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에는 다음과 같은 책을 읽었다.


놀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꽤나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특히나 이번에 주역의 원리를 확인하기 위해 참고 도서를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중국철학사 읽을 때 주역의 이론과 개념을 접했으나 거의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일단락짓고 넘어갔기 때문에 이번에는 기본 원리라도 이해하고 넘어가자라고 생각했기에 선택한 책이었다.

주역이 점술의 원리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 '기'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확장된 세계관이라는 것을 이제는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8월에는 광복절이 끼어 있었는데 신임 광복회장에 논란이 될 인사가 발탁되어 한참 시끄러웠다(그뿐만이겠는가). 내가 읽는 책들이 현실 도피용이 아닌, 현실 세계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늘려가기 위한 공부여야 함을 되새기며 다짐하게 된다.


의미 깊은 책은 뭉우리돌 시리즈였고 흥미 있게 읽은 책은 청명상하도였다. 


(다)문화, 인종, 민족은 근래 들어 계속 뜯어보고 있는 주제의 책들이다. 여러 권의 책을 통해서 겹치는 개념, 이론들은 이해를 강화시키고, 새로운 개념이나 주장을 접하면 다른 시각을 접하게 되는 것이니 그만큼 공부가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며칠 전 구글 Assistant에서 Gemini를 써볼 것을 요청하는 메시지가 왔길래 궁금하여 전환을 하고 이런 질문을 해 보았다. 


1. 민족주의란 무엇인가?


민족주의는 간단히 말해 특정 민족에 대한 소속감과 애착심을 강조하며, 이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사상입니다.

핵심 개념:

 * 민족: 공통의 언어, 문화, 역사를 공유하며, 자신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 소속감: 자신이 속한 민족에 대한 강한 귀속감과 유대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 독립 국가: 자신들의 민족이 독자적인 국가를 건설하여 자주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념입니다.

민족주의의 특징:

 * 다양한 형태: 민족주의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 긍정적 측면: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민 통합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 부정적 측면: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과 배척을 야기할 수 있으며, 과도한 민족주의는 국가 간 갈등과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역사 속의 민족주의:

 * 근대 민족주의: 근대 시민 혁명과 함께 등장하여, 국민 국가 건설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습니다.

 * 제국주의 시대의 민족주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 운동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습니다.

 * 현대 민족주의: 다문화 사회의 등장과 함께, 민족주의의 개념과 의미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

Gemini도 'Context(맥락)'을 고려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다만 민족주의의 정의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자 한다'라는 구절에서는 물음표가 따라왔다. 


2. 한국의 민족주의의 특징


한국 민족주의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과 사회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요 특징:

 * 저항 민족주의의 강한 유산: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형성된 민족주의는 한국인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종족적 민족주의의 강조: 혈통과 언어, 문화를 중심으로 한 종족적 순수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 단일 민족 신화: 한국인은 단일한 혈통을 가진 동질적인 민족이라는 신화가 강하게 작용하며, 다문화에 대한 수용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입니다.

 * 국가와 민족의 동일시: 국가와 민족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 남북 분단의 영향: 남북 분단은 한국 민족주의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통일 문제는 한국인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 근대화와 산업화의 영향: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 성장 과정에서 민족주의는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활용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배타적인 민족주의를 심화시키기도 했습니다.

 * 다양한 표현 방식: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민족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표현됩니다. 예를 들어, 역사 교육, 문화 콘텐츠, 스포츠 등을 통해 민족주의가 강조될 수 있습니다.

한국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

 * 국가 정체성 확립: 민족주의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국가 통합에 기여했습니다.

 * 저항 정신 함양: 일제강점기의 경험은 한국인에게 저항 정신을 심어주었고,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 국가 발전의 동력: 민족주의는 국가 발전의 중요한 동력이 되어왔습니다.

한국 민족주의의 부정적 측면:

 * 다문화 사회에 대한 수용성 저하: 단일 민족 신화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수용성을 낮추고,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야기할 수 있습니다.

