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민의 한국전쟁 - 해외파병을 둘러싼 문제들
천자오빈 지음, 박철현 옮김 / 빨간소금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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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에 대해 학계는 주로 중국공산당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정책 결정에 따른 초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따라서 중국 시민은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져왔다. 한국 저자들이 쓴 한국전쟁 관련 책에서도 주로 중국(과 소련)은 정권 결정자 중심으로 그려져 왔는데 한국은 시간이 지나면서 시민의 목소리가 담긴 책이 나온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중국 시민을 전쟁의 주역으로 보고 그들의 언행에 주목한 것이 특징이다. 시기적으로는 중국이 참전을 시작한 1950년 11월을 중심으로 하여 전후 4개월 남짓이 대상이다. 책에서는 참전한 군인들 뿐 아니라 다양한 일반 시민들의 동향(도시민, 농부, 문화예술인 등)을 담고 있는데 이는 『신화사통신』 기자들이 시민의 목소리를 수집하여 선택해 내놓은 1차 자료가 바탕이 되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현장 재구성을 위해 중국 각지에서 얻은 자료를 조사 검토하는 과정을 거쳤다.


전쟁이 발발하자 베이징 시민들은 노조, 협회, 보습학교, 공산당위원회와 파출소, 세무소 등 다양한 전쟁 관련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3차 세계대전에 대한 불안이 경제에 다시 악수가 되는 결과를 낳았다(전쟁 초기에는 대체로 3차 세계대전의 발발 여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대학생들의 진로 선택 문제에도 영향을 주었다. 푸단대학 4년생인 구제강의 조카딸 가오루이란은 진로 고민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어 초췌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어머니나 삼촌을 돌보기 위해 본가에 가까운 곳에서 취업하기를 바랐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졸업 뒤 진로 결정에 큰 영향력을 가진 대학의 공산주의청년단이 그녀를 토지개혁 운동에 보내려 했지만, 가오루이란은 지주들의 거센 저항으로 신변이 위협받을까 주저했다. 그러나 참여하지 않으면 조선과 가까운 "둥베이 지역으로 가든가" 타이완 진공 작전을 담당하는 "제3야전군에 입대해야 한다. 모두 거절하고 싶지만, 그러면 장래는 없다"라는 딜레마에 빠졌다(P51). 기본적으로는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전쟁을 (회)피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시민들은 국공내전이 종결되면서 이제 겨우 평화를 얻었는데 또 다시 전쟁이냐며 불만을 터뜨렸다. 특히 유지 등 기반이 있는 사람일수록 전쟁이 확대되면 지금의 지역을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가야 한다는 생각에 좌절했다. 둥베이 지역 사람들 같은 경우는 만주 사변 때 관동군의 폭격을 받은 경험이, 시난의 충칭 사람들의 경우도 충칭 폭격의 경험이 있어 폭격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고. 


그렇다면 지식인들은 어땠을까. 우선 1950년 당시 "지식분자"의 정의부터 보자. 1947년 3월에 수신청 등이 책임 편집한 《사해》(중화서국 출판)에서는 "지식분자"를 "광의로는 흔히 교육을 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협의로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을 삶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 즉 정신적 노동계급인 사람을 가리킨다. ... 그러나 1949년 혁명을 기점으로 지식분자의 정의가 바뀌었다. 같은 해 10월 《신명사사전》에서 "지식분자"를 "흔히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며, 그 10배에 해당하는 지면을 마오쩌둥의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완전한 지식이라는 논의에 할애했다. 동시에 "반지식분자" 항목은 대학을 졸업하고 이론에 치우쳐 실천 지식을 갖지 않는 이를 가리켰다(P85~86). 지식인들은 정치 스펙트럼에 따라 붉은색에서 초록색까지, 나라를 위한 적극 참여에서 가벼운 관여, 미루기, 불관여,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양상을 보인다. 

주커전은 미핵 공격 가능성에 주목했다. 중국의 조선 참전이 공식화된 11월 중순이 되자 방사능 피해를 우려했다. 그러면서 중국 과학 내부의 후진성을 비판하고 더 나은 학문 연구 환경을 조성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주장했다. 한편 이때 교회 관계자나 기독 학교 교원 측에서는 친미 감정이 강했기에 교원과 학생 간 갈등이 적지 않게 발생했다. 

무거운 세금에 경영이 악화되자 도산 위기에 처한 상점들이 많아졌다. 이는 연구 환경에도 악영향을 주어 대학 등은 경영 압박을 받는 사례가 속출했다. 


