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발견 - 사랑을 떠나보내고 다시 사랑하는 법
캐스린 슐츠 지음, 한유주 옮김 / 반비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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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가까운 이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에겐 엄마의 죽음이 그러했다. 처음 맞이하는 사랑하는 죽음이라 그랬다.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생각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엄마를 볼 수 없고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가장 절망적이었던 건 엄마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시간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엄마의 부재를 아무렇지 않은 일로 만들었다. 오히려 나의 힘듦을 엄마가 모르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족음은 그렇게 자연스럽게 상실을 삶으로 데려왔다.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준비할 수 있다는 감사를 불러왔다. 며칠이었지만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고 암 투병을 하는 큰언니를 보며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들의 부재가 얼마나 큰 힘을 지녔을지 준비할 수 없었다.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던 아버지의 죽음이 만든 부재는 큰 구멍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자리를 볼 때마다 아버지가 거기 없다는 게 고통스러웠다.


캐스린 슐츠의 『상실과 발견』은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상실에 대해 말한다. 상실의 의미를 보여준다. 상실의 모든 것을 말한다고 할까. 가족의 죽음으로 비롯된 지극히 개인적인 상실에 대한 감정이 아닌 상실 그 자체에 대한 은유와 통찰이라고 하는 게 좋겠다. 한 사람이 사라지는 과정, 한 사람의 생이 부재한 자리에 채워지는 상실.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이자 애도의 글은 모두를 상실의 구덩이로 빠지게 만든다. 아니, 상실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든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그리워한 것은 아버지를 통해서 여과된 삶. 아버지의 내면의 빛에 비추어 바라본 삶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사라져버린 가장 중요한 걸 다시는 손에 넣을 수 없음을 나는 즉시 깨달았다. 아버지의 방식대로 바라봤던 삶. 철저하게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대로의 삶. 내 모든 기억들을 다 모아도 아버지처럼 존재하는 단 하나의 순간도 만들어낼 수 없고, 내가 겪은 상실 전체는 아버지가 경험한 상실 앞에서 창백해진다.(99쪽)


한 사람의 존재, 역할, 사소한 집착, 취미, 습관, 이 모든 게 한순간 부재하며 느끼는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의 시간은 측량할 수 없고 측량될 수 없다. 상실이란 그런 것이니까. 가족의 죽음과 사랑하는 이를 잃은 일은 최대한 미루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마침내 그것은 우리 앞에 도달하고 상실의 시간은 이어진다. 상실을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상실이 삶을 지배하고 전부라 여긴다. 상실을 이길 다른 감정이 스며드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캐스린 슐츠가 ‘발견’에 대해 사유하고 내려간 사랑은 우리 삶에 상실과 대등한 위치에 놓인다.







그녀와 C의 만남, 그녀가 발견한 사랑, 그녀의 삶을 풍부하게 만드는 그 모든 것을 발견하는 과정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이 역시 상실과 마찬가지로 개인적인 경험이며 감정이지만 발견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고 위대한 일인이 우리는 알게 된다. 발견이 지닌 놀랍고도 신비한 힘, 그 가능성에 대해서 말이다. 배우고 깨우친다. 그러니까 이 책을 통해 발견을 발견했다고 할까. 아무튼 굉장하다. 그녀의 사유에 감탄한다.


애도와 마찬가지로 사랑 역시 유동적인 속성을 지닌다. 사랑은 어디로든 흐르며, 어떤 형태의 용기도 채울 수 있고, 흠뻑 스며들지 않는 것이 없다. (166쪽)


상실은 세계를 축소하지만, 발견은 풍성하게, 풍부하게, 재미있게 한다. (228쪽)


상실이 삶을 지속적으로 우울하게 만들었다면 발견은 삶을 기쁘고 황홀하게 만든다. 그리하여 우리는 상실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상실에 대한 부분을 힘들게 읽었기에 발견의 주제로 넘어오면서 나는 이 책에 더 좋아졌다. 고백하자면 좋다고 말하기에는 부족한 그런 책이다. 엄청난 책인데 그것에 대해 잘 소개하지 못해서 속상한 마음이다. 너무 좋은 책은 너무 좋은 마음이 급해서 서툴기 마련이라고 포장한다.


