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무가 존재와 분리되어 존재 바깥을 감싸는 경우가 아니라 존재 사이사이에 분배될 때 생성이 성립한다. 정확히는 단지 사이사이에 분배될 뿐만 아니라 존재-무-존재-무⋯⋯를 경계 짓고 있는 선들이 계속 무너질 때 생성이 성립한다. 존재와 무는 절대 모순을 형성하며, 존재가 존재이고 무가 무일 때 생성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는 무이므로(없으므로) 존재만이남는다. 무가 존재 사이사이에 분포하고 그 경계선들이 무너져갈 때 차이생성(differentiation)이 도래한다. 모든 생성은 차이생성이다. 그리고 이때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상 ‘생성한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 P23

경험론적 형이상학자들은 한편으로 ‘경험‘에 충실하되, 이런 주체중심주의를 벗어나 경험의 심층을 응시한다. 그러나 이들은 실재를 인식하기 위해 경험을 피상적인 것으로서 벗겨내고 그것과 불연속을 이루는 실재를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실재를 찾는 한 본질과 현상의 이율배반과그것과 맞물려 있는 신체와 정신의 이율배반)은 피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들은어디까지나 경험과 연속되는 그것의 심층을 구체적으로 인식해 들어가려했다. 이렇게 경험과 연속적으로 파악된 실재는 곧 ‘생성‘이었다. 경험론적형이상학의 구도를 통해 새롭게 성립한 형이상학 즉 생성존재론은 현대 철학/탈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성취에 속한다. - P49

오늘날 생성존재론의 구도는 ‘존재‘로부터 ‘생성‘으로의 이행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생성‘으로부터 ‘동일성들의 발생 과정을 설명하는 데에 있는것이다. 뒤에서 (6장, 1절) 논할 들뢰즈의 ‘잠재성의 철학‘은 이 과제에 답한각별히 정교한 시도에 속한다.
생성존재론의 또 하나의 의의는 이 존재론에 이르러 마침내 서구적 사유와 동북아적 사유가 서로 통(通)하게 된 점에 있다. 동북아의 형이상학은 처음부터 생성존재론의 형태를 띠었다. 이 전통은 ‘氣‘를 근본 실체로서 생각했고, 기는 반드시 ‘氣化‘로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생성은 생성하지 않는 진실재의 ‘타락‘한 모습이었으나, 동북아에서는 정확히 반대로 ‘物‘의 고정된(고정된 듯이 보이는) 모습은 ‘氣‘의 흐름이 일정한 형태로 굳어진 것일 뿐이었다. 세계에 대한 이런 직관은 ‘易‘의 개념으로써도 표현되었다.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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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태어나 그 생명을 축복받은 아이가 대체 얼마나 있을까? 나는 아이를 가지거나 지운 적은 없지만 주변을 보면, 스스로를 빛 쪽에 있다.
고 생각하는 여자는 아이를 낳고, 스스로를 어둠 쪽에 있다고 생각하는여자는 낙태를 한 것 같다. 여자는 경제적 사정에 이런 알파를 더해 애를 낳을지 말지 정한다. - P193

여자가 자연에 좀 더 가깝다고 보는 근거는 여자의 비생산적인 가치관, 사고방식이 문명이라는 것에 해를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자의비생산성은 여자의 존재 자체가 총체적인 것에, 여자가 남자처럼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지 않는다는 점에 기인한다. 남자는 이론(말)으 - P205

로 총체성을 획득하려 하나, 여자는 그 존재 자체가 총체성을 갖고 있다. - P206

여성해방이란 여자들이 힘을 모아 여자가 살기 힘든 현실을 깨부수는 것이며, 동시에 서로 갈등하고 미워해온 여자와 여자의 관계성 속에 에로스를 되살리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자에게 에로스는 나의 자궁, 즉 나의 자연과 내가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나온다. 소통은 ‘여자인 것‘에서 오는 아픔과대화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 P214

