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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남자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7
외젠 이오네스코 지음, 이재룡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태어난다. 양육되고 조금씩 자신의 자아를 형성한다.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지 않은가.  ‘나’는 어디서 와서 이 세상에 ‘나’라는 이로 살아가는 것일까. 누구나 한 번쯤 깊이 고민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 정답도 없거니와 존재라는 명제만 생각할 수 없다는 걸 안다. 생이라는 굴레는 그 질문 외에도 답을 찾아야 할 것이 많으니까. 만약, 존재에만 올인 할 수 있다면 답 근처에 다가갈 수 있을까? 외젠 이오네스코의 『외로운 남자』의 화자처럼 말이다.

 

 불우한 가정사를 지닌 우울하고 권태로운 남자에게 친척이 남긴 유산은 그를 일에서 벗어나게 만든다. 지겹던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생겼으니 그에게 남은 건 행복하게 사는 것 뿐이다. 작고 낡은 호텔을 떠나 자신만의 아파트를 장만하고 가정부를 두고 홀가분한 생활을 시작한다. 식당에서 혼자 끼니를 해결하고 거리를 거닐며 주변 인물들을 (자신을 경계하는 수위, 지정 자리를 내어주며 부러워하는 식당 종업원, 개를 기르는 이웃 여자)관찰한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지 않아도 되고 하고 싶은 일만 해도 되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삶이니 그는 충분히 만족스럽다.

 

 하지만 아무리 풍요로운 일상이라도 혼자 깨어나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사는 일은 고독하다. 거기다 건물은 무너지고, 폭동이 일어나고, 잔혹한 살인이 일어나고, 독재는 이어지는 세상까지 그가 불행할 이유는 충분하다. 이 끔찍한 세상을 흉보고 비판하고 술잔을 나눌 누군가를 원하지만 그는 찾지 못한다. 물론 그가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다. 전화를 설치하지만 타인에게 자신의 번호가 알려지지는 건 원하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 학생에게 인생에 대한 생각을 털어놓지만 병원을 추천받는 일로 끝난다.

 

 다른 시도로 단골 식당 여 종업원과 동거를 한다. 사랑을 나누고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이 역시 이별로 이어진다. 그를 불안과 그의 환멸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들의 눈에 그는 그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절대 외롭거나 불쌍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절대적으로 외로운 사람이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우주에 대한 욕망을 가진 이였다. 평범한 삶이 그에게는 너무도 무겁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모든 것이 존재하면서도 부재하며, 단단하고 투박하면서도 한없이 허약한 듯한 이 느낌이 야릇하다. 이 세계가 진정 존재하는 것일까? 조금만 허점이 있어도 모든 것이 수천 조각으로 부서질 수 있다. 내 몸이 조화의 눈부신 잎사귀의 일부라 생각되자 무(無)에 대한 구토가 일어난다. 그리고 충만에 대한 구토. 어떻게 버틸 수 있을까, 시간이 남아 있다면 얼마 동안이나 버틸 수 있을까? 아마도 오직 순간만 있으리라.’ 89쪽

 

 ‘존재하는 것은 그냥 있는 것과 같은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이 세계는 용해될 수 없는 실재이거나, 아니면 절대적 실재의 껍데기일지도 모른다. 실재를 감추고 있는 단순한 커튼일지도. 동시에 연속적으로 나타나는 수십억 개의 이미지와 목소리, 이런 모든 것은 부동의 근본적인 토대에 의해 지탱되고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추측일 뿐. 이런 토대가 있기를 절망적으로 원했다’ 107쪽

 

 그가 예전과 같이 직장에 다니고 그들과 어울렸다면 그의 생은 달라졌을까? 여전히 그에게는 존재에 대한 갈증이 있었 것이다. 육체적 욕망을 채우고, 계절이 바뀌고, 이념이 대립과 화해를 반복하고, 세상이 변하는 것도 그에게 어떤 의미도 부여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그 답에 가장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건 죽음이었다. 

