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갖지 못한 어떤 것, 그 능력을 질투한다. 질투는 나의 힘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를 향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건 꽤 괜찮다. 모방이라는 노력이라는 방향으로 뻗어가거나 수집으로 남기 때문이다. 2월을 기억하고 말하고 쓴 김상혁의 에세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그의 시집을 읽었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싶었다. 겨우 한 권하지만 말이다. 나만 아는 문장, 나만 쓸 수 있는 무언가를 갈망하던 시절이 있었다. 적극적으로 배우거나 강의를 찾는 대신 그저 읽기에 최선을 다했던 때였다. 그때의 인연은 나에게 시집을 많이 읽으라고 했다. 시집을 모으고 읽으려고 하던 노력도 다 그 인연 덕이다.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할 다짐과 수많은 용기로 채워진 1월과 왠지 모를 설렘으로 기대하는 3월 사이에서 날도 적어 움츠러든 2월이 진짜 나라고 말하는 김상혁 시인의 글은 어떤 꾸밈없이 솔직하다. 부모의 이혼 당시 엄마의 뱃속에 있었던 시인, 아버지는 곧 재혼했으니 아버지와의 시간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조금 천천히 알아도 좋았을 슬픔은 존재와 동시에 느꼈을지도 모른다. 손에 꼽을 정도의 만남과 함께 한 시간은 그에게 어떤 감각이었을까. 때문에 그는 아들에게 그 사랑을 온전히 전하고 싶었을지도. 어쩌면 이건 나의 오지랖이겠다.


일하는 엄마, 손주를 향한 끔찍한 사랑이나 다정함보다는 자신들의 분노와 고통을 돌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안에서 자라는 그가 외로움을 친구로 두는 일은 가장 쉽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우울했던 유년 시절 할아버지 방에서 보았던 주말의 영화는 그를 안아주고 달래주었다. 늦은 밤 TV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영화를 보던 그 소년을 상상한다. 우리는 어느 시절 같은 영화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나는 그의 플레이리스트에 겹치는 곡이 있는 독자, 여기 있다고 외친다. 내가 좋아하는 노래, 내가 자주 듣는 노래가 두 곡이나 있다고 말이다. 시인의 플레이리스트가 궁금한가? 궁금하면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어보길.


이렇듯 책이란 참 이상하다. 김상혁이란 시인에 대해 나는 아는 게 없었는데 이제 조금 안다고 할 수 있다. 책에 썼고 그걸 읽었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작가가 책에 쓴 모든 게 나에게 흡수되거나 하는 건 아니니까. 재밌게 읽었다는 기억으로 남거나 심지어 읽은 기억도 잊게 되니까. 물론 이 책에 대한 기억도 그런 수순을 밟을지도 모르지만 기록으로 남기니 다를 것이다. 그가 즐겨드는 노래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있다는 것, 그가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은 등단작을 얄궂게 검색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런 글이 좋아서 가끔씩 저녁이 되면 생각날지도 모른다.





저녁이 우리집 대문을 열고 나를 찾으로 온다. 서서히 다가오는 저녁은 짐짓 엄격해 보이는 표정이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서 밥 먹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더 놀지 못해 좀 슬프다. 그렇지만 나도 종일 노느라 지쳤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며, 실은 매일 돌아가자고 이야기해주는 저녁이 고맙다. 집에 가자고 강권하는 저녁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 진지하고도 차가운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놀이에 미련이 남아 공터 쪽을 연신 돌아보며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사실이 고맙다. (95~96쪽)


그러니까 ‘저녁’은 김상혁 시인의 고유한 정서 같다고 할까. 그의 시집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에서도 만난 저녁이니까. 어떤 슬픔과 안도가 동시에 전해지는 저녁. 어떤 저녁은 그를 위로하고 어떤 저녁은 그를 더 외롭게 만들고 어떤 저녁은 그를 포근히 안아주었을 것이다.


문득 나의 저녁도 떠올려본다. 빨리 밤이 오기를 바랐기에 저녁은 존재하지 않았던 날들. 나는 왜 그토록 밤을 기다렸던 것일까. 어둡고 짙은 밤의 깊이에 숨을 수 있어서 그랬다. 그 시절의 나는 저녁의 애틋함 따위는 알지 못했다. 오직 밤 만이 계속되기를. 그리하여 끝내 아침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저녁이 있었기에 이런 저녁의 아름다움을 흠모할 수 있다.


