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시대의 탄생 - 1980년대의 시간정치
김학선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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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는 대한민국 현재 시스템의 대부분이 형성된 시기다.


대표적으로 박정희 독재 정권과 차별화를 두고자 했던 신군부 정권은 야간통행 금지를 해제하면서 국민들을 24시간 체제로 편입시켰다.

국민의 피와 땀이 녹아 있는 (이제는 여러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기는 하지만) 1987년 헌법 체계가 만들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또 지금의 텔레비전 편성 시스템이 갖춰진 시기이기도 하다. 아침 드라마를 비롯하여 연속극, 아침-저녁 뉴스 등 정기적인 시간에 고정적인 방송을 해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현재는 유튜브, OTT 등 다양한 매체가 생기면서 TV 방송도 변화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어쨌든 대부분의 시스템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함께 읽는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의 제목을 알게 되었다. 당분간 독서 모임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음에도 책의 제목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마침 이북으로 보이길래 바로 읽어보게 되었다.

이 책은 일상사, 문화사, 정치사, 경제사 등 다양한 관점을 일정 부분 각각 차용하고 있다. 읽기 어렵지 않고 술술 읽히며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익숙한 이야기다.


1980년대 역사를 다룬 책은 보통 3s 정책, 경제 발전에 집중하여 기술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책이 그것과 비교하여 어떤 차별점을 두어 신선함을 줄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일었다. 


근대적 시간체계의 시간은 기억정치의 장(場)이다. 때문에 시간의 기억을 둘러싼 여러 주체들 간의 충돌은 계속된다. 

같은 사건, 같은 경험을 한 시간을 무엇으로 기억할 것인가의 문제, 그중 어떤 시간은 삭제하고 어떤 시간은 기념할 것인가의 문제, 그 시간의 의미 부여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는 한 국가 또는 사회의 갈등을 유발함과 동시에 통합으로 이끌기도 한다.


과거에 모두에게 달랐던 시간은 근대에 오면서 동질화되고 수량화되면서 모두에게 일률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러나 추상화된 시간은 모든 인간에게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지 않았다. 


24시간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업이 노동자를 쥐어짤 수 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밤샘 근무를 비롯하여 노동의 강도는 더 높아지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가 되면 더욱 심화된다. 


'노동자의 날'은 본래 '법의 날'에서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메이데이가 그 기원인데 대한민국 정부는 그 의미는 삭제하고 법의 날로 만들었다. 

1989년 정부는 법의 날 행사를 개최했고 한국노총은 같은 날 세계노동절 행사를 개최하려다 정부에게 저지당했다.

지금은 당연한 '노동자의 날'(근로자의 날은 박정희가 명명한 개념이다)이 이런 과정을 거쳐왔던 것이다. 

같은 날을 두고도 해석을 달리 했다는 것은 이를 비롯해서도 많다.


국경일과 법정공휴일을 정하는 과정이 특히 그랬다.


정부는 양력으로 국경일과 법정기념일과 법정공휴일을 제정했다. 이후 미군정의 서머타임제를 받아들이면서도 연호는 단기를 채택하는 이중성을 보였다.

5.16 이후에서야 국가 연호는 서기로 채택되는 과정을 거쳤다.

서머타임제는 대한민국 실정과 맞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서구 근대를 받아들인다는 명목 하에 적용되었다.

그러나 신군부의 의도와는 다르게 이는 현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 시간이 연장되고 야간화되어 시위를 확산시키는 효과를 발휘하기도 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인상적으로 읽었던 부분은 명절이 공휴일에 포함되는 과정이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설, 추석, 한식을 의미 있게 보냈다.

그러나 이는 1980년이 되어서야 공론화되고 지금의 시스템을 갖게 된 것이다.

1980~1984년까지 음력설을 공휴일로 하자는 의견이 공론화되었고, 1985~1988년에 관공서 공휴일로 법제화되었다.

이처럼 1980년대 이전까지는 명절이 공휴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음력설을 명절로 쇠는 것은 마치 이중과세 논리로 치부되어 억압되었다.

추석은 이전까지 추수절로 불렸는데 1989년이 되어서야 음력설과 더불어 법정공휴일로 비로소 안착되었다고 한다.

