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필 약속은 가장 추운 날이었다. 그러니까 어제 말이다. 서로의 시간을 맞추고 얼굴을 마주하기로 한 날. 친구가 오기 전에 보일러를 틀었다. 바닥이 따뜻해지는 게 기분이 좋았다. 거의 5달 만에 마주한 우리. 그 사이 우리는 조금 더 늙었고 집착 비슷한 열망은 조금 옅어졌다. 9월엔 친구에게 큰일이 있었고, 나는 그 곁을 지켜주지 못했다. 약속을 잡으면서 친구가 무화과 시루를 사갈 수 있으면 사 가겠다고 했다. 당신이 예상하는 그곳의 무화과 시루가 맞다.


친구와 나는 그 지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 그래서 종종 놀란다. 그 빵집이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으니까. 당시에도 랜드마크였고 그 앞에서 약속을 잡기도 했지만. 아무튼 직접 본 무화과 시루는 너무 예뻤다. 어마 무시하게 컸다. 친구가 말하길, 이건 숟가락으로 떠먹어야 한다고. 우리는 그렇게 각자의 접시와 수저를 두고 무화과 시루를 먹었다. 물론 먹는 양이 적어서 다 먹을 수 없었고 남은 케이크는 소분해서 냉동실에 넣었다. 그건 모두 친구가 했다. 친구는 나보다 그런 걸 잘한다.





이사 간 집과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친구가 책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가 책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정말 진기한(친구에게 미안하지만) 일이다. 필사를 할 거라고 했다. 켈리 그라프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친구의 손 글씨는 정갈하고 곱다. 덕분에 나는 이런 책이 있는 줄 알았다. 친구에게 선물을 하려고 장바구니에 담아두었다. 드라마 대사로 하는 필사, 그래서 나는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가장 기다리는 드라마 <연애박사>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도 올가을 내 키워드는 <연애박사>가 지배할 것 같다.

​

11월의 첫날 친구는 여동생 둘과 중국 여행을 떠난다고 했다. 3박 4일의 짧은 기간이 친구에게 쉼이자 휴식이면 좋겠다. 함께 할 시간은 끝이 났고 우리는 다음 계절을 약속했다. 겨울의 어느 시기에 만날지 모른다. 첫눈이 내리는 겨울일지도 모르고 봄에 속한 겨울이 될 수도 있고 여름에 떠올리는 겨울일지도 모른다. 그때까지 10월의 무화과 시루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달콤함으로 풍성하게 채워진 하루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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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10-29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때 자주 가던 곳인데 이렇게 유명해질지 몰랐어요 저는 거기서 빵 보다는 돈까스 먹는걸 좋아했는데...ㅋㅋㅋ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0 | URL
헐 저기 돈까스도 팔았어요? 신기하네........

망고 2026-10-29 15:34   좋아요 0 | URL
2층에서 팔았는데 요즘은 안 팔까요?ㅋㅋㅋ그당시 90년대에도 돈까스 줄서서 먹었던 기억이 나요

자목련 2026-10-30 09:37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요, 핫해도 정말 핫해요! 요즘에도 팔지 않을까 싶어요^^

hnine 2026-10-29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2006년부터 그 동네에 살고 있는데 이사올 당시만해도 이 정도로 유명하진 않았고, 전 지금까지도 그곳의 시그니처 케잌들을 못먹어봤어요.

자목련 2026-10-30 09:38   좋아요 0 | URL
나인 님, 그곳에 사신다니, 괜히 좋습니다 ㅎㅎ
정작 그 동네 사시는 분들은 시그니처 빵 먹는 게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제 친구도 그렇고요.

