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 타이완 여행기 -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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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소설가 치즈코는 1938년 타이완을 방문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자신의 소설 《청춘기》를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를 감명깊게 본 현지부인단체 〈닛신카이〉가 타이완 총독부와 연합하여 초청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일본 촐판사에서 모든 경비를 대줄테니 타이완으로 가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의도가 불순하다 생각하여 가질 않았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늦었는데 결혼도 안한다며 성화였고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집안의 잔소리도 피할 겸 타이중으로 떠나오게 된 것이다.

타이중 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인 거리로 향한 치즈코는 과일 노점상의 판매원과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 부딪쳤는데 다행히 한 소녀의 통역 도움을 받아 위기를 해결한다. 그때 시역소(시청) 직원인 미시마가 그녀를 찾아낸다. 사실 타이중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치즈코는 현지인 거리를 경험하고 싶다며 나선 것이었던 것. 다카다 부인 댁에 도착한 그녀는 그렇게 타이완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시마는 현지에서의 일에 도움을 주고 통역을 맡기로 했지만 치즈코와 사사건건 의견 대립으로 맞지 않았다.
치즈코는 관광객들이 흔하게 먹는 음식이나 계속 먹어왔던 일본 음식보다는 진짜 현지인이 평소 먹는 음식들을 권해주기를 바랐다. 몇 번이나 요구해봤지만 미시마가 한 번을 들어주지 않자 치즈코는 폭발했다.
결국 다카다 부인은 다른 현지 통역사를 소개시켜주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과일 노점상에서 도움을 받은 그 소녀였다.

그녀는 왕첸허로 이름이 치즈코의 한자와 같았으니 결과적으로 둘은 이름이 같은 셈이었다. 치즈코보다 3살 어린 첸허를 치즈코는 샤오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치즈코는 관광 여행이 아닌 현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위해 1년 정도 살 집을 원했다. 다카다 부인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고 무사히 그렇게 1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치즈코는 샤오첸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샤오첸은 일본어, 타이완어, 하카어, 영어에 능했고 프랑스어도 접해본 언어 능력자였고 어린 나이임에도 처세술에 아주 능했다. 조용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샤오첸은 식민지 부유한 가문인 서출 출신이었다. 치즈코는 샤오첸과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공을 들이는데 반대로 샤오첸은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때는 1938년 타이완이 배경이다. 타이완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고 1938년 무렵에는 이미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통과하는 철도가 놓여진 후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라 철도 내에서는 주먹밥과 매실 장아찌만 있는 도시락만 파는 것이 허용된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 정책으로 내지와 본섬 현지인 간의 동화 정책이 시행되는 만큼 일본의 음식이나 풍습, 문화 등이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차별은 자행되고 있었다.

˝사기업에 고용된 혼토진 여성 통역사는 잡역부와 같은 거 아닌가요?˝
이런 말을 뱉고 있는 현지 농림 전문학부의 Ⅰ 서기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통역을 맡는 여성은 확실히 소수지요. 게다가 혼토진이잖아요. 실질적인 전문성이 있나요? 예전에 학교 선생으로 일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공학교에서 가르쳤던 것뿐인데요...˝ - P67
공학교는 타이완인이 다니는 학교를 지칭하고 내지인이 다니는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라고 불렸다. 치즈코는 이처럼 샤오첸이 자신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겪는 일들을 부당한 차별이라 생각한다. 내지인이고 남성이었다면 결코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오첸은 치즈코가 보기에 적극 대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치즈코는 그런 샤오첸이 때론 답답하다. 게다가 자신을 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동등한 관계로 대해주었으면 하지만 이마저도 잘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혼토진이자 통역을 맡은 제가 비서 업무를 수행하길 기대한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본섬 출신 통역사는 내지 작가의 전속 직원인 셈이지요. 겸상이 적절하지 않답니다. ... 함께 식사하려면 반드시 평등한 관계여야 하니까요.˝ - P114

˝토인삼은 가짜 인삼이죠. 이 세상에는요. 저를 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의 눈에는 첩실의 딸이자 본섬 국적의 여학생일 뿐이에요. 저는 그저 진짜처럼 꾸며진 채 사람을 속이는 가짜 인삼이죠.˝ - P254

타이완은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청(복건성 등)에서 내려온 한족인 하카인이 있고 가오사족이나 핑푸족처럼 다양한 타이완 원주민이 있다(번인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는 당시 일본인이 그 사람들을 부르던 멸칭이라고 한다). 푸라오인은 하카인 중 타이완어를 쓰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살다 보면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었을 듯하다.

