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끌 같은 나
빅토리아 토카레바 지음, 승주연 옮김 / 잔(도서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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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여도 어떤 종류의 인간들은 꾸준히 진화한다. 그들에게 퇴보란 없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자신의 삶을 고수하고 지키려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훌륭할지도 모르지만 곁에 있는 이들에게는 엄청난 고통을 안겨준다. 대체적으로 무능력한 남자들이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시작하고 말았다. 러시아 작가 빅토리아 토카레바의 단편집 『티끌 같은 나』에서 만난 게 그들이 아닌데도 말이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를 포함 5편의 단편에서 내가 집중한 건 그런 남자들이 아닌 여자들, 반짝이고 눈부신 티끌 같은 이들이다.


반짝이고 눈부시면 뭐 하냐고, 티끌인데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나 티끌이 아니던가. 이 광대한 우주에서 반짝이는 티끌이 된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가. 아무튼 이 소설집, 너무 재밌다. 여성 작가의 소설이라 그런가, 적재적소에서 시원하고 통쾌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다. 그러나 곧 소설 속 여성에게 빠져들고 만다. 표제작 「티끌 같은 나」의 주인공 ‘안젤라’는 한적한 시골 카자흐인 마을 마르트노프카에서 태어났다. 게으름의 표본인 아버지와 한때 교사였지만 알코올 중독으로 현재는 소를 모는 어머니가 있다. 도시와는 동떨어진 삶, 그 안에서 안젤라는 자신의 꿈을 꾼다.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는 안젤라는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말 그대로 무작정 모스크바로 온다.


모스크바에서 안젤라가 마주한 현실은 막막함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안젤라는 절대 굴하지 않고 가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찾아 나선다. 그러던 중 운명 같은 ‘키라 세르게예브나’를 만난다. 그녀는 영화 판에서 일하던 사람으로 많은 인맥을 지녔다. 키라 세르게예브나 집에서 살림을 도와주며 안젤라는 기회를 엿본다. 그 기회에 필수조건은 돈이었고 안젤라는 돈을 모으기 위해 가리지 않고 일을 한다. 안젤라는 70~80년대 시골에서 도시로 상경한 수많은 우리의 안젤라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그들은 가족을 위해 희생한 K- 장녀지만 안젤라는 오로지 가수가 되기 위해 모스크바에 왔으니까.


젊고 예쁜 안젤라는 가사도우미를 하던 집의 주인 남자 ‘니콜라이’의 구애를 허락한다. 이게 중요하다. 안젤라가 유혹한 게 아니라 니콜라이의 적극적 구애. 언뜻 이제 안젤라는 모든 걸 다 가졌으니 그깟 꿈은 버리고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선택할 거려 짐작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안젤라는 특별하다. 돈과 명예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니콜라이와 살면서 주체적으로 행동한다. 아이가 생겼을 때 니콜라이는 안젤라가 당연히 아이를 선택할 거라 자신하지만 아니다. 이 소설집에서 단연 빛나는 문장은 바로 이 두 문장이다. 아, 나는 안젤라를 추앙할 것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먼저 나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해요.” (「티끌 같은 나」, 104쪽)

“나라는 나라이고 나는 나예요. 나는 내 집에서 기뻐하든 슬퍼하든 하고 싶어요.” (「티끌 같은 나」, 105쪽)


안젤라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해 나아간다. 그 길은 탄탄대로가 아니다. 가시밭길로 시련의 길이다. 때로 누군가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때로 좌절하지만 안젤라는 굴하지 않는다. 결코 비련의 여주인공이나 운명에 발목 잡히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남들이 뭐라든 내 뜻대로 나의 꿈을 향해 살아가는 안젤라야 말로 눈부신 티끌이다.


「티끌 같은 나」의 안젤라와 다르게 「이유」의 주인공 ‘마리나’는 결혼한 여성이다. 그러나 곧 혼자가 된다. 남편이 아내인 마리나와 자식을 버리고 떠났기 때문이다. 서로가 사랑해서 가정을 이뤘지만 삶이 행복하지가 않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양육에 버거운 마리나는 남편의 욕구를 거절하자 남편은 다른 여성에게로 떠났다. 아들과 딸을 키워야 하는 마리나는 최선을 다해 살아간다. 그녀에게 다시 ‘루스탐’이란 사랑이 찾아오지만 온전하게 자신의 몫이 아니다. 자신의 전부였단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들과 딸은 마리나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았고 각자 결혼을 해서도 마리나의 짐이 될 뿐이다.