1960년대의 투쟁은 비일상적인 정치 공간에서 나 스스로를 보편적으로 대상화하려는 투쟁이었다. 그러나 이건 표면상 하는 말이다.
‘00일 투쟁하자!‘는 식으로 1년 365일 중 며칠 정도만 투쟁해서 자신의 비참한 일상성을 승화하려 한다.
우리가 투쟁에서 잘못 내디딘 첫 번째 걸음이 바로 이것이다. 애초에 총체적인 권력의 이러한 총체성이 일상에서 나타나는데도, 머리로만 억압을 밝히려고 하여 문제를 정치적 과제로 집약해서 정치권력을물리적으로 분쇄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얻고 해방을 향해 최단 거리로 질주하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투쟁에서 멀어지고 벗어나 버린 것이다. 투쟁을 하면 언제나 투쟁을 담당한 주체가 품은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다. 정치권력으로 곧 귀결하는 그런 사고방식은 어떤 주체가 있어서 나온 것일까? 이런 주체는 대의를 위해 나를 버린다는 일본전통의 정신 풍토와 근대 합리주의 사고가 합쳐져 나온 것이다. - P228

혁명과 파시즘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이 둘은 양극으로 보이지만,
실은 둘 다 비일상적인 공간 속에서 극한까지 그 생명의 가능성을 불태워다 쓰고 싶은 바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둘 다 따분한 일상, 시시한 일상, 곧 오르가슴이 없는 일상이 있어야 한다. - P233

맞벌이. 이것은 여자가 휴일인 일요일에 산더미처럼 쌓인 빨래를해야 할 이유이고, 직장 퇴근 후 백화점이 문 닫는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뛰어 들어가야 할 이유이다. 또 콘돔을 사용하는 이유이고, 여자가경제력을 갖게끔 하는 이유이다.
맞벌이 여자에게 맞벌이란 실은 일상의 모든 구석구석을 샅샅이보살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에게는 어떤가? 여자가 "맞벌이하는데 신랑이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어요." 하는 말을 들으면 그 답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 P240

나의 어렴풋한 기억에 따르면 적군파가 생긴 직접적 계기는 1969년 4월 28일 ‘오키나와의 날(오키나와 반전의 날)‘이다. 그날의 패배에18대한 총괄에서 적군파가 나왔다. 앞서 1월 18, 19일에 도쿄대 야스다 강당 투쟁 공방이 극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때까지 활발히활동을 하던 신좌익은 이제 지는 해에 가까워졌음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4월 28일 당일에 적이 압도적으로 퍼부은 물량 공세에 신좌익은 박살이 났다.
"오키나와의 날에 벌인 대중적인 무력 투쟁이 패할 수밖에 없었을 - P241

때 자연 발생적으로 도달한 군사적 투쟁의 한계성이 분명히 드러났다.
또 소시민인 투쟁 주체의 한계성 또한 확실히 드러났다.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투쟁의 약점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혁명이 ‘남자다움‘을 상징하는 시대도 종언을 고했다."
위는 당시 내가 쓴 전단지 내용이다. 생각해 보니 1969년 4월 28일에 신좌익은 그전까지 갖고 있던 모든 것들을 잃고서 어쩔 수 없이 풍부한 ‘0‘의 지점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는 저녁놀 가운데적군파와 여성해방운동이 태동했다. 이 둘은 신좌익 운동의 아이들로태어났다. - P242

나의 어둠과 타인의 어둠 즉 내가 살아가는 모습과 타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경합하는 가운데 ‘우리의 내일‘에 빛이 싹튼다.
‘가해자 논리‘는 피억압자 자아를 버리게 할 우려가 있다. 억압자인 동시에 피억압자인 모순 속에 투쟁의 변증법이 숨 쉬고 있는데, 자신을 억압자일 뿐이라고 한쪽으로 기울여 고정하고 굳혀 버리면, 겉으로 내세운 명분밖에 없는 혁명 대의를 사명감으로 갖게 되며, 그런 대의에 나를 바치게 된다. 이런 과정에 ‘가해자 논리‘의 범죄성이 있는 것이다. 내가 실감한 것은 억압자라는 것은 철저히 겉으로 내세운 명분일 뿐이란 점이었다. 이는 늘 깔끔하게 딱 떨어지는 논리였고, 남자들한테 남자다움과 혁명가에 대한 기대를 만족하게 해 주는 논리이다. - P254

‘오늘 내가 느낀 비참함을 그대로 두고 ‘내일 만약에‘로 바꾸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파시즘이 싹튼다. - P259

