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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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도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게 맞을지도 모른다. 코로나 시국이라는 게 마음을 쪼그라들게 만든다.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자영업자의 소식을 전하는 뉴스를 보고 있는 게 힘들다. 간신히 그 자리를 벗어나 살고 있다는 게 아프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고, 그렇다고 울 수도 없으니 웃음을 지어야 하는 연습을 해야 할까. 그래서 더 감사한 일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기도 한다. 과거로 속해버린 열정, 언제 실행될지 모르는 계획들. 그럼에도 하루하루를 살게 하는 건 무엇일까. 삶을 가능하게 만드는 건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을까. 잡을 수 없는 존재, 사라져버린 사랑일지라도.


‘안나’에게는 그럴지도 모른다. 휴가차 떠난 여행지에서 우연히 맺어준 운명. 그와 결혼을 하고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결혼식은 미루었고 친구들의 축하만 받았다. 코로나 여파로 안나는 여행사에서 퇴직했다. 화자인 ‘나’는 보험사 직원으로 안나와 대학 동기로 어느 시절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냈다. 친했다면 친했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지 않은 관계다. 오랜만에 연락을 해도 불편하거나 이상하지 않은 그런 사이. 종종 안나의 SNS에서 그녀의 일상을 확인하고 한 번씩 통화를 하고 안부를 나눈다. 안나는 도서관 통로를 걷는 장면을 올리면서 유명해졌다. 안나는 도서관에서 AS안심결혼보험이란 책을 대출하는데 그건 책이 아니라 보험 약관집이었다. 약관집을 중고로 구하려는 이가 많다는 사실에 안나와 나는 놀란다.


안나와 자주 연락을 하지 않는 나에게 안나의 지인이 연락을 해온다. 그녀는 안나가 운영하는 독서모임의 회원으로 연락이 끊긴 안나를 걱정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지인을 통해 안나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안나의 흔적을 찾아 나선다. 안나와 나눈 대화, AS안심결혼보험이 그녀를 찾는 단서라고 생각한다. 안나는 그 책을 고스란히 도서관에 반납했고 나는 그 책을 대출한다. 이제 소설은 안나를 찾아 나서는 과정이라기 보다 AS안심결혼보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20년간 납입을 하면 130%로 환급을 해주는 보험, 결혼에 있어 다양한 에피소드에 대해 보험료를 청구할 수 있지만 지급 가능성은 너무도 어렵다는 사실을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소설에서 들려주는 예단 예물에 대한 사례는 현재 결혼의 의미와 그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준다. 예단 예물로 지출된 비용을 청구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냉장고를 바꾸고 반상기를 싸지만 그건 해당이 안 된다는 너무도 정당한 보험사의 사유는 놀랍지만 타당해보인다. 반상기는 구시대적 발상이며 이전의 잘 사용하던 냉장고를 굳이 예물로 바꿀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AS안심결혼보험의 사례는 너무도 현실적이라 마치 이 소설이 이 보험에 대해 설명하며 결혼을 분석하는 게 아닐까 착각할 정도다. 안나가 활동했던 독서모임에서 이 책(보험 약관집)에 대해 토론을 벌이는데 결혼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는 AS안심결혼보험를 중고로 내놓은 손해사정사 ‘조’를 만난다. 어쩌면 안나와 닿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생각한 것이다. 상대가 들고 나온 건 안나가 대출한 책이 아닌 다른 버전이었다. 조를 통해 AS안심결혼보험이 가입자마다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그는 과거 AS안심결혼보험의 직원이었다. 가입자마다 특약이 다른 것처럼. 조를 통해 AS안심결혼보험에 대해 가입 절차나 약관과 특약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듣는다. 안나가 대출한 약관집에서 사라진 페이지에 대해서도. 둘은 자주 만나고 가까워진다.


그리고 안나가 연락을 해온다. 나는 안나에게서 사라진 약관집 내용이 어떤 것인지, 남편 정우가 AS안심결혼보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동안 한 번도 듣지 못했던 남편과 안나, 둘 사이의 일상에 대해서도. 안나에게 정우가 어떤 존재인지. 안나가 얼마나 그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있는지도. 그가 떠난 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어 과거에 머무는 안나를 볼 수 있었다. 불쑥 모든 게 코로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소설 밖에 있는데, 그런 생각이 달려들었다.


