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게이트우드 할머니의 발자국 - 숲으로 걸어간 할머니, 엠마 게이트우드의 놀라운 여정
벤 몽고메리 지음, 우진하 옮김 / 수오서재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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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게이트우드는 미국 에팔레치아 트레일 도보 여행을 추진한다. 67세 여인이 두 발로 140여일의 시간을 걸어 트레일을 완주하다니 놀라웠다. 사실 67세가 할머니라고 하기에는 이제는 그 호칭이 어색한 것 같지만 1950년대만 해도 고령의 나이에 속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녀는 도보 여행을 떠나기 전 자식들에게 그 사실을 숨기고 몰래 떠났다. 그 용기와 대담함이 놀라웠다. 자식들의 반응도 놀라웠던 것이 ˝어머니는 그러고도 남을 분이죠.˝라며 쿨하게 받아친다.

물론 그녀는 트레킹을 하기 전 충분한 준비를 했다. 평소에도 걷기는 꾸준히 해와서 체력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준비물을 최소한으로 하고 짐은 봇짐 하나가 다였다(무게는 7kg 정도).
에팔레치아 트레킹은 몇몇 사람이 도전하기는 했지만 게이트우드 전에 풀코스로 완주한 이는 단 몇 명에 불과했다.

트래킹을 하는 동안 그녀는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하고 폭풍우를 만나 휩쓸릴 뻔하는 등 여러 번 위기에 처했다. 그 길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손을 내미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녀를 놀랍거나 신기하게 본 이들이 지역 신문에 소식을 퍼나르면서 기사화가 되어 이후 인터뷰를 요청받는 등 점점 유명세를 타게 된다. 나중에는 그녀가 인터뷰를 피해다니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렇게 게이트우드는 에팔레치아 트레일 풀코스를 끝내 완주한다. 심지어 한 번만 완주한 것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두 차례 더 완주했다고. 이후 그녀는 홍보대사 활동, 강연을 진행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을 딴 트래킹 코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고. 그야말로 미국 트레킹 여행의 전설이 되었다 할 수 있다.

헌데 이 책의 장벽이 있다면 남편(페리)이다. 그의 이야기가 언급될 때마다 분노가 치미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제발 헤어져, 헤어지라고!‘를 수없이 외쳤다는. 11명의 자녀를 두었다는데... 어휴, 그 과정과 마음을 생각하면 내 속이 문드러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집을 박차고 나서 독립한 이유, 그리고 길을 나서서 또 다른 인생을 개척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았다. 자식들의 인생 때문에 그녀는 몇 번이고 제자리에 앉았지만 결국 스스로 살기 위해서 빠져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입장과 마음을 이해해준 자식들의 마음도 공감이 갔다.

여행기이자 에세이지만 1950년대 전후 미국의 역사를 설명해주어 역사를 좋아하는 내게도 안성맞춤이었다. 내용이 그래서인지 자기계발서의 느낌도 좀 있었다. 힘든 상황에서도 결국 그녀는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를 보듬었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덕분에 나도 희망과 긍정, 위로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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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6-05-1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은 삶은 예순부터라는 말도 있군요 아이를 열하나나 낳았다니... 그때는 그런 사람 있기도 했겠습니다 한국에도... 자신이 자기 대로 살 길을 찾았군요 그게 즐거움이었을 것 같아요 아이도 중요하기는 하겠지만 열하나는... 꽤 오랫동안 아이를 낳고 길렀겠습니다


