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베갯잇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무섭고 슬픈 꿈은 처음이었다.
살다보면,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장면이 하나 추가되는구나!'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는데, 오늘 새벽  또 한 장의 사진이 내 앨범에 추가되었다.
꿈속에서  딸아이가 한 말과, 그 표정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잠에서 깨어나 바로  옆에 누워 쌕쌕 가볍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문득 어떤 깨달음이 왔다.
내게는  아이에 대한 죄의식이 무지 많다는 것.
그러면서도 앞으로 좋은 엄마 노릇할 자신이 없다는 것. 
다시 눈물이 흘렀다.
오랜만에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드렸다.
아이가 건강하고 밝게 자라게 하시고 우리 부부가 아이의 정말  좋은 친구이자
인생의 멋진 선배가 될 수 있도록 이끌어 달라고.

오늘은 아이 학교의 급식과 청소를 맡은 날이다.
아는 엄마 둘이 짝이라 전화를 걸어 사정이 생겼다고 말하고 영화 <망종>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게 어젯밤 잠들기 전 나의 원대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오늘 새벽 그런 꿈을 꾼 것이다.

지난주에 학급회의에 처음 참석하여 담임선생님 얼굴도 뵙고, 급식 당번도 맡고,
학급비도 자진해서 냈다.
회의에 참석한 엄마들이 열대여섯 명.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고 바쁘다며 아무 일도 맡지 않는 엄마들이  알지도 못하면서
뒤에서 이상한 이야기들을 쑥덕인다고 한다.
나는 아이를 가르치는 담임 선생님이 어느 분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리고 급식과 청소 당번을 정할 때 내가 좀 나이가 많은 것을 내세워
두 번 중에 한 번 정도만 맡아야겠다 야무지게 생각하고 갔었다.
그런데 그게 내 마음대로 되어야 말이지.

급식 도우미는 처음이었다.
소고기국과 코다리찜, 미나리무침과 깍두기, 후식으로는 딸기 세 알씩.
나는 여학생들의 식판엔  굵고 더 싱싱한 딸기들을 골라 담아 주었다.
딸기가 싫다고 한 알만 먹겠다는 녀석에겐 눈을 부라려가며 한 알 더.

아침에 묶은 머리가 풀어지고 삐어져 나와 용의가 단정치 못한 딸아이가
어느새 다가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내 옆구리를 잡아당겼다. 
와락.

조금 남은 밥과 반찬으로 서서 엄마들과 점심을 먹었다. 꿀맛이었다.
그리고 교실을 깨끗이 청소하고......

내가 오래도록 결혼생활이나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을 꿈도 꾸지 않았던 것 중 제일 큰 이유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당연하다는 듯이 지속적으로 방해받는 상황이었다.
바로 오늘같이 너무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급식당번을 하러 학교에 가야 하는 그런......

체념이나 의무로서가 아니라 우러나는 마음으로 사랑하면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다.
그걸 이제서야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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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6-03-28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꿈이셨길래.........
그게 그렇더라구요.. 내가 해야할 일이다~ 라고 생각하고 하면 힘든일도 훨씬 쉬워진다는..^^ (저는 시댁일에 그런 마음가짐이 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mong 2006-03-2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가 싫어요 한 알만 주세요
(이러면서 더 받으려는 못된 몽) =3=3=3

물만두 2006-03-28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모든 맘들을 존경합니다!

chika 2006-03-28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딸기 엄청 좋아해요. 근데 딸기보다 더 맛있는 글이예요 ^^

paviana 2006-03-28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딸기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군요. 참 우리집에도 과일이라곤 한알도 안먹는 녀석이 하나 있군요,, 저도 딸기 한알만 주세요.ㅎㅎ
포도도 한알만 주시구요.ㅎㅎ
저도 급식당번 한번 해보고 싶어요.ㅠ.ㅠ

비로그인 2006-03-28 14: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구, 로드무비님. 많이 놀라셨겠어요. 지금은 좀 나아지셨을까요?
그나저나 신문에서 망종 포스터를 보고 영화 개봉하면 참 좋아하시겠다, 문득 그런 생각 들었는데 급식 때문에..글치만 주하는 기분이 째졌겠어요. 에이구, 전 어렸을 적에 어수룩한 옷차림의 가난한 아버지나 엄마가 학교를 찾아오시면 왜 그리 창피하고 미안하던지. 대, 대부분 좋지 않은 일로 오셨거덩요. T^T
그래요, 즐거운 맘이라지만 오늘 고생하셨어요. 날도 추운데..