“아무 신호가 없다는 게 위안이 될 때도 있다. 왜냐하면…… 불행의 신호를 미리 안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그리 많지도 않거든.” (246쪽)


안나와 정우와 보낸 반짝이는 시간들, 그것에 대해 들려주는 부분은 차오르는 슬픔을 감당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안나가 지금 살아갈 수 있는 힘 역시 그 시간으로부터 나온다는 걸 알 것 같다. 안나가 살아갈 세계는 여전히 차갑고 어두울 것이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었다면 윤고은의 기발한 상상에 감탄했을 것이다. 작가가 시의성을 염두에 두고 쓴 소설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하여 현재의 삶에 대해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들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다.


삶이 좋아하는 것으로만 이뤄지는 게 아님을 알아. 먹구름에 가려 일몰을 볼 수 없는 날도 생기고, 애써 준비한 마음이 오해되고 버려지는 경우도 생기겠고, 삶의 타이밍이 늘 한발 늦을 수고, 내 경우엔 미련도 품을 수 없을 만큼 열 발쯤 늦을 때가 많고, 시간 낭비 같은 산책도 많지.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일도 있고. 내가 사랑하는 세계가 훼손되고 내 속도가 흔들릴 때도 울지 않을 거라고 말할 자신은 없는데. 그렇지만 무언가를 누군가를 아주 좋아한 힘이라는 건 당시에도 강렬하지만 모든 게 끝난 후에도 만만치 않다. 잔열이, 그 온기가 힘들 때도 분명히 지지대가 될 거야. (258~259쪽)


누군가는 안나에게 사랑이 끝났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슬픔에서 일어나 다른 것들을 보라고. 사랑의 끝은 누가 정하는가. 그 사랑 안에 있는 당사자만이 결정할 수 있다. 어떤 이도 그 사랑의 내부로 침범할 수 없다. 안나와 나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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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9-19 00: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죽었다고 해서 그게 끝은 아니겠지요 죽은 사람을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사는 것도 괜찮지 않을지... 그 시간을 생각하는 게 그 사람을 살게 할지도 모르니...

자목련 님 명절 연휴 즐겁게 편안하게 보내세요


희선

자목련 2021-09-19 16: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곁에 머물지 않지만 마음 속에는 자리하고 있으니까요.
희선 님도 건강하고 평온한 추석 보내세요^^

scott 2021-09-19 1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목련님

추석 연휴 동안 가족과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해피 추석~


∧,,,∧
( ̳• · • ̳)
/ づ🌖

자목련 2021-09-19 16:42   좋아요 1 | URL
스콧 님도 맛나고 달콤한 추석 보내세요^^*
고양이 넘 귀여워요!
 
화이트 호스
강화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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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소설을 처음 만났을 때 놀라운 기운을 받았다.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일상을 상세하게 다뤘기 때문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의 주변에 가까운 이가 소설 속 화자처럼 은근하게 데이트 폭력을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육체적인 폭력이 아니라 정서적인 폭력, 이를테면 가스라이팅 같은 것 말이다. 내밀한 부분이라서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들이 소설에 있었다.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지금처럼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때이다. 아니,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교묘하게 다양한 방법으로 자행되는 데이트 폭력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강화길이 소설에서 그런 주제를 다루고 있어 한편으로는 다행이구나 싶었다. 소설이 현실이 되는 건 한순간이다. 언제부턴가 소설은 막연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떠나 현실을 자세하게 포착하고 있으니까.


『괜찮은 사람』, 『다른 사람』에 이어 사람 시리즈를 기대했던 나는 단편 「음복」과 「가원」은 무심한 사람, 게으르고 착한 사람이라고 혼자 부제를 붙였다. 소설집 『화이트 호스』에서 그 두 단편이 제일 좋았다.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읽은 단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인간의 다양성을 생각했다고 할까. 6면의 주사위처럼 서로 다른 숫자를 보여주는 속물적이고 기회주의자인 인간에 대해 말이다. 어디 6면뿐일까, 상황에 따라 무한의 면을 보이는 게 인간일 것이다.


