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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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된 책을 읽어봐야겠다 생각할 무렵 인문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서양 고전 중 대표작이라고 하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빼놓을 수가 없는데 그렇게 두 권의 고전과 관련 입문 책을 한동안 계속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리스 신화는 재미가 없었지만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는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데다 관련 인물들이 흥미로워서 읽는 과정이 지루하지 않았다.

이 책은 고전 일리아스를 기본으로 하여 쓰여진 소설이다. 원전 일리아스는 잘 해석된 번역본이 존재하지만 너무 웅장(거창)해서 쉽게 다가가지 못하는 면이 있다. 이 책은 소설인데다 문체도 부드러워 술술 읽혀서 좋았다.

일리아스의 역사적 배경이 된 트로이 전쟁은 과거만 해도 실제 있었던 전쟁이냐를 놓고 진위 여부가 논란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현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트로이 전쟁은 실제 하는 사건이었다고 이야기한다.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2004)>가 있다. 전쟁의 줄거리를 비교적 충실히 다루어서 나도 원전을 읽으면서 그 영화를 보았고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아킬레우스지만 나는 그의 서사보다 오히려 헥토르와 헥토르의 가족 이야기에 공감이 더 갔었다. 특히 헥토르가 사망한 뒤 프리아모스가 아킬레우스를 찾아간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일리아스를 하나의 단어나 문장으로 요약하라면 결국 ‘아킬레우스의 분노‘ 아닐까.
아킬레우스를 분노하게 한 것은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리스 연합군의 전투에 참여했던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도를 넘은 행위에 화가 나서 더는 전쟁을 가담하지 않겠다 선언했다. 오디세이아 등이 가서 설득해보았지만 역부족이었고... 꿈쩍 않는 아킬레우스 대신 파트로클로스가 대리 참전을 했고 그것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고 말았다.
아킬레우스에게는 파트로클로스가 그만큼 소중한 존재였음을 방증한다. 이 책에서는 연인 설정으로 나오는데 굳이 연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아주 깊은 관계였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아킬레우스는 보통 영웅시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 책에서는 영웅적으로 그려지기보다는 인간적으로 그려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누구나 여러 선택에서 고민을 하는데 아킬레우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특히 책에서 헥토르와 아킬레우스 간의 전투 장면은 문장 하나가 전부다(그만큼 아킬레우스의 전투력보다는 그 외에 것에 비중을 훨씬 두었다).
물론 그는 신분상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나서 특별히 존귀한 취급을 받는것으로 보인다(어머니인 테티스도 신의 아들임을 강조한다). 아킬레우스 삶의 전환점마다 테티스의 역할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야기를 소설화하니 모자 관계가 왠지 더욱 두드러지는 느낌이어서 흥미로웠다.
결국 아킬레우스를 차지하지 못했지만 데이다메이아란 여인도 있었다. 둘 사이에서 태어난 네오프톨레모스(피로스)가 전쟁을 마무리짓게 되는 것도 왠지 운명적이다.
개인적으로는 케이론의 역할이 가장 좋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에게 의술 및 여러 인생의 가르침을 훈육한 스승이다. 나는 그가 지식 뿐만 아니라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해주는 그런 모습이 있어서 좋았다. 이런 것이 현명함과 지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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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1-25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영학을 전공하던 대학시절, 유학파 여교수가 서양문학을 맛깔스럽게 강의한다고 소문이 나서 이 강의를 도강하러 갔던 추억이 떠오릅니다.
 
