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의 핵심은 이정 안에 들어 있는 어떤 면이 이런 파멸을 불러오기에이르렀으며, 그 측면이 얼마나 어둡고 강한 것이기에 이성의 자기교정 능력마저 상실하게 만들었는가를 밝히는 것이다. 이는 곧 근대적 이성의 대변자라고도 할 수 있는 계몽사상)을 그 결과가 아니라 원리에 있어 급진적으로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신화는 이미계몽이었다. 그리고 계몽은 신화로 돌아간다"고 말한다.) 계몽은 전(前)이성적 사유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빛으로써 수립된 사유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명제는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곤란하다. 열쇠는 이들의 ‘변증법‘ 개념에 있다. 이들에게 변증법은 헤겔적 변증법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이억압한 비개념적인 것을, 보편적인 것이 억압한 개별적인 것을 드러내는작업이다. 그래서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 아래의 모순된 것들을 계몽으로통일해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계몽이라는 개념이 억압하고 있는 그 아래 - P590

의 모순을 드러내는 일이다. 이때 우리는 계몽 아래에서 이제까지 그것의대립항으로 여긴 신화를 발견하게 된다. 반대로 신화에서는 계몽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계몽=신화‘라는 등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계몽과 신화는 동일한 것도 아니고, 어떤 동일한 것으로 ‘지양‘되는 것도 아니다. 양자는 (양 속의 음, 음 속의 양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대 안에 똬리를 틀고 있으며, 서로 적대적 공모()의 관계를 형성한다. - P591

니시다는 국민 개인과 국가/민족 사이에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의 관계
‘를 부여한다. 국가/민족이야말로 행위적 직관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자각의장소인 것이다. 이는 곧 신민 개인과 천황 사이의 관계이기도 하다. 개인에게 일본과 천황이야말로 ‘절대 타자‘인 것이다. (뒤에서 논할 레비나스의 경우와 대조적이다.) 니시다에게는 이렇게 황실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자이자 ‘영원의 지금‘을 중심으로 이런 관계를 맺어온 전통이 바로 ‘일본정신‘이고 또 ‘국(國)‘이다. 그리고 일본만이 이런 전통을 이어온 국가인것이다. - P602

미키는 일본에 남아 있는 봉건성 그리고 개인주의의미발달이 일본 파시즘을 특징짓고 있다고 보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로서일본적인 것에는 "형태가 없다"는 점을 들었다. 즉, "무형식의 형식"이 일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니시다의 무 개념은 이런 성격의 한 정식화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일본 문화는 유연함과 포용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온갖 것들이 병존하는 상황을 빚어내기도 한다. 그리고 일본 사상/문화의 이런 성격은 오히려 당시 파시즘에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던 것이다. - P609

도사카가 생각한 사물의 성격 = 특성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와 달리 정태적으로 파악되기보다 동태적으로, 즉 역사적으로 파악된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적 실천과 맞물려 드러난다. 도사카는 이 성격 개념을 ‘문제‘ 개념으로 잇는다. 도사카의 문제론은 미키의 그것을 이으면서도 유물론의 방향을 취한다. - P613

아나키즘은 노동조합주의/집산주의와 상호부조론의 이념, 자주적 관리에 의한 운영, 평의회에 입각한 정치, 총파업이라는 직접 행동, "일하면서공부하는" 삶 같은 원리들을 고수하고자 한 흐름이었다. 그리고 이런 원리들은 특히 파리 코뮌과 러시아의 소비에트에서 그 구체적/역사적 모습을드러냈다. 그러나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마르크스주의)와 아나키즘은갈등하기 시작했고(이러한 갈등은 동북아의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논의가 되었고, 이른바 ‘아나-볼 논쟁‘으로서 전개되었다.), 결국 러시아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점차 고갈되기에 이른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공히 자본주의의 소유적 자유를 비판하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 양자는 반(反)자본주의자유주의의 이념을 공유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의당 중심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독재(국가의 잠정적인 쟁취)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양자는 곧 충돌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 P618

푸코는 권력이라는 것에 실마리를 두고서 타자들의 사유를 전개했다. 그래서 그의 일차적인 관심사는 배제, 감금, 수용 등에 관한 고고학적 진실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사유를 보다 고유하게 해준 측면은 그가 권력을 담론/지식과 연계해서, 담론 구성체와 비-담론(/신체) 구성체 사이의 비관계의관계에 주목해서 분석한 점에 있었다. 그리고 이로써 인식론도 정치철학과전에 없던 관계를 맺으면서 일신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유의 근저에 깔린 궁극의 관심사는 주체의 문제였다고 생각된다. - P640

