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 레오나르도(브라질의 신학자)는 미국을 방문 중 우리 학생들을 만났을 때 맘몬(부, 재물)을 섬기지 말라는 복음서의 명령에 대한 학생들의 모호한 입장을 주의 깊이 경청하고, 그 명령을 그대로 따른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혐오감을 감지했다. 학생들에 대한 그의 답변은 첫째 그는 ‘자발적 가난’과 ‘비자발적 가난’을 구분했다. 자발적 가난은 축복이지만 비자발적 가난은 사람이 만든 저주다. 자발적 가난의 목적은 비자발적 가난의 비참함을 없애려는 것이다. … "여러분이 받을 수 있는 최선의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비참과 불의를 영구화하는 사회 경제적 구조를 뜯어고치기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허용하시는 힘과 돈 무엇이든 활용하십시오." - P228

자라난다는 것은 불만족스럽고 불완전한 결말들을 가지고 산다는 의미다. 생명이 중간에서 단절되거나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치닫거나, 화염에 휩싸이는 사람들과 더불어 산다는 의미다. 우리들의 삶이 아무리 평범하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 마지막 신비의 문턱에 이를 때 우리의 삶은 모두 일종의 물음표로 끝나게 된다. - P259

말세 신학은 명백히 숙명론적이다. 해석의 근거란, 내막을 잘 아는 열성가들에게, 성격은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낱낱이 다 누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는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말살하는 것이다. - P300

예루살렘에 관한 과목을 택한 학생들에게서 내가 얻은 귀중한 통찰 중 하나는 그 악명 높은 ‘예루살렘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결국 예루살렘은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도시를 거룩하다고 믿는 모든 종교 전통 출신으로 종교에 헌신적인 학생들이 그 도시를 공유하는 길을 생각해낼 수 있다면, 그 참혹한 과거를 가진 도시의 장래도 어느 정도 밝아 보인다 하겠다. 필요한 것은 정치적, 윤리적 의지와 이와 함께 성스러운 장소가 공유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 P320

행동하지 않는 것도 행동하는 것만큼 큰 손실의 원천이 될 수 있다. - P343

분노, 혐오, 공포, 포학 등과 같은 감정이 윤리적 문제를 놓고 생각하는 우리의 사유 활동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단 말인가? 플라톤 이후 칸트나 존 듀이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도덕 철학자는 이런 감정이 자리할 곳은 전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감정은 명쾌한 사유 활동을 흐리게 만들고 건전한 판단력을 약화할 뿐이다. 이런 말이 대체로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장거리 전투, 대리 살인, 이메일을 통한 강탈, 지속적인 미디어 폭력의 마비 효과가 만드는 선동 등이 난무하는 오늘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그 반대 문제에도 봉착해 있다. 다른 이들의 고통을 감지하는 능력이 마비되고, 우리의 행동이 다른 이들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상상할 수 있는 힘도 죽어가고 있다. - P360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환경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운명이나 개인의 심리적 과거사가 우리의 행위를 결정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내세울 수는 없다. "그건 그럴 수밖에 없었다"든가 "어쩔 수 없었다"라는 것이 결코 핑계가 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아무리 희생당하고 억압당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인간성을 앗아가는 그 무엇에든 저항하기만 한다면 계속적이고 참된 책임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 P387

역사의 궁극 완성을 이야기할 때 나 개인의 역사에 초점을 맞추어서 안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인간 역사에 초점을 맞추기만 해서도 안 된다. ‘호모 사피엔스’가 나타나기 이전 억겁의 세월을 지탱해온 실재를 위한 희망이어야 하고, 그 희망은 목성의 가장 먼 달이나 지극히 작은 우리 이웃을 위한 희망이기도 하다. - P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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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옛 지침으로는 모든 사람을 다 설득할 수 없는, 심지어 우리마저도 설득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올바른 일‘을 하려 애쓰고 있다. 도대체 ‘올바른 일‘이란 무엇인가? - P43

우리에게는 사실이 필요하다. 그러나 속임수에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것은 그런 사실에서 의미를 찾아낼 수 있도록 해주는 이야기들이다. - P67

그리스도교 이야기의 중심에는 예술적이고 대중적인 상상력이 만들어낸 사랑스러운 ‘백인 여인’이 그의 아들 앞에 찬양의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 있을 수 없다. 거기에는 식민지에 살면서 온갖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이에 대항하며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임신한 여인이 서 있어야 한다. - P107