제국의 어린이들
이영은 지음 / 을유문화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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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시기라도 자신이 어떤 입장에 놓이느냐에 따라 주변을 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이 책은 식민지 조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중일전쟁 이후 무렵 시기를 시간적 배경으로 일본인 어린이들과 조선인 어린이들의 시선을 살펴봄으로써 자연스레 그들이 처한 상황과 주변 인식을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저자는 양국 어린이들이 남긴 작품을 따로 구분해 놓지 않고 실었는데 그렇게 해야 양국 간 차이점을 더 잘 느낄 수 있게 한다고 여겨서였다고 한다. 현명한 판단이었다고 생각한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서 1938년 제1회 조선총독상 글짓기 경연대회를 시작으로 1944년까지 대회를 연다. 그것은 조선의 아동 문학이 더욱 탈정치화하고 개인화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적 행보를 시작한 일제가 문학을 통해서 역설적으로 어린이다움을 강조하려했다는 것은 시사할 점이 있다. 물론 그들은 표방한 것일 뿐 어린이들의 삶이 당시의 환경과 결코 무관할 수 없었음은 아이들의 글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앞선 식민지 시기에도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 정치를 표방하며 식민지 조선에 통로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기만 정치였음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 해도 양국 어린이들은 그들 간 경계로 인해 입장 차와 온도가 보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 읽었던 <제국의 소녀들>이란 책이 떠올랐다. 그 책은 식민지로 건너가 식민자로서 그곳에서 생활한 여성이나 식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식민자 2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식민자들의 관점에서 식민지가 어떠했는지 개인의 경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장하는 이들은 식민지 시기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에 재학했던 사람들로 대부분 조부모나 부모를 따라 경성에 들어왔다. 그 책을 통해서도 느꼈었지만 식민자 2세의 어린이들 대부분은 부모가 식민지 관리이거나 자영업으로 성공한 경우라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래서 재조일본인 가정에는 조선인 고용인이 있었고 고용인이 그곳에서 어떻게 불리는지 그 집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그 책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만 그 책은 식민자의 입장에서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었는데 이 책은 양국 간 교차 상황을 확인할 수 있어 훨씬 도움이 된다. 


양국 어린이들 간 경계가 드러나는 지점은 여럿 있다. 


가장 먼저 일본인 어린이와 조선인 어린이 간 교육 차이가 크다. 일본은 1905년 통감부 설치 후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들을 위한 교육 지원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일본 문부성은 '거류민단법 재외지정학교제도'라는 법령을 통해 교원을 뽑고 재정을 지원할 수 있도록 했다. 1909년이 되면 학교조합령이 발포되어 문부성이 하던 일을 조선총독부가 그대로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인들에게도 교육 기회가 주어지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일본인과 차등을 두어 진행되었다. 이는 소학교 뿐 아니라 중등학교, 대학교도 마찬가지다. 


조선인과 일본인이 교원이 되기 위해 수업을 받는 경성사범학교가 있고, 그 뒤의 붉은색 건물에는 일본인 초등교육기관인 경성사범학교 부속 제1소학교가 있었다. 흰 건물은 조선인 어린이가 다니는 경성사범학교 부속 제2소학교였다. 그리고 수영장 근처에는 일본 가옥 같은 건물이 하나 있었는데, 이곳은 일본인 상류층 고위 자제들이 학년에 상관없이 다같이 모여  수업을 받는 '단큐'라는 곳이었다. 일장기를 상징하는 붉은색과 흰색 건물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같은 길로 통학하며 언제나 마주쳤지만, 시비가 붙지도 않고 교류를 하는 일도 없었다. - P191


일본인, 조선인 어린이의 수신(윤리) 교과서 내용도 서로 달랐다. 일본인 어린이 교과서에서는 주체성을 강조한 반면 조선인 어린이 교과서에서는 청결을 강조하고 조선의 발전에 감사하라는 내용과 외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하자는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고. 


그리고 경제적 이유도 크다. 1920년대를 기점으로 조선의 쌀이 싼값에 일본으로 반출되면서 농업의 비중이 컸던 조선 농가의 피해가 컸다. 땅은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이름으로 국가의 소유가 되거나 아니면 일본인 거부나 친일파 지주의 땅이 되었다. 땅을 잃은 이들은 새 땅을 찾아 만주로 가거나 일자리를 찾으러 일본으로 떠났다. 일본과 만주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은 조선 내 대도시로 향했다. 그러나 아직 산업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조선 내 도시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일용직이나 잡부 정도에 불과했고 결국 그들 중 많은 수는 도시의 궁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집안에 최소한의 살림이 유지되지 않으니 조선인 어린이들은 스스로를 돌볼 여력이 없어 집안 일을 도와야 하는 일이 잦았다(그래서 일찍 철이 든 느낌). 반면 일본인 어린이들은 여유가 있어서인지 게으름이나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보인다. 조선인 어린이들의 생활의 중심에는 가족이 있어서인지 생활의 터전이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벼를 키워야 해서 가문 하늘에 비를 내리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다. 일본인 어린이들의 글에는 감정과 상황 자체에 대한 묘사가 많았다. 예를 들면 아버지 직업을 부끄러워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1940년 정도가 되면 일본 본국만이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도 상황적으로 전쟁과 뗄 수 없는 근대 교육이 이루어진다. '너희들은 미래를 짊어질 일꾼'이라는 내용을 주입시키고 군대식 훈련을 통해 충성을 강요하며 은연중에 전쟁적 상황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 등이다. 1937년 이후 예비 일본인들을 양성시키기 위한 기획으로 황국신민맹세가 제정되었고 전쟁으로 나가는 군인을 위해 여성들이 흰 천에 빨간 실을 수놓아 전달하는 행위가 공공연히 이루어졌다. 