한식은 일제강점기 때 식목일로 그 의미가 변경된 뒤로 그 의미가 굳어져버린 경우다(요즘 한식이라는 명칭을 아는 이들도 드물 것 같다).


이 책은 1980년대를 설명하기 위해 멀게는 대한제국 시기의 역사부터 일제강점기, 해방 전후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를 폭넓게 다루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24시간 시대가 되면서 대한민국 주체들은 같은 시간을 살면서도 시간정치에 의해 다른 삶과 기억을 가졌다는 것에 여실히 공감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권은 자기들 구미에 맞는 정책을 펼치지만 국민은 그 논리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정권에 반작용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한 사회는 상이한 역사적 시간성을 가진 주체들에 의해 구성된다고 한다.

이는 근대적 시간의 전일성을 부정하는 동시에 근대적 시간체제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체들 간에는 시간 분배와 배치를 둘러싸고 시간기획과 시간정치가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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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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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참 운이 좋지. 힘들게 사는 사람이 참 많잖아. 우리라고 부자는 아니지만." 살다 보니 어떤 개인에게도 어려운 한 때가 찾아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 삶이 어떤 일로 인해 쉽게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이를 애써 외면하며 우리는 쳇바퀴 도는 일상을 살아간다.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내가 제대로 살고 있나?’ 하는 생각조차 잊고 멈추는 순간조차도 사치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평범한 일상은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세 달째 계속 되고 있는 사회적 불안이 내게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다는 것을, 분노를 넘어선 피로감이 내 일상에 타격을 주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번 지나간 것(일)은 돌아오지 않으며 매일이 다름을 인식하며 살려고 노력중이다. 


펄롱은 아내와 다섯 명의 딸을 둔 아버지다. 석탄, 포탄, 무연탄, 분탄, 장작 등을 팔며 열심히 삶을 살아가고 있다. 미시즈 윌슨의 도움으로 엄마는 자신을 낳았고, 자식이 없었던 윌슨은 펄롱의 양육을 도왔다. 펄롱은 이처럼 좋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하고 성실하여 잍터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 일을 하러 갔다가 석탄광 창고 안에 여자 아이가 하룻밤 이상 갇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수녀원은 세인트 마가렛 학교와 붙어 있었다. 교육을 위해서는 아이들이 다니는 세인트 마가렛 학교와 척을 지어서는 안 되었다. 수녀원 원장은 너무나 침착한 태도로 아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강요했다. 펄롱은 이상함을 느끼고 눈치챘지만 그럼에도 아이의 이름을 묻고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와 불편한 기색을 내비추자 펄롱의 아내인 아일린은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게 우리와 무슨 상관이야? 우리한테 무슨 책임이 있어?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모른척해야할 것도 있는 거야."


아일린의 말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한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은 나도 힘든데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우냐 생각하고 말할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사는 것도 어려운 일일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갇힌 아이는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수녀원으로 갔고 원치 않은 취급을 받으며 살아가는 불운은 누가 결정한 것일까. 펄롱은 아이의 불운을 생각하며 부당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펄롱은 아이를 데려오지 못했고 수녀 원장의 돈을 받았으며 미사를 보러 간 자신이 위선자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이 일은 펄롱을 괴롭힌다. 주중은 기계적으로 일에 매달리려 했지만 집중하지 못했다. 일요일이 되면 공허했다. 


주변 사람들은 펄롱에게 충고했다. 그곳과 척을 지면 안 된다고. 생각보다 그들의 힘은 강력하다고 말이다. 하지만…

”애들한테 가봐야겠어.“


결국 자신도 모르게 펄롱은 석탄광 쪽을 향하고 있었다. 자기보호본능과 용기 사이에서 그는 용기를 택했던 것이다. 

그의 선택이 대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는 전에 없었던 당당함이 내면에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주변 사람의 따뜻함으로 자신은 잘 커나갈 수 있었다. 펄롱은 하지 않은(못한) 일로 인해 어쩌면 평생 안고 살아갈 짐 대신 지금부터 마주하게 될 고통을 선택했다. 


펄롱의 선택 덕분이겠지만 말미에는 가슴이 정말 벅찼다. 펄롱 같은 사람이 이 사회에 많다면 정말 좋겠다, 내가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내가 애써 외면하고 살아가는 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만들었다.


