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쓴다. 잊히지 않는 일들을 쓴다. 기억을 더듬는다. 어떤 기억은 바로 몇 분 전의 일처럼 선명하다. 상처로 남았을 때 그렇다. 시간이 흘러도 도무지 회복이 되지 않는 순간, 그런 기억은 여러 차례 글감이 된다. 세세한 기록으로 은유와 상징으로 재탄생된다. 시의적절 시리즈로 만난 박상수의 『생활력』에서 내가 발견한 건 그런 것이다. 상처, 기억, 회복, 위로 같은 것들.

여타의 시의적절 시리즈와 다르게 이번 박상수의 『생활력』은 시와 산문이 교차로 수록된 게 아닌 전체가 다 산문이다. 들어가는 시, 나가는 시를 제외하고 7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31편의 산문으로 이어진다. 선명하지 않은 조각의 꿈같은 기억으로 남은 들어가는 시는 작가의 유년 시절이고 대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아이를 맞는 풍경의 나오는 시는 작가의 아이의 모습이다. 두 편의 시 사이에 작가의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더 반갑고 어떤 이는 많이 아쉬울 수도 있다.

휴가, 바다, 장마, 뜨겁고 청량한 7월를 찾는다면 이 책엔 없다. 책의 처음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 있듯이. 그럼 무엇이 있는가. 시인 박상수가 있다. 그의 생활력이 있다. 그가 품어온 이야기가 있다. 어쩌면 이 기회가 아니면 들려주지 않았을 이야기, 물론 시를 향한 마음은 가득하다.

부모님의 맞벌이로 돌봄이 필요한 아이는 시골 할머니 댁으로 보내진다. 아이에게 충분한 설명은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설명한 듯 이해할 수 있었을까. 산골에서 신나게 뛰어놀았지만 밤에는 달랐다. 칡 흙 같은 어두운 밤, 잠들기 위해 눈을 감은 게 아니라 무서움에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을 초입의 당산나무에 올라가 부모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렇게 싹을 튼 불안은 명절에 큰집에 갔을 때에도 이어진다. 혹시라도 부모가 자신을 놓고 갈까 잠들지 않으려 애썼지만 결국 잠들었고 잠에서 깨었을 때 부모가 없다는 사실은 충격이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 큰아버지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는 그 길은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남는다. 그것은 불안과 불행으로 단단해졌을 게 분명하다.

그 시절 많은 아버지가 그랬듯 돈을 벌기 위해 시인의 아버지도 리비아로 떠나기로 돼 있었지만 출국 전 날 발작이 시작된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는 그 밤의 기억을 아름답게 만들고 싶지만 끝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아는 때가 온다고 해도 자신의 일부가 된 기억을 분리할 수 없는 것. 어쩌면 그런 기억과 상처가 사랑에 대한 집착으로 혹은 사랑에 대한 불신으로 문학도 고통과 상처가 전부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랑하고 유쾌한 애인을 만나 마음껏 웃어도 되고 행복해도 된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단 한 사람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그런데 그런 사랑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다시 시도해 볼 마음도 없었다. 실패는 이미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 한 사람에게만 가야 할 사랑을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그렇게도 원하는 사랑을 피했던 것이다. (101~102쪽)

등단을 하고 첫 시집을 냈지만 시만 쓰는 삶은 가능하지 않았고 생활을 위해 시간 강사, 대필, 사교육 알바를 해야 했다. 그런 시절에는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이 달아날까 두려웠을 것 같다. 그러니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 시가 좋아서 시를 잘 쓰고 싶지만 생각처럼 안 돼서 힘들었던 시간이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됐을지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아직 거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148쪽)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이 문장이 좋아서 소리 내어 읽기를 반복했다. 그게 무슨 마음이든 아직 거기 있다는 걸 잊지 않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거기 있다는 걸 아는 건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놓친다. 늘 거기 있어 그것의 소중함을 말이다. 생활을 위해 일하느라 크리스마스이브인 것도 모르던 작가처럼.


