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짧은 소련사 - 러시아혁명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순식간에 사라진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현장
실라 피츠패트릭 지음, 안종희 옮김 / 롤러코스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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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류 역사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삶이 그렇듯이, 인류 역사에서 불가피한 사건은 거의 없다고 본다.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정치철학자들이 고전적인 문헌을 참고해 다룰 수 있지만 나는 다른 관점, 즉 역사인류학자의 관점에서 접근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원칙적인 의미가 무엇이든, 1980년대에 어설프게 명명된 ‘실존하는 사회주의‘가 소련에 실제로 등장했다.

소련의 근현대사를 압축하여 놓은 책이다. 1922년부터 1991년까지의 주요 흐름을 훓고 있다. 비단 역사적 사건에 대한 나열과 소개에만 그치지 않고 관련 인물과 사건에 대한 평도 실어 놓았다. 이것이 독자별로 장점이자 단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소련의 역사에서 볼셰비키와 사회주의 체제의 등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저자의 말처럼 사회주의 체제의 구성과 정치적 의미를 분석하는 것보다는 인류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소련의 사회주의의 정점이 언제였는지 생각해본 적 있었는데 이 책은 그 정점을 1980년대로 보고 있다(오히려 나는 미소 경쟁의 정점이었던 1950-60년대를 생각했었는데-길게 본다면 1970년대까지). 경쟁적인 냉전 체제가 한꺼풀 지나간 뒤 소련 사람들의 삶에 사회주의가 자연스레 스며들었기 때문이라고. 사회주의는 소련의 종식으로 일단락되지만 러시아로 전환되는 과정까지의 도입 부분의 역사도 조금 다루고 있다. 특히 푸틴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설명하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푸틴이 권력을 강화하고 전쟁을 유지하며 세계를 불화에 빠트리려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자연스레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볼셰비키는 마르크스주의자들로 근대주의, 합리주의 신봉자들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에 적대적이었고 비러시아인의 민족주의를 권장하였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이는 볼셰비키 지도자 세력 중 다수가 비러시아인들이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방증이 가능하다.

혁명 초 주역이었던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을 비교하는 대목은 언제 읽어도 흥미롭다.
트로츠키는 주로 전형적인 지식인으로 묘사가 된다. 레닌은 이론가이자 연설가로 이름을 드날렸다. 물론 세 사람 중 마지막에 권력을 쥔 자는 결국 스탈린이었다. 레닌과 트로츠키 모두 스탈린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보통 유언장에서 남을 평가하지는 않는데 레닌의 유언장에 묘사된 스탈린은 부정적이었다. 특히 트로츠키는 스탈린을 저급하고 상스러운 인물로 바라보았다.

스탈린의 국가 체제 변혁은 전방위적이었다. 5개년 계획에 따른 강제 산업화, 농업 집단화, 문화 혁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농촌에서는 산업화를 위해 한 자금 조달이 농민에게 압박을 가져왔다. 이는 식량과 소비재 부족을 초래하여 수십년간 농업의 발전을 저해했고 농민을 소외시켰다. 도시에서는 초반에 반짝 산업이 발전하기는 하였으나 막대한 비용을 초래하면서 산업 원재료가 부족해졌다. 결과적으로 농촌에서든 도시에서든 그의 경제 정책은 모두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대숙청으로 문제가 된다고 여겨진 대부분의 인물이 수면 아래로 사라졌고 문화 혁명을 통한 정치적 권력화와 영웅주의화가 이루어졌다.

스탈린 이후 후계자 투쟁이 이어진 그 결과 서열 5위에 불과하던 흐루쇼프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 스탈린에 의한 독재 체제가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정치 형태는 집단지도체제로 가게 되었다. 흐루쇼프는 즉각적인 급진 개혁 프로그램을 주장하여 놀라움을 일으켰다. 정치국 동료들조차도 그의 계획의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아 인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에서나 급진 개혁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성이 따르는 것 같다. 흐루쇼프의 개혁은 그래도 꽤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사적인 공간에서 가족과 친교를 나누는 모습이 흐루쇼프 시대의 상징이었다. 그것을 통해 이른바 서구에서 시민사회라고 부르는 것, 이를테면 국가와 별도인 여론 형성 공간이 등장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스탈린 치하에서 서구 문화와 스파이의 접근을 막기 위해 폐쇄되었던 국경이 열리면서 제한적이긴 했지만 새로운 해외여행 기회가 생겨 여론 형성에 도움이 되었다.