다락방 2026-10-29 13: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화가 시루 엄청나게 아름다운데, 어쩐지 먹을 순 없을 것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1 | URL
전 사실 사진만 보고는 삼겹살인가 했는데... 저게 삼겹살이라면 다 먹을 수 있죠?? ㅋㅋㅋㅋ

자목련 2026-10-30 09:39   좋아요 0 | URL
그냥 숟가락을 푹 넣으면 됩니다 ㅎㅎ

자목련 2026-10-30 09:40   좋아요 1 | URL
잠자냥 님 댓글을 보니 삼겹살로 보이기도 합니다. 삼겹살이라면 저도 다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ㅋㅋㅋ

잠자냥 2026-10-29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곳이 바로 그곳인가요! ㅎㅎ 전 아직 한 번도 그곳에 가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나 유명하다는데....
물론 그곳에 다녀온 가족이나 지인들이 그곳의 시그니처 빵이라면서 사 온 적이 있어서 먹어본 적은 있지만... (아 저 위에 다락방이 사 온 적도 있네요. ㅋㅋㅋ)
아무튼 그렇게 유명해져서 그렇게 긴 줄을 서야 하는 곳이라니... 아마도 영원히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케이크는 사진만으로도 참 풍성해 보입니다.

자목련 2026-10-30 09:42   좋아요 0 | URL
저도 그 지역을 떠나온 후로는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살아서 덕분에 맛을 보고요.
친구 말로는 케이크 줄이 따로 있어서 다른 빵은 사 올 수가 없었다고 하더라고요.
케이크 맛은 괜찮았어요. 아주 달지도 않았고 무화과가 엄청 많았고요.

건수하 2026-10-30 10:38   좋아요 0 | URL
대전역 근처 지점은 줄이 엄청 길고, DCC 라는 곳에 있는 매장은 줄이 짧아요. 그리고 거긴 주차하기도 편해요. 가신다면 DCC점 추천합니다 ^^

blanca 2026-10-3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저 안판석 감독님 드라마 너무 좋아해요. 어제 우연히 티비에서 <연애박사>8회를 보고 그냥 심심하네 하고 말았는데 1화부터 다시 제대로 볼까요? 무화과 시루 넘 맛나겠어요.

자목련 2026-10-30 09:45   좋아요 0 | URL
안판석 감독님 드라마 좋아하신다면, 1회부터 보기 추천합니다. 나머지 4회가 찐일 것 같기는 해요 ㅎㅎ
무화과 시루는 맛났어요!

건수하 2026-10-3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화과 시루도 나오는군요 ^^ 전 말차시루 한 번 먹어봤는데, 케이크가 좀 물컹물컹해서 먹고 나머지 보존하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전 사실 그렇게까지 줄 설 맛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 원래 줄 서는 거 싫어하기도 하고요 ^^;; - 사오니까 가족들이 좋아하긴 했습니다 :)

<연애박사>란 드라마 처음 들었는데, 자목련님이 관심있다 하시니 급 궁금해집니다.

잠자냥 2026-10-30 15:53   좋아요 0 | URL
성심당은 케이크를 시루라고 부르는가 봅니다! ㅋㅋㅋㅋㅋㅋ

건수하 2026-10-30 16:04   좋아요 1 | URL
시루떡처럼 빵 / 크림 과일을 층층이 쌓은 케이크거든요. 그래서 겉의 틀을 제거하면 모양 보존이 힘듭니다 :)

자목련 2026-11-02 09:54   좋아요 0 | URL
저는 딸기를 좋아해서 딸기 시루를 한번 먹어보고 싶은데, 불가능할 것 같아요 ㅎㅎ
개인적으로 <연애박사>추천합니다! 아침부터 밤 10시를 기다립니다ㅋㅋㅋ

coolcat329 2026-10-30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무화과시루 저만 모르고 있었나봐요. 찾아 보니 유명하네요. 와~~아름답네요.

잠자냥 2026-10-30 15:53   좋아요 1 | URL
ㅋㅋ 저도 몰랐어요! ㅋㅋㅋ 이 페이퍼 보고 검색해봐서 처음 알았답니다.. 케익알못...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6-11-02 09:55   좋아요 0 | URL
계절마다 제철 과일로 나오나 보더라고요. 실물은 더 맛스럽습니다!
 