다만 여기, 우리가 밤과 낮을 같이 살며,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세계 속에서도 생활을 잃지 않고, 생활을 속이지 않고, 생활을 나누며 살아나갈 수 있다면, 그렇게 우리의 이야기가 계속될 수 있다면. (「나가는 시」, 260쪽)


어떤 기억은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기억을 안을 새로운 풍경이 필요하다. 혼자만의 조각이 아닌 우리의 그것으로 만든 풍경들. 그리하여 먼 훗날 꺼내어 볼 때 괜찮은 슬픔이 되고 다행인 기억이 된다. 결국 시인이 쓰고 싶은 시는 그런 생활이다. 그의 시집 『메신저 백』의 이런 시처럼.


흘린 듯 귀기울이다보면 우린 한데 묶여 있다는 걸 알게되죠 오래전부터 우린 고통의 목격자, 서로가 겪었던 바닥을 알고 있어요 햇빛에 반짝이는 강이 끝없이 펼쳐진 길을 따라 하염없이 걸어갔던 우리, 제발 뒤를 돌아보라고, 더이상 가지 말라고 외쳐도 구부정하게 가버리던 작은 등을 가진 우리, 무너지는 얼굴을 본 적이 있어서 우리가 지금까지 함께해온 것일까요 우린 이 행성의 소박한 여행자이지만 이렇게 묶인 서로가 있어서 다시 집밖으로 걸어나갈 수도 있는 거겠죠, 보세요, 작은 보라색 단화의 주인공이 나타났어요 담요를 두르고 은박지에 싼 고구마를 들고 아궁이로 다가가네요 토치에 불을 붙여 장작불을 만들고, 작은 불이 너울로 번져가는 동안 발그레해지는 얼굴, 어느덧 한 사람 두사람 신발의 주인공들이 모여들고 있네요 바람을 막아주고 싶어도 제 몸을 통과할 뿐이라서 저는 그저 이야기를 듣고만 있어요 장작불을 쬐는 내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구나, 누가 한숨처럼 내뱉어도 우리가 여기 모인 게 기적이야! 그런 말로 되받을 줄 아는


이런저런 말도 없이 제가 조금 늦었어요, 스르륵 같이하고 싶지만 그럼 너무 놀라서 사람들은 이 집을 뛰쳐나갈지도 모르죠 그러니까 저는 밤새 세 사람의 신발을 지키고, 끝없는 이야기를 기다리고, 바람소리를 먼바다의 파도 소리로 잠재워 세 사람의 잠을 지킬 거예요 이 집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것뿐이지만. (「오래된 집의 영혼으로부터」,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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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치는가 싶더니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 내린다. 무섭게 쏟아진다. 장마라고 하기엔 연속성이 부족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맑음이 적다. 내가 사는 곳은 흐림과 비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장마인 걸까. 습하기가 이렇게 습할 수가 없다.

습습의 날들이다. 좋아하는 감자를 쪄서 먹기 좋은 여름이지만 습한 날에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냉장고에 작은 수박의 속내도 보지 않았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수박 써는 일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다. 내가 수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박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수박을 썰어서 먹을 정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친구가 보낸 황도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다. 한 입 베어 물면 복숭아 형태가 완전히 사라지는 단맛이다. 친구는 내게 복숭아를 주문하면서 자신을 위해서는 백도를 주문했다고 했다. 황도보다 단단할 백도의 맛도 궁금하다.

책을 샀다. 아, 자꾸 책을 산다. 지난번 박솔뫼의 짧은 소설을 샀는데 블랑카 님이 단편집 『영릉에서』에 수록된 단편이 좋다고 해서 그 단편이 궁금해서 샀다. 좋아하는 시인 하재연의 신간시집 『인간이라는 환상처럼』, 산문과 시가 모두 좋다는 고명재의 시집도 한 권 샀다. 『어깨에 머리를 기대던 시절』란 제목에서 그리움과 애틋함이 느껴진다. 땡스투는 시인의 글씨가 순수하다고 하신 분에게. 박상수의 『생활력』은 시의적절 시리즈다.





