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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증인 재일 조선인 - 한일 젊은 세대를 위한 서경식의 바른 역사 강의
서경식 지음, 형진의 옮김 / 반비 / 2012년 8월
평점 :
일본인에게 조선의 문제는 옛날 일이나 남의 일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늘날 일본의 성립에 깊숙이 관련된, 자기 자신의 문제입니다.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는 그것을 잊지 않도록 하는 산증인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재일조선인과 만났을 때, 이 사람은 왜 여기에 있는지 생각하고,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만으로도 일본의 역사가, 특히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역사가 보입니다. 그것이 현재의 자신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앞으로 당신이 나아가야 할 ‘앞’을 생각하기 위해 필요합니다. - P219
서경식 1주기 무렵 마침 추모를 위한 글이 올라왔다. 어느덧 1주기라니… 1년 전 그의 글을 한 번 읽어보겠다 생각했는데 어영부영 하는 사이에 1년이 훌쩍 그렇게 지나버렸던 것이다. 과거 그의 인터뷰나 칼럼, 에세이 등 조각 글을 읽어본 적이 있으나 그의 책을 완본으로 읽어보지는 못했다.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했다. 사실은 근저를 살까 생각했는데 먼저 이 책을 읽고 싶었다. 그가 오래도록 천착해온 주제이자 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주제를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러 모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우리는 ‘재일조선인’에 대해서 얼마나 알까. ‘재일조선인’ 하면 일본 사회에서 차별받아온 마이너리티 집단 정도로 여기는 사람이 수두룩하지 않을까.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재일조선인’은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고 누구인지 사실을 정확히 직시하는 것부터가 먼저다. 게다가 이 책은 관련 지식이 전무한 청소년을 비롯하여 젊은 층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여졌으면서도 ‘재일조선인’에 대한 주제의 핵심을 비롯하여 관련된 다양한 논점까지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2012년 일본에서 원서가 출간되고 국내에도 바로 그해 번역되어 출판이 되어 나온 지 한참 되었으나 여전히 그들과 관련한 문제는 해결된 것이 거의 없어서 유효한 문제이기에 시간이 갈수록 더 중요성이 더한 책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저자인 서경식은 1951년 교토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다. 어릴 적 어머니에게서 “조선은 나쁜 게 아니다.”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만 주변에서 재일조선인으로서 받는 수모와 차별을 보고 들으며 자신도 그런 차별을 받을까봐 많이 두려웠다고 고백한다. 집단 따돌림 문화가 있는 일본에서 더군다나 한 번 그런 일을 겪으면 그 트라우마는 생존과도 직결될 정도로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까.
재일조선인은 정확히 누구일까. ‘일본의 식민지 지배의 결과로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을 말한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된 조선에서 살기 어려워진 조선의 많은 사람들이 그 기간 동안 일본에 건너갔다. 1945년 이전 전쟁 막바지에 가서 짧게 정착했던 조선인들은 일부 조선에 돌아갔지만, 일찍부터 일본에 정착해서 가족과 이미 생계를 꾸리고 살게 된 조선인들은 일본에 계속 정착했던 것이다(지금은 어느덧 그 후손이 4, 5세대까지 이어졌다고). 일본에서는 ‘특별영주자’라는 자격을 가진 사람들인데 말은 특별한 자격을 주는 듯하여 그럴싸해보이나 실상은 일본인과 달리 일이 있어 외국에 나갔다 오더라도 재입국 허가가 필요하고(그 기간이 끝나면 돌아오지 못함), 중범죄를 저지르면 국적을 언제든 박탈당할 수 있는 불안정한 신분이다. 심지어 이 자격은 1991년에서야 부여된 자격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이런 제도마저도 없었던 셈이다.
메이지 시대에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를 공고히 하고 ‘문명개화’를 추진하면서 천황에게 충의를 다하고 애국심이 강한 자가 ‘충량(충성심이 있고 우수)한 국민’이라는 사고를 일반 사람들에게 주입했습니다. 구미를 본떠 다른 나라나 타민족을 지배하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정치 제도에서는 구미와 같은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일본의 ‘문명화’였습니다. - P101
일본의 허울 좋은 문명화의 논리는 구미 열강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를 따른다는 명분을 표방했으나 ‘민족(야마토)’을 강조하며 차별을 오히려 조장하는 반인권적인 행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1944년까지 조선인은 병역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투표권도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병역을 부과하게 되자 투표권을 요구하는 조선인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어, 1945년 1월에 귀족원령과 중의원 선거법이 개정되었습니다. … 그러나 제도만 개정되었을 뿐,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선거는 실시되지 않았습니다. … 외지인 조선 반도의 조선인은 1945년까지 단 한 번도 참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지만 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었습니다. - P121
1940년대 들어오면 일본과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표방했으나 1945년까지 조선반도에 있는 조선인은 외지인으로 취급되며 투표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1947년 외국인 등록령이 발표되면서 조선인은 구식민지 사람들로 일본인임을 부정당했다. 더군다나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의 패전에 대한 책임을 다루는 자리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서 대립의 영향으로 미국과 관계가 깊은 자본주의 진영 국가만 참여했다(북조선, 소련은 참여하지 못했음). 그 결과 구식민지 출신자들은 일본 국적을 상실하면서 모두 무국적자가 된다. 1965년 한국과 한일조약(?)이 맺어지면서 이들은 한국 국적 선택이 가능해졌으나 통일 정부를 염원한 이들 또는 남북 한쪽을 선택하기 어려운 이들은 무국적자로 남게 되었다. 1959년부터 1980년까지 북조선 귀국 사업이 진행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 중 10만 명이 북한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 정부가 인도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재일조선인을 떠넘기기 위한 일환이었음이 밝혀졌다고.