상공업이 발달한 톈진, 상하이, 홍콩 지구는 어떤 모습이었나. 톈진과 상하이는 당시 중국 내 공장 수 1, 2위를 다투는 곳이었고 홍콩은 중국인들의 자본이 많이 진출한 장소였다. 이곳의 상공업자들은 원료가 부족해지고 조세 부담이 증가하며 무역이 단절되는 등 경제 여건의 악화가 우려되는 상황을 예견했다. 대체적으로는 정권을 불신하여 살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여겼다. 따라서 예금을 인출하겠다며 대거 소동이 벌어졌고 암금융시장의 이자율이 급증하였으며 통제 물품을 사재기하는 등의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톈진 상공업자들이 공산당과 가까웠다면 상하이 상공업자들은 국민당과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이는 북양 정부 시절에서 비롯된 것으로 따라서 상하이 상공업자들이 더 정권의 정책에 회의적이었다.

노동자, 농가는 해외 파병, 후방 지원에 투입되었다. 이중 농민은 대체로 평화를 선호하고 전쟁을 두려워했는데 이는 공산당의 선전과 교육이 잘 먹혀 들지 않았음을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일부 농민은 정권이 교체될지도 모른다며 토지개혁으로 얻은 땅을 처분하는 이들도 있었다(특히 한반도와 가까운 지역일수록 더 그랬다고 한다). 후방 지원은 한반도와 인접한 둥베이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기술직을 제외한 단순 작업에는 대부분 농민들이 투입되었다. 이중 토지개혁에 불만이 있었던 농민들일수록 후방지원에 회의적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장병들 중 해방된지 얼마 안 된 지역에서 새로 입대한 이들의 경우 친미 감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에는 중일전쟁 때 대일협력군이나 국공내전 중 국민당군에서 귀순한 경우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파병에 소극적이었다고. 대다수의 장병들은 앞선 전쟁이 끝나고 이제는 안정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망을 가지며 참전하기를 꺼렸다. 19병단에 조선 출동 명령이 내려진 것은 10월 초였다. 하지만 이미 8월 중순에 이 병단을 제13병단의 후속 부대로 가을 수확 뒤 산둥성과 허난성에 배치한다는 계획이 군 상층부에서 비밀리에 논의되고 있었다. 이 병단의 장병들은 조선에서의 전황에 다라 자신의 복원이 갑자기 중단될 수 있다고 직감했던 것 같다. 실제로 제13병단은 7월 중순에 복원 절차를 중지하고 복원 예정인 인원을 군에 붙잡아 두었다. 당시 장병들의 또 다른 관심사는 결혼 문제였다. 실제로 19병단의 복원 예정자들은 정치 학습 과정에서 1950년 5월 1일에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혼인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혼인법 제19조는 인민해방군 "군인이 본 법률의 공포일로부터 기산해 가정과 2년간 소식 왕래가 없고 그 배우자가 이혼을 요구하면 이혼을 허가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P302). 

장병의 사기는 승전과 패전에 따라 정반대로 갈린다 인민지원군 장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신흥리 전투에서 이긴 부대에서는 "적이 패퇴한 사실을 듣고, 들판에 쓰러져 있는 적의 시체를 보고, 승리와 그 의미에 대한 선전을 들으면 기분이 조금씩 좋아졌다 적극적으로 전투를 요구하면서, 일전을 벌이기도 전에 조선은 해방될 것이고 미군은 역시 약해서 국민당군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투가 순조롭지 않고 사상자가 많은 부대에서는 "'미중 공멸'이나 '수지가 맞지 않는 전쟁이다', '승리의 구호는 들려오지만 그림자는 없지 않은가'"라는 얘기가 나왔다 "비행기나 포병을 보내 공동으로 작전하지 않은 것이나 준비되지 않은 전쟁을 시작한 것을 원망했고, 심지어 마오 주석까지 원망했다"(P328). 


중국 참전 후 전세가 전환되고 나자 시민들은 달라진 반응을 보인다. 평양이 인민군의 수중에 들어가자 시장은 안정을 되잦았고 이전과는 달리 "해볼만하다!"며 적극적인 태도로 변한다. 1950년 12월 20일에 청간위안과 동급생 3명의 이름이 나란히 실린 수송학교 배정 비준 명단이 학교 게시판에 게시됐다. "군복을 입고 혁명의 전사가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럽다"라고 느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다음 과제는 입대까지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가족의 반대를 넘는 일이었다 청간위안의 아버지는 국민정부 시절 난징시 교육국의 관료이자 중양대학 교육학부 교수 및 교무주임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에는 안후이성의 한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군사학교 지원 의사에는 "중학교도 졸업하지 않아 천박한 지식밖에 없는 사람이 '혁명'이라는 공론을 떠들어봤자 소용 없다"라며 강하게 반대했다 청간위안은 더 이상 설득한 더 이상 설득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모집사무소에서 나이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도록 16세라고 신고해 입대 수속을 밟았다. 외아들이 작별 인사도 없이 입대한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아들을 되찾기 위해 대학 시절 동급생이자 화둥구 당위원회 서기였던 커칭스에게 편지를 보내 아들이 학업을 이어가도록 설득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자녀의 혁명 참여를 지지하라는 훈계뿐이었다(P474). 그러나 타이완과 가까운 지역이었던 푸저우나 칭다오는 국민당군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물론 전쟁으로 인한 경제 제재는 계속 되어 물자 부족으로 인한 피해는 여전했다.