고명재의 시집에는 「작약」이라는 시가 있다. 시가 있는 줄 몰랐는데 좋다. 잘 샀다 싶다. 내가 모르는 작약은 많고 내가 모르는 작약을 담은 시도 많으니까.


먹을 수 없는 작약, 그 오월의 품격

꺾을 수 없는 작약, 그 동그런 향기

약이 될 수 없는 작약, 홀로 아름다움

약도 듣지 않는 미래, 그래도 아름다움

(「작약」, 일부)

하재연의 시는 어려운 시가 많다. 상상이 되지 않는 낯선 세계. 그런데도 이상하게 하재연의 시집은 계속 사게 된다. 계속 읽게 된다. 잘 모르면서 말이다. 이번 시집에 이런 시가 있다.


반구의 너머로부터 네가 도착한다

이십 년이 지난 후에야

이렇게 시작되는 대본을 쓰는

창밖으로 눈이 쏟아진다 클리셰가 난무하는

장르 드라마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열린

창문틀이 육체처럼 삐걱거리고 있다

나의 시간들이 새어 나간다

기화하는 탄소에게 사로잡힌

탄산수의 나머지 심정으로

종반부가 다가온다

지면을 덮는다

흰 백지와 같이 절대적으로

이십 년 후의 네가 이상하게 아름다워서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눈은 이제 폭설이 되어가며

결말을 준비하고

마지막 장을 덮고서야

여름의 파도 소리는 시작된다

지구의 건너편 반구에서부터

기억처럼 도래하는 방식으로

(「여름 판타지」, 전문)


책을 사는 건 좋은 일이다. 읽으려고 산다. 좋아하니까 계속 좋아하기로 한다. 현재의 상태는 좋음이니까. 나중에는 별로가 될 수도 있고 싫음이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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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6-07-09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둥, 자목련님이 좋아하셔야 할 텐데... 좋아하실 거라 믿어봅니다. 저 이번달 시의적절 박상수 시인이라 저도 주문했어요. 저도 요새 갑자기 책을 계속 주문하기 시작했어요. 비 오는 장마철 좋은 이야기들 읽고 자목련님 마음도 보송보송해지기를 바랍니다.

잠자냥 2026-07-09 15:56   좋아요 1 | URL
100자평도 꼭 남기세요. ㅋㅋㅋㅋㅋㅋㅋ

자목련 2026-07-10 09:21   좋아요 1 | URL
좋을 것 같아요. 어제 도착한 <세부 속으로>도 그렇고요. 아, 박상수 산문도 곁에 두셨군요. 좋은 책과 즐겁고 재미가 가득한 7월이면 좋겠습니다!

건수하 2026-07-09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이셨군요 ^^
고명재 시인 미소도 참 순수하셨어요.. 저도 샀으니 얼른 읽어봐야겠습니다 :)

자목련 2026-07-10 09:22   좋아요 1 | URL
산문도 좋다고 하셔서 궁금한데 우선은 이 시집부터 읽어보려고요!
 


수국을 주문하려고 살펴보고 있었다. 올해는 분홍에 꽂혀지만 청보라를 거부할 수 없어 분홍과 청보라를 장바구니에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수국이 도착했다. 친구가 보낸 게 분명했다. 친구가 신청한 구독은 끝났다고 알고 있는데 말이다. 사진을 보냈더니 모른다는 답이 왔다. 어쨌거나 내게 온 수국은 은은하게 예뻤다. 강렬하고 화려한 수국이 아닌 다소곳한 수국이라고 할까. 수국수국의 시간이 이어진 것이다.






어제는 예약된 치과 진료가 있었다. 스케일링과 검진이었는데 비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취소할까 하다가 그냥 가기로 하고 집을 나섰다. 가로수에 수국이 있었다. 아파트 화단에도 수국과 목수국이 있었다. 작년에도 있었던가 기억하려 했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수국의 계절이었다. 자귀나무도 꽃을 피웠다. 예전 같으면 6월인데 덥다고 했겠지만 이제는 6월이니 덥다가 익숙하다. 여름인 것이다.