아담과 하와는 선사 시대의 선조들이 아니다. 우리는 그들을 만난 적이 있고, 또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신화적 시간으로 투영된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우리는 단순히 인간이라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좀 더 위대해지려고, 뭐든지 지배하려고 애쓰고, 그리하여 모두를 망가뜨리고 만다. …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방법을 고치려고 하고, 또 어느 정도 고치는 데 성공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호수를 오염시키고 산림을 황폐케 한 우리 이전 세대들의 욕심이 남겨준 찌꺼기를 가지고, 그리고 과거에 치른 전쟁으로 촉발된 역겨운 원한 관계를 가지고 살지 않을 수 없다. - P114

예수의 생애 이후 2,000년 동안 유대교는 그 보편주의적 성격과 예수주의적 특성 사이에 일정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살아오고 있다. 최근의 학계에서는 기원후 처음 3세기 동안은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더 보편주의적 성격이 강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개종 이래 오만하고 제국주의적이 되자 유대인들도 할 수 없이 자기들의 특수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교에 있는 보편주의적 흐름이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명한 코즈니츠의 레베는 "오 주님,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시옵기 간구하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으시려면 이방인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예수의 가르침이 이런 개방적인 경향성을 그의 전통 속에서 특별히 강조한 것은 사실이다.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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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브라질에서 이룬 빛나는 성과는 군대와 동맹을 맺은 케 - P190

네디가 추진한 새로운 전술 덕분만은 아니었다. 미국도 운이 좋았다.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브라질에 지난 500년 동안 흑인, 빈민, 폭력적이고 주변화된 이들에 대한 공포로 쌓아올린 아주 뿌리 깊은 자체적인 반공주의 전통, 그리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럴듯한 반공 신화와 연례 의례가 있었다.
합법적으로 선출된 장구는 국민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반격에 나서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번도 브라질 역사에서 벌어진 다른 쿠데타들처럼 체제의 재설정 같은 것이어서, 금방 지지자들을 재조직해서 다음 선거에 출마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브라질에서는 그후 25년 동안 민주적 선거가이 사열리지 않았다. 워싱턴의 군 주도 근대화에 대한 약속과 지지는 존슨행정부 아래서 확고했으며, 브라질은 이제 냉전 시기 가장 중요한 친미 동맹 중 하나가 되었다. - P191

말레이어 그리고 이제는 인도네시아어 개념인 아목은 영어화되면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일반을 뜻하게 되었지만, 본래는 의례적 자살의 전통적 형태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1965~1966년의 대규모 폭력이 인도네시아 전통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이유는 전혀 없다.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이런 종류의 대규모 폭력이 벌어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으며, 있다 해도 외국인이 연관됐을 때뿐이었다. - P258

이 불가해하고 막연히 부족적인 (미국인 독자들이 이해하기 쉬운버전의) 폭력 이야기는 완전히 틀렸다. 그것은 분명한 목적을 위해 조직된 국가폭력이었다. 군의 완전한 권력 장악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의도적인 절멸 프로그램, 곧 무고한 민간인 대량 살인을 통해 제거되었다. 장군들은 이 국가폭력을 통해, 대중의 지지 말고는 아무 무기도없는 정치적 반대파를 충분히 약화시킨 후 권력을 차지할 수 있었다.
희생자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기에 자신들을 쓸어 버릴 절멸에 저항하지도 않았다. - P259

1960년대 말이면 제3세계 운동은 몰락까지는 아니어도 혼란에빠졌다고 할 수 있다. "반둥 정신"은 유령이 되었다. 탈식민운동의 진보적 지도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네루는 1964년 세상을 떠났고, 수카르노는 자신의 동맹이 학살되는 것을 보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으며, 가나의 은크루마와 버마의 우 누는 쿠데타로 실각했다. 이라크좌파 상당수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살아남은 소수마저미국을 등에 업은 사담 후세인에게 곧 쏠려 나갈 예정이었다. 이집트의 나세르는 다마스쿠스에서 일어난 쿠데타로 시리아가 탈퇴하게되면서 아랍연합공화국이 해체되자 크게 흔들렸으며, 시리아의 쿠데타 지도부는 시리아공산당을 숙청했다. - P286