 * 배타적인 민족주의 심화: 과도한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에 대한 배타성을 강화하고, 국제 사회에서 고립주의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 비판적 사고 저해: 민족주의는 비판적 사고를 저해하고,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

한국 민족주의의 긍정적, 부정적 측면은 내가 생각해왔던 것들과 꽤 비슷하다. 그러나 여전히 다양한 구성원들의 입장이 고려되지 않는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얼마 전 집에 세탁기를 건조까지 되는 트윈워시로 바꾸고 제습기를 추가로 구매했다. 예전보다 쾌청한 날이 덜하고 습도가 높은 날이 많아 빨래가 잘 마르지 않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세탁 및 건조까지 되니 삶의 질이 높아지는 느낌이다. 특히나 수건 건조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어제 큰 결심을 하고 운동을 위해 개인PT 수업을 등록했다. 이곳을 선택한 것은 여성전용 휘트니스 센터라는 점 때문이었다. 지금의 몸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더는 운동을 미룰 수 없을 것 같다. 요즘은 자도 계속 피곤하고 아픈 곳이 늘어나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여겼던 것이다. 

추석이 껴 있는 지라 시작은 그 이후로 하기로 했다. 투자한 돈이 아까워서라도 의지를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고 한다. 이제 운동이 재미 없다는 핑계는 대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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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9-08 0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난 팔월에 읽으신 책 뜻깊어 보입니다 저는 2024년엔 다른 해보다 책 못 보는데, 7, 8월엔 더 못 보기도 했군요 운동을 깊이 있게 몸에 좋게 하려고 하시다니 멋지네요 운동도 하다보면 즐겁기도 하겠지요 앞으로 운동하시고 피곤함이 남지 않으면 좋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9-08 09:1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 여름에는 작년과 제작년에 비해서 덜 읽었다는 생각입니다.
PT까지 굳이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기는 했는데 동영상 보고 따라하는 것도 요령을 알아야 할 수 있는 것이라서 결심을 했어요. 허리나 어깨나 무릎, 발목 같은 관절이 안 좋아지는 게 느껴져서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는 것도 있고요. 운동을 하면서 부디 제 삶의 일부가 될 수 있기를 생각하며 열심히 해보려고요. 희선 님도 건강 잘 챙기시길 바랍니다^^
 

오장환
정현웅: 삽화가만이 아닌 북디자이너로서
청오 차상찬: 개벽 발행인, 춘천 출신 언론인. 시인이자 수필가. 문화 기획자 …

문화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없는 듯 있고 또 있으면서도 없는 듯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과는 달리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열악한 문화적 인식과 인프라가 미비한 문화예술계에서도 변방이었던 판화나 드로잉 장르는, 활동은 있었으되 공기처럼 잘 포착이 되지 않는 분야였다. - P50

1930년대 당시 한국은 목판화가 매우 드문 시기였다. 조선 후기까지서책의 삽화로 쓰였던 전래적 인쇄방식이 퇴조하고, 활판. 석판. 마스터•옵셀 등 서양식 인쇄 기계와 기술이 도입되면서 목판 삽화는 거의 사라졌고, 또 현대미술로서의 창작판화도 경성에 거주하는 일본인 작가들을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을 뿐이었다. 목판화가 미술로 제대로 조망을 받지 못한 시절에 이미 오장환은 선배의 개성적인 판화작품을 자기 시집의 삽화로 초대하면서, 시뿐만 아니라 책의 장정과 북 디자인도 주목받게 만들었다. 이런 새로운 장정의 시도는 일견 겉멋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화려한 치장을 배제하고 검소하고도 담백한 수공적 미감으로 속물성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었다. 오장환의 시적 재능과 함께 심미성과 감성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 P44

장정은 책의 겉장이나 면지, 도안, 색채, 싸개 따위의 겉모양을 꾸밈,
또는 그런 꾸밈새를 말한다. 장정이란 말이 문헌상에 처음 나타난 것은 조선조문종 즉위년인 1450년의 일이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 장정이란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잡지에서는 1914년 『청춘 창간호부터이고, 단행본에서는 1922년 희곡집 『荒野에서부터이다. 그후 우리나라에 북디자인의 개념이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한 1970년대 말경부터 ‘북디자인‘이란 용어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하여 현재는 일반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 P60

정현웅의 작품을 분석한 결과 그는 시대와 대중이 요구하는 상업적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동시대 인쇄출판 경향에 관한 연구와 유럽에서 유입된 해외의 예술 동향에 대해서도 인지하여 표지와 내지에 반영하고자 했다.
러한 그의 업적은 식민지하 검열과 통제의 억압 속에서 꾸준히 한국인들이 - P81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시각 이미지를 제작하여 출판미술의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북디자이너로서 입지를 만들어 나가며 오늘날 한국 디자인사의한 부분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인쇄출판 매체와 대중들 사이에서소통을 위한 중요한 시각적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는기대와 미래에 대한 희망적 믿음으로 기능하며, 그를 당시 시각 문화 속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도록 했다. - P82

