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연의 맹은 양국의 주장을 타협 절충한 외교교섭의 산물이다. 거란은 관남 땅을 포기하는 대신 실리를 취했으므로 송군을 결정적으로격파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던 실정을 염두에 두면오히려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송은 연운지방의 회복이라는 숙원을 이루지 못했을 뿐 아니라 거란을 복종시키지도 못해 중화적자존심에 상처를 입고, 겨우 아우에 대한 형이라는 명목적 우위를 차지하는 데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 P72
송과 서하 사이에 화평이 실현된 직접적인 계기는 송·거란 - P87
관계의 추이였다. 거란은 송이 서하와의 전투에 국력을 쏟고 있는것을 틈타, 송에게 관남 10현의 땅을 요구하여 결국 세폐을 증액시키는이익을 보며 화친을 회복했다. 이러한 행보는 서하에게 바람직하지 않았다. 거란이 우호국인 서하의 혈전을 이용하여 혼자 이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요 사이에 화평이 실현된 상황에서 서하 역시 국내상황에 비추어 송과의 화평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화평은 말할 것도 없이 송으로서도 바라던 바여서 화평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 교섭에서의 걸림돌은 서하가대등외교를 기대한 데 비해 송은 서하를 신하로 보려고 한 점이었다. 1044년(송 경력慶曆 4, 서하 천수예법연조天授禮 이원호가 송에 신하의예를 취하여 하국주로 책을 받고 국경을 획정하였으며, 매년송으로부터 세폐로서 비단 13만 필, 은 5만냥, 차 2만 근을 받고나아가 매년 다음과 같은 재물을 얻게 되었다(총계 은 등 7만 2천냥, 비단 등 15만 3천필, 차 3만 근). - P88
관호형세호는 장원을 소유하고 농노적인 전호의 경작에 바탕하고 있었다. 즉 그들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지위는 장원과 거기에 나타나 있는 봉건적인 지배.종속관계인 지주전호관계를 기반으로해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관료로서 정치를 움직이고지방에서는 호족으로서 향리를 지도하여 지배계급으로 활동하였다. 더욱이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서 기술한 지주전호관계가 이후 원·명·청대를 통하여 전호의 지위 상승과 함께 그 성격이 변화하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중요한 생산관계로서 지속되었다는 사실인데, 이것이 송대에 성립한 의의는 실로 크다 하겠다. - P95
송초 이래 국내산업의 발달, 상품유통·화폐경제의 발전에 따라 진종(997-1022) · 인종 이후 국가 재정수입은 해마다 늘어나고 국고에는 막대한 잉여가 쌓였다. 한편, 재정지출 부문에서는송나라 군대의 허약성을 병사 수의 증가로 보충하려 한 데서 나온군사비의 급증, 문치정치에 따른 용관의 중대, 요와 서하에 대한세계 지출 등으로 크게 팽창하여 결국 세출이 세입을 웃돌게 되었다. 이리하여 인종 말부터 영종대(1063-1067)에 걸쳐 재정은 적자로 돌아서고, 이는 중소 농민과 중소 상인을 보호할 필요성과 맞물려 신종 때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었다. - P96
송대 화폐의 특징적인 현상으로서 전황(동전의 부족, 돈 기근)이 있다. 전황의 원인은 상업이 현저하게 발전하여 유통액이 크게 늘고 외국무역이 성행하면서 동전의 국외유출이 증가한 데 있었다. 거기에다 동전을 녹여서 불상이나 동기를 만들기도 하고 동전 가치가 등귀하자 부호들이 이것을 쌓아두게 된 것도 이 같은 상황을 조장했다. 전황은 지리적으로는 물산이 풍부하고 부유한 상인이 많은 동남의 여러 로와, 소비경제가 발달한 변경 부근이 심했고, 시대적으로는 주조액이 가장많았던 희령·원풍 시대가 심했다. - P120
송 초부터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될 때까지 국가재정은 삼사가관할하고 있어서 재상이라 해도 여기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왕안석의 신법이 시행되면서 청묘법, 면역법 및 여기에 부속된 방장·하도전河의 법, 농전수리법, 시역법 등 신법의 재정관계를 모두 사가 관할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들 새로운 재정은 모두 재상 왕안석이 장악하였다. 따라서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면서 국가재정은 종래처럼 삼사가 관할하는 것과, 재상인 왕안석의 지휘를 받는 사시가관할하는 두 계통의 재정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이는 지방재정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의 전운사(조사)는 종래와 같이 삼사에 속하여 삼사의 재정을 담당하였으나, 신법을 시행하기 위해 창설된 제거상평사(사)는 사시에 속하여 신법 관계 재정을 담당했다. 이것이 원풍 관제가 반포되는 큰 요인이 되었다. - P191