주문한 책도 왔다. 세 권의 소설이다. 모두 여성 작가의 소설이다. 조해진의 『우리 세희』, 백 솔뫼의 『다가오는 이마와 검은 털 고양이』, 이서수의 『첫사랑이 언니에게 남긴 것』이다. 조해진의 소설은 읽지 못한 소설도 있고 쓰지 못한 리뷰도 있지만 꾸준히 읽는다. 처음 그의 소설을 만났을 때의 느낌이 좋아서. 그렇게 말하자면 박솔뫼의 소설도 그러하다. 박솔뫼의 소설은 많이 읽지 않았지만 이번에 나온 짧은 소설이 급 궁금해졌다. 아, 김지연의 짧은 소설도 읽어야 하는데. 오랜만에 위픽 시리즈도 하나. 이서수가 소설에서 보여주는 여성 연대를 기억한다. 그들의 연대가 끈끈하고 단단하기를 바란다. 이 소설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수국도 좋고 소설도 좋다. 수국은 조금씩 시들고 있다. 수국과 소설을 짝꿍처럼 담아보려 했지만 아쉬움만 남는다. 수국을 바라보는 소설, 소설을 바라보는 수국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향하는 마음이라고 말이다. 소설과 수국의 마음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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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6-06-21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을 좋아하는 수국. 청색 한방울 머금은 청보라 수국 너무 예뻐요😍

자목련 2026-06-28 11:28   좋아요 0 | URL
수국이 체절!
망고 님 마당의 수국에 따라갈 수 없지만 마음에 드는 수국이에요^^

독서괭 2026-06-21 1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이 정말 아름답네요!! 마지막 사진 책과 책 보는 소녀 북엔드와 수국이 어우러져 멋집니다😍

자목련 2026-06-28 11:29   좋아요 1 | URL
책과 북엔드와 수국! 독서괭 님의 댓글 모두 좋아해요 ㅎㅎ

오후즈음 2026-06-2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수국 너무 예뻐요 저도 주문해야겠어요

자목련 2026-06-28 11:29   좋아요 0 | URL
어서 주문하세요!

blanca 2026-06-22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국 지는 게 너무 아쉬워요. 저는 박솔뫼 작가 <원준이와 정목이 영릉에서> 읽고 정말 너무 좋았던 기억 나서 찾아 읽다 요새는 좀 뜸했는데 다시 찾아봐야겠습니다. 요새 산수국도 참 이쁘더라고요.

자목련 2026-06-28 11:32   좋아요 0 | URL
여름과 수국은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너무 좋았다고 하신 박솔뫼의 소설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ㅎㅎ
 


얼마 전 이불을 버렸다. 침낭도 버렸다. 그 가운데 몇 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것들도 있었다.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예쁜 이불이라서 버리지 못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사라진다고 해서 어려움이 생기는 일은 없었다. 단지 버리지 못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소유한다는 것, 그것이 내 것이라는 어떤 욕심이 자리했던 것이다. 둘러보면 그런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런데도 나는 버리지 못한다. 도대체 무엇 때문일까?


오랜만에 친구나 지인을 만나면 주식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가파르게 상승하는 코스피를 보면서 지금껏 주식을 하지 않는 나는 잘못한 사람처럼 여겨진다. 그렇다고 주식을 하는 모두가 이익을 낸 건 아니다. 게으르고 무지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이런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내가 단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삶의 목적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 속 인물이 대사처럼 목적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이런 마음은 미국의 소박한 삶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만든 잡지 「플레인 Plain」에 실린 27편의 에세이를 담은 책 『간소한 삶』를 읽으면서 깊어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따라가는 삶. 과감하게 무언가를 내려놓고 버리는 삶. 그들이 들려주는 진솔한 이야기는 나를 돌아보게 만든다. 지금 사는 삶이 어떠냐고 묻는다. 농부, 시인, 평범한 주부이자 엄마, 할아버지, 환경운동가 등 다양한 필자가 경험에서 우러난 고백을 들려준다. 이 책을 읽고 당장 내 삶이 크게 변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알고 있다. 그러나 한 번씩 생각날 건 분명하다.