치즈코가 왕첸허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첸허 씨는 어느 종족에 속하나요?˝
˝아오야마 선생님 매우 교활한 질문이네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천황의 자식이죠. 민족도, 내지인이나 외지인을 구분하지도 않....˝ - P57~58
왕첸허의 ‘교활한 질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그들도 식민지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도 이런 답을 한 것은 이미 수년의 시간이 흘러 이런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게 일본 제국주의가 원하는 답이기는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치즈코는 제국의 정책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제국의 ‘남진‘, 제국의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은 식민지에서 천황국의 동화 운동이 되었다. 이건 사람들이 저마다 지닌 서로 다른 문화와 교양을, 그 흔적을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행위다. ...
‘전쟁 앞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강력히 주장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곤 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전쟁이 여성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은 내지나 본섬이나 차이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 P161

치즈코는 샤오첸 앞에서 자신은 제국이 하는 행위(와 일본인의 차별적 행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며 계속해서 그녀의 동의를 구하려 한다.

˝내지에서 가져온 벚꽃을 강제로 본섬 땅에 심는 게 너무 제멋대로 같지는 않나요? 샤오첸도 이렇게 생각하나요?˝ - P151

˝재작년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로 짧게 여행을 갔었거든요. 홋카이도 이누이족과 오키나와 류큐족의 고유한 생활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더라구요. 두 지역의 개척은 메이지 초기의 일이었데 말이에요! 일장기, 대일본제국, 천황의 백성은 모두 야마토 민족이다.... 이건 제국의 염원이겠죠.
... 식민지 타이완, 조선, 만주국은 머지 않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가 걸어갔던 길을 걷게 되겠죠.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 P165

˝예전에 사람들이 그랬어요. 내지인은 러우싸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여긴다고요. ‘내지인은 사시미만 먹는다‘ 같은 경고를 들은 적도 있고요. ...˝
˝어떤 게 미식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편견을 가진 게 분명해요.˝
˝본섬 사람의 러우싸오와 내지인의 사시미는 ‘더럽다‘와 ‘깨끗하다‘로 나뉜답니다. ... 본섬의 장삼과 내지인의 와후쿠도 마찬가지죠.˝
˝러우싸오와 사시미는 모두 미식이에요. 장삼과 와후쿠도 다 아름답고요. 저한테는요. 세상 만물에 있어서 본질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 P202~203

치즈코는 샤오첸을 위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샤오첸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치즈코의 방식은 제국주의의 얼굴인 오만과 편견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 타이완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당시 타이완에 살고 있던 상황을 여러 모로 떠올려보게 된다. 이 책은 아오야마 치즈코가 쓴 소설을 양쐉쯔가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양쐉쯔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여행기라고 하지만 엄연히 소설이므로 실제 여행기가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일부는 좀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허구적인 내용도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충분히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지배-피지배, 남성-여성 간의 위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친구라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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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여행자를 위한 도슨트 북 - 모든 걸작에는 다 계획이 있다
카미유 주노 지음, 이세진 옮김 / 윌북아트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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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경식 선생님의 대표작인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읽으면서 미술사에 관한 책을 읽어보고 싶어졌다. 

막상 구매를 했으나 예약 판매로 뜨는 것이 아닌가. 실제로 받아보는데 시간이 좀 걸렸는데 이러다 구매가 취소될까봐 좀 걱정이 되었다는. 무사히 받아서 읽을 수 있었다. 

요즘은 대부분의 미술관에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 같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들으면 아무래도 혼자 미술을 감상하면서 놓치기 쉬운 부분을 알 수 있어 좋다. 다만 나는 평소 혼자 전시를 보는 것을 좋아해서 도슨트 프로그램을 매번 이용하지는 않는다. 물론 박물관 가이드는 거의 이용한다. 가이드는 휴대폰에서 앱이나 웹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개인 이어폰으로 들을 수 있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편리하다. 도슨트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경우는 좀 더 깊은 이해를 원할 때 듣게 되는 것 같다. 