예전에 일본 여자들은 나라를 위하고 가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으로 몸과 마음을 다 갖고 있는 총체적인 존재인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정숙한 여자‘는 ‘일본의 어머니‘가 되어 전쟁터 후방에서 침략 전쟁을 지원했다. 그렇게 하는 동안, 전쟁터에서 황군 위안부들은 남성의성을 풀어 주는 역할, ‘신국 일본‘이라는 대의를 지키는 그림자 역할을해야 했다.
앞서 썼듯 위안부 대부분은 본국에서 잡아 온 조선인 여자들이었다. 그리고 지금 일본 국내에서는 남자의 배설 행위일 뿐인 ‘프리섹스‘
가 폐지된 집창촌을 대신한다. 한편으로 이런 ‘경제적 동물‘들이 동남아, 대만, 한국에 가서 그 땅의 여자들을 변소 대신으로 삼는다. - P264

문제는 ‘내 생각과 좀 다른데‘ 싶을 때나 놀랐을 때, 그걸 그대로 솔직하게 밖으로 표출할지 말지이다. 말을 가진 여자는 말을 삼키는 여자이기도 해서, 자신이 하는 말이 이치에 맞지 않거나 창피하다고 여기며 본심을 감춘다. 인텔리는 어찌 됐건 자신이 엉망이 되는 상태를 잘피하며, 잘 회피할 수도 있다. 그런데 밥그릇을 설거지하는 방법만 해도 사람이 열 명이면 설거지법도 열 가지다. 각자 예전부터 해온 방식에 각자의 과거가 녹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하자고 할 때 그건 암묵적으로 나 자신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므로 상대가 놀랄 때도 일상다반사로 있다. 둥글게 살자, 사람들한테 맞추자 하고 마음을 먹고서 내 뜻을 드러나지 않게 하려 해도 그리 길게 가지 않는다. 사람은 일상적이지 않은 일은 남을 속일 수 있어도, 일상적인 일로는 그러지 못하는 법이다. - P286

인간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에게 의미가 있는 세계를 만들 수 있다. 내가 있고 나서 남이 있는 것이고, 만사가 있고 세계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멋스럽게 이야기를 해 본다 한들, 애초에 나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고집스럽게 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마치 자기 꼬리를 물려고 빙글빙글 도는 개 같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자기 꼬리를 물 수가 없어서 짜증이 난다. 자신의 약점, 되풀이하는 실수에 혀를 차면서도 우리는 그렇게 헛도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찾아 왔다. - P290

공동체 생활의 마음가짐은 어쩌면 내일 내가 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삼고 지금 이 시간, 이 만남을 소중히 하는 것이다. - P297

평범한 가정에서는 평범한 부모가 평범하게 아이를 가르친다. 즉 평범한 가정에서는 딸에게 장래에 좋은 아내이자 좋은 엄마가 되라고 한다. 어린완벽주의자 여자들은 어떻게든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가 좌절하면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고 스스로를 철저히 벌하려고 또 애를 쓴다. 한 되씩이나 되는 밥을 먹고서는 토해 낸다.
강조하고 싶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가정이 이상이 된 현실이 바로 이병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 P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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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사

생명의 가능성이란 나 자신과 남이 제대로 만나기를 갈망하는 것이다. 여자가 생명으로 살 수 있는 방식은 남자처럼 바다로 나아가며 자아를 찾아가는 방식에 있지 않다. 나 자신 속에 바다를 품고 내 속의 바다에서 나 자신을 찾아가는 방식에 생명의 가능성이 있다.
-> 이 방식에 나는 의문이 있다. 여자는 왜 바다로 나아가면 안 되는가?

일본에 있는 외국인 가운데서도 유럽이나 미국인한테는 한없이 관용적이면서도(그렇다고 해도 반전 활동을 하는 이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는다), 재일조선인을 비롯해 일본에 있는 아시아인들한테는 마치 자기가 생사여탈권이라도 가진 것마냥 군다. 출입국관리법에는 낡아빠진 소위 ‘신국 일본’의 행태가 노골적으로 보였다. - P136~137
-> 근대 일본 제국주의는 서구를 따르고 동양의 평화를 운운하며 리더임을 표방하고 다른 동양의 민족을 억눌렀다.

당시 나는 내가 끝까지 못 싸운다는 것, 그러니까 각목을 들지 못하는 자신을 아주 창피하게 여긴 것 같다. - P138
-> 시위, 데모를 하러 나가는 것 자체가 큰 결심이 아닐까. 어떤 의도에서 시작되었든 내가 거기에 조금이라도 몸 담았다면 말이다.