브레즈네프 지도체제는 소련인들을 대상으로 조사했을 때 가장 안정된 치세로 기억한다고 한다. 단,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이전 시기까지다. 전쟁도 기아도 없는 평화로운 시기였으니 평범한 민중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평화를 내세우기 위해서 치러야 하는 일도 있었다. 이전 정부보다 오히려 군사비 지출 규모가 훨씬 더 커서 1985년에 1960년대 군사비의 2배를 지출했다고 하니. 미소는 여전히 조용히 경쟁중이었다. 또한 소련 입장에서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군사력을 유지하고 강화시킬 필요도 있었을 것 같다.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제로 점점 더 가파르게 지출 중인 대한민국의 군사 규모를 생각해보게 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역사는 사회주의의 편이었으나 갑자기, 겉보기에는 뚜렷한 이유 없이 엉뚱하게 흘러갔다고 이야기한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소련의 붕괴는 갑작스럽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고르바초프는 지도자 위치에 서기 전까지 중앙 정치 무대 경험도 없었던 사람이었고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니었다. 그는 소련 시스템에서 성장한 최초의 지도자였다고 볼 수 있다. 고르바초프는 해빙을 위한 점진적 개혁은 필요하지만 사회주의는 더 강화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는 호기롭게 인민대표대회를 통한 선거 시행을 발표했으나 오히려 급진파인 보리스 옐친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미 대통령 조지 H.W. 부시는 고르바초프와 소련의 존속 지지를 표명하였으나 이미 내부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데다 동유럽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도 혼란해진 상황이 더해져 모스크바 권력은 대폭 줄어든 상황이었다. 부시는 미 의회의 압력과 우크라이나의 로비로 인해 물러나게 되었고 옐친이 이끄는 러시아공화국은 소비에트연방의 핵심 공화국으로 올라섰다. 결과적으로 소련은 우크라이나가 연방을 탈퇴하고 미국이 묵인하면서 해체의 길로 갔다.
나는 다민족 연방 체제인 소련이 무너진 반면 러시아 공화국이 분열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이는 옐친과 뒤이은 푸틴이 민족 분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긴 지도자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어떤 민족이라도 분리를 허락하는 순간 쇄도할지 모를 위험 요소를 원천봉쇄하기 위함이겠지.

푸틴은 2020년 한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같은 민족인데도 분리되어 있음으로 인한 손실을 강조한 바 있다. 2022년 일어난 전쟁은 여전히 진행중이다.

소련의 역사를 빠르게 훑어볼 수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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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5-05-29 21: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련, 소비에트 연방의 줄임말이겠죠?
오랜만에 이 이름 보네요.
옛날엔 아무 의문 없이 받아들였는데,,, 갑자기 생소해서 이름의 의미를 생각해보네요^^

거리의화가 2025-05-30 06:41   좋아요 2 | URL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요^^ 소련이 무너진지 꽤 되었는데 러시아의 행보는 여전히 크게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새파랑 2025-05-30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련(러시아)의 근대사는 언제나 흥미로운거 같아요~! 문학이든 정치든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전에 공부도 많이 했었는데 ㅋ 읽어보고 싶습니다~!!