우선 이 책은 미술관의 구조, 미술을 볼 때 유용한 개념들(이젤, 선, 구상, 제단화, 템페라 등)을 앞부분에 실어서 미술과 미술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그리고 뒷부분은 조토부터 뱅크시까지 미술사를 대표하는 화가들에 대한 본문 페이지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페이지에는 화가별 삶과 이력, 작품에 대한 특징, 평판, 대표작에 대한 설명, 화파에 대한 특징을 싣고 있다. 르네상스처럼 시대적으로 중요한 개념이라던가 비례, 원근법 같은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은 따로 페이지를 할애하여 설명하고 있어 좋았다. 비슷한 화풍을 지녔거나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처럼 서로 비교할 만한 화가는 둘의 대표작을 싣고 그림의 특징을 설명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는다. 카라바조와 젠틸레스키는 같은 유디트의 그림을 그렸지만 다른 관점을 갖고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그림을 감상하면서 한 화가의 화풍을 알아가는 것보다 비슷한 화풍의 화가가 그린 그림을 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점은 미술사를 언급할 때 화가가 살던 시기의 역사적 장소와 배경을 설명해주는 것은 물론 다른 세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알려준다는 것이다. 유럽 뿐 아니라 아시아의 당시 화풍과 대표 화가, 역사에 대해서도 언급하는 점이 흥미롭다. 예를 들어 들라크루아와 루벤스가 활동하던 같은 19세기 일본에는 에도 시대가 이어지고 있었으며 호쿠사이라는 대표 화가가 있었다. 그는 우키요에 예술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서 주목을 받았고 후지산 연작을 그린 화가로 유명하다. 일본의 우키요에는 유럽의 인상파 화가인 마네, 모네, 고흐, 고갱 등에게 실제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여성 화가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점도 좋았다. 최근 들어 주목받지 못했던 여성 화가들이 재조명되고 있는데 이들이 실제 미술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 어떤 작품을 갖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화가를 만나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아예 이름을 몰랐던 화가들과 작품을 만나는 것도 흥미로웠다. 


라파엘로의 부제는 신과 같은 예술가라고 되어 있다. 그는 독실한 신자였던 만큼 인간의 이상이 무엇인지 고민하여 그것을 화폭에 담았다. 그가 이상을 삼았던 시기는 고대였는데(고대 그리스로마 문명으로 돌아가자는 르네상스가 14세기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16세기까지 이어졌으니 그는 그 한복판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교황 레오 10세에게 편지를 보내어 고대 로마 재건 프로젝트를 건의하기도 했단다. 그의 그림에는 신과 같은 모습을 한 인간을 그려서 비례라던지 균형이 완벽하다. 그래서 관념적이지만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어서 추종하는 이들이 많았던 것 같다. 실제로 후대에 신라파엘파라는 것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의 두 번째 삶, 즉 명성의 삶은 시간도 죽음도 거칠 것이 없으니 그의 작품들과 그 작품들을 찬양하는 학자들로 인해 영원무궁하리라." 16세기 이탈리아 철학자이자 신학자 조반니 피코델라 미란돌라가 라파엘로에 대하여 한 말이다(P46). 

그는 당시 교황, 자신과 관련 있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다. 

내가 라파엘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방문하고 나서였다. 그 전에는 이름만 알고 있었지 그가 누구고 화풍이 어떤 것인지 잘 알지 못하던 상태였다. 그러다 실제로 보고 나서 아름다운 그림에 매료되어 전시를 보고 나오자마자 영어로 된 가이드북 등 관련 상품을 잔뜩 사왔었다. 지금도 가끔 펼쳐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그 때의 감각으로 돌아가곤 한다.


이를 비롯해서 다양한 분야에 뛰어났던 미켈란젤로, 자신의 초상화를 유독 많이 그린 렘브란트, 영국의 위대한 화가이자 풍경화의 대가였던 윌리엄 터너, 대담한 시도로 근대의 문을 연 귀스타브 쿠르베, 점묘화를 그린 조르주 쇠라, 20세기 회화의 문을 연 폴 세잔, 색채의 마술 샤갈, 추상의 대가 피에르 몬드리안, 호박 그림으로 유명해진 쿠사마 야요이 등 수많은 화가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몇몇 여성 화가들을 소개해본다. 

네덜란드 황금 시대를 대표하는 라헬 라위스는 암스테르담 최고의 정물 화가로 당시 유럽 귀족들에게 그림이 불티나게 팔릴 만큼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책에는 '과일과 곤충이 있는 정물' 그림이 실려있는데 화사한 붓놀림에 채광을 잘 이용한 덕분인지 놀랄 만큼 사실적이어서 중앙 하단의 과일은 꺼내 먹고 싶을 정도로 싱싱해보인다. 반면 상단과 모서리로 갈수록 어둡게 채색하여 한층 과일을 돋보이게 했다. 곤충들을 함께 배치함으로써 평범성을 

아프 클린트란 사람이 있다. 그는 말레비나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렸는데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유언에 따라 사후 20년 간 작품이 비공개 상태여서 1960년대에야 비로소 작품이 공개되었고 그로부터도 20년 후에나 점차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그는 스웨덴 왕립 미술학교에 입학할 정도로 재능이 특출났는데 작품은 자연과학이 바탕이 되면서도 신비 사상을 담은 영성에 기반을 한다는 것이 독특하다. 책에는 대표작인 백조 연작 중 그룹 9번 그림이 실려 있다. 

