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5년 카라코룸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무렵,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만주, 북중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 및 점령했고 고려로도 진출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추가로 서방 원정을 계획했고, 이 원정은러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약탈하기보다 이곳을 통치할 행정 중심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수도 건설은 몽골이 약탈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 본토는 여전히이동하는 목축민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 P16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다이 가문 간 충돌의 결과로 원 조정은1307년 몽골 지역의 군인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새로운 행정기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관료 기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초원을 통 - P34

치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유목민 가구와 집단은 광활한 몽골지역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청(淸, 1644~1911)과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가축의 집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도목축민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몇몇작은 마을들과 주변 지역, 그리고 거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앞으로 설명할 정책들을 따랐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게다가 대도의원 조정에 있는 몽골인들은 원래 초원 출신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정주 세계에 거주했고 일부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목민 사촌들과 연결이 끊겼고, 관심사와 정책 선호도도 달랐다. 이 몽골인들과 원 조정의 중국인 관료들이 고안한 행정기구가 과연 초원에서 효율적이었는지 여부를 규명하기는 어렵다. - P35

여러 몽골 집단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다. 그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귀환한 몽골인과 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피난민은 그 정확한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새로운 집단은 목초지, 물, 가축 무리를 놓고 거주민과 경쟁했다. 따라서 식량과 필수품이 부족해졌다. 1388년까지 계속된 명의 공격으로 사태가 더욱 심해졌는데, 카라코룸에 위치한 보급 본부뿐만 아니라토지도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어진 명조의 무역 제한으로 몽골은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침략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은 분열 상태였다. 서몽골 집단 중 하나이자 몽골의 혼인 동맹이었던 오이라트가 칭기스 가문과 이른바 동몽골에 도전했다. 그들이 아릭 부케의 후손들과 손을 잡으면서 북원이 중국에 대한 권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 P44

고려와 칭기스계 관계의다른 측면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30년(1231~1259)가까운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 끝난 뒤 고려 황실은 1274년에 칭기스가문 황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한 세기 동안지속됐다. 칭기스계는 일부 초기 동맹 세력 및 지방 군주(콩기라트와 위구르 등)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몇몇 정치체(금, 남송, 맘룩)와는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상호작용이 이처럼 눈에 띄게 결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칭기스계의 방벽이 됐고, 1380년대에는 정통성을 갖춘 국가로서 칭기스계의 지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였다. - P51

초기 고려-몽골 관계의 성격을 둘러싸고 논쟁이 진행중이다. 10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해석은 1218~1219년의 연합으로고려가 몽골 속국의 지위를 갖기 시작했고, 이 지위는 간간이 중단되긴 했지만 몽골 제국이 붕괴할 때까지 지속됐다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고려는 속국으로서 공물과 군사 원조 등 몽골의 요구를 모두 충족시켜야만 했다. "반면 1218~1219년 연합과 초기고 - P55

려-몽골 관계를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한국 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당시 몽골 지휘관들은 금에대항하기 위한 동맹이자 몽골의 지역 정권 통합을 위한 초석으로서 여러 지역에서 현지 세력을 물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몽골은동진 정권이나 일부 거란 귀족들과 연합했던 것처럼, 고려와도 비슷한 관계를 맺고자 했다. - P56

유라시아의다른 곳에서도 그러했듯, 고려는 몽골 제국에 통합되면서 기존 무역 관계(주로 중국)를 확장했고 더 넓은 지역 간 네트워크에 연결됐다. 그리고 마침내 개별 칭기스계 귀족들과 그들이 통치하는 영역의 일체화가 대칸 한 사람의 지배 아래 통합된 정치체로서의 제국이라는 관념을 압도하자, 원 왕조의 일부는 고려를 독립적 속국이 아니라 하나의 지방으로 보고 원의 행정 구조 안에 편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이 주장은 고려의 지위가 칭기스계 체제의 변화하는 역학 관계를 어떻게 반영 - P71

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 P72

1380년대 내내 고려는 가문, 외교, 군사 이해, 공동의 역사 등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원과 얽혀 있었다." 요동은 고려를 떠난다수의 이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자 고려 왕족과 홍씨 일가 [홍복원과 그의 후손들]의 자치에 익숙했던 곳으로, 명 왕조는 나름의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요동 장악에 도전했다. 더 넓은 맥락에서 보자면, 15세기 중반까지도 야심에 찬 초원 지도자들은 고려가 몽골제국의 부마국이었다는 점을 내세워 조선 조정의 충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명 조정에게는 한반도와 칭기스계 사이의 관계를상기시켰고, 우리에게는 칭기스계의 지속적인 유산에 대한 주의 - P82