제목 그대로 제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는 「음복」은 집안 서열로 인한 차별을 말한다. 부모 세대에 있어 시부모와 시고모 사이의 차별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제사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내는 자리에서 가장 크고 솔직한 목소리를 내는 고모는 불편한 사람처럼 보인다. 시부모는 며느리 보기에 부끄럽다. 하지만 화자는 그들이 보인 태도에서 자신의 남편을 발견한다. 무심하고 무감한 사람으로 성장한 사람. 명절이 다가오는 시기라서 그럴까. 지금은 제사를 지내지 않지만 어렸을 적 집안 풍경이 그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아마 영원히 모를 테니까. 뭔가를 모르는 너.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없고, 미움받는다는 것을 알아챈 적도 없는 사람. 잘못을 바로 시인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람. 너는 코스모스를 꺾은 이유가 사실 당신 때문이라는 걸 말하지 못하는 사람도 아니고, 누가 나를 이해해 주냐는 외침을 언젠가 돌려주고 말겠다는 비릿한 증오를 품은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 손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아니지. 그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아니야. 그래. 그래서 나는 너를 사랑했다. 지금도 사랑한다. 때문에 나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네가 진짜 악역이라는 것을. (「음복」, 41~42쪽)


「가원」에서 게으르고 착한 사람은 화자의 할아버지다. 세상에 없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이지만 결코 단 한 사람 할머니에게는 가장 나쁜 사람이다. 갑자기 사라진 할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화자는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가 된 옛집에서 잊었던 기억과 조우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할아버지와 하나부터 열까지 가혹할 정도로 자신을 양육한 할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할머니의 혹독한 지침이 현재의 자신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할머니의 다른 얼굴을 본다.


내가 그 모든 걸 미리 알았다면 할머니를 이해했을까. 할머니가 이러는 건 모두 다 나를 위해서라고, 나만은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해서 그런 거라고.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당신 자식의 발목을 잡은 새끼여서 혹독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가 부디 다른 삶을 살았으면 하는 그런 간절한 마음 때문에 이러는 거라고. 그래서 내게는 도저히 미련하게 굴지 못하는 거라고. 그랬다면, 내게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질문을 평생 마음에 묻고 살 필요 없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러면 그때 그 마음을 덜 간직할 수 있었을까. (「가원」, 63쪽)


남편의 파견근무로 인해 아이 양육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로 한 「손」의 선생님인 화자는 시골 마을에서 어떤 공포를 느낀다. 외부인에 대한 경계, 작은 마을 내 권력자의 횡포를 우연하게 알게 된 화자는 딸이 그들의 세계에 흡수될까 두렵다.


강화길이 포착한 일상 속 숨겨진 폭력이나 공포는 미스터리로 이어진다. 새벽에 택시는 타고 가던 여자의 실종을 그린 「서우」, 2년 전 사망한 배우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며 소문과 진실 가운데 우리가 어느 쪽으로 기우는가 묻는 「오물자의 출현」, 실종된 소설가가 묵었던 레지던스에 입주해 기묘한 경험을 하는 「화이트 호스」에는 스릴러의 기운이 보인다. 하지만 매력적이지도 기발하지도 않다. 개안적으로 이전의 단편보다는 느슨하고 엉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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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 시스타북스 Seestarbooks 18
최진영 지음 / 스타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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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어려지고 싶다면

