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뤼노 라투르 컴북스 이론총서
김환석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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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의 입문서인 이 책은 작년에 나왔다. 올해 나온 책 이외에 라투르의 사상을 요약 정리하여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근 신간과 서로 비교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여러 모로 라투르 사상의 흐름을 잘 정리한 책이라 보여진다. 한 명의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약력을 들여다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의 이력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개하면서 자연스레 사상이 전개되고 심화되는 과정을 저작과 함께 소개한다. 이보다 탁월한 구성이 있을까. 


브뤼노 라투르는 임용 시험에 합격하고 교사에 근무했다. 그리고 니체의 <비극의 탄생>을 읽으면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코트디부아르에서는 프랑스과학연구소(ORSTOM)에 군 복무 대신 근무하면서 과학에 관심을 가진 동시에 과학이 객관적임을 증명하기 위해서 다른 학문 등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인류학에 관심을 갖기도 한다. 

그의 사상에 다양한 학문이 걸쳐 있는 것은 이런 이력에서 온 경험들이 축적된 덕분이 아닐 수 없다.


라투르는 이후 엔지니어 양성기관인 파리 국립고등광산대 혁신사회과학센터의 교수에 임용되었다. 그곳에서 과학사회학 연구자인 미셸 칼롱을 만나 행위자 연결망 이론(ANT)을 개발하는데 여기에 영국 과학지식사회학 연구자인 존 로도 동참했다.

행위자 연결망 이론은 과학과 기술의 여러 서로 다른 요소들이 과학자, 엔지니어에 의해 긴밀한 연결망으로 결합되는 과정으로 만들어진다고 정의했다. 여기에 중요한 것은 과학자, 엔지니어 등의 인간 행위자 뿐 아니라 기구 등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를 읽을 때 이 부분에서 강한 충격을 받았다. 사물에도 역할을 부여한다고? 당시로서는 정말이지 파격이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그는 서구 근대주의의 모순, 과학기술에 의한 산물이 무한대로 뻗어 나가며 현대의 생태 위기를 불러왔다고 진단했다. 이는 사람 대 사물 등 이분법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존재론과 행위 원칙을 세워야 함을 알린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근대주의자이지 탈근대주의자는 아니라고 명명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포스트 모더니즘, 탈근대 이론 등과 구분해볼 수 있겠다).

라투르는 과학에는 어느 정도 중요성을 부여했으나 사회학에는 유독 비판적이었던 모습을 보인다. 사회학은 사회학에만 머물러서는 안되고 다른 것과 결합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을 역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이나 과학과의 결합을 말한 것이 아닐까. 


그는 ANT에서 나아가 지구인이 살아가기 위한 존재 양식의 인류학적 방법론을 새롭게 구상한다. 이를 위해 선택한 것이 가이아 이론이었다. 가이아 이론은 1970년대 이미 나온 바 있는 이론으로 지구의 자기조절 시스템에 대한 자연 과학론이었다. 

가이아 정치생태학을 통해 인류세의 생태 위기를 극복하려는 라투르와 슐츠가 ‘계급’ 개념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된 것은, 과연 어떻게 하면 서구 역사에서 정치를 조직하는 이념이었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그리고 신자유주의(그리고 극우 민족주의)에 이어 생태주의가 그러한 이념이 될 수 있을지 고심한 결과였다. - P157

계급 투쟁은, 지구사회적 갈등의 얽힘이었다. 경제화를 통해 이를 협소하게 틀 짓는 것은 지구적 존재들(인간 포함)을 위한 공간을 마련할 수 없기 때문에 더 이상 적절하지 않다. 따라서 생태계급은 경제화 대신 거주 가능성 문제를 제기한다. - P161