마리기유민 브누아라고 처음 알게 된 화가인데 역사화를 그렸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는 나폴레옹 1세 시대에 초상화가로 활약했다는데 스승이 다름 아닌 다비드였다고. 그렇지만 여성 화가로서 평론가들의 악평에 마음 고생이 많았고 결정적으로 남편이 더는 예술 활동을 하지 않게 하여 더는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니 참 아쉬울 따름이다. 책에는 '마들렌의 초상'이라고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작품이 실려 있는데 원래 작품 제목은 '니그로 여성의 초상'이었다가 이후 '흑인 여성의 초상'으로 변경되고 2019년 이후로 이 이름으로 변경된 모양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상이 변하는 만큼 사람들의 생각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상파 화가 중 베르트 모리조도 있었다. 그는 최초의 인상파 전시회에 참여했을 정도로 기량이 뛰어난 화가였다. 그는 카미유 코로에게 그림을 배웠고 특히 여성을 즐겨 그렸다고 한다. '요람'이라는 작품은 어딘가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 여성이 요람에 누워 있는 아기를 지켜보고 있는 그림이다. 주인공인 여성은 자신의 언니인데 언니도 화가였지만 결혼 후 그림을 그만둔 반면 모리조는 오랫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그림을 쉬지 않고 그렸다. 결혼이란 제도가 여성들을 가정에 가두고 꿈과 이상의 세계와 멀어지게 한 것 같아서 씁쓸했다. 


단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무게다. 추천사에 '이 책 없이 미술관에 가지 말 것'이라고 되어 있지만 양장본으로 책 무게가 상당하여 갖고 다니기에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미술관 나들이 전후 또는 미술 작품에 대한 기초 자료로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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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5-12-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술사...서양미술사의 원탑은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라고...미술사학자들이 입을 모아 말하더군요. 두꺼워서 읽기 좀 거시기 했는데 몇년 전에 문고본으로 나왔어요. 도판 제외하면 진짜 200여 페이지밖에 안됩니다. 개인적으로 문고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추천드립니다. 거의 모든 서양미술사의 원형이 되는 책...사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권이면 다른 서양미술사 책 안봐도 될 정도라고...서양미술 전문가가 그러더라구요..그런 후 미술관 소개 책을 보면 좀더 입체적이고 쉽게 보인다고..^^;;

거리의화가 2025-12-23 16:19   좋아요 0 | URL
언제 한번 도전해보겠습니다^^

그레이스 2025-12-24 0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이책들고?!
ㅋㅋㅋㅋ
저도 살까 하고 봤는데,,, 예약판매여서 장바구니에만 넣어놨었어요
나중에 판매소식이 왔을때 약간 흥미를 잃은 상태!
이 리뷰 보니 다시 궁금해지네요~
전 곰브리치 재독 중이예요~

거리의화가 2025-12-24 09:24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 님도 이 책 넣어두셨었군요. 이 책 다른건 몰라도 여성 화가들을 많이 다뤄서 좋았습니다.
집에 곰브리치 책이 있는데 엄청 두껍더라구요;;; 700페이지 가까이 되서 엄두가 안나는...!!! 재독이시라니 더 깊이 이해하실 것 같습니다.
 
해석에 반하여 수전 손택 더 텍스트
수전 손택 지음, 홍한별 옮김 / 윌북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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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내용(본질)이 아니라 스타일(형식)이다. 따라서 예술의 분석을 지양하고 더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법을 배워야 한다.‘ 1부의 ‘해석에 반하여‘와 ‘스타일에 관하여‘가 이 책의 전체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면, 2부에서 5부까지는 그 사례와 감상이다. 낯섦을 거부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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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열정과 광기의 정치 혁명
로버트 O. 팩스턴 지음, 손명희 옮김 / 교양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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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은 '공동체의 쇠퇴와 굴육, 희생에 대한 강박적인 두려움과 이를 상쇄하는 일체감, 에너지, 순수성의 숭배를 두드러진 특징으로 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이자, 그 안에서 대중의 지지를 등에 업은 결연한 민족주의 과격파 정당이 전통적 엘리트층과 불편하지만 효과적인 협력 관계를 맺고 민주주의적 자유를 포기하며 윤리적 법적인 제약 없이 폭력을 행사하여 내부 정화와 외부적 팽창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는 정치적 행동의 한 형태'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 P487