거리의화가 2025-05-30 09:46   좋아요 1 | URL
새파랑 님은 러시아 작가 소설 많이 읽으시니까 관련 역사를 읽으시면 훨씬 도움이 되실 것 같아요^^ 역시 이전에 공부를 하셨군요! 멋집니다^^
 
이재명의 길 - 소년공에서 대선후보까지, ‘그들의 악마’ 이재명이 걸어온 길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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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이란 사람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그 궤적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이 그의 과거를 있는 그대로 담아냈는지는 솔직히 알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적어도 당사자를 그동안 현재 매스컴에 비춰지는 모습으로만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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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의 고전 - 스스로 배우는 방법을 익히기 위하여 상냥한 지성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외 지음, 정지인 옮김 / 유유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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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서문을 읽다 공감했다. 독자가 이 책을 접어들었다면 공부에 관심이 있거나 적어도 고전 읽기 등에 욕심이 있을 것이라고. 이 책은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공부에 관한 이야기를 설파한 지식인을 소개하며 그의 대표작을 이야기한다. 소개하는 내용이 책인 경우도 있지만 논설문인 경우도 있다. 길(안내)인 만큼 핵심 부분을 간추려 소개한다. 고전을 안내하는 책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독자의 마음에 들기란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는 얇은 페이지 수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는다면 꽤나 도움이 될 책이라 생각한다. 다만 서양 지식인만 다뤄지는데다 이들이 신 중심의 기독교 세계관에 빚을 지어 사고하는 시대에 살았다는 점을 감안하며 읽어야 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새뮤얼 존슨이었는데 그가 말하는 바는 구구절절 공감이 갔기 때문이다. 

먼저, 도서관은 쓸모 없는 곳이며 능력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도움 없이도 자신이 스스로 다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책만 들여다보는 일은 쓸데 없이 기억력만 소비하는 일이라고 말한다)에 대해 일침을 놓는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이 지혜롭다 여기며 자만하는 사람이라고. ‘책은 대체 왜 읽어요? 도서관엔 왜 가나요? 책에 왜 그렇게 돈을 쓰세요?’ 하는 이야기를 종종 들을 때가 있는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모든 것을 능히 다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동영상에서 얼마든지 그런 정보를 소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두 번째로, 그는 베이컨의 공부와 독서를 인용하며 독서와 글쓰기, 토론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물론 독서를 통해서 앎을 얻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독서의 목적이 지식이나 지혜가 아닌 다른 목적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만약 앎을 목적으로 한 독서를 하고 있다면 책에서 얻은 앎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 누군가와 그 책에 대해서 토론해야 하고 자신의 생각을 꼭 기록해야 한다. 책 읽는 시간이 아까워서 요즘 ‘주로’ 읽기만 하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반성했다. 읽고 쓰고 나누기, 기본이지만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마침 비코의 <새로운 학문>을 읽고 있었는데 이 책에서 다뤄져서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 시대도 청소년의 공부법에 문제가 많았나보다. 누가(부모가) 강요하거나 떠먹여주는 공부를 왜 하는가를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향이 어떤지 어떤 공부를 해야 하는지 목적 의식이 없는 공부를 하다 보니 떠밀리듯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인데 놀랍도록 통찰력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다(어릴 적 나도 스스로 좋아하는 공부가 무엇인지 주인 의식을 갖고 했다면 지금 좀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코는 타락한 인간 본성을 위해서는 학문과 지혜에 도움을 구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혜는 세 가지 방법으로 얻을 수 있다. 이는 격조 있게 말하는 것(바른 말을 쓰고), 확실히 아는 것,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 같지만 이를 모두 지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리고 과거의 일을 올바르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의무를 잘 수행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결국 그의 말에 의하면 이는 도덕과 신학의 가르침이다. 


공교롭게도 앞에서는 세네카가, 뒷부분에서는 세이어즈가 자유학문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중세의 공부 법인 리버럴 아츠(3학 4과)는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 통찰력을 던져주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특히 세이어즈는 2차 대전 직후 영국의 교육 개혁에 대하여 비판하며 과거의 자유학문(리버럴 아츠)에서 해결점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교육이 지나친 전문화로 매몰되어 있다는 지적이었다. 4과가 과목들이라면 3학(문법, 변증술, 수사학)은 4과를 배우기 전 예비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3학은 배움의 도구를 제대로 사용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한 학문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고려해야 하는 과목이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 다양한 교양 수업을 듣지 못한 것을 후회하곤 한다. 지금의 대학은 과목을 가르치는데만 집중하고 사고하고 논쟁하고 결론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사고하고 논쟁하고 결론을 표현하는 방법이 바로 3학의 핵심 내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배우지 않고 오로지 기술(과목)만 배운다는 말이다. 비단 당시의 교육만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 관심이 가는 저자 또는 관련 저작을 찾고 더 나아간다면 이 책을 통해 얻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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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27 0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부에 관심이 있거나 적어도 고전 읽기 등에 욕심이 있을 것에거 앗 나는 아니구나 합니다. ㅠ.ㅠ