청오는 언어 천재이자 문화기획자였고 사회비평가요 지역전문가였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청오의 저작물을 계속 발굴하고 확정하고 정리하는 작업도 진행형이어야 한다. 청오가 방정환과 함께 어린이 운동을 전개한 선구자이자 어린이들에게 먼저 다가간 진보적 어른임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청오가 펴낸 잡지 『제일선을 통해 춘천 출신 문인인 김유정(金裕)이처음 등단한 사실을 기억하는 이 또한 누구인가?
100여 년 전이지만, 국내 역사, 민속, 문학, 사회, 예술, 정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청오가 세상을 향해 쏟아낸 다기한 글들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그의 심장은 우리 시대에 깨어 있는 지성인과 같다. 다음에 나오게 될 제2, 제3의 현대문 선집이 더 궁금해진 이유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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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어영부영하다 보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는구나.

이번 달은 휴가도 껴 있었고 여러 모로 즐기다 끝이 난 느낌이다^^ 


지난주만 해도 아직 덥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이번 주는 확연히 달라진 느낌이다. 아침 저녁으로 꽤나 선선해져서 다닐만해졌다. 게다가 낮에 걷는데도 볕은 뜨거워도 습도가 줄어드니 걷기가 괜찮았다. 이제 얼마 후면 이런 초록초록함이 알록달록함으로 바뀔 때가 오겠지.



지난 주말도, 이번 주말도 어김없이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집 근처에서 운동을 하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노을빛을 좋아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아직은 동트기 전 새벽의 하늘이 훨씬 좋다. 아무래도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활력을 얻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오랜만에 책을 샀다. 



<청명상하도>는 제목과 부제로 설명이 끝이다. 북송 시기 청명절 하루의 풍경을 담은 그림인 청명상하도를 세세하게 들여다보는 책이다. 읽고 리뷰까지 다 썼는데 예상대로 좋았다. 이 책을 다 읽으니 집에 있는 수호전을 읽고, 도서관에 가서 송사를 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 시인 이청조의 사(詞)도 궁금하다.


<교만의 요새>는 다음 달 여성주의 책 읽기 모임 책이라 구비했다. 마사 누스바움 책은 언젠간 읽어야지 하면서도 계속 미루고… 이렇게 결국 읽게 되는구나.


<계급 횡단자들 혹은 비-재생산>은 보관함에 진작 담아두고 있었는데 읽기 어려울까 싶지만 과감하게 읽어보려고 한다(하나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은 이미 많은 분들이 언급을 한 책이라 말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내년도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위안부 관련된 사항이 축소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그 뿐 아니라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이 대폭 강화되었다고. 이럴수록 정신차려야지.


<체공녀 연대기>는 여성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 주제로 꽤나 긴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모쪼록 잘 정리되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어보겠다. 




계속해서 원서 책을 읽고 있는 중이다.


중국어 원서는 微信读书로 오디오북을 들으면서 한글 번역본을 병행해서 보는 중이다.

허삼관 매혈기는 생각보다 문장 구조가 길지가 않아서 어렵지는 않다. 장상사는 아무래도 인물 이름이나 지명 등이 많고 문장이 길어서 쉽지 않기 때문에 듣는데 의의를 두는 중이고^^; 아무튼 장상사는 다 듣고 마지막 6권만 남겨 두었다. 


영어 원서 the Story of the World 3는 늦게 시작한 만큼 진도를 열심히 빼고 있다. 9월에 열심히 읽어야 겨우 완주할 것 같은!


얼마 전 Audible로 the Women이라는 소설을 받아 듣고 있는데 이야기가 꽤나 흥미롭다. 베트남 전쟁 중 간호 인력으로 지원을 나가게 된 여성의 이야기이다. 전쟁 중에도 비정함과 냉정함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주인공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현지에서의 불안함과 공포, 고국을 떠난 외로움을 달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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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31 20: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서련의 ‘체공녀 강주룡‘이 좋아 도서관에 ‘체공녀 연대기‘ 희망도서로 신청했는데 읽기 힘들 것 같아요.
부당함과 차별에 화가 치밀듯요.
날씨가 좀 선선해지면 아무래도 책도 더 많이 읽을 것 같은 착각이 듭니다. ㅎㅎ
9월도 화이팅해요^^

거리의화가 2024-09-01 13:34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읽기 힘든 책이겠지요? 그래도 도전해보려고 합니다. 읽으면서 열이야 나겠지만^^;
페넬로페 님도 무덥고 긴 여름 지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날씨 핑계대기에는 민망하겠지요?ㅋㅋ 9월에도 즐거운 독서 생활 이어가시길!