이 소설은 얇지만 진한 감동을 안겨 준다. 아마 당분간은 이 책의 감동을 뛰어 넘을 이야기를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림 같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일상의 풍경들을 만나는 것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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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5-03-04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용기를 내는 건 쉽지 않을 듯합니다 많은 사람이 보고도 모르는 척하겠지요 그때는 용기를 냈지만, 시간이 지나고 그때 왜 그랬나 할지도 모를 일이고... 그런 일은 없으면 좋겠네요


희선

거리의화가 2025-03-04 08:42   좋아요 1 | URL
분명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고 나조차도 어머니가, 주변에 나를 거둬준 사람이 없었다면 그런 처지가 되었을지 모르는 상황이지만 한 가정의 아비로서 아내와 자식들을 생각하면 그런 감행을 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용기 같아요. 물론 집에 가서는 아내한테 잔소리 폭격을 당할 테고 그러다 여러 갈등을 겪게될 일이 눈에 보이지만... 그럼에도 마지막에는 벅찬 감정에 눈물샘이 터지더라구요.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희선 님도 읽으시면 위로가 되고 따뜻함을 받으실 소설이라 생각합니다.
 
가치 있는 삶
마리 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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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닌 근본적인 취약함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지만 동시에 우리가 세상을 움직이는 영향력을 수용하게 하며, 우리의 근본적인 결핍은 삶이 지루해질 틈이 없도록 창의성을 맘껏 펼칠 기회를 열어 준다.


나는 원래도 일상이 불안해지는 것을 위태롭게 생각하는 성향이었는데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여러 번 하다 보니 주어진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안정을 더 추구하며 살아야 한다고 여기며 살아왔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욕망을 내치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누르고 불안해지는 것을 거부했던 것은 아닐까. 


불안은 우리가 가진 이상이 기성 문화가 제시하는 이상과 맞지 않더라도, 우리의 욕망과 이상을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신호다. 

따라서 우리 기질이 진정성을 갖길 바란다면 우리는 욕망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만 한다.


욕망이 따르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볼 때 평소 대단하다 생각했던 적이 많다. 통제하고 견디는 일에 익숙하여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에서는 겁이 나고 소심해졌던 경우가 많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이는 사회적 시선과 타인의 반응에 지나친 의식을 가지는 문제였다. 


사회적 활동에 몰두하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져 존재에 일관성이 생기므로 유혹적이다. 

그러나 사회적 활동에 지나치게 몰두하면 중요한 실존적인 선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고, 그 외의 것들의 중요성을 과장하게 돼 가능성의 장이 축소된다.


종종 내가 껍데기 같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길 때가 있었다. 나의 본성과 기질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상태에서 자아 찾기는 외면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 지냈었다. 공허할수록 다른 것에 집착했고 그럴수록 더 공허해졌다. 함께 사는 사람이 처음 진지하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종종 떠올린다. “너 그때 삐에로 같았어.” 웃고 있지만 슬퍼 보였다는 의미였다. 사실은 일도 제대로 풀리지 않을 때였고 자아는 불안했고 엉망인 상태였다. 


니체는 숭고한 기질을 지닌 사람이라면 자신을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가꾸기 위해서는 상처가 되는 기억을 그저 떨쳐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그렇게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불가해하며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의 무의식적인 삶을 매우 존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니체가 현재에 과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실존적 통찰력으로 보았다는 점에서는 그에게 동의한다.

고통 없는 삶이란 비현실적인 것으로, 과거의 고통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은 그 고통을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자원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니체의 견해에 공감한다.


저자는 과거의 경험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해서 니체의 의견을 이야기한다. 니체는 자신의 삶은 스스로 방향을 설정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저자의 말처럼 과거에 여러 부정적인 경험을 겪은 사람들은 그것을 쉽사리 잊고 나아가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래에 비슷하거나 더한 상황이 올 때 과거의 아픔과 고통의 경험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더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는 지침은 될 것이다.


