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무르 승전기
샤라프 앗딘 알리 야즈디 지음, 이주연 옮김 / 사계절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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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에 이어 또 하나의 제국을 이루었던 곳이 티무르다.
작년 말 출간 이후 추천 도서로 계속 있었는데 꼭 읽어야 하나 하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시간을 보내다 지금까지 왔다.
결론적으로 몽골에 대한 역사는 관련 전문서와 교양서 등을 읽었지만 티무르 제국은 관련 역사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그저 유라시아를 중심으로 한 제국의 역사 중 한 부분으로만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럴 땐 역시 읽어봐야겠구나 싶었다.

이 책은 티무르 제국을 연 사힙키란 티무르에 대한 승전기다. 티무르 제국은 몽골 제국에 이어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고 티무르는 이를 연 사람인 만큼 세계정복자라는 인식이 강했다. 과연 이 타이틀의 인식은 올바른 것인가 하는 질문이 있었다. 몇 년동안 몽골 제국의 사서를 읽으면서 서구 제국이 주입한 그들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정복자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통합을 위해 기울인 여러 노력들은 과소평가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티무르도 그런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정복자‘라는 인식은 티무르 사후 근세 내내 오스만을 이웃으로 두어야 했던 유럽의 애환이 투영된 것이다.
잔인하고 무자비한 세계정복자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티무르 르네상스‘란 개념은, 티무르제국 시기에 발전한 문화와 예술, 학문과 지식이 이슬람 문화 부흥의 시발점이 되어 이후 여러 이슬람권 근세 제국의 문화적 발전의 기틀이자 모범이 되었음을 설명한다. 물론 이 관념 또한 유럽의 르네상스에 대한 비서구권의 비교군으로 등장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 P6~7

티무르 자신이 사서 작성을 명하여 완성된 사서 중 현존하는 제일 오래된 사서는 니잠 앗딘 샤미의 『승전기』(1404)이다. 티무르는 샤미에게 자신의 뜻과 가신들의 행동 중에 ‘(신의) 영원한 행운‘이 드러나는 바를 기록하되,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그리고 샤미의 『승전기』를 저본 삼아 완성된 야즈디의 『승전기』(이 책의 저본)는 개별 사건 및 일화들, 그리고 사건들의 전개 과정은 그대로 이용했으나, 사힙키란이라는 특수한 정통성을 보다 더 정교하게 덧붙였다.
여기서 사힙키란 무엇인지 알아보아야 한다. 사힙키란은 본래 페르시아 문학에서 ‘세계정복자‘인 주인공에게 붙는 별호였으며 그 기원은 이슬람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작품에서 사힙키란으로 불린 아미르 함자는 성스러운 행성 간의 합이 일어난 날 태어나, 용기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여 이슬람을 널리 확산시키고 피지배민들에게도 정의를 실천한 관대한 인물로 묘사된다. 13세기가 되자 이 칭호는 문학 작품뿐만 아니라 사서 속의 실제 인물, 군주의 별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 P331
티무르조가 성립된 14세기 후반은 ‘칼리프가 임명한 군주‘라는 이슬람적 정통성이나, ‘황금씨족의 후손‘이라는 몽골제국의 정통성이 모두 쇠퇴하는 시점이다. 이때 칭기스 일족도 아니고 칼리프에게 승인받을 수도 없었던 티무르가 내세운 새로운 유형의 정통성이 ‘사힙키란‘이었다.

역자는 이 책의 내용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및 여섯 장으로 분류했다. 원문은 336장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라서 저자가 한 편의적 구성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롤로그는 본격적으로 역사적 사실이 전개되기 전 상황에 대한 설명과 티무르의 탄생, 『승전기』의 특징 등에 대한 개괄을 다루었다. 1장부터 6장까지는 티무르의 본 원정기의 내용이고 에필로그는 티무르 사후 후계자들이 사마르칸트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던 이야기가 담겨 있다.