이 책은 한국전쟁 참전을 '미 제국주의의 불법적 북한 침공에 대항해 북한을 도운 정의로운 전쟁'으로 규정한 종래의 지배적인 '국가 서사'에 대한 도전이자, 한국전쟁 참전과 건국 초기 중국의 국가 건설을 바라보는 기존 연구의 '위로부터의 시각'에 대한 도전이다. - P495


다만 책에 실린 다양한 사례는 모본이기에 실제 전쟁의 양상을 담고 있다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한다. 주목하지 않은 목소리(와 그에 따른 상황)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중국군의 파병이 결정되기까지의 과정, 그 이후의 양상을 시민의 목소리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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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 아래서
가산 카나파니 지음, 윤희환 옮김 / 열림원(도서출판)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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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도로 위에 있게 될 거야.˝ 10년 간 가지 못한, 태어나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고향. 팔레스타인에서 요르단으로, 이라크에서 쿠웨이트로. 작열하는 태양 아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이 밀입국을 위해 길을 내딛는다. 이를 비롯해 여러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의 군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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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에 팔레스타인 번역가의 이중생활이라는 책도 나와서 관심이 가던데 이런 책도 나왔군요. 화가님 서재는 좋은 책이 보고입니다. ^^

거리의화가 2026-07-31 16:24   좋아요 0 | URL
2023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간 상황은 지지부진한데… 최근 미국과 이란 간의 전쟁이 중동으로 번지고 있는 것도 영향인 걸까요. 여기 저기 전쟁이 그치질 않으니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바람돌이 님께도 좋은 책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압록강은 흐른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00
이미륵 지음, 안삼환 옮김 / 민음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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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2022년 '독립운동열전' 책에 언급된 덕분이었다. 확인해보니 2000년에 이 책이 번역되어 나온 적이 있었고, 2010년에도 나왔으나 절판되었다. 내가 구입하려 했을 때는 이미 소설을 구할 수 없어서 아쉬워하던 찰나였다. 그러다 이번에 민음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과거 식민지 조선에서 1919년 3월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사상 불온 등을 이유로 옥고를 겪었다. 한편으론 혐의의 칼날을 피하기 위해 이 땅을 떠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사람들이 있다. 이미륵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여러 편의 소제목으로 구성되어 어린 시절부터 겪은 자신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내며 간접적으로 조선의 현실을 보여준다. 그는 189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시기가 참 교묘하다. 아주 어릴 때는 대한제국 시기를 겪었고 기억이 날 무렵에는 조국이 사라졌으니 말이다. 


이미륵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통해 한학을 공부하며 여러 경전을 두루 읽었고 나중에는 서당에서 훈장님으로부터 심화 학습을 거쳤다. 아버지에 의해서 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으나 그는 그것을 꽤나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11살이 되었을 때 그가 이미 중용과 맹자를 읽은 터였던 만큼 아버지는 한문 고전 공부는 그만하면 되었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그는 신식 학교에서 서양 교육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기차를 만드는 방법, 달까지 거리를 추정하는 방법, 전력을 만드는 방법 등을 배우게 된다. 하지만 이런 시간도 얼마 가지는 못했다.


어느 샌가 시내에는 일본군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민가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마을은 흉흉했다. 곧 전쟁이 일어난다고도 하고 세계가 멸망한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우리의 임금님이 물러나셨다.” 왕의 옥새가 찍힌 고지문이 방에 붙어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읽었다는 왕의 편지가 이렇게 허망한 글일 줄이야 어찌 알았으랴. 그런데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 고지문이 국권피탈 소식임을 인지하지도 못했을 것 같긴 하다. 이미륵은 얼마 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르게 되기도 했다. 


일제의 통치는 조선에 여러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911년이 되면 일제에 의해 새 교육령이 발표된 후 서당 교육은 구교육으로 치부되었고 신교육인 서양의 수학, 과학 교육 등을 배워야 하는 시기가 온 것이다. 게다가 일본어로 교육을 받아야 했으니 일본어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실제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던 것 같다. 그에게는 수학, 물리, 화학 등 모든 것이 명백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어머니는 그의 괴로움을 알고 신식 학교를 그만두라 이야기한다. 그는 한동안 농부의 집에서 지내며 방황의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 가출을 감행했던 적도 있다.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가려 했던 것이다. 물론 후회하고 돌아오기는 했지만. 