어른이 된 것이다

힘든 일이 있어도

견디고 또 이겨내며

지나온 삶을 웃으며

돌이켜 볼 수 있다면

그대 어른이 된 것이다

어머니의 손이 거친 게 이제야 보이고

아버지의 등이 더는 커 보이지 않으면

우리 어른이 된 것이다

아무리 아파도

엄마 품에 안길 수 없을 때

홀로 불 꺼진 방 안에

입술 깨무는 이슬비처럼

우는 게 고작일 때

조금 슬프지만

우리 어른이 된 것이다 (「어른」, 전문)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모두가 이렇게 쓸 수는 없다. 그래서 누군가는 시를 쓰고 누군가는 시를 읽는 것이겠지. 어른이지만 어른이고 싶지 않은 날들이 많다. 어른이라는 걸 부정하고 마구 떼를 쓰고 싶은 날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울음을 삼킨다. 어른의 삶이 더욱 버거운 코로나 시국에 모두를 위로하는 시다. 시는 그렇다. 시는 때로 이해하지 못하고 때로 이상하고 때로 울컥한다.


최진영의 첫 시집 『모든 삶은 PK로 이루어져 있지』는 제목부터 내게 생소했다. 그러니까 시집의 제목 ‘PK’에 대해 나는 알지 못했다. 검색을 해 보니 게임 용어라고 한다. 나는 게임을 하지 않고 유저들의 기분을 알지 못하니 시가 추구하는 방향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집에는 내가 모르는 영역만 존재하는 건 아니고 일상의 영역이 많이 등장한다. 편의점, 지하철, 아파트, 병원이라는 공간을 시인이 느끼는 감정과 은유적인 표현한다. 특히 중환자실, 응급실, 병상은 실제적인 경험이 느껴진다. 그 공간에서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것들을 나 역시 체험했기 때문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보호자와 환자는 서로 같은 듯 다른 상실을 경험하는 공간 중환자실 ‘누구든 실려 들어가고/눈꺼풀이 커튼을 치면/눈동자는 깊은 블랙홀이 된다’ (「중환자실 2」, 일부)과 절박함이 흐르는 응급실의 공기가 ‘생을 붙잡고 있는 건/자기 자신일까/사랑하는 사람일까’ (「응급실에서」, 일부) 그려진다.

그런가 하면 익숙한 분위기, 식상한 표현의 시도 보인다. ‘별이 보이지 않는다고/빛나지 않는 건 아니에요/그래요,그대처럼요.’(「밤하늘」, 전문)이나 『밤』이라는 시에서 ‘검은 창호지 같은 밤하늘’이나 ‘지상의 불빛이 반쯤 눈을 뜬 시간’이란 표현은 고유하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건 취향의 문제다. 내가 게임을 즐겨 하는 이라면 시 「PK」는 매력적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시집에서 시인이 어떤 삶에 대해 이야기를 건네고 싶은지 충분히 전해진다. 치열하게 살아가지만 같은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일상, 시를 향한 간절함, 주변의 모든 것들을 시로 쓰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물과 풍경을 보고 이런 시를 쓰는 이, 그는 건강하고 따뜻한 시인이다.

햇살 좋은 오후

문을 열고 나와서

맞은편 아파트 창문을 본다


빨래를 터는 사람

화분에 물을 주는 사람

블라인드를 치는 사람

노는 이를 보며 웃는 사람


그들의 모습이 잠시 책갈피가 된다


책꽂이 같은 아파트

책장처럼 칸칸이 꽂혀있는 책들의

한 페이지가 보였다


오래된 아파트에서

더 오래된 책 냄새가 난다 (「책갈피가 된다」, 전문)

어쩌면 그에게는 삶과 시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좋은 시가 무엇인지 찾으려 노력하는 이런 시를 보면 그러하다. ‘가슴이 아닌 대가리 깨져가며 쓴 시가/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그런 시나 쓰고 앉아 있으니/삶이 부끄럽고, 그런 삶을 살면서//좋은 시 한 편이 어디 가당키나 한 일인가’ ( 「좋은 시」, 일부) 시를 향한 염원과 시를 쓰며 성장하는 시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첫 시집은 그가 원하는 바를 제대로 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첫 시집이니까. 그러니 두 번째 시집을 기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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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9-14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들은 대단하단 생각이 들어요. 시 한줄의 말도 안되는가격, 그렇지만 그 시 한 줄 위한 엄청난 노고 ㅠㅠ