티무르는 어떻게 제국의 서막을 열 수 있었을까. 14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의 서부 오아시스 지대에서 몽골제국 차가타이울루스가 쇠퇴하며 혼란이 발생했다. 차가타이울루스가 강성했을 때는 울루스에 예속되어 투만(만호군), 하자라(천호군)를 이끌던 여러 부족 및 군사 집단의 아미르(장군)들이, 칸에게 사여받은 이크타(영지)에서 독자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1370년 아미르 티무르가 중앙아시아 서부의 마와라안나흐르 일대를 통일했다.
티무르는 마와라안나흐르를 통일한 후 그곳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하나씩 공격하며 자신의 세력 하에 만들어나간다. 1386년에는 3년 간 이란 서부를 공격하여 그 지역을 복속시켰고 1391년 무렵 이란 남서부와 이라크, 캅카스를 넘어 5년 원정을 이어나간다. 티무르는 5년 원정 전후로 여러 자손들에게 영토를 나누어 맡기고 1398년부터는 인도 원정을 시작했다. 1400년 무렵에는 이슬람권 왕좌를 거머쥐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으로 향한 뒤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점령하고 발칸반도까지 진출하여 조지아를 복속시켰다.
여러 원정 기록이 그러했지만 특히 인도 원정, 아나톨리아와 발칸반도 원정은 놀라웠다. 특히 인더스강은 징기스 칸도 건너지 못한 곳이었다는데 사힙키란은 그곳에 다리를 세우고 강을 건너 병영을 세워 지역 수장을 복속시켰다.

사힙키란은 능력이 있는 복속할 만한 이나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에게 힘을 쥐어주고 적어도 그가 배신하기 전까지는 믿음을 견지했다. 그러다 반복적으로 배신을 하는 경우 가차 없이 내치는데 그런 인물 중 대표적으로 톡타미쉬 칸이 있다. 톡타미쉬 칸이 적에게 쫓겨서 사힙키란에 도움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사힙키란은 그를 자녀로 삼고 많은 군대와 물자를 주어 주치울루스의 왕좌를 차지하게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톡타미쉬 칸은 사힙키란이 이란 원정을 진행 중 여러 번이나 군대를 파견하여 영토를 파괴했던 것이다. 사힙키란은 그의 말은 신뢰하기 어렵다며 더는 교류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복 지역과 주민에 대해서 대체적으로 호의와 관용을 베풀었다. 초반에 마와라안나흐르를 중심으로 한 울루스를 복속시키는 동안에는 조금 경직된 면모를 보였다면 제국이 확장되고 안정되어갈수록 관용성을 보였다. 예를 들어 사힙키란은 사바의 셰이흐를 서신 및 선물과 함께 맘루크의 술탄인 말릭 알자히르 바르쿡에게 파견했다. 서신의 내용은 이와 같다. ˝과거 칭기스 칸 계보의 왕들과 그대 왕국 왕들의 전쟁으로 시리아와 주변 백성이 고통을 겪었으나, 양측의 타협으로 세계가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아부 사이드 바하두르 칸이 사망한 후 이란의 칭기스 칸 계보에 강력한 왕이 남지 않아 다시 혼란이 찾아왔다. 현재 내가 신의 도움으로 이란과 이라키 아랍을 점령했으니, 양국이 이웃이 되어 통로를 열고 서신과 사신, 상인이 왕래하면 번영을 이룰 것이다.˝ - P157

반면 정복자임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모습도 있다. 대표적으로 정복 지역을 약탈하고 군대를 점령한 후 지역 주민을 모두 살해하여 언덕을 쌓고 머리를 잘라서 두개골 첨탑(미나렛)을 세운 것이다.
티무르만 그러지 않았겠지만 이런 모습은 그의 잔인함을 드러내는 증거이지만 정복 대상에게 복속하지 않으면 비참한 상황을 맞이할 것이라는 경고로서 하나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초반에 역자가 말하길 티무르의 세계정복자적 면모와 함께 (문화적으로) 티무르 르네상스라는 면모가 있다고 밝혔는데 사실 승전기 기록만으로는 개인적으로 지역의 문화를 수용한(이슬람 문화의 확대) 측면을 찾기란 어려웠다. 돔을 건설하고 종교인, 장인, 의사 등 전문직업인을 사마르칸트로 데려가는 모습 정도가 있을까.