방황을 끝내고 그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하면서 대학 입학 시험 준비를 위해 독학하며 열심히 매진한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말했다. “지나간 일에 너무 괘념하지 말아라! 새로운 문화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보다 앞서 있고… 네가 그들로부터 무엇인가 배우고자 하는 마당이니, 네 온화한 성격을 늘 유지하고 그들의 거친 태도를 아울러 참아내도록 해라.” 그는 때늦은 공부에 열등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이런 위로와 응원은 그에게 지지가 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이후 경성의학전문학교 학생이 되었다. 경성의전은 당시 조선 최고 교육기관들 중 하나로 조선을 여행하는 사람은 그 학교를 방문할 정도로 유명했다. 다만 강의와 실습을 선택할 수 없는 등 여러 모로 규율이 강해서 학교라기보다는 군대 같았다고 한다. 


여섯째 학기가 지나고 있을 때 그는 친구로부터 시위 소식을 듣게 된다. 정부 직속의 학교를 다니고 있었던만큼 그는 가능한 정치적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친구는 민족과 관련되는 일이 일어났는데 참여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야기한다. 고민하던 그는 친구와 같은 길을 가겠다 결심하고 3.1운동에 참여했다. 이 소식은 후에 어머니께도 알려진다.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불안해한다. 실제로 얼마 후 사태는 심상치 않게 전개되었다. 일제의 검거 작전이 시행되자 어머니는 어느 날 그에게 짐을 싸고 빨리 떠나라는 지령을 내린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넌 네 갈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그때 이미륵은 어머니를 두고 돌아서면서 3.1운동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고 고백한다. 행동하지 않았다면 그는 학교를 다니며 조선에 남아 어머니와 살 수 있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부랴부랴 떠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압록강은 흐른다>는 책의 제목이자 소제목 중 하나이기도 하다. 짐작하겠지만 이 내용은 그가 압록강을 건넌 뒤 어느 곳에서 조국을 바라보며 읊는 감상이다. 

아득한 옛날 이래로 이 끝없는 만주 땅으로부터 내 고향을 분리하고 있는 그 국경의 강은 막을 길 없이 세차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쪽은 모든 것이 크고 어둠침침하고 진지했고, 저 건너편은 모든 것이 작고 쾌활했다. 짚으로 지붕을 이은 밝은 집들이 언덕들 곁에 흩어져 있었다. 여러 굴뚝에서는 벌써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멀리 밝은 가을 하늘 아래에 한 무리의 연산들이 다른 연산들로 연이어지고 있었다. 산들은 석양을 받아 빛났고, 어스름 속에서 다시 한번 활짝 빛을 발했다가는 푸른 연무 속으로 서서히 잠겨 들었다. 나는 멀리 남쪽에서 골짜기들과 여울들을 거느린 수양산을 본 것 같았고, 어릴 적 매일 저녁 그 위에 앉아 저녁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하던 삼층 석탑도 내 두 눈 앞에 보이는 듯했다. 나는 남쪽으로부터 바람처럼 날아온 것에 틀림없는 그 천상의 소리를 두 귀로 약여하게 듣는 듯했다. 압록강은 그칠 줄 모르고 콸콸 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었다(P189~190). 

읽는 내내 정말이지 짠했다. 이 모습을 보며 발길이 제대로 떨어졌을지. 


이후 그는 기차를 타고 심양(묵덴)을 거쳐 산해관으로, 이후 난징까지 곧장 이동했다. 그리고는 상해에 도착해서 유학생을 대상으로 상담하는 조선인을 찾아간다. 망명을 위해서는 중국 여권이 필요했는데 여권이 나오기까지의 기다림은 지난했다. 이미륵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조선 학생들이 망명을 위해 같은 절차를 밟았던 것 같다. 언제 해결될지 모르는 상황에서의 기다림은 까마득하지 않았을까. 마침내 1920년 초가 되어 여권을 구할 수 있었다고. 

그렇게 거대한 증기선을 타고 세계 곳곳을 돌며 마침내 그는 독일 땅에 닿았다.


한때 유럽을 가고 싶어 기차를 타고 싶어했지만 완전히 낯선 세계에서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삶을 정착해야 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생활이 좀 정리되자 매일 그는 고향에서 돌아온 소식을 살펴보기 위해 우체국에 들르기를 수개월 동안 했다. 안타깝게도 어머니의 소식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다고 한다. 결국 그렇게 제대로 이별하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떠난 길이 마지막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면 당시 얼마나 많은 이들이 그런 삶을 경험했을까 싶어 마음이 먹먹하다. 