어떤 책을 구입하자마자 정독으로 2회독 이상을 해본 것은 오랜만이다. 독서 모임 책으로 이 책을 11월에 샀다가 1회독을 했지만 뭔가 미진한 것 같았다. 모임이 12월로 미뤄졌길래 그참에 정독을 한 번 더 했다. 한 번 더 봤다고 해서 책을 잘 이해했느냐 물어보면 자신감 있게 대답할 수 없겠지만 역시 1회독보다는 2회독이 훨씬 낫다는 것은 확실하다.


파시즘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나치즘(파시즘)과 대중을 선동하는 히틀러(나 무솔리니)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언급되는 내용이지만 그들이 연출하는 의식적 행동은 당시 대중에게 감정적 수사로 작용하여 먹혔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들의 행위는 과장된 연출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떡고물을 주었(기에 열광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파시즘은 어떤 사상, 이념과도 결합하여 유연성을 가졌기에 운동성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위한 설명보다 파시즘이 역사적으로 어떤 과정을 거쳤고 각 지역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 추적하는데 집중한다. 


파시즘은 1차 세계대전의 경험과 자유주의와 보수주의, 공산주의 사이에 제3의 질서가 만들어질 공간이 생긴 것이 직접적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자유 개인주의가 공동체를 무너뜨릴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속에 성립된 반자유주의, 이민 인구의 증가로 인한 내부 보수 세력의 결집, 그것을 이용하고 조장함으로써 성립된 민족주의, 인종주의가 배경이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파시즘 이데올로기와 파시즘 정권에 반드시 등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파시즘 정권은 다양한 이해 관계를 바탕으로 여러 과정을 통해 사회 속에서 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나오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제 조건(이자 상황)이 필요했다. 일단 대중이 정치에 전면으로 등장한 것, 볼셰비키 혁명으로 인해 기득권층이 위협을 받은 것, 좌파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이 벌어진 것이다. 파시즘은 무엇보다 근대성에서 발현된 갈등과 문제점을 현실에서 맞닥뜨린 군중이 대안적인 근대성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시점에서 나왔다고 본다. 어쨌든 저자의 말에 의하면 이 전제 조건이 없는 상황에서 파시즘과 비슷한 형태의 상황은 나올 수 있어도 파시즘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렵다고.


파시즘은 1919년 3월 23일 밀라노에 모여든 군중이 민족주의에 반하는 사회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 시작이었다고 한다. 파시즘의 기원이 되는 구체적인 사건이 있었구나... 그러니 나는 파시즘을 이데올로기와 구체적인 실현 형태와 섞어 놓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형태가 두루뭉술하여 그 시작이 언제지 떠올릴 수 없었던 게 어찌 보면 당연했다.

내가 생각한 파시즘의 이미지는 초기가 아닌 후기의 급진화된 파시즘에 가까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이념적인 접근으로 가볍게 시작했으나 사회적 상황과 구체적 현실에 따라 점점 더 과격해져 자리한 형태로 보이기 때문이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담아 정당을 만들었으나 초기에는 그 세력이 미약했다. 그래서 그들은 부르주아 정당과 결탁하는 선택을 감행했고 대중에게 가능한 이상적 현실을 보여주며 선택과 지지를 호소했다. 