서울에 다녀왔다. 일요일에 출발해서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하필 폭우가 쏟아지던 시간에 고속도로 위에 있었다. 내가 운전을 한 건 아니지만 조수석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무서웠다. 병원 일정으로 간단한 검사를 위한 것이었지만 오랜만에 입원을 하니 위중한 환자가 된 기분이었다. 몸무게와 키를 확인하고 배정된 병실로 향했다. 침대에 담요와 환자복이 개어져 있었다. 저녁을 먹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보호자도 나도 심심했다. 코로나 이후로 병원 분위기는 달라졌다. 조용했고 커튼을 걷어두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나쁘지 않았다. 혈압, 맥박을 측정하고 간단한 채혈을 했다. 미열이 있어 살짝 걱정했지만 간호사는 검사에는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일찍 잠들었지만 간호사의 방문으로 깊은 잠은 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새벽에 깨고 다시 잠들기 위해 노력했다. 월요일의 검사는 지난번 외래에서 하지 못한 것으로 이번에는 꼭 해야만 했다. 혹시나 이번에도 힘들까 봐 걱정했는데 다행히 검사를 마칠 수 있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면서 늦은 아침과 약간의 낮잠과 점심을 먹었다. 걱정할 정도의 결과는 아니었고 의사는 1년 후로 검사를 잡았다. 이번 검사는 돌발적인 상황이라 할 수 있지만 하나의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나를 살피는 일이었다. 내 몸에 일어난 변화를 내가 감지하는 것, 내가 스스로 나를 책임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로 향하는 길은 폭우와 바람 때문에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편안하면서도 지루했다. 월요일의 고속도로는 생각보다 차가 많았다. 저녁을 간단하게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피곤했는지 꽤 많은 잠을 잤다.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에는 내 일정을 아는 친구의 통화가 이어졌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일정이었는데 병원이라서 걱정이 많았다. 직접 통화를 해야 마음이 놓이는 이들이었던 것이다.


나의 안부를 묻는 일, 그 모양은 다양하다. 자신의 관심거리에 맞춘 안부라고 할까. 어떤 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안부를 시작하고 어떤 이는 드라마 이야기를 하다 마지막에 내 안부를 묻고 어떤 이와는 안부를 묻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주고받는다. 누군가를 염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은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다음 주에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나는 친구가 많은 편이 아니고 얼굴을 보는 이도 정해져 있다. 그래도 얼굴을 보고 밥을 먹으면 안심이 될 것 같아서 약속을 정했다.





책의 안부에 대해 생각해 보면 작가의 신간 소식을 듣고 읽거나 오랜만에 작가의 책을 구매하고 읽는 일이 아닐까 싶다. 김경후의 시집이 그러하다. 김경후의 시집 『열두 겹의 자정』을 좋아하는데 그 이후로는 시집을 읽는 게 없다.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도 장편은 처음인 것 같다. 두 권의 책은 모두 Falstaff 님 덕분에 알게 되었다. 땡스 투로 부족하지만 고마움을 표한다. 이윤 리의 에세이는 너무 아프고 슬플 것 같은데 그래도 읽어보고 싶어서 구매했고 하루키의 소설은 좋아한다고 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나오는 소설이라서.


가을이니, 가을에 어울리는 이런 제목의 시를 우선 찾았는데 뭔가 핏빛 낭자한 풍경을 목도한 것만 같다.

​

눈먼 새들

열린다

날개 묶어

열린다

핏빛으로 떨어진다 열린 채

얼어붙은 채

엄마, 떨어지면 날아가?

