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인간은 인간 정신의 불명확한 본성 때문에 무지로 빠져들어갈 때마다 자기 자신을 만물의 척도로 만든다. - P148

[122] 인간 정신의 또 다른 속성은 멀리 떨어져 있고 알지 못하는 사물에 대해서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과 그들 앞에 존재하는것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이다. - P148

[124] 앞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53, 59] 자만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민족의 자만심이고 다른 하나는 학자의 자만심이다. - P149

[161] 인간사의 본질 속에는 모든 민족에게 공통적인 정신의 언어가 전제되어야 함이 확실하다. 이 언어는 인간의 사회생활.
에서 일어날 만한 일들의 본질을 균일하게 이해하도록 해주며 그사물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측면의 다양한 양태를 설명해준다[387]. 민중적 지혜의 금언인 속담이 그 예인데 고대와 현대의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가 그 민족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다[445]. 201 - P162

[173]이집트의 고대는 우리에게 두 개의큰 흔적을 남겨놓았다. 그 하나는 이집트인들이 세계의 모든 시간을 신의 시대, 영웅의 시대, 인간의 시대라는 세 시대로 구분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세 시대의 순서에 따라 각 시대마다 세개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하는 것이다. 즉 상형 언어 또는 신성한언어, 상징 즉 비유를 통한 언어 또는 영웅의 언어, 서간체 언어또는 인간의 민중 언어로 민중 언어란 일상적인 삶의 필요를 소통 - P127

하기 위해 기호를 사용한 언어이다[52,432]. - P168

첫 번째 공리는 민중이 신화를 만들고,
그것도 호화롭게 만들려는 자연적인 경향을 보여준다. 두 번째는인류의 소년기에 있던 초기의 인간은 사물을 개념화시킬 범주를 형성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시적인 인격체를 만들어야 할 자연적 필요성을 갖고 있었다. 시적인 인격체란 상상력의 속(屬) 또는 보편적 상상력으로서, 모델이나 이상적인 초상화처럼 그것을닮은 모든 특수한 종(種)들을 거기에 맞추어 환원시킨다. 이러한유사성 때문에 고대의 신화는 호화롭게 꾸며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 P179

[250] 모든 민족은 어떠한 신성에 대한 숭배와 함께 시작하였기때문에, 가족 국가의 가부장들은 전조를 통한 점복에 능통한 현자였음이 확실하다. 그들은 점복을 수행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희생 의식을 거행하는 신관이면서 그들 가족에게 신성한 법을 전달하는 왕이기도 하다: - P190

[311] 씨족들의 자연법은 민족들의 관습과 함께 출현했고, 그것은 아무런 이성적 사고도 필요 없는 인간의 상식에 일치하며,
따라서 민족들 사이에 모방도 없다. - P215

모든 민족은 종교를 갖고 있고, 엄숙한 혼례를 거행하고,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다. - P225

방종한 인간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타고 난 힘이 결핍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신앙에의존한다. - P232

육체의 운동을 통제하는 것은 인간 선택의 자유, 즉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과임이 확실한데, 그것이야말로 정의를 포함한 모든덕성의 고향이자 안방이다. 정의의 지시를 받아 자유의지는 모든올바른 것의 원천이 되며, 올바른 것의 부름을 받은 모든 법의 원천이 된다. - P233

학문의 여왕인 형이상학은 "학문은 그것이 다루는 소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314] - P238

새로운 학문이 사용하는 기준이란 사람들 전체 혹은부분이 옳다고 인식하는 것은 사회적 삶의 규칙이 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 P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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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생명과 안전을 경시하는 파렴치한 세상을 변혁하기 위한 고통을 우리는 얼마나 감내해왔을까? 착한 마음을 넘어 구조의 문제들을 얼마나 직시했을까?