이미륵은 독일에 정착해서도 세계피압박 반제국주의의회에 유일하게 한국 대표로 참가할 정도로 조국을 위한 일을 놓지 않았다. 아무튼 마침내 읽고 싶었던 소설을 읽고 나니 속이 후련하면서도 한편으론 여러 소회가 든다. 읽고 싶으셨던 분들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보시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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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6-07-30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리뷰에서 이미륵이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 쫘악 펼쳐지는거 좋네요.

거리의화가 2026-07-31 16:20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소설 이미륵이 한국에 떠나기까지 인생을 담아놨더라구요. 참 좋았습니다.

책읽는나무 2026-07-31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화가 님도 압록강 책을 읽으셨군요?
저는 이번에 이미륵이란 작가도 처음 접했어요. 기회가 되면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7-31 16:22   좋아요 0 | URL
나무 님도 왠지 좋아하실 것 같은 소설이에요. 한국에서의 이미륵의 삶을 엿볼 수 있더라구요.
 
있는 곳이 집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2
왕겅우.왕마거릿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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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중엽까지 중국행을 늦춘 덕분에 두 가지 혜택이 내게 돌아왔다. 받아놓은 졸업증서가 싱가포르의 새 대학 지원을 위한 자격을 충족해주었다. ‘비상사태’란 이름의 반영 항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나처럼 현지 출생도 아니고 국적도 없는 중국인의 신분은 입학 자격에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도 말라야가 자리잡아 살 곳이라는 생각을 점차 받아들이셨다. 지역 중국인 중 타이완의 중화민국 지지자들과 베이징의 신중국 지지자들 사이의 정치적 분열을 부모님은 마음속으로 예상하면서 내가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다. - P18

앞선 회고록 1권 후기에서 왕겅우의 싱가포르 선택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히 언급했었다. 싱가포르로 가기 직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상황이었다. 나뉘어진 정치적 선택지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기란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물론 말라야 현지의 정치적 혼란도 한몫 했다. 말라야 연방이 말라야 공산당이 독립을 위해 세운 말라야 민족해방군을 상대로 비상사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그가 입학한 말라야 대학은 영국인 관리의 행정을 도울 현지인을 훈련하기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한 곳이었다. 일종의 제국 시민을 키우기 위한 곳이었다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영국식 교육에는 익숙하면서도 현지 동남아시아 시스템과 역사를 이해에 대한 인식력은 약했다. 왕겅우는 말라야 출생이 아니었기에 특히나 정치 활동 참여, 반제국주의 발언 등에 조심해야 했다. 말라야 대학은 입학 때 전공을 고르지 않고 3년 간 통합으로 공부하다가 학위를 받은 후 최종적으로 전공을 고르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말라야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시를 써서 지방 신문에 보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창작에 한계를 느껴 문학의 길은 가지 않기로 했다. 아무래도 언어의 장벽을 느낀 것이 아닐까. 외국인이 외국 문학의 길을 택하기란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라야 연방 지역 사회를 둘러싸고 민족, 계급 등 다양한 이해 충돌의 문제가 있었다. 특히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말레이 공산당이 해산된 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싱가포르와 말라야 연맹 간의 관계는 생각 이상으로 복잡했다. 싱가포르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공부해야 했다.
1950년 마리아 헤르토흐 폭동 사태가 발생했다. 사건은 이렇다. 마리아 헤르토흐의 네덜란드인 가톨릭교도 아버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 일하고 있다가 1942년 일본 점령 때 포로수용소에 들어갔다. 유라시아 혼혈의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자기 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자신이 수용소에 들어갈 때 마리아를 한 말레이 여인에게 맡겼다. 그 여인은 마리아를 딸로 입양하고 자기 고향 트렝가누에 데리고 살았다. 전쟁이 끝난 후 마리아의 아버지가 딸을 찾아 나섰다. 마리아가 양모를 찾아 싱가포르에 와 있었기 때문에 이곳 법원에서 재판이 열렸다. 영국인 판사는 마리아가 네덜란드인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으나 말레이 양모가 항소에서 이겨 풀려난 어린 마리아를 말레인 총각과 결혼시켰다. 네덜란드인 아버지가 재항소를 통해 결국 마리아의 양육권을 확보했다. … 판사는 마리아가 최종 판결을 기다리는 동안 수녀원에서 지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무슬림 사회에서는 마리아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려하는 것 아니냐는 감정적 반응이 나왔다. 마리아가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로 가라는 판결이 나오자 폭동이 시작된 것이다(P82~83). 군중은 유럽인만 보면 싸움을 걸었다.
그는 이 사태를 통해서 싱가포르의 현실과 제국주의가 종식된 후 탈식민, 신민족국가 건설의 험난함을 목격하게 된다. 그는 학생회 일을 통해 민족주의 운동에 참여하면서 국가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함을 느꼈다. 그가 문학을 접고 역사학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처럼 어떤 종류의 배타주의에도 반대하겠다는 내면적 변화와 정치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 대한 열망이 생긴 결과였다.