나는 어디까지나 내가 저지른 죄상이 무엇인지 전혀 추측조차 못하는 죄인이었다. 나는 열심히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하려 했다. 엄마가 자꾸 묻는 바람에 벽에 딱 붙어서. 그런데 뇌리에는 "다른 사람들한테 말하면 안 돼!" 하고 무서운 표정을 한 엄마의 말만 남아 있었다. - P103

아무리 머리로 제국주의와 싸우는 피억압 인민들이 있다고 확실히 알고 있다 한들,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사람은 잃어버린 한쪽 다리에서 모든 것을 출발하는 것이지, 논리로는 잃어버린 자기 다리를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 아픈 사람은 항상 미시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거시적 대상황과 미시적 소상황을 합쳐 문제시해야 한다. - P124

1969년 1월 18일 도쿄대학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고 농성 중이던 학생들을 체포하는 강제 진압이 일어났다. 그날 밤 나는 밤새 친구와 기동대가 빙 둘러싼 도쿄대 주변을 배회했고 이튿날 오차노미즈에서 벌어진 투쟁에 참가했다. 현기증을 느끼면서도 나는 지금 내가 역사의 모든 것을 묻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 P127

어디에 있든 완벽히 사회에서 자립한 주체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고 각자가 가진 노예의 역사성, 교태를 부리며 살아온 역사성을 짊어지고 걸어갈 수밖에 없다. - P133

남자들은 "만약 내가 결혼을 한다면 운동을 하지 않는 여자랑 할 테야."라고 거리낌이 없이 큰소리쳤다. 그런 남자들을 위해 조그맣게 움츠러들어 바리케이드 시위에서조차 밥을 짓고 변소를 청소하는 역할을 담당한 이들이 ‘여자’라는 이름의 암컷들이었다. 어머니의 너그러움과 창녀의 교태를 두루 갖추고 남자들의 혁명 지도부를 떠받쳐 온 ‘엉클 톰’ 같은 여자들. ‘만일 혁명이 된다면’ 하고서 그 환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신좌익 내부의 신데렐라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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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부

울산의 2022년 여성 고용률은 47.1퍼센트로 전국 최저다(도표 3.6참조). 최근 10년과 최근5년도 각각 44.4퍼센트, 46.1퍼센트로 단연 전국 최저다. 10년간 울산은 단 한 번도 여성 고용률 차원에서 전국 최저수준을 면하지 못했다. 3부 시작에서 살펴봤던 가부장제의 기준으로볼 때, 가장 보수적이고 가부장적 정서가 강한 지역인 대구 경북보다여성의 노동 시장 진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산업 가부장제의 틀로 봤을 때 여성에 대한 ‘경력 봉쇄‘가 가장 심각하게 벌어지는 지역이 울산이다. 그럼에도 소득 차원에서 대기업 정규직으로 내부 노동 시장 안aros에 있던 ‘인사이더‘이자 가정에서는 생계 부양자였던 남성의 고소득으로 여성의 낮은 노동시장 참여가 무마돼 왔다. - P221

사무직이든 생산직이든 중소기업 취업에 대한 회피가 강화됐다. 중소기업을 경험한 이후 열악한 근무여건을 깨닫게 됐다(31.3퍼센트→ 38.9퍼센트). 또 장기적 발전 가능성에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변했다(3.8퍼센트→6.9퍼센트). 반면에 중소기업에 대한 부정적 편견 때문이라는 생각도 줄었다(10퍼센트→ 4.2퍼센트).
게다가 중소기업의 구인난이 직무 능력을 갖춘 인력 부족이라는 생각은 오히려 급감한다(8.8퍼센트→1.4퍼센트). 좋은 인력이 들어가더라도
‘구제할 수 없다는 비관적 생각이 강화된 것이다. - P241

울산대 학생의 관점에서 취업 준비가 힘들다고 ‘지인찬스‘이나 ‘아빠 찬스‘로 가까운 공장에 ‘알음알음‘ 생산직으로 취업하는 것은 고용 불안과 저임금, 산재 위험까지 고려했을때 나쁜 선택지다. 또 학교 취업지원센터나 산학협력단, 또는 단과대등에서 추천하는 지역 중소기업(하청 회사 혹은 부품 협력사)에 취업하는것도 자신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어려운 선택지다. 겪으면 겪을수록 다른 선택지를 모색하는 게 본인에게 유리하다는 것을 울산의 대학생들은 간파한다. 개개인의 관점에서 공과대학을 다닌다면 어렵더라도 스펙을 더 갖춰서 대기업이나 기술 계통 공공 부문에 가는 것이 더 나은선택이다. 인문사회 계열이라면 일자리가 더 많은 수도권에 지원하든가아니면 공무원이나 공기업 등 공공부문에 지원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리하여 산업도시 울산에서 나고 자라 부모의 지원으로 고학력 - P243