공쟝쟝 2024-09-02 2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새벽운동 하시는 화가님은 정말인지 바른생활 학인이시다. 저는 올빼미.. 여덜시애 눈꼽떼는 겔름뱅이입니다. 지적임이 폴폴 책탑 눈구경 잘하고 갑니다 😀

거리의화가 2024-09-03 08:02   좋아요 0 | URL
ㅋㅋ 바른생활이라니... 전날 12시 넘어서 자서 새벽 운동을 나간지라 하루종일 몽롱했다는 것은 안비밀입니다!ㅎㅎ
이제 날이 좀 선선해졌으니 새벽 운동이 아닌 시간대를 뒤로 미루어 아침 운동 또는 저녁 운동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책탑의 책들 섭렵하려면 부지런히 읽고 써야겠지요. 쟝 님의 독서 생활도 계속 응원합니다^^

희선 2024-09-07 0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월 첫째주가 가려고 하는군요 어느새 주말이라니... 낮엔 좀 더워도 아침 밤에는 시원하고 풀벌레 소리도 들리는군요 갈수록 낮에도 좀 시원해지겠지요 여름엔 새벽에 운동을 하시다니 대단합니다 새벽 하늘이나 공기를 만나서 좋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9-07 16:42   좋아요 1 | URL
오늘도 일어나자마자 걷고 왔습니다^^ 어제부터 시작해서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렸는지 노면이 젖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운동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어요. 아직은 낮에 운동하기에는 많이 더우니까 이른 시간을 많이 이용하는 듯 보입니다.
그래도 제법 아침 저녁으로는 초가을의 향기가 나는 것 같아요. 희선 님 남은 9월도 행복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계몽주의 이후 근대는 사회의 세속화를 의미했다. 세속화는 진보의 방향이었다. 따라서 사회는 더 근대화될수록 더 세속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난 10년 혹은 20년 동안의 변화는 이 주장이 틀렸음을 보여 주고 있다. 놀랍게도 우리는 예상하지 못했던 종교의 귀환을 확인해야 했다.(비록 실제로 종교가 완전히 사라진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종교적 정체성은 오늘날 더는 완전한 정체성 유형으로 기능하지 않는다. 가장 확신에 찬 신앙인도 오늘날 자신의 종교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채, 불완전하게 소속된다. 불완전이란 자신의 확신과 결합이 언제나 여러 개 중 하나의 가능성임을 잘 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다.
이 상황을 부분적 세속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종교적 믿음은 오늘날 단지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믿음일 수밖에 없다. 이 또한 모순처럼 들릴 수 있다. 부분적 세속화는 본질적으로 그 이상의 요소에 의해, 바로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가시성을 통해, 즉 다원화와 함께 다양한 종교들이 점점 더 많이 눈에 들어오게 되면서 촉진된다.

오늘날 우리는 신앙을 선택한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신앙을 개수와 상관없이 선택하는데, 핵심은 선택이다. 이 점이 과거 종교에 대한 이해와 완전히 다른 점이다. 선택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세속 사회는 오늘날 종교 세계 옆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것은 종교의 심장으로도 진입했다. 전승 안에서 배치되는 대신 자기 전통 혹은 외부 전통을 스스로 습득한다. 어떤 자리에 배치되는 대신 자기 힘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한다. 스스로 선택된 전통은(이 무슨 모순인가!) 과거 종교성과는 반대되는 효과를 낳는다. 세대라는 사슬에 배치되어 탈주체화되는 대신, 선택한 자아가 강화된다.