파시즘 정당이 독일이나 이탈리아에서는 뿌리내리는데 성공했으나 다른 곳에서는 실패했던 이유는 지도자의 자질도 있겠지만 사회적 위기가 얼마나 더 큰가, 또 동맹 세력의 선택지가 거의 없는 상황인가에 따라 달라졌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기득권 보수층은 왜 군대를 동원하여 폭력적인 독재 정권을 수립하는데 나아가지 않았는가? 폭력을 선택했다면 대중과 노동자들, 지식인들의 반감에 의해 그들이 좌파의 손에 넘어갈지 모르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파시즘이 뿌리를 내리고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급진파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변화의 범위는 줄어들었다. 파시스트들은 혁명이란 단어를 언급하며 대중을 선동했지만 정작 사회경제적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민족 강화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공동체에 귀속시켰다. 특히 젊은 세대를 육성하여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하는데 무척 애를 썼다. 모든 파시즘 정권은 국가주의를 강조하여 외국으로부터 자국 문화를 보호하고 통제하는데 주력하면서 문화를 통해 국민 단결 메시지를 내세우는데 주력했다. 파시즘 정권은 경제적으로 저축, 투자를 강조하고 개인의 소비를 줄이도록 설득했으나 대공황, 전후 유럽 경제의 성장률은 1차 대전 이전의 유럽 성장률에도 도달하지 못했으며 일부 국가는 전쟁을 수행하는데 동원할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사실상 경제 개발보다는 전쟁 수행에 더 우위를 둔 것이 아닌가 한다. 파시즘 정권은 개인이 공동체의 삶에 참여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 혁명적이었으나 인권, 국제평화 등 전통적 헌법 수호 가치에 비추어 본다면 반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서 이야기했듯 파시즘이 마지막 급진화 단계에 이르면 자기 파괴(파멸)에 이르게 된다. 정권은 전 국민을 전쟁 수행을 위한 기계로 내던지게 하고 종국에는 민족과 국가마저 거부하는 단계에 이른다.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고 조국을 포함한 모든 것을 파멸시키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렇다면 궁금하다. 오늘날에도 파시즘이 있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1945년 후에는 파시즘이 막을 내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70년대 세계적인 석유 파동, 나아가 1990년대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사회적 위기는 특히 서유럽에 극우 정당이 들어설 수 계기가 마련되었다. 동유럽과 발칸 지역도 선회한 자유주의의 부작용과 영토 분쟁, 소수 민족과의 충돌로 인해 극우적 환경이 마련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저자는 유럽이 시장 자유와 경제 개인주의에 대한 공격이나 시장 규제로 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거나 헌정 질서를 파괴하는 등의 행위가 없기 때문에 극우정당들이 들어설 자리가 크지 않다고 보았다.

라틴 아메리카에도 파시즘과 비슷한 형태가 있으나 저자는 그들이 대중의 열광적 지지에 기반하지 않았고 팽창주의 노선을 추구할 만큼 자유롭지 않았으므로 독재 정권 또는 폭압 정치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은 천황제 파시즘 또는 위로부터의 파시즘으로 취사선택한 파시즘이라고 이야기하는데 그 전제 조건인 대중의 자발적인 행동이 없었는가. 그렇다면 1920년대 벌인 관동 대학살 등에 참여한 일본인들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이처럼 <파시즘>은 파시즘의 기원부터 바뀌어가는 과정을 역사적으로 서술하면서 나라별로 다른 양상을 보였던 이유를 맥락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그려냈다. 

그렇지만 한계도 보였다. 나는 저자가 과거 파시즘의 배경을 독일과 이탈리아 등 너무 유럽 중심으로 본 것이 아닌가, 파시즘을 전제 정치, 독재 정치나 폭압 정치와 구분하면서 그 범위를 너무 한정적으로 좁게 본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또 젠더적으로는 남성이 지도적 역할을 하고 여성은 보조적으로 그려지는 등의 아쉬움도 있었다.

이 책은 초판이 2004년에 씌여지고 2005년에 번역본이 나왔다. 그러다 보니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부동산 파산, 실업률의 급증 등의 경제적 위기(로 인한 계급적 갈등), 이민자 증가로 인한 사회적 문제(민족, 인종적 차별로 인한 대내외적 갈등) 등의 현 상황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저자의 생각과는 달리 현재 세계는 유럽도 극우 정당의 지지율이 급격하게 올라 1,2당이 되기에 이르렀고 연일 MAGA를 부르짖으며 지지자들을 선동하고 전 세계를 미국 질서에 맞게 다듬으려는 미국의 트럼프가 있다. 일본과 중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한국은 아니라 말할 수 있나. 