자목련 2021-09-15 16:53   좋아요 1 | URL
맞아요, 시를 읽을 때마다 놀라고 감탄해요.
말씀하신 부분은 더 좋은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어떻게 지내요
시그리드 누네즈 지음, 정소영 옮김 / 엘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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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한 적이 있다. 그건 나만 아는 고통이며 통증이기에 타인에게 이해시킬 수도 이해받을 수도 없는 종류의 것이다. 간헐적인 통증, 불안, 견디다 못해 먹는 진통제. 통증이 일상이 되면 무뎌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죽음은 어떨까? 죽음에 대해서는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며 누구나 시기는 다를 뿐 죽는 게 사실이니까.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주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음 역시 개별적인 것이다. 공포나 두려움을 측정할 수 있는 도구는 저마다 다르다.


시그리드 누네즈의 『어떻게 지내요』는 화자가 암 진단으로 죽음을 곁에 둔 친구와 일상을 함께 보내는 시간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사유하는 소설이다. 사실 암이라는 소재만으로도 큰언니와 보낸 시간이 떠올랐다. 수술을 시작으로 다수의 화학요법과 요양, 마지막엔 표적치료까지 그 과정을 지켜보는 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지 확인하는 경험이었다. 어쩌면 가족이라서 그 느낌이 강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에서 화자는 친구가 입원한 병원에 방문하기 위해 근처에 숙소를 구한다. 친구를 만나는 시간 외에 그 도시에서 옛 연인의 강의를 듣는다. 인류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기에 아이를 낳지 말라는 연인의 까칠하고도 이상한 강의. 오롯이 친구와 화자의 이야기만으로 채워진 게 아니라서 얼핏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산문이나 에세이처럼 다가온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철학적 문장은 유려하고 아름답다. 화자가 들려주는 일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은 모두 노년의 그들이다. 한때 아름다웠던 외모의 소유자, 유일한 방문자인 아들을 둔 노인. 화자 역시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도 없어 혼자 지낸다. 사는 동안 딸과 불화하며 끝내 화해하지 못하는 친구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어떤 과거를 보냈듯 결국엔 혼자가 되는 게 삶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


친구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화자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부탁한다. 약을 준비하고 숙소를 예약하고 그곳에서 모든 걸 실행하겠다는 친구. 너무도 차분하고 담담해서 여행을 떠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여행이나 다름없다. 친구와 화자는 그곳에서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휴식을 취한다.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친구의 식용은 떨어지고 활동반경도 줄어든다. 죽음을 말하고 그와 동반한 고통과 슬픔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인데 이상하게 편안하다. 친구가 들려주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딸에 대한 아쉬움과 속상함은 삶의 마지막이라는 전제가 아닌 그냥 보통의 이야기다. 나를 아는, 나의 모든 걸 아는 친구와 나누는 수다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화자가 느끼는 불안과 죄의식이 줄어드는 건 아니다. 항상 문을 열어두는 친구의 문이 닫혔을 때, 오늘이 그날일까 하는 공포감. 죽음은 친구와 화자 곁에 바짝 붙어 있었다. 때때로 친구에게 불어오는 절망의 기운을 화자는 볼 수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인간 경험을 통틀어 가장 고독한 경험으로, 우리를 결속하기보다는 떼어놓는다. (149쪽)


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마주한다는 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니까. 큰언니는 내게 그 순간을 부탁했었다. 마지막 순간에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보내고 싶다고. 큰언니의 임종은 내가 아닌 작은언니가 지켰다. 큰언니가 떠나고 한동안 죽음이 삶을 지배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조그마한 일에도 두렵고 불안은 커졌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경험한 순간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고 작지만 도움이 되었다. 죽음은 이렇게 삶을 단련시킨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했다. 고통받는 사람을 보면서 내게도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어, 생각하는 사람과 내게는 절대 저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야, 생각하는 삶. 첫 번째 유형의 사람들 덕분에 우리는 견디며 살고, 두 번째 유형의 사람들은 삶을 지옥으로 만든다. (166쪽)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힘겨운 날들, 시그리드 누네즈의 소설은 가만히 위로를 전한다.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나의 가족, 나의 이웃, 나의 지인들이 잘 지내는지 안부를 전하라고 말하는 듯하다. 무심한 듯 내뱉는 말, 어떻게 지내요? 괜찮아요? 란 말이 필요한 시대라는걸. 늦지 않게 안부를 전하는 일, 그 안에 담긴 진심을 전하며 살피는 게 살아가는 동안 소중하다고. 지금 우리가 읽고 느끼면 더 좋을 그런 소설이다. 