이처럼 라투르는 가이아 이론을 ANT 관점에서 재해석하여 정치 생태학 관점에서 분석했다. 그가 제시한 생태 계급은 세계화에 반대하고, 국경으로 둘러싸인 내부로의 회귀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마지막 챕터 제목이 ‘지구정치신학’이라는 것에 눈길을 끌었다. 그의 사상에 종교가 아무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는 ‘종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것이 인간으로 하여금 존재론적 관점에서 실재를 의식하게 하여 이전에 사실이라고 생각한 것을 새롭게 재정렬할 수 있게끔 한다고 보았다. 그는 정치신학이 현대에서 종교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비전이라고 말한다. 종교의 순기능이라면 여러모로 이기주의와 파괴 행태로 나아가는 이 세계의 행위자들에게 윤리적 태도를 갖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는 그렇게 인류세에 대응해야 하는 정치신학을 ‘지구정치신학’으로 명명했다. 라투르는 지구종교신학의 올바른 행위자로 공교롭게도 얼마 전 타계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언급한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말했다. “이 자매는 우리가 하느님께서 지구에 선사하신 재화들을 무책임하게 사용하고 남용하며 가한 해악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울부짖고 있습니다.” 그는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보다도 인간 자신임을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브뤼노 라투르의 사상을 시간 순에 따라 요약 정리하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여러 모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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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귀스타브 도레 그림,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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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전쟁의 흐름을 도레의 그림과 함께 간단한 설명과 지도를 통해 장면으로 구성해놓았다(현명한 책의 구성인듯). 전투와 인물에만 집중하지 않고 전쟁을 위해 떠나는 사람들, 사상자들에 주목한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서로 간 담소, 먹고 마시기, 운동, 언어 등도 주고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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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 - 완결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3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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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이야기 3권은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면서 3차 십자군부터 마지막 십자군까지를 다루기 때문에 기간도 길고 무척 다양한 인물이 등장한다. 역사를 다루지만 인물에 초점을 맞춘 책이기 때문에 특히나 3권에서 흥미로운 인물을 많이 확인할 수 있어 개인적으로도 재미롭게 읽었다.

3차 십자군에서 살라딘에 맞섰던 리처드. 4차의 엔리코 단돌로, 6차의 프리드리히 2세, 7차의 루이 9세, 8차의 메메드2세까지. 여기에 2차부터 참여한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에 이어 소년 십자군이 새롭게 등장한다. 


1, 2차 십자군때까지 영국은 개인 자격으로만 십자군에 참여한 사람이 있었을 뿐 집단으로 출병한 적이 없었다. 이는 프랑스와의 영토 이권 다툼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 헨리는 십자군 원정 비용을 위한 세금을 거두고 전쟁을 준비했으나 그의 아들인 리처드가 반기를 들면서(당장 떠나기엔 자금, 병력이 부족) 왕위 다툼이 벌어졌다. 이 싸움에서 리처드가 승리한 뒤 그가 왕의 자리에 오르고 1년 뒤 십자군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필리프 2세가 참여했고 신성로마제국에서는 프리드리히 1세가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참여한다.


1189년 8월 28일 십자군은 아코 성벽에 이른다. 아코는 항구도시로 출입구는 항구 밖에 없으므로 성벽이 뚫리면 아코가 함락되는 것이었다. 살라딘은 아코 방어군을 지원하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리처드도 도착하기 전이었다. 리처드는 살라딘의 보급선을 중간에 가로채는데 성공하고 아코에 도착한 뒤 십자군 최고사령관 자리에 오른다. 

리처드는 사령관에 올라 투석기를 성벽을 향해 쏘지 않고 성문을 향해 쏘는 방식으로 변경한다. 성문은 목재로 되어 있으므로 돌로 된 성벽보다 무너뜨리기 좋다고 여겼던 것이다. 또 전선을 방어선과 공격선으로 분리하여 병사들에게 명확한 임무를 부여했다. 이러니 어떻겠는가. 살라딘은 그에게 휴전을 요청한다. 십자군의 협상 조건은 포로를 조건 없이 송환하고 모든 이슬람교를 퇴출하며 현금을 지불하라는 것이다. 지불이 모두 완료될 때까지 이슬람교도를 인질로 잡아두는 것으로 하고 기한은 한달로 정했다. 아코 공방전은 2년 만에 이렇게 종료될 수 있었다. 그나저나 프리드리히 1세의 최후는 당황스럽기 짝이 없었다. 당시 계절은 여름이었는데 병사들과 함께 강으로 뛰어들어 최후를 맞았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1191년 9월 7일 십자군 대 이슬람군의 1차 격돌인 아르수프 전투가 시작된다. 아르수프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에 있던 항구도시였기에 살라딘 입장에서는 이곳을 먼저 수중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리처드의 별명이 ‘사자심왕’이 된 것은 상대측인 이슬람 병사들에 의해서다(그는 후방에서 지휘를 하지 않고 언제나 앞선 지휘로 용맹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맞수가 인정하는 상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전투는 아르수프 바로 아래에 자리한 야파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이슬람 기병수는 2천명이었으나 십자군 수는 기사가 불과 17명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수적인 불리함을 뒤집고 야코에서도 리처드를 위시한 십자군은 승리하고 야파를 탈환했다. 살라딘 측과 리처드 측은 강화  협약에 성공한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되찾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강화 협상은 무려 이후 26 년간 전쟁 없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성공한 회담이라고 생각한다. 