여러 모로 지금 이 혼란한 정국에 이 책을 읽다니 참 시기적으로 잘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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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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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부모를 잇따라 잃고 누이와 함께 바람도 쐴 겸 1983년 8월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을 떠나기 5개월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어머니도 꼭 같은 병으로 3년 전에 돌아가셨다니 두 남매 모두 그 슬픔이 컸을 것이다. 저자는 벨기에의 브뤼주에서 헤랄드 다비드의 ‘캄비세스왕의 재판‘이라는 그림을 보고 꽂힌다.
캄비세스왕은 기원전 6세기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군주인데 그림 속 주인공은 판사로 가죽이 벗겨지는 끔찍한 형벌을 받고 사망했다. 저자도 화가의 이름이나 이력이 생소했다고 하는데 나 또한 그렇다. 그림을 보면 너무 사실적으로 그려져 사실 계속 보고 있기가 어려웠다(이런 그림이 또 있는데 이는 뒤에 언급하겠다). 아무튼 헤랄드 다비드가 활동하던 당시 벨기에의 브뤼주는 세심하게 그려진 정물화가 유행이었다. 정물화는 색감이 화사하니 보고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되어서일까 어디에 놓고 보기에 안성맞춤이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당시 귀족들에게 정물화는 인기였다고.
저자는 이 그림을 보고 아버지의 죽음을 떠올렸다고 한다. 1920년대 아버지(저자에게는 할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저자의 아버지는 고국의 땅에 정착하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사람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좀 더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면 어떠했겠는가 그런 착잡함을 떠올리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내맘대로 되는게 아니지만 그럼에도 안타까운 그런 감정들이 내게도 와 닿았다.

저자의 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는 바가 있었다(당시는 한 개인을 정치적 이슈로 몰아가 파멸로 이끌기에 넘치는 흑색 시절이었다. 저자의 두 형은 그렇게 감옥에 몇 년을 가 있게 되었다. 이 책에도 여러 번 형에 대한 상황과 저자의 그에 대한 생각과 감정이 실려 있다).

저자는 여행 전 루브르 미술관에서 이 작품을 보아야만 한다고 점찍어두고 있었다. 작품을 보고 싶어했던 형을 대신해 저자가 직접 보고 그 감상을 전하기로 한 것이다.
밧줄로 묶여 있는 노예는 상체와 하체를 서로 반대 방향으로 뒤틀어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눈동자는 볼 수 없지만 시선은 저항하는 눈빛임을 느끼게 한다. 이 조각상은 ‘반항하는 노예‘라는 제목으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다. 이를 보면서 저자는 형의 상황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일부러 보러 가지 않았더라도, 우연히 스쳐 가다가 봤을지라도 상황상 형이 생각났을 것이다. 조각상을 감상하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써 내려갔을 그림엽서 속 편지의 내용과 그걸 받았을 형의 마음을 생각하니 나도 좀 울컥했다.

형에 대한 이야기는 고흐의 ‘거친 하늘과 밭‘ 그림을 보면서도 나온다. 고흐는 알려져있듯 테오라는 동생이 조력자였는데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자부심과 생활 사이에서 그는 여러 번 번뇌했다.
내 생활을 뿌리가 뽑히고 내 걸음걸이도 휘청휘청한다. 나는 내가 너희들의 저주스러운 짐짝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전적으로 그렇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염려하게 되었다. - P60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고흐의 경우는 화구까지도. 그것은 결코 적은 액수가 아니었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옛적부터 창조자·구도자·혁명가를 괴롭혀왔다. ... 창조자·구도자·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참고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 - P69
예술가라고 해도 생활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먹고 살지 못한다면 생계를 어떻게 유지해나갈 것인가. 그럼에도 대중에게 먹히고 팔릴 그림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할 때 고뇌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테오는 고흐를 뒷바라지하면서 형이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어쩔 때는 힘에 부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이처럼 살아 있는 생애 고흐를 괴롭힌 것은 생활 문제였다. 저자도 형의 처지와 상황이 안타까우면서도 그의 존재가 때로는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진품을 보지 않으면 그 훌륭함과 기막힘을 알 수 없는 그림이 있다. 모름지기 명작이라는 것이 다 그렇다 할 수 있겠지만 「게르니까」야말로 바로 그것이다. 도판으로 보면 「게르니까」에서 삐까쏘가 채택한 표현의 참신성이라든가 기발함 따위는 느낄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슬픔의 깊이, 분노의 격렬함 같은 것은 알기 어렵다. 바로 그와 같은 것들을 표현하기 위하여 고심을 거듭한 끝에 이러한 참신성이 산출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필연성을 깨달을 수는 없다. ...
일본에는 전쟁에 협력한 그림은 있어도 「게르니까」에 비길 만한 것은 없다. 전쟁 찬미는 더 말할 것도 없고, 한다하는 명인대가들이 전쟁에 협력한 그림을 그린 그 자체를 ‘없었던 일‘처럼 괄호 속에 묶어넣어둔 채 능청거리고 있는 퇴영적 정신에서는 「게르니까」가 태어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 P88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담은 게르니카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좋았다. 이는 게르니카를 언급하기 전에 일본 화가인 코이소 료오헤이가 그린 그림 ‘낭자관 행군‘을 언급함으로써 대비 구도를 만든 것이다(그의 그림은 전쟁이 아니라 어느 사막을 군인들이 지나가다 잠시 쉬고 있는 풍경화 느낌을 받는다). 일본이 군국주의를 향해 나아가던 때 당시 화가들은 전쟁을 미화하거나 선전하고 찬양하는 그림은 그렸어도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그림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피카소의 게르니카에 그림 요소들을 보면 전쟁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우성치고 뒤틀린, 몸부림치는 몸들을 말이다. 피카소는 한국전쟁 시기 학살을 배경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처럼 전쟁은 예술을 위한 하나의 표현적 배경이 된다. 예술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단번에 대중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동조하게 만든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알게 된 화가, 작품들이 많다. 그중 레온 보나라는 화가가 있다.