휘종 때 재상에 오른 채경은 ‘원우간당비元祐‘를 세우고 구법당을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그는 신법을 시행하였으나 이를 악용한 가혹한 정책으로 백성을 괴롭혔는데, 풍류천자 휘종에게 아첨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유지하기 위해 환관과 결탁하고 장기간에 걸쳐 정권을 장악했다. 휘종도 정치에는 열의가 없고, 도교를 신앙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국비를 함부로 낭비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는 지폐와 염인등의 유가증권을 남발하고, 절십대전과 협석전 같은 악화를주조하여 화폐제도를 혼란에 빠뜨렸다. 이에 관의 기강도 자연히 무너져 신법을 시행한다 해도 성과를 올리기가 어려웠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북송이 멸망하게 된 것은 결코 왕안석이나그가 시행한 신법 때문이 아니라, 휘종 같은 정치적 무능력자가 천자가되고 채경처럼 정치적 식견이 부족한 기회주의자가 재상이 되어 정치를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 P196
휘종 때의 신법에는 환관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있었다. 환관인 동관은 섬서·하동·하북로에서 균적법 시행하여 도시·향촌의 호시행에 곡물을 할당하고 이를 시가로 수매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부정이개입되면서 결국 이것은 강제적 할당이 되었다. 또 공전법되어 이것을 환관인 양전과 이언이 담당하였는데, 특히 이언은공전을 늘리기 위해 인민의 토지를 불합리한 방법으로 박탈하고 게다가 무거운 세금을 화폐로 징수하여 천하의 원성을 샀다. 이것은 주면화석 함께 북송 멸망의 요인이 되었다. 이로 인해 화북에과 송강 등의 반란이 속출하고, 양절로에서는(양산박)서는 양산락방랍의 난이 일어났다. 이렇게 하여 화북은 금이 침입하기 전에 이미 수습 불가능한 혼란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 P197
금은 송의 수도 개봉부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점령 후 이것을 어떻게처리할지에 대해 어떤 준비도, 계획도 없었다. 동북의 산속 오지에서튀어나온 여진인이 문화수준도 너무 높고 인구도 많은 한족을 통치할실력을 갖추고 있을 리 없었고, 그들 자신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있었다. 이에 금이 생각해낸 한지통치책이 괴뢰국가를 세워 송을 - P239
이맡기고 자신은 배후에서조종한다는 방책이었다. 이 방책 아래 세워진 것이 장방창張邦의 초楚였고, 유예劉豫의 제齊였다. - P240
진회는 논공행상을 하겠다며 장군들을 임안부로 불러들여 한세충과 장준을 추밀사로, 악비를 추밀부사로 임명하여 그들이 거느리고 있는 군대를 중앙으로 옮기고자 하였다. 이는 여러 장수들 사이의불일치를 이용한 것도 있고 해서 의외로 수월하게 성공하였다(1141년4월). 이렇게 하여 남송 초 이래 군벌세력을 형성하고 항전을 주장하며중앙정부의 명령에 따르지 않던 무장들의 힘은 약화되고 문관에 의한남송의 중앙집권정치가 회복되었다. 특히 여러 장군들 가운데 가장강경파였던 악비를 모반을 구실 삼아 옥에 가두면서 화평의 기반이마련되었다. - P256
진회는 화평을 실현하기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않았고, 반대자를 무너뜨렸으며,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독재정치를 강행했다. - P258
그러나 그가 주장한 화평은 송이 가진 국력의 한계를 높은 견지에서판단하고, 금의 내정을 제대로 살펴 금송 양국의 역학관계를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론이고 신념이었다. 그리고 이 결론을 실현시키기위해 그가 가진 모든 정치력을 쏟아부었다. 진회가 유능한 정치가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P259