리처드는 영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오스트리아 레오폴트 부하에게 걸리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으나 몸값을 지불하고 무사히 귀국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노리는 동생 존이 있었다. 담판 승부를 벌이려 했던 존은 이미 프랑스로 도망친 뒤였는데 리처드는 그럼에도 프랑스까지 쫓아가서 그와 화해한다. 

이후 리처드는 프랑스에게 빼앗긴 영토를 수복하는데 전념한다. 그러다 전선에서 석궁을 맞아 41세 나이에 사망했다. 리처드 뒤를 이은 것은 자연스레 존이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후계자 분쟁으로 정신이 없었던 이슬람 측으로 인해 이집트가 최종 목적지가 되었다. 수송을 위해 이탈리아 해상국들을 물색하는데 최종 선택은 베네치아가 되었다. 이때 베네치아 공화국을 통치하던 최고 지도자인 도제는 엔리코 단돌로였는데 그는 협상에 응하면서 얻은 땅 절반을 받아내고 수송을 돕기로 한다. 

비잔틴제국도 당시 권력 투쟁으로 혼란스러웠다. 황제인 알렉시우스가 나라에서 쫓겨나는 상황에 놓이고 이 때문에 베네치아에 도움을 청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에 새로 등극한 황제는 두카스 무르주풀루스, 십자군의 항전이 거세자 그는 단돌로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단돌로가 이를 거부하자 자국의 시민으로부터도 인기가 없던 그는 나라를 팽개치고 도망치기에 이른다(?). 공석이 된 황제 자리로 십자군은 쉽게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올 수 있었다. 


제5차 십자군은 중근동의 그리스도들을 주력으로 하고, 해군 및 수송은 제노바, 목적지는 이집트 항구인 다미에타로 정해진 채 시작되었다. 13세기 초는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모두 이집트 술탄의 지배 하에 있었기 때문에 이집트 쪽으로 방향을 정했던 것이다. 십자군은 다미에타를 수중에 넣었으나 이후 나일강 부근에서 진군에 어려움을 겪고 여기에 이집트 술탄이 군대를 보내자 더는 싸움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이에 십자군은 술탄과 협정을 맺고 병사들을 철군시키는 대신 다미에타는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강화 협상은 총 3차례에 이어 싸움을 지속하면서도 이루어졌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는 개인적으로 십자군 전쟁 중 가장 마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6차 십자군을 이끌었던 그는 교황 그레고리우스의 종용에 십자군을 출발시켰으나 역병이 돌아 병사들이 나가 떨어지자 출발을 연기했다. 이로 인해 교황의 심기를 거슬렀다는 이유로 파문을 당하기에 이른다. 6차 십자군은 소수 정예집단으로 병력을 구성하고 이탈리아 해상에 도움을 얻지 않고 직접 해군을 꾸렸으며(수송용 배도 직접 제작), 지휘 계통을 일원화시켰다. 이때 술탄 알 카밀은 동생 알 무아잠이 죽자 또 다른 동생인 알 아슈라프에 의해 위협을 받는 상황이었다. 아코에 십자군이 당도했을 때 교황의 칙령이 도착했다. 그러나 알 카밀과 프리드리히는 싸우지 않고 공생 관계를 맺기 위해 프리드리히는 파라딘을 협상자로 내보내 협상을 성공시킨다. 교황이 이를 가만 두고 볼리가 없다. 안 그래도 미운 털이 박힌 프리드리히였는데 이 일로 인해 프리드리히 영지인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프리드리히의 결정이 잘못되었나? 나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협상자였던 알 카밀은 10년 간 서로 전쟁을 벌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놈의 명분을 위해 전쟁터에 병사들을 내보내는 것이 잘하는 일인가?