아이들의 글을 보면 천황의 사진을 (마치 진짜 천황처럼 여기고) 소중히 여기거나 강한 일본 정신을 기르면 훌륭한 황국 신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일본인 어린이 모습이 보인다. 또 신사 설립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과정을 묘사하기도 하고 군가를 부르는 일을 눈물나게 기쁘다고 여기는 글도 있다. 조선인 지원병에 대한 글을 통해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도 하다. 전쟁놀이를 신나해하거나 중일전쟁의 경과에 따라 일본의 승리의 발자국이 늘어났으면 하고 바라는 글을 볼 때는 진짜 좀 섬뜩했다.


전쟁 때문이 아니더라도 근대 일본의 교육은 국가의 요구에 충성하는 인간을 양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 교육 체계는 식민지 조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45년 전쟁이 마무리되자 재조일본인은 본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귀환한 일본인들과 원래부터 본국에 있었던 일본인들은 마치 이전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인과 조선인의 차이처럼 경계가 있었다(원래 본국에 있었던 이들이 귀환한 일본인들을 차별했다).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런지 자못 궁금하다. 


스쳐 지나갔지만 막상 읽어볼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좋은 이웃분 덕분에 이 책을 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희망도서로 받았으니 여러 사람들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책은 널리 읽혀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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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의 민주주의 - 한국 현대 민주주의의 계보를 탐구하다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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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한국사 시리즈 그 마지막이다. 2015년에 첫 책이 쓰이고 두 번째 책이 2017년에 쓰였는데 이 책은 2025년 2월에나 나왔다. 2권과 3권 사이에 기간이 기니 확인해본 이는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유는 납득할 만했다. 남한 정부가 세워진 이후 민주주의의 역사의 과정을 훓는 작업이다. 저자가 운동권 세대이기 때문에 거리를 두고 쓰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나부터도 나와 직접 연관된 1980년대 이후의 역사는 중립적으로 바라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더 열심히 공부하기 어려웟던 것도 있다. 학교 다닐 때는 박정희 시기까지의 역사는 그나마 상세하게 알려주었으나 이후 역사는 제대로 알려주지를 않았다. 1987년 이후 체제의 일은 더욱 그렇다. 정치사보다는 경제사로 접근하는 경우가 더 많아서인것 같기도… 이제는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비로소 최근의 역사도 슬슬 다루고 있는 듯 싶다.

3권의 목차에는 모두 ‘민주주의’가 들어가있는 것이 특징이다. 미국, 반공, 민족, 독재, 민중, 시민사회 키워드가 중심이 되었다. 저자는 윤석열 정부 들어서도 매일같이 마주하는 ‘이게 나라인가?’라는 질문에 마주했다고 한다. 저자가 느꼈고 우리가 느끼듯 현재의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니 결코 완성형이 아니다. 서문의 제목이 모두의 민주주의 시대, 미완의 민주주의 역사라는 말이 그래서 인상적이었다.

해방 후 일제가 물러난 자리에 미국이 들어섰고 이들이 남한의 정치사회를 좌우했다. 식민지 시기 일제에 협력한 친일파를 타도해야 했으나 남한 우파의 의견에 미국의 입김이 더해져서 보통선거법 처리가 우선시되었다. 친일파 범위가 축소되고 처벌 규정이 완화된데다가 미국 군정장관인 딘이 친일파 처벌법 인준을 보류했고 이후 폐기되었다. 이후 유엔한국위원회에 의해 소선거구제를 바탕으로 한 5.10 선거가 이루어진다. 미국은 미국식 민주주의에 대한 선전과 홍보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자유선거가 민주주의이니 이에 반대하는 것은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선전을 위해 만들어진 미군 본부 직속 기관인 공보원은 선거 홍보용 영화를 제작하고 미국 사회를 소개하는 영화를 상영했다. 미국의 교수법과 교과가 도입되고 미국 유학이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 되었다.