결정이 반드시 성숙을 위한 결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결정의 무대가 된 종교는 결정을 통해 바로 근본주의로 가는 관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다양한 종교들의 새로운 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는 것은 다원화의 원인이자 결과다. 일단 볼 수 있게 되면서 여러 종교로부터 다원성이 생겨났다. 그리고 바로 이 눈에 보이는 다원성 때문에 오늘날 모든 종교적 믿음은 다른 신앙과 나란히 존재해야 하며, 부분적으로 세속화된 신앙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국가의 중립성은 바깥 어딘가에 있지 않다. 중립성은 컨테이너가 아니다. 중립성은 개인에게, 특히 국가의 대리인에게 자기가 양분된다는 사실을 지식과 의식 차원에 각인시킬 때만 존재한다. 모든 판사들은 자신들에게 사인과 공인이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공적 인격은 바로 사적 인격과의 거리로 인해 존재한다. 사적인 성향 및 확신과 거리를 둘 때에만 국가의 중립성은 실현된다.

국가 시민적 의식은 시민의 완전한 정체성과는 거리가 있고, 완전함에서 뭔가 빠진, 감소된 자아로 이해된다. 다원화된 민주주의 사회가 필요로 하는 중립성은 바로 이런 것이다.

다양성이 큰 사회에서 정체성은 타인과의 구별로만 형성되지 않으며, 자기 자신의 정체성과 경계 짓기를 통해서도 형성된다.

근본주의는 오늘날 다원화에 대한 저항을 의미한다. 종교적 근본주의는 따라서 다원주의에 대한 종교적 저항이다. 이런 저항은 모든 종교에서 발견된다.

문화는 오늘날 중심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다룬다. 문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만나고 충돌하는 영역이 곧 문화다. 그러나 문화는 레크비치의 서술처럼 "가치와 담화의 영역"인 것만은 아니다. 문화는 또한 기호의 영역이다. 말하자면 문화 영역에서 물건, 자산, 단어들이 의미가 있는 기호 또는 상징으로 변환된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는 정체성에 상징을 부여하는 기본 틀이다. 문화 영역에서 개인과 상징 사이의 관계가 다양한 방법을 통해 고정된다. 이 관계에서 우리가 정체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온다.

1세대 개인주의에서 문화는 개인을 잘 조직된 상징세계에 (대중으로) 끼워 넣는 데 도움을 준다. 이를 통해 개인은 각자의 특별함을 포기하고 일반적인 상징 질서 안에 있는 주체로서 자신을 재발견한다. 즉 여기에서는 완전한 주체와 완전한 상징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다.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이 질서정연한 관계가 휘청거린다. 여기에서는 해체라는 주제가 널리 퍼졌다. 예를 들면 여성이 대표적이다. 정해진 역할, 장소, 상징 관계의 해체.

3세대 개인주의는 정체성의 불안정화를 통해 규정된다. 이는 사회의 다원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외면적으로 보장하는 일이 개별 주체들에게 맡겨졌음을 의미한다. 자기 정체성의 불안정화, 유연화는 상징의 불안정화를 동반한다. 민족적, 종교적, 성적 상징 등 모든 상징이 자신의 분명함을 잃어버린다.

오래전부터 우리가 우리의 사회상을 다루는 지점인 즉 문화 영역에서 동성애가 찬성과 반대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면, 콘치타와 함께 트랜스젠더 유형이 이 민감한 지점에 불쑥 들어왔다.

다원화된 개인주의 시대에서 문화는 결코 훼손되지 않고 온전한 문화 재화들과 완전한 상징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는 오히려 불안정해진 상징과의 관계를 획득하려는 시도다. 다원화된 개인은 소수의 엘리트와는 달리,전 지구 안에서 획득 가능한 완전한 상징들의 단순한 주인이 아니다. 다원화된 주체는 기껏해야 불완전한 상징과의 관계 속에서 불안정한 자율성과 권한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문화 본질주의는 자기 자신을, 자신의 "종교, 민족, 인종적 관습을 영구적으로 유지하려는" 시도다.

참여는 권리와 권한의 부여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참여는 참여적인 주체를 생성하고 힘을 주는 일이다. 따라서 말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하는 이들에게, 말할 수 없고 말하면 안 되는 배제된 자들에게 권한을 부여하는 데 인종적 게토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쾌락주의는 주도 담론이 되었다. 성공한 삶이란 즐거움과 쾌락의 실현이자 향유다. 이 쾌락주의가 사회의 중심 개념이 되는 과정에서 자체의 의미를 바꾸었을 뿐 아니라 거의 뒤집었다는 것 또한 비밀이 아니다. 원래 쾌락주의는 욕망에 적대적인 도덕을 향한 저항의 징표이자 해방의 울림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오래전에 쾌락주의는 그 반대편에 자리를 잡았다. 실현과 성공을 통해 쾌락주의는 저항의 정신에서 빠져나와 참여와 소비의 도구이자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가 되었다. 자본주의는 기능하는 노동력뿐 아니라 즐기는 소비자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쾌락주의는 변화 없이, 수직적인 계층 없이, 충동의 지연됨 없이 개인으로서 완전히 참여할 때 실현된다.

