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브리지 중국사 11 - 상 - 청 제국 말 1800~1911, 2부 캠브리지 중국사 11
존 킹 페어뱅크.류광징 책임 편집, 김한식.김종건 외 옮김 / 새물결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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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브리지 중국사 11권 앞 부분은 청나라 말기 경제의 변화, 주변국과의 관계에 따른 중국의 인식의 변화를 다룬다. 


청나라 말 무렵 정치와 이념 체계의 파고로 중국 경제도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근본적인 경제적 변화, 근대적인 경제 성장은 자체적으로 이루지는 못했다. 

농촌은 인구가 증가하여 1인당 경지 면적이 줄었다. 보조 수단인 수공예품 생산도 값싼 면화의 유입으로 경쟁력에 밀리면서 새로운 시장을 향한 재배 작물 유형을 찾아야 했다. 공업은 제도의 미비로 한계가 있었다. 국내 교역 시장은 지방 단위로 소규모의 거래가 이루어진 반면대외 교역은 수치로는 증가하였다. 다만 상품 유통은 독점 구조를 가져 하층 노동자에게 가기 어려운 구조였다. 청 정부는 외국과 조약을 맺으면서도 관세율 조정을 과감히 하지 못해 이를 국내에서 세금 수입을 통해 이루어야 했다. 또 계속되는 내부 반란 진압으로 인한 군사 비용이 커졌고 1895년 청일 전쟁의 결과로 배상금까지 얹어져 삼중고가 되는 상황이 되었다. 


대외 관계는 급속도로 변화하였다. 먼저 1905년까지 제국주의가 첨예화되면서 서구 열강과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서 역학 관계가 변하였고 만주족에 대한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미국의 남북 전쟁이 종식되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 이탈리아와 독일이 통일되면서 전 세계의 분위기는 여러 모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1869년 중국 최초 외교 사절단이 해외로 파견되었고 그 결과 올콕 협정이 맺어졌으나 이로 인해 홍콩에 영사관이 설립되고 각종 품목에 대한 세금이 인상되었다. 또 이 때 최혜국 대우가 들어갔으며 내륙에서 외국인들이 임시로 거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1871년 타이완 원주민들이 난파당한 류큐인들을 살해한 일로 일본이 류큐에 종주권을 주장한 뒤 1879년 일본이 류큐를 합병하게 된다.

투르키스탄 초대 총독인 카우프만이 1871년 쿨자(일리) 지역을 점령한 일로 청은 1875년 좌종당을 흠차 대신으로 임명하고 신장 원정대를 파견해 1877년까지 신장 전 지역을 수복한다. 청은 이후 1884년 신장을 정식성으로 승격시켰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조선은 문호를 강제 개방하고 이후 서양과 연이어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임오군란, 갑신 정변, 거문고 점령, 동학 농민 전쟁, 청일 전쟁까지. 조선은 오랜 동안 중국과 접경국이었고 사상과 이념, 철학 체계의 영향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외교적 관계였으나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아시아의 수장 자리에서 청은 물러나야 했다(조선에 대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청일 전쟁을 아주 짧게 다루지만 전쟁에서 왜 졌는지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일사분란하지 못했던 청의 군대 체계, 이홍장의 외교력 부족, 북양 함대 사령부의 부패-군사력 문제, 정부와 백성의 단합 X).  


러시아가 중국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뤼순, 다롄을 점령하고 남만주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것을 계기로 영국, 일본, 프랑스가 조타지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청 국내에는 외국 제품이 증가하면서 농촌은 빈궁해졌고 실업난과 생활난이 더해지면서 이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을 쌓게 하는 계기가 된다. 여기에 자연 재해까지 겹치면서 못살겠다 갈아보자 하며 일어난 것이 의화단 운동이다. 

이 운동은 외국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완전히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폭발한 것으로, 내재적으로는 애국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일부 다른 역사가들은 이 운동을 동기는 타당했으나 방법은 부적절했던 일종의 원시적인 애국적 농민봉기로 간주하고 있기도 하다. - P219


일본이 영국과 동맹을 맺고 러일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는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다.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거의 틀림없이 만주 그리고 아마 몽골까지 합병했을 것이고, 다른 열강들로 하여금 영토 배상을 요구하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그러나 패전한 러시아는 발칸반도로 눈을 돌렸고, 이 지역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과 충돌해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할 장을 마련하게 된다. 이제 남만주에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일본은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독립과 영토 보존까지 위협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1905년 만주에 대한 청의 통치권 회복은 비록 일본과 러시아가 소유한 특권에 의해 제한된 것이기는 했지만 만주가 여전히 중국 땅으로 남을 것임을 보증해주었다. 1907년 4월 20일 조정은 만주족의 발상지라는 만주 지역의 특별한 정치적 지위를 종결시키고 그곳을 정식 성으로 개편하기 위한조치를 취해 쉬스창을 총독 겸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펑톈, 지린, 헤이룽장 3성에 각각 무관 순무 대신 문관 순무를 파견해 총독을 보필하도록 했다. - P238~239


서구와의 관계에 대한 중국의 관점은 1840~1895년 사이에 계속 변화했는데, 1860년 이후 그러한 변화는 한층 더 가속화되었다. 일반적으로 말해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는 1840년대의 쇄국‘ 정책에서 1860년대에는 유가의 성과 신에 기초한 ‘수신‘ 정책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근대적 외교술, 특히 국제법 사상은 이후 20년 동안 계속 강조되었다. 1880~1890년대에는 권력 정치, 특히 세력 균형론과 강대국과의 동맹론이 한때를 풍미했다. 다른 한편 1860년대 중반에는 민족의식이 등장해 날로 강력해져갔다. 1840~1860년 사이에는 상업을 이용해 오랑캐들을 견제하자는 원칙이 인기를 끌었으나 1860~1870년대에 그것은 ‘상전‘이라는 좀더 역동적인 관념에 자리를 내주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대외 정책에 대한 견해에서 나타난 이러한 변화들은 유교의 이상주의적 태도에서 실용주의적 태도로의 전환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 P327


신장 수복을 계기로 청은 실전에서 서양 무기나 자체적으로 개조한 무기의 사용성을 늘렸다. 이홍장은 직예 총독에 올라 청 최고의 군대였던 회군의 훈련법대로 다른 군대를 훈련시키게 했고 근대적 해군을 창설했다. 또 순양함을 외부에서 구입하여 북양 해군의 함대를 재정비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885년 타이완이 성으로 승격되고 유명전이 초대 순무가 되었다. 그러나 이주민과 토착민 사이의 갈등이 발생하여 조정은 유명전을 직위에서 해임시킨다(임무는 그대로 하게 했음). 