사회는 관리를 위해서라도 특정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한다. 그러나 사회적 가치와 기성 문화가 모두 옳은 가치는 아니다. 그 가치에 맞지 않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은 타자화되고 배제된다. 과연 우리가 현대에 살면서 옳다고 여겨지는 가치들로 외면되는 것들이 없는지 돌아볼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사회는 그저 말로만 개성이 좋다고 한다. 하지만 공리주의적 효율성의 측면에서는 사실 우리는 서로 비슷하면 비슷할수록 좋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다면, 여론에서 미용 상품에 이르기까지 우리에게 다양한 것을 쉽게 팔 수 있다. 

그들에게는 우리의 생각을 예상할 수 없을 때가 위태로운 순간이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자신만의 독특한 열정을 많이 가지고 있을수록 정치 경제 기관들은 더욱 더 자기 잇속을 차리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 책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는 개념은 ‘큰 사물’과 (이에 대응하는) ‘반복 강박’이다. ‘큰 사물’은 라캉에 의해서, ‘반복 강박’은 프로이트에 의해서 나왔다. 

애초에 우리가 이 낙원을 소유한 적이 없다는 사실, 우리는 결코 완전한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단순하고 마음이 태평하기만 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은 낙원을 되찾으려는 우리의 결심을 조금도 굽히지 못한다. 이 실낙원을 "큰사물the Thing(환상의 대상)"로 명명하는데, 이 대문자 T는 그것이 그저 평범한 환상의 대상이 아니라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매우 특별한 것임을 나타낸다.

반복 강박이란 우리가 전혀 이롭지 않은 행동의 청사진을 반복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똑같은 대인 관계 문제, 똑같은 직업적 딜레마, 똑같은 성가신 "문제"에 다시 빠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큰사물의 울림이 우리를 반사회적인 것으로, 즉 문화적 규범에 대한 저항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이끈다면, 반복 강박은 우리를 사회화하는 트라우마를 되풀이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과론적으로는 큰사물의 울림은 우리를 기질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한 하나의 저항이라면, 반복 강박은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서구 세계의 물질주의는 사실 매우 부끄러운 행태를 보인다. 평범한 백화점이나 교외의 쇼핑몰에서 볼 수 있는 수많은 상품은 매혹적인 모습으로 우리 마을을 어지럽힌다. 밤마다 텔레비전 화면 속에서 빛을 발하는 온갖 사물 또한 마찬가지다. 또한 서구 사회가 누리고 있는 풍족함이 종종 상대적으로 특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사회를 희생시켜 가며 얻은 것이라는 사실은 큰사물의 윤리 규범을 속히 소생시킬 필요가 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가 옳다고 여기며 살고 있는 가치를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내 삶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결코 알 수 없다. 지금의 일을 몇 년 더 할 수 있을지 50세 넘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것인지 갑자기 아프지는 않을지 가까운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 경험을 하게 될까 늘 두렵다. 그렇지만 이 끝도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지금의 삶을 당장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지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최소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지 않나 생각한다. 


삶이 다소 불분명해 보이고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모호함투성이거나 삶에 자유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는 단지 삶의 명확함이나 자유가 무조건적으로 주어지지 않으며, 때로는 이를 얻기 위해 아주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자기계발서 같기도 하고 인문교양서 같기도 한… 이 책은 묘하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은 자기계발서에 가장 가깝다고 여겨진다. 기질, 욕망, 사회와의 타협 등… 다만 우리가 살다 보면 부딪치는 갈등과 문제를 여러 개념과 이를 다룬 철학(자)으로 설득력 있게 다루었다. 

자기계발서를 읽은지 얼마나 오래 되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2010년 이후로는 읽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비슷비슷한 패턴과 어찌 보면 광고성 같은 내용들에 피로해졌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기계발서가 이래야지 생각했다. 부를 쌓고 성공에 다가가고 그런 책들은 이제 더는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내 삶을 가꾸면서 타인과 살아나갈지, 사회와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지 그런 가치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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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5-03-01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한 자기계발서!
 
[eBook] 암흑의 핵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
조셉 콘래드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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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읽어봐야지 했던 책이었는데 결국 읽고 있는 책에 언급되어서 읽었다.