를 일깨워준다.
한국사에서 더 중요한 점은 조선 왕조의 설립에 참여한 많은주요 정치인, 군인, 지식인이 몽골 치하에서 성장했다는 것이다. - P83

일 칸국이 성립한 이후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했고, 코카시아에대한 통치는 더욱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귀족에 의존했다. 일 칸국의 종말이 바로 캅카스에서 몽골 지배가 종식했음을의미하지는 않았다. 대신에 권력이 분산되고 패권 중심이 사라지는 등 정치적 재적응의 과정이 시작됐다. - P126

몽골 제국의 탄생은 중세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캅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정복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고, 서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다. 몽골은 캅카스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수없이 파괴했지만, 생산과 교환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이전에 국제 무역에서 소외됐던 타브리즈와 마라가 같은 도시들을 성장시켰다. - P127

"시베리아"라는 지명은 13세기에 작성된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시비르, 즉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세기까지 러시아에서 시비르는 오비와 이르티시지역을 가리켰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출하면서부터는우랄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 - P139

몽골의 통치권은 인구조사와 공물 납부, 그리고 공작들의 몽골 군사 원정 참여를 통해서도 관철됐다. 일반 루스인들은 몽골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고, 특히 숙련 장인의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작들은 주치 울루스를 자주 방문했고,
때로는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1242년부터1445년 사이에 99명의 공작과 세 명의 공작 부인이 주치 울루스를250차례 방문했다. "주치 울루스에서 10년 이상을 보낸 야로슬라프와 스몰렌스크의 페도르 로스티슬라비치를 포함해 다섯 명의공작이 몽골 지배층과 혼인했다. - P180

몽골이 루스에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를릭을 하사하고 공물을 받은 것에서 입증되듯 몽골은 루스를 지배했다. 찰스 핼퍼린이 언급했듯이 루스인들은 타타르 지배의 실제 현실에 익숙했으나, 106 몽골이 블라디미르 대공에게 공물의 관리를 양도하면서 문인들은 몽골의 통치권을 얼버무리고, 핼퍼린이 ‘침묵의 이데올로기 (ideology of silence)‘로 부른 태도를 취할 수 있었다. 문인들은 몽골의 약탈과 도시 파괴를 알고 있었다. 그들은 "이교도의 압제", "가혹한 노예화" 같은 용어를 사용했지만, 복속과지배라는 개념은 애써 피했다. 107루스는 몽골의 관습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타타르인들이 모스크바 사회로 진입해 심지어 보야르 집단을 만들기도 했지만, 몽골인은 루스 사회의 외부인으로 남아 있었다. - P203

침략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자,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계가 발전했다. 정치적, 외교적 계획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해양 세력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호혜적 무역을 위한 유라시아 대륙로를 열었고, 흑해 식민지와 지중해 동쪽 항구라는 결절점을 통해 유럽과아시아를 연결했다.
하지만 상인과 선교사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로부터 매우분리된 상태로 지내며 몽골 지배층 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 P238

문화 교류의 측면에서 몽골 제국 내의 주요 과학적, 철학적 대화는 이슬람과 중국 사이에서 이루어졌고, 유럽은 몽골 조정에서있었던 주요한 지적 만남에서 주변부에 머물렀다. 몽골은 화약과같은 중국의 발명품을 유럽에 가져오는 데 주요 역할을 했을지도모르지만, 그 전파에는 여전히 의문의 여지가 있다. 몽골의 통치가 끝나자 유럽인들은 곧 내륙 아시아의 대상로에서 자취를 감췄다. 유럽인들이 몽골의 보호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현지 사회와의연결에 실패한 것이 아마도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 P239

1260년에 그랬듯이, 분명히정복 그 자체에 파괴적 성질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시리아에서 - P278