19세기 마지막 10년 청은 서구와 일본에게 겪은 충격으로 인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흐름에 휩싸이게 된다. 여러 지식인들에게서 다양한 주장들이 나왔다. 캉유웨이는 금문학의 해석을 달리 하여 유교 중심적 지향성을 앞세우며 ‘대동’의 세계, 평등주의와 보편론에 의해 지배되는 세계로 나아가자는 이상향을 앞세운다. 량치차오는 캉유웨이의 주장을 이어받으면서도 민족주의적 이상을 더했다. 옌푸는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 지향을 보였으나 다원주의적 세계관을 주장한 것이 눈에 띈다. 담사동은 중국의 전통적 질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해방시켜야 한다 주장했기에 당시로서는 가장 급진적인 것이 아니었나 싶다. 

대중 청원과 조정에는 상소문이 올라와 위로부터 개혁 요구가 빗발쳤다. 아래에서는 학회나 신문 등이 생겨났다. 


1898년 서태후는 광서제와 긴장 끝에 갈등이 폭발한다. 광서제는 캉유웨이와 량치차오 등의 개혁파의 청원을 받아들였지만 조정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백일 유신으로 조정은 황제와 소수의 급진 개혁가와 다른 한편으로는 태후와 다수의 기존 관료 간에 판이 갈린다. 서태후는 광서제를 유폐했고 훈정을 선포했으며 제3차 섭정을 개시하고 개혁가들은 숙청되어 망명길에 오르게 된다. 


근대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서구화를 의미했다. 많은 사대부들이 ‘양무‘ 운동에 찬성했던 것은 그것이 근대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서 중국을 망국의 위기로부터 구해낼 수 있다는 희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그것이 서구적이라는 이유로 ‘양무‘ 운동에 반대했다. 그것이 유가 학설을 대체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어떻게 하면 중국을 구하는 동시에 중국 고유의 방식을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에 직면한 그들은 모순적인 태도를 가질수밖에 없었다. - P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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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들의 청일전쟁 - 전쟁과 휴머니즘
조재곤 지음 / 푸른역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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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 근대사에 관한 책을 읽게 되었다. 한달 전 신간 도서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이 갔다. 돌이켜보면 국내 저서 중 ’청일전쟁’ 주제만을 다룬 책은 드물고 한국 근대사로 동학농민혁명을 다루면서 함께 보조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이 책에서 청일전쟁만을 어떻게 다룰지 궁금했다.


청일전쟁은 1894년 발발하여 1895년까지 진행되었다. 청과 일본 간 벌어진 전쟁이지만 일본이 국내 경복궁을 점령한 이후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내가 전쟁터의 한복판이 되었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청일전쟁이 진실에 가까운지는 의문이 든다. 물론 과거의 사건이기에 사료적으로 많은 한계가 있겠지만 연구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국과 일본의 연구는 일국사적 시각 또는 일국을 중심으로 한 양국간의 비교적 시각에서만 청일전쟁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같은 시기 활동했던 동학농민군에 관한 연구는 많지만 청일전쟁에 대한 이해는 상대적으로 매우 부족하다. 때문에 전체상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그간 연구의 사각지대에 있었던 청일전쟁의 전 과정을 조명하고, 보다 보편적 · 객관적 시각과 사료에 근거해 청일전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 P19


청일전쟁의 시작은 1894년 7월 23일 일본궁이 경복궁을 점령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 직전 일본에는 세 부류의 세력이 있었다. 천황가와 내각, 내각 구성원 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가 주도하는 세력, 이들과 사안에 따라 협력 또는 갈등하는 외부와 군부가 있었다. 청일전쟁은 이 중 외부와 군부의 결정이 개전의 주요 동인으로 작용하였고 오토리 게이스케 조선 주재 공사의 상황 인식과 행동이 변수로 작용하면서 조선 출병과 왕궁 점령이 결정되었다.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내각의 의견에 따라 작전을 결행하지 말라고 전달했다.)

 

일본 참모본부는 경복궁에 접근한 일본군에게 조선군이 선제 발포하고 이에 일본군이 응사한 것으로 이야기했다. 그러나 당시 현장을 목격한 일본군 장교들의 언급을 확인하면 일본군의 왕궁 침입과 그로 인한 ‘상호 교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월 23일 왕궁 수비병은 다섯 차례에 걸쳐 적극적으로 항전했다. (통설에 의하면 조선군은 일본과의 소규모 전투에서 일방적으로 패한 뒤 도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 날 독판교섭통상사무 조병직이 일본군 철수 명령을 전달했으나 오토리 게이스케는 이를 무시하고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일본군의 발포는 정당방위였다’고 변명하였다. 마지막으로 왕궁 수비병이 해산한 것은 도망간 것이 아니라 날조된 국왕의 ‘전교’를 믿고 명령을 수행한 것이다. 


일본군은 경복궁 점령을 사전에 철저히 계획 하에 진행했다. 우선 전신선 가설을 위해 (조선 전국 지도까지 제작) 한성 전보 총국을 장악했고, 서울에서 중국으로 보내는 전보를 차단하고 도성 내외를 수색하며 중국인에 대한 감시를 강화했다. 경복궁 점령 당일부터는 서울-평양 전신선을 차단한다. 

소식을 들은 조선 백성들의 피난이 이어진다. 경성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는 영사관에서 각 주요지에 순사를 파견하여 정세를 탐문하고 인부와 말먹이, 양식을 징발하여 일본군에게 편의를 제공하게 했다고 밝혔다. 당시 길거리 인민은 모두 물건을 지고 밖으로 몸을 숨겼고, 부녀자들은 10리 내외의 산중 또는 벽촌에 무리를 이루어 피란했다. 특히 평양, 황주, 순안, 중화 부근의 피해가 심해서 사방 70~80리 사이 물건은 거의 약탈을 당해 닭과 개 한 마리 없이 텅 빌 정도로 비참한 지경에 빠졌다. (P87) 


청국의 조선 출병은 1894년 6월 4일 전라도 농민 봉기에 따른 성의 함락으로 급박했던 조선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결과였다. 직예제독 예지차오와 태원진 통병 니에시청 하의 청군은 아산만의 백석포를 거쳐 아산에 들어왔다. 조선 정부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각종 비용을 제공하는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들어주었다. 이에 지방군은 그 요구를 맞춰주기 위해 백성의 고혈을 짜내야 하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일본군은 1892년 징발령을 통해 현지 조달 원칙을 적용하여 강제 징발을 감행했다. 이 과정에서 인부는 이탈하고 일부 지방관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7월 25일 경기도 남양만의 풍도에서 청일 간의 해전이 일어났고 7월 29일 충청도 성환과 아산 전투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지상전이 전개되어 이후 평안도 평양과 정주, 의주 등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진격한 이후에도 한반도는 후방 병참기지 역할을 해야만 했다. 