 

 ‘사다리가 빛났다. 정원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나를 둘러쌌고, 나는 그 일부가 되어 그 한복판에 있었다. 여러 해가 지났다. 아니면 몇 초가 흘렀다. 사다리가 내게 다가왔다. 거의 내 머리 위에 있었다. 여러 해가, 아니면 몇 초가 흘러다. 그것이 멀어져 녹듯이 사라졌다. 사다리가 사라지고 나서는 덤불이, 나무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선문과 함께 기둥들이 나에게 깊이 스며들었던 그 빛의 무엇인가는 남았다. 나는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였다.’ 155~156쪽

 

 쓸쓸하고 어두운 소설이지만 선명한 질문을 남기는 소설이다. 외젠 이오네스코는 이 소설에서 화자의 이름을 단 한 번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주변인물의 이름이나 사회적 지위, 직책을 언급하면서도 말이다. 화자를 비롯해 우리 인간이 우주의 작은 부속물에 불과하다는 걸 강조하는 듯하다. 버튼 하나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세상에 사는 우리는 어떤가. 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주목받기 위해, 시간마다 시시콜콜 일과를 사진과 140자의 글자에 담아 세상에 내 놓지 않는가.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와 같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나로 살고 있지만 다른 나를 갈망하며 수많은 사람들 속에 존재하지만 나와 같은 이는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것에 절망하면서도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는가. 누구도 그 기다림의 끝에 죽음이 있다는 건 인정하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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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12-14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의 글을 읽으니 '존재'에 대한 여러 생각들이 마구 떠오르네요. 그리고 쇼펜하우어가 여러 차례 언급했던 '마야의 베일'도 떠오릅니다. '필사해 둔 부분'이 있어서 (매우 길지만) 덧붙여 봅니다.
* * *
시간에 있어 각 순간은 오직 선행하는 순간, 즉 그 순간의 앞 순간을 없앤 후에만 존재하며, 그 순간 자체도 마찬가지로 곧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그 내용의 연속은 별도로 해도 마치 꿈과 같이 헛된 것이고, 현재는 이 둘 사이에 있는 넓이도 존속성도 없는 경계에 불과한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충족 이유율의 다른 모든 형태에서도 이와 같은 공허함을 다시 인식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과 마찬가지로 공간도, 또 공간과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속에 동시에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원인과 동기에서 생기는 모든 것은 상대적인 현존을 가지고 있을 뿐이며, 이와 같은 성질은 그것과 동일한 형태로만 존재하는 다른 것에 의해, 또 그러한 다른 것 때문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한 견해의 근본은 옛날부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러한 견해를 이야기하며 사물의 영원한 유동을 탄식했고, 플라톤은 그 대상을 언제나 생성될 뿐 결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경시했다. 스피노자는 그러한 것을 존재하고 영속하는 유일한 실체의 단순한 우연성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칸트는 이렇게 인식된 것을 물자체에 대한 단순한 환상으로 간주했고, 마지막으로 오랜 옛날 인도인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마야(베단타 학파의 술어로 환(幻) 또는 화상(化像)의 뜻, 현상 세계는 진제의 입장에서 보면 마야다)'다. 인간의 눈을 덮고 이것을 통해 세계를 보게 하는 거짓된 베일이다. 이 세계는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또 없다고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꿈과 같은 것으로, 방랑자가 멀리서 보물로 생각하는 모래 위에 반짝이는 햇빛과 같으며, 또 그가 뱀이라고 생각하고 던져 버리는 새끼줄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中에서

자목련 2012-12-14 18:41   좋아요 0 | URL
oren 님은 이렇게 어려운 내용이 담겼을 책을 읽으셨군요.
영원한 탐구의 주제가 아닐가 싶어요, 존재란.
소설을 읽는 동안은 고독과 존재란 단어에 둘러싸였지만 금세 잊고 마는..
 

 

 당신의 조언은 언제나 힘이 된다. 당신의 응원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불안하고 불안하다.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을 들었지만 말이다.  그리하여 얼어붙은 불안을 녹이기 위해 습관처럼, 의식처럼 책을 사들이고 있다. 때마침 문학동네 세계문학은 친절하게도 이벤트 중이다. 컵이 탐나서, 그런 핑계를 댈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이미 컵은 도착했고 미하일 조셴코의 감상소설을 포함, 이런 책들을 들인다.

 

 좋아하는 작가 김숨의 장편을 읽다가 멈추었지만 2013년 현대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는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할 길은 이 책을 주문하는 일, 수장작인 김숨의 『그 밤의 경숙』과 더불어 조해진, 김연수의 단편도 만날 수 있다. <국수> 같은 소설을 기대한다. 아직 읽지 않았으니 말할 수 없는 소설이다. 리뷰를 쓸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요즘 리뷰다운 리뷰(그러니까 이건 내 주관적인)을 쓰지 못하고 있다. 한강, 김선우, 백가흠, 정소현의 소설도 아직 읽지 못했다. 도대체 나는 요즘 무슨 책을 읽고 있는 걸까. 