는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몽골의 점령이 짧기도 했고 그 후 맘룩이 지배권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몽골이 이 지역 전체에 진출한이후, 사람들이 이라크, 자지라, 아나톨리아 등지로부터 시리아와이집트로 이주하는 인구 변화가 발생했다. 맘룩-일 칸국 국경 지역에서는 일부, 어쩌면 상당한 정도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는1320 년대 초 ‘평화 협상 과정‘과 함께 확실히 증가했다. 몽골이 아시아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한 것은 확실히 이집트의술탄국, 그리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가지 영향만 특별히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맘룩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몽골이 길을 닦았다는 점이다. - P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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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제국 시기의 몽골군은 알긴치 (alginchi, 복수형은 alginchin)와탐마, 정규군, 비유목민 군대, 카라울(qara‘ul) 혹은 카라굴(qaraghul),
케식 등 다섯 개의 주요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첫 번째 그룹인 알긴치와 탐마는 변경과 불안정한 지역에 주둔하는 부대였다. 10정규군은, 예상되는 바대로 침략과 정복을 위한 군대였고 유목민으로 구성됐다. 비유목민 군대는 비슷한 형태의 부대로 편성되어
‘병사‘나 ‘전사‘를 가리키는 몽골어인 체력이라고 불렸다. 이 단어는 의미를 가지고 페르시아어에 빠르게 유입됐다. "카라울 혹은카라굴은 "국경 수비대와 도로 순찰대 역할을 결합한 것으로 주력 부대의 일부로 기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케식, 즉 칸의 친 - P113

위대는 군주의 개인 경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 P114

통일 제국의 해체와 함께 이 정치체는 지역적인, 그러나 여전히 방대한 규모의 네 개의 칸국으로 나뉘었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분명하지만 몽골군은 크게 변하지 않았으며 각지의 필요에 맞는새로운 방법과 부대, 전술을 도입했다. 전체적인 구조는 유사하게유지됐다. 알긴치, 카라울, 케식 부대가 그대로 존재했으며 체력도마찬가지였다. 탐마는 몽골의 정복 활동이 줄어들면서 쇠퇴했을수 있지만 군대의 핵심 요소는 계속해서 기마궁사였다. - P121

원 이외의 다른 칸국들은 군주가 칸국 내 여러 칭기스 가문의 제왕들과 지역 왕조들로부터 군대를 징발할 수는 있었으나 그 군사들은 원래의 제왕들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원은 - P131

군대의 국유화를 시도했다. 1262년 이단(李)의 반란 이후 쿠빌라이는 한인 군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았고 그들의 권위와 독립성을 제한하고자 했다. 다수의 한인 지휘관들, 특히 친인척으로 구성된 부하 집단을 소유하고 있던 이들이 대거 제거되었다. 그들의군대는 몽골 군사 조직에 편입됐다. 한인 장수들은 몽골군에서 계속 복무했지만, 기존의 몽골 군사 제도와는 다른 관료 체제를 통해 엄격한 심사와 감시를 받았다. - P132

다른 몽골 칸국들은 해군을 창설하지 않았다. 원의 경우 옛금나라 지역이 약간의 해군력을 제공했고 송의 변절자와 투항자들도 해전에서 유용했으나, 더 중요한 것은 고려의 자원이었다. 고려 선박이 더 우수했고, 고려인의 항해술이 더 뛰어났다. 몽골 함대에는 원양 항해용 선박뿐 아니라, 남송 정복에 필요한 강 전투용대규모 함대도 포함하고 있었다. 나아가 중국을 정복하면서 몽골은 남송 해군을 병합하게 되었다. - P137

산업화 이전(더 구체적으로, 은행 제도 확산 이전)의 화폐 체계는 하위 수준(지역 내) 시장과 상위 수준(지역간) 시장의 교환 수단이 별도로 구성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체계는 근거리와 원거리 교역의 규모, 빈도, 계절성의 상당한 차이로 인해 별도로 작동했다. 몽골 정권은 하위 시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제국 전역의 공납 이동과 도량형 체계 통일을 결합원거리 교역에서의 화폐 통용성을 구축했고, 그 결과 전체 교역시스템에서 일련의 글로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 P155

중국 본토의 영지(투하)에서 서부 칸국으로의 일방적 은공납이 제국의 서부에 은 잉여를 발생시켰고, 이것이 남중국으로 - P187

부터의 비단과 자기 수입을 통해 결제되던 불균형 구조가 있었을가능성이 높다. 원에서는 지폐, 서부에서는 은화를 사용했기 때문에, 중국에 도달한 은은 빠르게 다시 유출됐을 것이다. - P188

한 국가 체제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흔히 그렇듯이, 어떤 집단이나 민족, 언어는 그들이 지닌 것으로 여겨진 능력이나 새로 등장한 정권에 제공할 수 있는 역할 때문에 우선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마련이다. 결국 이러한 과정 속에서 특정 집단이 종교로 인정받을 자격이 있는지 여부가 결정됐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범주화와 맞물려 있던 것은, 특정 집단을 이런 방식으로 규정하는 - P217