희선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1~3 세트 - 전3권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미할 비란.김호동 엮음, 조원희 외 옮김 / 사계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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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몽골사에 몸담은 권위 있는 연구자들이 참여하고 최근 학계의 내용과 의견을 담은 만큼 몽골 제국사의 종합판이라 할 만하다. 몽골 제국의 역사적 흐름을 파악하면서도 주변국과의 관계까지 조망할 수 있어 깊게, 넓게 읽을 수 있어 몽골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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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 - 지역사·외부 역사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3
모리스 로사비 외 지음, 미할 비란 외 엮음, 김석환 옮김 / 사계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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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5년 카라코룸을 건설하기 시작했을 무렵, 몽골은 중앙아시아와 만주, 북중국의 많은 부분을 정복 및 점령했고 고려로도 진출했다. 우구데이 카안은 추가로 서방 원정을 계획했고, 이 원정은 러시아의 많은 지역을 정복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는 새로 획득한 영토를 약탈하기보다 이곳을 통치할 행정 중심이 필요함을 인정했다. 수도 건설은 몽골이 약탈자가 아니라 통치자로서 정통성을 한층 강화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그러나 몽골 본토는 여전히 이동하는 목축민들의 영역이었기 때문에 중앙집권화되지 않았다. - P16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시리즈 마지막에 왔다. 시리즈를 구입하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3권이기 때문에 기대감을 갖고 읽었다. 3권의 내용은 몽골 제국에 흡수되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통치된 지역과 당시 관계를 가진 지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해당 시기 특정 지역에 어떤 국가가 세워지고 무너졌는지, 그리고 몽골이 행한 통치 방식은 어떠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구데이는 제국 관리를 위해 카라코룸에 수도를 건설했으나, 이후 자연재해로 인한 환경적 요인, 카안을 둘러싼 권력 투쟁 등 내부 갈등으로 그가 다스리던 몽골 지역은 쇠락의 길을 걸었다. 우구데이 가문과 차가다이 가문 간 충돌의 결과로 원 조정은 1307년 몽골 지역의 군인뿐 아니라 주민을 위한 새로운 행정기구를 마련했다. 이러한 관료 기구가 얼마나 효율적으로 초원을 통치했을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유목민 가구와 집단은 광활한 몽골지역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청(淸, 1644~1911)과 몽골인민공화국(1924~1992. 1928년부터 1932년까지 가축의 집산화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도 목축민에게 자신들의 의지를 관철하지 못했다는 측면에서, 몇몇 작은 마을들과 주변 지역, 그리고 거의 끝없이 펼쳐진 초원이 앞으로 설명할 정책들을 따랐을 가능성도 낮아 보인다. 게다가 조정에 있는 몽골인들은 원래 초원 출신이었지만, 많은 사람이 꽤 오랫동안 정주 세계에 거주했고 일부는 평생을 중국에서 보냈다. 그들은 유목민 사촌들과 연결이 끊겼고, 관심사와 정책 선호도도 달랐다. 이 몽골인들과 원 조정의 중국인 관료들이 고안한 행정기구가 과연 초원에서 효율적이었는지 여부를 규명하기는 어렵다(P34~35).

이후 권력을 잡은 쿠빌라이 카안은 원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주둔군을 배치하는 대신 관료와 군인에게 물자를 공급하는 등 떡밥을 주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었고 관리는 부패했다. 거기에 경제적 불안정이 더해지면서 막판에는 통치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러 몽골 집단 사이의 충돌은 다양한 요인에서 비롯됐다. 그 가운데 하나는 중국에서 귀환한 몽골인과 몽골 지역에 남아 있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이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피난민은 그 정확한 수가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10만 명에 달했다. 이 새로운 집단은 목초지, 물, 가축 무리를 놓고 거주민과 경쟁했다. 따라서 식량과 필수품이 부족해졌다. 1388년까지 계속된 명의 공격으로 사태가 더욱 심해졌는데, 카라코룸에 위치한 보급 본부뿐만 아니라 토지도 손상됐기 때문이다. 이어진 명조의 무역 제한으로 몽골은 필요한 물품을 얻기 위해 중국을 침략해야만 했다. 이와 동시에 몽골은 분열 상태였다. 서몽골 집단 중 하나이자 몽골의 혼인 동맹이었던 오이라트가 칭기스 가문과 이른바 동몽골에 도전했다. 그들이 아릭 부케의 후손들과 손을 잡으면서 북원이 중국에 대한 권위를 되찾을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P44).