또 종교적으로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 같지 않다(몽골 제국의 역사에서 종교적 관용성을 보여준 것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힙키란이 인도 원정을 떠난 것도 이교도들을 상대로 성전을 치르겠다는 명분이었다. 이후 키타이 원정을 하기로 결심한 것도 우상 숭배자를 제거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한 것이다. 조지아 지역 등에서 주로 믿던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이슬람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강요한 모습이 엿보인다.

사힙키란은 자신이 사망할 때가 되자 피르 무함마드 이븐 자항기르를 자신의 대리인이자 후계자로 삼으라 요청했다. 그러면서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지도하여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가 되지 않게 해달라 명했다. 자손들에게는 백성을 경시하지 말고, 이란과 투란을 적과 반란 세력에게서 지켜내며, 서로 적대심을 갖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수도인 사마르칸트의 왕위를 계승한 아미르자다 할릴 술탄은 창고 문을 열어 아미르와 정부의 중진과 군사들에게 사여를 베풀었는데, 경제 상황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금액을 남발하여 통치한 지 4년 만에 모든 창고가 텅 비어버렸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정부의 중진들을 멀리하고 외부인을 가까이하는 바람에 결국 백성과 군대에 신뢰를 잃고 말았다.

티무르의 역사는 그 이후로도 계속 이어진다. 이 책은 티무르 제국을 연 사힙키란의 영웅기이자 원정기를 담고 있다. 역자는 물리학을 전공했는데 역사학으로 방향을 전환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박사 논문을 교양서로 낸 버전이다. 어렵지만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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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6-01-14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내용과는 좀 관계가 없지만 티무르라는 인물을 보니까 예전 생각이 나네요.

2008년에 어쩌다 회사에서 우즈베키스탄에 출장갔는데,
그때도 티무르는 우즈베키스탄이 떠받들던 인물이었죠.
타슈겐트와 사마르칸트를 비롯해 전국 어딜 가나 티무르가 빠지는 곳이 없었습니다.

당시에 독재자 소리를 듣던 대통령이 티무르를 신격화에 가까울 정도로 강조하면서
반공개적으로 자신을 그 후계자인 것처럼 선전하던 모습도 떠오르네요.
어느 시대, 어느 국가나 정치에서 영웅을 소비하는 방식은 비슷한가 봅니다.
 
나의 일본미술 순례 2 + 이 한 장의 그림엽서 나의 일본미술 순례 2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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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망각이 존재하는 한 비극이자 잔혹한 현실을 빗댄 예술은 살아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저자가 그림을 마주하며 품은 질문은 비단 의문에서만 그치지 않고 희망에 대한 기대도 품고 있다. 이 책은 예술가가 살았던 일본 근대 사회와 그 뒤에 드리워진 개인의 삶을 함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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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본미술 순례 1 - 일본 근대미술의 이단자들 나의 일본미술 순례 1
서경식 지음, 최재혁 옮김 / 연립서가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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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으나 역시 재미 있었다. 원래 여행기를 읽는 것을 좋아하고 거기에 하나의 주제를 기반으로 정리한 책을 좋아하는 탓이다. 또 서경식 선생님의 디아스포라적 위치, 자기 재인식의 사유를 담은 문장들이 있으니까.

얼마 전 펀딩을 한 2권을 읽기 전 이 책을 먼저 읽기 위해 집어 들었다. 


저자는 일본 근대 미술을 언제고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고 한다. 책에 소개된 미술가들은 다양한 범위를 아우르고 있으나 보편적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 수도 있는,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이단자’들이 표현한 미술이다. 또 자신은 일본에서 태어나 자랐기에 조선보다 일본에 아무래도 더 친숙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책을 쓸 당시 코로나로 전 세계가 시름하고 있을 때였던데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된 상태였기에 개인적인 안타까움도 덧붙여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는 일본 미술을 미화하자는 것도, 비난하자는 것도 아닌 일본을 비판하기 위한 하나의 거울로 삼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힌다.


