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와다 하루키 지음, 남기정 옮김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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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전부터 김정은 정권이 들어올 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짧지 않은 기간의 역사를 300여페이지의 분량으로 담아냈는데도 빈 구석 없이 훓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이해하기 어렵지 않은 문장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 읽기에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세밀한 역사는 사료를 통해 보충해야겠지만 북한사를 처음 경험하기에 충분한 책이라 보여진다.

북한은 사회 구조상 자료 접근이 쉽지 않아 연구자들이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종식되고 나서야 비로소 내부자료를 입수할 수 있게 되면서 북한의 과거 시대 조명의 기회가 확대되었다. 때문에 현재는 1945년 이후부터 북한 체제가 국가사회주의체제로 확립되는 1961년까지의 역사는 거의 완전하게 복원 가능해졌다. 다만 1960년대 이후가 되면 소련도 북한의 내부사정을 파악하지 못하게 되었고 1970년대 이후는 내부자료조차 얻을 수 없는 시기가 되어 망명자 증언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저자도 1961년까지는 공식자료에 의해 검증할 수 있었으나 이후는 망명자 증언이나 다른 책이나 논문, 증언 등에 도움을 받았다.

나는 기존에 북한사 책으로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개정판)', '북한의 역사'(총 2권) 요렇게 가지고 있었다. 이 책이 셋 중 가장 최근 책이다.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북한현대사'는 제목에서 느낄 수 있지만 사진과 그림 자료들이 컬러로 들어가있고 다양한 분야를 다루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와다 하루끼의 책은 정치사 분야로 치중하여 서술하고 있지만 다루는 기간이 가장 길다. '북한의 역사'도 정치사 분야에 입각하여 기술하였지만 1994년 김일성 시기까지만 다루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구판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 같다.


이제 책에 대한 서술을 확인해보자.

지도자들의 스타일을 설명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흥미로웠다.

김일성은 해방 이전부터 항일운동 이력으로 인해 이미 유명했다. 1933년 5월부터 민생단(조선인 당간부와 부대간부가 일본이 꾸며낸 모략단체) 단원으로 몰려 구속 처형되는 민생단 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 동만주에서도 일본에 맞서기 위한 유격대가 조직되어 있었는데 김일성도 여기에 구성원이었다.
김일성은 적극적이고 용감했으며 대원들 사이 신뢰와 존경을 얻고 있다고 진술되어 있다. 말하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눈에 띄는 반면 정치문제는 잘 알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 시점에서 동만주의 군사간부에 대해 평가한 중국공산당의 자료에 김일성이 나온다. 동만주 당의 지도자 웨이 정민(魏拯民)이 코민테른 제7회 대회 참가를 위해 모스끄바에 가서 핑 캉(馮康)이라는 필명으로 코민테른 중공당 대표부에 제출한 보고서다.
김일성. 고려인. 1931년 입당. 학생. 23세. 용감적극. 중국어를 할 수 있음.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 대원들 가운데서 말하기를 좋아하고, 대원들 사이에서 신뢰와 존경을 받으며 구국군 속에서도 신뢰와 존경을 받는다. 정치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다.(『동북지구혁명문헌회집 乙一』) - P29

"조선인 부대를 중국인 부대와 구별하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장래에는 단독으로 조선인민혁명군을 조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분할을 강행하면 항일 무장역량을 약화시키는 결과가 된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현대동북사』, 『세기와 더불어』 제4권). - P30

올브라이트 장관이 기술한 김정일에 대한 인상은 김일성의 용감성과는 거리가 있다. 정보전에 능하고 수싸움에 능한 이미지가 엿보인다. 그는 김일성 사후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전군을 돌며 군인들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다. 또 고난의 행군 시기 사람들이 공식 선전에 대해 소극적 자세를 보이자 자신이 우대한 군대를 경제면에서도 전위로 삼아 다른 인민의 본보기로 활용하겠다고 생각한다.

올브라이트 장관은 김정일이 "지적인 인물"이고 "고립되어 있지만 정보에 통해 있으며" "절망하고 있는 사람이 아닐뿐더러 걱정하고 있는 사람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가 바라고 있는 것은 미국과의 정상적인 관계였다"라고 회상했다. - P269

김정은은 아직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보이는데 저자는 이전 두 지도자들의 스타일과 비슷하면서도 새로운 스타일이 엿보인다고 평가한다.

표현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며 위협을 가하거나, 제재에 대해 더 강경한 조치로 대항하는 것은 김정일 시대부터 이어진 북한의 전통적인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그런 와중에도 김정은의 새로운 스타일이 선보이기도 했다. 위성발사장을 외국의 기자에게 공개한 것, 발사가 실패했다는 사실을 즉각 발표한 것 등이다. 나아가 김정은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 열병식에서 육성으로 연설했다. 이 최초의 연설에서 그가 "새 세기 산업혁명"을 목표로 삼겠다고 한 것도 새로웠다. - P310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세 명의 정치인이 북한을 이끄는 동안 북한의 체제는 변함이 없어 보이지만 내외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키워드로 표현한다면 '주체정치 -> 선군정치 -> 보통국가' 가 될 것이다.

1970년에 국가의 새로운 상부구조가 완성되었다. 유격대 모델을 전국가로 확대하고, 사령관 김일성을 전인민이 받드는 유격대국가다. 이 구조는 국가사회주의체제 위에 구축된 2차적 구조물이었다. 이 국가체제는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명을 일으키고, 이를 지원하여 혁명적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로 구축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목표는 백일몽으로 끝났다. 목표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강력한 국가체제가 나타났다는 것은 커다란 역설이었다. - P176
국가디자인 측면에서는 이즈음 새롭게 가족국가론이 제창되어, 유격대국가라는 건물 위에 간판처럼 내걸렸다.
중심이 된 것은 "어머니 당"이라는 새로운 말이었다. 지금까지는 수령을 '부모님 같은 수령'이라는 의미로 '어버이 수령'이라 불러웠지만, 이즈음에 와서는 그 의미가 '아버지인 수령'으로 변화했다. 수령이 아버지이고 당이 어머니라면 대중은 그 자식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로써 가족에 비유한 국가디자인이 완성된 것이었다. - P198

1999년 6월 16일에는 논설 「우리 당의 선군정치는 필승불패이다」가 게재되었다. 이는 김정일의 체제, 즉 필자가 '정규군국가'라고 부른 것을 북한 스스로 '선군정치'라고 명명한 것이었다.
오늘 경애하는 김정일 동지가 혁명과 건설에서 구현해나가시는 기본적 정치방식은 선군정치다. 이 위대한 정치는 최악의 역경 속에서 사회주의 보루를 지키고 강성부흥의 새 시대를 열어놓은 전화위복의 기적을 창조했다. 현실은 선군정치야말로 현대 사회주의정치에서 나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는 불패의 정치라는 것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 P262

2011년 12월 30일 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이 회의를 열고, 김정은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서 "높이 모시었다"라고 선포했음을 발표했다. 국방위원장과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관여하지 않고 당 상무위원, 당 정치국원과 정치국 후보위원들만이 모인 가운데 국방위원회 위원장이 겸무해야 할 최고사령관 인사를 결정했다는 사실은 당의 국가지배, 당 정치국의 지배도, 당 집단지도의 개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규군국가체제는 최고사령관인 후계자를 머리로 받아들이기는 하겠지만 '당==국가체제'로 이행해나갈 것이다. 정규군국가로부터 당국가체제로의 이행은 보통의 국가로 나아간다는 뜻이다. 정치국의 정치는 합의의 정치이며, 전문성 있는 사람이 책임을 분담하는 정치이기도 하다. 이렇게 김일성의 시대에 이어 김정일의 시대도 끝났다. 북한 현대사의 새로운 페이지가 시작된 것이다. - P304

다만 그들이 주장한 정치 형태에 대한 내부 사람들의 평가는 어떨까?

리상조는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 양상을 기술하면서, 김일성과 그 주변에서는 당 내에 개인숭배가 없다고 억지를 쓰고 있지만 "김일성과 그 지지자들에게 20회 대회의 문서는 호랑이보다 무서운 것"이라고 지적했다. 리상조는 또한 역사가 왜곡되고 있다며, 김일성의 만주 항일무장투쟁만이 조선인민의 민족해방투쟁사를 이루고 있다는 역사기술을 비판하고 있다. - P130

1월 4일자 『로동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김정일 어록이 발표되었다. "과거의 시기에 만들어진 기초 위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요구에 맞게 그 면목을 계속해서 일신해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신문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이야말로 새로운 사고방식의 선두주자라고 추켜세웠다. 이러한 메시지가 북한의 간부와 인민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궁금하다. 고르바초프가 주장한 뻬레스뜨로이까의 가장 중요한 기둥은 "글라스노스찌(자유언론)"였다. 그것이 김정일의 "개건"에는 빠져 있었다. 그것 없이 신사고는 나타나기 어렵다. - P271

남한과 북한의 현대사를 읽으면 어쩔 수 없이 느낄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의 순간은 찾아온다. 이 책에서 꼽아보자면.