고려와 칭기스계 관계의 다른 측면들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거의 30년(1231~1259) 가까운 파괴로 점철된 전쟁이 끝난 뒤 고려 황실은 1274년에 칭기스 가문 황제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이러한 관계는 한 세기 동안 지속됐다. 칭기스계는 일부 초기 동맹 세력 및 지방 군주(콩기라트와 위구르 등)와 혼인 동맹을 맺었고, 몇몇 정치체(금, 남송, 맘룩)와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을 벌였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과 혼인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상호작용이 이처럼 눈에 띄게 결합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14세기 중반까지 고려는 동북아시아에서 칭기스계의 방벽이 됐고, 1380년대에는 정통성을 갖춘 국가로서 칭기스계의 지위를 인정하는 동아시아의 유일한 나라였다. - P51
이후에도 1380년대 내내 고려는 가문, 외교, 군사 이해, 공동의 역사 등 공식적,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원과 얽혀 있었다. 요동은 많은 고려 이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 또 고려 이후 들어선 조선 왕조의 설립에 참여한 많은 주요 관료, 군인, 지식인이 몽골 치하에서 성장했다는 점에서 역사의 중요도를 가진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몽골 통치 시기 한반도는 중국을 넘어 유라시아 지역까지 더 넓은 네트워크에 연결되면서 많은 문화적 교류가 일어났다.

몽골은 1220년 코카서스 지역을 정복한 뒤 셋으로 나눠 노얀(지휘관)에게 분배하여 제국의 통제하에 두었다. 일 칸국(훌레구 울루스)이 성립한 이후 권력의 중심이 남쪽으로 이동하자 (몽골의) 코카시아에 대한 통치는 더욱 간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현지 귀족에 의존했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백성들의 보호를 위해 대체로 몽골에 협조했다. 몽골은 복속민의 군사 원정 참여를 강제하였기에 아르메니아, 조지아 귀족들은 주치 울루스와 훌레구 울루스 간 전쟁에 참여한다. 훌레구 울루스의 가잔 칸이 권력을 차지하고 이슬람을 국교화하면서 기독교 탄압이 시작되자 귀족들은 여러 차례 반란을 일으켰다. 아부사이드 재위기 훌레구 울루스와 주치 울루스 사이 대립은 절정이었다. 조지아는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여기에 페스트까지 유행하자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고 티무르의 침입이 더해지면서 쇠락하였다.
몽골 제국의 탄생은 중세 국제 무역의 역사에서 중대한 사건으로, 캅카스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정복은 새로운 무역로를 열었고, 서유럽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도 국제 무역이 활발해졌다. 몽골은 캅카스의 주요 경제 중심지를 수없이 파괴했지만, 생산과 교환의 중심을 다른 곳으로 이전함으로써 이전에 국제 무역에서 소외됐던 타브리즈와 마라가 같은 도시들을 성장시켰다. - P127

˝시베리아˝라는 지명은 13세기에 작성된 「몽골비사」에 처음 등장하는 시비르, 즉 오비강과 예니세이강 사이에 거주하던 사람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15세기까지 러시아에서 시비르는 오비와 이르티시 지역을 가리켰고, 러시아가 동쪽으로 빠르게 진출하면서부터는 우랄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북쪽 지역 전체를 의미하게 됐다(P139).
몽골은 시베리아의 삼림 지대를 군사 자원의 원천으로 보아 복속을 시도했으며 원 조정은 캅카스 지역의 귀족들 상대로 한 것처럼 간접 통치 방식을 사용했다. 그러나 몽골이 루스에 정착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를릭을 하사하고 공물을 받은 것에서 입증되듯 몽골은 루스를 지배했다(P203). 몽골의 통치권은 인구조사와 공물 납부, 그리고 루스 공작들의 몽골 군사 원정 참여를 통해서도 관철됐다. 일반 루스인들은 몽골군에 징집되거나 강제 노동에 동원될 수 있었고, 특히 숙련 장인의 경우는 더욱 그러했다. 공작들은 주치 울루스를 자주 방문했고, 때로는 수개월, 심지어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P180). 또 루스 공작들 중 몽골 지배층과 혼인하는 경우도 많았다.

유럽, 아랍, 남아시아는 몽골이 직간접적으로 지배한 곳은 아니지만 이 시기 유라시아로 네트워크가 확장되어 연결된 만큼 서로 많은 교류가 이루어졌다. 이 책에서 외부 역사로 파트를 따로 다룬 이유다. 특히 무역과 상업, 종교, 과학과 기술 분야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았을 때) 상당히 많은 영향을 주고 받았다.