한 편으로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30여 년 전에 나온 책이니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동떨어진 이야기는 아니냐고 말이다. 곳곳에 기독교적 색채와 ‘아미쉬 공동체’에 대한 부담을 가질 수 있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책을 읽다 보면 미디어와 AI에 의존하며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물질만능주의에 빠져 그것에 매몰된 자신을 돌아보게 될 것이다. 혼자가 편하고 간편하고 빠른 속도에 익숙해 잠깐의 기다림도 참지 못하고 조바심을 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돈이면 다 되는 세상, 그 안에서 우리가 놓치는 게 무엇인지 말이다.

첨단 기술의 발전으로 놀라운 상품을 생산하고 더 많은 곡물을 재배하지만 누군가는 굶주림과 가난에 죽어간다. 책에서 마주한 삶은 과거 우리가 살아온 모습의 조각이다. 이웃과 인사를 나누고 시간을 내고 서로를 배려하고 좋은 일이 생기면 함께 즐거운 마음을 나누는 일. 물물교환, 품앗이, 직접 옷을 만들어 입고 잼을 만들어 먹는 일, 자동차가 아닌 자전거를 이용하는 삶. 지금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찾는 행복과 기쁨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책이 의미가 있다.

우리 삶에서 돈이 자치하는 자리를 줄이며 균형을 찾는 일은 상당히 도전이 될 것이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의 가치를 이해하고 우리가 쓰는 돈의 연결고리와 그것이 미치는 효과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돈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다. (71쪽)






음식에 관한 한 가장 멋진 점은 물론 먹는 것 그 자체다. 그러니까 함께 먹는 것이다. 혼자 먹으면 별 재미가 없다. 음식을 나누며 우리가 뜻깊은 일을 함께 기념하고 이웃을 사귀고 베풀고 감사하고 삶을 나눈다. 향연과 축제, 작은 파티, 공동식사를 생각해보라. 우리에게 가장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음식 자체가 아니라 식탁에서 생겨나는 유대감이다. (158쪽)

우리가 정말 바라는 삶은 무엇일까? 하루라도 스마트폰이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삶, TV 플러그를 뽑으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두려움. 그러나 TV는커녕 라디오를 꺼도 아무것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토록 원하던 고요를 느끼고 아이와의 대화는 풍요로워지고 노래를 부른다. 책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한정된 삶일까?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더욱 그러하다. 스마트폰 대신할 수 있는 다른 놀이를 찾을 수 있는 능력을 잠재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너무 많은 정보에 혼란스럽고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일, 나만 그럴까? 어느 순간 나만의 기준을 사라지고 주변의 삶을 따라가기에 급급하다. 주어진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살아간다. 정체를 모르는 욕구 불만에 계획 없이 무언가를 사들이고 대화는 단절된다. 단답형의 대화, 줄임말로 이어지는 문자.

더 이상 가까운 이의 전화번호를 외우지 않는 나를 발견했을 때 깜짝 놀랐다. 손의 감각에 의지할 뿐 도어록 비밀번호가 생각나지 않는 때도 있다. 스마트폰에 메모했으니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과거로 회귀한 듯 모두가 자급자족하며 공동체의 삶을 꾸리며 『간소한 삶』처럼 살라는 게 아니다. 그렇게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우리가 놓친 게 무엇인지는 인지하고 살아야 한다.

리 부모님이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거두고 우리 아이들이 낯선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서 지내는 게 정말 중요할까? 부모와 아이들을 갖다 맡긴 후 이론적으로 복잡한 관계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 늙지도 어리지도 않은 사람들의 삶은 과연 좋아졌는가? 좋은 삶이란 서로서로 복잡한 관계를 맺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것이 온전한 삶의 핵심이다. (305쪽)

『간소한 삶』을 읽다 보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러할 것이다. 주제적인 나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생각한다. 그와 같은 삶을 살 수 없겠지만 주변을 정리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월든』의 한 구절을 생각하게 된다. 내면의 소리, 내가 외면하는 소리, 그러나 어딘가에서 계속 들려오는 소리.


