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수일 감독 <검은 땅의 소녀와>
...내 눈에는 어린 보살처럼 보이는 소녀 영림
'무슨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그는 그토록 많은 말을 지껄여댄 것일까.'
(<검은 사슴> 한강, 61쪽)
세상에는 "무슨 말을 하지 않기 위해 그토록 많은 말을 지껄이는 사람"과
무슨 말을 꼭 하고 싶은데 입을 꾹 다무는 사람들이 있다.
한창 잘 나갈 때는 지나가는 개도 시퍼런 만 원 지폐를 입에 물고 다녔다는
탄광도시 철암.
광부들과 그 가족들도 모두 떠났는데 고집스레 남아 있는 한 민중미술가와의 인터뷰를 위해
그곳을 찾는 잡지사 기자와 그 후배의 여정이 중요한 얼개를 이루는
한강의 장편소설 <검은 사슴>은 저 한 문장으로 마음속에 남았다.
황재형 '식사' 1985 가을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하여 쭈그리고 앉아 먹는 밥
몇 개월 전 소설 <검은 사슴>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화가 황재형을 떠올렸다.
'황지'라는 그림으로 대한민국 화단에 자신을 알린 화가는
1983년 가족과 함께 철암으로 아예 거주지를 옮겼다.
탄광화가로 불리는 그는 몇 년 전 KBS 심야 프로그램 '디지털 미술관'에 나와
'철암'이라는 다소 낯선 지명의 황량한 풍경과 함께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2007년 12월 초부터 2008년 1월 6일까지 가나아트센터에서
16년 만에 그의 전시회가 열렸다는데 아깝게 놓쳤다.
흔히 탄광에서 일하는 걸 갈 데까지 다 갔다고 하여 '막장 인생'이라고 하는데,
화가는 이렇게 말한다.
"닫힌 현실이라는 점에서 서울도 막장이다."
영화 <검은 땅의 소녀와>는 갱 속과 갱 밖 광부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황재형 'In My Heaven' 1997 겨울
...저 골짜기 나부끼는 빨래를 보라. 제목이 특히 인상적인 그림.
황재형 '기다리는 사람들'
...무엇을 기다린다는 것일까.
사택도 곧 헐린다는데, 진폐증으로 해고당한 아버지.
영화 <검은 땅의 소녀와>
'어디로 갈까? 아홉 살 소녀 영림의 시선.
'내 안에 부는 바람'이라든가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 등,
나이브한 제목 때문일까 지나치게 심정적이고 멋을 부린 것 같아서 전수일 감독의 영화에
나는 아예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검은 땅의 소녀와>를 보고 나의 편견과 완고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한마디 대사나 내레이션 없이,
가장 압도적이고 아름다운 라스트 신으로 기억될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