가을 하늘은 넓고 높지

지하철역 스크린도어 열리고

닫힌다

내가 스마트폰을 찾는 사이

열차

날아갈 듯 핏빛 눈빛들

(「단풍」, 전문)

​

어제는 너무 추워서 겨울이 왔나 싶었는데 오늘은 다시 날씨가 가을이라고 확인시켜준다. 아직 노란 은행잎이 수북히 쌓인 걸 못 봤으니 겨울 생각은 조금 미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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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10-22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을 때면요, 낙엽이 사뿐히 내리는 것도 같고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는 것도 같고요. 그렇게 소곤소곤 목소리가 옆에서 들리는 듯해요. (ASMR)
추위를 많이 타서 겨울이 두렵긴 한데요, 겨울만 되면 유독 맛있는 간식거리가 있어서 그건 또 좀 좋아요. 막 게을러지고만 싶은 겨울 생각은 저도 조금은 미뤄 두고, 지금의 가을을 좀 더 담아 볼까 봐요.

자목련 2026-10-23 11:18   좋아요 0 | URL
곰돌이 님이 그리 읽어주셔서 그렇겠지요.(입꼬리 올라가고 기분은 날아갑니다~~)
겨울엔 호빵, 군고구마, 붕어빵. 맛난 먹거리가 많죠!
찰나의 가을을 한 아름 담아두시길 바라요!

yamoo 2026-10-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글을 보면...
오랜동안 문학책과 함께 문학적 환경에서 문학적 글을 써 오신 듯합니다..^^;;

서울에 다녀오셨군요. 이전에 찍은 사진들을 보면 참 호젓한 곳에서 사시는 것 같아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서울은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너무 많아요.ㅎㅎ

자목련 2026-10-23 11:20   좋아요 0 | URL
문학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문학적 환경까지는...

시골에 사는 게 나쁘지 않은데 한 번씩 서울에 갈 때면 힘든 게 있지요. 말씀처럼 서울은 복잡하고 답답한 느낌도 들고요. 문화적 혜택을 생각하면 서울살이가 부럽기도 하고요^^

구단씨 2026-10-2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건강하세요.
저도 점점 더 병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마음까지 아파지는 기분입니다.

자목련 2026-10-27 09:30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병원에 가는 건 건강해지려고 하는 건데.
구단씨 님도 감기 조심하고 건강 잘 챙기세요!

책읽는나무 2026-10-25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울행이 멋진 가을여행길이었음 좋았을 텐데…어차피 폭우 속이었어서 가을여행 만끽하기엔 힘들었을까요? 이곳도 며칠째 가을비가 계속 내리는 중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감기도 조심하시길 기원합니다.^^

자목련 2026-10-27 09:31   좋아요 1 | URL
말씀처럼 폭우라서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었어요.
오늘부터 추워진다고 하니 나무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김연수 작가를 좋아한다.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는 말이 정확하겠다. 그가 경북 김천 출신이라는 걸 알고는 대학 동기 하나가 그와 같은 출신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 동기의 이름은 유명 정치인과 같아서 기억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연락이 닿았다면 나는 김연수 작가에 대해 물어봤을 것이다. 김천이 뉴욕제과점에 대해서도. 어제 <책빵 뉴욕제과점>이란 곳에서 보낸 책을 받았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였다. 작가의 사인본, 그러니까 나만을 위한 사인본이다. 내가 김연수 작가를 좋아하는 걸 아는 다정한 동생이 보낸 선물이다.


<책빵 뉴욕제과점>이란 이름이 왠지 익숙해서 검색하니 독립서점이었다. 짐작하는 바로 그곳. 김연수 작가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던 그 빵집이 독립서점이 된 것이다. 작가의 누나가 운영하신다고 한다. 아마 동생의 선물이 아니면 나는 몰랐을 곳이다. 내가 독립서점을 방문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가까운 곳에 독립서점도 없거니와 온라인 서점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작가 사인본의 경우 거의 같은 경로로 내게 도착했다. 기억을 더듬어 찾아보니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과 『소설가의 산책』이란 비매품 도서에도 있었다. 날짜는 2014년 11월 15일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기억하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나를 생각해 주는 마음이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 우리는 만난 적이 없고 단 한 번의 통화가 전부였다. 우리는 이어준 건 책이었고 그 가운데 김연수 작가가 있었다.


