 군의 침공 초기에는 알 하라위가 그랬듯이 서쪽으로부터비롯한 위협이 그처럼 광범위하게 퍼지리라고 짐작한 아랍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너무 빨리 새로운 상황을 받아들인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의 아랍인들은 체념하고 살아 남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이 낯선 상황을 이해하려고 비교적 냉철한 관찰자의 모습을견지한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 가장 뛰어난 이가 바로 다마스쿠스 명망가 출신의 젊은 문필가이자 연대기 사가인 이븐 알 칼라니시3일 것이다.
1096년에 스물세 살의 나이로 프랑크인들이 처음 동방으로 들어오던 모습을 목격한 이래로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정기적으로 기록하였다. - P19

그 해 여름, 서쪽 하늘에 혜성 한 개가 나타났다. 그 혜성은 스무 날이나 계속 올라가더니 이윽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 P42

버렸다. 그러나 이러한 환상은 곧 사라져 버렸다. 소문은 점점 구체성을 띠갔다. 그리하여 9월 중순에 이르자 사람들은 프랑크인들의 전진 과정을포착할 수 있었다.
1097년 10월 21일, 시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 안티오케이아에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퍼졌다. "그들이 온다!" 몇몇 사람들이 성벽으로 뛰어갔지만 그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저 멀리 벌판 끝 안티오케이아 호수 근처에서 이는 희미한 먼지뿐이었다. - P43

새벽 4시, 도시 남쪽에서 밧줄과 돌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오각형 망루 꼭대기에서 한 남자가 몸을 매단 채 손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꼬박 밤을 새웠는지 그의 수염은 심하게 헝클어져있었다. 이븐 알 아시르는 그의 이름이 피루즈이며 망루를 지키는 일을담당한 갑옷 제조인이었다고 쓰고 있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무슬림인 피루즈는 오랫동안 야기 시얀의 주변에 머물러 왔으나 암거래를 한 혐의로얼마 전에 큰 벌금을 문 적이 있었다. 복수를 벼르던 피루즈는 포위자들편에 가담하기로 했다. - P61

당시 시리아는 아주 작은 부락조차도 독립적인 군주국으로 자처할 만큼 정치적 분열이 극에 달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만으로는 스스로를 지키거나 침략자들을 상대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왕자든, 카디든, 귀족이든 누구라도 지극히 미미한 저항만으로도 자신의 공동체를 단번에 위험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그리하여그들은 애국심은 따로 묻어둔 채 억지 미소를 지으며 공물을 지참하고프랑크인들에게 존경을 표하러 찾아왔다. 네가 부러뜨리지 못할 팔이라면 그것을 껴안고 그 팔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신에게 기도를 하라는 그지방 속담을 따르기나 하는 듯. - P74

생질은 그에게 신의 저주가 있기를 클르츠 아르슬란에게 패한뒤 시리아로 돌아왔다. 그의 휘하에는 3백 명의 병사들밖에 없었다. 그 때 트리폴리스의 영주인 파크르 알 물크는 두카크 왕과 홈스의 통치자에게 전갈을 보냈다. "생질에게 사람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니 이번에야말로 그를 완전히 물리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 P106

아니겠소!" 두카크는 2천 명을 서둘러 모았고 홈스의 총독도 가세하였다. 트리폴리스의 군대는 성문 앞에서 이들과 합세한 뒤 생질과 전투를 벌일 예정이었다. 생 질은 1백 명은 트리폴리스 군대와, 1백 명은 다마스쿠스 군과, 50명은 홈스 군과 맞붙게 하고 나머지50명은 자신을 호위하도록 했다. 그런데 적을 보자마자 홈스의 군대는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어 다마스쿠스 군도 똑같이 도망쳤다.
트리폴리스 군대만 홀로 맞섰는데 이 모습을 본 생질은 2백 명의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공격하여 7천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다. - P107

샤라프의 수하 몇몇이 그에게 말했다. "성지를 탈환하러 가셔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보다는 자파를 손에 넣읍시다!" 샤라프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그가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바다를 건너온 원군과 합세한 프랑크인들은기세를 회복하였고 샤라프는 결국 빈손으로 이집트의 부친에게 돌아가야 했다. - P108

여름이 시작되자 프랑크인들은 그들의 이동탑들을 성벽으로 밀어붙이면서 트리폴리스에 대한 총공세를 개시했다. 주민들은 격렬한 공격을 감당해야 할 것을생각하자 일찌감치 기가 질려 버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길 수 없으리라는 것을 벌써 느꼈다. 식량도 바닥난 데다 이집트 함대의 도착도 늦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마무리지으려는 신의 의지인지 바람은 반대편에 머물러 있었다. 프랑크인들은 공격의 수위를 곱절로 높였고 1109년 7월 12일,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다. - P125

