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생존 전쟁을 치르다 : 행랑어멈과 식모들*우리 시대의 커리어우먼 역사 속 여자, ㅇㅇ하다 4
이아리.권혁은 지음 / 푸른역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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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은 엄마(또는 할머니)가 먹여 살렸는데˝라는 회고는 한국 사회에서 낯설지 않다. 압축적인 근대화와 산업화를 겪었던 한국 사회는 매우 오랜 기간 여성들의 노동에 의존해 생계를 도모하고 살길을 찾아온 역사였다.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도 여성들은 스스로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혹은 삶의 의미를 찾고 자아실현을 이루기 위해 노동을 했다. - P11~12

의미 있는 내용의 신간이 나왔다. <역사 속 여자 OO하다> 시리즈다. 우선 4권의 책이 나왔는데 덜컥 한꺼번에 사기보다는 한 권을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1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권이었다는. 다른 무엇보다 4권의 제목과 내용이 가장 먼저 끌렸다.
이 시리즈가 왜 기획되었는지 독자들 입장에서 대부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역사학계에서 일하는 여성학자들은 역사 속 사료를 보고 읽으며 여러 번 한계를 마주한다. 남아 있는 사료와 기록은 대부분이 남성이 쓴 것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료 속에서 아무리 이를 잡고 헤집어봐도 여성들의 목소리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근현대 이후 시기부터 여성들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전에는 그런 경우도 드물었으니 말이다.
이 시리즈는 2024년 여성 사학자들 몇몇이 담소를 나누다 의기 투합하여 기획하게 되었다고 한다.

4권의 내용은 먹고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다. <여자, 식모 살다>를 통해서 근대 시기 행랑어멈과 식모에 주목을 했다면 <여자, 회사 가다>는 여성이 회사에 취직하고 맞닥뜨린 현실을 다룬다. 여러 사료를 접목하여 사건을 재구성하여 독자가 당시의 현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행랑은 본래 근대 이전 하인들이 주인이 사는 안채와 분리되어 사는 공간이었다. 그러다 1894년 갑오정권의 개혁 내용으로 신분제가 공식적으로 폐지되면서 노비들이 차차 주인을 떠나자 그들을 대신해서 지방에서 농사를 짓고 살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해서 상경하게 된 농민들이 서울 양반집의 행랑채를 채우게 되었다.
식민 지배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단기간만 조선에 머물던 재조일본인들이 가족을 이끌고 상당수 들어오며 서울에 자리하기 시작했다. 확산 중이던 서울의 행랑살이는 주택난이 심화되면서 쇠퇴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전시 호황을 누린 일본은 젊은 여성 공장노동자들을 고용하는 섬유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 본토에서도 식모 일을 할 만한 젊은 여성이 크게 부족해졌다. 반면 조선의 재조일본인 가정들은 달랐다. 조선인 식모가 일본인 식모에게 주는 급료의 6활 정도만 주어도 기꺼이 일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들은 조선인 식모를 고용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모여사는 진고개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채 발에는 일본식 게다를 신고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조선인 여성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한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는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여성들이 어떻게 재조일본인 가정에서 일을 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이 어려운 형편에 돈을 벌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여성들일테니 서울에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이들은 다름 아닌 직업소개소를 통해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1920년대부터 주요 도시에 국가적으로 인사상담소가 생기기 시작했는데 1920년대 중후반 무렵에는 인사상담소가 전문 ‘직업소개소‘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한다. 직업소개소에서 부르던 공식 명칭은 ‘호내사용인‘으로 여러 직업 중 식모가 전체 중 절반 이상을 차지했을 정도라니 놀랍다.
그러나 당시 식모를 보는 사회적인 시선은 별로 곱지 않았다. 언론도 그렇고 남성들의 편견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먹고 살기 위해 직업을 선택한 경우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허영심 있거나 유혹하는 여성으로 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은 범죄에 연루되거나 성폭력 및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될 위험성이 많았음에도 사회는 개인에게 책임을 지웠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은 모습인 것 같다.

대학을 간다 했을 때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기억이 난다. 하필 나라 경제도 어려웠고 살림이 팍팍했을 때니 말이다. 그래도 여성이 대학을 간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었던 때였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정부의 정책 때문이다. 전두환 정부는 과외 과열 해소를 명분으로 1981학년도부터 각 대학에 기존 졸업정원의 30퍼센트를 추가 선발하되, 그만큼을 중도에 탈락시키도록 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부에겐 당장 눈에 띄는 치적이 필요했다. 그 일환으로 입시 지옥을 해소하겠다며 과외 금지와 함께 졸업정원제를 내세운 것이었다. 졸업정원제는 대학생 수를 급격히 팽창시켰다. ... 여대생 수 역시 급격하게 늘어났다. 여학생이 점차 고등교육에 진입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많은 부모가 딸에게도 대학 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 P102~103
전두환 정부가 과외 금지를 한 것은 알고 있었는데 졸업정원제를 시행했다는 이야기는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늘어난 대학생 정원만큼 여학생의 수도 자연스레 늘어난 것이다.