누군가를 발견한다는 건 한없이 경이롭다. 우리 감각의 척도는 상실로 인해 우리가 엄청나게 작은 데 비해 이 세상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걸 깨달으며 바뀔지도 모른다. 발견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 유일한 차이는 우리가 발견에서 절망이 아닌 경이로움을 느낀다는 점이다. 끝없이 드넓은 이 우주에서, 삶이 무한히 변이하는 가운데, 이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경로들, 그리고 가능성들 가운데, 나는 여기 이 집, C의 곁에 있다. (233쪽)


우리 삶에 발견이 없다면 어쩔 뻔했는가. 상실을 대신할 발견은 아니지만 상실은 상실대로 발견은 발견대로 우리를 충만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를 살아가게 만든다. 캐스린 슐츠는 그것을 정확하게 파악했고 자신의 경험에 비춰 눈부시게 담아냈다. 한없이 작은 우리가 서로를 발견하고 발견됨으로 성장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상실은 일종의 외부적 의식으로, 우리에게 유한한 날들을 잘 사용하라고 한다. 우리의 삶은 찰나에 불과하고, 인생을 잘 산다는 건 보이는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것이다.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것에 경의를 표하고, 돌봄을 필요로 하는 대상을 돌보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것과 이미 사라진 것을 포함한 이 모든 것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우리는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켜보기 위해 여기 있다. (300~301쪽)


상실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에게 가만한 위로를 전하며 다가올 상실에 미리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이니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존재가 전하는 벅찬 감동이라고. 상실과 발견이 반복되는 그것이 삶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그 모든 걸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게 살아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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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03-11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참 좋았어요. 자목련님이 통과한 상실의 과정에 절절하게 공감이 갑니다....인생의 후반기가 상실로 채워지고 결국 나도 갈 거라 생각하니 요새 왜 이리 마음이 쓸쓸한지 모르겠어요....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자꾸 자신이 없어져요.
 
조금 망한 사랑
김지연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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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건 상수다. 변하지 않는다.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은 변수다. 원하는 대로 변하기를 바라지만 그런 삶은 어디에도 없다. 믿었던 이는 나를 배신하고 사랑했던 이는 나를 배반한다. 아, 그러니 삶 자체는 상수가 아니라 변수다. 자꾸만 고꾸라진다. 배신하고 배반한 이들처럼 나 역시 그런 선택을 하고 싶게 만든다. 그렇다고 그런 방향으로 갈 수 있는 몇이나 될까. 혹시나 하며 배신한 이의 소식을 기다리거나 배반한 사람이 잘 살기를 바라기도 하는데.

김지연의 단편집 『조금 망한 사랑』을 읽다 보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싶어 조금 위안이 된다. 나 혼자 망하고 나 혼자만 되는 게 없는 것 같아서 속상했던 마음이 살짝 괜찮아지는 거다. 이래서 소설이 좋다. 현실 아닌 소설마저 누구나 잘 살고 누구나 성공하면 속상해서 살맛이 안 나니까. 그러나 왜 이렇게 사는 건 힘들고 좋은 일은 늦게 오거나 소식이 없는 것일까 속상함이 밀려온다. 아무튼 김지연의 단편은 나쁘지 않다. 좋다.


베프는 아니더라도 좋은 친구, 좋은 사람을 만나 관계를 유지하며 지내기를 바라지만 그건 참 어렵다. 전 남자친구가 주변 사람과 가족에게 돈을 빌리고 연락을 끊어버린 「포기」는 가장 쉽게 일어날 수 있는 배신이다. 돈의 액수를 떠나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마음에 힘들다. 나로 인해 그 사람을 알게 된 이들에게 피해를 준 것 같아서다. 따지고 보면 돈을 빌려주거나 업무를 진행한 사람은 그들인데 말이다. 한데 이상한 건 소설 속 돈을 빌린 ‘민재’를 걱정하는 나의 사촌 ‘호두’의 마음도 알 것 같다. 돈을 갚는 건 둘째고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닐까 걱정하는 마음 말이다. 그리하여 소식이 닿은 민재가 돈을 조금씩 보내는 게 반갑고 기쁜 것이다. 심지어 돈을 다 갚으면 관계가 완전히 끝나겠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까지.