풍도 해전에 대해서 그간 일본과 중국에서는 많은 학술적 연구와 글들이 있었다. 일본에서는 과거에는 군국주의 일본의 국제법적 승리와대외적 과시의 대상으로 이 사건을 크게 강조해 왔다. 반면 중국에서는 일본 해군이 이곳을 먼저 공격한 뒤 뒤늦게 선전포고를 한 것을 근거로 일본제국주의의 불법 도발임을 부각해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전투가 일제의 동아시아 침략전쟁의 시발점이었다는 데는 어느 정도 의견일치가 되고 있다. - P232


풍도는 현재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풍도동으로 되어 있는 곳으로 덕적군도의 작은 섬이다. 일본의 중고교 교과서는 풍도 해전이 지도와 함께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건으로 자세히 소개된다고 한다.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풍도 해전과 성환 전투에서 청국에 승리함으로써 청일전쟁의 승기를 잡을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1894년 7월 24일 일본 함대는 아산을 정찰하고, 아산만 부근의 풍도 앞바다를 항해하고 있었다. 7월 25일 청국 함대가 일본 함대와 맞닥뜨렸다. 일본의 배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가운데 일본 함선은 청국 함대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청국 함대는 달아나다가 암초를 만나 좌초되자 군인들을 상륙시킨 후 폭파되었다. 전투 과정에서 청국군은 10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했다. 

성환 전투는 일본군이 7월 30일 성환 동북방의 고지를 점령하면서 일본군 기병이 아산 방면으로 퇴각하는 청군 보병을 습격하여 8명을 참살한 전투다. 성환 전투는 양국간 제1차 지상전으로 규모는 작았지만 그 영향이 매우 컸다. 청국군이 평양으로 밀려 올라가면서 일본군은 조선 중부를 완전 장악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언론은 청일전쟁을 일본의 자위 행위로 미화하고 조선에 대한 우월감을 강조하는 등 그들이 이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문명 개화, 식민지적 발상이 이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언론의 보도 행태는 사실과 거리가 먼, 왜곡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실체로 자리잡으며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외부에 알려지게 되었다. 


청일전쟁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이른바 ‘군신‘들을 만들어 냈는데 그 공식적인 첫 번째 주인공이 기구치고헤이였다. 시라카미 겐지로와 같은 오카야마현 출신의 그는 1892년 입영했는데,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1등졸 나팔수로 참가했다가 총탄에 맞아 사망한 것이다. 191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훈도 아이시마 카메사부로는 《심상소학수신서예어원거尋常小學修身書例語原據》의 ‘제17충의‘의 <예화 기구치 고헤이>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21연대 마쓰자키 대위는 제12중대의 전위로서 어두운 밤을 잘 이용하여 성환의 성루 앞으로 나아갔다. 기구치 고헤이는 그 첨병으로용기를 떨치며 앞장서 돌진의 나팔을 불었다. 적이 발사한 탄환이한층 더 격해지는 가운데 겨우 20여 인 만으로는 어떻게 하기 어려웠다. 기구치 고헤이는 2등졸의 몸으로 적의 앞 5~6칸까지 나아가 "앞서 나가라, 앞서 나가라"라고 나팔을 불어 우리 군의 용기를 북돋웠다. 우리 군은 이 용기에 격려되었고, 돌진하여 마침내 적병을부수었다. 이때 지금까지 계속 불던 나팔 소리가 갑자기 끊어져 괴상히 여기고 이를 보았더니 고헤이가 적탄에 맞아 용감하게 전사한것이었다. 그 시체를 정리하면서 봤더니 고헤이는 나팔을 꽉 쥐고입에 댄 채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감탄을 아니 할 수 없었다. 오호라. 충렬한 고헤이. 죽음에 이를때까지 자신의 임무를 다했다. 진실로 수천 년의 귀감이고 오랫동안 호국의 신이 되었다. - P316


성환 아산 전투의 전리품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비롯하여 일본 국내 주요도시에서 순회 전시되었다. 이후 평양 전투와 중국 관내에서의 전리품도 같은 전철을 밟았다. 노획한 탄환 중 일부는 혼성제9여단 야전포병 제5연대의 사격 훈련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 P307


성환과 아산의 전투에서 패한 청군은 평양에 도착했다. 청국군이 패배한 소식에 조선 청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댈 곳이 없는 정부는 청 정부에 신속한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2차 청국군이 추가로 들어와 평양에 합류한다. 후발 청국군 4대 군은 웨이루쿠이의 성쯔군, 마위쿤의 의군, 쭤바오구이의 펑군, 리셩아의 펑톈 성쯔연군과 지린연군이었다. 

당시 평양 사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한 기록으로 패은당의 <서경패사초략>이 있다. 그에 따르면 웨이루쿠이가 거느리고 온 병사는 산명장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외촌으로 나가서 우마와 재화를 빼앗는 것이 강도보다 심했다. 그 결과 평양의 인심이 크게 동요했다. 의주부터 평양까지의 500리 거리 연도의 백성들 재산을 약탈한 것도 거의 다 웨이루쿠이 병사들이 저지른 짓이었다. 반면 나머지 3군은 상대적으로 덜 심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양 전투가 벌어지기 전 평양성의 주민 대부분은 집을 버리고 도망가 인가에서 연기가 사라진 상태였다고 한다. 


선교리 전투와 모란대 · 현무문 전투가 평양의 3대 전투이다. 이 중 대동강 남안의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이 완승하고 일본군이 패한 것으로, 당시 청국 측이 주장하던 ‘선승후패‘ 중 ‘선승‘ 단계에 해당한다.