1993년 8월 서울대에 심상치 않은 대자보가 붙었다. A교수의 성폭력을 고발하는 대자보였다. 대자보를 붙인 여성은 조교로 불쾌한 일을 겪었다. 무언가 잘못 되었다를 느꼈는데 전임 조교로부터 자신과 똑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고 ‘이 사람은 상습범이구나.‘느꼈다. 짐작하겠지만 대자보를 붙인 후 논란과 더불어 거센 후폭풍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그녀가 대자보를 붙일 때 그것을 찢으려는 이들을 막아선 학생들, 대학본부와 학과의 외면 속에서도 먼저 진상조사단을 꾸렸던 학내 단체들, 끝없는 법정투쟁을 함께하며 곁을 지켰던 활동가들, 멀리서 연대의 목소리를 보내 온 시민들, 그들이 있었기에 단 한 장의 대자보가 시대를 움직일 수 있었다.
1999년 2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되며 ‘직장 내 성희롱‘ 개념이 명문화되었다. 또한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해야 하고,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부서 전환과 징계 조치를 취해야 하며, 피해 근로자에게 고용상의 불이익 조치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여성을 채용 공고에서부터 배제하는 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고, 이제 직장 안에서의 성희롱이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작고 얇은 책인데 쉬우면서도 알차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에 관심을 가지며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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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1894년 남북접 동학군의 공주 점거투쟁 - 남접·호남 중심 농민전쟁론 넘어서기 와이비 아카이브 2
지수걸 지음 / 역사비평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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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점거투쟁은 갑오변란과 청일전쟁 등으로 말미암아 크게 달라진 정세와 조건 가운데서 전개된 assembly/occupy(이하 A/O 투쟁으로 줄여 씀)이었다. 이 책의 표제로 ‘모이고 모으자! 점거하고 담판하자!‘라는 슬로건을 특기한 것은 공주 점거투쟁 시기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공동투쟁의 목표와 방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호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어떤 과거(의 이야기)이든 후대의 독자는 기존에 누군가가 정리해놓은 역사를 만나는 경험이다. 그리고 이 역사적 정리는 여러 번의 논란과 재고를 거쳐 가장 최근에 정설로 굳어진 것이다. 굳어진 정설을 깨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저자는 감히 그런 도전을 감행했다.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동학혁명 등등 다양한 용어가 있지만 이것이 교과서에도 일반적으로 쓰는 것이라 이걸 택하겠다)은 관련 자료와 데이터가 방대히 축적된 만큼 이미 충분히 많은 저서들이 나와 있다.

이 책은 동학군의 2차 봉기로 초점을 맞추었다. 장소는 호남이 아닌 호서, 충청 지역의 공주다. 공주라는 지역 이름만 보면 우금치 전투를 말하려 하는 것이구나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갑오년 항쟁에서 공주를 중심으로 한 호서 지역의 역할이 간과되었기에 이를 복원해야 한다 말한다. 기존에는 지나치게 전봉준 중심의 호남, 남접 집단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동학농민운동의 전개는 기존의 농민 전투(전쟁)이 아니라 임술년 이래 항쟁의 역사에서 어셈블리(도회)라는 말로 상징될 수 있는 비폭력적인 연대와 소통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모두 다 기존의 관점을 뛰어넘는 새로운 내용들이다.

기존 동학농민운동의 서술은 보통 호남 배경으로, 전봉준 중심으로 서술된 측면이 많다. ‘전라도 고부 군수의 학정에 못이긴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켰고 놀란 정부가 부랴부랴 전주성에서 농민들의 요구를 들어주며 화약을 맺었다. 그러나 새로 파견된 안핵사의 농간에 다시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의 발효로(구실이겠지만)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이에 농민들은 반봉건에 반외세 구호를 걸며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군 구식 무기에 밀린 농민군은 우금치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며 대패했다.‘ 이렇게 말이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저자가 말하려고 한 바는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군의 2차 봉기는 남접 집단의 8월 27일 남원 도회나 전봉준의 9월 10일 삼례 재기포령 때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다. 임기준과 이유상 등 공주와 충주 등 호서 지역의 척사유생들이 대원군 밀지나 고종 명의의 「조가밀지」를 받고 동학군과 함께 항일의려를 결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둘째, 기존 연구는 남북접 지도부 사이의 연대가 먼저 이루어진 후 최시형의 9월 18일 기포령이 나왔으며, 이에 의해 북접이 남접 전봉준과 협력하여 연합군을 결성했다고 본다. 공주를 점거하는 투쟁에 남북접 지도부가 합의한 시기는 9월 그믐경이고, 그들이 연대한 이유는 일본군과 관군의 탄압 및 동학 내부의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셋째, 기존 연구는 11월 8일~11일의 우금치싸움을 포함한 일련의 투쟁을 공주 점거투쟁의 절정으로 이해하였으나 저자는 우금치싸움이 아닌 10월 23일∼25일 공주를 둘러싸고 금강 남북 양안에서 전개된 효포 싸움이 더욱 중요한 사건이라고 주장하였다.
넷째, 남북접 동학군의 사망자 통계 사상자의 숫자가 과장되었으며 기존 연구는 공주 점거투쟁에서 동학군이 대규모로 참여하고 대규모 살상을 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동학군의 대규모 사망은 그들이 정식으로 해산한 11월 중순 이후 집단 학살로 나타났다고 말한다.
다섯째, 저자는 동학 연합군의 공주 점거투쟁은 기존 연구에서 말하는 “병력을 몰아 한성으로 진격하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니라, 호서와 호남을 연결하는 요충지 공주를 점거한 상태에서 애국적 사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와 무장 시위(도회와 의거)를 통해 중앙군·감영군, 향리·군교·상인들의 호응을 유도하여 조선 왕조나 일본 정부와 정치 담판을 하려 한 최종 단계라고 했다.
여섯째, 공주 점거투쟁의 성격을 논하면서 저자는 이 투쟁의 주역이 농민군이 아니라 동학군이며 혁명군이 아니라 (무장)시위대/의려이므로, 이들을 전사라고 부르거나 이 사건을 내전이나 혁명, 심지어 전투로 부르는 것도 역사 조작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느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이후 기존은 동학동민군에 삼례 봉기를 주목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공주, 이인 등지의 충청 지역에서 일어난 봉기의 규모가 훨씬 컸으며 중요했다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 이렇듯 호남 중심의 배경 중심에서 호서 지역 배경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하려한 점이 엿보인다. 또 기존에 동학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한 전제를 뒤엎고 공주 점거를 위한 투쟁이었음을 강조하고 공주점거 투쟁 시기 지방수령이나 척사 유생들이 동학군과 연대하지 않은 것은 일본군의 최신식 무기나 동학군의 무기 열세 때문이라기보다는 서로 연대하고 협동하는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 것 등은 충분히 공감이 되었고 새로운 의견 제시이기에 의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과연 반침략 반봉건 민중 항쟁으로 일컬어지는 동학농민운동을 어셈블리(도회 또는 의거)라고만 정의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의거와 전투를 그렇게 무자르듯 구획지을 수 있는지 모르겠어서다. 또 어셈블리라는 용어도 좀 난해한 측면이 있다. 저자는 굳이 어셈블리라는 용어를 쓰면서 기존에 도회라는 단어가 사어가 됐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그렇다고 한국에서 어셈블리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선뜻 와닿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말 호서 지역의 유생들이 고종 명의의 밀지를 받았는가. 저자도 이 부분은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다 그런 설이 있다는 것만으로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 전봉준이 우금치 싸움을 결행(및 실패)하면서 정말 교단에 저지른 잘못을 뉘우치며 회개했을까라는 것도 의문이었다. 전봉준은 호남 남접 기반의 대장군이었고 호남 남접은 당시 자료를 마땅히 기록하지 않았다(남아 있는 것이 없다). 해당 자료는 북접 동학교단에서 생산했기 때문에 신빙성에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이를 비롯하여 저자가 전개한 논지가 추론에 기대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아서 아쉬웠다.