행위 자체가 본질적으로 통제를 수반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해당 집단들을 제국의 중심 권력 범위 안으로 편입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원이 중국에서 공인된 모든 종교를 대표하는 별도의 관청들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법적 문제에서도 각 종교 집단이 자신들의 전통을 대표하는 인물을 내세워 법정에서 변론하도록 규정한 일은 놀랍지 않다." 이러한 정책은 몽골 제국이 다양한 종교적 전통을 구분할 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이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인들의 정책은 제국 통제의 문제를넘어서 다양한 종교 전통들을 동등한 위치에 놓음으로써 그들을상대화(relativize)했다. - P218

몽골인들과 그들의 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종교가 실천되는 방식과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더 넓은 틀 안에서 종교가 이해되는방식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전자의 예는 이슬람 세계를 보면충분한데, 그곳에서 아바스 칼리프조의 파괴와 그에 이은 몽골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수피즘의 부상뿐만 아니라 시아파 정치 권력이 부상하는 길을 열었다" 이 두 가지 발전은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 파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은 유럽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상상력을자극하고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에 대한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었으며, 이는 초기 근대 세계의 형성과 창조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 P240

요약하면, 몽골인들은 중국-이슬람 과학의 상호 교류를 촉진했다. 의학, 지도, 지리적 지식, 천문학과 점성학이 모두 영향을 받았다. 중국은 이슬람의 혁신으로부터 이익을 얻었으나 중국의 과학, 이론, 치료의 기저에 있던 기본 원칙은 바꾸지 않았다. 중국은이슬람 세계로부터 특정한 기술, 치료법, 지식을 받아들였는데,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보다는 중국의 경제나 중국인의 건강에 부합하거나 도움이 되는 관습, 사상, 신념을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더욱이 중국 관료들은 회회력, 즉 이슬람력과 같은 이슬람 생산품을장려했지만, 중국 내에서 개발한 수시력을 공식 역법으로 지정했다. 일 칸국의 학자들은 중국의 역법과 의학 지식을 습득했는데,
여기에는 특히 라시드 앗 딘이 「보물지』를 저술할 때 참고한 중국문헌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 P284

셔먼 리는 "14세기 중국 회화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기준과 양식이 급변했다.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인정받은 원대 이후의 그림 중에 이전 시대 그림과 유사한 모습을 한 것은 없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변화는 몽골 이후 이슬람 세계의 예술, 즉 티무르의 중앙아시아,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 무굴 제국, 오스만 제국, 그리고 나아가유럽의 왕국들, 공국들, 도시국가들의 예술에도 각기 다른 정도로 적용됐다. 유럽 미술은 자연 현상과 초상화를 생동감 있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계속 발전했다. 이슬람 미술은 초상화에서 멀어졌지만, 잘라이르 왕조(1335~1432) 시대 페르시아의 서적에서 볼 수있듯이 정교한 삽화를 수록한 문학 고전 필사본은 계속 제작됐다.
명대(1368~1644)의 산수화와 초상화는 자연과 인간 활동을 묘사하는 틀 안에서 더욱 추상적인 스타일로 발전했다. 몽골의 지배는 특정 모티프와 주제를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예술 전반의 상업화를가속화했다. - P329

불확실하고 지역별 차이도 분명히 나타나지만, 1200년경부터 몽골과 그 주변 지역에서 일어난 환경 변화가 몽골리아의 군사 활동에 잠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북중국과 몽골의 온난한 기후 체계, 특히 몽골과 중국 북동부에서 관찰된 강수량 증가는 초원 환경을 변화시켰다. 목축 생산이 의존하는 에너지의 총량, 즉 물과 목초를 전반적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환경 및 자연 대리 지표에 관한 연구가 몽골 제국의 부상에서 기후의 중요성을 재평가하도록 연구자들을 이끌었듯이, 이 자료들은 또한 그 이후 몽골의 영토 확장에서 기후 요인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면밀히 검토될 필요가 있다. 또한 기후 요인의 영향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규명하기 위해 - P367

서는, 정복 과정과 환경의 상호 관계를 살펴볼 때 몽골 지휘관들이각 원정 단계에서 선택한 시기, 이동 경로, 그리고 전술적 판단에대하여도 보다 정확한 분석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 P368