여성으로 어머니로의 삶을 보면 마리아의 생은 안타까움 그 자체다. 하지만 삶이란 쉽게 포기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티끌 같은 존재라 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을 알아봐 주는 이가 있다면 삶은 다시 빛을 발한다. 마리나에게는 루스탐과 운명처럼 만난 ‘안나’가 있다. 마리아가 모든 걸 내려놓으려 할 때 만난 안나, 둘은 서로를 돕는다. 생에 있어 그런 존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마리나와 루스탐의 관계는 사랑 그 이상의 우정으로 지속된다.


루스탐은 마리나를 쳐다보았다. 그녀에게서 과거에 있던 무언가가 사라졌다. 다름 아닌 젊음의 눈부심이었다. 대신 희미하나마 슬라브인 특유의 선이나 파란 눈은 여전했다. 루스탐은 서서히 그녀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삶은 그들을 찌그러뜨리는가 하면 포옹도 하고 버스에서 만난 집시들처럼 소중한 것들을 훔쳐 달아났다. 하지만 그들은 살아 있고 아픈 데도 없으며 몸 안에는 마트료시카처럼 옛 모습이 숨겨져 있었다. ( 「이유」, 317쪽)


‘빅토리아 토카레바’는 삶에 대한 뛰어난 통찰력을 지닌 작가인 것 같다. 삶이라는 게 단순히 기쁘거나 슬픈 게 아니라는 걸 아는 것이다. 아, 누군가 말할지도 모른다. 그건 다 아는 거 아니냐고. 하지만 소설 속 안젤라나, 마리나뿐만 아니라 다른 단편 속 인물들을 통해 그녀가 전하는 건 삶을 향해 달려드는 것들에 대해 절대로 지지 말라는 말 같다. 때로는 욕망이자 좌절, 때로는 운명 같은 사랑, 때로는 고독과 절망이다. 원하는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삶이다. 그래서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티끌 같은 나여도 괜찮다고 다독인다.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꺼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런 삶에 둘러싸였음을 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는 나대로 살 거야라고 소리치는 안젤라처럼 당돌하면서도 당당하고 유쾌하게 삶을 살고 싶다. 뻔하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우리네 생을 보여주는 『티끌 같은 나』는 괜찮은 소설집이다. 그러니 티끌 같은 존재여, 우리 힘들더라도 앞으로 뭐가 펼쳐질지 모르는 인생을 기대해 보는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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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24 1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진짜 이 책 너무 좋죠 ㅋㅋㅋ (저 이걸로 유튜브도 만들었어요 ㅋㅋㅋ 속닥속닥 ㅋㅋㅋ) 우리는 명랑한 티끌 ^^ 티끌 처럼 살아가요~!

잠자냥 2022-06-24 15:18   좋아요 3 | URL
아 이 사람 여기서 자기 유튜브 광고하고 있네... 점점 다부장 닮아가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2-06-27 17:49   좋아요 1 | URL
명랑 발랄한 티끌이 되어 이 습한 날들을 헤쳐나가고 싶습니다 ㅎ

mini74 2022-06-24 16: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젤라 저도 추앙합니다 자목련님 ㅎㅎㅎ