저녁은 헤어지기 좋은 시간이다. 지치기도 쉬운 시간이구. 하지만 제 손으로 머리칼을 털며 고갤 숙이고 있는 장면만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런 말도 가능하다. 내가 매일 현관으로 쓰러지며 쏟은 별과 모래를 아침마다 네가 예쁘게 비질한다고. (「가정」의 일부)


『그냥 못 넘겼어요』를 읽기 전 내가 기대했던 2월은 풍성한 꽃다발과 서툰 웃음으로 채워진 사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월은 각자의 사정과 기억으로 채워진다. 여느 달이 그렇듯 말이다. 누군가의 2월은 쓸쓸하고 누군가의 2월은 분주하고 누군가의 2월은 끝나지 않고 이어진다. 졸업과 시작으로 이어지던 2월은 없다. 내가 기다렸던 봄 방학을 지금의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계절은 조금씩 다르게 흐르고 열두 달의 의미도 새롭게 변화한다.


시 쓰는 강의에서 만난 천재 수강생이 수업에 나오지 않아 연락했더니 자신의 이름도 정확하게 모르고 있어 씁쓸하지만. 어렸던 자기를 질투하는 귀여운 아들과 아이가 태어나면서 그냥 개가 된 개와 살아가는 2월의 이야기는 흐뭇한 미소로 끝난다. 마냥 즐겁고 행복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일상이 소중한 풍경이라서. 정말 시의적절하다고 할까. 3월만 기다리지 말고 남은 2월을 사랑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얹는다. 2월이 있어야 3월이 오고 춥고 변덕스러운 2월이 있기에 그보다 포근한 3월은 폼 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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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시작되었다. 특별한 일정이 있는 건 아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이다. 설날 아침에 오빠네 집에 모여 예배를 드리고 간단한 식사를 하는 게 전부다. 작년 11월 올케언니가 골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라 걱정이 많지만 얼굴을 뵈니 마음이 놓였다. 겨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가. 평소처럼 그렇게 명절을 보내면 될 것 같다.


친구와 가까운 이에게 짧은 인사를 전하고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가 반갑고 정겨웠다. 뭐가 그리 바쁘고 대단한 일을 하는지 목소리를 나누는 게 어렵다. 그래서 더 귀하게 다가온다. 무고하고 무탈하길 바라지만 어떤 일들은 일어나고 어떤 일상은 계속된다. 그럼에도 무언가에 휩쓸리지 않고 단단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냈다.


이번 설에는 쿠키 선물이 많다. 커피와 곁들이면 좋을 다양한 수제 쿠키다. 냉동실에 보관했다가 하나씩 꺼내 먹으면 될 것이다. 연휴에 뭔가 읽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마도 먹다가 보다가 자다가 먹다가를 반복할 게 뻔하다. 그래도 알라딘이 적립금으로 유혹해서 제일 좋아하는 커피를 샀다. 주문하고 나니 알라딘이 커피 할인 쿠폰을 줬다. 타이밍이 아쉽다. 새로운 커피를 주문할지도 모르겠다. 책도 한 권 샀다. 『나만 아는 단어』란 제목에 끌려서. 정용준, 김화진의 소설을 읽었기에 그들이 선택한 주머니, 유령, 산책이란 단어가 내게 아는 척을 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는 커피를 쟁여둔다. 곁에 두기만 해도 향이 좋아서 자꾸만 생각난다. 좋아하는 것들을 쟁여두면 나쁜 것들이 사라질 것 같다. 무엇이 나쁜지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그런 기꺼운 마음을 쟁여두면 좋겠다. 쟁여두는 마음, 쟁여두는 안부, 쟁여두는 안녕.


기척도 없이 미세먼지가 찾아오고 봄이 가까이 있다는 걸 느낀다. 옷차림의 무게는 가벼워지고 잠깐이라도 집 밖을 나갈 때면 마스크를 챙긴다. 누군가 꽃이 피는 소리를 알려줄 것이다. 여기저기서 그런 소식이 날아들 순간이 곧 들이닥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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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2-15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은 꽃향 대신 커피 향을 따라 들렀어요. 쿠키 선물이 많으셨군요? 살은 저만 쟁여두는 걸로 하고, 자목련님은 맛있게 즐기세요!