이렇듯 장점도 있지만 한계도 엿보이는 책이다. 근래 들어 읽은 책 중 가장 도발적인 책이었다. 실제로 이 책이 나온 뒤 여러 건의 서평이 올라와 논쟁이 되었다고 보았다.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역사는 1980년 이후 민중 중심의 역사 담론이 유행하고 2004년‘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1894년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봉건제도 개혁과 국권 수호에 기여한 인물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참여자와 유족의 명예를 회복하며 민족정기를 선양하기 위해 위한 법률)이 제정되고 시행된 이후 민족적 측면이 강조되고 혁명화된 부분이 있어 보인다. 이 책이 시간이 흘러 그냥 묻히게 될지 아니면 또 다른 시선의 물꼬를 트는 책이 될지 사뭇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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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하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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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역사 전체는 비록 생존과 성취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커다란 어려움, 위기, 갈등의 이야기도 하다. ... 그러나 소련 역사를 환경의 산물이라고 말하면, 이 역사를 그토록 놀랍고도 눈에 띄도록 만드는 핵심적인 사항을 놓치게 된다. 아마도 어떤 다른 근대국가 이상으로, 공산주의자들(그들은 스스로를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이데올로기, 즉 자신들이 마르크스주의-레닌주의 혹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부르는 것으로부터 동력을 공급받았다. 그 이데올로기 자체는 진화되고 변화되었으나-모든 상황과 결정을 그것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하는 렌즈로 남아 있었다. - P707~708

앞선 상권에 이어 하권은 19세기 중후반부터 푸틴이 집권한 시기까지를 다룬다. 푸틴 집권 시기는 2008년 정도까지만 다루는데 이는 현재 제8개정판이 나온 시기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런 아쉬움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이 책은 러시아의 역사를 잘 정리하고 있는 것 같다. 번역본으로 나온 책 중에 러시아의 통사를 훓을 수 있는 책은 그나마 이 책이 거의 유일해보였다.

알렉산드르 2세는 지방정부인 젬스트보를 설치하여 대중 교육과 의료에서 상당 부분 효과를 보았다. 그리고 법원을 행정부에서 분리시켜 독립적인 역할을 하게 하고 배심원 재판과 치안판사 제도를 도입하는 등 사법 제도를 개선하였다. 또 하층 계급만 하던 군 복무를 모든 러시아인들에게 확대하는 대신 복무 기간을 축소하고 군사전문학교를 설립하였으며 군법과 법 절차를 개선하였다. 그리고 재정을 혁신하고 교육 및 검열을 조금 자유롭게 하는 조치를 취하는 등 여러 근대화 개혁을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러시아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협상을 맺고 발칸 반도를 놓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 또 캅카스 전역, 중앙 아시아를 정복하고 극동 경계를 넓혔다. 그러나 농민 문제는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농노 해방은 러시아의 근현대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이전부터 진행된 정부의 정책으로 농노제가 강화되고 공 등을 비롯한 귀족의 이익은 커져가고 있었다. 농민들의 불만은 쌓여갔고 일부는 봉기, 탈주하는 사태가 이어진다. 실상 이 문제는 한 세기 이상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서 주기적으로 농민들의 봉기를 불렀다. 이 무렵 인텔리겐치아들도 농노제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상황이었다. 정부로서도 더는 미룰 수 없는 과제였다. 이에 농노 해방은 알렉산드르 2세 시기인 1861년 공식 발표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에게 제공된 토지는 여전히 불충분했기 때문에 농민들의 불만과 소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문제는 그가 암살당하는 바람에 재위 기간 동안 진행했던 개혁이 다 부정당하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알렉산드르 3세는 변화를 최소화하면서 종교 통일(정교회), 전제 정치, 국민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니콜라이 2세 시기에도 이어진다.