유럽은 13세기 무서운 몽골 군대의 힘을 경험하면서 붕괴에 가까울 정도로 강한 충격과 파괴에 대한 두려움을 받으며 몽골이 어떤 나라인지 비로소 조사하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은 몽골의 지속적인 위협을 받았으나 유럽인들은 몽골의 존재를 서서히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몽골과 몇 차례 외교 소통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이는 몽골의 내부 분열로 분권화하고 울루스들이 서로 다른 외교적 노선을 취했기 때문이다. 정치 외교적으로는 잘 풀리지 않았지만 상업 경제적으로는 달랐다. 흑해에 이탈리아 해양 세력,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무역을 확대하자 러시아와 일 칸과 직접 대면하게 되었다.
유럽과 몽골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핵심 존재는 아마도 선교사와 상인일 것이다. 특히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 지역까지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기독교의 영향이 확산되었다. 초기에 몽골이 유럽을 침공했었으나 그 침략의 충격을 극복하고 나자, 둘은 정치적, 상업적, 종교적 측면에서 관계가 발전했다. 정치적, 외교적 계획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이탈리아 해양 세력의 아시아 시장 진출은 호혜적 무역을 위한 유라시아 대륙로를 열었고, 흑해 식민지와 지중해 동쪽 항구라는 결절점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했다. 하지만 상인과 선교사는 자신이 활동했던 사회로부터 매우 분리된 상태로 지내며 몽골 지배층 내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P238). 상인과 선교사가 유럽에서 주기적으로 왔다 갔다 한 것이 아니고 몽골 내에 자리 잡고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몽골은 1219년 호레즘 왕국을 침공하면서 아랍 세계와 처음 맞닥뜨리게 되었다. 40년 뒤에는 이라크를 몽골 지배 하에 둔다. 또 1260, 1300년에 두 차례에 걸쳐 시리아를 침공한다. 시리아는 몽골로부터 두 차례의 침공을 받았으나 몽골이 잠시 점령한 뒤 얼마 후 맘룩이 지배권을 되찾기 때문에 그 영향이 크지는 않았다. 그래도 몽골이 아랍-중동에 진출한 이후, 사람들이 이라크, 자지라, 아나톨리아 등지로부터 시리아와 이집트로 이주하는 인구 변화가 발생했다. 맘룩-일 칸국(훌레구 울루스) 국경 지역에서는 일부, 어쩌면 상당한 정도의 문화 교류가 있었고, 이는 1320 년대 초 ‘평화 협상 과정‘과 함께 확실히 증가했다. 몽골이 아시아를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개방한 것은 확실히 이집트의 술탄국, 그리고 예멘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한 가지 영향만 특별히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맘룩이 시리아를 점령하고 통치할 수 있도록 몽골이 길을 닦았다는 점이다(P279). 몽골의 위협이 맘룩을 단결하게 했다니 아이러니다. 게다가 맘룩은 몽골에게 통치술을 배워 강력한 중앙집권적 성격의 왕조를 만들었다.
남아시아(특히 인더스 남동부 지역)는 유라시아 대부분과 달리 몽골 제국에 통합되지 않았다. 몽골의 칸국과 남아시아 간에 외교 소통은 자주 이루어졌다. 이는 13~14세기 항해술이 발전하면서 더 활발해졌다. 무슬림, 힌두교도, 중국인 상인들이 운영한 상업 네트워크도 교류에 기여했다. 상업 교류는 다양한 통로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인도양의 해상 항로 뿐 아니라 미얀마와 티베트를 건너서 원으로 가는 육로, 델리와 이란을 연결하는 아프가니스탄 고개 길 등이 있었다. 은, 말, 향신료, 도자기, 직물, 노예 등 다양한 상품이 거래되었는데 남아시아가 교역지이자 중개지의 역할을 했다.