첫 번째 장면 ->
1948년 북한의 헌법이 제정된다. 헌법 제103조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부는 서울시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이전까지는 북조선만의 정권이었으나 국가 범위를 한반도로 확대한다는 것이다. 이 때 조선최고인민회의 선거가 8월 25일 북조선 전역과 남조선 지하에서 실시되었다. 이보다 앞서 8월 15일 서울에서는 대한민국이 전조선을 영토로 한 한반도 유일의 합법국가임을 내세우며 정부수립을 선포했다. 이쪽도 스스로가 전조선을 영토로 하며 서울이 수도인 조선 유일의 합법 국가임을 주장했다. 북한 헌법에 명시된 대로, 서로 다른 정권이 수립된 이후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거하여 국토를 통일하겠다는 구상은 이미 자리한 셈이었다.

두 번째 장면 ->
김일성은 중국의 국공내전이 진전되는 것을 호기로 여겨 결국 스탈린과 마오 쩌둥의 승인을 받은 이후 전쟁을 개시했고, 이승만은 이에 맞서 미군을 끌어들여 국지전을 세계전으로 만듦으로써 북진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쟁 후 김일성은 정치적으로 승리했지만 한반도는 수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낳았고 이념 전쟁은 격화되었다.

스딸린은 "변화한 국제정세를 위해" 북한의 동지들의 생각에 동의했지만 중국의 동지가 동의하지 않는 의견이라면 결정은 연기하겠다고 전해왔다. 마오 쩌둥은 대만 해방 이후라면 충분히 도울 수 있지만, 지금 무력통일을 개시하기로 결정했다하더라도 동의한다고 김일성 등에게 말했다. 김일성은 2만 내지 3만의 일본군이 파견될 가능성은 있지만 문제 없다고 말했다. 마오 쩌둥은 미군이 참가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으며, 그렇게 되면 중국은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말했다. - P88

그날 정오 직전 무초(Muccio) 주한 미대사가 대통령 관저로 방문하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조선을 제2의 사라예보로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러나 어쩌면 현재의 위기는 조선문제를 일거에 전면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최선의 기회를 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미국의 여론이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해 나날이 강력해지고 있다. - P89

세 번째 장면 ->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일으켰고 한국은 그 전쟁에 참여했다. 박정희는 1965년 한일조약 체결을 하고 김일성은 이 기회에 혁명전쟁을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 때부터 우리가 잘 아는 김신조 청와대 습격을 비롯한 수많은 사건들이 발생된다.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명을 조직하고 필요하다면 다시 혁명전쟁을 일으킬 것이며, 이를 위해 수령의 유일지도를 확립해 전인민이 항일유격대원의 정신으로 행동해달라는 것이 당시 김일성의 주장이었다. 베트남 사태와 한국의 출병에 자극을 받은 김일성은 한국에서의 혁명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 P161

네 번째 장면 ->
김일성과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협의하던 남북한의 교류가 끊어지게 된다. 남북한 관계는 북한과의 문제만이 아니고 미국, 일본, 중국 정권과도 얽혀 있어 정권이 강성하면 냉각 기류가 되고 온건하면 화해 무드가 조성이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북미간의 핵 관련한 문제가 그렇다. 국가 간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으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느낄 수 밖에 없다.

미국은 오만무례하게도 우리를 선제공격하기 위한 방법이 책상 위에 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기분이 나빠질 수밖에 없다. 상대가 막대기로 때리겠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존권을 위해 핵을 갖게 된 것이다. 생존권이 보장된다면 핵은 쓸모없는 물건이다.
미국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모른 척하면서 먼저 핵을 포기하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언어 도단이다. 핵의 완전포기는 패전국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국의 패전국이 아니다. 이는 이라크 같이 무조건 무장해제하자고 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수 없다. (...) 미국이 핵무기를 가지고 때린다면 그냥 맨손으로 가만히 있다가는 결국 이라크처럼 되어버리고 만다. - P281

저자는 북한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남한 등 주변의 역사도 함께 기술해줌으로써 역사적 이해에 도움을 준다.
현재 진행형인 김정은 시기에 대한 기술은 아무래도 부족하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역사가 강대강으로 쓰여지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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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리미트] 식물성 육포 갈비맛 - 갈비맛 [언리미트] 식물성 육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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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육포향과 맛은 비슷하게 구현되었으나 식감이 좀 아쉽다. 약간 꾸덕한 젤리 느낌? 안주로 먹는 것이지만 간이 좀 센 느낌. 양은 1인이 먹기에 적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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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티나무 2022-06-18 06: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악 간이 세다구요? 미리 실망이어요……ㅎㅎㅎ

거리의화가 2022-06-18 08:19   좋아요 2 | URL
ㅋㅋ 저에겐 살짝 짰는데 옆지기는 괜찮다네요ㅎㅎ 사람 따라 다를수도 있어요 맛보고 평가가시죠ㅎㅎ

다락방 2022-06-18 0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으앗 저 어제 왔어요. 빨리 먹어보고 싶네요!! 화가 님, 양꼬치맛도 사실 건가요?

거리의화가 2022-06-18 08:20   좋아요 2 | URL
오 다락방님도 받으셨군요^^* 옆지기가 살거면 양꼬치맛 사지 왜 갈비맛 샀냐고 하네요ㅠㅠㅋㅋㅋ 며칠 후 주문해볼까 해요ㅎㅎ

독서괭 2022-06-18 09: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호 젤리느낌이라.. 뭘까요?ㅎㅎ

거리의화가 2022-06-18 20:07   좋아요 2 | URL
ㅎㅎ 뭐라고 표현할지 떠오르는 게 없어서 꾸덕한 질감은 맞는데.

mini74 2022-06-18 09: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 핫하다는 육포리뷰가 올라왔군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18 20:08   좋아요 1 | URL
ㅎㅎㅎ 핫한 육포인가요? 음음 일단 사신 분 저 포함 세분?ㅋㅋ 간 보는 분들 몇 분 계신 것 같고요^^

바람돌이 2022-06-18 09: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육포리뷰가 올라왔군요. 육포는 식감도 중요한데 하 고민입니다.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18 20:09   좋아요 1 | URL
ㅋㅋㅋ 식감 때문에 고민되시는군요ㅜ 맛있게 표현했어야하는데 제가 미식가가 아니라서인지 맛표현을 잘 못하는듯합니다ㅋㅋ

singri 2022-06-18 09: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드셨군요.

거리의화가 2022-06-18 20:10   좋아요 1 | URL
네 어제 맥주랑 같이 먹었습니다ㅋㅋ

그레이스 2022-06-18 1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감! 여기서 주저되네요.

거리의화가 2022-06-18 20:1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 미각으로는 다르게 표현될 수도 있을듯합니다 제가 미식가가 아니라서ㅋㅋㅋ 저는 괜찮았어요ㅎㅎ

라로 2022-06-18 2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젤리느낌의 육포맛은,,,, 어쩐지 저는 별로 🙄

거리의화가 2022-06-18 22:19   좋아요 0 | URL
젤리라는 표현을 괜히 썼나봐요ㅠㅠ 다락방님의 후기를 기대해봐야겠습니다^^;ㅋㅋㅋ

scott 2022-06-19 0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건 봉지를 뜯고 손으로 육포를 잡는 순간
또 한개 육포는 없을 정도로 양이 넘 작아여 ㅎㅎㅎ
간이 세서
땅콩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랑 먹으면 간이 딱 맞능 ^ㅅ^

거리의화가 2022-06-19 07:24   좋아요 1 | URL
스콧님 말이 무슨 말인지 이제 이해가ㅋㅋ 견과류랑 먹으면 간이 딱 맞겠어요ㅎ
 
두만강 국경 쟁탈전 1881-1919 - 경계에서 본 동아시아 근대 너머의 글로벌 히스토리 2
쑹녠선 지음, 이지영.이원준 옮김 / 너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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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한반도의 국경은 자연스레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부근이고 간도 지역은 1909년 중일간 간도 협약 이후 현재의 영토 범위로 되었다라고 인식되어 있다.