20세기 초, 노동자들의 불안과 자유주의 및 마르크스주의 확산으로 1905년 혁명이 발생했다. 두마 통제가 가능해지면서 자체 입법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고 농업 개혁을 통해 농민은 자유 이동이 가능해졌다. 귀족의 수는 감소하였고 귀족이 가진 보유지의 수도 감소했는데 이는 부의 상당수가 국가에 진 빚을 청산해서 남은 돈이 얼마 없었고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못한 이유도 있었다. 귀족들은 많은 경우 이민을 떠났고 그러지 않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 했다. 대신 기업가, 사업가, 기술자 같은 중간 계급이 떠올랐다. 정부는 철도를 증설하고 외국 자본을 유치하였으며 중공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발칸 전쟁과 이어진 1차 세계 대전으로 러시아도 격랑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 시대부터 1917년 혁명에 이르기까지 이르는 동안 많은 문학가들이 탄생했다. 투르게네프가 1840년대를 배경으로 관념론자들, 자유주의자, 허무주의자, 인민주의자들을 다루었다면 1860년 무렵 등장한 도스토옙스키는 반합리주의, 슬라브주의에 입장에 서 있었다. 레프 톨스토이는 종교적으로 세속에 대한 비판과 예언을 다루었다. 이밖에도 잉여인간을 다룬 곤차로프, 교회 및 민중을 다룬 레스코프, 인텔리겐치아/농민/염세주의자를 다룬 우스펜스키, 현실을 풍자한 실티코프, 상인 중하층 계급을 묘사한 오스트롭스키, 평민 영웅을 다룬 고리키, 근대 단편 소설을 창시한 체호프 등이 나왔다(관련 문학을 읽을 때 이 부분이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1917년 2월 23일 식량을 달라며 일어난 섬유 노동자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혁명의 불길이 치솟았다. 2월 26일 임시 두마 정부는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키면서 로마노프 왕조를 종식시켰다. 이 무렵 소비에트도 조직을 갖추었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온건한 자유주의 입장을 고수하여 전반적인 개혁을 원하는 민중의 요구를 받아들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더군다나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기에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웠다. 이때 등장한 것이 레닌이다. 레닌은 현 정부가 부르주아적이라면서 소비에트에게 권력을 주고 토지를 국유화하여 농민에게 분배하고 산업을 노동자평의회의 통제하에 두는 등 사회 혁명의 방안을 제안하고 즉각 종전을 요구했다. 볼셰비키가 10월 25일 정부의 통제권을 장악하며 소비에트 러시아가 시작되었다.

1921년까지 볼셰비키는 무력을 동원한 급진 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사기업이 사라지고 국유화되었으며 사적인 교역은 억압되었다. 강제 배급이 실시되고 모든 토지가 국유화되었다. 이에 내부 반발로 백군 세력이 등장하였으며 주변국도 적군에 의한 통제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러시아는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는 1928년까지 국가 회복을 위한 후퇴이자 타협으로 자유도를 조금 높이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결과 도시에서 활동하는 소기업인들이 증가하고 농촌에서는 부농의 수가 증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는 기존 공산주의자들의 불안을 초래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스탈린이 등장한다. 스탈린 시기 러시아는 국가적 산업 계획 정책으로 농업 집단화를 완성하면서 농업 생산량을 다소 증가시켰고 식량 배급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도급 노동이 일상화되고 임금 격차는 확대되었으며 강제 노동이 시작되었고(반대 세력에 대한 대숙청) 사회주의체제에 대한 강조로 인하여 요식 행위가 늘어나는 부작용을 낳았다.

스탈린 사후 소련 지도자들 사이의 권력 투쟁이 일었다. 스탈린에 대한 흐루쇼프의 비난은 대내외적으로 충격을 주었던 사건이었다. 흐루쇼프는 당제1서기로 올라서면서 권력의 중심에 섰다. 흐루쇼프 시기 러시아는 개인숭배에 기반한 스탈린주의를 벗어나 레닌체제로의 복귀를 선택했다. 경제적으로는 생산, 소비를 자극하면서 산업 경영에 중점을 두었다.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중심에 서 있었고 중국과의 갈등, 쿠바와의 전쟁이 있었다.
이후 들어선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모스크바 중앙에서 정치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복귀하면서 정치가 정체되었다. 그러나 국민의 복지 정책이 확대되고 데탕트 정책으로 훈풍이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고르바초프는 낮은 성장률로 침체된 경제로 인한 불만과 이전 같은 이데올로기적 강요가 통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가 레닌주의 사회주의 이상을 강조하며 국민들에게 더 적극적이고 헌신적인 자세로 국가 발전에 이바지함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나아간 것은 한계가 있었다고 보인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정책으로 자율권을 부여하고 통제를 완화하는 등 개혁을 시도했으나 역설적으로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낳았다. 각지에서 민족주의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며 소련은 동유럽을 포기하고 동유럽의 국가도 독립을 자처하면서 결국 1991년 소련은 붕괴의 길을 걸었다.