제헌헌법에 따라 민주공화국의 기치를 내세웠지만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도민을 학살하고 국가보안법을 강화하였으며 반민법 시행을 노골적으로 방해했다. 이승만은 좌파를 비롯하여 자신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던 정치인을 탄압하고 반공동원체제를 시행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민주주의를 표방했으나 실은 개인주의를 배격한 국가주의인 반공민주주의였다. 사회 민주주의 등 반공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담론이 있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나며 반공 프레임은 더 강화되었고 대항 체제는 힘을 얻지 못했다. 통일 운동도 마찬가지다. 혁신정당과 시민단체에 의해 남북 협상에 의한 통일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국 대학에 통일 운동 조직이 결성되어 활동하기도 했으나 이승만 정부에 이은 장면 정부도 반공 임시 특별법과 집회, 시위에 관한 법률 제정을 시도하는 등 이전 정부의 기조를 이어갔다.

5.16 쿠데타 세력은 집권 후 혁명 담론을 내세우며 진실한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일어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이 모방한 것은 다른 아시아의 군사 정부의 행정 정치 시스템 체제였다. 민주주의를 강조했으나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영구집권, 독재체제를 낳았다. 더군다나 군사정부는 한일협정으로 미완의 과거사 문제는 청산했다고 했다. 이에 시민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는데 정부는 계엄을 선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문제에 천착했다. 이전 정부에 이어 경제 개발 계획을 추진했고 이를 뒷받침한 것은 미국이었다. 1950~60년대 미국의 로스토는 대한정책을 입안했다. 로스토는 공산주의를 이기는 것이 목표인 사람이었다. 이것이 경제 계획에 반영되어 동원에 의한 경제 자립과 부국 강병을 달성함으로써 공산주의에 승리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개발의 열망은 민주주의를 압도했고 민주화는 후순위로 밀리게 되었다. 자연스레 개발권력과 지식인은 불화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에 대한 경제종속성과 예속성에 대한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박정희 정부의 경제 개발의 폐단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는 전태일의 분신, 광주 대단지 사건을 통해 여실히 드러난다.

박정희는 삼선개헌 후 장기집권의 길을 열었고 1971년에는 국가비상사태 선포, 1972년 비상계엄령을 선포하며 유신 체제에 들어갔다. 긴급조치 9호 명령에 따라 자신을 반대하던 김대중 같은 세력은 납치하고 언론을 탄압하였으며 재야 세력과 지식인을 탄압했다. 민방위 훈련이 시작된 것도 이 시기이고 주민등록법을 통해 주민을 감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나 어렸을 때만 해도 활발히 활동했던 반상회도 이때가 시작이다. 결국 이 시기는 삶과 문화의 모든 틀을 통제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긴급조치 9호 명령이 시작되자 학생을 중심으로 운동권 문화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재야 사회도 세력화를 이루게 되었는데 대표적인 곳이 종교계와 언론계다. 개신교는 KNCC, 천주교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각기 만들어 투쟁했다. 지식인과 문학인도 각기 연대했다.

유신 독재는 한국형 민주주의를 이념으로 내세웠다. 이에 대하여 저항 연대는 민중 주도의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을 실현하고 민중의 생존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삼민론을 주장하였다. 한국형 민주주의라는 것이 앞선 이승만의 반공 민주주의이자 일민주의와 무엇이 차이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1970년대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면 1980년대 6월 항쟁 이후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시민 사이에서도 중요하게 부각되어 소수자, 교육 문제, 과거사 청산 등으로 범위를 넓히며 운동이 시작되었고 1990년대가 되면 이에 대한 결과물을 얻기 시작한다.

1970년대 노조가 결성되기 시작한 후 임금 인상, 근로 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면서 노동자의 경제적 삶의 개선이 중요시되는 등 노동자 의식이 향상되었다. 1980년대 들어서면 전국으로 노조 결성이 확대화된다. 농민들도 1980년대 농축산물 개방 문제로 연대를 시작하면서 운동 조직을 결성하였고 이들은 민주화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경제 개발의 그늘 아래 빈민들이 생겨났으나 이들의 삶에 대한 문제에는 누구도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고 이들은 판자촌 철거 반대 운동 등 스스로 목소리를 높였다. 1980년대는 그야말로 민중의 시대였는데 그에 맞춰 민중문학론, 민중신학론, 민중사회학, 민중역사학, 민중경제학 등이 등장하였다. 민족청년연합에서는 시민, 민족, 민중 중 어느 것에 우선순위를 두느냐에 따라 운동 노선을 둘러싼 입장 차이가 발생하였고 투쟁의 방향도 달랐다. 6월항쟁 후 울산, 마산, 창원, 수도권 등 산업단지 도시를 중심으로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났다. 1990년대는 그것이 확대되어 노동 운동이 사회 운동에 중심이 되었다. 민주노총이 탄생한 것이 이때였고 전국농민협회가 조직된 것도 이때다.