몽골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통치할수는 없다˝는 중국의 유명한 클리셰를 반증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말을 탄 채 이동하며 통치하는 것은 단점이 없지 않았지만 매우 혁신적이었음이 입증됐다. 초기의 대규모 공격 이후에 몽골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활기, 유라시아 규모의 통합, 상업의 활성화, 기술, 과학, 예술의 혁신, 새로운 종교적, 종족적, 지정학적 지형, 초원과 정주 제국 모두가 받아들인 세련된 제도를 낳았다. 몽골은 그들의 파괴적 정복에서 기인하기도 했고, 근대 민족주의 정서의 부침에 의해 더욱 강화된 야만인 이미지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13~14세기에 이 제국적 유목민들은 세계를 변화시켰고, 오늘날의 세계화 시대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 P363

이로써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읽기가 마무리되었다. 개인적으로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술된 점이 아쉽기는 했다. 다양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는데 욕심이었을까. 아무래도 남아 있는 사료들이 지배층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 많을 테니 또 어쩔 수 없는 부분인가 생각한다. 모쪼록 관련 연구가 더 늘어나서 후속 작업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봐야지. 이 시리즈 기획물은 몽골 제국의 역사적 흐름을 확인하면서 주변국과의 관계까지 조망할 수 있어 여러 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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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 주제별 역사 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
미할 비란.김호동 엮음, 최소영 옮김 / 사계절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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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임브리지 몽골 제국사 2권은 주제별 역사 중 이념과 제도, 종교와 과학, 사회/경제, 여성의 지위를 다룬다. 1권이 주로 몽골이 통일 제국을 형성했다가 분열한 이후의 역사를 정치에 집중해서 다루었다면 2권에서 이를 좀 더 주제별로 더 깊게 들여다보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나는 상위 챕터의 묵직한 주제만큼 여성의 지위를 동등하게 챕터로 다룬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만큼 몽골 제국의 여성에 대해 다룰 비중이 크다 여겼기 때문이리라.

몽골 제국은 통일 제국에서도, 4개의 칸국으로 나뉘어진 제국에서도 기본적으로 같은 정치 구조 및 통치 제도를 유지했다. 몽골은 가족 및 가축과 함께 이동하는 텐트 복합체인 오르도를 운영했다. 어느 한 곳을 근거지로 정주하며 제국을 운영하는 경우가 익숙하지만 유목민은 보통 움직이며 생활하는 데다가 몽골은 통일되는 과정, 그 이후의 과정도 정복의 연속이었으므로 대상지 근처에 오르도를 옮겨 다니는 것이 더 나았으리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우구데이 때 수도인 카라코룸을 건설하기는 하지만 기존의 오르도 방식의 궁정은 계속되었다. 정복지에는 행정업무와 세입징수를 담당하는 ‘다루가치‘, 법적 문제를 판결하는 ‘자루가치‘를 배치하여 통치의 효율성을 높였다. 칸은 야를릭(칙령)과 우게(영지/명령)등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역참 제도(칭기스칸 이후 계속되어 뭉케 때 확장됨)를 운영하여 제국의 각 지역에 사신과 물품 운반을 이동하게 하였다.
통일제국 시기의 몽골군은 알긴치 (alginchi, 복수형은 alginchin)와 탐마, 정규군, 비유목민 군대, 카라울(qara‘ul) 혹은 카라굴(qaraghul), 케식 등 다섯 개의 주요 그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알긴치와 탐마는 변경과 불안정한 지역에 주둔하는 부대였다. 정규군은, 예상되는 바대로 침략과 정복을 위한 군대였고 유목민으로 구성됐다. 비유목민 군대는 비슷한 형태의 부대로 편성되었다. ˝카라울 혹은 카라굴은 ˝국경 수비대와 도로 순찰대 역할을 결합한 것으로 주력 부대의 일부로 기능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케식, 즉 칸의 친위대는 군주의 개인 경호뿐 아니라 다른 많은 역할을 수행했다. 통일 제국의 해체 이후에도 전체적인 구조는 유사하게 유지됐다. 알긴치, 카라울, 케식 부대가 그대로 존재했으며 비유목민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탐마는 몽골의 정복 활동이 줄어들면서 쇠퇴했을수 있지만 군대의 핵심 요소는 계속해서 기마궁사였다. 해군을 운영한 것은 대원 울루스가 유일한데 이는 고려의 우수한 선박과 항해술의 기반이 있기에 가능했다.