선교리 전투는 청국군 2,200여 명, 일본군 3,600여 명이 참여한, 평양포위전 중 육박전을 포함한 가장 격렬하고 가장 오랜 시간의 전투로 기록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 6명, 하사졸 134명 총 140명이었고, 부상자는 장교 17명, 하사졸 270명 등 총 287명이었다. 이때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도 가슴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다." 니시지마 연대장, 나가타 포병대대장, 모리 보병대대장 외 중대장 3명의장교가 부상을 입는 등 일본군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 그 결과 평양성 공격을 준비한 혼성여단과 5사단 본대, 원산·삭령지대는 전진을 포기하고 숙영지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 P466


자료에 따르면 평양 북부의 정주는 집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부서졌고, 의주는 청국군의 약탈과 방화로 3,000호 가옥 중 2,000호 이하만 남게 되었다 한다. 평양은 6만여 명의 주민이 전쟁 시 1만 5천 명으로, 안주는 3,000호가 300호로 10분의 1 규모로 줄어들었다. 성천은 650호의 가옥이250호로, 순안은 600호의 가옥이 60호로, 황해도 황주의 주민은 3만명이 6,000명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한편 서울 일본영사관 서기생 오키 야스노스케의 현지 조사 보고에 의하면 경기 북부와 황해도·평안도의 피란민 현황과 호수와 인구 감소, 경제적 파급과 후유증 등을 주요 도시별로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조사한 25개 지역은 경기도의 고양·파주·장단·개성, 황해도의 금천·평산·서흥·봉산·황주·장연, 평안도의 중화·평양·순안·숙천·안주·박천·가산·정주·선천·철산·용천·의주·곽산·삼화·용강 등지였다. 이 지역들의 호구와 인구는 전쟁으로 인해 이전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 - P536


이 책은 청일전쟁만 집중적으로 다루어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청일전쟁에 관한 자료나 출판물 등 청, 일본, 조선에서 가져온 다양한 기록물들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길 자료조사 및 정리에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하는데 충분히 그러고도 남겠다 싶었다. 오래도록 조사한 자료를 이렇게 집에서 편하게 볼 수 있다니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책은 나중에라도 참고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 같아 구입할 작정이다.  


청일전쟁 동안 조선인들은 남의 전쟁에 동원되어 협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저항을 했고 물리적 정신적 고통을 감내해야 했기에 청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인식이 팽만했다. 그럼에도 청국과 일본의 전투장이 되었던 해당 지역 주민들은 ‘유원지의’를, 동학농민군은 ‘내자불자’의 인도주의 정신을 보이고 있었다.

유원지의는 “(국적 여하를 막론하고) 먼 곳에서 온 사람을 따뜻하게 대접한 후 되돌려보낸다”는 조선의 전통적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서양인과 중국인들이 조선에 표류할 때마다 적용한 바 있었고, 고종 초 초반 흥선대원군 집정기에 평안감사 박규수 등이 실행한 바 있다. 마찬가지로 조선인들도 풍랑으로 부득이 중국에 표류할 수밖에 없었을 때 같은 이유로 돌아올 수 있었다. 내자불거는 <맹자>의 인생철학을 반영한 “무릇 가는 사람은 붙들지 말고 오는 사람은 누구든 막지 않는다”는 인본주의 원리에 따라, 청국군의 진압 대상인 동학농민군이 스스로 표명한 ‘상화相和’의 방식이었다. - P632~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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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김영민의 공부론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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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공부란 자기 자신의 생각들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을 사뭇 뼈아프게 깨치는 일련의 사건들이다.


공부를 좋아하고 즐긴다. 그러나 평소 내가 하는 독서와 글쓰기가 '공부'로 제대로 이어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다 보면 선명해지는건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모호해지고 질문조차 할 수 없을 때가 찾아오면 불안감과 회의감이 느껴지기도 한다. 


저자 김영민은 작년 <생각의 요새>에 언급되어서 처음 알게 된 뒤로 언젠가 한 번 그의 저작을 읽어보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찰나였다. 그는 '동무공동체'로 이름이 알려져있기에 핵심 저작을 읽는다면 <동무론>, <동무와 연인>이나 <비평의 숲 공동체>를 읽어야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보다 먼저 관심이 가는 주제인 공부와 관련된 이 책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마침 전자책도 나와 있어 주저않고 바로 읽을 수 있었다. 에필로그 보고 피식 웃었는데 저자의 글을 읽는 이는 모두 다 어렵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자폭이지만 솔직해서 좋았다. 실제 읽어보면 그럴만 하다 싶기도 한데 바탕이 갖춰져 있지 않은 상태로 이 책을 읽는다면 말 뜻 자체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대체 나는 왜 공부를 좋아하고 계속 이어갈까 질문한 적이 있다. 보복 심리 같은 것일까. 어릴 적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지 못한다고 여겨서 그런 것인가 싶은 생각도 있다. 대학 전공을 취업을 위해서 선택한 탓도 있는 것 같고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매일 조금씩이라도 공부한다. 공부는 내게 읽고 사유하는 과정이다.


'공부는 실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다.' 변화를 하려면 질문해야 한다. 그런데 질문을 하더라도 같은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 어느 순간 내가 안정적으로 아는 관념과 틀 안에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탄력적인 변화가 중요한 것일텐데 같은 방식을 답습한다면 어떻게 발전할 수 있겠는가. 저자의 '자기체계의 안정화'라는 말에 너무나 공감했다. 더 이상 긴장 상태에 들어가려하지 않음은 공부가 아닐 것이다. '문제는, 관념과 그림자의 거울방을 깨고 나가서 실전으로 공부하는 방식을 묻는 일이다.' 


책이 잘 안 읽히고 공부하면서 어느 순간 돌파구가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머리를 비우고 잠시 내려놓는 것이 방법인가 고민한 적이 있다. 저자는 '책을 읽다가 싫증이 생기면? 계속해서 책을 읽어라!(覺懶看書, 則且看書.)'고 말한다. 왠지 희망적이지 않나. 희망 섞인 말이라도 믿고 싶어지는 주문 같은 말이었다. 


글을 쓸 때 늘 나의 문제점만 보인다. 왜 나의 글은 특색이 없을까 고민한다. 저자는 글쓰기와 관련하여 자신만의 고유적인 글쓰기를 하라 주문한다. '관념을 회집, 운용하는 재주만으로 그칠 게 아니라 자신의 고유한 박자에 맞는 사유와 글쓰기의 개성을 창조하는 게 관건이다. 나와 나 아닌 것이 서로 겹치고 헤어지는 리듬이 박자라고 했듯이, 글쓰기의 개성적 박자 역시 각자의 삶의 양식과 그 무늬가 글과 겹치고 헤어지는 오랜 연성(練成)의 과정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 그러므로 오직, ‘사는 일’ 속으로 다 불러들일 것!' 나의 삶과 철학이 글에 녹아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내 글에 삶(구체성)은 있어도 철학(이론이나 관념)은 없거나 철학은 있는데 삶이 없다면 고민해보고 변화시켜 적용해보면 좋을 것 같다.


