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아닌 곳에서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1
왕겅우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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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대부분을 역사 공부에 바쳐온 한 사람으로서 나는 ‘과거’에 매혹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보려 애쓰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언제나 위압적일 정도로 거대한 세계였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 읽을 때라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것은 거창한 교훈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과거’에 대한 내 이해가 매우 치우쳐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서 있던 무대는 유럽식 역사관과 유교식 자기 수양 정신 양쪽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 P11~12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를 보는 것만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과거를 어떤 방향과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도 거시적 세계의 관점에 매몰되 정작 역사 속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에는 소홀하다. 저자는 자신(과 부모)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읽히고자 이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한 가족의 역사가 비단 개인의 역사만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1949년 싱가포르의 말라야 대학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들려준 50년 간의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어머니는 5살 때부터 그에게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외아들이어서 각별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부모는 그가 중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시 흐름에 맞춰 존 듀이의 자유주의 교육 학습법을 전수받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중국 육조 시대 전통 문학에 늘 관심을 가졌다. 이후 그는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는 수라바야 화교 학교에서 교장직에 초빙을 받아 가게 된다. 경제적 자립 기반을 찾자 그는 고향인 타이저우에 와서 부모가 골라준 여인과 결혼한 뒤 수라바야에 돌아와 가정을 꾸렸고, 저자는 1930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때 하필 불어닥친 대공황의 흐름으로 학교가 재정난을 겪게 되어 아버지는 1년 만에 사직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이포라는 곳에 중국인 학교들을 관리하는 부장학사 직을 맡게 되어 옮기게 된다. 저자는 19년 간 이포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태어난 곳은 수라바야지만 마음 속 고향이자 여러 감정이 오가는 곳은 이포(말레이시아 북부의 도시로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방도시)였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가족이 이포에서 살고 싶어서 19년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세 식구는 끊임없이 중국으로 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반복된 시도에도 대내외적 상황에 주저않아 끝내 갈 수 없었다. 저자의 가족 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 이주해서도 전통 문화를 고수하려 했기에 현지인들과 자주 충돌했다 한다. 저자도 영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편으론 세살 때부터 한자를 배우며 고전 한문 교육을 배웠다. 중국어 어휘를 늘리기 위해서 중국어 학원까지 다녔다고. 그곳 환경은 사원과 모스크가 있고 관청에서는 영어를 쓰지만 길에서는 말레이어, 사적으로는 광둥어를 쓰는 복합적인 환경이었다. 과연 중국이 중국을 떠나 망명한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중국인들은 자기들만의 단체와 사찰이 있고 축제와 사회활동을 정기적으로 조직했다. 아이들 중 몇몇은 국민당 입대를 위해 자원하러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 가족은 이포에 임시로 살고 있었기에 언제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방위 성금 모금 행사 외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전쟁의 암운은 더욱 짙어만 갔다. 1941년 이포에서도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는 곳이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에 집을 떠나 벌목장, 동굴 등 포격을 피해 한동안 도망을 다녔다. 다행히 얼마 후 지인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중국인 학살하고 공개처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때였다. 3년 간 그는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경험을 하며 실력을 쌓는다. 이포에서 살던 때와는 다르게 그는 그곳에서 많은 중국인과 부딪쳐야 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광둥어가 늘었다. 아무튼 사건도 많고 네 차례 이사를 할 정도로 이동도 잦은 시기였다. 그래도 그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 당국에 의해 원래 직장에서 교육 일을 맡게 되면서 그가 3년 반 동안 도서관 책의 정리 목록 작성 일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영어 소설을 읽으며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이사한 가족의 집에서 라디오 영어 방송 뉴스를 듣고 아침 식사 때 전쟁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이것으로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과거의 고전 한문 공부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공부 방식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얻게 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중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등 졸업장이 있어야 했던 관계로 1947년 6월이 되어서야 상하이로 향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가족은 정말이지 대가족이었다. 가족이 많은 만큼 다양한 친척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대고모의 남편은 베이징대학 도서관장을 역임했고 고궁박물원에서 고미술을 담당했다(1949년 타이완에 갈 고미술 밀반출을 도와달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사촌 중에는 한국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한 이도 있다. 타이완 진먼다오에서 군복무시 공산당을 막는 부대에 있었던 친척도 있다. 역사가 드라마틱하다보니 이렇게나 역사적 현장에서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다.