자목련 2026-02-20 08:36   좋아요 1 | URL
다양한 쿠키의 달콤함에 빠져 지내고 있어요!
봄이 가까운지 제법 공기가 부드러운 느낌이에요. 곰돌이 님, 따뜻한 하루 이어가세요^^

페넬로페 2026-02-15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키와 커피는 최고의 환상 조합이죠.
미세 먼지가 많지만 산책길을 비추는 햇빛에 봄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
설 연휴 잘 보내시길요^^

자목련 2026-02-20 08:38   좋아요 1 | URL
커피를 좀 줄여야겠다 싶은데 쉽지 않습니다 ㅎ
봄빛을 기대하며 지내는 날들, 환한 시간 보내세요!

책읽는나무 2026-02-15 17: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날이 너무 따뜻해 겉옷을 벗고 다녔어요. 겨울 외투가 너무 더운 거에요. 순간 3월인 줄 알았어요. 벌써 목련나무랑 벚나무가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통통하게 차올라 있구요.^^
쟁여두는 커피와 쿠키 덕분에 설 연휴가 든든하시겠네요. 부럽습니다.
암튼 설 연휴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자목련 2026-02-20 08:39   좋아요 1 | URL
통통하게 차오른 봄이 나무 님을 반갑게 맞았을 것 같아요^^
뒹굴거리는 연휴가 끝났는데 뒹굴거림은 끝나지 않아서 ㅋㅋ

서니데이 2026-02-15 2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잘 지내셨나요. 한파가 길었는데 갑자기 따뜻해졌어요.
연휴가 시작되고 날짜가 빨리 지나고 있어요.
즐거운 명절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자목련 2026-02-20 08:40   좋아요 1 | URL
주말에 비 오고 다시 추워지겠지 싶어요. 그래도 따뜻한 추위가 아닐까 싶고요!
건강하고 활기찬 시간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6-02-20 15: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쟁여두는 마음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읽지 않아도 일단 쟁이고 굳이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닌데도 쟁이는 마음... 1월은 안 사고 잘 넘겼는데 2월에는 책을 왕창 쟁였습니다!ㅎㅎㅎ
저는 설 연휴 때 친가 쪽 식구들과 함께 식사를 한 것 말고는 특별한 일정은 없었어요. 시가 쪽은 시부모님도 안 계신 상태에서 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니 산소에 갈 때나 가게 되더라구요. 굳이 명절 때 왔다갔다 피곤하지 않아도 되니 그건 편한 것 같기도 합니다.
쿠키 선물 참 좋네요. 커피든 차든 함께 할 때 준 사람의 마음이 느껴질테니까요. 날이 따뜻해진 건 좋은데 역시 미세먼지가 스멀스멀... 그래도 저는 봄기운이 느껴져서 좋네요. 얼른 개나리가 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6-02-23 15:59   좋아요 0 | URL
어떤 책을 왕창 챙여두셨을까, 궁금하네요.
화가 님은 열심히 읽으시니 마구 쟁여두셔도 괜찮을 것 같아요. 쿠키 덕분에 커피를 마구 마십니다 ㅎㅎ
화가 님이 산책에서 만날 노란 개나리, 저도 보고 싶습니다!
 


1월에는 친구들을 만났다. 내가 가장 여유롭고 친구들은 바쁘기에 일정을 조율하고 맞춰 얻은 시간이었다. 언제나 친구들과의 시간은 빨리 지나간다. 다시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마음은 급하고 하고 싶은 말들을 쏟아낸다. 많이 웃고 많이 먹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그래서 다음 만날 약속을 정하는 일은 더 가쁘다. 다음 만남을 기대하며 정신없이 살아갈 것이다.


다들 바쁘게 살아가고 나는 느리게 산다. 나무늘보처럼 산다. 목적 없이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도 괜찮다고 그런 날들도 있는 거라고 친구는 말했지만 나는 알고 있다. 이런 시간을 종결해야 한다는 것을. 마음의 보폭이 조금은 넓고 빨라지기를 원한다.


좋은 책들이 내 마음의 속도를 올려줄 것이다. 2월의 책은 보뱅 (땡스투는 아프도록 아름답다는 잠자냥 님께)의 『세상의 빛』, 시의적절 시리즈 김상혁의 2월 『그냥 못 넘겼어요』, 이문재 시인의 시집 『꿈을 꾸게 하는 꿈이 있다』까지 세 권이다. 시집을 정리하면서 신간 시집을 사는 마음은 뭘까.