하산이 적을 겁주는 데 선호한 무기는 바로 살인이었다. 조직원은 대개는 혼자서, 아주 드물게는 두세 명의 무리를 이루어 지목한 인물을 살해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주로 상인이나 수행자로 변장을 하고범행을 저지를 도시를 배회하면서 그 장소와 희생자의 습관 등을 익혔다. 계획이 일단 결정되면 그들은 단번에 실행했다. 그런데 준비는 극도로 엄중한 비밀 속에서 이루어졌지만 실행은 되도록 많은 군중들이 모인장소에서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것이 관례였다. 장소는 대사원이 시기는금요일 정오가 선호되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산에게 살인은단순히 적을 제거하는 방법에 그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대중에게이중의 교훈을 주는 방식이었다. 살해당한 자에 대한 개인적인 징벌이하나라면 그 일을 행한 조직원의 영웅적 희생이 또 하나였다. 이 암살자를 이른바 ‘자살 특공대‘ 라는 뜻의 ‘피다이‘로 불렀던 것도 그들이 주로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 때문이었다.
그 조직원들이 침착하게 죽음을 맞는 모습 때문에 이들이 하시시에 중독되었을 것이라고 믿는 동시대인들이 많았다. ‘하시시 중독자‘라는 뜻의 ‘하슈샤신‘이라는 별칭이 훗날 ‘아사신‘으로 변형되어 여러 나•라 말들에서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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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형상화하기, 자코메티가 종종 말했듯이 삶이라는 이 경이를 형상화하기, 그것의 움직임을 형상화하고, 눈이 아니라 눈길을, 눈길과 그 눈길이 바라보는 모든 하늘을, 그리고 그 눈길 안에서 질주하는 삶을 형상화하기?그는 인간이 하는 어떤 일도 눈길의 광채만큼 가치 있지 않다고, 자신은 오직 눈길을 재현하기 위해 조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실패를 계속해야 했고, 고꾸라져야 했다.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실패해야 했고, 그 모든 암중모색과 망침, 후회, 망설임, 엉김, 돌출, 사고, 비틀림, 추함, 자신이 견뎌낸 모든 실패와 불확실성을 작품에 담아야 했다.
쉬지 않고 고집스레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스스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그저 자기 내면에서 나아가는 것일지라도.
그는 계속 걸어야 했다. 걷는 행위가 어쩔 도리 없이 그를 끔찍한 난파로 이끌지라도.
심장이 고동치는 한 걷고, 걷고, 걸어야만 했다.

허공에 사람들의 머리가, 공간에 에워싸인 머리들이 보였다. 내가 보고 있는 머리가 어떻게 정착될 수 있는지, 어떻게 시간 속에 확고하게 고정될 수 있는지 처음으로 명료하게 지각했을 때, 나는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두려워 몸을 떨었고,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것은 더이상 살아 있는 머리가 아니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오브제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오브제였다. 아니, 그것은 어떤 오브제와도 닮지 않았다. 산 동시에 죽은 무언가를 닮았다. 나는 공포의 비명을 내질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문턱을 넘어선 듯한 느낌이었다. 모든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이었다. 이 환영幻影은 자주 반복되었다. 지하철에서, 길에서, 식당에서, 친구들 앞에서….

〈걷는 사람〉은 나에게 최종 목적지를 일깨워주었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빠져나갈 수 없는 길을.
그동안 내가 보기를 거부해온, 출구 없는 길을.
종착역을.
그것은 〈걷는 사람〉이 이미 발을 들여놓은 땅으로 내가 돌아갈 차례가 곧, 반드시 온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고, 그 생각은 나를 공포로 짓눌렀다.

〈걷는 사람〉은 우리에게 인간의 취약성만 말해주는 게 아니라, 그가 걷고 있는 땅의 취약성도 말해주는 것 아닐까?