"자기자신은 자기의식의, 동일자의 팽창과 귀환의박동으로 환원 불가능한 비틀림이다. (...) 자기-자신은 스스로와 같지 않음이며, 존재에서의 결핍이며, 수동성 또는 인내이다."(AE, 169) 레비나스의윤리적 사유는 자기타자화의 사유이다. 윤리적 주체성이란 곧 ‘같은것 안의 다른것‘이다. 박해받는 타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볼모인 것이다. 그는 자신이 행한 것 때문이 아니라 타인들이 겪은 것 때문에 피고인이 된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타자를 위한 대신함, 책임짐을위한 자기타자화의 윤리학이다. - P658

데리다의 사유는 ‘불가능한 것‘의 사유이다. 그것은 바깥의 바깥이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이 동일자의 바깥에만 존재한다면, 동일자를 초월해 있다면,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각종 동일자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동일자 내부의 불가능한 것이다. 내부의 내부는 웜홀을 통해 외부에 이어져 있다. 내부의 내부로서의 불가능한 것을 사유하고 그것을 통해서 동일자를 변화시켜나가는것, 여기에 탈구축의 철학이 있다. - P660

인간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자신이 벌여놓은 짓을 도외시하면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려 하는 것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소멸이 아니라 인간의 책임이다. 기술중심주의에 휘둘리는 포스트휴머니즘이 아니라, 윤리적 주체로써 무너져가는 세상에 맞서는 새로운 휴머니즘인 것이다.
생태적 가치의 추구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핵심은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있다. 우리가 자연과 인간의 관계라고 생각하는 상당수가 결국 인간과 인간의 관계일 뿐이다. 문제의 핵심은 인간중심주의를타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어떤 인간들이 악업을 저지르고 어떤 인간들이 그것과 싸우느냐 하는 데에 있다. 이 점을 전제하고서 자연-인간관계를 논해야 하는 것이다. - P688

오늘날의 주요 저항 주체는 지식 계층, 성적·신체적 소수자들, 노동자들이 주요한 세 축을 형성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의 저항주체들은 과거의 역사에처럼 어떤 단일하고 일사불란한 대오를 형성하고있지 않다. 그래서 문제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의미 있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가에 있다. 현대의 대부분의 문제들은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으며, 때문 - P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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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찰》은 “여기서 신의 실존 및 영혼과 신체의 구분이 증명되다”라는 부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주제로만 본다면 이전의 형이상학과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성찰》이 이전의 철학들과 크게 다른 점은 오히려 책의 구성, 문체, 기술 방식 및 철학적 방법론 등에 있다. 이것들을 통해 이전의 형이상학적 주제들은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거듭났으며, 그 이후로는 누구도 그 이전의 철학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내가 참되다 믿었던 것들 가운데 의심이 허용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는 내가 생각 없이 경솔하게 하는 말이 아니라, 성찰을 거친 타당한 근거들에 따라 하는 말이다. 그러니 무언가 확실한 것을 발견하길 원한다면, 앞으로는 이런 논증에 대해서는 명백히 잘못된 논증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동의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만날 때까지, 아니, 다른 것은 몰라도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게 인식할 때까지 계속 나아가자.

이제 내가 보는 모든 것을 거짓으로 가정하자. 위조된 기억이 재현하는 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실존한 적이 없다고 믿자. 나는 아무런 감관도 지니고 있지 않으니, 몸이니 모양이니, 펼쳐있음, 운동, 장소는 키메라[같이 실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참된 것일까? 아마도 이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

누구인지는 몰라도 의도적으로 항상 나를 속이는, 대단히 능력 있고 아주 교활한 사기꾼이 있다. 이제는 그가 나를 속인다 하더라도 나 또한 의심의 여지 없이 있다. 실컷 속인다 하더라도, 내가 나는 무엇이다, 하고 생각하는 한, 그는 결코 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것을 대단히 충분히 숙고한 뒤 마침내 이러한 공리를 확립할 수밖에 없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는 내가 소리 내어 말하든 정신으로 파악하든 언제든지 피할 수 없이necessario 참이다.