오페라상 야카르타, 야카르타 비에네. 플란 야카르타,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로 된 이 표현들에서 ‘자카르타‘가 의미하는 바는 명백하다. 또한 이것은 트루먼 행정부가 ‘자카르타 공식‘을 따랐던 1948년에 자카르타가 의미했던 바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의 ‘자카르타‘
는 워싱턴이 위협으로 여기지 않아도 되는 독립된 제3세계의 발전을 뜻했다. 이제 ‘자카르타‘는 아주 다른 것이 되어 반공 대량학살의동의어가 되었다. 자카르타는 미국에 충성하는 자본주의 권위주의정권의 건설에 반대하는 민간인을 국가가 조직적으로 절멸시키는것을 뜻하게 되었다. - P334

어떤 식으로건 냉전의 영향을받아 온 나머지 세계에서 어떤 것은 변했지만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은 채로 남았다. - P380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정말이지 많은 이들이 미국에 갔어요."
안토니오 카바 카바가 내게 일롬 마을 이곳저곳을 보여주며 말했다.
우리는 그가 아는 거의 모든 남자들이 공산주의자라 의심받으며 처형당하는 것을 지켜봤던 광장을 지나고 있었다. "좀 웃기지요. ‘웃긴다‘라는 말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 마을을 파괴한 폭력이 누구 때문인지를 알거든요. 그 뒤에 미국이 있다는 것도 알아요. 하지만 우리 자식들을 거기로 보내고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말고는 갈 데가 없기 때문이에요." - P386

제3세계가 진정 자유롭게 여러 체제를 실험해 보고 다른 무언가를건설할 수 있었다면 세계가 어떻게 재편되었을지 우리는 모른다. 어쩌면 발전도상국들이 힘을 합쳐 세계 자본주의의 규칙들을 바꾸자고주장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제3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아예 자본주의 국가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나는 이 폭력이 없었다면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20세기에 승리했을 수도 있다고 (누가 피해자인지 그리고 미국의 국력을 생각하면 그 가능성은 낮지만) 생각한다. - 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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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식민지인이 유럽과 직접적으로 접촉한 일은 언제나 제3세계에서 혁명적 운동이 조성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초기 연원은 네덜란드에 있으며, 베트남의호찌민이 정치적으로 각성하고 교육받은 곳은 파리였다. 식민지 출신들은 제국의 수도에서 공부하거나 일하면서 절대 식민지에는 도달할 수 없는 사상을 가진 이들과 마주치곤 했다. 식민주의의 상당부분은 "내가 하는 대로가 아니라 내가 시키는 대로 해라"라는 식의 논리에 의존해 왔다. 혹은 현실에서는 "백인이 하는 대로가 아니라 백인이 시키는 대로 해라"였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교육을 국민전체로 확대하며 지식인들은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에대해 논쟁하곤 했지만, 이 두 사상은 상당 부분 식민지에서는 금지되었다. 원주민들이 그 사상을 받아들일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 P67

1953년 초 미국에서 새 대통령의 취임은 이란의 정권 교체를바라는 이들에게는 큰 희망이었다. 새로 당선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존 포스터 덜레스를 국방부 장관으로, 동생 앨런 덜레스를 CIA 국장으로 임명했다. 역사학자 제임스 A. 빌에 따르면 포스터에게는 평생 두 가지 집착이 있었는데 하나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다국적기업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가 딱 이란의 상황에 걸려 있었다. 빌은 이렇게 썼다. "공산주의에 대한 염려와 석유 확보는 뒤얽혀 있었다. 두 가지가 동시에 미국을 직접 개입으로 몰아갔다."
rezes이는 덜레스 형제와 CIA에게는 청신호였다. - P75

그들은 과테말라군의 보수적인 장교들마저 하찮게 보는 카를로스카스티요 아르마스 장군을 중심으로 작은 세력을 조직했다. 이들은 미국이 통제하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반군이 승전보를 울리며행진 중이며 과테말라시티가 공중폭격을 당하고 있다는 허위사실을 방송했다. 진짜 공격이 아니라 심리전이었다.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 국경의 오합지졸들은 진짜 군대를 물리치고 국경을 넘을 수있는 수준이 아니었으며, 미 공군이 수도에 떨어뜨린 폭탄은 술파토sulfatos, 곧 황산염 설사제 sulfate laxative라고 불렸는데, 그 목적이 파괴가 아니라 아르벤스와 측근들을 겁줘서 바지를 적시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 P83