이불을 개면서 더는 만나지 않는 친구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아무한테도 말할 수 없었던 사정은 조금 나아졌는지, 모두에게 상처를 주며 잠적해야만 했던 일에서는 벗어났는지, 무슨 일을 하며 사는지, 잘 지내는지, 건강한지, 아픈 덴 없는지, 아무리 고심해 봐도 나로서는 그런 질문들에 답을 내릴 수 없고 그 답을 아는 사람들이 곁에 있기를 바라다가고 이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저어버린다. (「포기」, 38쪽)


마음은 언제나 그렇다. 알 수 없다. 삶이 알 수 없듯이 마음이 그렇다. 김지연은 이렇 마음을 잘 포착한다. 내 맘 같은 갈팡질팡한 마음. 동거하던 동성 연인과 헤어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린 「긴 끝」의 ‘문애’의 마음과 이혼하면서 양육권을 포기한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복잡해진 ‘인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좋아하는 마음 없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연인과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끝이 났다는 걸 실감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미련 때문에 주춤한다.





연인과의 관계가 그러한데 혈연으로 이어진 자식과 부모는 어떨까. 전 남편의 외도로 인해 이혼을 하면서 모든 관계가 끝났다고 여겼는데 전 남편의 죽음으로 달라졌다. 어찌 된 일인지 보험금 수령자가 인지였다. 보험금의 일부를 양육비로 받고 싶다는 아이의 새엄마. 인지 역시 재혼으로 새로운 가정을 꾸렸지만 아이는 없다. 때문에 아이가 친엄마와 살고 싶다는 소식에 혼란스럽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아이를 키운 새엄마의 마음은 무엇일까. 데려오고 싶은 마음과 그렇지 않은 마음이 충돌한다.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는 마음, 누구도 강요할 수 없는 마음 아니겠냐고 김지연은 말한다.


“그럼, 이제 끝?”

“응, 끝.”

“진짜 끝?”

“진짜로, 끝.”

인지는 모든 것이 완전히 끝일 수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한 건 오늘 그들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둘 거라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에 다시 또 생각난다면 그때 그냥 내버려둘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 없이」, 167쪽)


이처럼 삶은 엉뚱한 방향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결혼할 수 없지만 결혼 같은 걸 할 수 있겠다 믿었던 문애에게 코로나의 여파는 결국 이별까지 불러왔다. 이혼하고 남남이라 여겼지만 아이가 둘 사이를 오가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되는 게 없다고, 이번 생은 망했다고 농담을 해 보지만 망했다고 삶이 그 순간 멈춰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우리는 힘을 쏟을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연인 ‘서일’은 떠나고 남겨진 빚을 갚아가는 「반려빚」의 ‘정현’처럼 말이다. 사실 이 소설집에서 가장 인상적인 단편을 꼽자면 「반려빚」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나 반려견, 반려묘, 반려나무, 반려그림도 아닌 반려빚이라니. 현실을 풍자하는 것 같지만 그게 우리의 실상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자동차 할부와 은행 대출 때문에 사표를 낼 수 없고 다시 한 달을 살아간다는 웃지 못할 이유처럼 정현은 그렇게 살아간다. 먹고 싶은 것도 못 먹고 말이다. 그럼에도 서일이 연락을 해 오자 반갑고 잠깐 동안 정현의 집에서 지낼 수 없냐고 물었을 때 냉큼 그러라고 하고 싶은 마음이라니. 우여곡절 끝에 빚을 다 갚고 서일의 전화번호를 쓰는 초등학생과 통화를 하는 정현의 마음을 알 것은 건 나뿐일까.