어느 국가든 국민을 통합시키기 위해서 통치 이념을 만들기를 추구한다. 몽골은 ‘영원한 하늘‘이라는 ‘텡그리‘의 힘을 받들어 믿게 하여 타 종교와는 다른 믿음의 영역으로 구분시켰다. 하늘은 제왕(칸)의 힘과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하는 데 제격이었던 것이다. 이는 과거 한반도의 왕조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인들의 이념적 메시지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신화, 종교적 신념, 정치적 원칙들의 혼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이들 중 대부분은 광범위한 지리적 범위를 가진 실제현상이었으므로, 세부 사항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민족들에게 인식되고 이해될 수 있었다. 즉, 다른 전근대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이 건설한 제국은 헌신적인 활동가들로 이루어진 핵심 집단, 열정적이면서도 계산적인 합류자들로 이루어진 훨씬 더 큰 집단, 그리고 신들의 헤아릴 수없는 계획과 정복자들의 뛰어난 행운에 대개 어쩔 수 없이 복종한 수많은 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P102).
몽골은 타 종교에 대해서 대체로 상대주의적 관점을 견지하고 관용성을 보였기에 다양한 종교 간 상호작용이 활발했다(물론 무슬림으로 개종한 칸의 경우 종종 이슬람교를 제외한 다른 종교에 대해서 배타성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비단 종교에서 그치지 않고 과학 및 기술에도 적용되었다. 예를 들어 본다면 과학, 예술 분야가 아닐까. 이는 실용성을 중요시했던 몽골인들의 지혜를 보여준다. 덕분에 의학, 천문학, 점성술 등 서아시아와 중국의 지식이 교류되어 다양한 결과가 축적될 수 있었다.

산업화 이전(더 구체적으로, 은행 제도 확산 이전)의 화폐 체계는 하위 수준(지역 내) 시장과 상위 수준(지역간) 시장의 교환 수단이 별도로 구성돼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 두 체계는 근거리와 원거리 교역의 규모, 빈도, 계절성의 상당한 차이로 인해 별도로 작동했다. 몽골 정권은 하위 시장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제국 전역의 공납 이동과 도량형 체계 통일을 결합원거리 교역에서의 화폐 통용성을 구축했고, 그 결과 전체 교역시스템에서 일련의 글로벌한 변화를 이끌어냈다. - P155
은이 세계 공통 화폐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부터였다. 고대 시기에는 물물 교환으로 교역이 이루어졌다면 그 이후에는 화폐가 쓰였겠지만 그마저도 공통 기준은 없었다. 은이 쓰였다고 해서 모두 동전 형태의 은화가 쓰인 것은 아니고 은괴, 은화, 동전의 3층 구조로 이루어졌다. 이무렵 세계 각지에서 은광이 발굴되고 유라시아가 교역로로 연결됨으로써 가능해진 일이다.
몽골인들과 그들의 제국은 유라시아 전역에서 종교가 실천되는 방식과 장소뿐만 아니라, 인간 활동의 더 넓은 틀 안에서 종교가 이해되는 방식도 영구적으로 바꿔놓았다. 전자의 예는 이슬람 세계를 보면 충분한데, 그곳에서 아바스 칼리프조의 파괴와 그에 이은 몽골인들의 이슬람 개종은 수피즘의 부상뿐만 아니라 시아파 정치 권력이 부상하는 길을 열었다˝ 이 두 가지 발전은 근대 초기 이슬람 세계의 역사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그 파장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몽골인들은 유럽 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인류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열었으며, 이는 초기 근대 세계의 형성과 창조에 근본적인 역할을 했다.˝ - P240
금속공예, 도자기, 건축, 직물, 필사본 삽화 등에서 유라시아 전역의 기술과 양식이 혼합 및 전파되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원 지역의 문화에 티베트 불교/이슬람/기독교(천주교, 정교회 등) 양식이 더해졌을테니 상상해보면 다채로운 문화 양식이 공존했던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몽골 황실에서는 여성들이 때때로 주도적인 활약을 하였다. 칸의 지위를 둘러싼 갈등과 이해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기 때문에 칸이 공석일 때 황실의 여인이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치 경제적으로 황실 여성들은 칸과 마찬가지로 쿠릴타이에 참석하고 정치적 조언을 했으며 독자적인 영지를 관리하면서 칙령을 내릴 권한을 가졌다. 또 사회적으로는 종교 활동을 후원하고 빈곤층을 구제하며 남편을 대신해 권위를 행사하거나 외교적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씨족, 부족 간 전략적 혼인을 통해 형성된 가족 관계는 남성들 사이의 정치적 동맹을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특히 몽골 제국 통치하에서 칭기스 가문의 여성과 혼인하는 영예를 얻은 남성은 황제의 구레겐(giüregen, 부마)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부마들은 통치자와의 긴밀한 사적 관계, 자신의 추종자들로 구성된 더 큰 부대를 지휘하는 군사적 특권, 그리고 이후 다시 자신의 자녀를 황실 가문과 혼인시킬 수 있는 사회적, 정치적 혜택을 누렸다. - P384
고려 시기 원 황실과의 정략적 혼인을 통해 고려 왕이 동시에 몽골의 부마가 되는 예를 떠올리면 된다. 부마 뿐 아니라 원의 마지막 황후였던 기황후는 고려 출신으로 원의 조정을 장악하기도 했다.