한 번씩 소장하고 있는 책을 정리한다. 읽지 않을 책, 읽게 될까 생각하지만 그대로 미루는 책, 누렇게 바랜 책을 이제는 과감히 정리하는 편이다. 시집은 남겨야지 했던 마음도 차츰 시들어져서 시집도 정리를 한다. 정리하는 과정에 읽으면서 분류를 다시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아무튼 현재 나에게 책은 가까운 사이면서도 정리할 사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의 책도 모두 소장한 건 아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애정은 줄어들지 않고 희미해지지도 않는다. 읽지 않은 책도 여전하다.





처음 김연수 작가의 소설을 읽었던 건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내가 쓴 글을 검색하니 나는 그의 소설에서 큰 위로를 받은 것 같다. 내가 기억하고 싶었던 문장을 다시 읽어보는데 최근에 그가 쓴 소설에서 받은 느낌과 이렇게 비슷할 수가 있다니. 놀라웠다. 누군가는 한 작가의 글이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그건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2007년의 글이었다. 다시 이 소설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장은 오래 기억하려 할 것이다.


우리는 지나간 뒤에야 삶에서 일어난 일들이 무슨 의미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며, 그 의미를 알게 된 뒤에는 돌이키는 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드』 중에서)


삶이란 우리가 살았던 게 아니라 기억하는 것이며 그 기억이란 다시 잘 설명하기 위한 기억이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중에서)




이 가을, 김연수 작가의 신잡 소설집이 나와서 참 기쁘다. 내가 아는 책을 좋아하는 이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주변에는 함께 할 수 있는 이가 아주 많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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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08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 뉴욕제과점이 독립서점이 된 거군요. 친필 사인본이라니, 우와....자목련님과 함께 김연수를 좋아하는 감정을 공유할 수 있어 기뻐요. ^^;;

자목련 2026-10-08 11:58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을 아는 사람이라면 더욱 반가울 독립서점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블랑카 님과 김연수 작가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어 좋아요. 많이 많이요!
 


연휴가 있어 기다렸던 책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책을 사는 일은 일상이 되었지만 사고 싶은 책을 바로 사는 일은 일상의 큰 즐거움이다. 사고 싶은 책을 바로 사는 게 무슨 대단한 즐거움이나 싶겠지만 사고 싶을 때 사지 못하고 나중에 사게 되면 당시의 기쁨이 조금 사그라든 기분이다. 사고 싶을 때 사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책이 도착했을 때 책을 바로 받아보지 못할 사정도 있고 예약판매일 때도 그렇다. 예약판매는 바로 책을 받아볼 수 없다. 그러니 사고 싶을 때 바로 책을 받아볼 수 없다. 좀 엉뚱한 말인가. 아무튼 그렇다.


기다리던 책은 김연수의 소설집 『눈 내리는 삼일포』였다. 사고 싶을 때 바로 샀지만 바로 도착하지 않은 책이다. 그리고 이서수의 『우리 착한 나진』은 제목에서 뭔가 알 것 같은 내용이다. 아직 읽기 전이다. 윤단과 최미래의 단편이 더 읽고 싶어서 『소설보다 가을 2026』와 10월엔 시의적절 시리즈도 구매했다. 신용목 시인의 『포도』다. 책을 감싸는 보랏빛이 좋다.





포도를 생각하면 여름이 자동으로 따라오는데 10월의 포도는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좋아서 더 좋을 것 같은 김연수의 소설집, 이번에 읽으면 더 좋아할 것 같은 이서수와 윤단, 최미래. 그리고 신용목 시인은 가지고 있는 시집이 있지만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번에 산문집을 읽으면 무언가 겹쳐지는 게 있을 것 같다.