 

 한국 문학을 선택할 때, 특히 시집을 주문할 때마다 도움을 받는 이웃(내가 매우 좋아하는 이웃)이 있다. 신간 시집 김주대의 『그리움의 넓이』,읽지 못한 구간 시집 이선영의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를 함께 주문했다. 폭설로 배송은 늦어지려는지, 예상 도착 일이 여느 때보다 늦다.

 

  12월은 21일 남았다. 12월의 리스트는 아직 그대로다.  줄어들기는커녕 리스트가 늘어나고 있다. 2013년의 리스트를 작성해야 할 시간도 곧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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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문학동네 시인선 28
박연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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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내렸고 세상은 느려졌다. 자동차는 길을 떠나는 대신 달콤한 잠에 취했고 안부를 묻는 전화는 틈을 두고 이어진다. 동(動)으로 가득했던 세상이 잠시나마 정(靜)으로 변화한다. 곧 사라질 것을 알기에 요란하지 않게 맞이하려 해도 닿는 곳마다 마주하는 눈은 이런 시를 찾게 만든다. 겨울이라는 계절과 하나가 되는 누군가를 데리고 온다.

 

 <겨울의 고도(高度)>

 

 빨간 코트가 잘 어울렸으면 좋겠다

 얼굴 위로 자꾸만 음영이 드리워지는데

 나를 덮은 우주의 그림자가

 나무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겨울의 갈라진 살결, 그 가느다란 틈에

 나는 끼워져 있다

 

 앙상한 얼굴의 낯선 사내가

 가끔 주먹으로 두드려보는

 나는 겨울이 앓는 문둥병,

 눈썹이 빠지고 코가 주저앉은 채로 휘파람 분다

 

 애인은 내내 화두였다

 전화는 오래도록 먹통이었고

 바람이 유난히 보채는 날에는

 거리를 배회하는 젊은 여자들 오목한 허리선에

 베이고 싶었다

 

 입 열면 허연 입김

 겨울에 피어나는 그을음처럼, 아득히 퍼지고

 나는 겨울의 고도를 생각하며

 자주 떨었다 (42쪽)

 

 <노란 꼭대기>

 

 겨울은 머리카락들이 수선을 떨며

 돌연 사상을 전향하기 좋은 계절

 끝내 완전한 오해로 이루어진 성에 들어가

 불 지르고, 함께 타고 싶다

 나는 정오를 모르고 오후 2시를 몰라요

 노래 부르다

 뜨겁게 녹아내리리라

 

 너는 ‘나’라는 비린내를 묻히고 돌아다니는 바람

 

 떨어지는 깃발

 끊기지 않는 리듬

 빨간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뛰어다니는

 시(詩)

 

 누가 내 삶의 가장자리를 따라

 푸른 실로 시침질하네

 

 비틀린 뿌리를 가진 작은 꽃들이

 비로소 편안히 시들 수 있도록 (61쪽)

 

 박연준의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빼놓아서는 안 될 시는 바로 아버지에 대한 시다. 당신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냐고, 당신은 아버지를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없다. 방 한 쪽에 죽은 아내의 사진과 당신의 사진을 나란히 걸어놓은 내 아버지는 늙었고 병들었다. 먼 훗날, 혹은 멀지 않은 날에 내 아버지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볼 시간이 올지도 모른다. 육체뿐 아니라 정신까지 허약해진다는 건 지독하고 날카로운 고통일 것이다.

 

 <뱀이 된 아버지>

 

 아버지를 병환에 걸어놓고 나왔다

 얼굴이 간지럽다

 

 아버지는 빨간 핏방울을 입술에 묻히고

 바닥에 스민 듯 잠을 자다

 개처럼 질질 끌려 이송되었다

 반항도 안 하고

 아버지는 나를 잠깐 보더니

 처제, 하고 불렀다

 아버지는 연지를 바르고 시집가는 계집애처럼 곱고

 천진해 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아버지의 팥죽색 얼굴 위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다

 미소처럼,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지나가는 뱀을 구경했다

 

 기운이 없고 축축한 ― 하품을 하는 저 뱀

 

  나는 원래 느리단다

  나처럼 길고, 나름답고, 축축한 건

  원래가 느린 법이란다

  그러니 얘야, 내가 다 지나갈 때까지

  어둠이 고개를 다 넘어갈 때까지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20~21쪽)

 

 <물빛, 정오>

 

 12시라는 찻잔 안에서

 애벌레처럼 꿈틀, 피어나는 아버지

 어디 숨어 있었나 했더니

 밤새 줄어들고 줄어들어

 찻잔 속 노란 애벌레가 되었다

 아버지는 가냘픈 목소리로 운다

 아버지는 100년 전

 자신이 화분 속에 심어진 고양이었다는 걸 기억할까?