지금까지는 오롯이 '자신'과 관련된 부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고 발을 맞추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만 공부를 위한 만남은 자신과 타인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몸과 몸이 부딪치는 경험은 인식의 새로운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된다. 

20대 후반부터 독서 모임, 동호회, 커뮤니티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만나 공부했다. 혼자 공부할 때는 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타인과의 부딪침 속에서 착각이었음을 여러 차례 느꼈다.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앎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서재는 또 다른 공부의 기회가 되지 않나 싶다. 시간을 들여 다른 분들의 글을 읽고 사유하는 것만으로 좋은 경험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댓글까지 달면서 소통한다면 더 좋은 기회가 될 것이고.


‘몸이 좋은 사람’이라는 개념은 우선 이 몸의 사실에 대한 인식, 그 몸의 정치성에 대한 체감에 근거한다. 그것은 그 몸의 주변자리로 내 감성과 인식을 넓히는 일이다. 내 몸을 내 이기주의의 텃밭이자 진지로 삼기보다 타인과 세상의 메커니즘을 알아 가는 촉수이자 매개로 삼는 일이다. 그 누구도 쉽사리 체계의 바깥으로 외출하지 못한다고 하듯이 그 누구도 임의로 자신의 몸 바깥으로 나갈 수는 없다. 그러나 이 같은 몸의 주변자리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삶의 전체를 헤아리고 따질 수 있게 될 때 마침내 우리의 몸은 작고 견결한 실천들을 통해 외부성의 확보에 나설 수 있게 되는 것이다(인식의 전체성+실천의 일관성=외부성). 그러므로, 몸이 좋은 사람의 이념에 있어서, 약빠르고 반지빠른 영악과 변덕은 영영 비각이다. 내가 지원행방(知圓行方)이라는 숙어를 곧잘 호출하곤 했지만, 지원이란 곧 주변자리에 스며든 전체성의 인식을 가리킴이요, 행방이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선택한 작은 실천의 일관성이며, 체계와의 창의적 불화를 위해 소용되는 외부성이란 바로 이 인식과 실천의 병진에서 가능해지는 결과인 것이다.


‘만남’이 주는 비대칭의 체험은 물질의 문제, 무엇보다도 피와 살의 문제이기 때문에 무사들, 혹은 몸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모른다’. 아니, 차라리 몰라야만 한다는 게 옳다. 반복하지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몰라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고쳐 말하자면, 무사들은 모든 ‘타자’의 대접에 (그들의 실력과 운신을 전혀 ‘모르는 듯’) 극진할 때라야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것!


저자는 우리 사회의 지식인층과 문화에 대해 비판하는데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우리 사회의 대화문화에 대한 비판은 이미 수위를 넘은 지 오래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약자들의 말에 먹통인 남성 기득권자들의 체계적 반(反)대화성은 우리 사회의 농축·급속·편파의 남성적 근대화나 군사주의와 맞물리는 현상으로 이른바 심층 근대화의 과제에서 우선순위다. 각종의 통계는, 특히 남자들의 비(非)대화성과 이와 관련된 여자들의 불만을 지목한다. 나는 1990년대에 일반 대중을 상대로 인문학운동을 벌이면서 ‘여자의 말을 배우기’라는 화두를 내걸고 생활인문학적 실천의 진장(振張)에 미력을 보탠 적이 있는데, 이것 역시 대화문화의 파행을 속으로부터 고쳐 보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가령 주변에서 흔히 접하는 지식인들의 다수는 "언제 언제면 이런 글을 쓰겠다"거나 "이런저런 일을 끝내면 저 책을 읽겠다"는 따위의 말을 자주 하면서 버릇처럼 연기하는데, 내가 실천해 오고 또 후학들에게 권한 방식은 오직 현재 속에 직입하는 것으로 공부의 실천을 쉼 없이, 곧장, 당장 하는 데에, 그리고 그 버릇을 자신의 몸(무의식) 속에 기입하는 데 있다.


몇 번이고 읽어도 좋을 만한 내용들이 많다. 곱씹을수록 우러나오는 뭉근한 말들이 녹아 있어서 재독, 삼독해도 좋을 만한 책이라 생각했다. 

기성의 체제를 확인하고, 그 네트워크 속에서 안돈(安頓)하고, 그 교조(敎條)를 복창하는 것은 아직 공부가 아니다. ‘화이부동(和而不同)’의 만남과 사귐이라는 것조차도 거친 술어들(차이들)의 순치나 체계내적 사회화를 위한 알리바이로 저락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동이불화(同而不和)가 아니라 굳이 화이부동인 것. 그러므로 불화는 진정한 불화이어야 하며 차이는 진정한 차이(real differences)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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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용어의 탄생 - 역사의 행간에서 찾은 근대문명의 키워드
윤혜준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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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학자들이 때로는 ‘근대성’이라 부르는 대상, 즉 근대적 의식, 담론, 사상 등과 부분적으로 일치한다. 그러나 그것만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이 책에서 ‘근대’는 ‘담론’이기도 하지만 시대와 공간이기도 하다. - P7

이 책은 근대 문명의 키워드가 된 ‘말’의 역사를 다룬다. business, constitution, democracy, president, project, revolution, university… 현대에도 사용되는 이 말들의 기원이 되는 단어는 무엇이고, 이후 어떤 발전 과정을 거쳐서 지금의 의미로 변화되었는지를 들여다본다. 한 마디로 말의 유래를 살피고 그 변화 과정을 확인하는 것이다. 말의 탄생지에서 시작하기 때문에 차례도 알파벳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America’는 첫 챕터이기도 하면서 우리와도 관련이 깊어 눈길이 갈 수 밖에 없었다.