옐친은 최초로 민주적인 절차에 의한 대통령 선거로 대중적인 지지를 얻으며 최고위 권력자에 선 인물이었다. 그의 재임기 초반에는 급진적인 사유화가 진행되었는데 이로 인해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재임기 중반기에는 대통령의 권한을 높이는 것으로 스스로 권력을 강화하면서 내분이 극대화되었다. 이후 그는 개혁을 후퇴하면서 사회 안정성을 높이려 했으나 급격하게 진행된 사유화는 사회적 혼란을 높이고 부패를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제2차 체첸전쟁이 벌어지자 옐친은 푸틴을 지휘관으로 보냈다. 옐친의 지지율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이는 푸틴의 지지율을 높이고 입지를 강화하는 역할을 했다.
권력자에 올라선 푸틴은 러시아의 발전과 진보를 강조하며 국가주의와 애국주의를 강화하였고 강력한 중앙 통제를 바탕으로 관리형 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했다. 관리형 민주주의는 비정부기구를 통제하면서 다른 견해가 들어설 공간을 위축시키는 것인데 용어만 좋게 포장한 것일 뿐 과연 좋은 평가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푸틴은 헌법을 고쳐가며 현재도 집권중이니 말이다. 더불어 크림 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 돈바스 지역을 노리며 시작한 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공산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은 최근에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중심이 되어버린 ˝원한의 정치˝에 사실상 편입되었다. 공산주의의 종식이 많은 고통, 소외, 공인된 모욕 등을 초래했다는 것은 냉혹한 사실이다. 특히 푸틴의 러시아에서는 민족주의가 대중문화와 여론에서 주류이며, 공식적인 미사여구가 되었다. - P1002~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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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 - 상 - 제8판
니콜라스 V.랴자노프스키.마크 D. 스타인버그 지음, 조호연 옮김 / 까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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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재료는 바로 지속성이다. 비록 모든 역사적 사건이 독특하고, 따라서 모든 일련의 사건들이 유동성과 변화와 다양성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현재에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가 역사를 가지도록 해주는 것은 주어진 현재와 과거의 관련성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속성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사항은 주장일 따름이고, 종종 논란거리가 된다. 비록 겉보기에는 별문제 없이 보이는 이 책의 표제도 하나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많은 특정 민족들, 문화, 역사를 "러시아"라는 제목 아래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중에는 러시아어가 아닌 언어를 구사하면서 스스로를 러시아와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민족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 일부는 나중에 차이점을 인식한 데에서 영감을 얻어 민족국가로서의 독립을 얻어내고, 자신들의 역사가 러시아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하게 된다. - P30~31


오늘날의 러시아가 오기까지 역사는 어떠했을까.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임을 알고는 있지만 지금의 모습이 되기까지 과정이 궁금했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이 도무지 끝날줄 모르는 상황을 보며 답답한 마음과 안타까움이 이는 까닭에 분석하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또 러시아 관련 문학 작품을 더 잘 읽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앞선 인용문을 통해서도 느끼지만 러시아의 역사는 복잡다단한만큼 사소한 것 하나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느꼈다.

러시아의 기원은 키예프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키예프국은 동슬라브족을 통일하고 비잔티움과의 전쟁 끝에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부상했다. 전성기(980~1054년)의 키예프는 영토를 확장하고 유럽의 많은 지배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같은 시기 유럽의 국가들처럼 기독교를 수용했다(로마가 아닌 비잔티움으로부터). 키예프는 지배 하에 있던 영토에서 모피, 밀랍, 꿀, 노예 등을 공물로 거두고 비잔티움 등과 교역하며 상업을 발전시켰다. 사회는 최상위층이었던 공, 보야르(귀족), 드루지나(가신), 스메르디(농민), 자쿠피(반자유농민), 수공업자, 노동자, 노예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공은 군사 지휘권 뿐 아니라 재판권, 행정권을 지니고 있었다. 보야르, 드루지나가 이에 협력하였으나 전쟁 등을 논의하거나 긴급 법령 등을 결정해야 할 때는 민회가 소집되었다. 

이런 키예프가 몰락하게 된 것은 내부적으로는 교역로가 파괴되고(국제 교역에서 키예프의 가치가 떨어짐) 정치 체제가 실패(합의 없는 무력에 의한 지배, 친족 간의 공동 통치, 형제 간 순환 통치 간의 갈등)하면서 국가 붕괴를 이끈 탓이 크다. 거기에 남동쪽 스텝 지대에서 끊임없는 외부 세력의 공격으로 소모전을 치룬 이유도 더해졌다. 


공의 독립 보유지에 따른 분령지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분열이 시작되었다. 키예프는 대외적으로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는데 특히 1240~1380년까지의 몽골이 핵심 타격이었고 남서부는 리투아니에게, 북부는 노르웨이, 독일, 스웨덴에게 의해서였다. 키예프인들은 언어적, 민족적으로 갈라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인 세 분류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몽골이 남부 러시아 스텝 지대를 차지하면서 러시아인들은 영토를 빼앗기고 권력의 중심이 북동쪽으로 이동하여 유럽과 단절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은 분령 시기가 위기와 생존의 시기였을 뿐만 아니라, 공국들 사이에서 앞을 향한 경쟁의 시기이기도 했고,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본다. 각각의 공국들은 키예프의 과거에서 자신들의 유산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중 모스크바가 경쟁 공국들을 물리치고 승자로 입증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 역사적 시대 구분이라는 언제나 골치 아픈 문제에 대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자들이 키예프와 분령 시기를 "중세 러시아"로 부르며, 중앙집권화된 모스크바국의 성립기를 "근대 초기의 출발이라고 규정하는 경향은 점차 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 발전의 독자성보다는 폭넓은 유럽적 흐름과의 비교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 P103


15세기 초 킵차크 한국은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으로 분리되고 모스크바는 1480년 몽골로부터 완전히 독립한다. 