 

 찻잔 속에서 늘어지게 자다

 가끔 구름이 되기도

 가끔 허공이 되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도 아버지는 성실하다

 

 귀여운 귀여운 아버지

 사그라지는 몸

 사그라지는 목소리

 사그라지는 실체

 

 마침내 잦아드는,

 흘러넘치는

 아버지라는 액체 (30쪽)

 

 어린왕자가 뱀에 물려 자신의 별로 돌아가는 것처럼 아버지는 자신의 별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만의 꽃과 나무가 기다리는 곳으로 말이다. 그러니 박연준의 다른 시에 뱀, 나무, 꽃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것이리라. 원래는 팔이 있었다 / 어느 날 이유 없이 두 팔이 잘리자 / 온몸으로 한을 품어 나무의 정수리에서 (나무의 약력 중에서, 31쪽), 너는 나의 캔버스에 / 낯선 초록과 / 열두 마리 키스를 데려왔지 (나무 중에서, 80쪽) 껍질을 벗어놓고 잠든 뱀은 모른다 / 자신이 털어낸 그림자 속에 / 누가 들어가 잠드는지 (가벼운 숲 중에서, 86쪽), 때문에 그녀의 시는 지극히 몽환적이며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연애의 그늘>

 

 내가 아래로 아래로 떨어질 때

 입술은 위로 위로 흐르리

 역방향으로 흐르는 비틀린 빨강이

 허공에 핀 찰나의 꽃이라고 생각하리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손가락은 사물을 가리키는 막대로 전락하고

 손톱은 가장 딱딱한 미소를 짓는다

 소리가 나지 않는 사고라니,

 누군가 봄을 꺼버렸다

 

 동공 없이 뻥 뚤린 눈 알 속에

 개구리들이 알을 낳고, 알들은 곧 썩는다

 식탁 위 음식들은 왜 모두 죽어 있을까?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긴,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

 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

 톡, 톡,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

 오래 생각하면 어둠도 늙는다 (74~75쪽)

 

 <기억은 청동빛으로 굳는다>

 

 거울 속에서 너는 내 얼굴을 침범하고

 네 눈으로 나를 본다

 너는 권태,

 라고 말한다 코끝으로

 너는 소리를 내지 않는다

 코끝이나 무딘 이마 중앙으로 표현한다

 

 거울 속에 내 모습이 비치지만

 그곳에서 나를 바라보며 도리질 치는 건

 너다 그런데 나는 왜 눈 속에서

 날 바라보는 네 눈을 봐야 하는 걸까?

 

 거울,

 거울 속에서

 너는 몸이 아니라 시간으로 나타난다

 너는 악보의 끝세로줄처럼 서 있다

 너는 한쪽 팔이 잘렸고 그것은 유래 깊은 사건 때문이었다

 그곳에 바다는 없었지만 너는 바닷물에 화상을 입었고

 내가 불탔고, 기억은 팔이 세 개가 되었다

 거울 밖에서 돋아난 겨울 속엔 지렁이 세 마리가 산다

 움직이지 않는 채로 자란다

 

 거울 속에서 나를 뒤집어쓴 너는

 끊어지는 허밍으로 존재하고

 우리는 밤의 치마를 들친 벌을 받는다 (52~53쪽)

 

 박연준의 시에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본다. 부모, 형제, 연인, 친구와 보낸 시간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다. 희미해진 사진 속에 갇힌 얼굴을 발견한다. 잊고 있던 이름들, 잊었다고 믿었던 이름들을 불러온다. 어쩌면 12월이라서, 연말이라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 볼 핑계를 찾으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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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안 곳곳에 있는 달력은 몇 일 전부터 12월의 시간을 살고 있다.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고 성탄절이 있고 아이의 방학이 있고 이별이 있다. 12월엔 눈 다운 눈이 내릴 것이고, 게으름의 날들은 늘어날 것이다. 12월이 되면 Camel의  Long Goodbyes와 Club 8의 Love in December 를 들을 것이다. 12월의 첫 주문으로 이혜경의 너 없는 그 자리와 김성중의 『개그맨』을, 읽게 될 책으로는 이정록 시인의 시집 『어머니 학교』제스민 워드『바람의 잔해를 줍다가 될 것이다. 사실은, 읽겠다고 사들인 책들이 많지만 차마 그 제목들을 나열할 수 없다.

 

 온라인 서점에서는 올 해의 책에 대한 투표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작가, 인상 깊었던 책에 투표를 했다. 해마다 그렇듯 돌아보면 시간은 왜 이리 빠른지, 지난 1월에 내가 했던 다짐과 생각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 의지만으로 할 수 없는 일들을 제외하고는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뭐, 나라도 나를 칭찬해줘야지 어쩌겠는가.

