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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평점 :
지금의 나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만들어졌다는 말은 좀 이상하고 나를 채운 것들은 무엇일까라고 말하는 게 더 적당할지도 모른다. 어린 나를 돌본 손길, 모르는 것들을 하나씩 알려준 이들, 개인이 아닌 사회의 구성원으로 알아야 할 것들, 보편적 가치에 대해서 나는 누구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을까? 가장 가까운 이들의 영향은 언제나 막강하다. 그냥 지나칠 정도의 소소하고 사소한 것, 습득하지 않으면 끝내 모르고 말 작은 예절 같은 것, 그리고 선과 정의에 대해서 나는 누구를 통해 알게 되었는가.
클레어 키건의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내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생각지 못한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의 존엄에 대해서, 삶의 기본적 존중과 아름다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니 이 소설을 아름답지만 비참하고 평범하지만 비범하다. 그저 중년의 가장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잔잔하고도 평온한 삶의 풍경이면서 추악한 삶의 이면을 들쳐내는 목소리다. 그렇다고 지독하게 불편하거나 괴로운 소설은 아니다. 그래서 더 훌륭하고 더 많은 이들에게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진다.
이제 소설을 들여다보면 주인공 펄롱은 착실한 가장이다. 석탄 목재상을 하는 그에겐 아내 아일린과 다섯 딸이 있다. 풍족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하지도 않은 살림, 건강하고 예쁜 딸이 있으니 충분하다. 그럼에도 쉼을 위한 여유는 없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마저 내일 해야 할 일의 목록을 정리하고 무엇이 필요한가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시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마냥 즐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상념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바쁘게 살아온 시간, 쫓기듯 살아온 삶, 무언가 놓치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 펄롱은 생각했다. 삶이 달라질까 아니면 그래도 마찬가지일까 ㅡ 아니면 그저 일상이 엉망진창 흐트러지고 말까? (29쪽)
요즘 펄롱은 뭐가 중요한 걸까, 아일린과 딸들 말고 또 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했다.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 같지도 뭔가 발전하는 것 같지도 않았고 때로 이 나날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44쪽)
그의 어머니는 미혼모였다. 펄롱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다. 어머니와 자신을 거두고 돌봐준 미시즈 윌슨 덕분에 잘 성장할 수 있었다. 미시즈 윌슨에겐 그런 의무가 있었던 건 아니다. 돌이켜보면 지금의 펄롱은 그분의 돌봄에서 시작되었다. 그걸 모르지 않기에 펄롱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을 배려하고 도우며 살았다. 자신은 운이 좋았다.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는 수녀원에 배달을 갔다가 마주친 소녀를 지나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상관없는 소녀를 그냥 모른 척 지나쳐도 될 일이었다. 그러나 펄롱은 아버지였고 자신의 딸들을 떠올렸다.
지역의 수녀회와 수녀원의 힘은 막강했다. 이런저런 소문이 돌았지만 아무도 그 소문의 실체를 파악하려 하지 않았다. 미혼모와 그들의 아이들을 수녀원에서 어떻게 대하는지 말이다. 그저 소문과 무관하기를 바라며 살았고 자신의 딸들이 그 소문의 주인공이 되지 않기만을 바라며 살았다. 그게 가장 현명하다고 믿으며 살았던 것이다. 그러나 펄롱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소녀를 거부할 수 없었다. 단지 딸 다섯을 둔 아버지라서가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고 배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펄롱처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19쪽)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120쪽)
소녀와 함께 둘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펄롱은 가볍고 당당함을 느꼈다. 펄롱을 바라보는 시선은 이미 냉대에 가깝다. 그러나 펄롱은 집으로 가는 길을 멈추지 않는다. 아내 아일린과 딸들의 태도를 짐작할 수 없다. 어떤 내일이 펼쳐질지 알 수 없다. 자신이 받아온 것들을 소녀에게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다. 대단한 것들이 아닌 사소한 것들로 자신을 이끌어 준 미시즈 윌슨처럼. 아마도 그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묵묵히 나아갈 것이다.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의 아픈 역사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펄롱이라는 한 개인의 시선을 통해 보여준다. 세상을 따뜻하다고 믿는 펄롱의 믿음과 행동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말이다. 그의 손길에 모두의 손길이 더해지기를 바란다. 그의 뭉뚝하고도 다정한 손길이 시리도록 차가운 세상에 온기를 전한다. 그 온기가 당신에게도 닿았으면 한다.
『맡겨진 소녀』에 이어 『이처럼 사소한 것들』도 영화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영화로 만나는 벅찬 감동을 기대해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