이후 가족은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는 줄곧 국민당 정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2년 혁명에 회의를 품으며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는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된데는 당시 난징정부의 행태가 큰 몫을 했다. 충칭에서 옮겨온 난징 정부는 계속되는 내전에 기아,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48년 화폐 개혁이었다. 당시 돈으로 300만 위안이 금원위안이 되었고 금화, 달러, 금괴를 금원권으로 바꾸라는 강제 명령이 내려오자 혼란과 공포가 가중되었다. 정부에 대한 실망이 깊어지고 있을 때 장제스가 미국에 의지해 공산당을 적대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몰려든 학생들의 행진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 기마경찰대가 투입되어 강제 해산에 나서자 몇몇 학생들이 다쳤다(그는 다행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2주 후 농성대회에는 반정부활동 탄압을 위해 국민당 청년부에서 보낸 깡패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400명의 신입생 중 한 명이 된 것. 그가 들어간 중앙대학 수업은 수준이 높았고 교수진도 훌륭했다. 특히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강의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전까지 부모님에게 듣거나 중국의 고전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고국에 대해서 현재적 질문을 품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통해 혁명이 전통적 혁명과 어떻게 다른지, 중국인에게 민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개념, 중국에서 공화국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지, 중국은 자본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등등을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된 데다 계속되는 내전과 불안정한 상황으로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다. 그는 그곳에 남아 2학년 진학을 위해 1948년 10월 난징으로 향했다. 그러나 11월 초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격파되고 베이징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가능한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난징이 최후의 전장이 될 것을 염려한 부모의 불안과 걱정에 이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이포도 민족해방군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비상사태로 말라야 전역의 중국인 학교에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그였기에 아버지는 그의 계속된 학업을 위해 싱가포르 대학에 진학하라고 등을 떠민다. 문제는 그곳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더는 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앞날을 계획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그가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정말이지 드라마틱하지 않나. 혼돈의 역사적 배경 속에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에는 언급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사건,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비단 한 가족의 역사로만 읽힐 수가 없는 것 같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가 가정을 꾸리고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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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2 - 중국편
정재서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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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이 시간순으로 역사를 나열하며 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곁들이는 형태라면 2권은 주제별로 나누어 신화와 전설, 신, 신이 사는 세계를 다루고 있다. 그래서 1권은 역사에 집중한다는 느낌이고 2권은 좀 더 신화적인 내용에 집중했다는 느낌이었다. 신화의 배경이 중국 뿐 아니라 한반도, 만주나 다른 지역으로 확장된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렇다고 해서 낯설지는 않다. 지역별로 차이는 있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동화로 보았던 이야기, 전해지는 이야기들 속에 그 이야기들이 녹아 있는 것이다.

시조 탄생 신화는 민족 성립의 기원과 결부된다. 우리 조상이 어떤 기원을 가지고 있는지 그럴듯하게 포장해내고 싶은 유혹은 어느 민족의 후손들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중국 민족의 시조는 동방의 동이계와 서방의 화하계로 나뉜다. 여기서 동방은 중원을 기준으로 동쪽에 있다는 의미로 역사서에서 ‘동이‘로 언급되는 지역이다. 새의 알에서 부화한 이가 시조가 되는 경우가 있다. 주몽 신화도 그렇고 만주족의 신화도 비슷하다고 한다. 그런 반면 서방인 화하계는 농업의 신인 후직이 시조로 앞선 동이계와 결이 다른 이야기를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인류 문명과 관련된 신들은 누구인가. 불을 발명한 수인씨, 농업을 일으킨 염제, 잠업을 일으킨 잠신 등이 있다. 요는 토기를 제작하였고 유소씨는 집을 만들었으며 창힐은 문자를 발명했다.