남한은 두만강과 압록강이 한반도의 국경임에도 육로로는 가볼 수가 없어 체감상 거리가 까마득하다. 간도 지역은 더하다.
사실 그 지역을 직접 피부로 느끼는 것은 북한일 것이다. 한반도의 국경선이 직접적으로 맞닿아있고 간도 지역도 거리상 가까우니 말이다.
일본은 근대 시기에 식민지 제국의 대륙 발판기지로 만주 지역을 선택하면서 분쟁에 개입했다.

지난 저작 《동아시아를 발견하다》에 이어 저자 쑹녠선은 동아시아 근대를 삼국을 중심으로 다각도로 바라본다. 먼저 경계라는 의미부터 살펴본다. 

마르틴 하이데거의 유명한 말처럼 경계는 "무엇인가가 멈추게 되는 지점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하는 지점이다." 이 관점은 변경에도 적용된다. 변경은 단순히 주변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는 장소다. - P31

서양학자 앙드레 슈미드는 두만강 경계 획정을 한국 국가건설 과정의 한 부분으로 간주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새롭게 상상된 '한민족'이 제기되었고, 민족주의 사상가들이 현재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과거에 대한 낭만적 향수를 이용하기 시작했음을 그의 연구는 보여준다.
나는 이러한 관점을 수용하면서 두만강 지역의 국경 형성을 검토하는 대안적 공간 단위로 '로컬'을 적용할 것을 제안한다. 이 '로컬' 개념에는 '다변적 로컬'과 '지역적 차원의 로컬', '지구적 차원의 로컬' 등 최소한 세 가지 지리적 층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세 층위는 서로 다르지만 역동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 P33~34


두만강은 청 제국의 국경이었을 뿐 아니라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하고 양국 간 무역을 장려하는 제국의 포용성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을 차단하는 제국의 배타성을 모두 보여주는 이중적 상징이기도 했다.
만주에 대한 거버넌스와 인식은 다양한 압력에 따라 그리고 국경을 초월하는 행위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설정되었는데, 이 행위자들은 최소한 세 가지(국내, 양자 간, 다자간) 상호작용하는 공간 층위와 관계되었다. - P89

그리고 한 사건이 등장한다. 1931년 7월 두만강 국경에 있던 정계비(목극등비)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조사차 들렀던 사람들은 비석을 확인했으나 백두산 천지에 다녀온 사이 그 자리는 텅 비고 실체는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것은 조사의 핵심 증거물이었다. 

두만강과 간도를 둘러싼 이전 역사를 살펴보자.

두만강 유역 부근은 조선 초기 6진이 조선의 영토가 되면서 남쪽에 있던 백성들이 이곳에 유입되며 시작되었다. 하지만 국방을 위한 혹독한 세금의 수취 요구와 차별 및 배제로 많은 백성들이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었다. 17세기 청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전해준 지도 제작법을 전수받고 새 지도 제작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청은 1710년 이전부터 답사대를 만주로 여러 차례 파견하면서 백두산을 황실의 산으로 선전하고 왕조의 건국신화를 강화하는 작업을 했다. 1710년 그 지역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강희제는 목극등에게 재판을 감독하고 끝나면 청과 조선의 경계를 조사하라 명령한다. 조선은 청의 의도를 간파하였으나 협력할 수 밖에 없다 느끼고 1712년 현지 조사 후 두만강 수원지로 결정하고 6월 18일 비석(정계비=목극등비)을 세운다. 얼마 후 조선은 이 때 선택한 수원지가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임을 알게 되었으나 조정은 이 문제를 묻기로 하면서 청 조정은 이 사실을 모르고 넘어간다.
1713년 목극등이 백두산 수계와 지리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주는 시늉은 하되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고 잘못된 지리 정보를 주었다. 장 밥티스트 레지(1663~1738)는 목극등이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에 기초하여 한국에 관한 지식과 지도를 생산했고, 이는 나중에 프랑스의 중국학자 장 밥티스트 뒤 알드의 중국 서술에서 재생산되었다. 이후 약 200년이 지난 뒤 시노다 지사쿠는 레지 원고에서 특정 부분만 골라내어 사실을 편집하고 왜곡했다. 두 세기 넘게 변형된 지리 지식은 일본인에 의하여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의 땅이 '무주지'로 간주되는 증거로 이용되기에 이른다.

한족과 만주족 정치가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추진해온 '영토화'와 '내지화'의 지속적 실천은 만주족의 고향이 '중국'이라는 새로운 개념 안으로 통합되어가는 길을 예견했다. - P154

간도 지역에 1877년 조선인 14가구가 용정에 처음 정착했다. 본래 있었던 세금 폐해에 이 무렵 조선에 심각한 자연 재해가 발생하자 많은 백성들은 살기가 어려워졌고 이에 자발적으로 간도로 넘어가게 되었다. 1881년 조선인의 월경 사건을 계기로 청과 조선이 두만강을 둘러싼 국경 조사/협상을 시작했으나 1887년까지 이어진 후속 조사에도 양국 간 타협을 보지 못한채 종결된다. 이후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하면서 천하질서는 막을 내리고 청과 조선 모두 세계 질서로 진입한다. 이후 알다시피 1909년 간도 협약으로 두만강의 국경선이 확정되었다. 1909년 조선은 이미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고 일본은 이미 남만주 철도부설권 획득으로 대륙 진출의 야욕을 드러낸 상태였다. 러시아도 부동항을 얻기 위해 만주를 노렸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하면서 그 기회를 잃었다.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 독립운동을 위해, 먹고 살기 위해 간도에 모여드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청은 이를 어느 순간 민감하게 여겼고 일본도 식민지민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영토 전쟁에 뛰어들었다. 

만주에서든 전국 각지에서든 '비적'에 대한 청의 정책은 탄압과 수용이 결합된 야누스식 전략이었다. 반군을 진압하는 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진압하는데 실패했다면 항상 대안은 있었다. 반군을 사면하고 그들을 징집하는 것이다. 이 전략은 비정부 무장 세력에게 국가와 사회 사이에서 활동할 수 있는 상당히 넓은 공간을 허용했다. 만주의 야심 찬 젊은이들에게는 토비가 되는 것이 단순한 생존 전략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분 상승의 수단이기도 했다. 만주에서 여러 국가가 벌인 정쟁은 비정부 무장 세력이 서로 경쟁하는 국가들과 협력하거나 대항할 더 많은 선택지를 제공했다. - P187


두만강 국경 획정 과정은 동아시아 민족과 국가가 근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를 남겼다. 이 과정은 복잡하게 얽혀 있었고 이후 이 땅에 조선족이 정착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기존의 연구는 두만강 경계의 영토 주권 문제에 집중한 측면이 크다. 이 책은 연속성을 이야기한다. 시간적으로는 전통에서 근대의 과정이 이분법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통을 극복하고 근대를 수용하는 과정이 공존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이야기한다. 공간적으로는 두만강을 단절된 경계선의 영역이 아닌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랜 시간 교류하고 소통해온 연속된 공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동아시아의 다변적 변경지대를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유라시아대륙 양편 사이의 지적 연계의 역동성이 드러났다. 로렌 벤튼의 표현을 빌리면 무주지 개념이 보여준 여정은 "갈수록 더 서로 연결되는 세계 속에서 공간의 점진적 개념화에 관한 지배적 매력적인 서사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 지난 3세기에 걸쳐 지구의 다양한 지역 간에 이루어진 오랜 기간의 상호교류로 권력을 둘러싼 경쟁에 따라 공간과 법에 관한 지식은 다양한 형태로 생산 재생산되고 변형되었다. 두만강 국경 지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은 그 사례이며, 이로써 우리는 유럽과 동아시아의 관계를, 특히 서로가 상대방의 역사적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P248

책을 읽고 난 후 한국사에서 다루는 한국 영토의 인식에 대해 생각이 많아졌다. 정권에 따라 역사 교육은 저마다 다르게 전개되고 자국사를 한편으로는 국수적이고, 다른 한편으로 근대화와 개발의 논리에 맞춰 가르친다. 이에 맞춰 과거사의 영토의 범위는 축소되고 확장되었다.
역사 인식에 다양한 관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배우고 수용하는 대로 익숙한 관점에서 바라보기 쉽다. 이 책은 그런 내 좁은 관점과 식견에 대해서 상기시키게 만들어주는 책이었다.