모스크바 러시아 시기 이반 3세(1462~1505년)는 흩어져 있던 주변 공국들을 모으며 통합하는 과정을 진행했다. 이반 3세는 비잔티움 공주인 소피아와 결혼하면서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높였다. 리투아니아는 모스크바와 결혼 동맹을 맺었으나 이는 중앙 집권적 정치를 진행하던 모스크바가 지방 분권형 정치를 진행하던 리투아니아에 대해 우위에 서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혁명 이전의 대부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은 모스크바의 성장이 모스크바 공들과 러시아 민족의 위대하고도 필연적인 업적이라고 찬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외부의 침략을 받고도 살아남아서, 역사에서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담당하기 위해서 통합해야 했기 때문이다. 소련시기의 역사학자들도 동일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이 주장은 소련 이후의 공식적인 역사 교과과정에서, 그리고 러시아 지도자들이 민족의 과거에 대해서 언급할 때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반면에, 프레스냐코프 같은 혁명 전의 러시아 역사학자들, 오늘날의 많은 서구 역사학자들, 그리고 당연하게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역사학자들 등은 이런 해석-비판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민족주의적 신화이다에 종종 의문을 제기한다. 이런 저술가들은 칭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러시아 모으기가 무엇보다도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같은 러시아인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다양한 비러시아 민족들을 대상으로 한 모스크바국 공들의 교묘한 침략이라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그리하여 모스크바국 공들은 그들에게서 자유를 빼앗았고, 모든 사람들을 모스크바국의 전제정치에 예속시켰다는 것이다. - P169


모스크바 러시아는 이반 뇌제와 표도르 시기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반 4세(이반 뇌제)는 개혁을 하는 한편 공포정치를 병행하며 근대 국가 및 제국으로의 기틀을 마련했고 볼가 지역과 시베리아로 영토를 확장했다. 표도르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그루지야국을 속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시기 농민 지위가 낮아지며 봉직 귀족과 충돌 및 갈등이 빚어지자 정부는 봉직 귀족의 편을 들면서 농민들이 여기저기에서 들고 일어났다. 또 표도르가 죽을 당시 후계자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고 보리스 고두노프처럼 여기저기에서 권력자임을 참칭하며 사회적으로 혼란이 발생했다. 이는 1613년 미하일 로마노프의 즉위로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면서 일단락되었다. 


미하일 정부는(1613-1645년) 국제 관계를 안정화시키고 재정 확충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뒤이은 알렉세이는(1645-1676년) 1649년 탈주한 농노를 붙잡아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기한이 무기한으로 변경된다는 법을  공포하면서 농노제를 더욱 강화했고 우크라이나까지 모스크바의 관할 영역을 확대했다. 

행정을 뒷받침한 것은 보야르 두마 혹은 협의회(오늘날로 보자면 의회)였고 차르는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에 열을 올렸다. 관료의 수가 증가하며 관료제는 확대된 반면 지방행정은 취약해졌다. 이 시기 농업은 여전히 중심 산업으로 위치했으나 교역, 수공업, 제조업도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알렉세이 시기 종교 인쇄가 가능해지면서 기독교 저술이 활발해졌고 교회 개혁 운동 진행으로 국가와 교회가 통합되었다. 유럽을 통해서 서구의 세속 문학이 확산되자 개인주의 주제가 대두되었으며 궁정 극장이 설립되면서 러시아 희곡이 시작된다. 이전부터 유행하던 성상화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 원근법, 해부학 지식이 더해져 달라진 모습을 보였고 초상화 같은 세속적 회화도 등장하였다.


18세기부터 19세기는 제정 러시아의 시기다. 이 시기는 제국 시대라고도 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대이자 이전 러시아 시대라고 불린다. 