자가 된 많은 자녀가 기회만 생기면 일자리를 찾아서울로 떠나기 일쑤다. 그래도 나고 자란 고장에 살겠다는 청년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거나, 공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NCS 문제집을 풀면서 기약 없이 구직준비를 하게 된다. 아직은 정년을 채우지 않은 부모의 지원을 받으며아르바이트와 구직 준비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 P244

신체적 조건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울산의 생산직은 남성 채용의 관행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관행이 아니었다면 여성을 채용하려는 시도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또는 여성이 일하기에 적합한 작업장인지 확인하기 위해 정밀한 신체 조건을 조사했을 테지만그런 적은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문제 제기가 제대로 된 적도 없었다.
사소한 이유로는 여성이 남초 직장인 3대 산업의 정규직 생산직 자리 - P252

에 적극적으로 구직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설령그렇다 해도 이는 "남성은 임금 노동을 하고 여성은 무불 가사 노동을한다"는 가부장적 성역할에 기댄 측면이 있으므로 검토해 봐야 할부분이다. - P253

IMF 이후 평생직장이 사라지고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사회로 나왔다는 서사가 있다. 하지만 그 전에도 여성은 ‘야쿠르트 아줌마‘부터 시작한 각종 방문판매원이나 미싱사같은 다양한 경공업 노동을 전업과 부업의 형태로 수행해 왔다. 그러다 남성 위주 정규직 화이트칼라 직군이수도권에서 늘고 산업도시에서 남성 생산직 노동자의 임금이 오르면서 일시적으로 남자가 돈을 벌고 여성이 육아와 가사를 전담하는 ‘전업주부‘로 불렸을 따름이다. 노동사회학의 개념으로 표현하자면 다양한서비스 산업과 비공식 경제, 그리고 경공업 근처 외부 노동 시장을 계속 맴돌았던 것이 해방 이후 대다수 한국 여성의 노동 경험이었다. - P257

여성이 원하는 일자리 혹은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울산은 적절한 일자리를 공급하지 못하고 있다. 울산에서 자라고대학을 나온 여성이 울산에서 일한다면 커리어 패스 관점에서 손해다. - P266

근속을 하며 경력을 인정받아 이직할 때 협상력을 키우고 임금과 복리후생 수준을 높일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울산에서 전문직 여성이 일한다는 것은 다른 지역에 비해 13퍼센트 이상 임금 손해를 감수하는 선택이다. - P267

울산의 노동자 중산층모델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면 박정희 시대 이후 50년간 형성돼 온산업-노동-가정의 복합체로 굴러가는 전국의 산업도시 역시 손쓰기어려운 순간을 맞을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이 되는 가장 근본적 이유는 우리가 ‘산업도시의 평범한중산층 가정‘ 구성을 생각할 때 은연중에 전제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 때문이다. 바로 남성, 생산직,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가정이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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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장

울산에 대한 많은 사람의 오해는 울산이 1962년 울산공업지구지정으로 시작해 1970년대 중화학 공업화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생포에서 고래나 잡던 평화로운 마을을 정부가 지정하여 울산에 온산공단, 울산공단이 생기고 석유화학 콤비나트가 들어섰다. 그뒤에 정주영 회장이 현대자동차 공장을 세우고 조선소를 세웠다. 그리고부자도시가 되었다"라는 식의 설명은 중간 단계가 너무 허술할 뿐아니라, 그 전사를 무시했다는 점에서 옳지 않다. 산업도시 울산을제대로 이해하려면 중화학 공업화의 출발이 하필 ‘왜 울산이었는가‘부터 알아야한다. - P48