간도와 만주를 둘러싼 영토 경쟁과 함께 이 다변적 변경에서는 지적 차원에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진행되었다. 한국과 중국, 일본의 대표 지식인들은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제시하면서 이 공간에 대하여 각각 민족주의적 제도주의적 식민주의적 계획과 구상을 제시했다. 각자의 구상은 상대방으로부터 지적 자원을 흡수했고,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에게 영감과 양분을 주며 강화했다. 이 다변적 상호작용 과정을 거치면서 만주, 특히 백두산의 개념은 그 환상이 벗겨졌다가, 합리화되었다가, 다시 환상이 입혀지는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만주는 20세기 동아시아 정신의 역사에서 복합적이고 핵심적이며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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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13 23: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국경이나 영토 등과 관련되면 항상 더 복잡해지는 거 같아요. 넘 재미있게 읽었어요 ~~

거리의화가 2022-06-14 06:44   좋아요 3 | URL
미니님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용이 많은데 다 담을 수가 없었어요ㅠ 국경과 영토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책이었습니다.

새파랑 2022-06-14 06: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딱 화가님이 좋아하실 스타일의 책이네요~!! 두만강이 저런 역사와 의미가 많았다니 놀랍기만 합니다. 역시 역사천재 화가님~!!

거리의화가 2022-06-14 06:47   좋아요 3 | URL
맞습니다 딱딱해서 제 스탈입니다. 두만강 국경선에 얽힌 스토리가 참 복잡다단하더군요. 리뷰 내용에 차마 다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숨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새파랑님^^

scott 2022-06-16 0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간도 까지 우리 한반도 영역인데 ㅜ.ㅜ

국경의 밤이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16 08:56   좋아요 3 | URL
간도 땅에 우리 동포들이 왜 그리 많이 흘러들어가게 됐는지 기원을 알게 되니 달리 보이고 그렇습니다ㅠㅠ 먹고 살기 위해, 독립 운동을 위해 숨어들어간 곳이니까요~ 중국인들과의 마찰도 무시못할 일이었을텐데 그곳 생활이 결코 녹록치 않았을 듯합니다. 나중엔 일본인까지-_-; 1945년 이후에는 더 먼 땅이 되어버렸네요.

그레이스 2022-06-16 23: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 담아둡니다!

거리의화가 2022-06-17 09:11   좋아요 2 | URL
그레이스님 이 책 문체는 딱딱해도 두만강과 간도에 얽힌 한중일 삼국간 서로 다른 관점들을 엿볼 수 있을듯합니다. 도움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동아시아를 발견하다 -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
쑹녠선 지음, 김승욱 옮김 / 역사비평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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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동아시아'와 '현대'라는 용어의 기원과 둘의 관계에 대한 모색이었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현대'는 대체로 19세기 이후 유럽 식민주의의 팽창과 함께 이루어진 세계사적 전환이다. '동아시아'는 어떨까? 냉전 이후 자본주의 국가->발전 이라는 흐름 속에 '동아시아'는 지역적 의미가 아닌 민족이나 종족성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저자는 일반적 현대의 개념이 아니라 '동아시아 현대'를 정리하려 했는데 그 기점이 16세기이다. 따라서 부제도 '임진왜란으로 시작된 한중일의 현대'로 되어 있다.

'동아시아' '중국' '일본' '한국'은 시대마다 다른 함의를 내포한다. 이 개념들은 구역 내부의 교류 및 구역과 외부의 상호작용 속에서 점차 형성된 것이다.  그것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끝나지 않았으며, 미래에도 분명히 낡은 내용은 버려지고 새로운 내용이 첨가될 것이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은 그것들에 대한 부단한 정의, 부정, 재정의다. - P15

책의 내용은 약 16세기 말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구역의 역사가 세계 역사의 흐름 속에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살펴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다만 사료를 새로 발굴했거나 독특하거나 새로운 내용이 있거나 하지는 않는다. 대부분 삼국의 역사를 공부했다면 알 만한 내용이기 때문에 상식적인 내용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서양철학자 헤겔(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8.27~1831.11.14)은 이성이 인류를 진보로 이끌어가는 메커니즘을 삼단논법인 변증법을 통해 설명했다. 이는 유럽을 이성-선진-문명-진보로 여기고 아시아는 야만-낙후-우매-정체로 하여 부각시켰다. 이는 일반적인 유럽(인)의 시각이었다.

아시아가 존재하는 의의는 유럽이 왜 유럽인가를 증명하는 데 있었다. 1885년 「탈아론」은 헤겔 이래 유럽 사상 속의 이 '아시아 안티테제'를 상당 정도 드러내고 있었다. - P23

유럽 중심 시각의 영향 아래 아시아 안티테제'는 동아시아 모든 국가에서 일찍이 자리했다. '아시아주의' 속에 서양은 종족과 문명이고, 제3세계 이론 속에 서양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대표하였다. 따라서 ''동아시아' 개념은 내부에서 생겨난 듯 보이지만 매우 강한 외부적 영향이 접목되면서 탄생했다고 보아야 한다.

'아시아'는 본래 타인 눈 속의 타자였다. 그러나 동아시아인은 이 개념을 가져와서 역으로 타자를 주체적인 자기 인식으로 변화시켰다. 스스로 인식한 '아시아'도 상당 정도는 유럽(또는 서양)을 안티테제로 삼은 것이다.
「탈아론」에 대한 단순화된 해석은 곧 '현대화'를 탈아와 동일시한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이 여전히 익숙하게 '우매 폐쇄 야만 전제'와 같은 크고 부당한 모자를 씌워서 동아시아의 역사 경험을 부정한다. 그에 내재하는 논리는 '탈아'와 일맥상통하며, 심지어 지적인 면에서는 더 나태하고 조악하다. - P24


조선전쟁의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동아시아 국제 관계 기억의 결절점이자 원점이라는 데 있다.

첫째, 이 전쟁에 대한 한중일 삼국의 서사는 처음부터 줄곧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해서 오늘날에 이르렀다. 둘째, 삼국은 이후 다른 시기에, 늘 이 전쟁에 대한 회고를 통해 당면한 자신의 운명, 민족의 운명, 세계 구조에 대한 역사적 해석을 찾았다. 자료와 연구가 이미 한우충동汗牛充棟이지만, 이 충돌에 대한 동아시아인의 인식은 시종 혼란스럽게 나뉘어서 나라에 따라, 시기에 따라, 정세에 따라 다르다. 그뿐 아니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과도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체성의 변화에 따라 서술도 바뀐다. - P63

전쟁에 대한 삼국의 기록은 저마다 다른데 이마저도 서로에게 유리하게 기술되어 있는 탓에 후대의 사람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할 뿐 아니라 평가에도 어려움을 겪게 한다.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전쟁의 성격, 전쟁의 명칭은 삼국이 서로 다르다.

임진왜란의 배경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심도 큰 몫을 차지했으나 더 큰 것은 경제적인 이유였다라고 생각된다. 명과 일본 사이에는 100 여년 동안 감합무역이 이루어졌으나 16세기 중엽이 되면 감합무역은 중지되고 공식적 교류도 단절된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교류가 중요해진다. 이전에 조선과 일본은 통신사와 수신사를 서로 파견하였고 부산에 왜관이 설치되면서 상인의 거래가 가능했다. 조선-일본을 이어주던 쓰시마 섬 영주는 일본의 커지는 요구에 문서를 날조하여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은 일본의 목적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전쟁에서 삼국이 악역으로 삼은 인물은 누구일까? 명의 심유경이다. 그는 자싱 출신으로 일본과 왕래하면서 일어를 할 줄 알았다.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자 병부상서의 요청으로 일본과 교섭하게 되었다. 그는 적의 요구를 적당히 들어주면서 평화를 이끌어내려고 했다. 문제는 중국과 조선 사이 오가는 문서를 위조했다는 사실이다. 심유경의 죄는 결국 만력제에게 드러나 전쟁 후 참형에 처해진다. 심유경은 동아시아의 조공 체제를 잘 알았고 체제 담론 아래서 어느 정도의 변통 내지 조작의 공간이 있을 수 있음을 잘 아는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 간에 요구사항을 잘 알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기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은 그의 설득으로 전투를 멈추고 공격을 중단했다.