어떻게 지내요? 이렇게 물을 수 있는 것이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의 진정한 의미라고 썼을 때 시몬 베유는 자신의 모어인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프랑스어로는 그 위대한 질문이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무엇으로 고통받고 있나요 Quel est ton tourmemt? (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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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13 12: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꺼려하는 주제!
주변에 아픈 사람이 많아서...
질문은 다가 오네요
껠레똥뚜르망?

자목련 2021-09-14 11:18   좋아요 1 | URL
아, 아픈 분들이 많으시군요.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어요.
죽음을 다루는데 제게는 그 과정이 편안한 일상을 들려주는 느낌도 받았어요.
그레이스 님, 건강한 하루 보내세요^^


초란공 2021-09-13 17: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족 중 한 명이라도 병원신세를 져본 사람이라면 세상에 아픈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지 새삼 놀라기도하고 절망스러운 기분마져 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책인듯 싶네요..

자목련 2021-09-14 11:16   좋아요 2 | URL
병원이라는 공간이 그렇지요. 말씀처럼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하지만 안도의 기운을 전해주는 곳도 병원이지 싶어요. 작가의 통찰과 사유가 놀라웠어요.초란공 님, 맑은 하루 이어가세요^^
 
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 - 듣기의 기술이 바꾸는 모든 것에 대하여
케이트 머피 지음, 김성환.최설민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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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듣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을 통해 상대를 향한 배려와 관심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건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유한 생각과 감정, 의도를 지닌 한 명의 사람으로 이해받고 존중받는 것 말이다. (54쪽)


듣는 일에 대해, 듣기의 가치나 태도 같은 걸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상사로부터 업무에 대한 조언(질책을 동반한)을 들을 때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소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형태의 듣기였다. 아마 상대도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잔소리, 청자가 집중하지 않으면 모든 소리는 잔소리가 된다.


케이트 머피의 『좋은 관계는 듣기에서 시작된다』란 책은 의외로 흥미롭고 재밌다. 화자와 청자, 둘 사이의 위치, 관계, 친밀감에 따라 대화는 다르게 흘러간다는 걸 알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 대화에 집중하는 방법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 책을 읽으면서 나의 듣기와 말하기에 대해 돌아볼 수 있었다. 인터뷰 기자인 저자가 만난 사람들은 다양하다. 어쩌면 기자로서 상대의 말을 가장 잘 듣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만난 이들이 들려주는 듣기의 힘은 대단했고 놀라웠다. 책을 읽는 동안 정혜신의 『당신이 옳다』가 생각나기도 했다. 대화에 있어 상대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충조참판(충고, 조언, 참견,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가장 기본적인 듣기는 잘 듣는 일이다. 잘 듣는 일, 그건 생각처럼 쉽지 않다. 대화의 주도권을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할 수도 있고 지루하다는 걸 표정으로 나타내서도 안 된다. 나는 어떻게 듣고 있을까. 신기하게도 상대방도 그걸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대면의 경우에도 그렇고 유선으로도 느낄 수 있다. 그런 경험 있을 것이다. 그가 만난 영업사원, 정치가, 경영자, 인질 협상가, 첩보원의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듣기에 소홀한지 알려준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듣기의 태도는 무엇일까.


지금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고 가정해 보자. 스마트폰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싶은 말을 줄이고 상대의 말을 들어줄 것인가. 스마트폰을 테이블 위에 놓는 것만으로도 듣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걸 잘 알 것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듣기에 대해 소홀해졌다. 특히나 가장 가까운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상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다 알았다고 판단하거나 중간에 끼어들고 말을 막는다는 저자의 설명에 멈칫할 수밖에 없다. 가깝다는 이유로 듣기가 아닌 걱정과 해결이 앞서기도 하니까. 우리가 낯선 사람에게 힘든 상황과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이유다.