가문들의 상호 합의와 지참금 지불을 통한 혼인은 서로 관련없는 씨족과 부족을 연결하는 정치적 결합에서 선호하는 형태였다. 실제로 여성들은 몽골의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전략적 혼인을 통해 형성된 가족 관계가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 핵심 개념인 쿠다(quda, 인척(姻戚))는 상호신뢰, 애정, 협력의 관계를 의미했다. 초원 사회 전반에서 남성지도자들은 자녀, 형제자매, 또는 자신의 결혼을 통해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 특히 몽골 제국 통치하에서 칭기스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영예를 얻은 남성은 황제의 구레겐(giüregen, 부마)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마들은 통치자와의 긴밀한 사적 관계, 자신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더 큰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적 특권, 그리고 이후다시 자신의 자녀를 황실 가문과 혼인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혜택을 누렸다. 칭기스 가문의 칸들 또한 자녀를 자신의 측근과혼인시킴으로써 추종자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 P384

당대(618~907)의 시각 및 문헌 자료들은 상류층 여성을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는 풍만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반면, 송대(960~1279)의 자료들은 날씬하고 심지어 연약해 보이는 신체를 강조한다. 중국에서 말타기는 여성과 완전히 무관하고, 심지어 남성들에게도 드문 일이 됐는데, 이는 금과 몽골의 침입으로 북방의 말 사육지가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상류층 가문에서는 아내와 딸의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게 규범이 됐다. 비상류층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농사, 가게운영 등을 맡기도 했지만, 이후 수세기 동안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었다. 송대에는 전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족의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지역마다 다소 달랐지만, 문헌 증거와 고고학 증거 모두 12세기에 자리 잡기 시작해 상류층에서 모든 계층의 한인 여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음을 보여준다(하카, 위구르, 만주,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들은 수 세기 동안 전족을 하 - P416

지 않았다)."
몽골의 점령은 중국의 혼인법에도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은 모든 민족 집단에 대해 몽골의 수계혼 관행을 합법화했고, 치열한 법적 다툼과 소송의 홍수 속에서 과부의정절은 중국 여성들이 수계혼에 저항할 수 있는 법적 수단으로 부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계혼은 중국에서 불법이 됐고, 과부의 정절을 지지하는 법들은 중국의 왕조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 -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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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투멘으로 구성된 그들은 황허 북쪽의 여러 지역에 주둔했으며, 몽골어로 "두르벤 투멘(dörbentimen)", 중국어로는 "사만호몽골한군(四萬戶蒙古漢軍)"이라고 했다. - P38

비록 "네 만호"라고 불렸지만, 실제로는 34개의 천호가 있었는데,
15개는 몽골 천호였고 19개는 한인 천호였다." 1303년 이후에는
"하남회북몽골군도만호부(河南淮北蒙古軍都萬戶府)"로 개명되어 낙양(洛陽)에 주둔했다. 앞서 언급한 두 탐마치 군대 외에도 몇 개의다른 군대가 있었는데, (1) 익도(益都)에 주둔한 산동하북몽골군도만호부(東北蒙古軍都萬戶府), (2) 봉상(鳳翔), 문주(州), 연안(延安)에 주둔한 섬서몽골군도만호부(陝西蒙古軍都萬戶府) (3) 성도(成都), 중경(重慶), 가정(定)에 주둔한 사천몽골군도만호부(四川蒙古軍都萬戶府)가 그것이다.
이처럼 몽골과 탐마치 군대는 황허 북쪽 여러 지역에 배치됐고, 북중국인(한군)과 남중국인(신부군)은 화이허 남쪽에 배치됐다. - P39

결론적으로 몽골 제국은 처음부터 단일 군주하의 동질적 정치체가 아니라 칭기스 가문이 통치하는 여러 울루스들의 집합체였다. 제국의 최고 통치자인 카안은 처음에는 제왕들에게 확고한권력을 행사했지만, 제국의 규모가 커지고 제왕들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을 뿐 아니라 카안의 지위에 대한 투쟁이 이어짐에 따라 울루스의 구조는 크게 변모했다. 그 결과 서방은 주치, 홀레구, 차가다이 가문이 지배하는 세 개의 대형 울루스가 성립했고, 카안의중앙 울루스는 쿠빌라이와 그의 후계자들이 지배하는 카안 울루스로 변모했다. 그리고 이 네 울루스 내에 여러 소규모 울루스가존재했다. 예를 들어, 카안의 영역 내에는 몽골의 우구데이계 울루스들, 하서회랑의 차가다이계 울루스들, 만주의 칭기스 칸 형제들의 울루스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주치 울루스 또한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었으며, 이후 다시 더 작은 울루스들로 분할되었다. - P25