박정희 정부 때 노조의 정치활동이 금지되었던 것이 1998년 노사정위원회가 노조의 정치 허용법 개정을 함으로써 가능해졌다. 2000년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2004년 국회에 진출함으로써 진보정당도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현재의 헌법은 87년 체제다. 지금은 이 헌법 자체가 낡았기에 개정해야 한다는 말이 계속 있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인권을 보장하는 당시의 헌법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87년 헌법은 특히 여야합의에 의한 최초의 개헌이었기에 의미가 있었다. 시민들은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한 단체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경실련, 참여연대 등… 그리고 국민기초생활법 제정 운동이라던지 호주제 폐지 운동 같은 개혁 입법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환경 운동 등을 통해 시민 참여 시대를 열었다. 광장 정치는 미군의 장갑차 사건, 광우병 촛불 집회, 한진노조 희망버스, 세월호를 지나 2016년 촛불 시위로 이어졌고 이는 윤석열의 탄핵을 이끌어냈다.

이렇게 민주주의를 키워드로 한국의 현대사를 확인하다보니 더 뜨겁게 느껴졌다. 결코 그냥 얻어진 것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고. 3권이 나오는데 오래 걸렸지만 이렇게 무사히 나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시 한 번 정리하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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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꿈꾸는 민주주의 - 민주주의 개념으로 독립운동사를 새로 쓰다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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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민주주의 시리즈 중 그 두번째 해당하는 내용이다. 제목을 통해 유추할 수 있듯이 민주주의의 눈으로 본 독립운동을 다루고 있다. 다만 시기는 1919년 3.1운동 이후 시점부터라 다른 독립운동사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를 유추하면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10년대 일제는 무단통치로 조선인에 철권을 휘둘렀고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에 차별을 두는 정책을 시행했다. 억눌려왔던 조선인들이 3.1운동 때 폭발한 것이다(여기에는 외부적인 요인도 영향을 미쳤다). 


1권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와 관련된 키워드를 목차로 구성했다. 자치, 주체, 권리, 사상, 정의, 연대, 해방이다. ‘해방’은 사실상 민주주의라는 키워드라기보다는 독립운동의 끝에 맞이한 결과에 가깝지만 독립운동사와 관련지으면 떠올릴 수 있는 제목이다. 이 키워드를 바탕으로 독립운동 관련 인물과 단체, 사건, 운동, 사상을 배치하였다. 조선처럼 제국주의에 의해 피해를 입은 나라는 봉건주의와의 결별 뿐 아니라 제국주의와의 투쟁도 해야 하는 지난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임시정부는 주권 ‘자치’를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국을 헌법으로 내세웠다. 총 다섯 번의 개헌을 통해 공포된 헌법은 민주공화국의 이념과 주권재민의 정신이 고스란히 담겼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식민지 조선은 외교권이 박탈된 상태였기 때문에 해외를 상대로 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노력을 벌였다. 1921년에는 중국으로부터, 1940년에는 미국을 상대로 외교를 벌였으나 사실상 승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20년대 초 다양한 정당이 만들어졌고 신간회는 합법적인 범위 하에 민족주의 우파 계열이 주도하여 자치 운동을 벌였다. 만주, 미국, 연해주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은 자치 조직을 만들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를 만들어 활동했다.