저자의 주장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단일 민족에 대한 강조와 국가관에 대한 문제 의식이다. 우리는 주민등록증과 여권이 없으면 어떤 것이든 할 수 없는 제도권에 묶여 있다. 내가 선택하고 싶지 않아도 주민등록증은 나의 신분을 대리하고 여권은 해외에 나가서 체류하기 위한 당연한 신분증이다. 이 둘이 없다면 나를 증명할 만한 수단은 하나도 없는 셈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이것을 왜 증명해야 하는 것인가. 내가 국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속해 있다. 국가에 속하지 않으면 이 세계 어디에서든 살기 어렵다. 난민으로 떠돌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나는 어떤 국가에 속해서 국민으로 살고 있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데도 그 조건을 맞춰 가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부당한 이야기일 수 있다.
일본 국민의 단일 민족 국가관은 국적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 국민이 아니면 인권도 없다는 이야기다. 1950년 부모가 일본인이어야 자식도 일본인임을 부여했다. 그러나 제도상만으로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1985년 개정 전까지 아버지가 일본 국민이어야 자식이 일본 국민인임을 인정받았다고 한다. 일본인으로 귀화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쳐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심지어 이는 법무 대신에게 결정권이 있는데 그 말인즉슨 재량에 따라 귀화가 결정된다는 의미이겠다.
조선 학교의 문제도 있다. 일본 정부는 일본의 학교 교육법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이 아니면 정식 학교로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전후 일본의 연합국 사령부도 일본 정부의 방침을 그대로 따랐다. 재일 조선인은 억압 받았고 조선 학교를 폐교하라는 지시가 내려오자 항의하던 재일조선인 학생이 경찰 부대에 사살당하는 일도 있었다(1948년 한신 교육 투쟁).
1965년 한일 조약이 맺어졌지만 한일간 입장 차이가 큰 상태에서 억지로 맺어진 조약이라 한계가 있다. 물론 일본 정부는 이 조약을 빌미로 현재까지도 강제 징용, 위안부 등 전쟁에서 발생한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 중이다. 이는 전범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은 3명의 재일조선인의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재일조선인 1세 문금분 씨, 재일조선인 2세 이정자 씨, 재일조선인 3세 배귀미 씨가 그 주인공이다. 저자인 서경식의 체험담도 책에 있기 때문에 사실상 최소 4명의 재일조선인이 있는 셈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명의 재일조선인의 사례를 거론함으로써 일본 사회에서 재일조선인들이 겪는 실생활에 대한 목소리를 간접적으로 들을 수 있다.
문금분 씨는 9살 때 일본에 와 시멘트 공장, 과자 공장에서 일을 했고, 열일곱 살 때 조선인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아 키웠다.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생활 속에서 교육을 받지 못해 딸들이 모두 결혼한 후 야간 중학교에 문을 두드려 배움을 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일본인이라고 해서
조선인을 그만두라고 해서
배타고 왔습니다
아이를 기를 때
기모노 입었습니다
집 얻기 위해
기모노 입었습니다
저고리를 옷장에
넣어두었습니다
이제, 저고리 입습니다
외인 등록에
지문 찍습니다
아이에게도 찍게 합니다
그래도
손주에게는 찍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가 쓴 시인데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이정자 씨는 1947년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저자와도 같은 세대로 시를 써서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교류를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녀는 단카를 쓰는데 저자도 그의 애독자라 밝힐 정도다. 짧은 구절 속에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 단카는 생각 이상으로 어려운 장르라 생각한다.
자식을 낳았네. 조국을 알지 못하는 자식을 낳았네.
어미는 맘속으로 하늘에 죄를 묻노라.
이 단카를 읽으며 마음이 내려 앉았는데 나중에 그녀의 아들이 37살에 갑작스레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저자는 황망함을 느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일로 자식을 앞세우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그 마음을 감히 짐작할 수조차 없음이다.
배귀미 씨는 재일조선인이었지만 재일조선인임을 부정하고 그들을 혐오하며 지냈다고 고백한다. 조선적 행동이 싫었고 일본인으로 동화하며 지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며 지낸 것이다. 그는 나중에 심포지엄에서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저는 다음 세대의 어린이들이, 어렸을 때의 저와 같은 생각이나 사고방식으로 현실을 살지 않기를 바랍니다. 일본 사회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며 일본에 동화하는 길을 걷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실’을 가르쳐주십시오. ‘사실’을 배우십시오. 단지 그것뿐입니다.” 사실을 배우라는 그녀의 말이 귓가를 울린다.
재일조선인에 대한 생각은 한국의 마이너리티 차별에도 여러 모로 경종을 울린다. 나와 같은 사람을 분류하고 재단하려는 순간 차별은 시작된다는 사실 말이다.
‘저 사람들은 국민이 아니니까 차별 받아도 어쩔 수 없다;는 지점에서 생각을 멈추는 것은 ‘나는 국민이니까 우대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 사람들’에 대해 상상하지 않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을 멈추는 것이며, 타자에 대한 상상력도 없어지는 것입니다. - P2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