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을 차려 보니 6월의 반이 훌쩍 지나가고 있다. 몸이 피곤하다는 핑계로 잘 읽지도 못하고 안 읽으니 쓰지도 못하는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 역시 읽기와 쓰기는 일종의 훈련이라 계속 하지 않으면 퇴화되는 것 같다. 그래서 기름칠을 위해 짧게나마 끄적여 본다.




유발-데이비스의 <젠더와 민족>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달 여성주의 책을 읽지 못해 아쉬웠는데 이번 달 책은 꼭 읽고 싶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젠더'와 '민족'이란 키워드는 둘 다 내가 관심을 갖는만큼 눈길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초반부터 인류학, 사회학, 페미니즘 등 다양한 분야의 저자와 인용 목록이 등장한다. 읽다 보면 어지럽기는 한데 예전보다는 나아졌음을 느낀다. 조금이라도 경험해 본 작가와 관련 책의 목록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오늘까지 해서 총 3장까지 읽었다. 지금까지 읽으면서 생각한 바는 제목의 키워드가 글에 전체적으로 잘 녹아들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따로국밥 같다고나 할까.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 문장에 잘 드러나지 않아서 아쉽다. 




지금까지 읽은 부분 중에서는 맥락과 상대주의라는 키워드에 눈길이 갔다.


도나 해러웨이의 '상황적 지식' 등의 개념을 따르고 있는 게이튼스의 주장은 젠더 관계를 분석하는 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아는 언제나 상황적이다"라는 주장의 중요성은 젠더 관계 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 관계의 분석과 관련이 있다. - P30



해러웨이는 날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는 학자 여겨진다. '사이보그 선언문'과 '반려종 선언'을 통해 내가 얻었던 지식적 충격은 지금도 유효하다. '맥락'context는 보편주의와 절대성과 반대 지점에 있는 개념이다. 내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가, 시간과 공간에 따라 지식은 다른 결론을 낳는다. 세계의 시공간은 좁혀졌지만 오히려 자국 보수주의가 득세하는 지금 '맥락'은 더 중요해졌다.


단일한 시각은 이중적인 시각이나 머리가 여럿 달린 괴물의 시각보다 나쁜 환상을 만들어낸다. - 24P 





문화 개념은 조너선 프리드먼이 설명한 보편적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들과 상대주의적 문화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기적 논쟁을 통해 오랫동안 결정되어 왔다. 전자의 관점에 따르면, 다양한 사람과 집단들이 자신의 '발달단계'에 따라 특별한 서열을 지니게 되는 인간 문화 전반이 있다. 이를 거부하고 있는 이들이 주장하는 상대주의적 문화 패러다임에 따르면, 문명마다 상이한 문화를 갖고 있어 이들이 지닌 고유한 측면에서 이해하고 판단해야 할 필요가 있다. - P79~80



문화 개념에도 '보편주의'와 '상대주의'가 있다. 클리퍼드 기어츠는 문화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학자 쪽에 속한다. 불과 몇 달 전 읽은 <문화의 해석>이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솔직히 그 때는 꾸역꾸역 읽었는데 몇 달이 지나서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읽고 안 읽고는 역시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인간이라는 것이 발생학적으로 과연 무엇인가에 관하여 증명할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사실을 몇 가지 발견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민족의 문화적 특수성, 즉 그들의 특이한 점들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개념의 구성-또는 재구성-에 인류학이라는 과학이 기여한 주요한 공헌은 그것들을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준 데에 있을 것이다. - P63

클리퍼드 기어츠는 문화의 개념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고 실례로 자바, 발리, 모로코 등의 원주민 문화를 통해 인간의 본성과 사회 문화적 관계를 드러내 보인다. 직접적인 현지 조사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의 체계와 이론을 정립해나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도 에드워드 사이드처럼 서구 중심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책의 부제가 '정체성의 정치에서 횡단의 정치로'다. 정희진 선생님이 생각이 안날 수가 없었다.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에서 나는 '트랜스', '횡단'이라는 개념을 뚜렷이 자각할 수 있었다. 


융합은 '범학문'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앎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횡단적 사고' '사선으로 보기' '가로지름(crossing)' '조우(遭遇)'가 융합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 P46~47


'위치성'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나의 위치에서 생각한다는 건 성별, 계급, 인종, 지역 등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 속에 내가 '어디에'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만물은 결국 '나'라는 렌즈를 통해 인식되기 때문에 자신의 위치를 모르는 앎은 무의미하거나 대개는 사회악이다. - P59


요즘 특히 나는 맥락과 위치성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곤 한다. 내가 어떤 입장에 있느냐에 따라 사안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다.

한 맥락 안에서 ‘민족‘과 ‘국가‘의 관계는 다른 형식의 민족 집단과 국가의관계와 함께 분석되어야 한다. 이것이 여성들이 이러한 과정에 영향을 주고받는 방식을 이해하는 전제조건이다. - P39
중요한 것은 혈통 개념에 기초한 민족 구성물과 문화에 기초한 민족구성물에서 비롯된 관심들을 혼동하지 않는 것이다. 아울러 둘 모두 국가 시민권에 기초한 민족 구성물과 분석적으로 구별할 필요가 있다. 젠더관계의 다양한 양상은 이러한 민족주의 기획의 모든 차원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들에 대해 적절한 어떤 이론화에는 중요하다. - P50

‘재생산권’은 보다 일반적인 여성 해방 운동의 중요한 일부로 봐야 할 것이다. 이는 결국 보다 일반적인 사회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투쟁의 중요한 일부로 봐야 하며, 이때 사회에서 사람들이 처한 위치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 - P76

여성들은 종종 집단체의, 집단체 경계의 문화적 상징으로, 집단체의 ‘명예’의 잉태/전달자이자 세대를 잇는 집단체 문화 재생산자로 구성된다. 특정 법령과 규제들은 ‘올바른’ 남자와 ‘올바른’ 여자란 누구/무엇이며 집단체 구성원들의 정체성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의하면서 대체로 발전한다. 식민과 종속 과정에서 비롯되는 권한 박탈의 감정들은 식민화된 남성들을 통해 종종 남성성 박탈과/이나 여성화의 과정으로 해석된다. 저항과 해방의 과정에서 남성의-그리고 더러는 보다 중요하게 여성의-역할 (재구성)은 대부분의 이러한 투쟁에서 중심이었다. 그러나 문화들이 동질적이지 않은 만큼 그리고 특정 헤게모니 문화구성물들이 집단체 안에서 지배적인 지도력의 관심과 밀젒한 관계가 있는 만큼, 이러한 헤게모니 구성물들은 종종 이러한 헤게모니 기획을 지향하는 입장을 거스르기도 한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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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4-06-16 2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거리의화가님 말씀처럼 이번달 여성주의 책이랑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나란히 놓고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저도 6월책 막 시작했는데 진도가 영 지지부진하네요. 기름칠을 위해서 자주 자주 올려주시어요^^

거리의화가 2024-06-20 08:02   좋아요 1 | URL
이번 책 어려운 듯하죠? 이런 책은 읽다 말다 하면 더 진도가 안 나가는 것 같아서 이번 주말에 아예 완독해버릴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보조 교재로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요.
힘을 짜내어 더 자주 써보도록 해보겠습니다. 무더위가 찾아왔는데 건강 잘 챙기시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