유럽의 그리스도 세력은 10년이 지난 뒤 전쟁으로 기존 영토를 수복하자는 흐름이 대세를 이룬다. 그런 만큼 유럽의 왕실과 제후, 기사 세력들이 전폭적으로 참여했다. 이때 주력군은 프랑스 군이었는데 왕은 루이 9세였다. 왕이 직접 십자군을 이끄는데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도였기 때문에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리고 수송 및 해군은 제노바 선단의 도움을 받았다. 이번 십자군 목표는 이집트에 일격을 가하여 이슬람 세계를 흔들리게 하기 위함이었다. 다미에타는 이번에도 공략에 성공하였으나 나일강이 문제였다. 십자군은 결국 나일강에서 많은 병사들을 잃고 대패한다. 그들은 카이로까지 가는 것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하는데 되돌아가다 이슬람군의 공격을 받고 왕과 귀족들이 포로로 잡혀 감옥에 갇혔다 카이로로 연행되는 굴욕을 당한다. 


1258년 바그다드(수니파 아바스 왕조의 수도)가 몽골의 공격을 받아 왕조가 멸망한다. 루이 9세는 8차 십자군을 꾸린다. 이번에도 유럽 각지의 왕족이 참여했고 로마 교황이 도장을 찍으면서 출발한 군대였다. 그러나 리더인 루이 9세가 튀니지아의 카르타고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는 바람에 이슬람에 주도권이 넘어가버린다. 이후 십자군과 이슬람 간의 강화 협상이 이루어졌고 십자군이 스스로 철수하기로 하면서 기나긴 십자군 전쟁이 막을 내린다. 


장장 2백 년에 걸쳐 이어진 십자군 전쟁이었다. 성전을 위한다는 명분 아래 교황이 승인, 기사들이 모이고 왕과 황제가 자금과 병력을 모았으나 피해를 본 것은 이름 모를 사상자들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다만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해상 이용 능력을 가졌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등의 해상국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수확이다. 신권에 대한 의문과 함께 인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르네상스도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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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 마지막 대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 트뤼옹 지음, 이세진 옮김, 배세진 감수 / 복복서가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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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노 라투르는 새로운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은퇴하고 편안히 늙다가 평화로이 눈을 감을 수 있었다. 그들의 어릴 적 여름과 그들 손자 세대의 여름은 비슷할 수도 있었다. 물론 기후는 유동적이었다. 그러나 기후가 어느 한 세대의 노화와 나란히 가지는 않았다. 현재 나의 세대, 즉 베이비부머세대의 쇠락은 기후의 쇠락과 함께 가고 있다. 나는 내 세대의 역사에서 8월을 떼어내어 내 손주들에게 물려주고 은퇴하고 늙어가고 죽을 수가 없다.” - P36


작년에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을 독서 모임을 통해서 읽었던 적이 있다. 시간이 없어 입문서를 읽지 못하고 그 책을 바로 읽었기에 책을 소화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갈증을 채우기 위해서 입문서를 읽어보자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또 수개월이 지나가버렸다. 최근에 이 책이 나온 것을 계기로 읽어보자 싶어 선택했다. 

우선 책의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판형은 작은데 양장본이고 안의 글자 크기도 작지 않아서 좋았다. 

그리고 책의 제목을 잘 선정했다는 생각을 했다. 이 책의 내용이 브뤼노 라투르가 타계하기 전 인터뷰를 담은 기록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라투르의 목소리로 자신의 이력과 사상에 대한 소회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장점이다.


20세기는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무엇이 근대적이고 근대적이지 않은지 진술한다고 해서 명확해지는 것은 없다. 

“근대인은 끊임없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부인했습니다.”


과학 기술과 근대 문명은 인간 주체를 강조하면서 세계를 분리하고 구별하면서 이를 유지, 가속화해왔다. 라투르는 근대 문명을 유지해온 이 합리론은 세계적 변화로 인해 더는 지속될 수 없다고 말한다. 기후 위기와 바이러스의 공격은 이제 더는 우리가 예전처럼 살 수 없음을 자각하게 했으니까 말이다. 과연 앞으로 인간 생존이 가능한 조건으로 지구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 것인가 생각해보면 이대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물론 너무나 큰 명제 앞에 서면 벽에 부딪치는 느낌이 든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활양식을 좀 바꾸어볼까.’가 최선의 방법이라고 보여진다. 근대화는 맹목적이어서 문제였다고 라투르는 지적했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든 의문을 품으면서 나아가야 한다. 