거리의화가 2025-05-28 08:49   좋아요 2 | URL
이 책 어렵지가 않아서 바람돌이 님은 순삭으로 읽으실 책이에요. 교훈적인 내용의 글입니다^^
 
패브릭 북마크 - 고흐 꽃 피는 아몬드 나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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빳빳하지 않고 유연해서 좋다. 내가 산 건 고양이가 발을 물 속에 집어넣는 그림인데 예뻐서 보는 맛도 있고 무엇보다 손잡이가 있어서 편리하다. 강렬한 붉은 색이 뜨거운 한여름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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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5-05-24 1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네요 🥰

거리의화가 2025-05-26 21:15   좋아요 0 | URL
네 실용성은 평가하기 어렵지만 확실히 예쁘긴 합니다^^
 
[eBook]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 역사에 연루된 나와 당신의 이야기
조형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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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인을 몇 년 이상 구독하면서 매주 꼬박꼬박 읽지는 못하지만 관심 가는 코너들이 있다.
저자도 시사인의 한 코너를 맡아 연재를 해왔던 칼럼들을 모아 이 책을 펴냈는데 나도 그 애독자 중 하나였다.
매주 시사인을 정독하지는 못해도 그 코너만큼은 꼭 읽고 넘어갔으니 말이다.

이 책은 역사에 대한 관습과 통념에서 벗어나서 다르게 생각해보자 제안한다.
예를 들면 제국주의 국가였던 독일과 일본에 대한 전후 인식과 태도에 대해서 말이다.
일본은 자신을 전범국가라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 코스프레하고 있는 반면 독일은 그래도 사과라도 하고 반성이라도 하지 않았느냐는 우리의 통념 같은 것 말이다. 과연 그렇게 단순할까?

이 책은 다양한 지역의 역사를 다루는데 지리적 범위가 따지고 보면 전 세계를 아우르는 만큼 역사도 그만큼이나 다양하다.
챕터마다 한 지역의 역사만을 이야기하지 않고 다른 나라의 비슷한 역사를 가지고 와 비교하여 제시해주며 말한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독자로서는 질문에 대한 답을 고민하면서 생각하고 관련 자료를 찾게 된다.

저자는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으면 한다고 했다.
하지만 각 챕터의 역사에서 다루는 사건이 하나만이 아니고 관련 인물도 많다 보니 읽는 일이 만만치는 않다 여길 것이다.
그래도 괜찮다. 인물의 이름을 다 기억하지 못해도 사건을 다 파고들지 않아도 ‘오~ 이런 인물도 있었어? 이런 사건도 있었어?‘ 또 ‘아... 이렇게도 연결지을 수 있구나.‘
이런 생각을 얻을 수 있다면 저자가 의도하고자 한 바가 독자에게 가 닿는 거라 여긴다.
나 또한 칼럼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역시 책으로 읽을 때도 챕터당 기억할 거리가 만만치 않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소개한 역사 속 빚어낸 사건과 인물이 흥미로워서 흡인력 있게 읽을 수 있었다.