사실 다윈의 진화론은 약육강식의 논리가 전혀 아니다. 다윈에게서 생존하는 것은 강자가 아니라 적합한 자, 즉 적자다. 약육강식이 아니라 적자생존이 진화의 메커니즘인 것이다. 강하거나 우수해서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환경에 적합한 종이 자연에 의해 선택된다는 것이 다윈 진화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공룡은 강했지만 멸종했고, 매머드도 코끼리보다 훨씬 크고 강했지만 멸종했던 것이다. 자연계에 ‘약한 것에서 강한 것으로, 열등한 것에서 우수한 것으로’ 따위 진화의 방향성은 없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미국 사이에 힘과 문화적 상상력의 위계가 엄연했던 만큼이나 성애의 판타지도 가파르게 위계화되었다. 승리한 나라의 남성이 점령지 여인과의 가벼운 로맨스를 꿈꿀 때, 패배한 나라, 약소국 남성은 수치심과 회한으로, 때로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꼽는다. 개화기 이래 과학기술이 주로 경제적 효용 달성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제시기 지식인들에게 과학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다고 비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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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세상에 쓸모가 없는, 힘이 되지 못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세계적인 과학저술가 사이먼 싱은 말한다. "기술은 삶(그리고 죽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반면, 과학은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과학자들의 동기는 유용성이나 편리함이 아니라 호기심이다."

‘작은 사람’이라고 해서 역사의 책임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아니 작은 사람이야말로 역사를 더 깊이 인식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성숙이 시작될 것이다.

적과의 싸움에 목숨 건 혁명가들이 동지가 밀정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의혹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렸다.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한 독립혁명의 길에서 증오가 자랐다. 미움이 서로를, 스스로를 파괴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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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5-11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책 전 좋았습니다. 화가님은 어떻게 읽으실지 기대되네요.

거리의화가 2025-05-13 11:39   좋아요 1 | URL
어제 알라딘 시스템 접속이 계속 이상해서 댓글을 이제야 답니다^^;
저도 이 책 좋았어요.
 

식민지배자는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시켜줄 거울, 즉 타자(식민지인들을 포함)를 필요로 한다. 일본인은 조선인을 타자로 설정했다. 식민지배자는 타자화 작업을 통해 자신들의 우월성을 확인하고, 결속을 다지며, 타자의 지배를 정당화한다. 타자는 다름 아닌 희생자들, 유색인들, 식민지인들이다.

식민植民이란 지배국이 식민지에 자국민을 옮겨 심는다는 뜻이다. 식민주의란 힘이 센 나라가 무력으로 자신보다 약한 나라의 땅을 침략하여 정복하고, 그곳의 물적·인적 자원을 약탈하며, 자국민을 이주시켜 지배하고 통치하는 행위 및 이념을 일컫는다. 다름 아닌 약육강식을 근간으로 삼는 차별적 이데올로기이다. 식민주의는 자국민에게 승리의 영광을 가져다주지만, 식민지인들에게는 패배의 굴욕을 안겨준다.

‘탈’이란 접두어는 예속상태에서 벗어남, 즉 주권수립과 해방,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탈식민화를 의미한다. 해방, 광복, 독립이란 단어는 억압, 어둠, 예속의 상태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런 외형적 독립과 국가건설만으로 식민상태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형태로 신식민주의가 여전히 작동하기 때문이다. 다국적 자본주의는 더 이상 국가(경계선)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오직 하나의 국가(예를 들면 미국이란 거대 자본국가)만이 존재하고, 다른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은 미국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구조로 되어 있다.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의 문제는 그 규모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단히 유감스런 일이다. 스탈린 치하의 고려인(까레스키) 강제이주, 일제지배 하의 강제징용, 6·25전쟁, 사할린 거주 한인들, 해외 이민 등이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입증한다.

블라디보스톡, 타쉬켄트, 하와이, 멕시코, 위안부, 사할린 한인들, 우토로(일본 교토 징용 조선인 촌락) 등은 강대국의 힘에 유린을 당한 한민족의 수난사를 잘 말해준다. 이산자들이 당한 고통과 상처를 글로 기록하고, 그 부당성을 환기시키는 작업은 필요하며 중요하다.