미국 역사학자 피터 퍼듀는 종번 담론이 일종의 '과문화 언어(Intercultural language)'로, 상당히 큰 융통성을 가지고 서로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지적한다. - P71


만주 지역은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변방으로 치부되기 쉽다. 그러나 중국의 내륙아시아 특히 동북 지역은 농경 지대도, 유목 지대도 아닌 중간 지대로 누르하치가 굴기한 것은 명, 몽골, 조선 등 모두의 역사에 걸쳐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으나 명이 조선에 참전하면서 만주 지역이 다각도로 변화하는 데도 영향을 미쳤다. 명조가 조선에 파견한 부대가 만주 동북의 여진, 몽골 등의 부족을 견제하기 위한 요동 부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이 파견되면서 역설적으로 동북 변경은 틈이 생겼다. 게다가 명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면서 명 조정은 이것에도 대응해야 했기에 누르하치가 주변 부족들을 위협하여 통합하는 동안에도 충분한 군대를 투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누르하치가 사망할 즈음 정권은 이미 여러 부족이 결합한 다원적 국가였다. 홍타이지는 이후 조선을 두 차례 공격하여 명까지 전쟁에 참여하게 만든다. 게다가 차하르를 포함한 내몽골 전체를 복속시킨다.

여기에서 동아시아의 민족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까? '이족'과 정통이란 구분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동아시아 각국의 민족주의는 확실히 19세기 이후의 의식으로, 전 지구적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이중 압박을 받은 뒤에 피동적으로 발생한 '상상'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결코 공중누각은 아니며 역사가 형성한 신분 정체성 인식의 기초 위에 접목된 것이다. 이 신분은 '민족'이 아니지만 후대인에 의해 매우 쉽게 '민족'으로 개편되었다. 민족과 민족주의 양자는 모두 인위적이며 비자연적인 산물이다. 민족주의 이전의 엘리트 계층은 결코 현대 민족주의자처럼 하층 민중을 포함한 전체 '국민'을 동원하여 '한 쟁반의 흩어진 모래'를 하나의 통일적인 '국國/족族'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의 정체성 인식을 자기 계층의 문화와 정치 신분에 더 많이 호소했다. 중원, 조선, 베트남, 일본에서 이 엘리트 계층은 유가儒家 사인士人 집단을 주요 대표로 삼았다. - P99

청조 통치자는 중원 지역에서 "화와 이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일부 한의 유학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청 조정은 명조의 정치와 이념 이데올로기를 계승하기는 했으나 다양한 집단들을 포함한 국가였기에 이를 아우르는 논리가 필요했다. 동아시아 세계에 명조 시기 형성된 '중화'라는 인식의 개념이 청의 등장으로 변화가 생긴 것이다.


기존의 '중화'는 성리학 학풍을 따르는 것을 전체적으로 지칭하는 흐름인데 명의 유학자들은 자신들을 '중화', 조선의 유학자들은 '소중화' 로 이를 지칭하였다. 청은 명의 제도를 계승하여 예부를 통해 대외 교류를 이어갔다. 이는 종번(조공-책봉) 체제를 기반으로 조선과 일본 등의 국가와 관계를 맺으면서도 다른 제도를 통해 내륙아시아 변강 지역(몽골, 칭하이, 티베트, 신장 및 서남 지구)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그 책임기구는 설립 초에 '몽고아문'(1636)으로 바뀌었다. 순치 연간 이번원은 예부에서 벗어나 외번 사무를 전담하는 독립 부문이 되었다. 이번원으로 내륙아시아에 대한 통치를 실시한 것은 청이 명과 다른 매우 큰 특징이며, 오늘날 중국이 '중국'으로 될 수 있도록 한 중요한 걸음이었다. - P113

홍타이지는 폭력과 강압만이 아니라 정치 체계와 종교 신앙 측면에서 자신과 몽골을 한데 섞어 하나로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군사 무역 이민 등의 방식으로 영토와 인구를 탄탄히 하고, 지역을 나누어 집정관을 파견하여 관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다.

17세기가 되면 동아시아의 '중화' 체계는 모호해지고 청을 중심으로 한 '천하' 질서로 바뀌게 된다. 중국은 여러 부족이 통합된 단일국가가 되었고 러시아와의 변계가 확정된다. 종번 원칙을 통해 조선 및 베트남 등과도 경계가 획정된다.


대항해 시대 로마교황청과 스페인 포르투갈은 동맹을 맺고 유럽 바깥의 세계에서 공동으로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1494년과 1529년 토르데이야스 조약과 사라고사 조약을 체결하여 지구를 동서로 분할하여 스페인은 아메리카와 태평양 서부를 맡고,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부분을 포함하여 브라질 동부에서부터 인도네시아 군도에 이르는 지역을 갖게 된다. 이 때 예수회는 로마교황청과 포르투갈의 후원을 받아 아시아로 진출하게 된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에 선교를 위해 갔으나 선교만이 아니라 유럽 문명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중국 뿐 아니라 조선과 일본에도 전해진다. 마테오 리치는 세계지도를 통해 아시아라는 용어를 출현시키기도 했다. 물론 이 때의 아시아라는 용어는 새로운 공간 인식의 틀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테오 리치는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일방적인 전달 방식이 아니어서 청 강희제에 의해 '마테오 리치 규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았다.

마테오 리치 규칙은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이질적인 두 문화가 만났을 때 좋은 측면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이며, 상호 적응을 시도하는 노력이다. 이는 중국 역사에서는 그리 신선하지 않지만, 줄곧 이슬람의 부상을 위협으로 보고 또 바야흐로 신교의 충격을 받은 천주교 유럽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담한 조치였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 이끌리는 가운데 천주교의 몇몇 기본 개념은 한어 맥락에 뿌리를 심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몇몇 한어 어휘도 기독교화했다. - P173

예수회는 16세기 일본 엘리트가 외부 세계에 품은 관심과 호기심에 영합하는 전략과, 발리냐노의 현지화 전략을 통해 천주교가 초창기 동아시아에 안착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예수회의 성공은 스페인과 그 지지 교단을 시샘하게 만들었고 유럽과 천주교 내부의 정치적 경쟁으로 일본은 격랑 속에 휘말린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권을 공고히 해야 했기에 정치적인 견해가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시작했고, 대외무역에 대한 관리도 강화했다. 이 과정에서 천주교 다이묘는 배제되어 '겐나 대순교' 등이 발생하였다. 얼마 전 엔도 슈사쿠의 작품 《침묵》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책이라는 것과, 책을 배경으로 한 영화 〈사일런스〉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 책에서 숨은 기리시탄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어서 놀랐다. 중국과 조선의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도 거셌으나, 일본의 기리시탄에 대한 박해는 아주 처참했다고 한다. 잔혹한 박해와 형벌로 일부 기리시탄은 겉으로 종교를 포기하고, 자신의 종교를 위장하고 숨어들었다. 그 세월을 2세기 동안 지켜냈다는 게 놀랍다.

17세기 후기에 이르면 예수회는 천주교 내부에서 배척당했고 포르투갈의 세력도 약화된다. 1773년 로마 교황청은 예수회를 불법으로 지정하였다.

16~18세기 유라시아 교류는 보통 유럽인이 출발점인 경우이다. 하지만 17세기 초 일본이 파견한 하세쿠라 쓰네나가 사절단은 태평양을 건너서, 강희 연간 번수의는 서쪽으로 인도양을 가로 질러 유럽에 이르렀다.
하세쿠라 쓰네나가와 번수의가 살던 시대는 천주교의 운명이 역전되던 때로 외부 세계에 대한 배척이 강해지던 때였다. 이 때문에 금교를 계기로 초래된 교류는 19세기 이래 '쇄국'이라는 단어로 통칭한다. '쇄국'이라는 단어는 어디에서 왔는가?

미국이 견고한 함선과 고성능 대포를 가지고 일본을 강제로 개방시킨 뒤, 종래 어떤 정령 속에서도 출현한 적이 없던 쇄국'이라는 단어는 에도시대 일본의 '자아봉쇄'에 대한 고정 인식이 되었고, 이후로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 대한 '상식적' 묘사로 더 확대되었다. - P216

동아시아의 역사를 곧 '쇄국'과 '개국'이라는 기본 논리로 삼아 파악하는 것은 구미가 주도하는 '현대' 서술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었다. - P217


아메리카의 은이 화폐를 대신하고 노예가 상품 가치를 띄기 시작한 이후 차와 담배가 동아시아 삼국 사회에 깊숙이 파고든다. 대항해 시기 이후 중국의 바다는 28년의 해금 정책 시기를 제외하고는 계속 열려 있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은 이민이 빈번하여 이민 사회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인 이민도 동남아시아까지 두루 퍼져 있었다. 조공 무역을 제외하면 해상무역이 빈번했고 이 때문에 해상을 장악한 세력은 부를 쌓을 수 있는 명백한 기회가 되었다.