외국 소설을 읽을 때면 매번 등장 인물이 많아서 힘들고, 인물들 이름이 어려우니 되돌아가서 자꾸 읽게 되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인물 관계도 복잡해서 대체 왜 이렇게 복잡한 건데 하다 보면 완독을 포기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이 소설은 이야기도 비교적 짧고 등장 인물들도 많지 않아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독자들도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유람선에 있던 사람들이 말로라는 선원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 내용이다.
작가는 콩고강을 운항하는 기선의 선장으로 잠시 일한 적이 있는데 그 체험이 소설을 쓰는 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물론 작가의 체험과 극중 화자인 말로의 이야기가 동일시될 수는 없겠으나 어느 정도는 따오고 일정 부분 허구를 덧붙였을 것으로 보인다.

한쪽 끝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색으로 표시된 크고 번질거리는 지도가 한 장 놓여 있더군.
붉은색이 차지하는 면적이 아주 넓었는데, 그곳은 언제 보아도 우리를 흐뭇하게 하지.
거기서는 어떤 실질적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야.
파란색 지역도 꽤 넓었고 녹색 지역 약간에 귤색도 보이더군.
그리고 동해안의 자줏빛 지역은 명랑한 발전의 선구자들이 그 좋다는 라거 맥주를 마시고 있는 곳을 가리켰어.
그러나 나는 그런 색이 칠해져 있는 곳으로 가게 되어 있는 게 아니었지.
노란색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어. 그곳은 지도의 한복판에 있었어. 바로 거기에 그 강이 마치 뱀처럼 매혹적으로 무시무시하게 놓여 있었지.

19세기 말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제국주의 국가들은 아프리카의 자원에 탐을 내고 꽂으면 깃발이 되는 그런 제스처를 취했다.
당시 콩고는 벨기에의 식민지였다고.

말로는 아프리카의 벨기에령 콩고에서 기선 선장으로 취직한 후 콩고강 상류의 오지까지 배를 몰고 가는 과정에서 온갖 체험을 하게 된다.
그는 콩고에 도착하여 자신이 그렸던 모습과 다른 현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다 주재원 커츠를 데리고 나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그 목적을 위해서 일명 흐린 눈 처리가 가능해진다.
그러나 실상 커츠는 현지의 주재원들에게 칭송을 받았을지 몰라도 현지의 원주민을 착취하고 코끼리의 상아를 약탈하는 데 몰두하는 인물이었다.
현지 회사 지배인은 그가 상도덕을 무시하고 일명 선(?)을 넘자 그에 대한 기대치를 낮출 정도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말로는 커츠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점차 궁금해한다.

사실 커츠의 타락한 도덕성의 진면목을 보고 나는 종국에는 말로가 그를 욕하거나 갈등이 폭발해서 부딪치는 장면이 나올 거라 예상했으나 전혀 아니었다.
말로는 몸이 약해져 배 위에서 ˝무서워!˝를 외친 후 죽게 되는데 말로는 그런 그의 모습이 삶에 대한 후회를 표시하는 동시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았다.
말로가 그에게서 일정 정도 연민을 느낀 것은 자신도 그럴 수 있다는 어떠한 감정적 발로가 아니였다고 보인다.

한때 커츠의 소유물이었던 것이 모두 내 손에서 빠져나갔어. 그의 영혼, 그의 육신, 그의 주재소, 그의 계획, 그의 상아, 그의 필생의 과업 같은 것 말이네.
남은 것이라고는 그에 대한 기억과 그의 약혼녀뿐이었어. 말하자면 나는 그런 것들마저 과거로 넘기고 싶었던 걸세.
나는 아직 내게 남아 있던 그의 잔재를 인간의 공동 운명에서 마지막 경지라고 할 수 있는 망각의 세계로 손수 넘겨주고 싶었던 거야.
나는 내 처사를 변명하고 싶지는 않아. 내가 진실로 원한 것이 무엇인지조차 분명히 몰랐으니까.
아마도 그것은 무의식적으로 커츠에게 충실하자든가 아니면 인간 존재의 여러 면모에 도사리고 있는 기이한 필요성 중 하나를 수행해야겠다는 충동이었을 테지.