총 일곱 명의 미술가를 다루는데 이중 아이미쓰와 마스모토 슌스케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나카무라 쓰네의 <두개골을 든 자화상>은 두개골을 들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평온하다. 두개골은 서양화에서도 익숙한 그림의 등장 소재다. 두개골은 죽음에 대한 상징적 묘사로 17세기부터 ‘바니타스’라는 형식으로 북유럽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에서 시작되었는데 전통적으로 정물과 해골을 함께 배치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화상 속 인물은 두 뺨이 붉게 물든 것을 통해서도 어딘가 아픈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도 표정은 두려움 같은 감정을 초월한 모습이다. 저자도 그 점이 신기해서 이 그림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나카무라 쓰네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시인이자 언어학자, 동화작가인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을 그렸는데 그 초상화는 근대 일본 서양화의 대표작으로 남았다고 한다(에로센코는 루쉰과 교류하고 염상섭, 박헌영과 만남을 갖기도 했다고 한다. 사망 직전 한국의 전래동화 <선녀와 나무꾼>을 에스페란토어로 남겼다니 놀라웠다). 


사에키 유조는 ‘요절, 파리, 화가’라는 세 가지 요소를 지녀 일본 근대 미술의 신화로 남았다. 도쿄미술학교 졸업작품으로 그린 자화상은 공교롭게도 앞서 언급한 나카무라 쓰네의 바실리 에로센코의 자화상과 비슷한 느낌을 받게 한다. 그러다 1924년 파리로 건너가 만난 야수파 화가 모리스 블라맹크에 의해 비난을 받고 충격을 받은 뒤 그린 자화상은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그렸다. 그는 일본 근대미술의 정통 아카데미즘적 화풍에서 길을 벗어나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사에키의 주변에는 조선과 관련 있는 인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후지시마 다케지는 그가 미술학교에서 가르침을 받았던 스승으로 짧게나마 조선에 체류하며 작품을 남기고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맡기도 했다(그는 조선 화가 오지호의 스승이기도 하다). 미술학교 선배인 이시이 하쿠테이, 친구인 야마다 신이치도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여러 번 맡았다. 


일본의 군국주의가 강화된 이후 서양화를 그리던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은 전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후지타 쓰구하루는 그 흐름에 앞장선 대표적인 화가다. 그런데 그는 전쟁이 끝나도 이에 대한 반성은 커녕 오히려 이를 정당화하는 발언을 했고 심지어 유럽으로 가 이름을 바꾸고 남은 삶을 살아갔다고 한다. 

이 흐름에 예외라 할 수 있는 부류가 아이미쓰와 슌스케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서양의 초현실주의 대표 미술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과 비슷한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적인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형체를 알 수 없는 덩어리들이 붉은 기운에 휩싸여 있다. 저자는 2020년 예술학 강의에서 ‘전쟁과 미술’을 테마로 삼았을 때 이 그림을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한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라 학생들의 감정도 남달랐다고. 이 그림은 1938년 그려졌다. 1938년은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일본이 군국주의의 기치를 내건 이후다. 그림 속 묘사는 당장의 현실은 아니지만 미래를 예견한 듯한 불안과 공포의 그림자가 엄습하고 있다. 아이미쓰는 전쟁화를 그리지 않았다. 조각가 이데 노리오의 회상에 따르면 어느 날 모임에서 화가 후루사와 이와미가 “요즘은 군부에 협력해서라도 살아남아야 해.”라고 말했을 때, 아이미쓰는 히로시마 사투리로 “아무리 그리 말해도 나는 전쟁화는 못 그려, 어쩌면 좋지?”라고 울먹였다고 한다(P113). 그는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시류에 편승하는 화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이미쓰의 <눈이 있는 풍경>은 현대미술가 야나기 유키노리에 의해 <고질라 프로젝트-눈이 있는 풍경>으로 재탄생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일본 정치, 우익 단체에 의해 전시 설치를 지속적으로 방해받는 등 우여곡절이 많다. 과거의 망령은 여전히 떨쳐지지 못했다. 