우리는 다른 칭기스가문의 제왕들도 케식을 유지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릭 부케의아들 말릭 테무르는 4케식을 소유하고 있었고, 아미르 한 사람당케식 하나씩을 지휘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고려 왕들도 몽골의 케식 제도를 도입했다는것이다. 충렬왕은 1274년 즉위 직후 자신과 몽골 생활을 함께한 귀족 가문 자제들인 투르칵, 즉 주간 호위대를 몇 개로 나누고, 이들을 야간 호위대로 삼아 코르치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네 부대로조직했다가 1275년에 세 부대로 변경했다. 동시에 고려 궁정에 비체치(bichéchi), 투크치(tuqchi, 기수), 바우르치(ba‘urchi), 수쿠르치(sükür-chi) 같은 다양한 케식 직책이 도입됐다. 충선왕의 경우 자신뿐 아니라 몽골 공주 출신인 그의 아내도 케식을 소유했으며, 이후 카안의 궁정에서 두 케식을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고려의 사례는 다른속국들도 몽골 궁정의 케식 제도를 모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 P45

몽골 제국의 지배와 그 유산은 "타타르의 멍에"와 "팍스 몽골리카"라는 두 경쟁적 표어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논란의 대상이되어 왔다. 최근에는 후자의 측면이 더 강조되는 경향이 있으며, 이는 과거 세대의 편견에 대한 단순한 반작용 이상으로 이해되어야한다. 특히 토머스 올슨의 선구적인 연구들로부터 영감을 받아 지난 30년간 수많은 연구들이 밝힌 것처럼,158 "팍스 몽골리카"는 세계사 책의 멋진 장 제목이나 "화려한 단순화" 이상이었다.159 하지만 마찬가지로 우리는 몽골의 정복과 그로 인해 일어난 파괴의 어두운 면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 P73

고대 말에 이르러 이미 중국, 인도, 근동, 지중해 세계에서 보 - P90

편주의적인 종교 및 정치 교의가 확립됐다. 그러므로 몽골인이 "제국적 지배권"을 "세상의 모든 곳에 걸쳐" 확장하겠다고 한 주장은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구두 및 서면으로 전달된 이러한 선언들을 몽골인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는 그들이 자신들의 정복 범위를 극적으로 과시하려 애쓴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 P91

몽골인들의 이념적 메시지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신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원칙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범위한 지리적 범위를 가진 실제현상이었으므로, 세부 사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에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즉, 다른 전근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건설한 제국은 헌신적인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핵심 집단, 열정적이면서도 계산적인합류자들로 이루어진 훨씬 더 큰 집단, 그리고 신들의 헤아릴 수없는 계획과 정복자들의 뛰어난 행운에 대개 어쩔 수 없이 복종한수많은 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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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는 굵직한 책들로 구입했다. 지난 달까지 책을 구입해놓고 아직 안 읽은 것들 투성이라 이번 달은 건너뛰려고 했는데 생각났을 때 사놓지 않으면 지나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더라. 결국 사기 위한 변명이지만.

아무튼 멋진 리뷰를 써주신 이웃님 덕분에 <남성 판타지>를 구입했고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는 펀딩했다.
몽골 제국사는 그동안 읽어둔 것들도 있고 해서 건너뛰려고 했는데 1권 내용보다는 2, 3권 내용이 궁금하여 결국 펀딩을 결정했다.
사실 정치사는 재미가 떨어지지만 일상사, 미시사나 주변사는 훨씬 재미가 있으니까. 3권의 내용이 그런 것을 다룬다. 2권은 주제별로 역사를 다룬 것이다. 이런 책은 레퍼런스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이미 1권은 읽기 시작했고 어느덧 4부를 읽고 있다.
남성판타지는 진짜 너무 무거워서 들다가 떨어뜨릴 뻔하여 식겁했다는. 조심 조심 다루어야할 것 같다. 사실 떨어뜨리는 것보다도 너무 두꺼워서 책 내부가 찢어질까봐 걱정이 되는데 모쪼록 잘 떨어지지 않는 제본이면 좋겠다. 내용은... 와. 이걸 읽을 수 있으려나. 그렇지만 늘 그렇듯 시도하는 것이 시도하지 않는 것보다 덜 후회하는 법이니까 (언젠가) 도전!!!
그리고 오랜만에 커피 500g으로 샀다. 커피를 점차 줄이고 있는데 간혹 3시 넘어서 커피를 마시면 좀 부담되는 경우가 있다. 늦게 마시지 않으면 좋지만... 이른 아침에도 위에 부담이 덜 갈 것 같고 해서 디카페인으로 샀다. 오늘 아침 드립해서 마셨는데 역시 맛있었다.