한결같이 아름다운 문장으로 가득한 책들이다. 아름다운 문장을 읽다 보면 나만의 문장을 꿈꾸게 된다. 나만의 문장을 갖는 일, 나만의 문장을 쓰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진다. 그건 좋은 일이다. 좋은 문장을 얻지 못해도, 쓸 수 없는 문장을 바라더라도 문장을 염원하는 일은 벅차다.



잔가지 맨 끝

늦겨울 이른 봄

처음 눈뜻 새순이

뒤돌아보며 말한다

무서워요

앞에 아무 것도 안 보여요

가지가 말한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안 보여

줄기가 말한다

네가 하늘을 보고 있는 거야

계속 올려줄 테니 앞만 보거라

뿌리가 말한다

하늘이 너를 보고 있는 거야

지근 네가 맨 앞인 거야

(「새봄」, 전문)


맹렬한 추위가 마음을 가둔다. 좀 풀린다 싶더니 다시 추워졌다. 입춘이 지났다고 방심한 탓일까. 추워도 봄은 오고 추워도 꽃은 핀다. 그렇게 계절이 흐르는 걸 느낀다. 봄이 오고 있다. 우리가 바라는 봄은 새봄일 것이다. 작년과는 다른 봄, 단 한 번의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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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월에 친구와 나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를 나눴다. 그것은 작가 한강에 대해서였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말은 친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려도 그런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책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현재의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을 사들이고 책을 쌓아둔다. 친구는 내게 한강의 책 가운데 『소년이 온다』의 내용이 뭐냐고 물었다. 대표적인 한강의 소설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기에 그랬을 것이다. 솔직하게 그 소설은 읽기 힘들 거라고 답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찬가지라고. 내가 좋아하는 단편집을 추천했지만 친구는 장편이 좋겠다고 했다. 나는 그 기회를 놓칠 수 없어 알라딘에 들어가서 주문을 하려고 하자 친구는 극구 말렸다. 친구에게 책은 도서관에서 빌리는 것이었고 내게는 사는 것이었다. 마침 곁에 둔 『디 에센셜 한강』을 건넸다. 이 책이 정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책을 구매했고 천천히 읽었다. 아니, 게으르게.


나는 한강 작가를 좋아한다. 한강 작가가 무얼 말하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그 차분한 슬픔이, 애써 고르고 고른 순수한 언어가 좋았다. 어렵게 다가왔지만 자꾸 그렸다. 어쩌면 그의 소설을 읽을 당시 내 감정과 상태가 그러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여전히 그의 초기 소설을 아낀다. 『디 에센셜 한강』에 수록된 작품은 그런 이유로 읽으면서 조금 울컥했고 많이 아팠다. 어떤 면에서 한강의 소설은 상실과 애도로 가득한 생을 버티고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것 같다. 아니, 어떻게든 살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한강에게 그것은 문학이자 언어였을 것이다. 유일하고 고유한 목소리.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는 남자와의 이야기인 『희랍어 시간』을 다시 읽으며 나는 조마조마했다. 아름답게 보이기만 했던 소설이 아니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었다. 처음 읽는 기분이 맞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그 삶이 깨질 것 같아서, 무너져내릴 것만 같아서. 그들이 겪는 상실과 고통을 나는 알 수 없으니 느낄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바라는 간절함이 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라서. 절망의 순간을 지나왔다고 여겼지만 여전히 절망의 시간을 살고 있다는 게 부끄러웠다. 말을 잃은 그녀가 시력을 잃은 희랍어 강사의 집으로 돌아와 그를 위해 안경점에 가려는 마음에 안도했다. 그것은 당연한 마음이 아니었기에. 이상한 일이었다. 과거에 옮겨 적었던 문장은 보이지 않았다. 오롯이 두 사람의 실루엣만 내게 들어왔다. 그들의 움직임, 사소한 떨림, 귀 기울이고 놓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몸짓.


그런 기분은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과 「파란 돌」을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의 소설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었다. 그게 맞았다. 「회복하는 인간」을 읽으면서 이런 내용이었던가. 나는 「회복하는 인간」을 「노랑무늬영원」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육체적 고통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아니라는 마음. 그렇다면 한강이 주목하는 고통은 무엇일까. 내면을 가득 채운 고통은 무엇일까.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있는가. 그러나 반가운 점도 있었다. 「파란 돌」을 읽으며 한강의 소설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파란 돌」에서 등장한 삼촌의 그림은 『바람이 분다, 가라』에 등장하는 먹그림을 불러왔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강의 「어깨뼈」를 떠올렸다. 한강의 소설 곳곳에서 느껴지는 봄의 기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기다리는 이미지가 한강의 그것은 아니었을까 혼자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떨리는 손이 가슴으로 올라왔습니다. 가슴뼈 사이 오목한 곳, 어떤 장기도 없는, 그렇게 아파보기 전에는 그런 장소가 몸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곳이었습니다. 당신은 잠시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을 뻗어 내 손을 가볍게 쥐었습니다. 담담하게, 무언가를 위로하듯이. ( 「파란 돌」, 263쪽)