김지연이 담아낸 인물과 일상은 뻔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우리의 모습이라 함부로 욕할 수 없고 함부로 편을 들 수도 없다. 돈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군가에게는 생계와 직결된 것이고 단 칼에 끊어낼 수 없는 게 관계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능을 마친 조카가 삼촌과 유자밭에서 유자를 따고 유자청을 담그는 소소한 일상을 들려주는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에서 행복과 불행으로 채워진 삶이라는 걸 발견하는 이런 문장에 울컥해질 수 밖에.


사람은 지극히 행복할 때 느닷없이 슬퍼질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는 나도 알지만. (「유자차를 마시고 나는 쓰네」, 293쪽)


우리가 사는 삶은 마냥 행복할 수 없다. 그렇다고 마냥 불행한 건 아니다. 행복한 기억을 빌려 불행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언제 다가올지 모를 불행이라는 변수와 담담하게 혹은 힘 있게 악수하며 살아가는 게 삶인지도 모른다. 조금 망했다고 삶이 끝나지 않는다. 그것이 나에게만 한정된 게 아니라는 보통의 진리가 큰 위안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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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5-03-10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반려빚이 제일 인상 깊었어요. 일단 너무 와 닿아서... 빚이 반려라니... 무슨 납치혼도 아니고 강제로 반려가 되었지만 솔직히 강제도 아니죠 뭐 자본주의 무섭습니다.ㅠㅠ

이 책 읽고 요즘 세상이 그런가보다 했어요. 청년들은 정말 힘들겠구나 싶었구요. 시간이 지나서 그런가 2,30대라는 과거는 미화되는지 그렇게까지 힘들었던가 싶기도 하지만 그 때 좀 덜 힘들었더라면 지금 이렇게까지 지치지는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했어요. 여러모로 위안 받으며 많은 생각을 했네요.^^

자목련 2025-03-11 09:39   좋아요 0 | URL
각자의 반려빚을 생각합니다. ㅠ.ㅠ
대학 졸업 후 갚아야 하는 대출을 생각하면 정말 암담하고요. 어쩌다 이런 시대가 되었을까 안타까워요. 그러면서도 20~30대에만 그런 게 아니라서 서글프기도 하고...

민선진 2025-03-10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5-03-11 09:39   좋아요 0 | URL
즐겁게 읽으시길 바라요^^
 
블렌드 오렌지선셋 - 2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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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마셔본 이들의 평을 믿고 구매! 커피를 좋아하지만 진정한 맛을 잘 모르는 나도 좋을 것 같다. 맛있게 마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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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5-02-26 1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오늘 이 커피 처음 드립으로 내려서 들고 나왔어요.
맛있죠~^^

자목련 2025-02-27 15:28   좋아요 0 | URL
네, 맛있어요!!
 
영원에 빚을 져서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4
예소연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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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과 함께 살아간다.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누군가를 잃는다.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을 수도 있지만 사람은 그럴 수 없다. 누군가의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상실은 삶이 된다. 얼마나 크게 삶으로 파고드는지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외면하고 어떤 이는 상실과 한 몸이 되기도 할 테니까.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판단할 기준은 없다.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사는 동안 잃어버린 것, 찾을 수 없는 것들이 늘어난다. 대체할 물건을 만나기도 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할 이는 없다. 상실 이후의 삶은 극명하게 달라진다. 상실 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애를 써도 복구할 수 없다. ‘캄보디아’에서 실종된 친구를 찾아 떠나는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 도 그런 소설이다. 그러니까 상실에 관한 이야기다.


엄마의 장례를 치른 ‘나’는 ‘혜란’으로부터 ‘석이’의 실종 소식을 듣는다. 혜란과 석이와 나는 대학시절 캄보디아 프놈펜의 바울학교로 해외봉사활동을 다녀왔다. 4개월의 시간을 보내며 친구가 되었지만 그 이후에는 각자의 삶에 집중하며 살았다. 석이의 실종으로 10년 만에 캄보디아를 찾은 나는 그곳에서 그들이 가르쳤던 학생 ‘삐썻’을 만나 과거를 떠올린다.