탈식민화에는 여러 장애물이 존재하지만, 그중 ‘매판계층(comprador)’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이 계층은 식민국의 상층부 엘리트를 구성하는데, 종주국과 협력적 관계를 유지한다. 그 결과 자국의 사정은 전혀 개선되지 않고 종주국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식민지배자는 이 매판계층과 유착관계를 맺어 적은 비용과 노력을 들여 손쉽게 식민지를 원격 조정할 수 있게 된다.

민족주의에 기초한 문화적 본질주의 혹은 ‘토착주의(Nativism)’도 탈식민화에 걸림돌이 된다.

서발턴이란 지배계층의 헤게모니에 종속되거나 접근을 부인당한 그룹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인 등 주변부적 부류가 속한다. 스피박이 ‘서발턴’이란 용어 사용을 고집하는 이유는 뭘까. 노동자, 농민, 여성, 피식민지 등 기존의 용어들은 억압체제에 저항하는 정치성을 지니기 때문에 다양한 종속적 처지를 아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서발턴 용어 사용의 장점은 단일하고 고정된 의미와 맥락에 한정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는 데 있다. 즉, 이 용어는 계층, 인종, 젠더를 포함할 수 있을 정도로 포괄적이며 자유롭다는 뜻이다. 그러나 스피박은 불평등 해소라는 정의실천보다는 지배권력을 해체하는 데 더 관심을 기울인다. 바로 이점이 그녀의 한계이다.

일본이 역사교과서의 내용을 계속 왜곡하는 현실에 맞서 우리는 계속 ‘자아성찰’만 해야 하는가.

탈식민주의는 저항담론이며 실천담론이다. 따라서 어렵고 난해한 용어와 이론을 운운하는 것은 지적 유희요 공허한 포즈이다. 탈식민주의 연구를 통해 타자를 이해하는 것, 자신의 삶과 인식을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불평등한 세상을 바꾸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탈식민주의 이론이 세상 읽기의 유효한 방식이 되고, 현실 참여의 영역과 맞물려 있어야 의미가 있다. 반성과 토론만 하다가 투쟁이나 실천이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면 진보는 위기에 처한다.

저항은 패권주의, 자본주의,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이다. 민족주의에 토대를 둔 저항이 없다면 예속, 불평등, 비인간화는 더욱 심화될 것이다. 지배자의 입장에서도 타자(약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윤리학을 정립하는 것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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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교도의 모든 역사는 출발점에 신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최초로 배워야 할 학문은 신화 - P88

또는 신화의 해석이어야 하며, 신화는 이교도 민족의 최초의 역사였다는 것이다[202]. 그리고 이렇게 확립된 방법으로 민족은 물론학문의 출발점도 다시 찾아야 한다. 왜냐하면 학문은 다름 아닌민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이 저작 전체를 통해 논증할 것이지만, 학문의 출발점은 민족의 공적인 필요성이나 유용성에 있었는데, 훗날 여기에 인간 개개인의 예리한 통찰력이 적용되어 완성되기에 이른 것이다[498]. 세계사는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데, 모든 학자들은 그러한 출발점이 [지금까지의 세계사에서] 결여되어 있었다고 말한다[399].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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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칠 줄 모르는 전사는 무려 18년에 걸쳐 시리아와 이라크땅을 누비고 다녔다. 때로는 진창에 빠지지 않으려고 짚단 위에서 잠을자고, 어떤 이들과는 싸우고, 어떤 이들과는 우호조약을 맺는 등 모두를작전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자신의 광활한 영지 곳곳에 널려 있는 궁전에서 편히 머무르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해보지 않았다.
그의 주변에는 비위 맞추기에 연연하는 간신들이 아니라 그에게필요한 연륜 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었다. 또한 바그다드는 물론, 이스파한, 다마스쿠스, 안티오케이아, 예루살렘, 심지어 자신의 영지인 알레포와 모술에까지 퍼져 있는 촘촘한 정보망 덕분에 지속적으로 정보를얻을 수 있었다. 프랑크인들과 싸웠던 다른 군대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 P169