책이 있지만 자꾸 책을 산다. 아침에 읽을 책, 점심에 읽을 책, 저녁에 읽을 책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넉넉해진다. 읽는 날보다 읽지 않는 날이 많지만 책을 생각한다. 쓰는 날보다 쓰지 않는 날이 많지만 쓰고 싶은 마음을 꽉 잡고 있다. 사실 그건 읽기에 대한 마음이 더 그렇다. 그렇게 읽지는 않지만. 꽉 잡은 손, 꽉 잡은 마음, 꽉 잡은 가을. 손이 아플 정도로 꽉 잡고 있어도 좋을 그런 것들. 꽉 잡은 마음을 생각하고 필요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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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10-07 13: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혹시 김연수 작가 메이킹북 부록도 주문하셨나요? 인터뷰 내용이 참 좋더라고요. <포도> 책 너무 이뻐요. 저 시리즈 참 좋아하는데 저도 읽어보고 싶네요. 눈부신 가을날입니다.

자목련 2026-10-08 11:37   좋아요 0 | URL
이 소설집은 제가 주문한 것과 선물로 받기도 했어요. 선물로 받은 책에 부록이 있었어요. 말씀처럼 정말 좋더라고요. 다음에는 메이킹북이 있으면 잊지 말고 함께 주문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포도> 표지 정말 예쁘죠? 블랑카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짧아서 더 특별하고 아름다운 가을이에요!

다락방 2026-10-0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목련님 덕에 이서수 작가 책 어제 처음 잀었는데 좋더라고요. 더 읽어봐야지 싶은데 언급하신 책 제목 보니, 말씀하신 것처럼 어쩐지 짐작이 되면서도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자목련 2026-10-08 11:40   좋아요 0 | URL
제 덕분이라니 기분이 매우 좋습니다 ㅎㅎ
이서수의 소설을 많이 읽지는 않았는데 단편, 장편 다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요.『헬프 미 시스터』도 좋았고요!
 


글을 쓴다는 건 가만히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때로는 보이는 대로 외부를 기록하다 점점 그것은 내부로 파고든다. 결국 글쓰기는 말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나 해야만 했던 말들에 대한 다른 방식의 대화다. 말로는 차마 하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용기거나 뒤늦은 후회, 다짐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처음부터 쉽지는 않다. 누구에게 보일 목적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다. 나만이 읽고 쓰는 글이라 해도 조금은 주저하거나 조금은 글 뒤로 숨고 만다. 그러나 결국엔 감정이 담긴 글을 쓰고야 만다. 그것이야말로 글을 쓰는 기쁨이고 글을 쓰는 위안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마주의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특성상 말을 크게 해야 하고 큰 목소리로 정확하게 아이에게 말을 건네야 할 치료사(언어, 놀이, 상담 등)를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다른 글이었다. 어쩌면 외부인인 내가 알지 못하는 내부인의 진짜 이야기가 그러하다는 걸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보편적인 이용자) 이들과 반복적인 내용을 전달하거나 학습시키는 일, 그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다만 외부로 드러나는 장면이나 드라마나 영화처럼 포장된 이미지가 실재는 아니라는 정도다.


그러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치료사라는 직업과 일을 떠나 치료사란 개인에게 맡겨진 막중한 책임을 처음 느끼고 생각했다.복지관이나 사설 센터에서 선생님이란 호칭으로 불리지만 4대 보험이나 정직원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 작은 공간에 아이들 치료를 위한 놀잇감이나 도구를 사비로 구입하고 대소변 실수를 하는 아이를 감당하는 일까지 하루하루 나아지기를 바라는 부모(조력자, 모든 보호자)에게 상태를 전달하고 앞으로 방향까지 계획해야 한다. 감사를 위한 서류 업무는 물론이고 센터의 청소까지.