1920년대는 다양한 ‘주체’의 목소리가 들리던 시기였다. 학생들이 3.1운동에 나서자 조선총독부는 경성 시대에 휴교령을 내린다. 그러나 학생들은 고향에 내려가면서 운동 소식을 전했고 이것이 역설적으로 전국에 운동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금의 초등생에 해당하는 아이들은 동맹 휴학을 통해 항거했다. 이후 벌어진 광주학생운동 시위는 전국을 넘어서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까지 퍼졌다. 노동자들의 다수를 차지하던 농민은 소유주를 상대로 자체 운동을 벌였는데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직업별로 노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사회주의 유입으로 만들어진 단체를 중심으로 노동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는 계급 투쟁의 디딤돌이 된다. 조선총독부는 노동자 보호는 커녕 노동 운동과 노조를 불법이라고 치부하고 탄압하였으며 이에 맞서 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였다. 신여성이 등장한 이후 여성 해방과 인권론이 본격적으로 거론되는 계기가 만들어진다. 청년은 민족을 근대화시키고 문명화시킬 장본인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소년은 방정환이 인격을 부여하면서 과거와는 다른 주체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식민 권력에 맞서는 언론 수호 ‘권리’ 찾기 투쟁이 있었다. 천도교가 발행한 조선독립신문은 창간 시점이 절묘하다. 3월 1일에 발행된 덕분에 신문에 3.1운동 소식을 알릴 수 있었고 이것이 시위 확산에 도움을 준 것이다. 3.1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자 조선총독부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일보, 동아일보, 시사신문과 몇몇 잡지 발행을 허가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언론 검열은 더 강화되었고 언론인에 대한 탄압도 심화되었다. 이에 언론계는 신문지법과 출판법 개정을 요구하는 건의안을 제출하였고 전국기자대회를 열어 규탄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인간해방과 평등 해방을 꿈꾸며 만들어진 형평사는 호적 정정 운동을 하고 아동의 취학, 자녀 교육, 사원 교양을 주장했다. 특히 이들은 형평 운동에서 그치지 않고 다른 계급과의 연대를 이끌려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교육 운동은 특히 활발했다. 1885년부터 초등학교 의무제를 실시하던 일본과 달리 조선은 1940년 이전까지는 의무교육에 대한 공적 제도가 없었다. 이에 공립보통학교 설립 운동을 벌였다. 대학도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통해 민립대학기성운동을 벌였고 공립 대학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조선총독부는 1925년이 되어서야 경성제대를 허가했다. 농촌 계몽 운동, 노동자 교육, 여성 야학, 서당 개량 운동 등 다양한 민중 운동도 벌였다.


식민지 시기만큼 다양한 사상이 오가던 시기도 없을 것 같다. 저항의 동력이 된 민족주의는 민족 개조 논쟁 이후 경제적 민족 담론이 생산되며 타협적 민주주의 대 비타협 민주주의로 분화된다. 기본적인 민족주의에 조선의 문화를 바탕으로 다른 민족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민족주의도 있었다. 러시아 혁명과 3.1운동 이후 사회주의는 마르크시즘이 주도했다. 독립운동계는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로 민족해방, 사회주의 혁명에 의한 소비에트 건설의 선후가 무엇이냐에 따라 입장이 달랐다. 아나키즘은 민족주의도 사회주의도 거부한 채 반제국주의, 반파시즘을 주장했다. 직접혁명에 의해서만 사회혁명이 가능하며 정치혁명은 권력의 교체에 불과하다 여겼다. 민주주의는 자유, 평등에 입각한 대안의 가치로 민족을 전제로 하되 민주주의에 의한 민족의 자치를 표방했다. 다만 민족주의 진영은 민주주의를 일본과 식민 지배를 효과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도구로 보았다면 사회주의 진영은 평등한 민주공화국을 꿈꾸었다는 것이 다를 것이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평민에 의한 정치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놀라움이 있다.


‘정의’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때도 중요한 가치였다. 사상 검증을 한다며 조선총독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였고 고문을 비롯한 비인권적인 조치를 단행했다. 독립운동가의 후기에 따르면 고문으로 사건을 만드는 것은 일도 아니었으며 감옥은 죽음의 집이었다고 한다. 한용운, 유관순, 김창숙, 오동진 등의 옥중투쟁기는 책에 언급된 부분만으로도 감히 상상할수조차 없는 아픔이 느껴졌다. 식민지 조선은 행정권이 사법권보다 우위에 있어 재판소는 조선총독부 명령에 의해 조직되어 검찰 권한은 막강했으며(이때부터…) 판사 역할은 제한적이었다고 한다. 이에 짜여진 각본에 의한 조서 재판이 이루어지기 일쑤였기에 법정투쟁은 조선인에게 불리하게 흘러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변호사들은 조선변호사협회를 만들어 사회 단체와 연대하여 사회적인 이슈 사건을 해결했고 신간회를 주체적으로 이끌며 사회 운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다. 허헌, 김병로, 이인은 특히나 기억해야 할 변호사들이다.


3.1운동은 기본적으로 비폭력 운동으로 시작하여 선례를 남겼는데 ‘연대’ 투쟁의 시작이 되기도 한 사건이다. 이후 암태도 소작 쟁의에서 더 조직적인 연대 운동이 이루어졌다. 해방이 가까워오면서 좌우파의 연대가 끊임없이 시도되기도 했다. 한중 연대를 비롯한 국제 연대 등을 바탕으로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운동도 시도되었다. 평화를 원했던 동양 평화론자 안중근, 여운형도 있었다.