자연계의 신들은 인간의 상상이 빚어낸 산물 중 하나다. 과거 인류는 비가 오거나 가뭄이 들어나 바람이 불거나 구름이 흐르는 것을 모두 인간의 길흉화복과 관련 있다고 여겼다. 희화, 풍백, 발 등은 이와 관련된 신들이다. 동양에서 태양의 신이 여신이었다는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동방의 큰 신 제준의 아내인 희화가 그 주인공이다. 그녀는 열 개의 태양을 아들로 낳았다. 본래 이들 열개의 태양은 매일 아침 한 개의 태양이 출발하면 아홉 개의 태양이 차례를 기다리면서 순차적으로 출발하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요임금 때 규칙을 깨고 열개의 태양이 동시에 오르자너무 뜨거워져 온 세상이 불바다가 되고 만다. 이때문에 요임금의 요청을 받은 예가 아홉개의 태양을 화살로 맞추어 떨어뜨려 하나만 남기게 된 것이다.
산과 바다를 다스리는 산신, 수신들도 있다. 무라는 청요산에 사는 산신이고 하백과 복비는 강과 관련된 대표적인 신이다. 중국에는 압도적으로 산신과 수신이 많다. 동해의 신 우호, 북해의 신 우경, 남해의 신 부정호여, 서해의 신 엄자가 있다가 용왕이 출현한 뒤로 점차 그 지위를 상실하였다고 한다.
한편 사람의 수명을 관리하고 귀신을 혼해주는 신들도 있다. 별자리와 수명을 관장하는 북두성, 남두성이 있다. 북두성이 죽음을 관장하고 남두성이 삶을 관장한다. 태산부군은 태산신으로 후에 염라대왕으로 알려지는 신이다. 신도, 울루는 귀신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은 신이다. 별자리와 수명이 관련된다는 것도 흥미롭다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이상한 나라와 괴상한 사람들을 다루는데 명백히 선입견이 담겨진 시각임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거인족은 말 그대로 거인족을 말하고 과보족은 지하 세계를 관장하는 신인 후토의 자손으로 동이계 종족에 의해 숭배되었다(하필 동이계는 왜 지하 세계인가 생각했다). 고구려, 경북 영주의 고분 벽화에서도 과보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 범위는 꽤나 넓었던 것 같다. 난쟁이가 사는 소인국, 긴 팔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장비국, 날개 달린 사람들이 사는 우민국, 인어가 헤엄치는 저인국, 여자들만 사는 나라인 여자국, 남자들만 사는 나라인 장부국, 털이 많이 난 이들이 사는 모민국, 그림자가 없는 사람들이 사는 수마국 등등이 있다. 동쪽 바깥에는 군자들이 사는 나라가 있다더라 하는 이야기도 있다. 전반적으로 중화주의 시각이 담겼다고 보여진다.