18세기의 러시아는 압도적으로 농촌 사회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농민이었다. 그들은 농노와 국가농민이라는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대략 수는 비슷했다. 농노의 처지는 표트르 대제로부터 파벨과 알렉산드르 1세의 통치기를 거치면서 더욱 악화되었고, 1800년 무렵에는 최악의 상황에 다다랐다. 세금 부담의 증가 이외에도 농민들은 점점 더 경제적 착취의 대상이 되었고, 농노들이 시정 요망 사항에 대한 청원권조차 가지지 못하고 주인의 의지에 사실상 완전히 예속됨에 따라서 형편은 더욱 악화되었다. - P407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개혁을 단행하여 군대, 행정, 교육 시스템을 근대화했으며, 대북방 전쟁 승리로 발트해 주도권을 확보하고 폴란드에도 우위를 확보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영토 확장(폴란드 분할)과 학문과 예술 발전을 이끌며 근대화를 주도했으나 이 시기 농노제는 더욱 확대되었다. 알렉산드르 1세 시기 러시아는 프랑스, 프로이센을 포함한 유럽국가와 스웨덴, 영국, 러시아 연합 간 전쟁 끝에 빈 회의에서의 협약으로 유럽 내 위상이 높아졌으나 내부적으로는 농노제 폐지 실패와 데카브리스트 반란으로 갈등이 일었다. 니콜라이 1세는 관제 국민성을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통치를 이어갔다. 페르시아, 투르크와 전쟁을 벌이고 폴란드,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를 러시아화했으나 크림 전쟁에서의 패배로 한계에 부딪힌다.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는 사실상 전례가 없는 놀라운 외교력 및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국가들은 거대한 유럽 국가를 해체하고 완전히 파멸시켰으며, 과거의 적이자 경쟁자이자 갈등의 근원인 국가를 제거함과 동시에 자신들의 영토, 자원, 인구를 크게 늘렸다. 동유럽은 완전히 이 나라들의 통제하에 들어갔으며, 프랑스는 자신들의 옛 동맹국을 잃어버렸다. 의미심장하게도, 폴란드 분할 이후 오랫동안 동유럽의 이들 세 군주국은 국제무대에서 서로 긴밀히 협력했다. 다른 한편으로 폴란드 분할은 지속적인 결과를 낳은 고통스러운 유산을 남겼다. 특히 러시아 제국 내에서의 "민족 문제"의 출발이 폴란드 분할로부터 유래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 P394


19세기 전반 고등 교육의 확산으로 과학 등 학문이 발전하면서 인텔리겐치아가 대두되는 등 지적인 해방이 이루어진다. 낭만주의, 관념론이 유행하는 한편 슬라브주의, 민족주의 같은 보수주의 기치가 일어서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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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우생학 -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과학’이 되었나
N. 오르도버 지음, 김현지 옮김 / 오월의봄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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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학은 언제나 극히 기민한 이데올로기였다. 우생학은 스스로 힘을 실어주기도 하고 동원되기도 한 운동들, 즉 국가주의, ‘개혁 지향‘ 자유주의, 절대적인 동성애 혐오, 백인우월주의, 여성혐오, 인종주의와 따로 떼어낼 수 없다. 우생학이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순전히, 어떤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오명을 뒤집어쓰더라도 나머지 사람들은 다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런 운동들과 공모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생학이 모든 유형의 편견에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배제나 유전적 추정이나 외과 수술의 대상으로 지목된 개인들이 대부분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며, 어느 하나가 아니라 그 이상의 표적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 P56~57

미국의 우생학은 이제는 더는 사라진 학문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더는 자신이 백인 코카서스 인종임을 드러내는 사람은 없지만 여전히 흑인과 이민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이 공공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중이니까. 인종, 계급, 젠더의 위계에 의한 불평등은 우생학을 낳는 기본 토대다. 거기에 정책 입안자, 의사, 법률가, 기업가 등이 서로 간에 양분을 주며 우생학이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우생학은 가산적 이데올로기다.

20세기 미국 이민의 역사는 우생학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실천 영역 중 하나다. 1875년 페이지법부터 1882년 중국인 배척법, 연방이민금지령, 1917년 재외국인 미국 이민 및 거주 규제법에 이르기까지 인종 및 계층에 따라 입국 불가 범위는 계속 넓어졌다. 특히 1917년 재외국인 이민법이 발표될 당시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급진주의자에 대한 적대감이 커지면서 보편적인 반이민정서가 횡행할 때다. 이후 1921년 이민자의 범위를 총 인구의 3%로 제한하는 법이 통과되더니 1924년 이민제한법이 발표된다. 이민제한법은 우생학 전문대리인인 로플린이 적극 역할을 했는데 그는 재외국인 국가등록제를 촉구하고 자격 통과한 이민 예정자에게 개발적으로 여권을 발급해야 한다고 권고했던 것이다(정책에 거의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 법은 나중에 히틀러의 나치 독일 단종법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우생학을 지지한 사람들은 몰려드는 이민자들로 인해 인종 혼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증폭됨에 따라 백색 인종적 순수성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렸고 이를 적극적으로 타개하고자 뛰어들었다. 파이어니어 펀드라는 회사는 우생학 출판물을 영어로 번역하고 미국의 우생학회 등 우생학을 선전하는 단체를 지원하며 반이민 기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동성애의 원인이나 치료법을 찾는 것이 동성애에 일탈이라는 꼬리표를 단다는 점, 동성애에 대한 의학적 또는 정신의학적 병리화가 이성애를 정상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 국립보건원은 어쨌든 이성애 유전자를 찾는 일에는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다만, 아마도 의도치 않게 연구를 하는 경우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1869년 헝가리 작가 카로이 마리아 케르베니 Károly Mária Kertbeny가 만든 ‘동성애자 homosexual라는 용어가 ‘이성애자 heterosexual‘라는 용어보다 먼저 통용된 것도 놀랍지 않다. - P183

