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 비디오 아티스트인 크리스틴의 직업은 노인 도우미 택시 운전사.
어느 날 고객이자 친구인 마이클을 따라 신발가게에 갔다가 손에 붕대를 친친 감고 있는
점원 리차드를 만난다.
그녀의 복사뼈 부근 구두에 쓸린 상처를 보면서 리차드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작은 고통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마세요!"
크리스틴은 사랑에 빠진다.
그런데 리차드 이 남자 이상하다.
며칠 전 아내가 짐을 꾸려 집을 나가기로 한 날, 아내의 콧노래에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건지
문밖으로 달려나가 자기 손에 기름인지 시너를 붓고 불을 붙이는데......
아내가 남겨두고 가는 두 아들에게 마술을 보여주려고 그랬다나?!
살아가다 보면 그렇게 착란을 일으킬 것 같은 날들이 있다.
영화 <판타스틱 소녀백서>의 두 소녀를 떠올리게 하는 이 소녀들.
너무 웃기는 건 이 아이들의 머릿속엔 섹스밖에 없는 걸로 나온다는 거다.
리차드의 동급생인 그녀들은 나름대로 멋을 부린 모습으로 동네를 배회하며
누가 더 남자에게 어필하는지, xxxx를 잘해 칭찬받는지 경쟁을 벌인다.
그런데 신기한 건 발랑 까진 것 같기도 하고 백치같기도 한 이 두 단짝친구가
함께 어울리는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어른들도 깜짝 놀랄만큼 섹스에 통달한 듯이 구는 그녀들, 막연한 욕망일 뿐,
구체적인 욕망이 아니다.
리차드네 이웃으로 피터를 마음에 두고 있는 소녀 실비의 혼수상자.
현실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듯한 등장인물들 속에 유일하게
현실적이며 야무진 꿈을 품고 또 실천하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한 대 패주고 싶었던 리차드.
용기를 내어 신발가게로 찾아온 크리스틴과 주차장까지 걸으며
그 한 블록의 거리를 인생에 빗대어 대화를 잘 풀어나가는가 싶더니.
얼굴빛을 싹 바꿔 크리스틴의 눈에 눈물이 핑 돌게 만든다.
인생에는 그렇게 무안한 순간들이 있는 법이지.
하지만 불쌍한 놈은 리차드! 크리스틴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러 간 화랑의 복도에서 운좋게 큐레이터와 마주치는데
비디오테이프를 직접 주자 우편으로 보내달라고 한다. 분실위험이 있다며......
아마도 이 장면 때문에 '디지털화된 시대의 인간소외와 파편화된 어쩌고'하는
평들이 쏟아져 나왔나 보다.
밉쌀스러워 보이던 이 큐레이터, 은근히 귀엽다.
컴퓨터로 채팅을 나누다 '환상적인 섹스'를 꿈꾸며 약속장소로 나오는데
그 상대가 리차드의 일곱 살 아들이다.
내가 제일 동일시를 한 인물이 바로 이 여자!
어느 날 엄마는 다른 남자를 만나 떠나고 의붓아빠와 살게 된 형제.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세상은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부실하기 짝이 없는, 실낱같은 관계로 보이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 컴퓨터 자판의 부호만으로 표현했다.
그런데 때로는 오려두기와 이어붙이기 기능만으로도 대화가 가능하다.
일곱 살 소년이 채팅상대인 40대의 여인과 공원 벤치에서 만나는 장면처럼......
조금만 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허심탄회하다면, 이 세상에서 친구를 사귀고 연인을 얻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타인의 SOS 신호를 못 본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