기이하고 별난 사물(동물)들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새는 질병을 치료하는 역할을 하고 악재를 방지하는 기능으로 쓰이는 존재였다고 한다. 길짐승들 중에는 질병을 치료한 이서, 흉조를 막는 굴굴이 있었다. 북쪽 바다 바깥에는 말같이 생겼고 몸빛이 흰 공공거허라는 짐승과 앞은 쥐, 뒤는 토끼같이 생긴 궐이라는 짐승이 있는데 이 둘은 사이가 무척 좋았다. 궐은 체형이 앞뒤가 달라서 걸으면 항상 넘어졌기에 공공거허가 좋아하는 감초를 구해다 주는 대신 공공거허는 궐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면 그를 업고 달아났다고 한다. 진정한 상부상조가 아닌가 싶다. 근심을 없애주는 과일이 있는가 하면 하늘로 올라갈 수 있는 나무, 영혼을 지켜주는 돌을 통해서 옛사람들의 주술적 사고도 엿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곳을 이야기한다. 서방의 낙원이 곤륜산이라면 동방의 낙원은 삼신산이라고 한다. 무협 드라마 배경으로 곤륜산이 워낙 많이 나오는지라 나도 그곳은 참 익숙하다. 동양의 유토피아하면 무릉도원을 빼놓을 수가 없다. 요즘도 그런 말을 종종 쓰거나 듣곤 하는 것 같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만.‘하고 말이다. 현실은 그런 곳이 없으니 언제나 그런 이상향적 도피처를 찾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읽으면서 비로소 산해경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신화와 다른 곳의 신화 이야기도 궁금해진다. 동양 신화의 입문서로 톡톡한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사실 진정한 신화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짐승, 정상인과 비정상인의 차별이 없다. 그곳은 모두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조화로운 신화의 세계도 지배 이데올로기가 침투하면 중심과 주변이 갈등하는 장소로 변모한다. 우리는 이들 기형적 존재들을 별쭝난 인종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다양한 모습으로 긍정하는 포용적인 관점을 지녀야 한다. 한편 종족적 편견이 개입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신화에서의 수많은 변방 인종들에 대한 묘사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의 자유로움과 기발함을 만끽하게 한다. 정말 인간의 세상은 어디까지 가능할까? 중국의 먼 변방에 관한 신화는 이 물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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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서 교수의 이야기 동양 신화 1 - 동양의 마음과 상상력 읽기, 중국편
정재서 지음 / 황금부엉이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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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부터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배우기 시작하여 신화하면 서양 신화에 익숙했다. 다양한 버전의 책으로도 나오고 만화나 매체를 통해서 다루니 반복 학습 효과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굳이 배우려고 하지 않아도 제우스나 헤라, 아프로디테 등 그리스, 로마 신들의 이름과 그에 얽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습득되는 형태 중 하나였다고 느낀다. 그에 반해 동양신화는 낯설게 느껴진다. 동양신화를 이야기하는 책은 서양신화에 비해 양이나 질적으로 한정적이고 매체에서 딱히 많이 다루지도 않다보니 그러지 않았나 싶다.

이 책은 중국의 신화를 기본으로 하되 비슷한 맥락의 한국 신화를 덧붙여서 친숙함을 주는 동시에 호기심을 불러 일으킨다. 중국의 신화는 산해경이라는 기록물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방대한 양의 산해경을 선뜻 시작하기 어려운 초보 독자에게 이 책이 입문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설명도 비교적 쉬운 편이고 참고 자료로 그림 등을 많이 실어두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었다. 아쉬운 것은 절판이 된 책이라 더 이상 구할 수 없을 따름이라는 사실이다. 나도 몇 년전 중고로 구입했는데 읽어보니 구입하길 잘했다고 느꼈다.