치니 2006-03-28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급식을 엄마들이 교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 아이 사랑과는 별개로 꽤 부당하고 억지스러운 제도라고 생각해왔는데...
보고 싶은 영화와 비교해서 뿐 아니라, 때로는 직장에서 일반적으로 상상 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수위의 피해를 감수하면서 택시를 타고 학교로 달려가야만 하는 경우도 있고.
내 아이만 엄마가 안오고 다른 사람이 오면 아이가 서운하겠지 하는 마음,
자꾸 엄마가 얼굴을 안보여서 선생님이 아이에게도 소홀하면 어쩌지 하는 마음,
게다가 직장 가진 엄마라고 애 못챙긴다고 수군거리는 것도 싫어지는 마음 등등을 담보로 학교가 그리고 정부가 자기 할 몫은 안하고 횡포라고...억울해했었어요.
게다가, 아이들 급식 후 청소까지 다 하고 늦게서야 겨우 얻어먹는 밥의 처량함이라니. 우...되돌리기도 싫은데.
그래도 로드무비님은 참 고운 맘으로 임하시네요 ^-^

반딧불,, 2006-03-28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구..힘내세요.
저도 매번 그렇습니다. 참 나쁜 엄마 만나 고생하는구나..

아영엄마 2006-03-28 15: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영이네 반은 2학년 때부터 자체(?) 급식을 하는군요. 아영이는 2학년 때까지 급식을 했는데..(아, 그러고 보니 아영이는 1학년때 급식을 안하고 2학년 때 처음으로 했군요..^^;) 2학년이라도 많이 어설플텐데도 선생님께서 아이들과 함께 급식도우미를 하시나 봐요. 저는 4학년에 사서도우미 한다고 2학년 어머니 모임에는 안 들었어요. 헷~

로드무비 2006-03-2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너무 무서웠어요.
출근 전이라 남편에게도 거시기해서 이야기 못할 정도로.
뚱뚱하고 허름하고 늙은 엄마이지만 주하는 엄마가 학교에 오면
좋아 죽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래줘야 하는데.ㅎㅎ
그런데 좋지 못한 일로 학교에 주로 오셨다면 무슨 사정이었을까나?
지금은 기분이 상쾌해요.^^

파비아나님, 급식당번 당당하게 안해도 되는
직장인 엄마들이 조금 부럽습디다.
서로의 애환이 교차하는 거겠지요.ㅎㅎ
딸기, 포도 한 소쿠리씩 드릴 테니 잘 받으세요.^^

치카님, 어제오늘 어쩜 그리 이뿌시다요?ㅎㅎ

물만두님, 심히 찔리는군요.^^

mong님, 한 소쿠리 가득 드릴게요. 꿀 발라서...^^

날개님, 맞아요. 정말 현명한 생각이십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은 기분좋게 받아들이자.
그 말씀이시죠?^^

hnine 2006-03-28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웅~ 공감, 공감이요!! 특히 마지막 두줄...

Mephistopheles 2006-03-28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꿈이셨길래..꿈은 반대라고 하잖아요..^^
좋은 일 있으실 껍니다...

BRINY 2006-03-28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플레져 2006-03-28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을 꾸고 난 후 기도를 드리는 로드무비님 모습에 뭉클했어요.
급식 도우미하는 로드무비님앞에 식판 들고 나타나고 싶어요.
갈래 머리만 하면 될 것 같은데...헤헤~ =3=3

마태우스 2006-03-28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써, 썰렁한 농담 하나만 할께요... 베개가 젖은 게 혹시 침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추천을 늘 휩쓸어가는 님에게 질투를 느껴서 딴지건 겁니다

로드무비 2006-03-28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플레져님, 저도 제 모습에 뭉클했어요.=3=3
갈래머리 하고 빨간색 재킷 입고 화요일에 ..초등학교로 오실래요?^^

브리니님, 평범한 진리일수록 너무 늦게 발견하는 것 같아요.^^

메피스토님, 꿈 내용은 좀 거시기했고요.
제 죄책감과 뿌리 깊은 관련이 있는 꿈이었습니다.
언감생심 좋은 일은 안 바라고요,
어떤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계기였던 것 같아 고맙기만 합니다.

hnine님, 공감해 주셔서 다행이고 고맙고.^^

아영엄마님, 저들 손으로 하라면 또 할지도 모르지만
제가 오늘 본 바에 의하면 당분간은 엄마들이 좀 도와주어야 할 것 같아요.
2학년부터 시작한 것이라 아무래도.
사서도우미 좋을 것 같은데요?^^

반딧불님, 전 평소 아이에게 니가 얼마나 행운아인가를 주지시킵니다.
좋은 부모 만났다고.
그런데 마음속은 그게 아닌가봐요.
반딧불님은 뭐 그리 자책하실 필요가 없을 것 같은데......