‘America’는 청나라 시절 아메리카’에 대한 중국어 소리 ‘메이’를 표현한 글자로 한자, 아름다울 미를 써서 ‘미국’이 되었다. ‘아메리카’는 피렌체 공화국 지도자였던 ‘아메리고 베스푸치’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함선을 타고 신대륙을 향해 갔으나 독일어 지리학 연구자인 발트제뮐러가 세계전도에 그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면 아마도 ‘아메리카’가 아닌 다른 이름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 ‘자본주의’는 ‘capitalism’의 번역어다. 원어는 라틴어 ‘capitals’인데 머리를 뜻하는 ‘caput’에서 따 왔다. 지금의 ‘자본’이라는 의미는 원래 ‘stock’을 주로 쓰다가 1880년 이후 경제사회체제 개념으로 ‘capitalism’이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이것이 사회주의에 대응하는 정치적 용어로도 확장되었다.
이처럼 키워드의 의미가 시작부터 지금까지 같은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번역어와 영어의 의미가 서로 맞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경쟁competition’도 라틴어 어원으로는 ‘함께 노력하다’라는 의미였는데 이것이 ‘다툼이나 경쟁’으로 변화한 것이다.
통화로 쓰이는 ‘currency’의 한자어의 부수는 책받침 부수로 ‘쉬엄쉬엄 간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반면 ‘currency’는 ‘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서로 연결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currency’는 18세기 이후 화폐 경제에 의한 경제 활동의 흐름이 빨라지면서 지금의 돈이라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영어 ‘revolution’이나 프랑스어 ‘revolution’은 원래 어원적 의미만 따지면 획기적인 정치적 격변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라틴어 어원 ‘revolutus’를 그대로 따른다면 ‘원래 자리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앞으로 ‘전진’하는 혁명과는 오히려 정반대다.
‘industry’는 원래 ‘근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가 기계 산업 시대 이후가 되면서 지금의 ‘산업’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었다.
‘reform’은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종교 개혁 시기에 ‘과거로 되돌리다’라는 의미로 변화했다가 현재의 ‘(사회 경제적인) 개혁’이라는 의미로까지 변했으니 상전벽해가 된 경우다.
물론 ‘소비consumption’은 ‘다 가져가다’로 애초부터 지금과 같은 부정적 의미로도 쓰인 경우도 있다.
또, 번역어 ‘프로젝트’, ‘리뷰’, ‘유토피아’ 등은 이제 완전히 우리말처럼 되어 버린 경우도 있어 흥미로웠다.

대부분은 기원어가 라틴어가 많았는데 ‘민주주의democracy’는 그리스의 폴리스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리스가 기원이라는 점도 주목이 되었다. 기원어의 의미는 ‘평민, 인민에 의한 지배, 통치’로 직접 민주정을 가리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이 되면 알렉시 드 토크빌이 주장한 기회의 평등, 지성의 평준화에 의한 미국식 민주주의의 의미로 보편화된다.

키워드와 내용을 확인하면서 눈에 머무는 것이 있다면 관심이 가는 주제일 것이다. ‘헌법constitution’도 그런 경우다. 영국이 헌법에서 말한 바와 달리 그들은 식민지를 만들고 노예를 부리며 그들의 인격을 강탈했다. 워런 헤이스팅스의 말에 분노하며 도자기 회사에서 만들었다는 저 문구를 보니 더 착잡함이 일 수 밖에 없었다.

에드먼드 버크가 워런 헤이스팅스를 기소하는 연설에서 ‘constitution’은 주요 쟁점 중 하나였다. 워런 헤이스팅스는 탄핵 재판장에서 자신이 통치한 인도 지역의 토착 ‘constitution’이란 원래 다수의 민중을 소수의 지배자가 “저급하고 미천한” 상태에 머물도록 억압하는 구조라고 주장했다. 반면 에드먼드 버크는 고유의 억압적인 정치문화가 아니라 영국인 지배자 워런 헤이스팅스가 주도한 “부패”가 “그 나라헌정질서의 모든 이득을 상실하게 한 진정한 원인”이라고 단언했다.

18세기 내내 북아메리카 및 서인도제도(카리브해) 영국 식민지에 아프리카인 노예들을 파는 노예무역은 영국의 중요한 ‘기간산업’ 중 하나였다. 워런 헤이스팅스를 탄핵하던 시기인 1780년대 후반에는 온갖 사업자와 투자자가 관여하던 영국의 노예무역을 법으로 금지하라고 요구하는 목소리가 의회 안팎에서 터져나왔다. - P67~68


웨지우드 도자기 회사에서 만든 ‘폐지론자’ 메달에 새겨진 메시지는 “나도 사람이고 (당신의) 형제 아닌가요?”다.


노예무역 페지론자들 중 한 명인 토머스 쿠퍼는 ‘consumption’이란 말속에 인간 생명의 ‘소모’와 설탕의 ‘소비’를 다음과 같이 연결하고 있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900만 명의 노예가 유럽인들에 의해 소비되었다. 이러한 통계도 이미 한 10년 전 것이므로 한 100만 명은 더 추가해야 한다. 노예 하나를 포획하기 위해 열 명씩은 살육해야 한다는 계산을 해보면 그렇다. 그중에서 5분의 1은 배에 실려오는 도중에 죽고, 3분의 1은 농장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죽는다는 점을 감안하자. 전혀 과장하지 않은 계산을 해보아도 유럽인들의 탐욕이 보여주는 악마적인 게걸스러움은 무려 1800만 명의 우리와 같은 동료 인간에 대한 살인을 통해 채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 맙소사, 그들은 도대체 무슨 목적에서 그렇게 하는가? 깜짝 놀란 독자는 이렇게 말할 법하다. “유럽의 신사 양반들이 마시는 차에 설탕을 타기 위해서!” 독자에게 해줄 답은 이것이다. - P84

‘계몽’이라는 단어에서도 비슷한 감상을 받았다. ‘빛’에서 기원한 이 개념은 점차 서구중심주의의 문명사적 개념’으로, 시대 정신이자 사상으로 확장되었으나 과연 그들만이 문명인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계몽’은 이전의 ‘가르침, 훈육’에 의미에서 이제는 너무 변질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메이지 시기 일본에 의해 번역된 ‘president’의 대응어인 대통령’도 의미가 너무 변질된 경우다. 미국의 정치 체제의 의장에서 온 것으로 ‘위임 받은 권위를 행사하는 대리자’라는 의미가 대한민국에서는 ‘권력자’라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삼권 분립이 제대로 지켜지고 있는지도 사실 의문이다.

이처럼 이 책은 역사의 흐름에서 근대 문명의 키워드를 확인할 수 있다.


