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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 관하여 ㅣ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김하현 옮김 / 윌북 / 2025년 7월
평점 :
몇 달전이었나 정수리에 흰머리를 처음 발견하고 순간 철렁했던 기억이 난다. 몇 년전만 해도 동안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이제는 웃으면 눈가에 주름이 진하게 잡히고 팔자 주름은 말할 것도 없게 되었다. 조금만 무리하면 ‘아이고야...‘ 하는 소리가 나오니 나이듦에 대한 화두는 이제 자연스레 피부로 와닿는 주제가 되었다.
이 책은 손택이 여성에 관해 언급한 에세이들을 묶은 것이다(일부 벗어난 글들이 있는 것 같지만).
신체적 노화는 성별의 구분 없이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유독 여성에게만은 외모 지적이 뒤따르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여성은 나이가 어리든 들든 왜 하나같이 외모에 대한 언급이 끊이지 않는지.
우리가 물려받은 아름다움 개념은 남성이 발명한 것이며 (더 우월하고 심오한 자신들의 가치를 지탱하기 위해) 지금도 거의 남성의 손에 관리되고 있다. 남성은 이 체제에서 용의주도하게 자신을 배제한다.
이 문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이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건만 나도 모르게 그 기준에 동조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여자다움‘이라는 기준도 그렇다. 여성은 반드시 이래야 하는 기준이 나를 오래도록 괴롭혔었다.
어딜 가도 변명을 해야 하는 일이 잦았다. ˝남자인가(요)?˝ 질문을 받았던 적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답변을 하면서도 ‘왜 내가 이런 변명을 해야 하는 거지‘ 화가 나는 것이다. 여성이면 화장을 하고 치마를 입어야 하며 상냥해야 해야 한다 등등등. 돌이켜보면 부모님, 특히 어머니는 내게 여자다움을 강요하신 적이 많았던 것 같다. 너는 너무 딱딱하고 섬세하지 않다. 나긋나긋하게 굴어라 등등... 어머니의 그 지시에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반대로 행동했던 적이 많았던 것 같다.
사실은 내가 이렇게 오래도록 일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결혼을 한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어떤 것을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살아왔다. 어차피 인간은 어떤 순간이 되면 혼자일 수밖에 없는데 그때 누구에게 의지해야할 생각을 해선 곤란하니까. 물론 여성이 선택할 직업에 대한 고정 관념이 존재하고 여성의 직업적 능력에 대하여 색안경을 끼고 보는 시선은 여전하다. 이는 제도적 시스템이 동반되어야 하겠지만 그러기 위해서 여성들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진출하여 나가서 자기 주장을 할 필요가 있다.
여성은 그저 친절한 것이 아니라 현명해지기를 염원할 수 있다. 그저 쓸모 있는 것이 아니라 유능해지기를, 그저 우아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기를 원할 수 있다. 그저 남자와 자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야심을 품을 수 있다. 여성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나이 들며 이 사회의 나이듦의 이중 잣대에서 비롯된 통념에 적극적으로 불복하고 저항할 수 있다.
더 많은 직업의 기회를 열어젖히고 어린 자녀를 맡길 무료 보육시설을 세움으로써 돈 벌 가능성을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 일은 한낱 선택지이거나, 가정주부와 어머니라는 더욱 흔한 (그리고 규범적인) ‘커리어‘의 대안이어서는 안 된다. 대다수 여성이 남성과 마찬가지로 일하고,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경제적으로 독립하는 것이 반드시 요구되어야 한다. 일하지 않으면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는 고리를 절대 끊을 수 없다.
앞선 이런 글들도 좋았지만 나는 추가적으로 특히나 아래와 같은 글들이 좋았다.
우리가 역사의 연속체 위에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해요. 이때 우리 뒤에 놓인 과거는 무한히 두텁고 현재는 면도날처럼 얇습니다. 미래는, 음 문제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시간을 과거와 현재, 미래로 나눈다고 한다면, 마치 세 부분이 현실에서 동등하게 나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과거가 셋 중 가장 실질적이에요. 미래는 어쩔 수 없이 상실의 축적이 되고, 우리는 모두 평생 죽어가고 있어요.
과거에 ‘해석‘이라는 공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적어도 과거의 나는 글이든 사진이든 남아 있는 기록을 통해서 보관되어 들여다볼 수 있기에 인식의 매개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에 반해 현재와 미래의 나는 인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당장의 현실을 파악하고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물론 종착지는 죽음이지만). 손택이 과거를 실질적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런 측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제 생각에, 옹호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지성은 비판적이고 변증법적이며 회의적이고 단순화를 거부하는 지성이에요. 갈등을 완벽히 해결하려 하는(즉 갈등을 진압하려 하는) 지성, 조종을 합리화하는 지성(물론 공상과학 소설의 주요 전통에 계속 출몰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속 대심문관의 훌륭한 주장처럼, 그 명분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입니다)은 내가 생각하는 규범적 지성 개념이 아니에요.
손택이 말하는 지성의 개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진정한 지성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일방적으로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질문하고 심문하며 끊임없이 회의하며 나아가는 과정, 그것이 지성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일부 챕터에서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다루며 전체주의와 미학이 양립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는데 마침 파시즘에 관한 책을 읽고 있어 더욱 눈에 들어왔다. 독일의 나치즘이 발돋움을 해 나갈 때 레니 리펜슈탈이 만든 예술은 이에 동조하고 협력하고 선전하는 데 쓰였다. 그녀는 1934년 9월 히틀러의 요청으로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제6차 나치당 전당대회를 촬영한 영화 〈의지의 승리(Triumph des Willens)〉를 만들었고 1936년 열린 베를린 올림픽을 기록한 영화인 <올림피아>를 만들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으로 몰린 그녀는 자신이 정치와 무관하고 영화(예술)적 이상을 좇았다라고 변호했다. 예술(미학)과 도덕은 구분되어야 하는가, 예술은 정치와 구분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국가사회주의는, 더 나아가 파시즘은, 삶이 곧 예술이라는 이상, 아름다움 추종, 용기에 대한 맹목적 숭배, 공동체에서 느끼는 황홀경을 통한 소외의 해소, 지성에 대한 거부, (지도자를 부모로 둔) 인간 가족처럼, 다른 기치 아래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는 다양한 이상을 옹호한다.
쓰다 보니 이도 저도 아닌 잡다한 글이 되버렸는데 아무튼 이번에 나온 <여자에 관하여>가 국내 초역본이라고 알고 있어서 더 값진 독서 경험이 되지 않았나 싶다. 손택은 여성이 성별이란 고정 관념에 갇히지 않고 개인의 권리를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 같다. 손택과 같이 깨어 있고 나아가려는 여성들이 더욱 많아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