‘구성’은 좋은 기술과 나쁜 기술, 선법과 악법을 가려내는 역량을 말합니다. … 구성의 대안적 메시지는 논쟁에 뛰어들고, 진보와 옛 것의 분리를 포기하고, 거주 가능성이라는 근본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생산보다는 거주 가능한 조건을 우선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려면 할일이 많지요!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도 없지만 이제 우리가 근대인이었다는 생각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작업장은 완전히 열려 있어요. - P60~61


라투르는 영국의 생리학자이자 공학자인 제임스 브룩이 구상한 개념인 가이아 이론을 가져왔다. 원래 가이아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가져온 개념으로 가이아는 모든 신들을 품은 모신에 해당한다. 그는 변한 지구적 환경에 맞춰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를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의 이름을 ‘가이아’라고 명명했다. 


기술한다는 것은 앉는다는 것, 자신을 위치시킨다는 것, 토대를 지닌다는 것입니다. 철학과 존재론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서 나는 늘 실용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할 만한 해결책을 찾습니다. 그래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이렇습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적어보시오." 혹은 "당신이 무엇에 의존하느냐가 영토를 정의할 겁니다." - P77~78

세계를 인식할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이렇게 자신의 입장을 어디에 위치시킬 것인가 생각해보기를 당부했다. 여기서 라투르는 존 듀이의 말을 인용하는데 신발 속을 들여다보는 사람만이 어디에 뭐가 있어서 발이 아픈지 안다고.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공간이 어디이며 내가 기대어 살아가는 것들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정의해나가는 작업은 일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지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학파를 만들지 않았지만 이것이야말로 오늘날에 맞는 진정한 모델이라고 생각합니다. 서로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이 집합적으로 작업하는 모델 말입니다. 그 학문 분과들은 매체도 각기 다르지만같은 문제에 접근하지요. 이러한 모델은 과학적 생산물을 내놓고 A급 혹은 B급 학술지에 발표한 후에 대중에게까지 확산되기를 바라지 않고 오히려 연구자 못지않게 혼란에 빠져 있는 대중을 향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으로 중요한 모델이지요. - P110 

라투르가 오늘날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완전히 다른 학문 분과들 간에 집적 결과를 내놓기 위해 하는 노력들을 강조했던 점이라고 본다. 특히나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 하나의 학문의 이론과 실험 결과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대학에 각종 융합 학부가 생기고 학과와 학문 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은 어느새 우리에게 자연스러워졌다.


"여러분은 과학자니까 사실을 생산해내십시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아요! 이자벨 스텡거스가 자기 방식대로부단히 보여주었잖아요. 사실들은 희박하고, 과학적 발견은 정말 희소하지요. 어디서나 통하는 과학적 방법에 대한 관념, 그러니까 하얀 가운을 걸치면 아무 말이나해도 과학적 권위가 있는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는 관념은 완전히 허구입니다. 그런 건 사기예요. - P131

그는 근대를 비판했지만 그럼에도 과학(적 증명)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알았던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과학은 반증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가설이 사실로 밝혀진다고 해서 그것이 계속 ’팩트’로 남아있다고 단정지어서는 안 된다. 이는 새로운 이론이 나오면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는 가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학적 사실을 접근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라투르는 철학이 여러 구성원들이 가진 다양한 양식들이 유지되기 위한 방식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구성원들이 충돌하고 갈등할 때 어떤 방식으로 상호 존중하며 나아갈 수 있을지 알려준다).

어떤 존재가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매순간 다른 무엇을 거쳐야 하지요. 내가 여기 와서 당신과 얘기를 나누기 위해 그전에 아침부터 먹어야 했던 것처럼. 아주 평범한 방식으로 그렇습니다. 나는 삶의 끝까지 나를 지속하기 위해 계속해서 타자를 집어삼킵니다. 이러한 성질을 지니지 않은 존재는 하나도 없습니다. 존재들은 다른 존재들을 거치지 않는 한 결코 시간 속에서 지속할 수 없어요. - P169

그것은 존재로서의 존재를 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은 토대를, 나머지 모든 것을 떠받치는 기저를, 모든 사물을 구성하는 그것을 정의해주지 않습니다. 철학은 겸손한 실행이요. 더욱이 그 또한 글쓰기에 의존합니다. 하지만 철학은 없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 P172


라투르 입문서로 제격인 책이었다. 내용이 쉽고 친절하게 쓰여져 있어 저자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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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비 2025-05-02 0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 책 살까말까 망설였는데, 이 리뷰를 읽어보니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거리의화가 2025-05-02 10:50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도움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2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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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에 입성에 성공한 십자군은 이제 방어를 위한 작전에 돌입한다.
예루살렘 초대 왕은 고드프루아가 맡았으나 1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의 동생인 보두앵이 18년 간 예루살렘 왕을 지켰다. 그 기간동안 십자군은 시리아와 팔레스티나 부근 정복을 끝낸 뒤 에데사, 안티오키아, 트리폴리, 예루살렘으로 세력이 쪼개지면서도 통합 세력을 유지했다.