 

 두꺼운 커튼을 주문해야 한다. 착용감이 좋은 내의도 골라야 한다.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는 서로가 더 높이 오르겠다고 경주를 하는 듯 거침없이 오른다. 작년에 쓰지 못한 크리스마스와 새해 인사를 보내야 한다. 카드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문자가 아닌 짧은 손편지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눈이 내리는 12월, 예고없이 도착하는 편지와 산타의 선물을 받고 싶기도 하다. 산타라니, 가당치 않은 말이긴 하다. 그래도 산타 할아버지 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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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30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내일이면 12월이 시작되네요.
행복하게 마무리 하는 한 달이 되었으면 해요.^^
'너 없는 그 자리' 담아갑니다.^^

자목련 2012-12-01 21:16   좋아요 0 | URL
차분하게 보냈으면 좋겠어요.
많이 추워졌어요.
프레이야님의 12월,건강하고 평온한 바라요^^*

라로 2012-11-30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2월엔 제 남편의 생일이 있어요. 제가 12월에 기다리는 날이지요. 그런데 올해는 19일에 레미제라블 영화가 기대를 하게 만드네요. 기대하는 12월을 맞기 위해서 부지런히 레미제라블을 읽어야 하건만,,,오늘 밤을 세워서 읽을까 하다가 체력의 한계를 느끼는;;;
참 여긴 진눈깨비가 내렸어요. 12월엔 말씀하신대로 눈 다운 눈이 오겠죠??? 저도 자목련님이 읽게 될 책을 같이 읽고 싶네요. 손 따듯하게 지내세요.

자목련 2012-12-01 21:18   좋아요 0 | URL
12월이 행복한 이유가 벌써 두 가지네요.
내내 행복하면 좋겠어요.
<어머니 학교>는 지금 읽고 있는데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해요.그래서 좋아요.
 

 

 주저하다간,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말은 옳았다. 미리 겁을 낼 필요도 없었다. 어떤 결과든 시작이 있어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떠난 것이다. 떠났다는 말은 과장된 게 아니다. 과장되었다 해도 좋았다. 그 날 나는 아침 6시 40분에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아침을 먹었다. 설거지를 하고 커피는 마시지 않았으며 창문을 열어 맑은 하늘을 확인했다. 출발하면서 문자를 보낸 순간 이미 나는 그 도시에 도착해있었다. 허락된 시간은 충분하지 않았다. 적어도 내 욕심에는 그랬다. 그러나 충만했다.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고 다시 커피를 먹고 다시 길을 되돌아 집으로 오기까지 나는 내내 웃음을 지었고 피곤하지 않았다. 나의 오른발도 붓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 몸은 나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기다렸던 하루였는지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나 혼자 실컷 떠들었다. 그 날 밤에 생각해보니 묻고 싶은 이야기는 더 있었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더 많았다. 그렇다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소중하지 않은 게 아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내게는 보석같다. 불편할 수도 있었을 만남, 우리는(어쩌면 나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기뻤다. 그래서 즐거웠다. 고맙다는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좋았다는 말도 말이다. 더 자세한 단어로, 더 많은 문장으로 기록하고 싶은 마음도 크지만 여기까지만 쓰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제 더 자주 만날 것이고, 더 많이 서로를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새로운 11월을, 새로운 가을을 새겨준 이가 당신이라서 좋다.

 

 시집을 읽고 있고 두 권의 시집을 기다린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모두 창비의 시집들이다.  문성해의 입술을 건너간 이름에서 처음 마주한 시는 <결이라는 말>이란 제목의 시다.

 

 결이라는 말은

 살짝 묻어 있다는 말

 덧칠되어 있다는 말

 

 살결 밤결 물결은

 살이 밤이 물이

 살짝 곁을 내주었단 말

 와서 앉았다 가도 된단 말

 

 그리하여 나는

 살에도 밤에도 물에도 스밀수 있단 말

 쭈뼛거리는 내게 방석을 내주는 말

 

 곁을 가진 말들은

 고여 있기보단

 어딘가로 흐르는 중이고

 

 씨앗을 심어도 될 만큼

 그 말 속에

 진종일

 물기를 머금는 말

 

 바람결 잠결 꿈결이

 모두모두 그러한 말 

 - <입술을 건너간 이름, 50~51쪽>

 

 남아 있는 11월의 날들에 나는 내내 행복할 것이다. 결벽증처럼 대했던 11월에, 연두빛 애정의 싹이 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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