‘민주주의’로 번역한 말은 ‘-ism’으로 끝나지 않는데도 그렇게 번역되고 고착되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인들이 ‘demokratia’에 부여한 기능은 무슨 ‘-주의’가 아니라 특정 유형의 정치 체제를 지목하는 것이었다. 원리와 본질을 중시하던 플라톤이었지만 그가 법률에서 ‘demokratia’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발언은 ‘-주의’와는 관련성이 적다.
정치 체제에는 두 개의 모형이 있고 나머지는 다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이 둘 중 하나는 왕정이고, 다른 하나는 공화정(demokratia)이지요. 전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페르시아의 정치 체제고, 후자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는 아테네입니다. 그 나머지는 모두 이 둘을 조정하고 배합한 것일 뿐이지요. 어떠한 체제 속에서 자유와 박애를 지혜와 배합하려면 이 둘 중 하나의 형태를 채택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합니다. - P101

‘계몽’이 형용사englighten로 ‘교육받은, 지식인의, 문명화된’으로 주로 쓰이던 18세기가 지나고 19세기가 된 이후로 시대정신이나 사상을 지칭하는 칸트식의 용례가 영국에서도 ‘계몽시대’ 같은 표현에 종종 등장한다. 이 단어가 이러한 뜻으로 사용될 경우 단어의 머리글자 ‘E’를 대문자로 구별했다. 대문자로 시작하는 일종의 고유명사가 된 ‘Enlightenment’를 ‘계몽주의’로 옮기지 않을 이유는 물론 전혀 없다.
‘계몽주의’를 이어받은 과학기술문명은 “가장 무지하고 야만적인 시대”와 “잔혹함과 부당함”을 놓고 여전히 경쟁했다. 종교적 양심의 ‘계몽’에서 해방된 근대과학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위해 이성의 힘”을 숭상하는 ‘계몽주의’는 19세기와 20세기에 권력욕 및 “저급한 탐욕”과 결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 P130~131

미국 헌법이 규정한 ‘아메리카의 주 연합 의장’을 ‘미합중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순간 삼권분립을 유지하기 위해 고안해낸 온갖 거추장스러운 제약과 견제 장치들이 슬그머니 사라진다. 이러한 오역의 과정을 거쳐 통용되는 ‘대통령’이라는 말에는 ‘대권’을 휘두르는 권력자의 모습이 중첩되어 보이기 마련이다. - P200

“합리적인reasonable” 사람이라면 “쓸모없는” 질문에 매달리지 않는다. 삶의 유익한 바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 존 톨런드가 인정하는 ‘합리성’의 내용이기에 존 로크가 말하는 ‘reasonableness’와 유사하다.
‘합리적 의심’은 윌리엄 블랙스톤, 에드워드 쿡 경, 존 로크, 존 톨런드가 이해한 신축적인 실천성과 실무적 감각을 법정에 적용한 법 원칙이다. 그러한 ‘합리성’은 상식의 또다른 이름일 뿐이다. 한 피고인의 권리와 심지어 생명에까지도 영향을 줄 수 있는 형사 판결을 비전문가 일반 시민들의 상식에 근거한 판단에 맡기는 것이 배심원 재판이다. 법률 전문가들의 뒤틀린 말장난과 정치판의 편싸움에 끼어드는 기괴한 논리에 따라 사법 정의가 왜곡되는 일이 비일비재한 대한민국에서 이 표현이 나온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자세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을 법하다.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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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04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담아가요~~
리뷰 감사합니다

거리의화가 2024-04-04 11:06   좋아요 1 | URL
도움을 드렸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 - 인도, 문명의 나무가 뻗어나가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동양미술 이야기 시리즈 1
강희정 지음 / 사회평론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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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미술의 영역은 폭넓어졌다. 그러나 지금도 전시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회화가 압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도 서양화다. 그러다보니 미술 하면 뭔가 모르게 나와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미술은 결코 회화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으며 조각, 서예, 전각, 일상 용품 등 다양하다. 이처럼 미술품은 결코 특별하지 않으며 눈 닿는 곳에 모두 존재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릴 적 보고 자랐던 옛 장롱, 베개 자수, 한복의 무늬 등이 지금은 미술품이 되었던 걸 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싶다. '평범한 것이 위대하다’ 라는 챕터의 제목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바와 맥락이 닿아 있어서 더 공명했던 것 같다.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권은 인도의 미술 이야기다. 


인도에 대해서는 책의 질문자처럼 나도 IT가 발달된 곳, 바라나시, 소, 갠지스 강(에서의 목욕) 정도 밖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인도는 불교가 시작된 곳이니 불교 관련 미술이 있을 거야 하는 생각 정도를 갖고 읽기 시작했다. 


인도는 파키스탄의 지명인 ‘신드’에서 유래한 말로 짐작할 수 있듯 인도 미술의 범위는 오늘날의 ‘인도’만이 아닌, 아프가니스탄 일부와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미술까지 포함한 지역이다. 과거에는 인도가 이 모든 지역들을 커버했기 때문이다. 


인도는 흔히 4대 문명 중 하나인 인더스 문명의 발상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비교적 최근인 1974년 인더스 강 유역에서 메르가르 유적이 발굴되면서 인더스 문명보다 더 앞선 문명이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나도 앞선 문명이 있었음을 미처 알지 못했었는데 충격적이었다. 선인더스와 인더스 문명의 유적을 통해서 사실적인 신체 동작과 살의 촉각을 생생하게 표현하려는 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인장을 저렇게 입체적으로 새긴다는 것도 놀라웠는데 특히 ‘춤추는 소녀’는 당시 어떻게 저런 아름다움을 갖춘 조각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세밀하고 사실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BC 322년 인도에 마우리아 제국이 세워진다. 마우리아 제국의 세 번째 왕이었던 아쇼카 왕은 인도 남단을 제외한 대륙 전체를 정복했다. 그는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고 석가모니를 의미하는 사자 조각을 통해 석가모니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작업을 한다. 현재 인도를 대표하는 공식 국장에는 네 마리 사자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아쇼카 왕이 세운 석주의 사자 조각에서 기원한 것이다. 


불교는 인도의 아쇼카 왕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기독교가 들어오기는 했지만 불교는 여전히 대한민국의 기본이 되는 종교 중 하나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용어 중에서도 불교에서 온 용어가 많다고 하는 것에 놀랐다. 예를 들어 ‘기특하다’, ‘불가사의하다’ 같은 말이나 관념, 대중, 살림, 심지어 지식이라는 말이 인도에서 왔다고 한다. 또 ‘주인공’이라는 단어는 불교 경전에서 깨달음을 가리키는 용어였다고. 왠지 ‘주인공’이라는 단어가 달리 보이지 않나.  


아쇼카 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이라고 칭했어요. 성왕은 성스러운 왕, 전륜은 구를 전(轉)에 바퀴 륜(輪)을 써서 바퀴를 굴리는 성스러운 왕이라는 뜻입니다. 이때 바퀴는 당연히 법륜이죠. 아쇼카 왕은 석주를 통해 자기가 우주의 진리이자 불교의 법을 전파하는 위대한 왕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주장하는 겁니다. 