그날 밤 나를 사로잡았던 불안의 원인들이 밝혀지자, 기이하게도 가장 단순하고 가장 친근한 일들이 중요해졌다. 산책하는 것, 20구 거리를 거니는 것, 콜리브리 카페 테라스 자리에서 진한 커피 한 잔을 마지막 커피 마시듯 마시는 것, 고양이 한 마리가 창가로 풀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윌리엄 포크너의 《압살롬, 압살롬!》을 다시 읽는 것, 분홍빛 감도는 하늘로 날아가는 찌르레기 떼를 눈으로 좇는 것, 베르나르와 함께 아무 얘기나 나누고 르프레드Lefred의 그림을 보며 함께 웃는 것. 이 모든 사소한 일들이 나에게는 난생처음 접하는 행복처럼 보였고, 저녁까지 걷고 싶은 욕구를 안겨주었다.

예술은 사는 일이 우리에게 고통을 안긴다는 사실에 맞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확실하다. 예술이 우리의 기쁨과 삶에 대한 허기를 늘리기도 한다는 것. 예술이 죽음에 당당히 도전하거나 냉혹하게 우리에게 죽음을 상기하기도 한다는 것. 몸과 영혼이 포맷된 세상에 대한 우리의 거부를 날카롭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 시대는 더이상 불가능을 희망하지 말라고 엄명하는데 예술은 불가능을 좇는 우리의 취향을 자극하기도 한다는 것. 유용한 목적만 좇는 정신이 곳곳에서 우세할 때 예술이 무용한 것에 대한 우리의 취향을 되살리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꿈을 꾸고 자유로움을 갈망하는 강렬한 욕망을 다시 솟구치게 하기도 한다는 것. 우리가 유년기에 무척 좋아했던 색채들, 특히 빨강에 대한 취향, 잊어버린 취향을 우리에게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형태와 사물에 대한 취향, 그것들의 소재와 빛에 대한 취향,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우리가 보지 못하는, 주어진 단순한 사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다시 안겨주기도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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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인과관계를 부여하는 사건의 연쇄 또는 연결은 정확히 말하면 자의성(즉 특정 사건들 사이의 특정 연결을 특권적 연결로 삼는 다소 임의적인 선택)을 적용할 때만 나타나는 환원적 설명이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시장에 출시된 최신형 스마트폰을 원하는 것은 단순히 그가 부유한 동료에 대한 열등감의 희생자여서, 혹은 그 스마트폰의 특정 기능이 그에게 필요해서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 모두 사실일 수 있으며, 위계질서 없이 공존할 수 있다. 따라서 특정 사건들 사이 특정 연결에 특권을 부여하는 선택은 자의적일 수 있으며, 이 자의성은 현실의 왜곡이므로 가능한 한 적어야 좋다.

ANT는 라투르가 비서구 문화가 아니라 서구의 근대 문화(특히 과학기술)에 인류학적 분석을 적용하면서 시작되었다. 라투르는 여기에 그레마스의 기호학적 접근을 결합해 인간과 비인간의 이분법을 벗어난 탈인간중심적 사회과학의 길을 처음 열었다.

‘번역’이란 용어는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헤르메스(Hermes)≫ 3권에서 빌려 온 것이다. 세르는 정보 이론을 바탕으로 번역이 신호를 전송하고 왜곡하는 의사소통 행위라고 보았지만, 칼롱과 라투르는 이 개념을 존재론적으로 재해석해 특정 존재가 다른 존재들의 대표자 또는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끊임없는 재배치를 설명한다.

행위자와 연결망은 항상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둘 사이에 하이픈이 붙는다(actor-network). 행위자는 분해될 수 있으며, 그 구성 요소들은 해체되고 재조립될 수 있다. 따라서 행위성(agency)은 개별 행위자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결망 또는 ‘집합체’ 내에 분포해 있다. ‘누가 또는 무엇이 행위 하는가’는 특정 연결망에서 어떤 효과가 생산되는지 조사해야만 파악·결정할 수 있는 경험적 문제다.

라투르는 근대성에 대한 학계의 상식과 달리 "우리는 결코 근대적이었던 적이 없다"는 도발적 명제를 제기했다. 근대인들은 이원론적 세계관을 지녔음에도 ‘번역’ 작업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을 계속 혼합했지만, ‘정화’ 작업으로 이러한 하이브리드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하이브리드들의 증식을 가속해 왔다.

근대적 헌법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물의 의회’ 개념은 인간과 비인간의 공동세계인 코스모스를 점진적으로 구성하는 정치, 즉 ‘코스모폴리틱스’의 제안으로 이어진다. 이는 어떤 존재든 당혹→협의→위계화→제도화의 정당한 절차를 거쳐 집합체의 구성원이 되는 제도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

코스모스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 그리고 비인간 존재들과 공유하는 하나의 지구를 나타낸다. 코스모스 개념은 지구에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존재들이 있으며,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들에게도 정치적으로 고려해야 할 다양한 이해관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을 함축한다.