소설은 석이의 실종에 관한 의문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들려준다. 바울학교에서 선생님이라 불리며 아이들을 가르치며 느꼈던 회의감, 그곳에서 마주한 세월호 사건. 나와는 상관없는 죽음이라 여겼던 일들이 어떻게 일상으로 스며드는지 생각한다. 죽음을 대하는 태도는 저마다 달랐다. 유독 힘들어했던 석이를 혜란과 나는 몰랐다.


결국 나와 혜란의 문제는, 어떤 식으로든 석이의 마음과 고통을 함부로 가늠하려고 했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이해하는 것과 가늠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65쪽)


삐썻의 안내로 석이의 캄보디아 행적을 밟으며 나는 석이의 마음이 어땠을까 생각한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이태원 참사를 겪은 후 집회 같은 곳에 나가는 석이의 마음을 말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꺼삑섬’ 물 축제 압사 사건이 있었던 곳이다.


어떤 기억을 집요하게 추적하다 보면, 그것이 정말 물성을 지닌 무엇처럼 느껴지게 된다. 생생하게 만져지는 감각, 흐르는 기류, 시시껄렁했던 나의 마음 같은 것들. 그러니까 기억을 추억하는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이지만, 그 고통 너머에 존재하는 희마한 마음이 있다. 건너보는 마음, 살펴보는 마음, 그 기억을 안고 내일을 살기 위해 다짐하는 마음들. (69쪽)


아무 잘못도 없이 희생된 죽음에는 충분한 애도가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어떤 죽음은 시간이 지나도 생생하게 우리에게 말을 건다. 멈추지 않는 슬픔으로 흐른다. 석이는 슬픔을 주워 담고 그 말에 귀를 기울이며 살았고 사느라 바빴던 나와 혜란이는 슬픔을 흘려보내고 말을 듣지 못하며 살았다. 나는 이제 엄마의 죽음으로 놓쳤던 그 말을 붙잡고 슬픔에 기댄다.


상실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수많은 상실을 겪은 채 슬퍼하는 사람으로 평생을 살아가게 될 거고 그것은 나와 관계 맺은 이들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엄마를 잃음으로써 내가 상실을 겪었듯, 누군가도 나를 잃음으로써 상실을 겪을 것이고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 상실의 늪 속에서 깊은 슬픔과 처절한 슬픔, 가벼운 슬픔과 어찌할 수 없는 슬픔들에 둘러싸여 종국에는 축축한 비애에 목을 축이며 살아가게 되겠지.

“나는 슬픔을 믿을 거야.” (113쪽)


예소연의 『영원에 빚을 져서』은 특별한 소설이 아니다. 보편적인 일상을 담아낸 소설이며 상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다.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를 겪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 누군가 석이가 너무 예민하고 요란한 거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이에게 그게 일상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일상을 지키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을 무엇으로 채우든 말이다.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할 수 없다.


슬픔은 때로 몸집을 부풀려 눈덩이처럼 커졌다가 어느 순간 녹아내리기도 할 것이다. 슬프면 슬픈 대로 목놓아 울어버리는 삶이야말로 가장 최선의 삶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 상실과 함께 살아갈 것이다. 상실의 순간을 떠올리며 애도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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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 - 신뢰와 호감을 높이는 언어생활을 위한
MBC 아나운서국 엮음, 박연희 지음 / 창비교육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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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쓸 때마다 맞춤법 검사기를 사용한다. 맞춤법이 틀렸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최근 카톡을 보내면서 맞춤법 기능이 추가되었다는 걸 알고 반가웠다. 매일 사용하는 우리말인데도 매번 맞춤법은 어렵다. 어디 맞춤법 뿐인가. 우리말을 배우고 쓰기 시작하면서 점점 어렵다고 느끼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우리말 맞추기 퀴즈인 <우리말 겨루기>를 시청하면서도 맞추는 것보다는 틀리는 게 훨씬 많다. 시청할 때마다 우리말의 세계에 놀라곤 한다.