제2차 십자군의 발단은 에데사를 잃은 일 때문이었다. 그곳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예루살렘 부근의 십자군 세력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이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로마 교황도 자신이 직접 가지는 못하지만 대리 자격으로 수도사인 베르나르두스를 보내기로 한다. 1차 십자군이 민중들과 봉건 제후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번에는 최고 권력자인 프랑스 왕(루이 7세)과 독일 황제(콘라트 3세)가 직접 참전했다. 이는 베르나르두스의 설득이 먹혔기에 가능했다. 또한 1차 때 부족했던 물자 보급 문제를 위해서 이번에는 이탈리아 해양 세력을 이용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 떠난다.
다만 규모는 1차 십자군에 비해 소수였는데 그래도 정예병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소아시아를 지나면서 투르크군의 게릴라 작전에 당해 상당수의 병력을 잃고 황제가 부상을 당하는 손실을 입는다. 프랑스군도 적의 기습으로 병력을 일부 잃고 한동안 고립을 겪었다.
그래도 목적지인 다마스쿠스를 위해 남은 병력은 이동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군량도 부족해지고 십자군에게 특히나 익숙하지 않았던 극심한 더위는 그들을 곤란하게 했던 것 같다. 게다가 이슬람의 우누르였던 알레포 지역의 누레딘(그의 아버지인 ‘장기‘가 지략가였다)이 다마스쿠스에 온다는 소식을 듣자 십자군은 다마스쿠스에서 철수를 결정한다. 이로써 2차 십자군 입장에서는 전쟁이 실패했다.
독일 황제와 프랑스 왕은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유럽으로 돌아간다. 로마 교황도 실패의 책임을 제대로 지지 않았다. 교황 대리로 떠났던 베르나르두스가 그럼에도 성인에 올랐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연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다치고 죽은 병사들은 자신의 고향도 아닌 외국의 어느 산야에 묻혔으나 책임을 지지 않았던 사람은 정작 성인에 오른다는 것이...

당시 이슬람의 시아파 주류는 셀주크투르크족이었고 수니파 주류는 아랍족이었다. 이집트 파티마 왕조의 힘이 약해지자 재상인 샤와르의 아들 카릴이 수니파 권력자였던 누레딘에게 군대를 요청한다. 이때 장군 시르쿠의 조카였던 살라딘이 이집트로 향했다. 샤와르가 급사망(!)하면서 살라딘이 재상의 자리에 오르고 누레딘은 카이로(시아파)까지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고 권위자는 누레딘이었지만 살라딘은 자신의 이름을 알릴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전진기지를 세우고 길을 나선다. 이때 유럽 세력은 올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기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위해 나선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종교 기사단,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 병사들을 중심으로 구성한 세력 중심의 군대가 아코를 떠난다. 다마스쿠스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목을 막을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살라딘은 하틴 전투에서 완승을 거두면서 갈릴리 지방을 손에 넣는다. 사실상 팔레스티나 지방의 항구도시를 수중에 넣는 쾌거를 거둔 것이다.

1차 십자군 방어를 맡게 된 발리앙 이벨린은 60여명 정도로 예루살렘을 맡게 되는 상황에 놓였다. 그는 기지를 발휘해 예루살렘 내 있던 16살 이상의 장정들을 모두 기사로 임명한다. 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였던 상황에서 그는 회담을 택한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생각이었기에 그의 결정은 현명했다고 보여진다.
아무튼 이슬람 세력은 그렇게 88년 만에 예루살렘 성도를 자신의 영역으로 얻게 되었다.

템플 기사단과 성 요한 기사단으로 대표되는, 수도사와 기사의 겸업 집단인 종교 기사단은 십자군의 산물이다. - P.34

중근동에 건설된 십자군 사이의 성채는 대표적인 것만 해도 백개가 넘는다. ‘성채가 아니라 요새‘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해 보이는 소규모 건축물과 감시원만 두고 있던 탑까지 더하면 2백개가 훨씬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수많은 방어 시설이 근동 서쪽 절반의 좁은 지역에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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