나는 발견한다. 생각이다. 오로지 이것만이 나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는 있다, 나는 실존한다. 이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얼마 동안? 물론 내가 생각하는 동안. 다시 말해 [이런 일은 불가능하겠지만] 내가 모든 생각을 그만둔다면, 그와 동시에 내가 있다는 것도 완전히 멈추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지금 나는 오로지 피할 수 없이 참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있다. 따라서 나는 엄밀히 말해 오로지 생각하는 것이다. 즉 이전에는 말뜻을 몰랐던, 정신이나 영혼이나 지성이나 이성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참된 것, 참으로 실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것인가? 말했다시피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나의 정신보다 더 쉽게 혹은 더 명백하게 지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명백히 인식한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다시피 물체들 역시 엄밀하게 말하자면 감각이나 상상력이 아니라 오직 지성으로써 지각되며, 만져지거나 보여서가 아니라 오로지 인식되는 까닭에 지각되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실체라는 사실로부터 어떤 실체의 관념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유한하기 때문에 이것이 무한 실체의 관념은 아닐 것이다. 무한 실체의 관념은 정말이지 무한한 실체로부터만 비롯될 것이다. 또한 나는 무한한 것을 참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것을 부정함으로써 지각한다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내가 마치 정지를 운동의 부정으로, 어둠을 빛의 부정으로 지각하듯이 말이다. 그렇기는커녕 나는 무한 실체가 유한 실체보다 더 많은 실재성을 담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무한한 것, 즉 신에 대한 지각이 유한한 것, 즉 나 자신에 대한 지각보다 어떤 면에서는 먼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고 있다. 만일 내게 더 완전한 존재자의 관념이 없어서, 내 결함을 이것과 비교함으로써 깨닫지 못했다면, 내가 의심하고 욕구한다는 사실, 즉 내게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고 내가 전적으로 완전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내가 과연 어떻게 알았겠는가?

삶의 모든 시간은 무수히 많은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고, 이 낱낱의 부분들은 어떤 식으로도 서로 기대어 있지 않으며, 어떤 원인이 나를 이를테면 다시 이 순간에 창조하지 않는다면, 즉 나를 보존하지 않는다면, 내가 방금 전에 실존했다는 것으로부터 지금 실존하는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사실 시간의 본성에 주목하는 사람에게는 명백한바, 무엇이든 낱낱의 순간을 지속하는 어떤 것을 보존하는 데에 드는 힘과 작용은, 아직 실존하지 않는 것을 새롭게 창조하는 데에 드는 것과 똑같다. 따라서 보존과 창조는 자연의 빛에 따라 밝혀지는 것 가운데 하나지만, [실재적으로는 구분되지 않고] 단지 이성적으로만 구분될 뿐이다

많은 부분적 원인들이 나를 만들어내기 위해 참여했다. 이 원인에서는 신에게 귀속되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의 관념을 받았고, 저 원인에서는 다른 완전성의 관념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 모든 완전성은 우주 곳곳에서 발견되지만, 신이라고 하는 하나의 장소에 모두 결합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신이 지니고 있는 모든 것 가운데 단일성, 단순성 곧 나뉘지 않음이야말로 내가 신 안에 들어 있다고 파악하는 주요 완전성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이 모든 완전성 가운데 단일성의 관념은 내가 다른 완전성들의 관념들을 얻게 된 어떤 원인이 없었다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원인이 나로 하여금 이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인식하게 할 수 없었더라면, 이것들이 결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나뉠 수 없다는 것 또한 인식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인식하는 모든 것을 인식하는 바대로 신한테서 얻었기 때문에 의심의 여지 없이 올바로 인식하며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르칠 리도 없다. 그렇다면 나의 오류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물론 이 한 가지에서, 즉 의지가 오성보다 더 넓게 열려 있는데도 내가 의지를 지성의 한계 안에 가두지 않고 오히려 인식하지 않은 것들에까지 확장시키는 일에서 비롯된다. 이런 것들에 대해 의지는 차이 없다는 투로 있기 때문에 참되고 좋은 것에서 쉽사리 벗어나며, 그리하여 나는 속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한다.

판단을 내릴 때 지성이 맑고 또렷하게 보여주는 것까지만 의지가 확장되도록 묶어둔다면,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맑고 또렷한 지각은 의심할 바 없이 어떤 것이고, 따라서 어떤 것도 아닌 것으로부터는 비롯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것의 작자는 반드시 신이다.