동성애는 유전의 영향인가, 환경의 영향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은 사항이다. 그러나 동성애를 문제시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애당초 문제가 있었다는 식으로 이끌고 가려 했다. 한쪽에서는 동성애는 유전이 아니지만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성향은 유전이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이는 실패를 선천적인 지적 결함으로 이야기하면 특권층에 유리하기 때문에 먹히는 매커니즘이다. 한편 의학이, 의사의 주장이 사법 제도가 된 사례는 단종법의 통과다. 1909년 캘리포니아의 단종법 통과 이후(1911년 아이오와주, 나중에는 오리건주까지) 상습성범죄자 등에 대한 단종 수술이 징벌적 성격이 아닌 치료 목적으로 둔갑되었다. 이는 명백한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에 의한 사고다. 동성애자는 이렇게 사회에서 근절되어야 할 악이자 그 대상이 되버렸다.
마찬가지로 젠더가 유전적 요소에 따른다는 편견과 집착이 존재했다. 젠더부적응도 마찬가지다. 젠더 역할에 대한 의학적 판단은 인종, 계급에 기초하여 동성애를 구성하고자 했다. 의사든 비전문가든 레즈비언은 신체적으로 이상하고 기괴하다는 생각이 있었다. 동성애로 짐작되는 아이들 중 자위하는 아이들의 음핵을 제거하고 두개골 크기 및 얼굴 생김새로 범죄 성향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레즈비언도 지배적 레즈비언과 소극적 레즈비언으로 구별하여 정량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는 논리를 폈다.
동성애에 대한 정신의학 및 생물학 논문이 내놓은 가설은 퀴어에 대한 적대감 및 신체적 위해를 제거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호르몬으로 동성애자를 치료할 수 있다는 가설은 심리학자, 의사, 연구자들을 만족시켰다.

테크노픽스는 점점 더 암호화된 방식으로 활용됐고, 자유주의자들에게 더욱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의식적이든 아니든 보수주의자들과 합세해 인종, 계급, 젠더(청소년 여부 및 장애 유무에 의해 더 강화됨)를 우생학 프로젝트의 주요 결정 요인으로 확립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공공 정책 분야의 ‘혁신‘과 손을 맞잡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양상을 다시 한번 각인시켰다. 여성 및 여자아이들이 먼저 하나 이상의 특정 인구통계학적 집단의 구성원이라는 이유로 병리화된 다음, 의학적으로 위험하고 헌법에 비춰 의심스러운 ‘치료법‘을 받아들이도록 압박을 당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 P411~412

산아제한은 계급(지위든 경제든)과 연관되어 우생학적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마거릿 생어는 적극적 우생학(‘적자‘는 인종과 국가에 봉사하기 위해서 가족 구성원을 늘려야)은 비난했으나, 소극적 우생학(‘부적자‘ 사이의 생식은 방지되어야)은 가치가 있다고 여겼다. 푸에르토리코의 가난한 여성을 대상으로 경구프로게스테론 실험약이 투여된 것은 미국의 식민주의와도 연결될 수 있는 지점이다. ‘니그로 프로젝트‘는 흑인 사이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면 남부의 빈곤이 해결될 것이라는 가설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 W.E.B.듀보이스). 클래런스 겜블은 강제 단종수술 클리닉을 설립하고 널리 시행했는데 여기에 생어는 적극 동조하고 지원했다. 생어는 빈곤층이 재정 부담을 가져오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구 과잉은 국가적 재앙을 불러온다며 단종수술이 필요하다 보았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장애나 정신적 부적자에게도 단종수술이 필요함을 설파하는 인간개량재단에도 참여했다.
미국 남부에서는 조직적인 단종수술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929년에서 1940년 사이 노스캐롤라이나 주 단종 수술 후보자 중 78%가 여성이었고, 그중 21%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며, 1964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전체 단종 수술의 65%를 차지했다. 수술 대상자로 지목된 사람들에는 인종 및 사회 경제적 지위 뿐 아니라 연령(낮은) 기준이 작용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단종 수술을 받지 않으면 복지 혜택이 줄어든다고 하는 사실 때문에 수급자에게는 협박으로 작용했다는 현실이다. 이처럼 산아제한의 명목으로 여성의 선택권은 보호받지 못했고 의료계가 선택한 자율성과 편의성에 의해 단종수술이 시행되었는데 이를 제공한 의료 서비스 제공자들의 권리는 철저히 보호되었다. 이는 난관결찰술 및 자궁적출술에 이은 노플란트, 데포-프로베라도 마찬가지다. 국외 빈곤 퇴치 방안으로 행해진 두 시술은 모두 부작용이 제대로 고지되지도 않은 채 미국 외 저개발국가에서 실시되었다. 특히 노플란트는 원상태로 돌릴 수 있다(주로 5년 이후 빼낸다고 하지만 빼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지...)는 사실 때문에 더 호혜적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여성의 몸(의 부작용과 위험적 결과)은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생각할수록 소름이 끼친다.

이처럼 이 책은 과거 미국의 우생학이 펼쳐진 다양한 국가 정책적 사례를 자세히 보여준다. 그러나 서두에도 이야기했지만 우생학은 결코 죽지 않았고 여전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미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과거와 현재를 확인하고 진단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미국 우생학의 역사에서 두드러지는 점은 반동주의적 의제와 개혁주의적 의제가 늘 협력한 것은 아니더라도 공통의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논쟁의 여지는 있지만 그럼에도 많은 경우 자유주의는 보수주의, 그리고 심지어 전면적인 파시즘도 이룰 수 없었던 것을 더 밀고 나아갔다. 여성, 가난한 사람, 인종화된 사람, 장애인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양쪽 모두 온정주의적인 자세를 취했다. 구조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데양쪽은 모두 실패했다. 양쪽 모두 미국 국내와 ‘개발도상국‘의 인구 조절 프로젝트를 지원했다. 이런 공동의 대의의 기틀을 만들고 조성한 사람이 바로 자유주의 페미니즘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우상 중 한 명인 마거릿 생어다. 물론 생어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 P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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