그래, 나는 이런 문장에 반하고 반했었다. 감히 만질 수 없는 감각과 숨죽여야만 들을 수 있는 소리. 그 모든 것은 슬픔에 기반된 것이었다. 그러나 슬픔에 싸였거나 갇힌 게 아니었다. 슬픔과 함께 성장하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눈이 되어 사라지고 말을 잃고 시력을 잃어도 멈출 수 없는 삶은 이어지고 계속된다는 당연하고 당연한 삶의 의무에 대한 위로이자 토닥임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슬픔을 통해서 한강이 전하고 싶은 게 이런 것이었지 오래전 나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부재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나와 우리를 버티게 만드는 그것이었다. 사라졌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몸에서 가장 정신적인 곳이 어디냐고 누군가 물은 적이 있지. 그때 나는 어깨라고 대답했어. 쓸쓸한 사람은 어깨만 보면 알 수 있잖아. 긴장하면 딱딱하게 굳고 어려우면 움츠러들고 당당할 때면 활짝 넓어지는 게 어깨지. 당신을 만나기 전, 목덜미와 어깨 사이가 쪼개질 듯 저려올 때면, 내 손으로 그 자리를 짚어 주무르면서 생각하곤 했어. 이 손이 햇빛이었으면. 나직한 오월의 바람 소리였으면. 처음으로 당신과 나란히 포도(鋪道)를 걸을 때였다. 길이 갑자기 좁아져서 우리 상반신이 바싹 가까워졌지. 기억나? 당신의 마른 어깨와 내 마른 어깨가 부딪힌 순간, 외로운 흰 뼈들이 달그랑, 먼 풍경(風磬) 소리를 낸 순간. (『내 여자의 열매』 속 「어깨뼈」)


『디 에센셜 한강』에서 만난 산문은 정말 처음이었다. 처음이라서 새로웠고 더 깊게 집중할 수 있었다. 작가 한강이 아닌 소녀 한강, 딸 한강, 인간 한강을 마주하는 순간이라고 할까. 피아노를 열망하던 어린 한강을 상상하며 읽은 「종이 피아노」는 비슷한 경험이 있어 더 애틋했다. 딸이 원하는 피아노 학원을 보내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땠을까. 형편이 나아졌을 때 피아노 학원에 엄마 아빠를 위해 일 년만 다녀주라는 그 마음. 그리하여 중학교 3학년이 되어 다니게 된 피아노 학원의 이야기 「저녁 여섯 시, 검고 긴 바늘」은 피아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언제 기회가 되면 피아노에 대해 말할 수 있기를.


그런가 하면 「여름의 소년들에게」는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이나 읽은 후에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는 이 책을 읽고 어떤 느낌이었을까. 친구가 궁금해했던 『소년이 온다』를 읽게 될까. 아니면 읽지 못하게 될까. 친구는 한강의 다른 책을 더 읽게 될까. 아니면 멈추게 될까. 다음에 친구를 만나면 우리는 한강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예상하지 않았던 대화지만 예전과 같으면서도 다른 그 무언가에 대해서.


‘언어’라는 나이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하여 마침내 첫 문장을 쓰는 순간, 내는 백 년 뒤의 세계를 믿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쓴 것을 읽을 사람들이 거기 아직 살아남아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가능성을. (「백 년 동안의 기도」, 340쪽)


저마다 독립적이었다고 여겼던 한강의 소설이 동그라미가 되었다. 동그랗게 커지고 있었다. 내가 만난 소설이 그 동그라미의 일부였고 전체였다는 게 기쁘다. 잘 모르고 끝내 알 수 없더라도 읽을 수 있고 읽는 일이 작가와 나를 연결하는 통로라는 사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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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6-01-27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에 <희랍어 시간>을 사서 읽었었어요. 참 좋더군요. 그리고 <여수의 사랑>도 좋았구요. 한강의 소설은 애잔하게 아픈 것 같아요. 그래도 어딘가 강한 힘이 분명 있는 것 같아요.
<한강 디에션셜>은 책을 선물해주시겠다고 하셔서 저 책을 선물해주십사. 부탁해서 받은 선물이에요. 아직 읽진 않았지만요.^^˝
제법 많은 목차를 가지고 있군요.
서점을 가면 늘 한 켠에 마련된 한강 작가 코너가 눈에 밟혀 기회가 되면 한강 작가의 소설을 한 권씩 사가지고 와서 수집하고 있네요. 책들이 이쁘니까 자꾸 눈길이 가고, 소설을 쓰는 작가를 상상하며 떠올리곤 합니다.^^