‘해방’은 민주주의가 실현되기 위한 조건이었다고 생각한다. 인민 민주주의, 반공 민주주의, 신민주주의 형태는 각기 달랐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민주주의였다. 통합 가치를 생각한다면 신민주주의가 조선에 정착될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싶다. 백남운은 인민정치, 민주경제, 민주문화, 민주도덕을 강조했다. 배성룡은 정치적으로는 의회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토지 산업의 사회화를 주장했다. 안재홍은 초계급성을 강조한 사회 통합을 주장했다. 


이처럼 저자는 독립운동이 민주주의 운동이었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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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향한 역사 - 시대의 건널목, 19세기 한국사의 재발견 민주주의 한국사 3부작
김정인 지음 / 책과함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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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구입해온 책을 기반으로 알라딘이 추천하는 책들을 간혹 볼 때가 있다. 그렇게 얻게 된 책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한국사 3부작 중 첫 권인데 시리즈가 올해 초 완간되었다고 하여 3권 다 구비했었다. 최근에 구입한 책들은 거의 다 완독했고 파시즘을 읽게 된 김에 이 시리즈를 읽어보면 좋겠다 생각하여 읽게 되었다.

민주주의가 최선이고 정답이냐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솔직히 회의적 시각으로 변해가는 중이다. 특히나 한국의 정당 민주주의는 양분화되어 소수당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는데다 그마저 다수당도 국민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현실상 내가 가진 의견이 국회에 반영되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정작 중요하게 해결되어야 할 과제는 산적해 있지만 그걸 외면하는 국회나 정부에 답답할 때가 많다. 그러나 어쨌든 지금으로선 민주주의가 차선책으로라도 가장 나은 대안일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은 19세기부터 20세기 초 대중 운동의 한 정점이었던 3.1 운동 이전까지 정치체제의 변혁 과정에 대한 역사를 다룬다. 조선에서 대한제국을 거치기를 지나 일제강점기가 될 때까지 짧은 시간에 조선은 압축적인 정치 변혁 과정이 이루어졌다. 신분제의 해체와 더불어 서양 근대 개념이 수용되면서 민중은 억압되어 있던 불만의 목소리를 분출하기 시작했다.

민주주의의 역사를 시간순으로 나열하지 않고 키워드를 중심으로 목차를 구성하여 내용을 정리한 점이 눈에 띈다.
인민, 자치, 정의, 문명, 도시, 권리, 독립 말이다. 인민, 자치, 정의, 권리는 민주주의에 반드시 필요한 키워드라면 문명은 조선이 왕조 국가에서 벗어나 근대 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지식인이) 먼저 수용해야 할 키워드였다. 도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따르는 결과이고 독립은 나라를 빼앗긴 지식인과 민중이 함께 외친 함성이었다.

‘인민‘은 19세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피지배층을 뜻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다 19세기 들어 정치적 주체라는 의미로 변화되었으며 소외 계층이 인민화되는 과정을 수반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소외 계층이라면 노비, 여성, 백정이라고 할 수 있다.
1801년 공노비가 해방되고 1894년 사노비까지 노비 해방이 되었으나 신분적 차별의 뿌리는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독립협회는 노비제 잔재 청산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동학은 여성과 남성은 다 같은 종교인이며 과부의 재혼을 허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독교와 독립협회는 여성을 위한 교육과 계몽 운동을 벌였다. 찬양회는 여학교를 설립해야 한다 기치를 내걸었으며 여기에 독립협회도 함께 가담하여 활동을 해 나갔다.
백정은 조합을 만들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었고 동학농민전쟁 시기 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다. 백정을 위한 목소리는 형평사 조직 후 모욕 호칭이나 교육 차별을 금지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해 나갔다.

‘자치‘는 대안 공동체적 개념이다. 천주교는 학문(서학)으로 수용되었다가 이후 종교로 수용, 확대되었다. 천주교는 자치공동체로서 교우촌(하느님을 따르는 친구들의 모임)을 만들고 화전을 일구거나 옹기를 만들어 팔며 공동노동/분배하는 조직을 시도했다.
동학은 천주교의 인간존엄적 평등 논리를 수용하면서도 조선 고유의 습속은 거스르면 안된다는 교리로 시작하였다. 최제우는 ‘내 안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했으며 최시형은 ‘모든 사람, 사물, 사건에 하느님이 있다.‘라고 말했다. 사람의 빈부귀천 뿐 아니라 사물, 사건에도 존엄성을 부여한 것이 놀랍다. 이들은 개인 수양이자 마음 공부를 가장 중요시했다. 자치공동체는 접주제(종교 공동체)에서 시작하여 포주제(정치, 군사 공동체)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였다.
천도교는 인내천 사상으로 대중들을 종교 운동 안에 끌어들였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종교 생활을 강조하였으며 시기에 맞게 독립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의정회, 전도사회, 소년회 등의 조직을 꾸려 활동했다. 특히 천도교소년회는 경어를 사용하고 스스로 벌어서 먹고 살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고 한다.