헌신적 사회 참여 속에서 다원화된 개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쾌락주의를 실현한다.

집단을 통한 대의는 오늘날 시민들의 정치적 욕구와 맞지 않는다. 사회 문제가 더 이상 없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오늘날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움직이고 건드리며 자극하는 것은 다른 무언가, 즉 완전 참여를 향한 열망이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적 국면이란 포퓰리즘이 뻗어 갈 수 있는 상황으로, 특정한 사회 분열이 시작되는 역사적 국면을 말한다. 정치, 경제, 문화의 균형이 흔들릴 때, 사람들의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 통합이 더 이상 굳건하지 않을 때 생겨나는 국면이다. 이때 전 국민은 "사회적 홈리스" 신세가 된다.

포퓰리즘은 정확히 이 나눌 수 없는 것에 집중한다. 잃어버린 나눌 수 없는 것, 오늘날 정치적인 것의 중심에 자리 잡은 바로 그 나눌 수 없는 것, 곧 정체성에 집중하는 것이다.

포퓰리즘 전략은 왜 효과가 있을까? 우리가 정체성들이 더 이상 옛 안전 체계를 통해 보장받지 못하는 포퓰리즘적 국면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들은 자신의 정체성이 위협을 받는다고 느끼며, 자기 정체성의 당연함에 질문이 제기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몰락을 두려워하는 중간 계급 이하의 사람들은 정체성에 관해 이중의 위협을 받고 있다. 나눌 수 있는 것에 정착한 사회 민주주의로부터 아무런 정체성도 제공받지 못하면서, 동시에 다원화가 불러온 사회 변화를 통해 위협받고 있다.

민주주의에서 국민은 추상 범주다. 이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말이 아니다. 추상화는 필수적인 허구이기 때문이다.

우파 포퓰리즘은 바로 이 추상화를 무력화시키려고 한다. 포퓰리즘은 추상적인 국민에게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려고 한다.

파시즘과는 달리 우파 포퓰리즘은 세속 종교가 아니다. 파시즘은 정치의 신성화를 통해 자기 숭배 의례와 성스러운 의무로 기능했다. 그러나 우파 포퓰리즘은 파시즘에서 기꺼이 여러 가지를 모방하지만, 파시즘의 세속 종교성은 모방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해 포퓰리즘은 더 이상 종교적으로 규정되지 않는 사회에서 움직인다. 포퓰리즘은 전체가 순전히 세속적인 사회에서 움직이며, 이 세속적 세계에서 여전히 초월적 대용품처럼 기능하는 것을 이용한다. 바로 ‘타자’의 배제다. 실제로 타자가 우리를 주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타자의 배제가 우리 내면의 위협처럼 보이는 것을 방어한다고 둘러댈 뿐이다. 지금 이 가상의 위협에 대항하며 포퓰리즘이 가져오는 것은 파시즘의 경우와는 다르다. 초월적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약속도 없다. 포퓰리즘의 모든 것은 오직 지금 여기에서만 작동한다.

민족은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나 복수감을 뜻하며, 인간 본성의 비합리적 측면을 말한다. 니체에 의하면 강자에 대한 반감의 배후에 작용하는 심리다.)과 연결되고, 동시에 정체성도 제공해 주는 환상이다.

미셸 푸코 덕분에 우리는 주피터 역사와 반주피터 역사를 구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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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권력을 상징하는 신" 주피터가 수행하는 역사다. 승자의 역사를 설명하는 방식이며, 권력과 영광을 드러내는 역사. 주피터 역사는 승리를 중심으로 사회를 일치시키는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모범적인 영광의 역사다. 이 때묻지 않은 영웅담인 주피터 역사는 "권력 강화"를 위한 의례다.
이와 반대로 반주피터 역사는 억압받는 자, 굴복된 자, 희생자의 역사다. 이 관점은 저항의 역사에 경청하게 해 준다. 영광은 오직 승자만을 비춘다. 그러나 반주피터 역사에서는 희생자가 그늘에서 나와 영광이란 단어를 움켜잡는다. 이 관점에서 타인의 승리는 자신의 패배다. 권력에 반항하는 저항의 역사는 주권과의 동일시를 흔들어 놓으며, 권력이란 결합할 뿐 아니라 억누른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반주피터 역사는 권력에 대한 저항 담론이고, 사회의 약속된 단일체를 방해하는 응답이다.