잘 모르고 사용하는 우리말은 얼마나 많은가. MBC 아나운서국에서 엮은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세상에나, 내가 사용하는 말들이 이렇게 틀렸다고. 그런데도 틀린 줄도 모르고 그냥 사용했다는 게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몇 년 전 논란이 되었던 ‘명징하게 직조한’ 이란 영화평이나 ‘심심한 위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은 게 우리의 현실이다. 간단하게 줄이는 말, 기존과는 다른 뜻으로 사용하는 말, 변화하는 말들 속에서 우리말을 제대로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우리말 나들이 어휘력 편』은 가장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책을 살펴보면 이렇다. 일상에서 쉽게 사용하는 말들이지만 헷갈리는 맞춤법, 잘못된 발음에서 이어져 틀린 상태로 굳어져 사용하는 표현, 익숙해진 외래어를 바르게 쓰는 표기법,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쓰도록 순화어 안내까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었다. 목록을 따라 사용하는 말들을 보면 이게 맞는 거라고 하며 놀라는 말들이 많다. 내가 알고 사용한다고 여겼던 우리말이 잘못된 거라 여기는 이는 얼마나 될까.


어느 집에나 있는 곽 티슈는 옳은 말일까? 맞춤법 검사를 돌리는 바로 곽 티슈를 갑 티슈로 수정하라고 안내한다. 그렇다. 물건을 담는 작은 상자를 나타내는 표준어는 이다. 곽 티슈 아니고 각 티슈도 아니고 갑 티슈가 정답이다.

이 책을 저 갑에 넣어봐.

휴지 한 갑만 주세요.

비슷해서 헷갈리기도 했고 주변에 누군가 바로잡아주는 이가 없어서 그냥 사용하는 말들은 어떤가. 자주 쉽게 쓰는 들르다 와 들리다를 보자. 비슷한 말이다. 들르다, 들리다로 쓰고 보면 확연하게 다른 것 같지만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을까?

지나는 길에 잠깐 들어가 머무르다의 뜻을 담은 우리말은 들르다로 ‘친구 집에 잠깐 들렀다’, ‘퇴근길에 포장마차에 들러서 친구를 만났다’를 ‘친구 집에 잠깐 들렸다’, ‘퇴근길에 포창마차에 들려서 친구를 만났다’로 쓰면 틀린 것이다. 정말 헷갈리기 쉬운 우리말이다. 책에서 정리한 것을 기억하면 틀리지 않고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틀리게 사용하게 있는 말은 얼마나 많을까. 책을 따라 읽으며 하나하나 고쳐가며 내 것으로 흡수하는 과정도 뿌듯하다.

근처에 오면 꼭 들러주세요. - 근처에 오면 잠깐 방문해달라는 뜻

근처에 오면 꼭 들려주세요. - 근처에 오면 무엇을 듣게 해달라는 뜻

이처럼 책은 쉽고 친절하게 우리말을 설명한다. 올바른 언어생활을 위한 순화어는 바로 일상에서 적용하면 좋을 것 같다. 다가오는 3·1절이나 광복절에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라는 안내방송은 국기를 달다로 순화하여 태극기를 달다, 국기를 올리다로 사용하기를 권한다. 나부터도 이렇게 바꿔 사용해야겠다.


뭔가 공부를 하거나 배운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펼치는 대신 몰랐던 단어의 뜻을 알아가는 재미, 내가 알게 된 것을 가족이나 친구에게 쉽게 알려주는 기쁨으로 책을 만나면 좋겠다. 우리말보다는 외래어, 줄임말에 익숙한 청소년 세대가 많이 접했으면 좋을 책이다. 다이어리 꾸미기처럼 첨부된 책 꾸미기 스티커로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이 책을 완독하고 나면 우리말을 쓰면서 자신감이 상승할 것이다. 물론 한 번으로는 어렵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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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2-12 0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은 다 다른 몸을 입고서 태어납니다. 모든 사람은 머리숱이 다르고, 머릿결이 다르고, 키와 몸무게와 얼굴과 맵시가 다릅니다. 모든 사람은 이도 다르지요.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우리나라는 겉모습에 지나치게 치우치면서 ‘다 다른 사람’이 ‘다 똑같은 겉모습’이어야 한다고 여기기 일쑤입니다. 얼굴을 꾸미거나 고쳐야 한다든지, 살을 빼거나 붙여야 한다든지, 이빨을 줄세우듯 맞춰야 한다고 여기고 맙니다.

