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 민주주의 개념으로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다 ㅣ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7년 8월
평점 :
한국사 민주주의 시리즈 중 그 두번째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다만 시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시점부터라 다른 독립운동사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유추하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로 조선인에 철권을 휘둘렀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을 두는 정책을 시행했다. 억눌려왔던 조선인들이 3.1운동 때 폭발한 것이다(여기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1권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키워드를 목차로 구성했다. 자치, 주체, 권리, 사상, 정의, 연대, 해방이다. ‘해방’은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라기보다는 독립운동의 끝에 맞이한 결과에 가깝지만 독립운동사와 관련지으면 떠올릴 수 있는 제목이다. 이 키워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단체, 사건, 운동, 사상을 배치하였다. 조선처럼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나라는 봉건주의와의 결별 뿐 아니라 제국주의와의 투쟁도 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주권 ‘자치’를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헌법으로 내세웠다. 총 다섯 번의 개헌을 통해 공포된 헌법은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주권재민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겼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식민지 조선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를 상대로 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노력을 벌였다. 1921년에는 중국으로부터, 1940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벌였으나 사실상 승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졌고 신간회는 합법적인 범위 하에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 주도하여 자치 운동을 벌였다. 만주, 미국, 연해주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은 자치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1920년대는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가 들리던 시기였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나서자 조선총독부는 경성 시대에 휴교령을 내린다. 그러나 학생들은 고향에 내려가면서 운동 소식을 전했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전국에 운동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초등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항거했다. 이후 벌어진 광주학생운동 시위는 전국을 넘어서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까지 퍼졌다. 노동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은 소유주를 상대로 자체 운동을 벌였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직업별로 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는 계급 투쟁의 디딤돌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노동자 보호는 커녕 노동 운동과 노조를 불법이라고 치부하고 탄압하였으며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신여성이 등장한 이후 여성 해방과 인권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청년은 민족을 근대화시키고 문명화시킬 장본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소년은 방정환이 인격을 부여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에 맞서는 언론 수호 ‘권리’ 찾기 투쟁이 있었다. 천도교가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창간 시점이 절묘하다. 3월 1일에 발행된 덕분에 신문에 3.1운동 소식을 알릴 수 있었고 이것이 시위 확산에 도움을 준 것이다. 3.1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조선총독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과 몇몇 잡지 발행을 허가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언론 검열은 더 강화되었고 언론인에 대한 탄압도 심화되었다. 이에 언론계는 신문지법과 출판법 개정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전국기자대회를 열어 규탄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인간해방과 평등 해방을 꿈꾸며 만들어진 형평사는 호적 정정 운동을 하고 아동의 취학, 자녀 교육, 사원 교양을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형평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계급과의 연대를 이끌려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육 운동은 특히 활발했다. 1885년부터 초등학교 의무제를 실시하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1940년 이전까지는 의무교육에 대한 공적 제도가 없었다. 이에 공립보통학교 설립 운동을 벌였다. 대학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통해 민립대학기성운동을 벌였고 공립 대학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1925년이 되어서야 경성제대를 허가했다. 농촌 계몽 운동, 노동자 교육, 여성 야학, 서당 개량 운동 등 다양한 민중 운동도 벌였다.
식민지 시기만큼 다양한 사상이 오가던 시기도 없을 것 같다. 저항의 동력이 된 민족주의는 민족 개조 논쟁 이후 경제적 민족 담론이 생산되며 타협적 민주주의 대 비타협 민주주의로 분화된다. 기본적인 민족주의에 조선의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과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이 주도했다. 독립운동계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소비에트 건설의 선후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이 달랐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거부한 채 반제국주의, 반파시즘을 주장했다. 직접혁명에 의해서만 사회혁명이 가능하며 정치혁명은 권력의 교체에 불과하다 여겼다.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에 입각한 대안의 가치로 민족을 전제로 하되 민주주의에 의한 민족의 자치를 표방했다. 다만 민족주의 진영은 민주주의를 일본과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면 사회주의 진영은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꿈꾸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평민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이 있다.
‘정의’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중요한 가치였다. 사상 검증을 한다며 조선총독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였고 고문을 비롯한 비인권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독립운동가의 후기에 따르면 고문으로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며 감옥은 죽음의 집이었다고 한다. 한용운, 유관순, 김창숙, 오동진 등의 옥중투쟁기는 책에 언급된 부분만으로도 감히 상상할수조차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식민지 조선은 행정권이 사법권보다 우위에 있어 재판소는 조선총독부 명령에 의해 조직되어 검찰 권한은 막강했으며(이때부터…) 판사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조서 재판이 이루어지기 일쑤였기에 법정투쟁은 조선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변호사들은 조선변호사협회를 만들어 사회 단체와 연대하여 사회적인 이슈 사건을 해결했고 신간회를 주체적으로 이끌며 사회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허헌, 김병로, 이인은 특히나 기억해야 할 변호사들이다.
3.1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하여 선례를 남겼는데 ‘연대’ 투쟁의 시작이 되기도 한 사건이다. 이후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더 조직적인 연대 운동이 이루어졌다.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좌우파의 연대가 끊임없이 시도되기도 했다. 한중 연대를 비롯한 국제 연대 등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도 시도되었다. 평화를 원했던 동양 평화론자 안중근, 여운형도 있었다.
‘해방’은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민 민주주의, 반공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형태는 각기 달랐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였다. 통합 가치를 생각한다면 신민주주의가 조선에 정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백남운은 인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강조했다. 배성룡은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토지 산업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안재홍은 초계급성을 강조한 사회 통합을 주장했다.
이처럼 저자는 독립운동이 민주주의 운동이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