중국 신화도 서양 신화와 시작은 혼돈과 암흑에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태초의 혼돈은 세상을 창조하기 위한 조건이라는 말이다. 반면 중국 신화를 비롯한 동양의 신화는 자연에 인격을 부여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연은 세계와 분리되지 않고 상호작용을 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조화와 상생을 의미한다 할 수 있겠다. 인간과 자연, 문명과 자연을 분리하는 것이 기본인 서양과는 출발부터 달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1권은 중국 역사가 시작되기 전 고대 시기부터 문명의 시작이라고 알려진 주나라까지의 역사와 그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준다. 반고는 암흑을 깨고 세상을 연 태초의 신이다. 인류를 창조한 것은 여와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신은 서왕모인데 그는 생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휘파람을 즐겨 부른다고 한다. 원래는 표범의 꼬리와 호랑이 이빨, 쑥대 머리에 비녀가 꽃혀 있는 모습의 반인반수 신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아름다운 용모를 가진 모습으로 인식되었다. 이는 한나라 이후 영생과 불사의 여신으로 숭배되고 특히 당나라 이후에는 사랑의 메신저 역할이 부여되면서인 듯하다. 한무제는 그녀에게 불사약을 간청했는데 서왕모는 한무제의 정성을 기특히 여겨 불사의 복숭아, 곧 선도를 내려주었다. 선도는 서왕모가 관리하는 복숭아나무로 그 복숭아를 한 개 먹으면 1만 8천 살까지 살 수 있었다 한다. 게다가 한무제 옆에 동방삭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그도 그 선도가 탐이 났는지 훔친 적이 있었다. 어릴 적 ‘삼천갑자 동방삭’을 따라부르던 기억이 나는데 아무튼 그는 그때 당시 신하 노릇을 하고 있었으나 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탈을 쓴 별의 정령이었다고 한다. 인간도 선도를 먹으면 수명이 늘어난다는데 그도 참 너무 욕심을 부린 거 아닌가 싶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선도는 나중에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에게 또 한 번 도둑을 맞는다. 불사란 예나 지금이나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여신과 인간 남성의 사랑 이야기도 있다. 중국판 이야기의 주인공인 무산신녀는 염제의 요절한 딸 요희로 초나라의 회왕과 사랑의 상대가 되었다. 아침에는 구름, 밤에는 비라는 운우지정의 고사가 전설로 지금도 남아 있다. 직녀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는 견우와 직녀 신화 속 주인공이다. 오작교 버전의 이야기가 있지만 사실 나중에는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라는 동화로 변주되어 알려지기도 했다. 이는 한국 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여러 이야기로 변주되는 이야기라고 한다.

신들의 임금은 황제로 오방(다섯 방향) 중 중앙에 위치한다. 오행 중에서는 ‘토‘로 흙을 의미한다. 황제는 벼락의 신이자 귀신과 요괴도 지배하는 막강한 신으로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겠다. 염제 신농은 남방의 큰 신으로 농업의 신이자 불, 의약의 신이다. 황제가 중앙에 위치해 중국 내에서 인기가 있다면(민족 이데올로기와도 연결된다) 염제 신농은 동방, 남방의 민족들에게 인기가 높다고 한다. 오방을 기준으로 태호(복희)는 동방, 서방은 소호, 북방은 전욱에 해당한다.

요순 시대 이후에는 실제적 기록의 역사다. 인상적인 이야기만 뽑아보면 폭군 주와 성군인 주나라의 문왕에 대한 이야기다. 상나라의 주왕은 술로 채운 연못, 고개 열매를 매단 숲에서 향락에 젖어 지냈다고 전한다. 달기는 그를 매혹하고 나라를 망친 조력자로 지목되는데 봉신연의(명나라 때 지어진 고전소설) 기록상으로는 ‘달기가 구미호로 변한 것이다‘라고 되어 있다고 한다. 그녀의 나쁜 이미지는 후대에 이것저것 살이 붙어서 인식된 탓이 있는 것 같다.

주의 건국 신화는 유교와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중화주의가 깔려 있다. 촉나라는 퉁방울눈을 가진 누에고치인 잠총에서 기원해 만들어졌다. 망제인 두우에게는 두견새의 이야기가 전한다. 별령이라는 신하에게 홍수 처리를 하러 보낸 사이 그의 아내를 탐한 두우, 돌아온 별령이 홍수 처리를 잘하고 오자 부끄러워진 두우가 그에게 왕위를 전한 뒤 은거했다는 이야기다. 두견새처럼 울었다나 뭐래나.

이를 비롯하여 재미난 이야기들이 많다.