상상하는 데에는 내가 인식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는 어떤 특별한 마음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마음의 노력이야말로 상상력과 순수 지성의 차이를 훤히 밝혀주는 것이다

물체는 본성상 언제나 나뉠 수 있음에 반해, 정신은 전적으로 나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정신, 곧 오직 사유하는 것으로서의 나 자신을 살펴볼 때, 나는 내 안에서 어떤 부분들을 구분할 수 없고, 오히려 내가 완전히 하나이자 통합되어 있음을 인식한다. 그리고 내가 아는 바로는, 신체 전체와 정신 전체가 통일된 듯 보이긴 하지만, 발이나 팔이나 무엇이든 다른 신체 부분이 잘려 나간다 하더라도 정신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은 없다. 나아가 의지 기능, 감각 기능, 이해 기능 등이 정신의 ‘부분’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하나의 동일한 정신이 의지하고, 감각하고, 이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은 신체의 모든 부분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라, 뇌로부터, 혹은 아마 뇌의 어떤 작은 부분, 이른바 ‘공통’ 감각이라는 것이 들어 있는 부분으로부터만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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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우리는 사물들 자체를 인식하는 것이아니다. 단지 뇌에 주어진 정보에 대한 뇌의 ‘해석‘이 바로 우리의 관념들인것이다. ‘정신‘이란 이 관념들의 총체에 다름 아니다. ‘표상주의‘란 이 과정전체를 표상의 과정으로 보고, 그것을 (분자생물학의 용어를 쓴다면) ‘센트럴도그마‘로 채택한 이론을 가리킨다.
베르그송은 우주와 (뇌를 포함한) 우리의 신체는 연속적이며 그 전체가 물질(‘이미지들의 총체‘)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객체/객관과 주체/주관을 맞세우는 근대 인식론의 구도와 다르다. - P497

어포던스란 환경이 동물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환경이 동물들의 행동.
과 관련해 드러내는, 어떤 면에서는 동물들에게 강제하는 특성이 어포던스이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깁슨에게 의미와 가치란 (인간을 포함해) 동물들이 환경에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의미와 가치는 환경 자체에 내재해있고, 오히려 환경이 그것들을 동물들에게 현시한다. "환경은 동물이 행할수 있는 것을 제약한다. 생태학에서 말하는 적소(‘니치)가 이러한 사실을반영한다." (EA, 135) 어포던스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절벽은 동물들로 하여금 죽지 않기 위해 그 앞에서 멈추게 만든다. 물은 동물들을 빠지게 만들지만, 소금쟁이 같은 동물은 그 위를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해준다.33) 불은인간이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동물들은 두려워 피하게 만든다. 이렇게 어포던스란 환경의 어떤 성격이 동물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 P521

유물론적 환원주의에 따르면 우리 마음의 상태는 곧 뇌 상태와 별개의것이 아니며, 양자는 동일한 것일 뿐이다. 열역학에서의 ‘열‘은 통계역학에서의 ‘분자들의 평균 운동에너지‘일 뿐이다. 어떤 물질이 ‘불에 탐‘은 그것의 ‘산소와 결합함‘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의식의 상태 C는 뇌의 상태 b의결과일 뿐이다. 그러나 환원주의의 실제 내용은 C와 b가 상응한다는 것 - P527

일 뿐이다. 우리는 C 과 b, 이, C2와 b2가, ... 상응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 전자의 차원을 후자의 차원으로 환원할 수 있을지, 다시 말해 후자로부터 전자를 연역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정신적 차원과 물질적 차원은 전혀 다른 언어/존재론으로 서술되기 때문이다. - P528

무지개는 물리적으로는 파동방정식으로 설명되고, 그것의 지각에 대해서는 뇌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무지개에 대한 역사적·문화적 경험들과 담론들에서의 차이는 접어둔다 해도, 그것에 대한 각 사람의 경험들은 모두 다르다. 이 경험들(심리적 내용들)은 어떤 일반적 법칙성으로도 환원될 수 없다. 뇌에 대한 일반성은, 나아가 다른여러 과학이 동원된 어떤 일반성도 이런 독특성들을 포괄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비환원적 유물론은 마음을 하나의 실체로서 인정하지는 않지만,
마음이라는 차원, 속성은 별개의 속성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이 심리철학은
‘속성 이원론‘이라고도 불린다. - P529

기능주의적 사유는 존재자들을 모두 지표화하고 그 지표들을 계산해서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지표들은 지표들일 뿐이다. 앞에서(1장, 1절, 82) 예를 들었듯이,
연결망 이론에서 노드 A가 노드 B와 링크되어 있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환자의 고통은 수치화될 수 있는 것일까? 빅 데이터를 분석하면 과연 해당사태가 구체적으로 이해되는 것일까? 기능주의는 몸으로부터 분리된 정신이라는 데카르트 이원론의 그림자 안에 들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때 아이스만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데이터 분석만잘했기 때문이 아니라 여러 군데를 발로 뛰면서 말하자면 현상학적 관찰을세심하게 수행했기 때문이었다. 미나레트 구축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 - P534