자목련 2022-06-27 17:48   좋아요 1 | URL
소설이 아닌 현실에서 만나면 어떨까, 궁금하기도 한 안젤라입니다^^
 
아노말리
에르베 르 텔리에 지음, 이세진 옮김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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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달라지지 않았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존재는 여전히 나다. 내면의 나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깊은 불안과 절망 같은 게 쌓였을지도 모른다. 그걸 눈치채는 이는 없다. 오직 나만 알 수 있는 변화다. 그런 나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면 어떨까? 그것도 온전히 나와 같은 나, 쌍둥이라 할 수 있는 나, 도플갱어가 아니라 진짜 나라면. 우주 속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는 나를 믿을 수 있을까. 분신이 있으면 좋겠다 농담처럼 말하는 일이 진짜 일어났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20 공쿠르상 수상작인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 는 어쩌면 나도 모르는 어딘가 다른 내가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상상으로 이끄는 소설이다. 2021년 3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는 난기류를 만난다. 탑승객들은 다양하다. 탑승 승객들은 그 순간 죽음의 공포를 경험했다. 그 경험이 누군가는 삶의 소중함으로 누군가의 허무로 남지만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한다. 3개월 뒤 신기한 일이 발생한다. 2021년 6월 파리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또 난기류를 만난다. 놀라운 건 3개월 전 탑승했던 승객 전부를 태운 비행기라는 사실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비행기를 공군기지에 착륙시킨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이 사건을 해결할 이들을 모아 대책을 강구한다. 과학자와 종교인이 우선이다.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어디까지나 가설일 뿐,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가설 중에 하나의 실체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우리를 조종하는 누군가의 분신이거나 복사물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일종의 시뮬레이션처럼 말이다. 종교적인 관점은 더욱 치열하다. 신이 만든 유일한 피조물과 악마라는 격정적 토론. 철통같은 보안을 유지하며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3월의 승객과 6월의 승객을 만나게 하는 일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믿는 사람은 없을 터. 직접 대면해야만 가능할 것이니까.


3월 비행기의 승객은 다양하다. 동일한 승무원과 암에 걸린 기장, 철저하게 신분을 위장하는 청부 살인업자, 소설을 쓰고 번역을 하는 작가, 유명 건축가와 그가 사랑하는 연인, 동성애자란 사실을 숨기고 활동하는 뮤지션, 뛰어난 능력의 변호사, 베티란 이름의 개구리를 키우는 소녀까지 FBI 요원의 인도에 따라 모인다. 지난 3월의 비행기에 탄 시간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6월 현재의 일상과 앞으로 맞닥뜨릴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상담한다. 3월의 승객 중 작가는 없다. 그는 소설 「아노말리」 를 남기고 자살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문장은 에르베 르 텔리에의 『아노말리』의 중심축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나는 알지 못했다. 내가 좀 더 치열하게 살았다면 세상을 어느 해안으로 데려갔을지도 알지 못했다. 내가 사라진들 세상의 흐름이 뭐가 바뀔까. 이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자갈들의 길을, 아무 데로도 데려가 주지 않는 길을 걷는다. 나는 삶고 죽음이 구분되지 않고 산 자의 가면이 죽은 자의 얼굴에서 안식을 찾는 하나의 점이 되어 간다. 오늘 아침, 청명한 날씨 속에서 나는 나를 본다. 나는 여느 사람과 다르지 않다. 나는 내 존재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불멸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헛되이, 마침내 나는 순간을 미루지 않을 마지막 문장을 쓴다. (38~39쪽)


그러니까 이 소설은 존재에 대한 이야기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존재하는 나는 누구인가. 3월의 존재와 6월의 존재가 서로를 알아보며 대화를 나누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부분이 가장 흥미진진하며 의미 있게 다가온다. 나와 나의 존재로만 끝난다면 그나마 괜찮다. 연인과 가족이 있는 경우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고 혼란스럽다. 한 명의 연인과 두 명의 나는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노년의 건축가는 다른 건축가에게 젊은 연인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알려주고 동성애자 뮤지션은 어린 시절 슬픔을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존재를 쌍둥이로 만들어 활동한다. 암에 걸린 기장의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두 번 경험하고 베스트셀러 작가는 방송에 출현해 자신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 토론한다.


현재 전 지구가 우리의 환상을 완전히 뒤집는 새로운 진리에 직면했습니다. 의심할 수 없는 표지가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그런데 이걸 어쩌나요. 생각은 시간을 들여야 하는걸요. 아이러니한 것은,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우리 이웃, 우리 지구에 대한 의무를 더욱 강화한다는 겁니다. 특히 집단으로서의 의무를요. (…) 시뮬레이션은 인류라는 종 전체의 반응을 기다립니다. 궁극의 구원자는 없을 겁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구해야 해요. (439~440쪽)


그 과정에서 어떤 진실은 왜곡되고 어떤 비밀은 추가되고 어떤 비밀은 밝혀진다. 소설에서 놀라운 건 아이들이 상황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거리낌 없이 똑같은 나를 반기고 똑같은 어른이지만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이들의 고유한 유연성, 우리가 놓치는 건 이런 것일까.