알라딘 친구분이 쓰신 리뷰를 보고 찜해두었던 책이었는데 오래도록 묵혔다가 이제야 읽게 되었다. 이제 그분은 이곳에서 더이상 활동하지 않으시지만 책을 읽는 내내 그분을 생각하며 읽었다. 어디서든 잘 살아가실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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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란 무엇인가 - 팔레스타인 문제의 역사적 맥락과 집단학살의 본질
오카 마리 지음, 김상운 옮김 / 두번째테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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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이 난민이 된 이유, 이스라엘 건국의 의미와 그 이후의 과정, 가자 지구의 봉쇄가 의미하는 것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밝히고 있다. ‘점령은 타자의 인간성을 부정하는 폭력이다.‘ 이 문제는 인도적 문제가 아닌 정치적 문제임을 자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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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기어이 욕망하다 : 고려 안정궁주*인조 후궁 조 귀인*열녀들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2
황향주.이민정.장지연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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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획은 역사 속 여성 중 욕망에 관한 이야기다. 신체적 욕망인 간통, 타인을 저주하는 욕망이 있었던 가 하면 수절에 대한 욕망이 있다.

첫 번째 이야기는 12세기 고려 안정궁주가 주인공이다. 그는 의종의 둘째딸로 당시는 무신정변이 일어나 사회가 극도로 혼란스러운 때였다. 이로 인해 의종은 폐위되고 안정궁주의 남동생이 명종으로 즉위하였다. 그녀의 남편인 왕박은 왕씨 성을 가졌으므로 태어날 때부터 국왕의 예비 사위 자격이 있었던 사람이다. 왕박은 형과 동생이 있었는데 삼형제 모두 혼인 관계를 맺으며 고려 왕실의 일원이 되었다. 형은 인종의 셋째 딸 창락궁주와, 동생은 의종의 첫째 딸이자 안정궁주의 언니인 경덕궁주와 혼인을 것. 이처럼 과거 왕실의 근친혼은 흔했다. 가까운 중국도 그렇고 유럽의 합스부르크 왕실도 근친혼이 당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중국의 경우 자식은 부계로 계승된다는 원칙 하에 다른 가문으로 시집간 딸의 자식들은 다른 부계 가문 소속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고려는 중국과 달리 딸은 출가외인이 아니었기에 딸뿐만 아니라 외손과 사위 또한 가문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었던 점이 서로 다르다. 그리하여 동생은 제후가 된 반면 왕박은 그 하위인 제왕에 머물렀다. 왕박은 경덕궁주의 상대가 되기에는 나이차가 커서 후보군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의종이 인종의 맏아들로 동생들과 나이 차가 커 자식들도 사촌 그룹에서 연장자에 속했기 때문이다(당시 의종의 남자 조카들은 10대 초반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언니의 남편감으로 거론되었다 탈락한 인물을 배우자로 맞게 된 안정궁주는 입장이 곤란하게 되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한 결혼 생활을 하는듯 보였던 안정궁주는 어느 날 악공 가영의 연주를 듣고 반한다. 악공은 서인과 천인의 경계에 있던 신분층이었다. 고려 왕녀에게 부인으로서의 도리는 당연한 의무가 아니었다. 왕실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는 선에서 안정궁주는 무엇이든 시도하고 즐길 수 있었다. 그러나 왕실에서 악공과의 간통을 용납할 수는 없었다. 만약 안정궁주가 사대부 집의 엇비슷한 나이대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들일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생각이 들기도 한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17세기 인조의 후궁이었던 조 귀인이다. 그녀는 1630년 궁녀로 입궁하여 인조의 총애 속에 1649년이 되면 종1품 귀인에 봉해지며 궁궐의 실세가 되었다. 조 귀인은 인조의 정비인 장렬왕후에 이어 인조와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을 왕에 올리고 며느리를 저주하고자 했다. 