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도제들은 이론을 먼저 배우고 그것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밑바닥 작업부터 철저하게 몸으로(관찰과 흉내 내기만을 통해서) 배워나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인식‘이란 지표들의추상적인 연산을 통해서만은 얻을 수 없는 것이며, 세계 - 내에서 몸을 통해이루어지는 경험이 뒷받침되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체화된(embodied)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 P535

체화된 인지를 기반으로 전개되는 체화된 마음의 심리철학은 용어가 시사하듯이 마음을 몸에서 추상된 어떤 것으로서가 아니라 몸에 구현되어 있는, 따라서 세계와 맞물려 있는 존재로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입장을 취할경우 뇌 안에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 안에 뇌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음은 어떤 실체나 부수물로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주체성으로서, 그러나 몸에 구현되어 활동하는 주체성으로서 이해된다. 억지로 마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면, 마음은 몸과 세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주체적 활동들에 내재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기능주의에서 벗어난)퍼트넘은 "의미는 머릿속에 있지 않다"라고 말한다. - P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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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

구조주의 기능주의와 달리 토템 현상을 어떤 실질적인 기능, 유용성, 필요에 입각해서 해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어떤 상징적인 것으로서,
문화를 떠받치는 틀, 구조, 객관적 선험으로서 해석한다. 따라서 토템은 해당 부족과 사실상 어떤 실질적인 연관성도 가지지 않는다. 기존의 모든 해석이 토템과 해당 부족의 실질적 연관성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했다는 점에서, 이런 시각은 획기적이다. 토템이란 그 부족을 상징하는 특정한 기의를가지지 않는 순수가표일 뿐이다. 이 기표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그 기표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표가 다른 기표에 대해 가지는 차이, 달리말해 특정한 기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점하고 있는 위치에 있다. 이는 곧하나의 토템은 그 자체가 특정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다른토템들과 맺는 관계, 토템들의 체계에서 그것이 다른 것들에 대해 가지는차이. 그 체계에서 점하는 위치에 따라 의미를 가짐을 뜻한다. - P444

구조주의는 의식적 주체의 바깥으로 나아가 사유했지만, 이제 그 바깥의 바깥에 주목함으로써 후기 구조주의 사유들이 도래하게 된다. 구조주의에서 주체는 구조 내에 용해되어버리지만, 구조의 바깥은 주체에게 구조로부터 탈주하고 나아가 그것을 변화시켜나갈 수 있는 가능성의 장을 제공한다. 그러나 주체가 탈주해서 나아갈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 아니다. 그 바깥은 구조로서의 바깥과 마치 웜홀에서처럼 통해 있는 구조 내의 바깥, 바깥의바깥이다. 그러나 바깥의 바깥은 바깥 너머로 뻗어가기보다 구부러져 안으로 이어진다. 주체가 찾아내야 할 바깥은 구조의 바깥이지만, 그 바깥은 오히려 그 자신과 닿아 있는 가능성이다. 주체는 이 가능성의 지점에서 솟아오르는 사건을 자신의 주름으로 바꾸면서 주체화해간다. - P448

칸트가 실재를 현상의 뒤편으로 물린 데 반해, 현상학은 그 뒤편을 접어두고 현상 자체의 실재성에 충실하고자 했다. 그것을 관념들로써 먹어치우고자 한다면 주체는 구토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현상학에서의 이 실재성은 어디까지나 의식의 지향적 대상으로서의 객관이며, 의식에 의해서만 그 의미가 드러날 차원이다. 반면 구조주의에서 의식과 대상은 공히 그 근저의 추상공간구조에 입각해 바로 그런 관계를는 것으로 이해된다.
때문에 양자에게서 ‘의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된다. 현상학에서의미노에마는 주체와 객체가 겹쳐진 곳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이겹쳐진 곳, 주름은 신체의 차원인 동시에 지각된 것의 차원이다. 신체는 이양자가 겹쳐진 생생한 경험의 장에서 성립한다. 현상학이 이룩한 큰 개념적 혁신은 근대적 신체 개념의 한계를 타파하고 완전히 새로운 신체론을정립한 점에 있다. 그러나 구조주의 사유에서 신체는 다시 증발되어버린다.
합리주의적 사유인 구조주의에서 신체는 언어에 자리를 내준다. 신체의 차원은 ‘이미지‘이며 ‘기표계’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의미는 추상공간의 요소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 - P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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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의 끝에서 사유하는 자아("ego cogito"), 사유활동(cogitatio)을 발견했다면, 후설은 판단 중지를 통해서 "현상학적 잔여로서의순수의식" (선험적 의식, 순수 자아, 선험적 주체)을 발견했다. 바로 지향적 체험을 실행하는 의식/주체이다. - P360