강남개발은 진한秦漢 시대 이후 차츰 진행되지만, 역사상 특히 획기적인 진전을 보인 시기는 전후 두 차례다. 첫 번째가 육조시대고, 두 번째가 남송南宋시대다. 이 두 시기에는 모두 북방민족이 화북을점령 지배하면서 한족왕조가 강남으로 쫓겨 내려와 도읍을 강남에 두고 그 개발에 힘을 기울였다. 강남개발의 진전은 시대의 큰 흐름이었다. 남조시대의 비약기를 이어받아 수·당·북송 때 발전을 거듭하고남송 때 다시 비약기를 맞이하였다. - P316
송은 국경의 요지에 관영 무역장을 설치하고 이것을 각장権場이라고불렀다. 무역은 모두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며 관이 직접 무역을 실시하였다. 동시에 상인의 무역은 통제하고 세금을 부과하여 수입을 올렸다. 각장은 요를 대상으로 해서는 웅주州(하북성 웅현)·패주州(하북성 패현)·안숙군安肅軍(하북성 서수현徐水縣)·광신군廣信軍(하북성 서수현 서쪽), 서하를 대 - P334
상으로 해서는 진융군軍(감숙성 고원현固原縣)·보안군保安軍(감숙성 지단현志丹縣) 등의 국경지방에 설치하였는데, 무역 규모도 크고 제도도 잘 정비되어 있었던 것은 송·금 무역이었다. - P335
송 통일시대에 해외무역은 더욱 번성하는데, 외국 상선의 내항과함께 중국 상선 역시 남해로 진출하여 자바.수마트라로 항해하고 실론(스리랑카)을 거쳐 페르시아 만으로까지 항해하기도 했다. - P339
인쇄술의 발달등의 출판을송대의 학문과 사상의 발달, 종교 활동에 공헌한 것은과 출판사업의 성행이다. 당대의 불경·역본曆자서이어받아 오대 시대에 사천 성도를 중심으로 『구경 『문선文選』등』, 이 출판되었고, 중앙에서도 후당 이후 국자감을 통해 판 구경』이출판되었다. 문교文教를 중시한 송조에 들어와서는 인쇄 출판 문화가더욱 발전했다. 그 원인으로서 나가사와 기쿠야澤規矩는 자신의 저서『일본 한적의 인쇄와 역사』에서 다음의 7개 조항을 들었다. - P348
① 송대 인쇄술의 융성, ② 오대의 경서 관각을 이어받아 정경, 정사의관각을 촉진한 송조의 문치주의, ③학문의 흥륭, ④지묵판목紙墨板의 충분한공급, ⑤ 수험 준비서에 대한 필요성과 출판사업의 영리기업화를 낳은 과거제도, ⑥ 출판서적업의 독립, 7 대장경 등의 불서 출판을 촉진한 불교의 흥성. - P349
송대에 들어 통일정치의 시대가 되자 문치주의 아래에서 유학은 새로운 기운을 만났다. 유학 본래의 목적인 경륜經綸(도의道義에 의거하는 정치)‘ 정명正名(명분을 바로함)·수양의 자각을 심화시키고, 유학을 국가의 정치, - P352
개인 생활의 실제와 연결시키고자 했다. 즉 한·당 시대에 유행한 경전의 주석에 몰두하던 훈고학에서벗어나 불교의 흥륭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전개하였다. 또 외적으로 인한 어려움에 대응하여 정치사상을 진흥시키고, 정명론에 의해 화이의 구별을 바로잡는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이러한 신유학을 송학이라고 불렀는데, 천리와 인성을 명확히 했다고 해서 성리학이라고도 하고 이학이라고도 한다. - P353
북송 말기에는 휘종이 특별히 도교를 보호하였는데 그것이 부패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도교계의 이 같은 폐해를 타개한 것이 남송 시대로, 금국 영내에서 왕중양王重陽(1112~1170)의 전진교全眞敎, 유덕인劉德의 진대도교道敎, 소포진蕭抱珍의 태일교太-가창시되었다. 유·불·도 3교의 융합사상에 입각한 이 종교들은 실천적이고 서민적이었다. 특히 전진교는 선종의 색채가 짙고 불로장생에 중점을 두지 않는다는 특징을 갖고 있었는데, 후에 크게 발전하여 강남의 정일교正敎와 대립하며 중국 도교계를 양분하는 대세력을 이루게 된다. - P360
송 초에 유개가 한유의 문체를 계승하고, 구양수가 등장하여 고문 부흥의 기치를 올렸다. 이어 증공·왕안석·소순·소식·소철 같 - P364
은 대가들이 나와 송대 문장의 큰 흐름을 구축하였다. 명대에는 이들구양수 이하 6명을 한유·유종원과 합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라고 불렀다. 그들의 문장은 정치적 의견을 충분히 표명할 수 있는 명의통쾌한 것이어서 시대를 대표하는 문장이 되었다. - P365
한대의 문, 당대의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송대의 대표적 문학이 사다. 사는 당 중기에 일어나 오대에 번영하고 송대에 유행한 장르로서, 절구에서 발원한 노래하는 문학이다. 절구는 오언 또는 칠언의 네 구절로 이루어진 단문장으로, 변화가 적고 가창의 정취가 옅은 편이다. 그래서 이것을 축소하거나 또는 늘려 억양과 완급을 가하여 일정한 보식을 만들고, 보에 따라 글자를 채워 장단구를 배열하였는데 이것이 ‘사‘다. - P365
송대에는 산업이 크게 발달했다. 특히 농업의 진보가 눈부셨다. 농업생산의 향상은 수리전의 조성에 힘입은 경지면적의 증가, 이를 경영하는 장원제의 보급, 벼의 품종개량, 벼·밀의 이모작, 농기구의 개량보급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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