일반적으로 19세기 프랑스 미술사는, 들라크루아, 꾸르베, 밀레, 도미에, 마네, 모네 나아가서 고갱이나 고흐 같은 선구적 반역자들과, ‘쌀롱‘을 근거로 하는 권위주의적이고 공식적인 아카데미즘 화가들, 곧 뽕삐에들과의 투쟁의 역사로 이해된다.
보나는 오로지 그러한 뽕삐에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미술사상의 적방인 것이다. (이렇게) 보나가 살았던 19세기 후반, 보나는 빛나는 승자의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1세기가 지난 오늘에 와서는 완전히 미술사상의 패자 무리 속에 처박혀버렸다. 비정하다고 할 만큼의 콘트라스트이다. - P119, P122

레온 보나는 처음에는 지지부진했지만 초상화가로 이름을 알린 후에는 계속 승승장구했다고 한다. 당시로 말하면 프랑스 미술사에서 주류 화가계에 속했다고 할 수 있다. ‘화가 누이의 초상‘ 그림을 보면 그럴 만도 하겠다 싶다. 그러나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 고흐나 마네, 밀레, 고갱 등의 이름과 그들의 그림은 알려져 있지만 레온 보나(와 그 그림)는 거의 알려지지 못한 것 같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안 읽었으면 그 이름도, 그림도 보지 못했을 것 같다. 하긴 고흐도 생전에 자신의 그림이 이리 인기 있게 될 줄 몰랐을테니 생각해보면 놀랍다.

이제 앞에서 잠시 언급했던 그림을 마지막으로 소개할 차례다.

이 치졸하고 짝이 없는 무명의 그림장이는 ‘죽음을 생각하라‘는 외침 속에서, 그의 시대의 요구에 미련하게 충실한 응답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졸렬함으로 인하여 진실을 나타낼 수 있는, 으스스하고 더러운 한 폭의 그림을 남긴 것이다. 선남선녀들은 이 그림 앞에 망연자실, 피할 수 없는 죽음의 공포에 압도당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 P194

제목만 ‘죽은 연인들‘로 남아 있는 이 그림은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모양이다(찾아보니 15세기 독일의 어느 고딕 화가가 그렸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보고 있으면 기괴하기도 하기도 으스하기도 하고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인다. 만약 내가 관 속에 묻힌다면 저런 모습이려나 그런 생각이 잠시 들기도 했다. 사람은 죽으면 시체가 되어 썩고 부패한다. 혼이 있다고는 하지만 남아 있는 것은 육신의 모습 뿐이니 흙이 되기 전까지는 적나라한 과정이 진행이 될 것이다. 마치 그 과정의 어느 한 순간을 그림으로 포착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저자의 대표작 중 하나임에도 이제야 읽게 되었으니 너무 늦은 셈이다. 눈에 띄는 것은 그림이나 화가의 원문을 발음이 나는 대로 한글로 표현했다는 점(미껠란젤로, 삐까쏘, 게르니까 등)인데 이것이 좀 어색한 독자가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여행자는 정착자의 시선이 아니다. 경계인이자 이방인인 저자의 시선이 여행자의 위치와 오버랩된다고 느꼈다. 여행 일기이자 자신(과 주변)의 처지와 상황에 대한 읆조림, 그림과 절묘하게 섞이는 설명이 참 인상적이었다.

청한 하늘이 금세 먹구름에 뒤덮이듯이, 하나의 희망 뒤엔 금세 새로운 불안이 밀려든다. 역사는 단선적으로 나아가지 않는 법. 세계를 전체적으로 본다면 좋은 변화가 많이 있었다고는 하기 어려우며, 가까운 미래가 희망에 차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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