메를로-퐁티 (1908~1961)는 경험주의와 주지주의(합리주의)는 공히 이현상학적 세계를 만족스럽게 파악하지 못함을 지적한다. 경험주의 예컨대행동주의는 행동에서의 주체성을 제거해버리고 그것을 오로지 기계적인자극-반응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행동을 단순한 요소들로 분석하고 그것들을 연합해서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넓게는 유기체의) 행동은 대상의 속성과 주체의 의도가 섞여 있는 곳, 즉 세계와 주체가 겹쳐져 주름을 형성하는 곳인 신체-주체에서 성립한다.2) 주지주의는 이 현상학적 장을 어떤 순 - P367

수한 개념들로 환원하고자 한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이런 주지주의의사유는 인간의 삶이 철저하게 육화된(incarné) 것임을 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추상적인 개념들의 이런 환원은 인식과 실존 사이에 깊은 골을드리운다. 물론 인간은 상징 수준의 의미작용을 살아간다. 그러나 메를로-퐁티는 일반적인 언어의 의미작용은 어디까지나 육화된 차원에서의 의미작용으로부터 몸의 파롤로부터 변형되어 나온 것임을 역설한다. 신체의지각은 언어로 추상화되기 이전에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표현‘인 것이다 - P368

현존재는 존재의 목동이며 무의 자리지기이다. 존재의 ‘말 건넴‘은 그 열려있음 안에 들어서있는 현존재에게만 들린다. 그러나 일상성에서의 현존재는 이 말건넴에 등을 돌리고 세상에 빠져있다. 불안은 이 현존재를 그의 세계내존재자임으로 끌어당긴다. 불안 속에서 현존재의 존재가능도 분명해진다. 현존재의 존재가능은 곧 ‘자기를 앞질러 -감‘, 다시 말해 (허공을 향해 앞질러가는 것은 아니므로) 언제나 이미 세계-내에 존재하면서-자기를 앞질러-감이다. 이러한 현존재의 존재를 하이데거는 ‘심려(心)‘로 파악한다. 현존재 특유의 모든 행위는 결국 이 심려에 근거한다는 것이 하이데거의 생각이다. - P397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불안을 가리려 할 때, 즉 자기가 자기를 결정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설득하려 할 때 ‘자기기만(자기 속이기)‘이 성립한다. 그런데 이 경우 자기가 자기의 불안을 잠재우려면 자기의 불안을 명확히 직시해야 한다. 이 점에서 자기 속이기는 타인 속이기와 다르다. 타인 속이기(‘거짓말‘)는 스스로는 진실을 알면서 타인에게는 거짓을 말해야만 성립한 - P418

다. 그러나 자기 속이기에서는 진실과 거짓이 하나의 통일된 의식 안에서혼효한다. 자기기만은 의식의 ‘반투명성‘에서만 나타난다. - P419

도달한 곳은 상반된 지점들이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공히 현상학자들로서 ‘현존재‘를, ‘인간존재‘를 사유했지만, 하이데거 사유가 존재에 닻을 내린다면 대조적으로 사르트르는 의식/주체성에 닻을 내린다. 하이데거의 사유가 존재와 현존재의 사유라면, 사르트르의 그것은 의식= 대자와 즉자의 사유이다. 하이데거에게 현세계는 존재가 드러나고 숨는 장으로서, 인간은 이 장에서 철학과 시를 통해 존재를 향할 수 있다. 사르트르에게 현세계는 대자적 주체가 무로부터 스스로의 삶을 창조해나가야 할 장이며, 인간은 이 장에의 앙가주망을 통해 그것을 바꾸어나갈 수 있다. 하이데거가존재에로 경사된 그의 사유를 통해 현실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을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가 존재의 빛을 특정한 민족에 결부시켰을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된 위험이다. 이런 경사를 품지 않았던 사르트르의 정치철학은 보다 의미 있는 것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저한 주체철학에서는 존재에로 나아갈 수 있는 다리가 끊겨버린다. -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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