사회적 기준에 어긋난다고 여겨지는 정체성, 그런 의미로 부정적인 정체성, 그래서 피해자로 규정되는 정체성을 보호하는 일이 정치적 올바름의 핵심이다.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란 정치적 올바름을 부정할 뿐 아니라 그에 적대적인 세력에게 좋은 먹잇감이다. 이것은 동시에 등장하는 실제 문제 그리고 편견의 관계와 같다. 실제 발생하는 문제가 편견의 원인이 아니듯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이 정치적 올바름을 거부하는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과잉은 거부를 크게 촉진한다.

좌파가 잊은 것은 물질적인 차원이 아니라 오히려 이와 연결되어 있었고 물질적 차원이 가져온 그 정체성이다. 망각에 빠져 있는 건 바로 정체성이다. 계급 투쟁의 귀환을 요구하는 좌파의 정치적 올바름 비판에서 바로 이 점을 간과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핵심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것을 포퓰리즘이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압된 좌파의 정체성을! 바로 좌파가 억압하는 정체성이 왜곡된 형태로 포퓰리즘 속에서 귀환하고 있다. 우파 포퓰리즘의 성공은 사회 문제의 귀환과 연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포퓰리즘에 대한 저항도 단순히 사회 문제를 재인식하는 데 놓여 있지 않다. 오히려 우파 포퓰리즘은 경제적 착취가 아니라 잃어버린 정체성의 국면을 최우선으로 다시 받아들였다. 나눌 수 없는 것의 이 억압받던 국면은 여기에서 왜곡된 형태로, 백인 남성의 굴욕감으로 귀환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백인 남성들에게는 사회적 서열의 전복으로 느껴진다. 경제적 상실과 나란히 문화적 헤게모니와 자존감을 앗아가고, 담론적 권위도 빼앗는다. 백인 남성들은 더 이상 여성, 흑인, 외국인, 동성애자에 대해 지배적이지 않고, 그들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회적 관심이 앞으로 피해자 지위를 통해 정해진다면, 경제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사회적 관심에서도 백인 남성들은 가장 아래 위치한다. 왜냐하면 백인 남성들은 이런 질서에서 피해자 지위를 요구할 권리가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착취당하고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고 백인 남성들 스스로 피해자라고 주장하기란 쉽지 않다.

각각의 특수한 정체성 규정들과 특별한 정체성들의 추상화는 민족이라는 특수하지 않은 수준에서 유사한 존재를 재생산하려는 시도다.(모든 긍정적 효과뿐 아니라 단점과 어두운 면도 함께 재생산하게 된다.) 이에 반해 오늘날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감소는 더 이상 유사성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 감소는 릴라의 단자들처럼 차이의 축제도 아니고, 즉 특수한 정체성과 본질적으로 오해된 정체성을 고집하지 않으며, 유사한 것들의 결합도 아니다. 오히려 다양한 존재들의 결합이자 만남이다.

"다원성의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목소리들이 등장하고, 다종다양한 의견과 위치가 표현되는 그런 공간이 될 것이다.

우파들이 정치적 올바름을 반대하는 전장에서 실현하려고 하는 그림은 정확히 반대다. 이는 사회를 유사한 존재들을 위한 무대로 바꾸려고 하는 시도다. 이 유사한 존재는 릴라가 생각하는 추상적 유사성, 시투아앵이 아니라 실체가 유사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분명히 해야 한다. 유사성은 다원화의 가장 극에 있는 반대 개념이다.

문화는 관계이며, ‘자기 자신’의 문화와 관계 맺는 방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오히려 우리가 문화를 사는 방식이다.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우리가 우리 정체성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가 우리 종교를 사는 방식이 우리를 분열시킨다. 그러므로 진짜 경계선은 다원주의와 반다원주의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지도자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단지 권위주의적 지배에 겉치레를 제공할 뿐이라는 허깨비 민주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이때 권위주의는 단순히 독재가 아니다. 비록 동의를 만들기 위해 강제가 동원될 수도 있지만, 강제를 통한 지배가 아니며, 동의를 통한 지배다. 예를 들어 국민 투표를 앞두고 기자들을 감금해 ‘반대’가 전혀 나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 이런 방식이 민주주의와 다른 지도자 민주주의 방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동의를 받는 일이며, ‘진정한 국민’과 그들의 지도자 사이에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또한 중요하다. 제도를 통한 우회로 없이 직접 동맹을 만드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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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장