리샹란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공교롭게도 몇 달전 한중일 근대 시기의 예술인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었다. 그때 그녀를 알게 되었기에 보자마자 반가웠다.
그녀는 만주국 배우이자 가수로 중국, 일본, 조선 삼국에서 모두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고위급 관리가 그녀의 팬을 자처했다고 하니(팬클럽이 있었다고) 든든한 후원으로 활동 내내 승승장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전쟁이 끝나고 부역자로 체포되었는데 이때 그녀는 자신의 실제 국적이 일본인임을 고백한다. 중국에서 추방당할 위기였는데 이것이 그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일본에 돌아가서도 몇 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헐리웃에 진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후에는 방송인으로 얼마 간 활동하다 정치인으로 변신하기도 했다. 나는 뒷 내용에 사실 놀랐는데 1990년대 위안부 고백이 시작되었을 때 위안부를 위한 운동가로 활약했다고. 만주국에서 노래를 하고 영화를 찍어 부역이 있었던 사람이 이런 활동을 했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그녀가 심적으로나마 빚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떨쳐내려는 의도였을까… 생각해보게 만든다.
추가로 언급할 인물은 진비후이(일본 이름으로는 리샹란과 이름이 같은 가와시마 요시코)다. 그는 청 황실의 친왕인 숙친왕의 14번째 딸로 태어났으니 그야말로 금수저였다. 그러나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 첩자 노릇을 하며 특급 인재로 대우받았다고. 오죽하면 그녀의 별명이 동양의 마타하리, 만주의 잔다르크일까. 리샹란은 일본 국적이라 매국노 처벌을 받지 못했지만 진비후이는 매국노로 1948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책의 제목과 동명인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는 어느 면으로 뜯어보나 참으로 비극적인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태국-버마 전선 철도 공사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무척 위험한 난공사로 악명이 높았다. 이곳에 조선인 포로감시원이 약 천여명이 투입되었음은 이학래의 회고록 등을 읽었던지라 이미 알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에 최근 들어 고백한 영국 포로 부대원이었던 알리스터 어쿼트라는 사람의 회고록을 언급한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담은 영화가 사실을 포장한 부분이 많다고 설명한다. 아무래도 제국주의 국가였던 일본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지 않았나 하고 말이다. 영화는 습윤한 기후, 열악한 환경에 대한 상황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포로들에 대한 가혹 행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고. 특히 조선인 포로 감시원들은 악질적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또 그들 모두가 악질은 아니었고 일부는 그들에게 동정을 표현하기도 했다는 것이 꽤나 인상적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개인이 어떤 집단에 속하여 단체 생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모두가 다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집단의 정책이 잘못되었음이 분명한데도 동화되어 잘못인지 인지조차 않고 가학 행위를 하는 경우의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구의 시선이 동양을 지배하던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은 세계대전 이후에도 한참을 이어졌다. 이를 그린 문화 예술 작품에는 무엇이 있을까. 가장 이른 시기 동양 여성에 대한 서양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그린 <나비부인>이 떠오를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의 기원을 따라가보면 <국화부인> 소설이 있다. 해군 장교를 지낸 피에르 로티가 1885년 일본 체류 당시 35세 나이에 18세의 일본 소녀와 일종의 계약결혼을 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결혼 계약에 들어가기 전 로티는 곧 자신이 프랑스로 돌아갈 몸이며 그 뒤에 소녀는 바로 일본인 남성과 재혼하게 될 것임을 양측이 인지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1880년 <로티의 결혼>을 발표하고 이 작품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 나비부인은 이 모티브를 따와서 극화시켰던 것이다.
이후 베트남 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미스 사이공>이 있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미 해군 크리스는 사이공에 있던 한 클럽에서 바걸로 일하던 베트남 소녀 킴을 만나 결혼해서 아이까지 가졌지만 이후 그는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녀와 아이만 남고 만다는 이야기. 한편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을 영화화한 <지옥의 묵시록>도 있다. 소설 속 배경은 19세기 콩고였는데 영화는 이를 베트남으로 변경했다. 정글에 갇힌 병사들은 플레이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고… 아무튼 정글에서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공포 때문에 병사들은 미쳐간다는 이야기다.