마쓰모토 슌스케의 그림은 대체로 어둡고 음울한 색채와 분위기를 지녔다. 슌스케는 도쿄에서 태어났으나 열 살부터는 모리오카시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는 갑작스런 고열 이후 얻은 청각장애로 원래 꿈이었던 엔지니어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다행히 형 덕분에 붓을 잡으면서 화가의 길로 들어설 수 있었다. 

‘신념’이란 말이 번번히 입에 오른다. 하지만 오히려 현대의 지식인이나 젊은이에게 신념이 없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직 반성하는 양심이 있다는 증거다. 신념의 부족보다도 몽매한 신념이 얼마나 크나큰 재앙이 되는지를 생각해 보고 싶다. - 잡기장, 1937년 4월호 (P208)

그는 아내와 함께 발행한 잡지에서 이런 글을 남겼다. 충성과 신념을 강요당하던 시대 몽매한 신념을 부르짖는 일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음을 느끼게 한다. 그는 스즈키 구라조가 기고한 미술가가 국가를 위해 붓을 휘둘러야 한다는 글에 대해 예술의 휴머니티로 논박한다. 물론 그의 휴머니티에 대해서는 곱씹을 필요가 있다. 슌스케는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저항한 예술가의 전형으로 추켜세워진 면이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가치이자 인도주의인 휴머니티의 구체적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가 일본의 군국주의이자 대동아주의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도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런 시대 속에서 그가 예술가로서 최선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다고 평한다. 


7명의 화가 중 4명의 화가를 언급했을 뿐이지만 나머지 인물들도 흥미롭다. 책은 각 화가의 작품과 삶의 궤적, 그와 관련된 인물들과 역사를 언급하고 있기에 근대 시기 예술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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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1-02 0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엄청 궁금한데 참고 있던 책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뒤로 뒤로 미뤄두고 있는데,,, 모른척 할 수가 없습니다.^^;;

거리의화가 2026-01-02 08:39   좋아요 1 | URL
책이 궁금해지셨다니 이보다 더 기쁠 수는 없네요. 즐거운 책읽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삼체 X : 관상지주
바오수 지음, 허유영 옮김 / 서삼독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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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우주는 주인의 뿌리와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꽁꽁 감추고 있었다.‘ 관념과 실재는 뒤섞이고 시간 관념조차 정의내리지 못하는 고차원의 세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사의한 우주에서 탄생과 죽음, 윤회를 떠올리며 누군가를 알아보는 마음과 진심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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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 타이완 여행기 - 2024 전미도서상 번역부문 수상, 2024 일본번역대상 수상, 2021 타이완 금정상 수상
양솽쯔 지음, 김이삭 옮김 / 마티스블루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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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 소설가 치즈코는 1938년 타이완을 방문하게 되었다. 현지에서 자신의 소설 《청춘기》를 각색해 만든 동명의 영화를 감명깊게 본 현지부인단체 〈닛신카이〉가 타이완 총독부와 연합하여 초청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이전에 일본 촐판사에서 모든 경비를 대줄테니 타이완으로 가라한 적도 있었으나 그 의도가 불순하다 생각하여 가질 않았었다. 그러나 집에서는 늦었는데 결혼도 안한다며 성화였고 좋은 기회가 찾아왔으니 집안의 잔소리도 피할 겸 타이중으로 떠나오게 된 것이다.

타이중 역에 도착하자마자 현지인 거리로 향한 치즈코는 과일 노점상의 판매원과 말이 안 통하는 상황에 부딪쳤는데 다행히 한 소녀의 통역 도움을 받아 위기를 해결한다. 그때 시역소(시청) 직원인 미시마가 그녀를 찾아낸다. 사실 타이중 역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치즈코는 현지인 거리를 경험하고 싶다며 나선 것이었던 것. 다카다 부인 댁에 도착한 그녀는 그렇게 타이완에서 지내게 되었다. 미시마는 현지에서의 일에 도움을 주고 통역을 맡기로 했지만 치즈코와 사사건건 의견 대립으로 맞지 않았다.
치즈코는 관광객들이 흔하게 먹는 음식이나 계속 먹어왔던 일본 음식보다는 진짜 현지인이 평소 먹는 음식들을 권해주기를 바랐다. 몇 번이나 요구해봤지만 미시마가 한 번을 들어주지 않자 치즈코는 폭발했다.
결국 다카다 부인은 다른 현지 통역사를 소개시켜주는데 알고 보니 그는 과일 노점상에서 도움을 받은 그 소녀였다.