역사상 중국의 바다 봉쇄와 개방은 국가와 해상 집단 간의 역량 각축이 서로 길항하며 소장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 배후에 존재하는 논리는 해양무역에 대한 거부라고 하기보다는 해양무역의 통제권에 대한 쟁탈이라고 해야 한다. 국가와 상인은 절대로 항상 대립적이지 않았다. 해상 집단은 전형적인 초국적 세력으로, 무릇 세력이 커진 자는 주변의 국가 및 비국가 정권과 미묘하고 복잡한 관계를 가졌다. 해금 시대의 동아시아 해역은 조금도 쓸쓸하거나 적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역사 극장이었다. - P241

1793년 영국 사절 매카트니는 중국 황제의 조정을 방문했다. 그러나 건륭황제는 그를 내쫓았는데 이유가 있었다.

닝보, 저우산 등 지역을 항구로 개방한다. 베이징에 영사관을 상설한다. 저우산 부근의 섬 하나를 획정하여 영국 상인의 거주지와 창고로 제공한다. 영국 상인이 광저우에 상주하는 것을 허가한다. 영국 배가 광저우와 마카오 수로에 출입할 수 있도록 하며, 아울러 과세를 감면한다. 영국 선교사의 선교를 허가한다. - P264

요구 조건이 누가 봐도 과하다. 통상적 권리가 아닌 영국 자국에 특수한 권리를 요구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매카트니가 삼궤구고의 예를 행하기 거부한 것과 건륭제가 영국왕에게 준 회신의 오만한 태도가 강조되며 선입견을 만들어 냈다. 이는 야만적인 '동양'이 침략당해도 싸다는 근거가 된다. 하지만 사실 건륭제의 회신은 1896년이 되어서야 전체가 영문으로 번역되었고, 그 서신과 거기에 담긴 말은 19세기 전반에 걸쳐 어떠한 주목도 끌지 않았다. "천조에는 없는 것이 없으며 ... 지금껏 정교한 제품을 중시하지 않았으니, 당신 국가의 제품은 조금도 필요치 않다." 해당 말의 문맥은 매카트니가 가져온 예물을 이야기한 것이지, 중영 간의 무역에 대한 언급이 아니었다.


17세기 조선의 강항과 중국의 주순수는 유학자로 일본 근대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강항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나 일본군이 전라도 해상에 쳐들어오자 그만 포로로 붙잡혀 일본으로 가게 된다. 일본에서 그는 후지와라 세이카와 교류하게 되었는데 그는 조선통신사를 통해 유학을 접한 이후 유학 연구에 매진하던 학자였다. 강항은 후지와라의 도움으로 조선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주자학은 후지와라 세이카 이후 하야시 라잔을 비롯하여 도쿠가와 시대 일본 사상의 주류 흐름으로 발전한다. 주순수는 정성공이 강남 지방을 공격할 때 전투에 참가했다가 실패하자 일본 나가사키로 가 학문을 전수한다. 이 때 주순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인 도쿠가와 미쓰쿠니를 가르쳤고 에도로 가게 된 그는 이후 일본 지식인과 많은 서신을 주고받으며 유명해졌다.

중국은 강남풍 문인화가 유행하고 일본에서는 우키요에 문화가 유행한다. 강남 풍격은 조정의 주류와 분리되어 있었기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호방한 기상을 담으며 개성이 뚜렷한 화풍을 열었다. 일본에서는 다이묘가 에도에 출사하러 가면서 에도의 무사 중심 인구가 급격히 늘고, 남녀 비율이 불균형해지면서 연예업, 서비스업, 색정업 발달이 촉진되었고 이로 인해 17세기 후기 우키요에 문화가 출현하였다.

청학은 경세치용 실사구시를 추구하면서 전통 유학의 관변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길을 열었으나 유학의 리와 이의 추구는 유학이 주도하는 흐름 속에 흘러갔다. 반면 일본 근대 사상은 청학과 달리 유학을 수용 발전시키기도 하였으나 난학처럼 유럽을 귀감으로 삼아 본토의 지식을 수정하고 국학과 같이 일본 내부의 특성을 담은 학문도 전개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실학은 유학 체계 안에서 정주이학에 대한 비판 및 반성과 부합했으며, 또한 16세기에 전해진 유헙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았다. 실학에서 '경세'는 학문의 실천을 검증의 표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이성을 숭상하고 과학 등의 실용적 지식을 중시하면서, 그것들을 유가 도덕 및 정치와 대립시키지 않았는데 이는 조선에 특히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백은 공급이 하락한 뒤 동인도회사는 중국의 차와 바꿀 다른 상품으로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에 주목한다. 동인도회사는 대중국 아편 무역을 회사가 인증한 항각상인이라는 산상에게 넘겨주었다. 많은 항각상인들이 광저우 관부와 결탁하여 아편을 밀수해 들여와 폭리를 취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아편이 10배 느는 동안 백은이 대량으로 유출되고 사회 풍조가 부패하고 해이해지면서 결국 영국과 전쟁까지 벌이게 된다.

일본은 페리 개항 이후 문명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요시다 쇼인은 미국인에게 접근하기 위해 밀항을 준비하며 미국 군관에게 한문으로 쓴 편지를 찔러주기도 한다. 이 편지가 영문으로 번역되면서 미국이 일본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구가 된다.

흑선의 도래는 미국이 동아시아를 정식으로 척식하는 한 과정이었으며, 일본이 '식민 현대'의 세례를 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미국에게 이후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본은 마치 요시다 쇼인이 페리를 추종했던 것처럼 동아시아의 겸손한 동료였다. 비록 두 나라는 20세기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미국의 점령과 개조를 거쳐 일본은 다시 좋은 학생의 모습으로, '문명'으로 되돌아갔다. - P335

중국은 아편전쟁의 결과로 개항을 하게 되고, 조선은 강화도 조약 이후 조미수호통상조약으로 개항을 하게 된다. 다만 두 나라는 당시의 국제법에 대한 원칙을 정확히 인지하지 못한 채 여러 나라를 상대로 조약을 맺게 된다. 국제법은 모두 식민제국 체제 하에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동아시아 '천하' 구조는 외부 압박과 내부 변란이 이중으로 작용하는 가운데 해체되어 하나의 '구역'이 되었다. 그러나 구질서가 해체된 뒤 도래한 것은 하나의 민족국가 체제가 아니라 일본이 중심이 된 제국주의 질서였다. 신질서는 국제법의 언어를 차용했지만 오히려 '중화-천하' 질서의 많은 면모를 계승했다. - P345

동아시아는 '식민 현대'의 한 대상이었지만, 그것은 단지 구미 제국의 눈에 '비문명' 세계의 한 구성 부분, 그 정도였을 뿐이다. 그러므로 '아'를 가져다가 추상적인 서양과 상대되게 한 것은 식민 체계 아래서 동아시아인의 인식 착오다. - P353


인류를 과학적 방법에 의거해 '인종'으로 구분한 것은 18세기 스웨덴 자연학자 카롤루스 린나이우스로부터 시작되었다. 인류학은 갖가지 측량술의 발달로 종족 이론의 생물학적 근거를 강화했다. 19세기 찰스 다윈의 자연진화론은 인류 사회의 차이를 해석하는 데 쓰였다. 종과 족은 문명진화론과 긴밀히 연계되었고 식민 압박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었다.

1904년 세인트루이스 세계박람회가 열릴 때 러일전쟁이 한창이었다. 러시아는 대회 참여를 사양했고, 일본은 세계 박람회에서 자기 문명의 높은 수준을 전시하면서 일본인이 러시아를 넘어서 '가장 문명적인 종족'을 자처했다. 일본의 논리는 유럽과 미국이 주장하던 식민 체제의 논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동아시아가 민족주의로 자신을 개조한 것, 그 하나의 주요한 자극은 담론과 실천 두 측면에서 마치 한 쌍의 대립적인 적으로 보이지만,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피식민자가 일련의 반항적 민족주의를 구축하면서 의지한 논리 역시 식민자가 가져온 그 문명 진화 논리였다. - P366

17세기에 기원한 현대 국제법은 식민주의가 세계에 확장되면서 식민 활동을 지지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이야기했다. '보호국'이라는 개념은 1885년 유럽 국가가 아프리카를 분할하면서 세운 논리였다. 일본은 식민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구미 국가의 평가에 특히 신경쓰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매 단계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문명의 규범에 부합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1912년 메이지 천황 사후 일본은 새 시대를 맞이하면서 명목상으로 구미 식민제국과 자신이 완전히 평등한 국가가 되었음을 인식한다. 이것은 1920년대 다이쇼 데모크라시 이후 '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며 삼국의 정치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아시아주의는 새로운 압박으로 기존 압박을 반대했기에 초월성을 가지기 어려웠기에 결론적으로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1919년 일부 지식인들은 식민주의의 타개도 중요했지만 어떻게 자신을 '현대'로 만들 것인가가 본질적으로 더 중요했다. 이 때문에 '현대'를 가속화하기 위해 자아 비판 나아가 동양 비판으로 나아갔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의 본질을 급격하게 실천한 이들은 중국과 조선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해방전쟁, 한국전쟁, 베트남전쟁이 연이어 일어나며 중소간 분열의 무대가 된다. 중국해방전쟁으로 중국과 미국이 조선에서 직접적으로 교전했고 베트남에서 간접적으로 대항했다. 미소간 게임이 아니라 중미와 중소의 게임이 이어졌는데 이는 19세기 이래 이어진 식민과 반식민, 패권과 반패권 항쟁이 심화된 무대였다. 1949년 이후 중국은 국가 건설에 어려움을 겪었고, 일본과 한국의 경제 도약은 한국전쟁 이후 영향 하에서 이루어졌다.