그는 영문학 학도인 마거릿을 만나게 되었다. 음악에 문외한이었던 그는 베다 림이라는 사람 덕분에 배움의 기회를 얻어 대학 교향악단 바이올린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녀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문학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으니 공통적 관심사가 있기도 했다.
마거릿 덕분에 전에 별로 생각지 않던 ‘사랑’을 마주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 또래 누구나와 마찬가지로 나도 사랑 노래를 많이 알고 그 말을 멋대로 가지고 놀기도 했다. 그 말을 쓰는 방법이나 함축하는 의미는 확실히 안 적이 없었다. 마거릿을 만나면서 그 말이 내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어떻게 일어난 변화인지는 그때도 지금도 수수께끼다. 사랑이란 소리 없이 자라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 머리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시간, 가정, 자유와 관계가 크다는 것만 안다(P132).

마거릿은 역사학 공부를 위해 그가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겠다는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당시 영국 식민지인으로서는 영국으로 가는 유학이 최고의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남양 등지에서 쑨원과 혁명 동지들에 관한 주제로 논문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료 조사를 위해 홍콩으로 출장을 떠난다. 홍콩은 민족주의, 공산주의 정치 활동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중심지인 만큼 많은 자료를 모을 수 있었다. 그는 영국으로 바로 가지 않고 필리핀, 실론, 인도 등지를 여행하며 중국인의 위치를 이해하게 된다. 원래는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하고자 했으나 10세기 중국 오대사 연구로 주제를 변경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와 관련 직접 자료가 부족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중국 초기 기록을 통해 남부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알게 된 만큼 인도양에서 기원한 문명에 중국 교역이 뒤섞이는 상황을 이해하고 싶은 열망이 일었다.

영국으로 떠나오고 1년쯤 뒤 마거릿이 영국으로 공부를 위해 왔다(영국으로 오기 전 두 사람은 약혼만 한 상태). 그러나 학교의 위치가 서로 달라 주말마다 만나는 생활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이런 생활에 지쳐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부모가 잠시 런던에 왔을 때 두 사람은 결혼 예식을 올렸다. 케임브리지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뒤 파리에서 첫 아이를 힘들게 낳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탯줄이 엄마 목에 칭칭 감겨 있어 한동안 격리되어 지낸 통에 왕겅우는 아이와 그녀를 바로 볼 수 없었다고 한다.

1957년 말라야 연방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싱가포르로 돌아온 뒤 부부는 바로 일을 시작했으나 얼마 후 일 때문에 쿠알라룸푸르로 가게 되었다. 그는 남양 화교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동남아시아에서의 화교에 대한 위치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강연도 호평을 받으며 책으로 출판까지 되었다고.
그무렵 미소 대립이 격화되면서 미국은 동남아시아에까지 관심을 뻗쳤고 동남아시아판 나토인 시토(SEATO)를 조직한다. 그는 1960년 미국 아시아 관련 연구소를 둘러보고자 미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당시 미국은 연구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었다. 마거릿은 미국의 영어 교육기관을 시찰해달라는 요청으로 미국 대학을 돌아본다. 그는 1961년 1년간 록펠러 재단의 지원으로 소아스에서 명나라 초기 동남아시아의 관계를 연구한다. 1962년에는 말라야 대학에 돌아와 문학부 학과장을 맡았다.

1963년 말레이시아 통합에 반대하는 수카르노 콘프론타시 폭력이 시작되었다. 말레이시아는 국제 승인을 위해 유엔에 도움을 청했다. 싱가포르에 잔혹한 폭동이 일어나자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는 공식 협상에 돌입했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65년 결국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합에서 떨어져 나오고 인도네시아 PKI는 파괴되었다. 남베트남에서 베트콩은 진격했고 중국에는 문화대혁명이 벌어졌다. 이처럼 동아시아에서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상황은 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그가 한국을 방문할 기회가 생겼다. 최규하 주말레이시아 한국대사 덕분이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이기백, 김준엽과 만남을 가지며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중요한 것은 그때 중국 관련 연구를 집중해야겠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세운 일이었다.