소설은 묻는다. 나에게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하겠나고. 이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겨야 할까, 저쪽의 내가 ‘분신’이라고 여길까. 다른 공간에서 다른 삶을 살기를 선택하는 게 가장 현명할까. 비단 소설 속 이야기라 치부할 수 없기에 놀랍고 감탄한다. 끊임없는 아노말리(이상, 변칙, 모순)의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완벽에 가까운 성형수술을 떠나 유전자 복제가 가능하고 우주의 탐험이 가까워진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 나는 누구인가. 자아를 찾아가는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하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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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6-23 0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내용 속에서도 동명의 책 <아노말리>가 등장하는 거군요.
이 책 소개를 처음 들었을 때, 소재가 괜찮을 것 같았어요.
잘읽었습니다. 자목련님, 요즘 날씨가 덥고 습도가 높은 시기예요.
건강 조심하시고, 좋은 하루 보내세요.^^

자목련 2022-06-24 11:02   좋아요 3 | URL
네, 소설 속 작가의 유작 제목이 <아노말리>입니다.
흥미진진한 소설이었어요. 서니데이 님도 시원한 하루 이어가세요^^

mini74 2022-07-08 17: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시원한 날들 이어가세요^^

그레이스 2022-07-08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축하드려요 🎉

자목련 2022-07-11 17:59   좋아요 0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해요. 산뜻한 여름 보내세요^^

새파랑 2022-07-08 18: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평범하지 않은 자목련님 당선 축하드려요~!!!

자목련 2022-07-11 18:00   좋아요 1 | URL
새파팡 님, 감사합니다. 저도 축하드리고요^^
 
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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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라 그럴까. 완결이 아니라 미완의 느낌. 최은영의 결은 여전한데 뭔가 좀 빠진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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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아도 마음산책 짧은 소설
최은영 지음, 김세희 그림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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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나야 꺼내볼 수 있다. 끝내 꺼내보지 못하는 일들도 있다. 대개 아픔이거나 상처의 일들과 관계가 그러하다. 당시에는 말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했던 상황이나 묵혀두었던 마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기도 한다. 늦더라도 터져 나오는 게 낫다는 생각이다. 최은영의 짧은 단편 『애쓰지 않아도』에서도 그런 일과 마음들이 등장한다. 14편의 짧은 이야기는 어느 시절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과 동시에 불가해한 마음에 대한 토로이자 좁힐 수 없는 한계에 대한 인정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은 가족과 친구라 할지라도 모두 타인이다. 그들과는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수직적 관계가 된다. 어른과 아이라서, 친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더 커서, 나보다 아는 게 더 많아서, 도움을 받아야 해서. 이유는 언제나 차고 넘치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애써서 상대의 감정을 읽으려는 태도는 얼마나 조급하고 피곤한가. 그건 상대가 보여 주지 않는다고 여기기에 상처가 된다. 표제작 「애쓰지 않아도」 속 ‘나’와 ‘유나’의 관계가 그러하다. 십 대 시절 친구라는 존재는 절실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친구와 무리가 된다는 건 일종의 특권이다. 유나에게 털어놓은 비밀을 모두가 아는 사실이 되었다는 걸 알았을 때 ‘나’가 느꼈을 배신감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별일 아니라는 게 된다.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던 시절이고 성숙하지 못했던 나이였으니까. 돌이켜보면 비밀이라고 할 것도 아닌 일상이 아니던가. 그저 이해의 폭이 좁았을 뿐이다. 특히 친구와의 관계에서 우리가 범하는 실수이자 오해이며 안타까운 마음이다.


