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그 바쁜 중에 옛날 수첩들을 잠시 뒤적이며 놀았다. 나의 페이퍼들 중 '오래 된 수첩'이 참 좋다고 말씀을 따로 남겨주는 분들이 계셔서 말 그대로 나의 오래 된 수첩 10여 권을 눈에 잘 띄는 통에 담아 언제든 꺼내어 뒤적여볼 수 있게 책상 옆 발치에 두었다.
그리하여 모두 아시다시피 엊그제 김화영 선생 등을 내가 직접 찍은 사진과 내 글씨로 기록된 채플린의 일절을 떠억하니 찍어 '오래 된 수첩' 페이퍼로 올렸다. 그리고 손에 잡은 김에 또 눈에 띄는 수첩 아무거나를 펼쳤더니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난밤 꿈. 나는 웨딩드레스 차림이 아니라 짙은 감색 재킷을 입고 누군가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상대 남성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나는 결혼식을 본격적인 예식장에서 하지 않고 세검정에 있는 고급스런 식당 홀을 하나 빌려 조촐하게 치렀다. 드레스는 끝까지 입지 않겠다고 고집 부려 인사동의 생활한복 가게에 가서 짙은 감색 저고리와 팥죽색도 아니고 보라색도 아닌 묘한 빛깔의 치마를 골라 입었다. 주례사도 생략하고 수수한 생활한복을 입고 우리 부부는 씩씩하게 하객들 사이로 입장했는데... 그러고보니 피아노연주자도 구해놓지 않아 가족석에 한복을 곱게 떨쳐입고 앉아있던 내 여동생이 후다닥 무대로 뛰어올라가 결혼행진곡을 연주했다.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웃고 서있는 늙은 신랑신부를 있는대로 째려보며......
신부화장은 그날 아침 함께 사는 내 사촌여동생에게 맡겼다. 내 눈엔 그 아이가 화장을 무지 잘하는 걸로 보여서......그 며칠 전엔 머리 파마를 꼭 했어야 했는데 종로에서 개봉한 프랑스 영화 <크리스마스엔 눈이 올까요>를 보고 필이 꽂혀 신랑과 그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셔버리는 바람에 아침에 동네 미장원에서 삐죽삐죽한 커트머리를 드라이해주는 선에서 끝냈다.
웨딩드레스를 입지 않은 것 등은 솔직히 말해 무슨 뚜렷한 가치관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귀찮은 일, 어색한 일을 죽어도 하지 않으려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렇게 얼렁뚱땅 순 내식대로 결혼식을 마치고 로비로 나오니 한 노신사가 눈물을 글썽이며 참 아름다운 결혼식이었다고 칭찬해 주었다. 학처럼 고고한 분위기의 어른이었다. 신랑에게 누구냐고 물으니 자하문 찌그러진 단칸방을 그에게 세준 주인이었다. 아름다운 결혼식이라고 눈물울 글썽이며 내 손목을 잡던 그 노신사는 그 단칸방의 알량한 전세금 중 200만 원을 결국 떼먹었다.
어라,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졌네! 다소 우스꽝스러웠던 내 결혼식 이야기를 떠들 생각은 없었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려고 했던 이야기는 결혼 5년 전인가 6년 전 꿈 속에서 나는 내가 짙은 감색 저고리를 입고 결혼하는 장면을 미리 보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꿈이 그대로 맞아떨어졌다는 걸 엊그제 오래 된 수첩 때문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무시무시한 꿈의 적중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