이후 전륜성왕이란 이름은 불교에서 이상적인 군주의 대명사가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진흥왕이 6세기에 한강 유역을 정복하고 불교를 수용해 나라를 정비하면서 자신을 전륜성왕이라 칭했습니다. - P242


일찍부터 마연한 조각과 토기를 만들다가 마우리아 제국 때 와선 돌이 들어가는 데는 모조리 마연하죠. 궁전 기둥도 그랬고요. 

우리나라 돌은 대부분 입자가 거칠고 단단한 화강암이거든요. 세밀하게 조각하기 어려운 돌이죠. 하지만 ‘석탑이 마멸되어 사라졌다’는 이야기는 거의 못 들어봤을 거예요. 화강암이 조각하긴 어려워도 내구성 하나는 끝내줘요. - P254~255


인도의 조각은 굉장히 사실적이고 세밀한 게 특징인데 이는 무른 돌을 사용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만큼 바람에 잘 날아가기 때문에 형태 보존이 어려워 ‘마연(갈고 닦아서 반질반질하게 하는 것)’을 한 것이라고. 우리는 화강암을 쓰기 때문에 단단한 대신에 상대적으로 세밀한 조각은 어려웠던 것 같다.


석가모니는 당시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감흥을 주었다. 석가모니 사후 여덟 개 나라의 왕들이 유골을 팔 등분 한 다음에 각각 돌아가서 스투파를 세운 것이 스투파의 시작이었다(근본8탑). 그러나 보통 사람이 그 탑들을 직접 찾아가기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아쇼카 왕은 사리를 나눠 전국 곳곳에 8만 4천 기에 이르는 스투파로 확장하기에 이른다. 8만 4천기라니, 지금도 그 정도의 숫자가 세워진다고 하면 놀랄 만한데 당시에는 진짜 어마어마한 숫자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석가모니의 복음의 위세가 강했다고 보아야 하겠다. 거기에 독실한 불교 신자인 아쇼카 왕이 있어서 스투카가 곳곳에 세워질 수 있었다. 

사실 스투파는 납골당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불교의 위세가 커지자 석가모니의 무덤만을 가리키게 된 것이라 한다. 그리고 스투파는 나중에 투파, 탑파, 솔도파 등으로 불리다 중국을 거치면서 우리가 아는 ‘탑’이라는 명칭으로 바뀌게 된다.

스투파는 차트라(산개), 야슈티(찰주), 하르미카, 안다(복발), 토라나(문), 베디카(외곽 울타리)로 구성된다. 복발의 둥근 형태는 알을 뜻하며 생명의 순환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스투파는 다양한 조각을 끼워넣을 수 있도록 울타리나 문에 홈을 내어 놓는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조각에는 석가모니의 이야기가 포함되면서 자연스레 그의 생애와 불교의 교리가 전파될 수 있었다. 


불교가 인도를 넘어 아시아에 전파되면서 스투파가 곳곳에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다만 인도와 거리상으로 교류가 쉽지 않았던 동북아시아의 국가들은 인도의 스투파의 형태가 아닌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제작되었다. 처음에는 목탑부터 시작되었다고.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목탑을 본떠서 만든 석탑이라고 하는 것이 신기했다. 입구가 있는 것, 찰주, 배흘림 기둥, 처마처럼 높이 올라간 지붕 모서리에서 스투파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문을 만들었다는 게 바로 목탑을 본떴다는 증거예요. 동북아시아의 탑은 애당초 목조 건물을 본떠 만들었으니 오히려 문이 없으면 더 이상하지요. 이 문만 봐도 우리나라 탑이 인도 스투파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인도의 스투파는 바깥 울타리에 문이 있긴 해도 복발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없습니다. 석가모니를 화장해 몇 겹짜리 사리함에 넣어 꽁꽁 싸맨 다음 묻었는데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문을 달 이유가 없지요. - P419

돌을 툭툭 쌓아 올린 돌기둥이 보일 겁니다. 이 돌기둥이 야슈티, 즉 찰주예요. 인도 스투파에도 찰주가 있었습니다. 우산처럼 생긴 산개가 있고, 그걸 받치는 우산대 같은 게 찰주였지요.

스투파에서 찰주는 특별한 기능이 없었어요. 그냥 복발 꼭대기에 꽂은 기둥 정도였죠. 동북아시아에서는 탑 층수가 높아지면서 찰주가 중심을 잡아주는 축이 돼요. 쉽게 샌드위치에 꽂은 이쑤시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찰주의 존재는 동북아시아 목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에요. - P420


신장위구르 지역에 모여 살던 월지족은 흉노족의 강성함에 밀려 인도 북부 지역까지 이동하였고 기존에 있던 그리스-박트리아 제국을 물리치고 1세기 경 쿠샨 제국을 세운다. 쿠샨 제국의 영토는 지금의 인도 북부,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 일부에 걸쳐져 있었다. 통일을 이룩한 인물은 3대 왕인 카니슈카 왕이다. 그도 마우리아 제국의 아쇼카 왕처럼 불교에 귀의하였다. 그는 최초로 불상을 탄생시키면서 지금의 불상의 표식을 정형화시켰다.    특히나 쿠샨 제국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북아시아에 불교를 전파하였다.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불교가 수입되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새삼 놀라게 된다. 




이 책은 장점이 많다. 우선, 질문자와 대답자가 말을 주고 받으며 궁금증을 풀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독자가 자연스레 그 과정에 동참하게 한다. 두 번째로, 챕터별로 핵심 정리를 해 놓아서 독자로서 한 번 더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세 번째로, 시기별로 역사를 도표상으로 나열하고 이를 미술품과 같이 배치함으로써 그림과 도표로 다시 한 번 정리할 수 있다. 


분량이 많았다 싶었는데 쉽게 읽혀서 이틀이면 너끈히 다 읽을 수 있었다. 아시아 문화권은 불교 문화와 뗄레야 뗄 수 없는 만큼 인도 미술의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제는 동양 미술을 더 자주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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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4-04-03 03: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도 미술 범위가 넓네요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지도... 그런 것도 거의 잊고 사는군요 불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데, 중국이나 한국하고 다른 느낌이 드는 건 왜인지... 불교는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온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4-04-03 08:57   좋아요 1 | URL
같은 불교권 문화라도 유물이나 유적의 형태가 달라서 다르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맞아요. 불교는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는 삼국 시대 무렵 들어왔죠. 벌써 천 년 넘게 이 땅에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제는 종교라기보다는 마음의 수양을 쌓는 하나의 방편이 된 것 아닐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