아메리카 지명 붙이기에서 깜짝 놀랄 만한 것은 ‘뉴‘와 ‘올드‘가 공시적으로, 비어 있는 동질적 시간 안에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된다는 점이다. 비스카야는 누에바비스카야와 나란히 있고, 뉴런던은 런던과 나란히 있다. 후계 구도가 아니라 형제 간의 경쟁을 연상케 하는 작명 스타일이다.
이 유례없는 공시적 참신성은 역사적으로 오로지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그들 자신이 다른 상당수의 인구 집단에 평행한 (parallel) 삶을 살고있으며, 결코 만나지는 않을지라도 틀림없이 같은 궤도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할 위치에 있을 때에만 일어난다.  - P280

평행성과 동시성의 감각이 단순히 떠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정치적 결과도 낳으려면, 반드시 평행 집단 사이의 거리가 멀고, 둘 중 새로운 쪽은 오래된 쪽에 확고히 종속되어 있는 대규모의 영구 정착지여야 했다.  - P281

유럽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들은 거의 즉시 그들 자신이 ‘잠에서 깨어난다고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문구는 아메리카에는 전혀 낯선것이었다. 1805년에 이미 우리가 제5장에서 보았듯이) 젊은 그리스인 민족주의자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는 자신에게 공감하는 파리 관중에게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민족은 자신의 무지라는 무시무시한광경을 살펴보고 민족을 선조의 영광으로부터 가르는 거리를 눈대중하며 부르르 떤다." 이것은 새로운 시간에서 옛 시간으로의 이행을 드러내는 완벽한 사례이다. - P289


 르낭이 그의 민족이란 무엇인가?』(Qu‘est-ce qu‘une nation?)를 발표했을 때, 그를 사로잡은 것은 다름 아닌잊을 필요성이었다. 일찍이 제1장에서 인용했던 구절을 다시 살펴보자. 

그래서 민족의 본질은 개개인 모두가 공동으로 많은 것을 가지면서, 많은것을 잊었다는 데에 있다. 프랑스 시민이라면 누구나 생바르텔레미와13세기 미디의 학살을 잊었어야 한다.

이 두 문장은 얼핏 보기에 직설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잠깐 곱씹어보면 이 문장들이 실제로는 얼마나 야릇한지가 드러난다. 예컨대 르낭이 그의 독자들에게 ‘생바르텔레미‘나 ‘13세기 미디의 학살‘이 무슨 뜻인지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그러나 ‘프랑스인‘이라 일컬어지는 이들이 아니면 그 누가 ‘생바르텔레미‘가 1572년 8월 24일 발루아가의 왕 샤를9세와 그의 피렌체인 어머니가 개시한 지독한 위그노 학살을 가리킨다는 것을, 또는 ‘미디의 학살‘이 길게 줄지어선죄 많은 교황들 중 그 죄가 더 깊은 축에 드는 인노켄티우스 3세의부추김 끝에 피레네 산맥과 남부 알프스 산맥 사이의 광활한 지대에 걸 - P295

쳐 저질러진 알비파 교도의 절멸을 가리킨다는 것을 곧바로 이해할까.
르낭은 이 사건들 자체가 300년 전과 600년 전에 일어났는데도 독자들의 머릿속에 ‘기억‘되고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 기이하다고 생각하지도않았다. 또한 (잊었다 (doit oublier)가 아니라 ‘이미 잊었어야 한다‘ (doitavoir oublié)라는 단정적인 구문도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이는 국세법이나 징병법에 사용되는 불길한 어조로, 옛 비극들을 ‘이미 잊었어야 함‘이 현대 시민의 일차적 의무라는 점을 시사한다.  - P296

시조(Originator)가 없기에 민족의 전기는 복음처럼 기나긴 씨뿌림과 생식의 사슬을 통해 시간을 타고 내려가며‘ (down time) 쓸 수 없다. 유일한 대안은 베이징 원인이든, 자바 원인이든, 아서 왕이든, 고고학의 등불이 알맞은 빛을 내려주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쪽을 향해 ‘시간을 타고 올라가는‘ (up time) 형식으로 전기를 빚어내는 것이다.  - P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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