언제든지 배반하거나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던 에미르들의 자율적인집단지도체제를 따르지 않았다. 군기는 엄격했으며 지극히 사소한 과실도 엄하게 다스려졌다. … 알레포의 통치자는 다른 이들에게만이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엄격했다. 그는 도시에 도착하더라도 자신의 뜻대로 머무를 수 있는 그 많은 성들을 무시하고 늘 성 밖에 있는 자신의 막사에서 묵었다. - P170

단 몇 주만에 장기는 동방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그는 아나톨리아로 특사를 보내 다니슈멘드의 후계자들이 비잔티움 영토를 공격하도록설득하였을 뿐 아니라 바그다드로 선동가들을 보내 1111년에 이븐 알카샤브가 일으켰던 것 같은 소요를 조직하여 술탄 마수드가 샤이자르로군대를 급파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또한 시리아와 자지라의 모든 에미르들에게 협박에 가까운 서신을 보내 새로운 침략에 맞서 힘을 모을것을 명했다. 적의 군대보다 수가 적었던 아타베그의 군대는 전방에 나서지는 않으면서 작은 교란 작전을 펼쳤다. 아타베그는 바실레이오스와프랑크 지휘관들한테 긴밀히 전갈을 보냈다. 그는 바실레이오스-일단은 그가 황제였으니까-에게 자신은 이 연합군이 두려우며 그들이 시리아 땅을 조속히 떠나기를 바란다는 뜻을 "넌지시 알렸다." 그러면서데사의 조슬랭과 안티오케이아의 레몽 같은 프랑크인들에게는 이런 전 - P184

언을 보냈다. 일단 룸인들이 시리아 땅의 요새 한 군데를 점령한다면 머지않아 당신네 도시들을 전부 손에 넣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단 말인가? 또한 페르시아와 이라크, 아나톨리아 등지에서 엄청난 무슬림 원군이 도착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려서 사기를 저하시키라는 임무를 띤 첩자들이 비잔티움과 프랑크의 일반 전사들 틈에 잠입했다. - P185

누르 알 딘은 선전선동을 몸소 관장했다. 그는 시와 서신, 책을 쓰게 하였으며 기대하는 효과를 거둘 만한 적당한 때를 골라 퍼뜨리게 하였다. 그가 설파하는 교리는 간단했다. 단일 종교, 곧 이슬람 수니파로서모든 ‘이단들‘에 맞서는 격렬한 싸움을 의미하였다. 이어 단일 국가. 이것은 프랑크인들을 사방에서 포위할 수 있는 국가를 의미했다. 마지막으로 단일 목표. 이것은 빼앗긴 땅을 되찾고 특히 예루살렘을 해방시키는지하드를 의미했다. 권좌에 머무른 28년 동안 누르 알 딘은 여러 울라마들을 부추겨 조약을 쓰게 했고, 이슬람 사원들과 학교에서는 대중 강독 - P208

집회를 통해 성지 알 쿠드스의 가치를 선전하게 하였다. - P209

누르 알 딘은 승리자다운 아량으로 아바크와 그 측근들에게 홈스지역의 봉토를 하사하였으며 그들이 재산을 갖고 피난하는 것도 허락했다.
전투 없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누르 알 딘은 무기가 아닌 설득 - P221

으로 다마스쿠스를 정복했다. 4반세기 전부터 아사신이건, 프랑크인들이건, 장기이건 간에 자신들을 예속하려는 누구에게나 격렬히 저항해 왔던 이 도시는 안전과 자주성을 존중해 주겠다는 한 왕자의 너그러움에손을 들고 만 것이다. 다마스쿠스인들은 그 점을 후회하지 않았다. - P222