어제도 늘 그렇듯이 점심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비가 온 뒤라 흐리고 쌀쌀했다. 옷깃을 여미며 한 바퀴 돌고 회사에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누군가 탁 하고 내 몸을 쳤다. 옆지기였다.
옆지기는 나와 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다. 사실 나는 그를 회사에서 처음 만났고 1년간 몰래 사내 연애를 하다가 그후 옆지기는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그 뒤로 우리는 4년의 연애 기간을 더 갖고 결혼했다.
어쩌다보니 지금 가까운 거리에 일터가 있어서 출근길에는 옆지기가 차로 데려다주고 퇴근길은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이렇게 산책길에 만날 때가 있다. 근데 3년 정도 이렇게 일하는데 산책길에서 만난 것은 손에 꼽는다. 옆지기는 걷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기 때문(오히려 자전거는 가끔 탄다).
비슷한 직업을 갖고 있어서 좋은 점은 이야기가 통한다는 점이다. 전문 용어를 이야기해도 이해를 못하면 아무래도 대화를 이어가는 데 한계가 있다. 회사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어느 때는 내가 일이나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거나 회사가 망해서 이직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어느 때는 옆지기가 일이나 회사 문제로 골머리를 쌓을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서로 버팀목이 되었다. 이 직업 세계의 생리를 잘 알고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는 것 같다. 옆지기는 만남을 갖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내게 가장 좋은 친구다.

4월이 단 이틀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몰랐다. 금요일도 일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 그 날이 노동절이었다(그 사실을 알고 출근길이 갑자기 매우 즐거웠다). 5월 4일 부랴부랴 휴가를 냈으니 이제 며칠 간의 휴가가 다시 생긴 셈이다. 어딜 가도 사람이 많겠지만 날이 좋으니 집안에만 있을 수는 없지. 산책하면서 볕도 쪼이고 어느 정도는 옆지기와 재밌는 시간을 보내지 않을까 싶다. 남은 4월을 정리하며 5월을 또 반갑게 맞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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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4-29 1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돌담이 하나의 화병 같군요. 돌화병^^
남편분과 회사 근처 산책길에 만난다는 건 좀 심쿵장면이군요.ㅋㅋㅋ
같은 직종의 회사를 다니며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도 때론 서로를 잘 이해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겠구요.
좋은 일이네요.
남편분 요리도 잘 하시고^^
<남성 판타지>는 저도 들고 있어요.^^

잠자냥 2026-04-29 13:15   좋아요 1 | URL
나무 님 들고 있어요?! 안 무거워요?!!! 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6-04-29 13:18   좋아요 1 | URL
앗. 그래서 매일같이 어깨랑 손목이 아팠구나?ㅜ.ㅜ
금방 잠자냥 님네 댓글에 <진리의 발견>도 들고 있다고 썼는데…이런!
또 팔이 너무 아프군요.ㅋㅋㅋㅋ

건수하 2026-04-29 14:00   좋아요 2 | URL
저는 책장이 대신 들어주고 있어요 ^^

거리의화가 2026-05-02 20:27   좋아요 1 | URL
돌화병이라는 표현 참 멋지네요^^ 회사 근처인데 저렇게 잘 꾸며놨더라구요. 매년 철쭉이 피어날 때마다 저런 풍경을 마주하게 된답니다.
산책하다가 옆지기를 만났을 때 정말 친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갑고 기분이 좋아요ㅎㅎ 괜히 놀란 척 하기는 하지만 애정표현이기도 하죠ㅋㅋ
<남성 판타지>는 두께 보니 후덜덜합니다ㅎㅎㅎ

잠자냥 2026-04-29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옆지기 님하고 산책길 만남 재밌어요.
긴 연휴 책과 옆지기님하고 재미나게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6-05-02 20:29   좋아요 0 | URL
오랜만에 옆지기 이야기 하려니 쑥쓰러웠는데 재밌어해주시니 좋네요. 저도 만났을 때 내심 반갑고 즐거웠거든요. 잠깐이지만 같이 걷다가 헤어지는데 이 또한 추억이 될 풍경이구나 생각하니 마음이 꽉 차오르는 걸 느꼈어요. 남은 연휴 잠자냥 님도 냥이들과 집사 님과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시기를요^^

다락방 2026-04-30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록 나무와 태양의 조화는 언제나 최상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 같습니다.