아이를 관찰하고 의연하게 바라봤던 그 수많은 의식과 기록들을 굽이굽이 기억에서 끌어올리는 것을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일은 그래서 가늘고 길다. (본문 중에서)


업무나 행정에서 한계를 느껴도 그것에 대한 개선이나 요구사항을 정확히 전달할 창구가 없다는 걸 낄 때 그 마음은 어떨까. 동료이면서 각자의 치료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서로의 시간에 들고나는 것 정도만 인식하는 일은 얼마나 외롭고 쓸쓸할까. 누군가는 그저 직업이라고 직장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이직을 할 때마다 치료사가 아닌 많은 아이를 받아 수입을 더 늘이는 게 목적인 원장 앞에서 수긍의 미소를 건네는 일은 아프고 힘겹다.


그러나 아이들을 만나고 개개인이 좋아하는 것들을 시작으로 발화하거나 의미를 알지 못하더라도 대화를 이어가는 일은 치료사에게 가장 소중하고 숭고하다. 때로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수업이 흐르고 반복적이 놀이에 지치더라도 아이가 놀이실에 왔다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 불편한 신체를 도와주기 위한 보장구에 대해 목발이나 휠체어 같은 게 전부인 줄 알았지만 더 세부적인 도움을 위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 책으로 알게 되었다.


치료사의 일상에 대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이에게 이 책은 선배이자 동료가 건네는 손길이 될 것이다. 한눈에 바로 뛰어나게 발화하거나 움직임이 좋아지거나 놀이를 원활하게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치료사와의 시간에 즐겁고 행복하다면 그로 인해 그들은 충만해질 것이다. 치료사도 아이도. 물론 이 모든 게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고단한 현실은 끝이 보이지 않고 어려움은 산적해 있는 게 삶이니까. 그래도 우리는 제목처럼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 반짝인다. 그것을 들어주고 공감해 줄 이가 있다는 사실에 더욱 그러하다. 이 책도 담긴 마음도 그렇다.


아이들이 남기고 간 장난감은 언제나 내게 어떤 이야기였다. 단순히 질문을 하기 위한 핑계가 아닌, 상상하고 느끼는 그대로의 이야기 말이다. 아이들과 노는 동안, 나는 되도록 어려운 질문은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그것대로 두고, 원래 그랬던 것처럼 바라보는 일을 오래오래 하고 싶다. 장난감이 가득한 곳에서 부끄럽거나, 슬프거나, 어딘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 없이 놀 수 있다면 초대한 내가 더없이 기쁘겠다. (본문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할 때』를 읽으면서 여러 저자가 자신의 계절에 대해 쓴 『계절 쓰기』와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를 만났을 때처럼 좋았다. 담담하면서도 차분한 톤, 쓰고 읽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나를 쓰고 나를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길고 길었던, 끝날까 싶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열린 지금, 가을에 대한 부분은 처음과 다르게 가을에만 존재할 것 같은 감각으로 읽힌다. 이 가을은 눈 깜짝할 것 없이 지나할 것이고 우리는 또 겨울에 취해 가을을 잊게 될지도 모른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왔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아침에 집에서 나와 숨을 들이마셨을 때 찬 기운이 가슴 속으로 훅 들어와 명치를 아리게 할 때다. 그럴 때면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고 어떤 감정이 나를 한바탕 뒤흔들고 지나가려는 조짐이라고 생각했다. (「홍한별의 가을 : 오래된 이야기」 중에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겠지만 슬픔이 너무 커서 세상에 대해 원망만 가득했던 마음이 찬란한 가을 햇살 속에서 맞닥뜨리는 어떤 풍경들에 황홀함으로 물드는 걸 느낄 때마다 나는 아름다움은 어쩌면 삶을 닮은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중에서)


순간을 채집하고 소중하게 간직하는 방법으로 기록은 훌륭하다. 정작 쓰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중에 가만히 읽어 보면 그때와 얼마나 달라졌는지 느끼고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말들은 여전히 깊은 곳에서 쌓이고 어떤 말들은 목까지 달려 나오다 멈추고 만다. 그런 말들이 글이 되어 나왔을 때 우리는 가만히 그 말을 듣고 그 말에 위로받고 회복된다. 그래서 글을 쓰고 글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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