인간은 언제나 자기영혼이 하는 진실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은 희미하지만 꾸준한 소리다. (『월든』, 286쪽)


같은 의미로 최근에 읽은 호세 카를로스 루이스의 『우아한 사고를 위한 철학』도 같은 맥락이다. 디지털 화면이 지배하는 세상, ‘스크린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각한다. 스크린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가 스크린를 조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메타버스, AI, 기후변화, 가상현실과 적절하게 조화하며 그 안에서 나만의 행복을 찾아 살아가야 하니까.


누군가 당장 변화를 찾아 행동할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와는 다른 삶이라 치부할지도 모른다. 나에게 맞는 간소한 삶을 찾는 일. 그게 필요하다.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고 소중한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 내가 좋아하고 마음이 고요해지는 삶을 향한 시작을 『간소한 삶』을 통해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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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6-19 1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주식은 책입니다! 그리고 제 주식은 단 한 번도 마이너스로 간 적이 없습니다! ㅎㅎ

자목련 2026-06-19 12:01   좋아요 2 | URL
이제부터 저도 제 주식은 책입니다!
잠자냥 님의 댓글이 무지 든든합니다. ㅎㅎ
점심 맛있게 드시고요!

hnine 2026-06-19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도서관에서 대출하여 읽은 소로의 월든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에 이번엔 구입을 해야할 것 같아 알라딘에 들어왔는데 이 글을 읽게 되었네요. 간소한 삶을 위해선 우선 마음 부터 간소하게 정리하며 살아야 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간소함보다 우선해야 할 것 같아요. 그래서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요.

자목련 2026-06-21 10:07   좋아요 0 | URL
마음부터 간소하게 정리하는 일, 정말 그게 시작인데 자꾸 욕심이 파고듭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채워지고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잊어버려요. 나인 님, 소로와의 즐거운 만남 이어가시길 바라요.
 



일상을 산다. 하루를 산다. 똑같은 날들이 지루하고 때로는 지겨워서 뭔가 이벤트가 있기를 바란다. 아주 작은 이벤트는 신선하고 새로운 활력을 불러오기도 하니까. 그러다 제법 큰 이벤트가 발생하면 그 뻔한 일상이 뻔한 하루가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대단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마음을 졸였고 전전긍긍하며 살았다. 어찌할 수 없는 앞에 한없이 작아지고 무기력하게 말이다.

6월이 되었는데도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달라지고 싶었는데 달라져야 했는데 말이다. 지난 주말에 친구가 다녀갔다. 친구는 이사 문제로 정신이 없었다. 사는 집을 팔았는데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보관 이사를 했고 당분간 살 공간을 원룸을 구했다. 그리고 해결해야 할 문제가 끝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를 만나러 왔다. 주말에 늦잠도 못 자고.

내가 고집을 부렸다. 나를 만나러 오라고. 겨울에 얼굴을 보고 두 계절이 지났다. 만나지 못했던 날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았고 그 시간은 허투루 보낼 수 없었다. 아쉬움을 남기고 친구는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오래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무기력에서 벗어날 생각, 줄어들지 않는 불안과 찾아야 할 일상에 대해서 말이다. 어떤 일에 대해, 어떤 시간에 대해, 어떤 요일에 대해 내가 부여한 의미들에 대해서. 그 시간이, 그 요일이, 그 느낌이 찾아오는 것들에 대해서. 의미를 부여했기에 나는 힘들었다. 의미를 부여했기에 나는 그것들이 두려웠다. 일어난 일들에 대해, 되돌릴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잔뜩 부여한 의미. 그게 문제였다.




나를 아끼는, 나의 소중하고 귀한 친구는 다시 컴퓨터를 켜고 무언가를 쓰는 루틴을 찾으라고 말한다.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라고. 그래서 나는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잔을 구매했다.계획에 없던 일이다. 다시 충동의 일상을 살기로 했다. 그리고 읽으려고, 궁금했던 책을 기록한다. 이 책들은 5월의 책이다. 읽기는 느리고 더디지만 6월의 책도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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