울산은 이케다에 의해 일제 강점기 태평양전쟁을 위한 공업도시이자 석유 비축기지로서 설계됐다. 울산은 ‘공업항, 어항, 연락항, 무역항, 공항‘의 다섯 가지 키워드로 분류됐다. 다섯 가지 키워드를엮으면 일본의 태평양전쟁 수행을 위한 ‘병참기지‘로서 울산의 역할이중시됐음을 알 수 있다. 이케다의 구상 아래 당시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은 오키나와에서 출발한 전투기의 급유지로 울산을 선택했다.
•급유를 한 후 다시 전투기를 띄워 중국 또는 러시아와 교전 지역인 만 - P50

주와 연해주 등으로 바로 출격할 수 있는 중간 기착지였던 셈이다. 물자는 배를 통해, 인력은 기차를 통해, 전투기는 바다를 통해 움직일 수있는 울산. 모든 것을 병참기지로서의 기능에 최적화해 설계했다고 말할수 있다. - P51

5.16 군사쿠데타가 벌어진 이후 쿠데타 세력이 처음 했던 일 중 하나가 기업인을 부정 축재자 명목으로 가둔 것이다. 당시 삼성 이병철, 삼양사 김연수 등 부정축재자로 몰린 많은 기업인은 군사정권 초기부정축재의 죄를 경감받을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그들은 ‘경제재건촉진회‘를 창립했다. 이들의 대책이 바로 공장 헌납이었다. 자신들이 기업을 경영하면서 형성한 노하우 혹은 암묵지 tacit knowledge를 통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여 경제개발에 기여한다는 논리였다. 자금은기업인이 외자를 유치하고 정부가 내자를 동원하는 것으로 협상했고결과는 성공적이었다. - P55

경로 의존설은 산업의 젖줄인 정유 공장의 준공, 정유 공장의 부산물로 생겨나는 석유화학단지의 건설로 산업도시 울산이 출발했다는 해석이다.
입지 요건설은 울산이 가지고 있었던 인프라와 지형적 요건 등 객관적 요소에 초점을 둔 관점이고, 커넥션설은 당시 투자와 사업을 추진량을 지녔던 기업가들의 속내와 정치적 결정에 집산이 산업도시로서 타진될 수 있었던 원인을 직간접적으로 보여 준다는 장점이 있다. 경로 의존설은 우발적이든 의도적이든 산업의 기초 인프라가 설치되면서 국가와 산업계에 의해 전략적으로 집중 투자가 이루어지고, 그에 따른 상승작용으로 투자-재투자가 반복되는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특히 산업화 초기 국토 전반에 균형발전을 꾀하기보다는 한정된 자원을 활용하고 집중 투자해 규모의 경제효과를 누리려 했던, 즉 ‘전략적 산업 정책‘을 펼쳤던 박정희 정부의사정을 고려한다면 경로 의존성은 불가피했다. 향후 산업도시의 궤적 - P60

을 일정 수준 유추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경로 의존설은 장점이 있다.
따라서 이 중 한 가지를 이유를 꼽는 것은 무리다. 입지 요건과 당시 기업가들의 이해관계가 상호작용을 일으키면서 울산에서 공업센터가 시작됐고, 공업센터라는 기반을 활용해야 했기에 경로 의존이 작동하면서 중화학공업화가 전개됐다는 것이 합당한 해석이다. - P61

한국 제조업 담론에서 누락돼 있으나 앞으로 핵심으로 삼아야 할것은 소부장 중소기업이나 제조 스타트업이 돼야 한다.
그러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혁신 기술‘을 개발하거나 소부장기업을 키워야 한다는 사고에 구체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국어디에 본사·연구소·공장이 입지해 있는지, 산업 내 연결망이 어떤지, 혁신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업이나 산업 단위 어느 수준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노사관계는 어떻게 풀고 산업과 기업 내부 인력은어떻게 교류하는지, 지역 사회와 어떻게 결속되어 있는지 등의 경제지리 차원의 구체적 질문이 빠져 있다. 또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글로벌가치사슬 gobal value chain의 문제를 혁신 문제와 함께 살피지 못하기 일쑤다. 더불어 제품을 만드는 생산의 문제나 혁신 기술을 실제로 현장에 - P82

‘어떻게‘ 안착시키느냐의 쟁점도 생략한다. 당연히 노사관계도 그저
‘노조가 문제‘ 혹은 ‘재벌의 탐욕‘이라는 피상적 수준으로 다뤄진다. 이러니 문제를 제대로 풀기 어렵다. - P83