치니님, 안 보면 모르겠는데 가서 보면 또 할 일이 있어요.
담임선생님도 나이 많이 드신 남자분이고 엄마들이 조금은 당분간
도와주어야 할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요즘은 강제적으로 시키는 것 같진 않아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참석 못하는 직장 맘들을 성토하는 분위기도 전혀 아니고.
단, 엄마들이 극성이어서가 아니라 최소한의 도움으로 필요성을 인식하고
학교에 나가 일을 하는 경우이더라고요.
제가 본 바로는.^^

로드무비 2006-03-28 1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 마태우스님, 제, 제가 침을 많이 흘린다는 건 우찌 아시고!=3=3=3
제 리뷰, 페이퍼 추천수 얼마 안되는데요.
언제부턴지 반으로 줄었답니다.(도망=3)

urblue 2006-03-28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망종 보고 싶어요. 그치만 뭔가 할 일이 있으면 영화 포기하고 기꺼이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06-03-28 16: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3-28 16: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드무비 2006-03-2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흐흐흐님, 깜짝이야!
너무 반가워요.
안 그래도 아쉬웠는데......
고민도 방황도 치열하게 혹독하게 하시는 님이
앞으로 좋은 열매를 거두실 겁니다.
전 뭐 젊은날의 어리벙벙함이야 이루 말할 수가 없었고요.
단 한 가지, 어느 잘난 사람 앞에서도 비굴해 본 적이 없어요.
그것 하나가 자부심이라면 자부심.
가끔 들러 메모 남겨주시면 저도 기쁘지요.
긴 편지 감사하게 잘 읽었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요.^^

앞치마 세트님, 아니 그렇게 안 어울리는 것을!=3=3
접수했습니다.^^

블루님, 그러니까요, 좋아하는 것 대신 어떤 일을 하는 데서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니.
헤헤 그래도 다음주엔 핑계 대서 빠지려고요.=3

그로밋 2006-03-28 2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뚱뚱하고 허름하고 늙은 엄마이지만 주하는 엄마가 학교에 오면 좋아 죽습니다.' <-- 울 아들도 이래줘야 하는데... 늙다리 엄마라고 싫어해도 전 꼬박꼬박 갈려구요. 언니대신 몇 번 갔었는데, 나름 재미있더라구요^^ '서서 먹는 급식'때문은 절대로 아니랍니다. ㅋㅋ

하루(春) 2006-03-28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이네요. 이런 상투적인 말밖엔 못하지만, 그 이면엔 흐뭇한 미소도 숨어 있답니다. ^^

조선인 2006-03-2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급식 이야기가 나오면 벌써부터 찔려요. 어쩌죠. 히잉.

blowup 2006-03-29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내일이나 모레쯤 망종 보러 가려구요. 로드무비 님은 언제요? 우연히라도 스치게요. ^^

로드무비 2006-03-2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친구들이 집에 놀러와 못 나갔고요.
내일이나 모레나 글피.
나무님, 우리 마주치면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님께 윙크하는 여인이 있으면 저예요.^^

조선인님, 찔릴 필요 전혀 없습니다.
학급문고에 책을 몇 권 선물한다든지, 나름대로 참여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거든요.^^

하루님, 저도 덩달아 흐뭇한 미소를 지어보는 댓글입니다.^^

그로밋님, 저도 님처럼 세상에 맛없는 게 없으니 그것도 문제죠?
(물귀신 작전)
사실은 가리는 것 있어요. 호탕해 보이고 싶어서.=3=3=3

치유 2006-03-31 08: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기전의 갈등..하지만 가선 너무 잘 왔구나...생각하며 다녔지요..지금은 급식당번 같은 건 졸업했지만...그래도 좋은 엄마되려고 애쓰며 살잖아요..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