다만 몽골 시기 이후 여성의 지위가 상승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지 않나 한다. 이전인 중국 당대(618~907)의 시각 및 문헌 자료들은 상류층 여성을 말을 타고 폴로를 즐기는 풍만한 모습으로 묘사하는 반면, 송대(960~1279)의 자료들은 날씬하고 심지어 연약해 보이는 신체를 강조한다. 중국에서 말타기는 여성과 완전히 무관하고, 심지어 남성들에게도 드문 일이 됐는데, 이는 금과 몽골의 침입으로 북방의 말 사육지가 중국의 통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상류층 가문에서는 아내와 딸의 생활 공간을 분리하는 게 규범이 됐다. 비상류층 여성들은 상황에 따라 농사, 가게 운영 등을 맡기도 했지만, 이후 수세기 동안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보이는 경우는 훨씬 줄어들었다. 송대에는 전족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전족의 기원은 여전히 불분명하며 지역마다 다소 달랐지만, 문헌 증거와 고고학 증거 모두 12세기에 자리 잡기 시작해 상류층에서 모든 계층의 한인 여성으로 빠르게 퍼져나갔음을 보여준다(하카, 위구르, 만주, 그리고 다른 소수 민족들은 수 세기 동안 전족을 하지 않았다)(P416~417). 송대 이후로 강화된 유교 규범 문화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한다. 몽골의 점령은 중국의 혼인법에도 장기적 영향을 미쳤다. 1271년 쿠빌라이 카안은 모든 민족 집단에 대해 몽골의 수계혼 관행을 합법화했고, 치열한 법적 다툼과 소송의 홍수 속에서 과부의 정절은 중국 여성들이 수계혼에 저항할 수 있는 법적 수단으로 부상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수계혼은 중국에서 불법이 됐고, 과부의 정절을 지지하는 법들은 중국의 왕조 시대가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P417).