브래버먼은 제품 개발과 설계(기본, 상세, 생산)를 하는 소수 엔지니어의 기능을 ‘구상‘이라 하고, 설계에 따라 각자 맡은역만 작업하는 노동자의 기능을 ‘실행‘이라 했다. ‘구상과 실행의 분리‘는 엔지니어가 노동자에게 일방적으로 작업을 지시하고, 노동자의 공정에 대한 품질이나 자주 관리가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는 또 노동자와 엔지니어가 생산 과정에서 함께 의논하는 과정이 줄어들었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 P94

이제는 엔지니어링의 잠재력과 기본기의 중요성이 더 커지고 있다. 선배에게 노하우를 전수받는 도제 방식만 가지고 울산3대산업의 엔지니어 역할을 해낼 수 없다. 이제 조선소에서는 줄자와 모눈종이로 설계를 하는 게 아니다. 모든 제품설계를 CADComputer AidedDesign 프로그램으로 수행하고, 생산관리의 많은 것은 센서를 거쳐 생산실행시스템인 MES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와 전사자원계획시스템인 ERP Enterprise Resource Planning 등을 통해 데이터 기반으로 진행된다. 더나아가 4차 산업혁명이 강조되는 지금 IIOT나 디지털 트윈 등 스마트팩토리로 통칭되는 데이터 기반 공정 운영과 자동화, 로봇의 활용, 현장의 3D/4D 구현은 훨씬 더 심화되는 상황이다. 현장에서 그나마 가장 ‘인간적‘인 방식의 일은 조선소나 자동차 공장이나 석유화학 공장이나 공히 노무관리다. 하지만 노무관리자는 엔지니어가 아니다. 달리말하면 엔지니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물리적 화학적 수치를 해석하고, 기하학적 공간에 역학적 지식을 활용해 제품을물성까지 고려하여 배치하거나 소재와 부품 사용시 그 영향력이 얼마 - P123

나 되는지 계산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일이 기초적인 공학 지식과자연과학 지식에 기대게 됐다는 것이다. - P124

당시의 고용조정은 정부가 3자 개입을 해서 회사측과 노동자들을설득해서 이룬 제한적 성과였다. 그러나 제한적 성과만으로는 회사와노조 모두에게 남은 깊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했다. 이는 두고두고 노사양측에 강한 트라우마를 남겼고서로의 전략을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먼저 노동조합과 회사가 갖고 있던 목표가 변했다. 당시 노동조합김광식 집행부는 해고 대신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고통분담을 주장했으나 회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동료가 해고당하는모습을 목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경영 위기가 왔을 때는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다는 공포 속에서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벌자"는 신념 체계를 형성했다. 더불어 일종의 트라우마에 따른 교섭 전략이 탄생했다. 투쟁적으로 경제적 이윤을 챙기려는 노동조합의 전투적조합주의 전략이었다. 그에 비해 회사는 더 이상 생산직 노동자를 생 - P143

산성 향상의 파트너로 삼지 않는 기조를 강화했다.
현대자동차 정리해고사태는 울산의 ‘남성 생계부양자경제‘의 신화가 다시금 민낯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이른바 ‘밥꽃양‘ 사태다. 정리해고 대상자 선정에 난항을 겪자 협상 카드로 식당 여성 노동자 300명이 지목됐고 그들은 남성 고용 보호를 위해 해고당했다. ‘남성 생계부양자 정규직 노동자‘를 지키기 위해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의 해고를 거래한 것이다. - P144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가 신뢰에 기반을 두고 있을 때 가능하다. 포스코의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이나 복지뿐 아니라 생산성 관점에서 노동자의 숙련 형성 자체가 영향받을 수 있음을시사한다. 노사관계의 신뢰는 역사적으로 발생했던 노사분규와 갈등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달려 있다. 생산성 동맹은 노사관계만의 문제는 아니다. 좀 더 넓게 보면 국가가 노사관계에 어떠한 방식의 인센티브를 주거나 강제하는지에 따라서도 영향을 받는다. - P189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인데 왜 주주shareholder가 아니라 이해당사자라고 표현할까. 기업이 책임져야 할 것은 주주이고, 사실상노사관계는 ‘외생적 비용으로만 판단하는 것이 한국이나 영미식자본주의의 사고다. 하지만 생산 현장은 단순히 지시하고 따르는 곳이 아니다. 노동자와 관리자 그리고 회사가교섭하는 장소이기 때문에 이해당사자의 협치라고부르는 것이다. - P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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