그럼에도 한 번쯤은 꼬집어 무척 힘들고 서운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여전히 어려운 건 왜일까. 부모에게는 좋기만 했던 시절의 기억이 정작 ‘나’에게는 아니었던 「호시절」속의 나처럼 말이다.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도움을 주던 이웃이 다른 이웃에게 보였던 냉대의 시선이 어린 ‘나’에게는 이상했다. 나중에 다른 나라에서 같은 대우를 받고서야 알게 된다.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다른 피부색이라는 이유로 피하고 혐오하는 삶의 방식은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최은영은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짧은 이야기를 통해 다름을 그대로 인정하는 받아들이는 마음에 대해 말한다. 거기다 잘못된 건 고쳐야 한다는 부드럽고도 강한 의지를 더하는 게 최은영이다. 성당에 다녔던 ‘해주’의 기억으로 시작하는 「저녁 산책」에서 자기주장이 확실한 딸 ‘유리’를 통해 엄마 ‘해주’가 느끼는 감정은 아마도 최은영이 전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성당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진행할 때 보조 역할인 ‘복사’에 대해서 들었지만 ‘대복사’를 여자는 할 수 없다는 걸 몰랐다. ‘유리’가 복사를 하며 기대했던 대복사를 하지 못하게 된 이유를 유리는 이해할 수 없었고 다툼이 일어난다. 신부가 되고 싶었던 유리가 여자는 신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왜 신부는 모두 남자일까. 소설이 아니었다면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을 일이다. 신이 과연 그것을 바랐을까.


짧은 호흡의 글이지만 긴 여운을 남긴다. 특히 좋았던 이런 문장들이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속에서 아버지의 죽음에도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송문을 향한 유리의 마음. 굳이 이해시키려고 강요하지 않는 마음, 끝내 모르고 배울 수 없는 것들이 우리 삶에는 너무도 많으니까.


송문은 유리의 방식이 좋았다. 유리는 송문이 살아온 방식을 모르며,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고 고백한 것이었지만 그 목록의 제목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쩌면 송문 또한 송문으로 살아온 송문의 마음을 영영 배울 수 없을지도 몰랐다. 자기 마음을 배울 수 없고, 그렇기에 제대로 알 수 없는 채로 살아간다. 송문은 그 사실을 알았다. (「우리가 배울 수 없는 것들」, 95쪽)


안다고 해서 이해한다고 해서 진짜 아는 것도 아니고 이해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우리는 알고 있지 않나. 척하고 싶은 마음은 필요하지 않다는 걸 말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일,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렇다고 해서 어긋날 관계라면 지속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니 코로나로 인해 오랜만에 친구 ‘현주’의 집에 방문한 「무급휴가」 속 ‘미리’는 지날 시절을 떠올린다. 함께 그림을 그렸고 많은 시간을 공유했지만 ‘미리’가 어머니를 힘들어하는 걸 ‘현주’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미리를 향한 설득이나 강요는 하지 않았고 자신에 집에 머무는 미리에게 일정이나 계획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그냥 기다려준다. 서로를 인정하는 관계는 아름답고 우아하다.


사랑은 애써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심연 깊은 곳으로 내려가 네발로 기면서 어둠 속에서 두려워하는 일도 아니었다. 사랑은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것이었다. 그 모든 사실을 알려준 건 현주였다. 현주와 함께 있을 때면 미리는 안전함을 느낀다. 현주는 미리의 존재 이외의 것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무급휴가」, 220쪽)


나의 관계는 어떠한가.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좋아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더 알고 싶고 뭔가 더 말해주기를 기대한다. 내게도 꺼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으면서. 터져 나올 것들은 언제나 터져 나오기 마련이니 추측하고 부축일 필요가 없다는 걸 느낀다. 누군가의 심연에 닿는 일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니까. 내 심연을 들여다보는 일도 마찬가지고. 애쓰지 않아도 그곳에 닿으면 좋으면 그건 쉽지 않음을 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한 더 많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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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6-16 12: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6-18 17: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2-06-16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작들과 쭉 이어지는 느낌인듯요

자목련 2022-06-18 17:49   좋아요 1 | URL
네, 비슷한 결이에요. 짧은 이야기라 미완성의 느낌이 매력이겠지만 그게 또 아쉽기도 하고요.
 
여름 상설 공연 민음의 시 288
박은지 지음 / 민음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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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은 좀 더 공들여 읽게 된다. 여름에 다시 펼치는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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