식민주의도 현대적 복장으로 갈아입고서 한 국가 안의 소수 외국인 집단에 의한 경제적 통제, 지적 통제, 실질적인 물리적 통제라는 형태로 작동합니다. 그 식민주의는 기민하고 강력한 적이며 다양한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전리품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어디서나 언제나 어떤 식으로건 식민주의는 악하며, 지구상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입니다. - P102

워싱턴의 태도는 사뭇 달랐다. 그들의 반응은 인종주의적 무시와 거들먹거림 쪽이었다. 한 국무부 관리는 반둥 회의를 "껌껌한 동네 사람들의 으스대는 파티"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이젠하워, 위즈너, 덜레스 형제에게 수카르노의 언행은 농담이 아니었다. 이제 그들에게 중립주의는 그 자체로 미국에대한 공격이었다. 적극적으로 소련에 반대를 표하지 않는다면, 수카르노가 제아무리 목소리 높여 폴 리비어를 칭송했다 해도 미국에반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상원의원이 된 존 F. 케네디는 반둥 회의 이후 몇 년간 연 - P109

설을 통해 미국 정부의 이런 접근법에 대해 아주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무력으로 알제리를 차지하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맹렬하게비판한 연설에서 그는 "오늘날 미국의 외교 정책이 처한 가장 중요한 하나의 시험대는 우리가 제국주의의 도전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향한 열망을 지지하기 위해 무엇을 할것인가입니다. 무엇보다 이 시험에서 미국은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있는 아직 누구와도 동맹하지 않은 수백만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에게 날카로운 판단을 받을 것이며, 철의 장막 뒤에서 여전히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은 미국을 불안하게 지켜볼 것입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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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하원 비미활동위원회(이하 HUAC로 표기함)의 활동은 1938년에 시작되어 1975년에야 중단되었다. 유명한 공개 재판들이 있지도 않은 실체를 쫓은 ‘마녀사냥‘만은 아니었다. 미국에는 실제로 공산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조합, 헐리우드, 정부 여기저기서 활동했고, 많은 아프리카계 및 유대계미국인이 미국공산당에 입당했다. 1930년대에도 공산주의자가아주 인기였던 적은 없었지만, 2차 세계대전 후 달라진 것이 있다면이제는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매카시즘은 특히 대통령과 미국 연방수사국(이하 FBI로 표기함) - P43

이 주도한 하향식 과정이었다. 반공주의 합의를 도출하고 전파하는 데 앞장섰던 FBI 국장 J. 에드거 후버는 HUAC에 출석해 매카시즘이 바탕을 두었던 몇몇 가정들을 널리 알렸다." 후버는 공산주의자들이 미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려고 계획 중이며, 그러한 반란이 일어나면 경찰력이 마비되고 모든 통신수단이 장악될 것이라고 했다. - P44

위즈너는 1944년 9월, 루마니아로 가서전쟁 중 미국이 임시로 세운 첩보기구인 전략사무국(이하 OSS로 표기함) 지국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소련이 루마니아를 차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믿었으나, 본국의 상관들은 동맹이 그런 짓을 할 리 없다는 분위기였다. 1945년 1월, 스탈린은 루마니아에서 독일계 남녀 수천 명을 소련으로 데려가 "노동동원"하라고 명령했다. 대상자 중 몇은 위즈너와 아는 사이였다.
강제 이주가 시작되자 그는 미친 사람처럼 시내를 돌아다니며 그들을 구출하려 했다. 하지만 위즈너는 실패했고, 수천 명이 유개화차에 실려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의 가족들은 그 장면들이 뇌리에 박혀 파란만장한 삶 내내 그를 괴롭혔다고 말했다. - P52

같은 시기, 미국 외교 정책 기구의 정반대 부분에서 일하는워드 팔프리 존스라는 아주 다른 류의 인물이 위즈너의 OSS 전 상사였던 앨런 덜레스와 함께 베를린에 도착했다. 그는 외교관이자참전용사로 일찌기 독일 국가사회주의의 참상을 목격했다. 그는1934년 독일에 여행을 갔다가 나치 깃발에 제대로 경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치 군인에서 두들겨 맞은 적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이미 성인이었던 존스는 참전해서 독일에 있었다.
종전 직후 그는 국무부에 들어갔다. 존스는 단호한 전사인 위즈너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세계에 접근했다. 모든 상황을 전 지구적인 흑백 대결로 보지 않고 각 상황의 복잡성을 깊이 파고들어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 P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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