사할린 한인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나 궁금했는데 덕분에 잘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사실 얼마 전 읽은 책을 통해 이들에 대한 역사를 추가로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현재 사할린에는 총 인구의 5.5%로 약 3만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 어쩌다가 그들은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을까? 러일전쟁 때 승리한 일본은 사할린의 남부 땅을 얻어 그곳을 식민지화했다가 1943년에 본토로 편입하였다. 최초 한인 이주민들은 함경도에서 연해주로 일부 건너간 사람들이 정착했다. 두 번째는 조선 내 일자리가 없어 자발적으로 떠난 경우다. 세 번째는 강제 징용으로 가게 된 경우다. 그렇다면 해방이 되었음에도 이들은 왜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을까. 1946년 미소 간 협정이 이루어졌으나 귀환 대상은 일본인만이었고 조선인은 호적이 조선이라는 이유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1957년에서 1959년까지 진행된 소련과 일본 간 협상 때도 조선인은 논외 대상이었다. 그후로 수십년이 지난 1990년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가 이루어질 때 이들은 비로소 한국에 방문이 가능해졌다. 한국 정부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에 관심도 없는 것 같고 그들의 귀환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조차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진다. 사할린 한인들은 이제 몇 세대가 지나갔을테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넋놓고 있어도 되는건가하는 생각을 했다.

추가로 한 두개의 내용만 더 언급해보자.

우선 근대 시기 과학과 제국의 시대였으나 조선의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과학은 유용성이나 편리함에 치중해 있다는 지적은 뼈아팠다.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사이먼싱은 말한다. “기술은 삶(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자 호기심이다.”’ 우리가 받아들인 과학은 이와는 너무 거리가 멀어 보인다. 기술 만능주의, 편리하면 모든 것이 만사 오케이라는 식으로 수십년이 이어진 결과 지금 우리는 어떠한가… 곱씹어볼 부분이다.
같은 의사라는 직업을 지녔지만 다양한 길을 걸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다. 이미륵은 압록강을 건너 독일에 정착했고 <압록강은 흐른다>라는 책을 펴냈고 세계피압박 반제국주의의회 유일한 한국대표단으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박서양은 간도에서 독립군 군의 활동을 했고, 김필순은 독립 운동을, 그 아들인 김염은 중국에서 항일배우로 활동했다. 이태준은 난징, 몽골에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의료 봉사를 했다. 유상규는 오롯이 계속 의사의 길을 고집한 경우다. 그러나 그도 민중을 위한 봉사를 하다 사망했다고. 지금 의료개혁 문제로 몇 년째 환자와 의사 간 갈등이 극도로 달해 있어서인지 이들의 이야기는 울림이 깊었다.

이를 비롯하여 흥미로운 이야기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책이다. 이 책은 관련 자료를 직접 찾고 확인하면서 읽으면 훨씬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책이다.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경우는 따로 빼야하겠지만 음악 같은 경우는 책을 읽으면서 듣는다면 마치 시간 여행을 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힘이 없는 개미일 따름이라고 주저하거나 세상 일에 관심을 등한시하며 살고 있지 않나. 그러나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에서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작은 사람이야말로 역사를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성숙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 말은 노트에 적어 두고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들여다보고 싶은 말이었다. 좋은 책 감사하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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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3 14: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든 역사이든 기록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걸 실례로 알려주는 책이었어요. 그리고 각각의 순간들이 다른 장면들과 연결되는 것도 좋았고요. 저도 화가님처럼 이 책 무척 재밌게 읽었네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8:40   좋아요 2 | URL
누군가 장면을 기록하고(이것도 선택적인 기록이지만) 이것을 독자가 읽어야지만 접할 수 있는 것인데 이마저도 기록되지 않은 일들이 얼마나 많이 숨겨져 있을까 저도 그런 생각을 하며 들었어요.
증언의 경우도 사건이 일어난지 얼마 안 되었을 때는 뜨거운 감자일테니 그때는 이야기 못하다가 용기를 내어 나중에라도 밝히는 경우도 있을테구요. 이야기를 여럿 엮어내니 생각해볼 거리가 더 많아서 좋았습니다.

다락방 2025-05-13 17: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정희진의 공부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제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비록 사서 읽지는 않았지만요. 거리의화가 님 리뷰를 보니 흐음, 그렇다면 나도 한 번 읽어볼까 하게 되네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8:41   좋아요 1 | URL
아 맞아요. 저도 이 책 읽으면서 매거진 생각했었네요. 다 읽고 나서 관련 에피소드 들어야지 생각도 했었답니다.
저는 재미나게 읽었어요. 다락방 님이 읽으시면 어떨까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