그녀는 왕첸허로 이름이 치즈코의 한자와 같았으니 결과적으로 둘은 이름이 같은 셈이었다. 치즈코보다 3살 어린 첸허를 치즈코는 샤오첸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치즈코는 관광 여행이 아닌 현지인의 삶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위해 1년 정도 살 집을 원했다. 다카다 부인은 그녀의 생각을 이해했고 무사히 그렇게 1년 동안 머물 수 있게 되었다.
치즈코는 샤오첸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샤오첸은 일본어, 타이완어, 하카어, 영어에 능했고 프랑스어도 접해본 언어 능력자였고 어린 나이임에도 처세술에 아주 능했다. 조용하지만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가졌다고 해야 할까. 샤오첸은 식민지 부유한 가문인 서출 출신이었다. 치즈코는 샤오첸과 친구가 되기 위해 무척 공을 들이는데 반대로 샤오첸은 선을 넘어가지 않으려고 계속해서 노력한다.

때는 1938년 타이완이 배경이다. 타이완은 일본의 첫 식민지였고 1938년 무렵에는 이미 북쪽 끝에서부터 남쪽 끝까지 통과하는 철도가 놓여진 후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라 철도 내에서는 주먹밥과 매실 장아찌만 있는 도시락만 파는 것이 허용된다. 이처럼 일본의 식민 정책으로 내지와 본섬 현지인 간의 동화 정책이 시행되는 만큼 일본의 음식이나 풍습, 문화 등이 깊숙이 들어온 상태였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듯 차별은 자행되고 있었다.

˝사기업에 고용된 혼토진 여성 통역사는 잡역부와 같은 거 아닌가요?˝
이런 말을 뱉고 있는 현지 농림 전문학부의 Ⅰ 서기 얼굴에서는 부끄러운 기색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
˝통역을 맡는 여성은 확실히 소수지요. 게다가 혼토진이잖아요. 실질적인 전문성이 있나요? 예전에 학교 선생으로 일했다고는 하지만, 그저 공학교에서 가르쳤던 것뿐인데요...˝ - P67
공학교는 타이완인이 다니는 학교를 지칭하고 내지인이 다니는 다니는 학교는 소학교라고 불렸다. 치즈코는 이처럼 샤오첸이 자신의 통역사로 일하면서 겪는 일들을 부당한 차별이라 생각한다. 내지인이고 남성이었다면 결코 그런 취급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샤오첸은 치즈코가 보기에 적극 대응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치즈코는 그런 샤오첸이 때론 답답하다. 게다가 자신을 업무적 위계 관계가 아닌 친구처럼 동등한 관계로 대해주었으면 하지만 이마저도 잘 되는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혼토진이자 통역을 맡은 제가 비서 업무를 수행하길 기대한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았을 때 본섬 출신 통역사는 내지 작가의 전속 직원인 셈이지요. 겸상이 적절하지 않답니다. ... 함께 식사하려면 반드시 평등한 관계여야 하니까요.˝ - P114

˝토인삼은 가짜 인삼이죠. 이 세상에는요. 저를 왕씨 가문의 귀한 아가씨로 여기는 이도 있지만, 더 많은 이들의 눈에는 첩실의 딸이자 본섬 국적의 여학생일 뿐이에요. 저는 그저 진짜처럼 꾸며진 채 사람을 속이는 가짜 인삼이죠.˝ - P254

타이완은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함께 지내고 있었다. 청(복건성 등)에서 내려온 한족인 하카인이 있고 가오사족이나 핑푸족처럼 다양한 타이완 원주민이 있다(번인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는 당시 일본인이 그 사람들을 부르던 멸칭이라고 한다). 푸라오인은 하카인 중 타이완어를 쓰는 사람들이다.
아무튼 다양한 구성의 사람들이 살다 보면 충돌과 갈등은 피할 수 없었을 듯하다.