옆지기가 최고의 친구라니, 정말 큰 복 받으셨습니다, 거리의화가 님.
:)

거리의화가 2026-05-02 20:31   좋아요 0 | URL
다락방 님은 역시 포인트를 아십니다! 저도 초록나무와 태양의 조합을 정말 좋아해요. 특히 아주 짙어진 초록이 아닌 4~5월의 연둣빛 잎의 나무와 햇빛의 조화는 찬란함 그 이상이잖아요. 매년 돌아올 때마다 보면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인생에 좋은 친구를 만나는 게 복이라는데 저는 그런 면에서 행운을 얻은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홀레구의 원정은 제국의 모든 지역에서 군사력을 동원한, 통일된 제국이수행한 마지막 원정이었다. 이러한 원정은 1260년 이후 불가능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1259년 뭉케가 사망한 뒤 대칸의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생겨난 갈등 때문이다. 이제 제국은 다소 단순화해서말하자면 네 개의 독립된 칸국으로 나뉘었다. 중국과 몽골의 대칸국, 중앙아시아의 차가다이 울루스, 폰투스초원의 킵착 칸국, 그리고 훌레구 울루스가 그것이다. 그중 오직 일 칸들만이 쿠빌라이 - P321

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쿠빌라이는 훌레구의 형이고, 서방 원정군을 파견한 뭉케의 지위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킵착 칸국 통치자들은 쿠빌라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차가다이 울루스도 마찬가지였다. 중앙아시아의 상황은 차가다이 영토 내에 새로운 칸국이 들어서면서 더욱 복잡해졌다. 이 칸국은 쿠빌라이의 적대적 반대자이자 우구데이 가문의 일원인 카이두가 이끌었다. 따라서 새로수립된 홀레구 울루스는 앞으로 상당 기간 동안 동쪽과 북쪽 국경에서 잠재적이고 종종 실제적인 적들을 상대해야 했고, 이집트와시리아의 맘룩 정권의 적대감도 감당해야 했다. - P322

케식의 지위는 본질적으로 세습됐으며, 그 일원이 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특권이자 의무였다. 홀레구 울루스에서 케식은 주로 페르시아 관료제와 병행하는 일종의 행정 체계를 구성했다(일부는 겹치기도 했다. 라시드 앗 딘은 자신이 아미르 쿠틀룩 샤와 같은 케식에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는 몽골 페르시아 정부가 몽골적 특성을 매우 두드러지게 유지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페르시아인과 몽골인 사이의 문화 변용은 양방향으로 이루어졌으며, 홀레구 울루스의 정치는 몽골인과 페르시아 관료를 모두 포함한 파벌 투쟁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 P342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울제이투가 라시드 앗 딘의 「집사」에 관심을 가졌다는 점이다. 라시드 앗 딘은 가잔이 자신에게 의뢰하여 완성한 몽골사를 울제이투에게 헌상했고, 새로운 일 칸은가잔을 추모하는 의미로 이 작업을 이어달라고 요청했다. 이제라시드 앗 딘은 몽골이 만났던 모든 민족들에 대한 기록까지 포함시켜야 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대작의 "세계사" 부분이다. 여기서 라시드 앗 딘은 중국인, 인도인, 튀르크인, 프랑크인 등의 역사를 서술했다. 추가된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사학사적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 - P366

초기 몽골의 파괴적 영향과 그 이후의 통치 성격, 특히 홀레구가 자신과 후계자들을 위해 영구적인 왕국을 수립한 이후의 통치 성격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P383

몽골의 페르시아 지배에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고볼 수 있다. 적어도 초기 몽골의 침략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는그랬다. 더 나아가 페르시아가 현대 이란 국가로 발전하는 데 몽골인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몽골인들이 그들의 페르시아 왕국을 "이란"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이는 7세기 무슬림 아랍인의 침략 이후 거의 사용되지 않던 고대의 명칭이다. 몽골이 정복했을 당시 "이란"이라는 정치체는 600년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몽골의 이란 영토는 16세기 사파비 왕조가수립한 것보다 약간 더 넓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현대 이란의 국경과도 일치한다. 페르시아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설명을 할 수 있다.
물론 페르시아어는 구어로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지만, 문어로 - P394

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됐다. 교육받은 계층 사이에서 아랍어로대체됐기 때문이다. 아랍어는 아랍 지배자들의 언어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페르시아로 가져온 이슬람교의 언어이기도 했다. 물론,
몽골이 도착하기 훨씬 전에 이미 "신(페르시아어 "(아랍 문자를 변형해 쓰고 수많은 아랍어 차용어를 포함한 페르시아어)가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랍어는 높은 위신과 지위를 유지했다. 쿠란과 이슬람 법학 및 신학의 언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전의 몽골인들에게 이는 큰 의미가 없었다. 그 결과 몽골의 통치 시기에는 신페르시아어가 아랍어를 제치고 승리를 거두었다. - P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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