라투르는 사회를 잘 식별되고 분리된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사회적 행위’에 대한 이해와 ‘사회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사회학적 용어로 제공하는 과학인 전통적 사회학을 ‘사회적인 것의 사회학’이라고 부른다. 반면 그 대안인 ‘결합의 사회학’은 다양한 결합들을 추적하고 그 결합들의 안정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분석해 사회적인 것을 형성하는 집합적 과정을 재조립하는 데 관여한다. 이런 결합의 사회학을 가리켜 라투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이라고 부른다.

라투르는 과학을 ‘상대화’하지 않으며, 과학이 ‘단지 다른 형태의 믿음’, ‘또 다른 문화’라고 비난하지도 않는다. 그는 탈근대주의자도 아니고 상대주의자도 아니다. 다양한 존재양식들을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할 뿐이다. 라투르의 존재론은 과학의 가치를 격하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다른 가치들을 격상한다.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의 용어로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이아’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소설가 윌리엄 골딩(William Golding)은 과학자인 제임스 러브록에게, 생명체들이 지구의 대기(더 구체적으로는 지구에 생명이 존재할 수 있게 하는 산소 수준과 이산화탄소 수준의 균형)를 조절한다는 그의 가설을 부를 이름으로 ‘가이아’를 제안했다. 유기체들 대신 생물권을 자연 선택의 단위로 간주한 것에 대해 진화생물학자들에게 비판받았던 러브록은 나중에 가설을 수정해 가이아 이론을 발전시켰다. "간단히 말해 유기체들과 물질적 환경은 단일한 결합적 시스템으로 진화하며, 현재의 생물군이 무엇이든 그들이 거주 가능한 상태에서 기후와 화학의 지속적 자기조절이 이 시스템으로부터 창발한다."(Lovelock, 2003: 769

러브록이 근대의 과학적 세계관에 의존해 이 존재들의 집합체를 인간 활동에 의해 방해받을 수 있는 자기조절시스템으로 이해했을 때, 라투르는 러브록을 따라하기를 완전히 멈추고 그러한 ‘메타디스패처’는 없다고 단호히 주장한다. ‘타자로서의 존재들’, 즉 "공약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모든 것은 결합될 수 있고 결합되어야만 하는가"(Latour, 2013: 461)라는 질문을 자극하는 존재들로 이루어진 다원적 집합체(plural collective)만이 존재한다. 우리는 ‘가이아’에 대한 호소가 우리를 통합시켜 주거나 인간과 비인간의 가장 포괄적인 공동 이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인종적 우월성의 수사학을 주장하는 서구 정당들의 대두는 단순히 낡은 파시즘으로의 회귀가 아니다. 이들 현상은 우리의 근대적 제도와 습관이 지구가 인간 활동에 폭력적으로 반작용(react)하고 있다는 사실에 응답할 능력을 결여하기 때문에 초래되는 독특한 결과다. 이러한 곤경 속에서 라투르는 인류에게 "우리의 정치적 정동이 새로운 목표로 향할 가능성을 모색할 것"을 촉구한다(Latour, 2018: 2).

생태화 정치는 더 이상 마르크스의 생산 시스템 분석을 통해 사유할 수 없는데, 그 분석이 자연을 인간 활동의 맥락이자 자원으로 간주하는 근대적 관념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라투르는 우리가 생성의 실천들(practices of engendering)을 통해 사유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생산’은 자원들로 이루어진 주어진 세계를 당연하게 여기고 그로부터 시작하지만, ‘생성’은 먼저 이들 자원과 그것들에 의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태어난 이 세계가 계속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것은 무엇일지 고려하는 가이아적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기후변화가 문제인 이유는 그것이 ‘생산’(즉 경제 성장)에 충격을 가할 뿐 아니라 가이아의 거주 가능성 조건을 급격히 변형해 ‘생성’ 자체를 위협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슐츠는 라투르가 말한 ‘생성의 실천들’ 속 계급들이 생산 시스템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위치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에서 차지하는 영토적 위치에 의해 정의된다고 본다(Schultz, 2020). 따라서 단지 경제적 자원에 대한 접근에 의해 정의되는 사회적 계급들과 달리, 지구사회적 계급들은 사회 집단들의 번영과 생존을 허용하는 더욱 광범한 존재의 물질적 조건들(땅, 식량, 물, 옷, 집 등)에 대한 의존과 접근에 의해 정의된다.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생존과 재생산은 모든 사회와 그 역사의 제1원칙이었다. 따라서 인간 사회와 사회적 역사에 대한 분석의 첫 번째 단계는 필연적으로 사회와 인간 집합체들이 생존할 수 있게 하는 물질적 조건들(사람들이 먹는 음식, 마시는 물, 입는 옷, 사는 집 등)과 그것들이 출현하게 된 과정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재생산의 물질적 조건들을 생산하는 것을 사회적 역사의 토대로 간주했다. 그러나 그것은 주로 인간 존재들의 재생산에 한정된 것이었다.