자목련 2026-02-02 15:12   좋아요 1 | URL
<여수의 사랑> 좋아요! <흰>도 좋아하실 것 같아요^^
말씀처럼 한강의 소설은 아프고 슬프고 상처가 가득한데 그 안에서 작은 빛을 발견하고 나갈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서점에 갈 때마다 눈에 밟히는 작가의 책이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에요.
 


빈둥거림이 지나쳐서 이제는 뭔가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기온이 영하 저 아래로 떨어지는 날들이다. 몸만 추운 게 아니라 마음까지도 바람이 들이치는 것만 같다. 새해에 맞게 뭔가 새롭게 해야 할 것만 같은 부담은 어디서 오는 걸까. 주변에 뭐라 말하는 이도 없고 눈치를 주는 사람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면 이런 마음은 새해 증후군일지도 모른다.


몇 년 전 이즈음의 글에는 계획을 세우는 게 세우지 않는 것보다 낫지 않겠냐는 큰 언니와의 대화가 있었다. 아무런 계획을 세우지 않는 지금의 나에게 하는 말 같았다. 계획 없이 사는 나에게, 조금은 계획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지난 계획을 기록한 글을 찾아보니 대단한 게 없었다. 책을 조금 더 읽고 쓰고 친구를 만나는 일, 그게 전부였다. 운동을 하거나 외국어 공부를 하거나 투자를 하거나 하는 건 없었다. 그런 계획을 다시 세워보기로 한다. 읽는 즐거움이 완전히 소멸되지 않도록 책을 고른다. 올해의 첫 시와 첫 책은 이렇다. 조용미 시인의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만난 시, 디디에 에리봉의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책이다.




기이하다 오래전에 나는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나누었던 것 같다 같은 공간과 시간에서 서로에게 마음을 다했던 것 같다

왜 지금은 이토록 남인가 다른 생을 받으면 이렇게 다시 시작되는가

이전의 모든 생은 분명하고 또 어렴풋하다 모든 생에서 나는 나의 기억과 함께였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런 걸 알 수가 있을까 당신은 지독한 타인이고 다음 생까지는 너무 멀다

언제나 다음 생을 믿을 만큼 나는 어리석었다

여기서 그쳐야 한다 끝이라는 말을 늘 생각한다 끝은 여러 생을 거쳐 행할 줄 모르는 습관이 생겨났다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우리는 끝에 닿을 수 없다

믿을 수 없다 끝이 없는 마음이 지옥인데도 죽어도 마음은 끝을 모른다 끝이 저 스스로 죽고 싶도록 아름답게, 처절하게 우리는

(「구제적인 삶」, 전문)


모든 게 불확실하고 모호하지만 구체적인 것들을 생각한다. 하루의 일상, 하루의 시간,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분명하고 명확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루하루 늙고 있다는 게 이상하지 않다. 나이를 헤아리지 않은지 꽤 오래되었다. 혼자만의 새해 증후군은 조금 더 길어질지 모르지만 제주도에서 온 동백 사진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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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1-13 18: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은 끝끝내 오지 않아서‘ 결국 오는 순간은 죽음일까요. 동백 사진이 정말 너무 예쁘네요.

자목련 2026-01-14 15:54   좋아요 1 | URL
문득, 죽음을 대면하는 일도 모두에게 주어진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동백은 직접 보면 얼마나 예쁠까요! 아쉽지만 사진으로 담아준 이가 고맙지요^^

거리의화가 2026-01-14 08: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도 글인데 사진이 예뻐서 한참을 바라봤습니다. 화사한 색감이 회색 겨울을 날려보내는 것 같은... 추위에 건강 조심하세요^^

자목련 2026-01-14 15:55   좋아요 1 | URL
네, 저도 예뻐서 자꾸 보고 있어요. 덕분에 마음도 환해지는 것 같고요!
화가 님도 감기 조심하시고 따뜻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