장렬왕후를 질투한 마음은 짐작할 수 있으나 시기가 인조 사후였다는 것이 이상하다. 또한 며느리를 저주한 점도 이상하다. 장렬왕후는 일찍 사망한 인열왕후 대신 계비로 간택되 들어와 중전이 되었으나 인조의 마음은 이미 조 귀인에게 가 있었다. 인조는 반정으로 즉위하여 정통성이 부족했기에 항상 주변을 경계하였고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치러야 했으며 이괄의 난을 비롯하여 자신을 겨냥한 궁중 저주 사건이 4차례나 발생하는 건 물론 그때마다 병고를 치렀다. 조선이 아무리 유학 이념을 기반으로 한 국가였다 하더라도 과거에는 병이 저주 때문이라는 믿음이 일반적이었다. 사람이 자꾸 아프면 기력이 떨어지는 만큼 평상시의 컨디션으로 살아가기 어렵다. 인조도 그리하여 무속신앙의 힘에 기댔던 것으로 보인다. 조 귀인을 건드릴 사람은 궁중 내 없었으나 그녀는 수동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았다. 인조의 또 다른 후궁인 이씨가 조 귀인을 음해하려 했다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인조는 결과적으로 조 귀인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공식 기록에서 확인되는 ‘악녀 조귀인‘은 유학 이념에 충실한 남성과 무속신앙에 기대는 여성이라는 조선의 젠더화된 구조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며 욕망에 사로잡힌 비도덕적인 여성이 선택하는 저주라는 수단은 조선의 상층 남성들이 좀처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의 사례에서 확인되듯, 사실 그들도 현실에서는 무속신앙의 힘을 인정했다. 다만 그것을 공식적으로 표하지 않을 뿐이었다(P124).

세 번째 이야기는 주인공이 여럿으로 조선후기의 열녀 현상을 다룬다.
행실이 나쁜 부녀 및 재가한 여성의 소생은 동서반의 관직에 서용하지 않는다-경국대전 이전 경관직. 이는 조선후기 사대부가 여성들의 재혼을 막는 가장 강력한 금령이 됐다.
조선초기만 해도 여성들의 재혼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세종 때 시작된 유학 기반의 사회 체계는 성종 때 강화되고 완성되었다. 조선후기 사가의 여인은 과부가 되어도 수절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미덕인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함양 박씨는 혼인하자마자 남편이 사망하고 과부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같은 묫자리에 묻히길 원한다는 유서를 쓰고 남편의 대상 날 제수를 장만하여 제를 지낸다. 그리고 상에 온 삼촌에게 자신이 죽을 것을 알린 뒤 준비된 시각에 독을 먹고 자결했다.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었다. 이것이 세종 때 만들어진 삼강행실도의 영향인가 싶으면서도 심정적으로 온전히 이해는 가지 않았다. 18세기 초 가난한 평민이었던 향랑은 혼인 후 남편의 손찌검이 계속되자 도망쳤지만 어디서도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물에 빠져 자살했다. 당시 하층 여성들의 자살은 성폭력이 만연하던 환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한다. 일부 열녀라는 호칭을 부여받는 경우에도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 사대부 남성의 시선은 그녀들을 주체성이 있는 사람으로 봤을 리 만무하다. 하층 여성들의 열녀 현상은 성폭력에 대한 저항의 의지, 자신들의 주체성을 천명하고자 한 의지의 표출로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여성의 정절을 추앙하는 문화 속에서 자신의 행위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자, 이들은 더욱 과감히 이를 결행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조선이라는 국가권력이 부여한 규범에 에속되는 과정이었으나, 동시에 그러한 종속을 통해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P169).

특히 마지막에 본 과부살이와 열녀 현상을 욕망으로 본 시선이 새로웠다. 나도 사대부 남성의 열녀 담론의 답습론자가 아닌가 싶어 부끄러웠다. 조 귀인의 이야기도 그렇다. 무속 신앙을 믿는 것을 터부시한 사대부 남성과 임금이었지만 그들도 그 문화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고려 시대 황실에서의 연분 맺기 문제도 그렇다. 왕씨만을 고집한 것은 역설적으로 딸이든 아들이든 그 일가는 모두 황실의 일원이었기에 더 압박하는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흥미롭게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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