이처럼 말로는 커츠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과정을 거친다.
사실 나는 이 책을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약탈하는 것이 정당한가 인종주의는 옳은가 라는 단순한 질문과 호기심을 갖고 읽었다.
당시 아프리카로 내려간 유럽인들이 모두 현지 주민을 약탈하는 등 제국주의적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보지 않는다.
적어도 선의나 호의를 갖고 접근한 사람들도 있었을테니.

보고서의 주장은 이렇게 시작되. 우리 백인들의 발전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네들 야만인에게는 마땅히 초자연적인 존재인 것처럼 보여야 하고, 하느님 같은 힘을 과시하면서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등의 내용이 바로 그거야.
그리고 ˝우리는 단순히 의지를 행사하기만 해도 실제로 무한한 이익을 위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
바로 여기서부터 그의 어조는 고양되어 나를 사로잡기 시작하더군. 보고서의 맺음말은 화려했어.
위엄 있는 선의를 가지고 그 거대한 이국적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는 생각이 담겨 있었어.
그 구절을 읽으니까 나도 열광하지 않을 수 없더군.

그러나 이는 정확히 제국주의적 시각이며 화자인 말로의 생각과 행동에도 은연 중에 드러난다.
야만을 문명화하겠다는 주장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소설은 제국주의가 어떤 귀결로 끝이 날지 당연하겠지만 말해주지는 않는다.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그 세계로 들어왔을까? 우리가 그 말 없는 세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게 될까? 말을 할 줄 모르고 아마 귀까지 먹었을 그 세계가 실로 엄청나게 거대하다는 것을 나는 절감했어. 그 세계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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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2-24 1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3-01 10: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기억의 에티카 - 전쟁·철학·아우슈비츠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고은미 옮김 / 소명출판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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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것도 없이 ‘기억’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닌 항상 현재의 문제이다. 과거의 폭력의 기억이 지금 질문되고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폭력의 기억이 지금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 P4

한동안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질문과 회의가 오갔던 시기가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결국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현상인데 그것은 기록에 의거하거나 누군가의 증언에 의해서 대신해서 말하여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100% 진실인가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록은 쓰는 사람의 의견에 따라 재단될 따름이고 증언도 보는 사람의 눈과 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는 생각에서다(착각했거나 사후 편집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그럼 기억과 추모는 무의미한가, 결론적으로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정말로 지하에 묻혀 있어 생존자들이 사라져서 어딘가에서 끌어올려지지 않으면 문제 제기조차할 수 없는 사건들이 도처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입장은 위에서도 볼 수 있듯 기억은 현재의 문제이기 때문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여기는 입장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세계철학사> 4권을 읽으면서였는데 우선은 ‘기억한다는 것’에 대하여 내가 관심을 갖고 있었고, 추가적으로 한나 아렌트와 헤겔, 레비나스의 입장에 대하여 저자가 제시하는 문제 제기가 궁금하기 따름이기도 했다. 읽기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뒷부분에는 일본의 근대 사상과 제국주의에 대한 문제 제기도 들어 있어 내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저자는 아렌트, 헤겔, 레비나스 등의 입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의견에는 동의하지만 일부는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느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 3부의 세 번째 장에서 ‘망각의 구멍’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녀는 강제수용소 및 절멸수용소의 현실을 통해 ‘계속 생각해 나가야’만 하는 가장 ‘두려운 것’을 인지했다. 수백만이라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량학살이 한쪽에서의 인종투쟁과 다른 한쪽에서의 계급투쟁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전제 아래 강철 같은 엄격함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혹은 대량생산적으로” 집행되었다고 하는 사실, 그것이 저 두려움의 중심에 있음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조차 없다. … 동시에 또한 “희생자의 흔적도 없는 소멸이 전체주의 체제에 있어 얼마만큼이나 중요했는지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 P12, P13

‘망각의 구멍’이라는 번역어가 어색하다는 것은 넘어가기로 하자. 망각의 구멍은 소멸한 존재들이 쓸모 없는 존재였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기억까지 완전히 지워서 존재한 적이 없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아렌트가 말한 바는 저자의 입장과 같다.
그러나 아렌트의 후기 저작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망각의 구멍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그 정도로 완벽하지 않다. 생각대로 될 리가 없다. 세계에는 인간이 너무 많기 때문에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할 것이다. - P20