오늘날 냉전 구조는 대체로 종료되었지만 식민 자본주의 체제가 무너졌는가 생각하면 그것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그 흐름은 세계를 주도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식민 현대성과 다른 대안적 발전관을 찾도록 요구한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곤혹스럽게 하는 역사 인식의 문제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어떤 전쟁, 어떤 사람(집단), 어떤 사건에 대한 책임을 확인하는 데 있지 않고 우리의 현대성 개념에 대한 인식에 있다. 19세기 후기부터 동아시아는 점차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고, 정해진 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종의 발전주의 시대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역사는 부단히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인류는 '야만'에서 '문명'으로 나아간다, 미래는 과거보다 더 '선진'적일 것다, 우리가 매 맞는 이유는 '낙후'하기 때문이며 낙후한 원인은 '폐쇄 보수'에 있다. 이러한 일련의 논리는 우리에게 영원히 '문명의 승리자'의 시각에 서서 '몽매한 야만인'을 부정하도록 요구한다. 그런데 누가 문명과 승리를 대표하며, 누가 몽매와 실패를 대표하는가? - P458

인류의 현대는 어느 하나의 국부적인 기원에서 다시 전 지구적으로 확대된 것이 아니며, 서로 다른 사회 간에 긴밀히 교류하고 만나는 과정 속에서 함께 형성해낸 것이다. 동아시아, 남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상호작용이 없었다면, 유럽의 현대화도 우리가 아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없었다. 그러므로 '현대'는 동아시아에 내재된 것이다. 외부 세계가 가져온 충격을 직시하되, 이러한 충격을 유일한 역사 추진력으로 간주하지 말고 외부 충격에 조우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어떻게 현지의 역사적 동력으로 내화하는지의 과정을 탐구해야 한다. - P462

이 책을 통해서 동아시아가 현대로 들어서는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 보았다. 한중일 지역을 둘러싼 지역의 역사를 한 곳에 모아놓아서 한 권의 책으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다만 저자의 기호가 균형 있다고 생각되어지지는 않는다. 아무래도 조선에 관한 분량은 적은 편이고 중국에 우호적인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재밌게 읽었다. 한중일 근대사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더 재미나게 읽을 수 있을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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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06-07 1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임진왜란이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전쟁이었다는 해석
을 본 기억이 나네요.

굽작가도 혹시 이 책을 참조하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

거리의화가 2022-06-07 11:39   좋아요 1 | URL
임진왜란를 조선전쟁이라고 하기에는 명칭이 맞지 않죠^^; 애초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명을 정벌하러 간다는 의도로 시작한 전쟁이고 명도 참전한 전쟁이니까요. 명도 이 전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고 결국 청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잖아요.
삼국의 역사를 함께 보여주는 이런 역사책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여러 모로 비교할 지점이 생기니까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2-07-08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8 15:34   좋아요 2 | URL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7-08 17: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화가님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1   좋아요 2 | URL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저도 놀러갈게요.

mini74 2022-07-08 17:3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학 축하드리러 왔다가 붕어빵 말풍선에 빵 터지고 갑니다 ㅎㅎ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8 17:3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랜덤 스킨인데 왜 하필 붕어빵에 소주?ㅎㅎ 저도 덕분에 들여다봤어요^^;
어제는 소주잔 스킨이 당첨되더니ㅋㅋㅋ

미니님 감사합니다*^^*

이하라 2022-07-08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립니다.^^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이하라님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07-08 18: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역시 역사책은 화가님이 최고~!!

거리의화가 2022-07-09 21:33   좋아요 2 | URL
ㅎㅎ 영광입니다^^ 소설은 새파랑님이 최고!^^*

겨울호랑이 2022-07-08 23:2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글에서 어쩌면 임진왜란을 전후한 동북아의 국제질서는 ‘사상의 중심과 공간의 중심을 일치시키기 위한 일련의 노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전통적인 중화사상의 명나라, 포르투갈과 교류하며 중화를 넘어선 서구문명과 중화세계의 연결점으로 서려던 일본, 소중화 세계의 조선과 중화로부터 독립된 과거 홍산문명의 후계로서 독립문명을 꿈꾸던 청나라 등. 이들 인식의 대립이 페이퍼의 배경이 아니었을까를 잠시 생각해 봅니다.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

거리의화가 2022-07-09 21:42   좋아요 2 | URL
겨울호랑이님 이런 멋진 댓글을!ㅎㅎ
저자가 임진왜란을 현대의 기점이 된 사건으로 꼽은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전쟁 후 조선은 종번체제에 철저히 이입되는 모습으로 나아갔고 일본은 물론 쇄국 정책을 펼치기는 했지만 포르투갈, 네덜란드를 비롯한 무역을 통해 서양 사상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 있었고요. 명의 지역은 청이 들어섰지만 명이 유지하려던 체계를 청도 이어가려고 했던 걸로 보입니다.
감사합니다^^

희선 2022-07-09 03:1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 님 축하합니다 한국만이 아닌 한중일 세 나라로 역사를 보는 건 더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라와 나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도 하니... 그러고 보니 한중일 역사를 만화로 내는 사람도 있군요 그 책을 보신 분이 쓴 글만 봤지만...


희선

거리의화가 2022-07-09 21:43   좋아요 1 | URL
네. 하나의 시선만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보는 역사를 요즘은 더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희선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07-11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역사에 대해 관심이 많으신 것 같고, 항상 깊이 들어가셔서 많이 배웁니다**

거리의화가 2022-07-11 09:01   좋아요 3 | URL
페넬로페님 관심만 많습니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축하 인사 감사합니다.

scott 2022-07-11 0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이달의 당선 축하 합니다

아베 피살
소식을 들은 주말
한국 중국 일본의 지난 역사들이 스쳐 지나가네요

한반도의 운명 ㅜ.ㅜ

거리의화가 2022-07-11 09:02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피격 소식 듣고 놀랐다가 사망까지 이르다니 심경이 좀 복잡해졌어요. 삼국 간에 더 피튀기는 외교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ㅠㅠ

thkang1001 2022-07-11 06: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세요!

거리의화가 2022-07-11 09:03   좋아요 1 | URL
thkang1001님 감사합니다^^ 즐거운 한주 보내세요~

독서괭 2022-07-11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화가님 당선 축하드려요~^^

거리의화가 2022-07-11 13:11   좋아요 2 | URL
괭님도 당선 경축드립니다^^*

thkang1001 2022-07-11 20: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광장 / 구운몽 최인훈 전집 1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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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예전에 읽었으니 가지고 있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 둔지 알 수가 없어서 결국 새로 구입한 책이다. 이전에는 같은 출판사이지만 최인훈 전집으로 나온 판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판본이었다.

어쨌든 광장은 재독이었다.

1960년대를 대표하는 문학 작품으로 손꼽히는 광장. 1960년 11월에 발표된 소설이다.
출간 당시가 전쟁이 끝난 지 6~7년, 4.19 혁명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황이었다. 남북한은 갈라진 상태에서 전쟁으로 막심한 피해를 겪었고 인간에 대한 증오와 불신이 여전히 남아 있을 때였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는 비동맹 선언, 중립주의 등의 새로운 시도들이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이명준의 선택은 당시 사람들의 상황과 선택지 중 하나를 예상케 한다.

명준이 남한과 북한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면서 중립국을 선택하는 모습은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남한과 북한 사회의 모습들을 친절하게 보여주는 모습에서 명준이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한다.