‘정의‘는 공평한 기회와 공정한 분배가 실현되는 투명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인민의 노력이었다. 삼정의 문란,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농민들은 생존권이 흔들렸고 이에 억눌렸던 설움이 봉기로 나타났다.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수많은 농민 항쟁이 일어났다. 민란 중심 세력은 빈농이었으나 유지층과 지식인, 수공업자, 노비, 유랑민, 날품팔이 등도 동조했다고 하면 나라가 얼마나 썩어 있었는지 이해가 갈 만하다. 정부에서 삼정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았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도리어 폐해가 심해지자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졌다. 동학농민군은 토지평균분작, 노비제와 천민 차별의 철폐, 청춘 과부의 재혼 허용, 지역과 문벌을 타파한 인재 등용을 강조하며 대의를 제시했다. 반봉건에서 시작한 전쟁은 청일전쟁을 전후로 반외세까지 더해진다.

‘문명‘은 근대적 시민이 되기 위해 받아들여야 할 개념이었다. 서양 문명관을 수용해야 나라가 부강해진다는 생각에 지식인들은 서양 학문에 주목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해 서양 문명 담론을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1894년 정부에 의해 보통 교육이 시작되었고 대중들의 호응도 이어지면서 사립학교 설립 붐이 인다. 음력 시간에 길들여져 있다가 이때 서양식 시간 관념이 받아들여지면서 양력이 일상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도시‘는 근대에 들어와 형성된 공간이자 자발적 결사체들이 시위나 집회로 목소리를 내는 공간이었다.
독립협회는 오늘날로 말하면 민회(국회)적 기능을 정부에 요구하였는데 고종을 비롯한 권력자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고 이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독립 협회는 매주 토론회를 열었는데 누구나 회원으로 가입할 수 있었지만 굳이 가입하지 않아도 토론회를 방청할 수 있었다고 한다. 토론으로 결성된 의견은 독립신문 등의 매체에 실어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국권 수호를 위해 전국에 284개의 결사체가 만들어지고 전국적으로 대중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이 시기 시위의 꽃은 독립협회가 주도한 만민공동회와 관민공동회가 아닐까 한다. 정부의 폭압적 진압이 아니었다면 좀 더 오래 유지될 수 있었을텐데 참으로 아쉽다.

‘권리‘는 ‘인권‘과 ‘민권‘을 자각한다는 의미였다.
조선에서는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인민화와 개인화가 동시에 진행되었는데 동학농민전쟁과 갑오개혁을 통해 제도화되는 과정을 거쳤음에도 본격적으로 개인이라는 개념은 20세기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리잡았다. 특권이 해체되면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벌어 먹고 살아야 한다는 자주노동이라는 개념도 퍼졌다(권세 있다고 남에게 빌붙어 얻어먹으려하는 자들은 더이상 좋은 시선을 받기 어려웠다는 뜻). 한편 교과서를 통한 윤리 교육으로 자립, 근면, 공공성에 대한 가치가 교훈적으로 전파되었다. 재판소 제도 설립 등 사법권이 제도화되고 신체형, 연좌제가 폐지되는 등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한다. 개인의 권리가 중요해진 시대가 되었지만 국권이 피탈되면서 국권과 민권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라를 위해 개인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으냐는 지금도 생각해볼 문제이나 예전만큼 집단의 목소리를 내기란 어려워진 게 아닐까 싶다. 오늘날의 지방자치 제도를 내놓은 사람들이 있었다. 박영효의 현회 제도(인민이 법을 제정하면 이것을 의회에서 논의하자)나 손병희의 향자치 제도가 그렇다. 유길준의 부민회는 비록 한성에서 시작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근대 말 식민지 초 조선에서 민중이 권리를 자각하고 목소리를 외치는 시기가 도래했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특히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여러 활동은 오늘날의 민주주의 형태와 비슷한 단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정치 체제는 왕조 국가에서 전제군주정으로, 입헌군주제에서 공화정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3.1운동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입헌군주제가 좀 더 대중적인 호응이 있었으나 민주공화정이 대세가 된다. 다음 권은 1920년대 이후부터 식민지 말까지를 배경으로 한 민주주의의 역사를 다루는 것 같다. 기대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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