앞선 저작에서는 인간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일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했는데 앞선 주장을 완전히 뒤집는 주장을 꺼내놓고 있다. 따라서 저자는 ‘반드시 누군가 한 사람은 살아남아 보아왔던 일을 이야기’한다고 가정할지라도 그 증언 자체가 ‘역사’가 될 수 있을지 아닐지는 결코 보증될 수 없다. ‘완전한 망각이란 있을 수 없’다고 말하는 아렌트의 발언은 «전체주의의 기원» 의 인식으로부터 명백히 후퇴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P25)라고 이야기한다.
나는 저자의 말도 납득은 가지만 아렌트가 입장을 변화시켰던 배경에 대해서도 이해는 간다(그녀를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고 사람의 입장이 어떻게 대쪽 같이 같을 수 있겠는가). 그녀는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그를 보고 자신이 생각하고 그린 악인의 모습이 아니었음을 인식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우둔한 광대였다고 그녀가 고백하자 이야기를 들은 대중들은 그렇다면 누구나 아이히만과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저작은 출간되었으나 히브리어로 번역되지도 못했고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책을 출간하느냐 물었을 때 “세상이 멸망하더라도 정의만은 영원히”라는 격언으로 대답했다.

란즈만 감독의 영화 «쇼아»를 바탕으로 펠먼은 ⌜증언의 시대에=클로드 란즈만의 <쇼아>⌟라는 글을 썼다. 이 영화는 ‘증언이 필요한 이유는 증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2차 세계대전 절멸수용소에 있었던 이들은 절대로 증언해서는 안되도록 강요받았기에 겨우 살아 돌아온 생존자들은 영화 앞에서 증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고. 나치는 떠나면서 그들의 흔적을 철저히 없애려고 했다. 영화의 화면은 수용소가 없어지고 빈 공터가 되어서 평화롭기만 한 광경이라 더 기묘하게 느껴진다.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보면서 자연스레 나는 군 위안부와 강제 징용 노동자들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렌트는 European mankind의 위기에 대해서 언급했다. 아렌트에게 “서양의 몰락”이란 ‘유럽이라는 여러 민족들의 가족”이 붕괴되면서 ‘인종사회’화되는데 이는 유럽의 아프리카화로서 표상된다. 여기서 민족이란 함께 사는 사람들이 구성하는 정치적 조직이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이 문장만 봐서는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인종 망상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이론적으로도 정치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민족학자는 바로 그런 공포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자신의 연구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인종주의 광신자는 이 경악을 초월해 있다고 자칭하기 때문에, 나아가 온갖 종류의 인종사상에 정당한 싸움을 거는 사람은 인종사상이란 대개 아무런 현실적 경험의 기초도 갖지 않는다고 당연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쪽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들보다 조셉 콘래드의 이야기 ⌜암흑의 핵심⌟ 쪽이 역사, 정치, 비교민족학의 저작들보다 인종 망상에 대한 경험의 배경을 밝히기에 더 적절할 것이다(P107). 과연 그런가. 저자는 실상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고 있다. 주인공이 만난 아프리카의 경험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아프리카에 대한 유럽중심주의적 표상의 근거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정신의 상처는 상흔을 남기지 않고 아문다”고 헤겔은 잘라 말했다.
«정신현상학» 6장 정신의 마지막, ‘악과 용서’의 논의이다. 헤겔이 말하는 ‘정신’은 ‘모든 실재’로서의 이성의 자기 확신이 ‘진리’로까지 고양되고, “자기 자신을 세계로서, 또 세계를 자기 자신으로서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 그 어떤 돌이킬 수 없는 행위도, 그 어떤 용서할 수 없는 범죄도 역사 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모든 부정성의 기억-역사의 상흔-은 정신의 힘을 통해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앞서 아렌트의 주장과 맥락이 이어지고 있는 만큼 저자의 의견을 짐작할 수 있다. 홀로코스트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고, 그 상처가 아물고, 양자 사이에 화해와 유화가 성립되는 일이 가능한가.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되고 그 의도나 부정성의 기억을 소멸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를 묻는다. 피해자의 상처가 너무 깊다면 용서란 곤란하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레비나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신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법이라고 말한다. 물론 헤겔도 ‘인간의 온갖 죄는 용서받을 수 있지만, 정신에 반하는 죄만은 용서받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했다.