앞선 1권이 전체적인 몽골 역사의 훓어보기 성격이라면 2권은 주제별로 정리해놓았기에 관련 분야를 찾고 싶을 때 참고하기 좋을 것 같다. 다만 저자마다 편차가 있어서 글의 밀도가 떨어진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이는 최대한 일반 독자를 위해 더 깊은 이해 수준을 위한 내용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기술해서이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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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시와 물질 문학동네 시인선 229
나희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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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물질>이라니.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이었다. 시와 친하지 않고 시를 막상 읽으면 무슨 말인지 뜬구름 같이 느껴져서 아마 평생 읽은 시집이 손에 꼽을 것이다. 근데도 이 시집의 제목을 보니 궁금하고 계속 눈길이 가서 참을 수가 없었다. 유혹할 땐 읽어줘야지. 초반에는 좀 진도가 안 나가다가 이후에는 의외로 쭉쭉 읽었다. 희한한 경험이었다. 시가 이리 두루뭉술하게 느껴지지 않다니. 피부로 와 닿는 느낌이라니. 내겐 좀 특별한 경험이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봤는데 저자가 인용하는 책, 기사, 사건 등이 우리의 현실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자본과 이익을 위해 욕심을 부리는 인간, 환경을 뒷전으로 하고 개발에 앞장서며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려는 자들에게 일침을 날린다거나 노동자를 가벼이 여기는 관행에 분노를 내뿜기도 한다. SPC 노동자 이야기는 시를 읽으면서 주먹을 불끈 쥐게 되기도 했다(나는 그 이후로 파리바게뜨, 삼립, 쿠팡은 계속 불매 중이다). 예전에도 그래왔으니 계속 그래도 된다는 가벼운 생각은 선택하기 쉽지만 미래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다. SPC 공장에서는 불과 얼마 전에도 또 노동자의 사고가 발생하지 않았나. 대체 이런 관행은 언제나 바뀌는 건지.
광장은 위치가 변하고 목적도 변화하였지만 진화 중이라는 생각을 한다. 적어도 후퇴하는 광장터를 만들지 않고 불의를 참지 않기 위해 모인 시민들이 보여준 단결과 의지는 자랑스러운 문화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정치는 지지부진하고 후퇴한다 해도 시민 의식이 살아 있는 한 정치는 갈 길을 잃지 않을 거라 여긴다.
한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은 (정부가 외면하고 싶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미와 퐁니, 퐁넛에서의 민간인 학살을 시간이 오래됐다고 해서 덮어두기만 할 것인가. 여전히 피해자의 유족 및 후손들은 진실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더이상 외면하지 말고 부끄러운 과거를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것이다.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구금된 뒤 구타로 3일 만에 사망한 아미니의 이야기도 있다. ‘머리카락 깃발‘이란 제목과 내용을 보며 눈물이 났다. ‘자유‘라는 두 글자에 무게감과 고통을 또 한 번 느꼈다.
몰랐던 사건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호주에 있는 ‘사과의 날‘이었다. 호주는 백인과 원주민 사이에 태어난 혼혈 아이를 가족으로부터 분리하는 정책을 자그마치 100년 간 시행했다고 한다. 정책은 1960년대 종료되었으나 실태 조사가 시작된 것은 1990년이 되어서야 시작되었다니... 이들을 도둑맞은 세대라 부른다고 한다. 흑백 분리, 인종 차별... 눈에 보이는 차별이 문제라고 인식한 지 얼마되지 않은 것 같다. 이제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도 문제임을 깨닫고 개선해나가는 중이라 여긴다.
조지 오웰의 장미라던지, 사울 레이터의 사진을 보고 영감을 받아 쓴 시도 반가웠다.
시의 이름은 정확하지 않지만 죽음에 대해 여러 번 생각하기도 했다. 장례식의 풍경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아주버님이 가는 길이 떠올랐다. 옆지기는 그때 무척 힘들어했다. 만난 뒤 처음으로 마주한 그의 눈물을 보면서 죽음의 무게를 느끼기도 했다. 항상 아주버님에 대해 불만이 많던 그였는데 막상 그가 떠났을 때 빈자리를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옆지기였나보다.

시가 아니라 마치 저자와 대화하는 느낌이랄까. 에세이 같기도 하고. 내겐 너무 명쾌해서 이해하기가 쉬웠다.
독자에 따라 이 시들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호‘였다. 인간은 결코 단독으로 살 수 없고 세계는 이어져 있음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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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6-05-15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희덕의 이 시집은 읽지 못했는데 좋은 시집 같아요. 화가 님의 서재에서 시집을 만나니 더 좋고요!

거리의화가 2026-05-15 11:05   좋아요 0 | URL
몽글몽글하거나 감상적인 시가 아니고 사회, 환경 문제 등을 담고 있어서 현실적이라 저는 좋더라구요. 시에서조차 이런 답답한 내용을 만나야 하나 생각할 수는 있을 것 같지만요. 자목련 님은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