누군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는 말은 그 사람의 마음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귀를 기울인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때 동원되는 주의력의 강도는 관계의 깊이와 수명을 결정짓는다. 가까운 사람들을 아주 잘 안다는 안일함에 빠지는 것은, 고정관념을 바탕으로 낯선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다. 특히 낯선 사람의 뚜렷한 사회적 신호에 의해 강화된 고정관념은 극복하기가 매우 힘들다. 하지만 듣기는 그런 덫에 걸려들지 않도록 당신을 보호해 준다. 듣기가 당신의 예상을 뒤엎어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91쪽)


기술의 발전으로 점점 대화가 사라지는 시대다. 진정으로 원하는 관계, 그 소통에는 무엇이 있을까. 바로 대화다. 누군가 내 이야기를 진심으로 들어준다면 나 역시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책에서 소개한 가구점 영업사원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물건을 파는 사람이라면 구매를 위해 더 많은 설명과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영업사원은 반대로 손님의 원하는 말을 들어주고 침묵의 시간까지 기다린다. 중간에 재촉하듯 설명하고 말을 이어나갔다면 아무것도 사지 않았을 거라고.


듣기 능력이 좋은 사람은 말하는 능력도 뛰어나다. 상대가 원하는 바를 잘 포착하고 그에 상응하는 말을 할 수 있으니까. 우리는 한 번도 듣기의 중요성과 교육을 받는 적이 없다는 사실도 놀랍다. 그래서 듣기의 경험도 중요하다. 자신의 말을 잘 들어준 어른이 있었던 아이와 그렇지 않은 경우 성장했을 때 대화와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한다. 듣기에 대해 알아갈수록 듣기의 어려움, 듣기의 능력에 감탄하며 지나간 대화를 떠올린다. 잘 모르는 주제나 단어가 나왔을 때 솔직하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 확인해야 하고 의미 있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걸 배운다. 대화에 있어 상대를 격려하며 상세한 설명과 정보를 이끌어내는 지지 반응이 일상에서 필요하다는걸.


개를 잃어버렸다 3일 후에 찾았다는 상대에게 울타리나 목줄을 잘 챙겨야 한다는 말보다 걱정했겠다며 어디서 어떻게 찾았냐고 물어야 한다는 게 지지 반응이다. 아, 대화는 왜 이리 어려운가. 상대의 입장에서 느끼고 생각하는 게 듣기의 기본일 텐데.


상대가 한 말에 대해 깊이 생각할 때, 당신은 그 사람의 생각과 느낌이 당신 안에 자리 잡도록 허용한 것이다. 이 과정은 듣기와 마찬가지로, 환대의 한 형태이다. 상대를 당신의 의식 속으로 초대해 들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사실 당신이 소중히 여기는 대화는 어떤 형태로든 머릿속에 각인될 수밖에 없다. (284쪽)


돌이켜보면 나를 걱정하고 지지해 준 이들과 나눈 대화는 오랜 기간 살아있다. 듣기가 환대의 한 형태라는 말을 마음이 새긴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마다 듣기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듣기라는 주제를 잘 설명하고 유용하게 다룬 책이다. 다른 의미로 대화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뜬금없지만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옛 속담에 대해 감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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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9-10 13: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듣기는 환대의 한 형태 이말 기억해야겠어요.
듣는다는게 상대의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 살피는 행위라는것도요.
참 어렵고 저는 잘 들으려고 노력하지만 이게 제 느낌에 굉장한 정신적 칼로리를 소모시키는 일이더라구요.
듣는다는거 참 힘들어요. 그래도 이왕 듣는다면 이 책의 저 내용을 생각해야겠어요.

자목련 2021-09-13 11:54   좋아요 0 | URL
듣는 행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어요.
좋은 구절이 참 많았어요. 언급해주신 그 문장도 그렇고요.
가을의 향기가 가득한 날들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