살라딘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그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작고 가냘픈 몸에 단정하게 수염을 길렀다고. 그들의 얘기를 종합해 보면 살라딘은 사색적인 표정에 약간은 침울해 보이는 인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환해졌다고 한다. 그는 늘 손님에게 상냥했다. 음식을 자꾸 권했으며 그들의 요구는 되도록 들어주려 했다. 비록 불경을저지른 자들일지라도 모든 예의를 갖추어 대접했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이 실망스럽게 돌아가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그의 이런 성격을 때로이용하는 자들도 있었다. - P255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것이 금은보화가 탐이 나서도 아니요. 복수 삼아 한 일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다만 신과 자신의 신앙에 대한 의무에서였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살라딘이 거둔 승리의 의의는 성지를 침략자 무리로부터 해방시켰다는 것뿐 아니라, 피와 파괴를 동반하지 않고, 증오 없이 행해졌다는 데 있다. 자신이 아니었더라면 무슬림은 기도를 드릴 수 없었을 이 성지에서 무릎을꿇을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살라딘은 흡족할 따름이었다. - P284

아크레, 아스칼론, 또는 예루살렘 등 도시나 요새를 점령할 때마다살라흐 알 딘은 적의 기사들과 병사들이 티레로 망명하는 것을 허락했다. 현실적으로 이 도시를 완전히 함락하지 못하게 되었음에도불구하고 말이다. 연안 지대의 프랑크인들은 바다 저편에 있는 자들에게 연달아 전령을 보냈고 이들은 원군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살라흐 알 딘이야말로 자신의 군대에 대항하는 방어군을조직하게 만든 장본인이 아니었을까? - P288

사실 성지 예루살렘은 알 카밀의 세력권에 있지 않았고 얼마 전에 사이가 틀어진 동생 알 무아잠의 수중에 있었다. 알 카밀은 자신의 벗인 프리드리히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서 알 무아잠의 야심을 저지하는 완충국을 건설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길게 보면 다시 힘을 회복한 예루살렘이 이집트와 그 위협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는 아시아의 호전적인 전사들(몽골을 말함-옮긴이) 사이에서 효과적인 중재역을 할 수 있을 터였다. 열렬한 무슬림이라면 결코 냉정하게 성지를 포기할 수는 없었겠으나 알 카밀로 말할 것 같으면 백부인 살라딘과는 엄연히 달랐다. 그에게 예루살렘은 무엇보다 정치적이자군사적인 사안이었다. 종교적 입장은 여론을 상대할 때에나 고려할 문제였다. 한편 스스로를 그리스도 교도도, 이슬람 교도도 아니라고 느끼고있던 프리드리히도 그에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그가 성지를 탐냈던 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묵상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 위업을 달성함으로써 동방으로의 출발을 늦춘다고 자신을 파문한 교황과의 싸움에서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P320

당시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을다스리고 있던 아이유브 왕조의 소국 왕들은 밀려오는 파도를 막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 중에는 칭기스칸의 종주권을 인정하는데 그치지 않고 침략자들과 손을 잡아서 왕조의 적이기도 한 이집트 맘루크들과 대적할 생각을 할 만큼 정신 나간 자들도 있었다. 서유럽과 동방의 그리스도 교도들의 입장도 가지가지였다. 하이톤이 통치하던 소아르메니아는 몽골인 편을 들었다. 하이톤의 처남이었던 안티오케이아의보에몽도 마찬가지였다. 반면 아크레의 프랑크인들은 오히려 무슬림 쪽에 유리한 중립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서유럽은 물론 동방에서도 - P339

몽골 군의 원정을 프랑크인들의 원정처럼 무슬림에 대항하는 일종의 성전으로 보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 P340

아크레를 정복하고 나자 신께서는 시리아 연안에 아직 남아 있던프랑크인들에게 엄청난 두려움을 심어 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이다와 베이루트, 티레는 물론이고 다른 모든 도시들에서도 서둘러짐을 싸기 시작했다. 술탄은 그 어떤 술탄보다도 좋은 운을 타고난사람이다. 그 지역을 그처럼 수월하게 정복해서 즉각 파괴시켜 버릴 수 있었으니 말이다. - P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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