레비나스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공적 역사에 의해 부당하게 박탈당한 개인의 생의 의미를 어떻게 ‘변호’할 수 있으며, 어떻게 ‘정의’를 손에 넣을 수 있는가(P169)에 대하여 세밀하게 기술하고 있다. 레비나스는 ‘타인’은 ‘나’를 응시하고 고발하는 존재로 심판은 나에게 내려지기 때문에 나는 교환불가능한 존재로 누구도 대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로 인해 타자를 위한 변호의 책임으로부터 나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은 자신의 비참함 가운에서도 이미 제3자에 봉사한다. 타인의 증인인 나는 증인의 증인이다. ‘나’가 그 ‘증인’인 ‘타인’은 ‘제3자’를 변호한다. 이 구조 속에 공적 공간에 울려 퍼지는 증인들의 목소리는 변호가 가능해진다.
다만 ‘자아의 유일성은 번식성(부계)에 의해 성취된다’고 말하고 ‘아버지의 공통성이 있는 한 모든 인간은 형제이다’는 입장을 취하기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다. 저자는 ‘번식성’이라는 ‘무한의 시간’은 ‘증언’의 무한반복가능성에 한정해야 하는 하나의 경우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타인을 위해 타인을 대신한 증언’은 아버지의 공통성을 넘어, 모성까지도 초월해야 한다고 말이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는 «하이데거와 <유대인>»의 일본어판 서문 ⌜애초부터 땅 위에 길은 없다⌟에서 ‘교토학파’의 ‘정치철학’-이른바 ‘세계사의 철학’-을 언급하면서, 대동아전쟁에서 ‘유럽 근대’를 초극할 가능성을 보고자 했던 그 학파 안에 실제로는 ‘유럽적인 형이상학적 모티프의 회귀’가 확정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 P199
근대 세계는 유럽풍 일색으로 빈틈없이 필하려는 세계였다. 이는 유럽 근대의 원리가 공리적 이지적이었던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도의적 세계원리는 그러한 것과 다르며, 각 민족 본연의 우수함을 살리고 서로 다름의 근저에서 깊숙한 통일성을 실현하려는 작용이지 않으면 안 된다. … 그러한 구성에 존재하는 것이 ‘자리를 얻는 일’이며, 그러한 구성을 만드는 것이 ‘자리를 얻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 점에 있어 비로소 일본적 세계가 일본을 지도적 중심으로 삼으면서, 각 민족 제각각이 자리를 얻어 진실한 공영에 도달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 P237~238
교토 철학은 세계사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이 기본이다. 이는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러나 고야마 이와오는 일본이 세계사에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국체의 독자성에서 찾아야 한다 말한다. 또 교토학파는 유럽의 제국주의를 비판하며 각 민족 각 국가가 제각기 그 자리를 얻음으로써 세계사에서 자기 자리를 위치시킬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역설적으로 일본으로의 회귀가 되고 말았다. 일본의 철학적 내셔널리즘의 논리의 시작이다.

사실 더 다루고 싶은 내용들(국민국가, 인종주의 등)이 많은데 내용이 더 길어질 것 같아서 이만 줄이려고 한다. 마침 러시아 내전을 읽고 있었기에 자연스레 더 몰입하여 읽을 수 있었다. 폭력과 기억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책일 것 같다.

모든 폭력, ‘근절’의 폭력, ‘세계’의 외부에 있는 절멸이든 ‘세계’ 그 자체의 절멸이든, 일반적으로 절멸의 폭력, ‘인간이 기억할 수 있고 모종의 영속성을 가질 수 있는 세계’라 불리는 것의 창설 자체가 이미 ‘근절’의 폭력을 포함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절멸의 폭력의 망각과 은폐에 의해 자기를 ‘법’으로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세계’ 그 자체의 폭력, ‘법’ 그 자체의 폭력, ‘벽’을 만들어 ‘경계선’으로 ‘에워싸는’ 것 그 자체의 폭력, ‘법’으로서 작용하는 기억 그 자체의 폭력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이 기억할 수 있는 세계에는 속하지 않는’ 것에 대한 기억, ‘기억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기억’도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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