1968년 이후 그는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으로 가게 되었다. 사실 그에게는 말레이시아가 고향과 다를 바가 없다. 자기 집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더는 현대 중국에 관한 자료를 입수하기 어려워진 상황이 되었다. 중국사 연구를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다행히 마거릿도 부모님도 그 결정을 지지해주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얼마 후 돌아오려 했으나 1969년 쿠알라룸푸르에 폭동으로 국가 비상 상태가 발생하자 귀환을 미루었다(그 사이 그의 아버지는 1972년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그리고 18년 간 그곳에서 삶이 이어졌다. 1977년 오스트레일리아 국적을 취득하기는 했지만 1996년 싱가포르로 이주해 24년째 살고 있다 한다. 마거릿은 2020년 세상을 떠났다.
‘있는 곳이 집’이라는 제목은 그의 삶(의 경험)을 그대로 잘 드러내주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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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아닌 곳에서 디아스포라 역사가 왕겅우 회고록 1
왕겅우 지음, 김기협 옮김 / 글항아리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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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의 대부분을 역사 공부에 바쳐온 한 사람으로서 나는 ‘과거’에 매혹을 느껴왔다. 그러나 나 자신이 보려 애쓰고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한 것은 언제나 위압적일 정도로 거대한 세계였다. 사람들의 삶에 관해 읽을 때라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 것은 거창한 교훈을 얻으려는 욕심 때문이었다. 시간이 지나며 ‘과거’에 대한 내 이해가 매우 치우쳐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서 있던 무대는 유럽식 역사관과 유교식 자기 수양 정신 양쪽의 지배를 받는 곳이었다. - P11~12