구운몽은 처음 읽게 되는 것이었다. 
(근데 이전에도 같이 실려 있었을텐데 왜 나는 구운몽을 함께 읽지 않았을까.)
우선 읽기 전 왜 하필 구운몽이 광장과 나란히 한 책에 묶였을까 궁금했다.
어떤 배경도 접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전달받고 감정을 겪자 생각하여 곧바로 읽게 되었다.

완독 후 첫 감정은 혼란과 어지러움이었다.
독고민이 몇 차례의 꿈을 꾸고 환각을 경험하던 것처럼 나도 마치 악몽을 꾸었다 현실로 돌아왔다 다시 비슷한 악몽을 꾸는 과정을 여러 번 겪듯 메스꺼움이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구운몽을 이끌고 가는 인물은 독고민 뿐 아니라 김용길, 시사회 해설자 등 다양하다. 이 때문에 장면의 전환이 빨라서 혼란스러움이 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작가의 의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구운몽은 1962년 4월에 발표된 소설로 5.16 군사 쿠데타의 상황을 그렸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혁명군 방송에서는 혁명이 위기에 빠졌다며 시민군이 일어서기를 반복적으로 종용하고 자유를 부르짖는다.

독고민의 내면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무엇이든 반복되는 내면의 상황들이 독고민의 마지막을 짐작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광장>의 광장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광장이라면 <구운몽>의 광장은 썰렁하고 시멘트 바닥의 느낌처럼 차갑고 얼어 붙어 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인데도 불구하고 광장과 구운몽은 형식이 달라서 새롭게 느껴졌다.
<광장>은 명준이 선택하는 외부 상황에 대한 묘사에 집중하는 모습이라면 <구운몽>은 철저히 인물에 대한 내면에 치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독자들은 한 권의 책에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 두 개를 만날 수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역시 두 소설을 한 권에 담은 더 큰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4.19 이후 독재에서 벗어나 이제 진정한 자유를 찾는다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던 대한민국 국민들은 5.16 으로 그것이 송두리채 무너지게 되니 말이다.


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 P106

인류는 슬프다. 역사가 뒤집어씌우는 핸디캡. 굵직한 사람들은 인민을 들러리로 잠깐 세워주고는 달콤하고 씩씩한 주역을 차지한 계면쩍음을 감추려 한다. 대중은 오래 흥분하지 못한다. 그의 감격은 그때뿐이다. 평생 가는 감정의 지속은 한 사람 몫의 장에서만 이루어진다. 광장에는 플래카드와 구호가 있을 뿐, 피묻은 셔츠와 울부짖는 외침은 없다. 그건 혁명의 광장이 아니었다. - P158

에덴 동산에서의 잘못에서 법왕제에 이르는 기독교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코뮤니즘의 낳음과 자람의 걸음에 신기스럽게 들어맞는 것이었다. 그들은 쌍둥이 그림이었다. - P184

그는 지금, 부채의 사북자리에 서 있다. 삶의 광장은좁아지다 못해 끝내 그의 두 발바닥이 차지하는 넓이가 되고 말았다. 자 이제는? 모르는 나라, 아무도 자기를 알 리 없는 먼 나라로 가서, 전혀 새사람이 되기 위해 이 배를 탔다. 사람은, 모르는사람들 사이에서는, 자기 성격까지도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도 있다고 믿는다. 성격을 골라잡다니! 모든 일이 잘될터이었다. 다만한가지만 없었다면. 그는 두 마리 새들을 방금까지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무덤 속에서 몸을 푼 한 여자의 용기를, 방금 태어난아기를 한 팔로 보듬고 다른 팔로 무덤을 깨뜨리고 하늘 높이 치솟는 여자를, 그리고 마침내 그를 찾아내고야 만 그들의 사랑을. - P208

마음이 추우면 죽는다. - P223

더 많은 탐조등 빛이 도시의 하늘에서 갈팡질팡 엇갈리고 있다. 폭격, 혁명, 누가 혁명을 일으킨 것일까. 스피커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거리고 나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개 한 마리 얼씬 않는 거리는 사방이 괴괴할 뿐, 총소리 한 방 들리지 않는다. - P249

불사조처럼 날아오르는 그대의 양심을. 그대의 사랑을. 양심과 사랑에 거듭나서, 심연의 그 아득한 거리에 승리하고, 저 높은 자유를 향하여 날아오르는 그대의 앞날을 봅니다. 이 도끼를 받으십시오. (총성. 또 총성. 뒤따라 기관총이 이어쏴) 안녕히. 연인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자유 만세. 공화국 만세. - P278

현대는 성공의 시대가 아니라 좌절의 시대며, 건너는 시대가 아니라 가라앉는 때며, 한마디로 난파의 계절이므로, 다음에 현대인의 인격적 상황은 극심한 자기 분열이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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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06-04 2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광장은 몇 년 전에 재독했는데, 같이 실린 구운몽은 아직 못 읽었어요^^; 구운몽 쪽이 더 읽기가 어려울 것 같군요. 화가님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06-04 22:59   좋아요 3 | URL
괭님도 구운몽 못 읽으셨군요ㅎㅎ 구운몽 내면 묘사가 좀 많고 장면 전환이 휙휙이라 어지럽더군요^^ㅎㅎ
월요일까지 쉬니 여유가 더 생긴 것 같아요~ 연휴 잘 보내세요^^

mini74 2022-06-04 2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광장, 밑줄 그으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고딩때 읽었었는데, 반공교육이 익숙했던 세대로 주인공의 선택이나 결말이 꽤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ㅎㅎ 화가님도 연휴 즐겁게 보내시길 *^^*

거리의화가 2022-06-04 23: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에 읽을텐 명준의 선택이 아쉽기도 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는데 다시 읽으니 명준의 마음이 더 이해되는 측면이 많더라구요 가면 갈수록 명준이 혼란스러워하는 걸 보니 말이죠. 그 시기를 직접 겪은 분들의 심정도 돌아보게 됐어요^^ 연휴 잘 보내세요!

바람돌이 2022-06-05 15: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책 가지고 있는데 왜 광장만 읽었을까요? 광장 처음 읽은게 중학교때였던 거 같아요. 순전히 집에 책이 있어서.... 그런데 진짜 그때는 이해가 하나도 안돼는.... 학교에서 하는 반공주의 교육에 찌들어있던 어린 영혼이 뭐가 이해가 되었을까 싶어요. 그 뒤 어른이 되어 다시 읽으면서는 1960년대에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다는데 정말 놀랐었고 감격했던 기억이 나네요.
구운몽은 아마 제목 때문에 안 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해요. 고전 소설 구운몽을 연상시키는데 저는 그 구운몽 싫어했거든요. ㅎㅎ

거리의화가 2022-06-06 21:43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 구운몽 제목 듣자마자 예전 고전 소설 떠올렸거든요~ 진짜 그게 연상되서 꺼려진건가 싶기도 하군요ㅋ 저는 어릴 때 읽지는 않아서 처음 읽을 때도 나름 잘 읽긴 했는데 그때는 명준의 마지막 선택이 강렬해서 다른 건 순삭되었었던 것 같고 이번에 읽으니 주변의 여러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더라구요. 어쨌든 잘 쓴 소설인 것 같긴 합니다!

scott 2022-06-06 0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 쓴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었는데
이후 두번 다시 읽지 않았던!ㅎㅎ

화가님 환각 경험까지 일어 나셨다고 하니
진심으로 명준의 선택에 아쉬움 가득 ㅠ.ㅠ

거리의화가 2022-06-06 21:45   좋아요 2 | URL
오~ 스콧님 독후감으로 상 받은 적이 없어서^^; 역시 능력자 스콧님! 근데 왜 두번 다시 읽지 않으셨어요...ㅋㅋ

환각은 뒤에 읽은 구운몽 때문에 생겼어요. 어찌나 상황이 어지럽던지ㅋㅋㅋ
명준의 선택은 충분히 이해되는 면이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제가 그 시절이었고 명준의 상황이라면? 전 물도 무섭고 겁이 많아서 육지에 내리긴 했을 것 같긴 한데 말이죠ㅋㅋㅋ

희선 2022-06-12 0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제목만 아는 책이네요 구운몽은 옛날 소설도 있는 거 맞군요 그것도 제목만 알지만... 그것과 아주 다른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형식이 비슷할지...


희선

거리의화가 2022-06-12 07:02   좋아요 2 | URL
고전 구운몽 학교 다닐 때 분명 읽었을 것 같은데 내용이 가물거리네요^^;
최인훈의 구운몽 제목은 아마도 주인공이 현실과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의 꿈을 여러 차례 꾸거든요 그래서 이름을 가져다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희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