치즈코가 왕첸허를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첸허 씨는 어느 종족에 속하나요?˝
˝아오야마 선생님 매우 교활한 질문이네요.˝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오늘날의 우리는 모두 천황의 자식이죠. 민족도, 내지인이나 외지인을 구분하지도 않....˝ - P57~58
왕첸허의 ‘교활한 질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다. 그들도 식민지인이 되고 싶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데도 이런 답을 한 것은 이미 수년의 시간이 흘러 이런 질문 자체가 적절하지 않다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그게 일본 제국주의가 원하는 답이기는 했을 것이지만.

그러나 치즈코는 제국의 정책에 대해서 계속해서 의문을 제기한다.

제국의 ‘남진‘, 제국의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은 식민지에서 천황국의 동화 운동이 되었다. 이건 사람들이 저마다 지닌 서로 다른 문화와 교양을, 그 흔적을 지워버리는 폭력적인 행위다. ...
‘전쟁 앞에는 남녀의 차이가 없다.‘
어떤 이는 이렇게 강력히 주장하면서 큰 소리로 외치곤 했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전쟁이 여성의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임은 내지나 본섬이나 차이가 없다.‘
이렇게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 P161

치즈코는 샤오첸 앞에서 자신은 제국이 하는 행위(와 일본인의 차별적 행위)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며 계속해서 그녀의 동의를 구하려 한다.

˝내지에서 가져온 벚꽃을 강제로 본섬 땅에 심는 게 너무 제멋대로 같지는 않나요? 샤오첸도 이렇게 생각하나요?˝ - P151

˝재작년에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로 짧게 여행을 갔었거든요. 홋카이도 이누이족과 오키나와 류큐족의 고유한 생활 방식이 점차 사라지고 있더라구요. 두 지역의 개척은 메이지 초기의 일이었데 말이에요! 일장기, 대일본제국, 천황의 백성은 모두 야마토 민족이다.... 이건 제국의 염원이겠죠.
... 식민지 타이완, 조선, 만주국은 머지 않아 홋카이도와 오키나와가 걸어갔던 길을 걷게 되겠죠. 그건 너무 슬픈 일이에요.˝ - P165

˝예전에 사람들이 그랬어요. 내지인은 러우싸오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여긴다고요. ‘내지인은 사시미만 먹는다‘ 같은 경고를 들은 적도 있고요. ...˝
˝어떤 게 미식인지도 구분할 줄 모르는 사람이 편견을 가진 게 분명해요.˝
˝본섬 사람의 러우싸오와 내지인의 사시미는 ‘더럽다‘와 ‘깨끗하다‘로 나뉜답니다. ... 본섬의 장삼과 내지인의 와후쿠도 마찬가지죠.˝
˝러우싸오와 사시미는 모두 미식이에요. 장삼과 와후쿠도 다 아름답고요. 저한테는요. 세상 만물에 있어서 본질이 가장 중요하거든요.˝ - P202~203

치즈코는 샤오첸을 위한다고 생각했고 그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샤오첸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치즈코의 방식은 제국주의의 얼굴인 오만과 편견을 드러낸 것일 뿐이다. 그런 상황에서 둘의 관계는 한쪽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둘의 관계는 후에 어떻게 되었을까?
이 책을 읽으면 타이완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당시 타이완에 살고 있던 상황을 여러 모로 떠올려보게 된다. 이 책은 아오야마 치즈코가 쓴 소설을 양쐉쯔가 번역한 것이다. 그리고 양쐉쯔의 번역본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다. 여행기라고 하지만 엄연히 소설이므로 실제 여행기가 그대로 있는 것은 아닐 테고 일부는 좀 과장하거나 축소하고 허구적인 내용도 들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당시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충분히 느끼고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은 될 수 있을 것 같다.
비단 지배-피지배, 남성-여성 간의 위계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친구라는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지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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