계급 투쟁은, 오늘날 다시 명백해지듯 언제나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정치신학은 현대의 공적 공간 한복판에서 작동하는 종교에 대한 비전으로, 자신의 행위성이 남긴 발자취에 민감하고, 더 크고 새롭게 출현하는 전체의 구성 요소로서 자신의 책임을 인식하며, 따라서 세계에서 완전한 정치적 행위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인간 주체들을 생성한다.

라투르는 종교의 존재양식을 ‘생존’의 관점에서 정의하면서 종교가 세상에 내재된 자신의 상황에 대한 ‘돌봄’과 ‘주의’라는 윤리적 태도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종교는 존재의 내재적 조건들에 충실한 행위를 요구하며, 미래의 궤적을 결정하는 자신의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키워 준다고 본다. 라투르는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한 생태적 도전 때문에 종교가 만들어 내는 이러한 윤리적 태도가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직 종교적 존재양식만이 인류세 시대에 필요한 정치 활동 양식을 창출하고 배양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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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견제세력으로? 어떤 맞불로? 감지하기 힘들고 무시무시할 정도로 도처에 편재하는 그 힘에 맞서려면 어떤 전투를 벌여야 할까? 싹을 틔우기도 전에 바로 질식당하고 소멸해버리지 않으려면 어떤 싸움을 걸어야 할까? 어떤 틈새를 파고들고 어떻게 우회할까? 어떻게 넘어설까? 어떤 식으로 훌쩍 도약해야 지구 전체를 쓰레기로 뒤덮어버린 그 시스템을 넘어설까?

그것은 우리 인간의 무한한 고독과 무한한 취약성을, 취약하지만 삶을 이어가려는 끈질긴 고집을, 분별없이 삶에 집착하는 고집을 보여준다.
〈걷는 사람〉은 꼼짝 못하게 굳어 있는 동시에 움직이는데, 그 움직임이 마치 넘실대는 순간 추위에 얼어버린 바다의 파도 같다.
그는 고독하다, 절대적으로 고독하다. 도무지 속을 파고들 수 없을 정도로 닫혀 있으며, 자기 안에 깊이 틀어박혀 있어 가 닿을 수가 없다.

그는 앙상하지만 무겁다. 아마도 홀로코스트와 부헨발트 수용소의 희생자들에 대한 앎으로 무겁다. 그는 늙었고, 시련의 흔적이 역력하다. 삶의 전장에서 무수한 타격을 입고 돌아와 기진맥진해 있다.
그는 세상의 무게에 등이 휘었다. 어쩌면 세상을 그렇게 만든 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무한히 취약하다. 한 포기 풀처럼, 잔가지처럼 취약하다. 그토록 무력하고, 그토록 보잘것없다.

그는 소멸 직전이다. 어쩌면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걷고, 계속 걷고, 용감하게 계속 걸으며 앞을 똑바로 응시하고, 성큼성큼 걷기를 계속하고, 주춤거리지 않고, 잔유물들의 세계 속에서 쉬지 않고 걷는다. 무의미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절대적 고독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만물의 덧없음에도 불구하고, 예고된 온갖 종말론에도 불구하고 계속 걷는다. 걷기를 멈춘다는 건 곧 죽음을 뜻하므로. 바람과 패배에 맞서 계속 걷는다. 자코메티처럼, 나처럼, 우리처럼.

라틴어로 레젠다legenda인 전설은 읽혀야 하는 것, 따라서 기억해야 하는 것, 우리가 금박을 입히거나 검게 칠해서 영원히 잊지 못할 것으로 만드는 진실이다.

자코메티에게 예술은 모든 화려함과 풍요로움에 맞서 저항하는 것, 심지어 전적이고 단호하게 반대하는 것, 관광객을 끌어당기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현실을 장식하기를 철저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예술은 젊은 사람들이 말하듯 너무 아름다운 아름다움인 비욘세와 제이지가 보여주는 아름다움에 완벽하게 상반되는 형태의 아름다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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