현재와 미래를 알기 위한 방편으로 과거를 보는 것만한 것이 있을까. 그러나 과거를 어떤 방향과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얻게 된다고 생각한다. 역사의 중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졌음에도 거시적 세계의 관점에 매몰되 정작 역사 속 사람들의 일상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에는 소홀하다. 저자는 자신(과 부모)의 역사를 아이들에게 읽히고자 이 이야기를 썼다. 그러나 한 가족의 역사가 비단 개인의 역사만이 아님을 이 책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이 책의 내용은 저자가 1949년 싱가포르의 말라야 대학으로 공부하러 갈 때까지의 기록이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어머니가 들려준 50년 간의 기억도 포함되어 있다. 어머니는 5살 때부터 그에게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외아들이어서 각별했던 탓도 있을 것이다. 부모는 그가 중국인의 정체성과 문화를 잊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당시 흐름에 맞춰 존 듀이의 자유주의 교육 학습법을 전수받아 영문학을 전공하면서도 중국 육조 시대 전통 문학에 늘 관심을 가졌다. 이후 그는 인도네시아 자바에 있는 수라바야 화교 학교에서 교장직에 초빙을 받아 가게 된다. 경제적 자립 기반을 찾자 그는 고향인 타이저우에 와서 부모가 골라준 여인과 결혼한 뒤 수라바야에 돌아와 가정을 꾸렸고, 저자는 1930년 그렇게 태어났다. 그러나 그때 하필 불어닥친 대공황의 흐름으로 학교가 재정난을 겪게 되어 아버지는 1년 만에 사직하고 그곳에서 가까운 이포라는 곳에 중국인 학교들을 관리하는 부장학사 직을 맡게 되어 옮기게 된다. 저자는 19년 간 이포에서 성장했다. 그래서 태어난 곳은 수라바야지만 마음 속 고향이자 여러 감정이 오가는 곳은 이포(말레이시아 북부의 도시로 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지방도시)였다고 고백한다. 그렇지만 가족이 이포에서 살고 싶어서 19년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세 식구는 끊임없이 중국으로 가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반복된 시도에도 대내외적 상황에 주저않아 끝내 갈 수 없었다. 저자의 가족 뿐 아니라 중국인들은 인도네시아에 이주해서도 전통 문화를 고수하려 했기에 현지인들과 자주 충돌했다 한다. 저자도 영어 학교를 다니면서도 한편으론 세살 때부터 한자를 배우며 고전 한문 교육을 배웠다. 중국어 어휘를 늘리기 위해서 중국어 학원까지 다녔다고. 그곳 환경은 사원과 모스크가 있고 관청에서는 영어를 쓰지만 길에서는 말레이어, 사적으로는 광둥어를 쓰는 복합적인 환경이었다. 과연 중국이 중국을 떠나 망명한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가만히 생각해보게 되었다.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다른 중국인들은 자기들만의 단체와 사찰이 있고 축제와 사회활동을 정기적으로 조직했다. 아이들 중 몇몇은 국민당 입대를 위해 자원하러 떠나기도 했다. 그러나 세 가족은 이포에 임시로 살고 있었기에 언제고 떠난다는 생각으로 방위 성금 모금 행사 외에는 참여하지 않고 정치와는 거리를 둔 채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전쟁의 암운은 더욱 짙어만 갔다. 1941년 이포에서도 포격이 시작되었다. 사는 곳이 언제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상황이 되었기에 집을 떠나 벌목장, 동굴 등 포격을 피해 한동안 도망을 다녔다. 다행히 얼마 후 지인의 집에서 얹혀 살게 되었다. 당시는 일본군이 싱가포르를 점령하고 중국인 학살하고 공개처형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때였다. 3년 간 그는 자기계발을 위한 공부를 하면서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경험을 하며 실력을 쌓는다. 이포에서 살던 때와는 다르게 그는 그곳에서 많은 중국인과 부딪쳐야 했다.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 없다보니 자연스레 광둥어가 늘었다. 아무튼 사건도 많고 네 차례 이사를 할 정도로 이동도 잦은 시기였다. 그래도 그는 행운을 얻었다. 그의 아버지가 일본 당국에 의해 원래 직장에서 교육 일을 맡게 되면서 그가 3년 반 동안 도서관 책의 정리 목록 작성 일을 도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그는 도서관에서 영어 소설을 읽으며 실력을 키웠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 무렵 이사한 가족의 집에서 라디오 영어 방송 뉴스를 듣고 아침 식사 때 전쟁 진행 상황을 브리핑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이것으로 영어 듣기와 말하기 실력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과거의 고전 한문 공부에서 벗어나 다른 종류의 공부 방식으로 성장하는 경험을 얻게 된 셈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가족들은 중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중국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등 졸업장이 있어야 했던 관계로 1947년 6월이 되어서야 상하이로 향할 수 있었다. 상하이에서 만난 가족은 정말이지 대가족이었다. 가족이 많은 만큼 다양한 친척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대고모의 남편은 베이징대학 도서관장을 역임했고 고궁박물원에서 고미술을 담당했다(1949년 타이완에 갈 고미술 밀반출을 도와달라는 유혹을 받았으나 단칼에 거절하셨다고). 사촌 중에는 한국전쟁에 위생병으로 참전한 이도 있다. 타이완 진먼다오에서 군복무시 공산당을 막는 부대에 있었던 친척도 있다. 역사가 드라마틱하다보니 이렇게나 역사적 현장에서 있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다.
이후 가족은 난징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역사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는 줄곧 국민당 정부 편이었다. 그러나 그는 1912년 혁명에 회의를 품으며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품는다. 그런 생각을 품게 된데는 당시 난징정부의 행태가 큰 몫을 했다. 충칭에서 옮겨온 난징 정부는 계속되는 내전에 기아, 인플레이션을 잡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거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1948년 화폐 개혁이었다. 당시 돈으로 300만 위안이 금원위안이 되었고 금화, 달러, 금괴를 금원권으로 바꾸라는 강제 명령이 내려오자 혼란과 공포가 가중되었다. 정부에 대한 실망이 깊어지고 있을 때 장제스가 미국에 의지해 공산당을 적대하는 데 반대하는 시위를 하러 몰려든 학생들의 행진에 진압 명령을 내렸다. 기마경찰대가 투입되어 강제 해산에 나서자 몇몇 학생들이 다쳤다(그는 다행히 다치지 않고 돌아왔다). 그리고 2주 후 농성대회에는 반정부활동 탄압을 위해 국민당 청년부에서 보낸 깡패들이 들이닥쳤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시간이 흘러 그는 대학생이 되었다. 400명의 신입생 중 한 명이 된 것. 그가 들어간 중앙대학 수업은 수준이 높았고 교수진도 훌륭했다. 특히 쑨원의 삼민주의에 대한 강의가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전까지 부모님에게 듣거나 중국의 고전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고국에 대해서 현재적 질문을 품은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쑨원의 삼민주의를 통해 혁명이 전통적 혁명과 어떻게 다른지, 중국인에게 민족이란 어떤 의미인지, 자유와 권리에 대한 개념, 중국에서 공화국은 어떤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을지, 중국은 자본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사회주의로 나아가야 할 지 등등을 고민해보게 된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건강이 악화된 데다 계속되는 내전과 불안정한 상황으로 말라야로 돌아갈 결정을 내린다. 그는 그곳에 남아 2학년 진학을 위해 1948년 10월 난징으로 향했다. 그러나 11월 초 만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격파되고 베이징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는 가능한 떠나고 싶지 않았으나 난징이 최후의 전장이 될 것을 염려한 부모의 불안과 걱정에 이포로 돌아가게 된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이포도 민족해방군과의 전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 비상사태로 말라야 전역의 중국인 학교에 정치적 압력이 거세지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공부를 중단하고 돌아온 그였기에 아버지는 그의 계속된 학업을 위해 싱가포르 대학에 진학하라고 등을 떠민다. 문제는 그곳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중국 국적을 포기해야 했다. 그의 아버지가 큰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이제 더는 중국에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과 다름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 앞날을 계획하기 위한 준비에 돌입한다. 그가 싱가포르로 떠나기 직전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이 선포되었다.

정말이지 드라마틱하지 않나. 혼돈의 역사적 배경 속에 그의 삶의 이정표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책에는 언급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사건, 사람들과 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이 이야기는 비단 한 가족의 역사로만 읽힐 수가 없는 것 같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가 가정을 꾸리고 흐르는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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