때로는 머리카락이나 몸이나 이를 살짝 다독일 수 있습니다만, 모든 사람이 얼굴뼈와 머리뼈가 다르기에 이도 다르게 마련인데, 그저 줄세우듯 이를 쇠줄로 친친 감아서 맞추려 하면, 오히려 나중에 뼈가 어긋나고 맙니다. 얼굴을 비롯해 몸에 자꾸 칼을 대어 고친 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고치고 손볼 일이 늘어납니다.

저는 우리말꽃(국어사전)이라는 꾸러미를 쓰고 엮는 일을 하는 터라, 어느덧 서른 해째 곳곳에 ‘우리말 이야기(강의)’를 들려주러 다니기도 하고, 노래쓰기(시창작)를 들려주기도 하는데, 이웃님한테 으레 여쭙는 몇 가지 말씀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하나는 “‘맞춤말(표준어·정서법·철자법)’에 얽매이지 말라”입니다. 글쓰기를 거드는 풀그림을 쓸 적에 맞춤틀(맞춤법 검사기)을 켜는 분이 꽤 많은 줄 알지만, 맞춤틀은 아예 끄고서 글을 써야 한다고 여쭙니다. 맞춤틀을 켜고서 쓰는 글로 갇히면 ‘글다운 글’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글은 ‘말’을 옮깁니다. 말은 ‘마음’을 담습니다. 마음에는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고 가꾸고 누린 ‘삶’이 담깁니다. 그래서 “글쓰기 = 말하기 = 마음짓기 = 삶쓰기”인 얼거리입니다. 우리가 글을 쓰는 뜻이라면, “보기좋거나 반듯하거나 멋스러운 겉모습인 글”이 아닌, “내가 내 나름대로 살아내고 살아왔고 살아가려는 꿈을 그리는 이야기를 옮기는 글”이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글을 쓸 적에는 “맞춤길에 틀린 곳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내 눈으로 보고, 내 몸으로 겪고, 내 손으로 짓고, 내 발로 다니고, 이리하여 내 온마음에 고스란히 담은 이 삶을 어떻게 담느냐”를 바라볼 노릇입니다.

맞춤틀을 켠 채 글쓰기를 할 적에는, “내 삶을 내 손끝으로 가다듬어서 옮길” 적에 자꾸자꾸 ‘띄어쓰기가 틀렸’다든지 ‘바로적기가 아니’라든지 ‘서울말(표준말)이 아닌 사투리를 쓰면 안 된’다든지 하면서 자꾸 끊기거나 바뀌곤 합니다. 이렇게 걸리고 멈추고 바뀌다 보면, 막상 “내 삶을 담는 글쓰기”를 잊거나 등지면서 “틀린 말씨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틀”에 갇히지요. ‘글쓰기’가 아닌 ‘글만들기’로 기울어 갑니다.

‘정서법·철자법’은 일본에서 영어를 비롯한 먼나라 글살림을 받아들여서 배우는 동안 일본에서 지은 한자말입니다. 일본말씨입니다. 우리 글살림이 아닙니다. ‘일본옮김말씨(일본식 번역체)’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맞춤길(정서법·철자법)을 따지는 글살림을 폈어도, 고을마다 고을말이 고스란하더군요. 우리나라는 경상말과 전라말과 강원말과 충청말과 경기말과 서울말이 이제 낱말은 그냥 똑같으면서 높낮이나 밀당만 조금 다를 뿐인데, 일본은 오늘날에도 도쿄·쿄토·오사카·훗카이도·류우큐우·구마모토…… 사투리가 대단해서, 서로 말을 못 알아듣기도 합니다.

사투리가 죽은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죽는다고 느낍니다. 사투리가 싱싱하게 살아숨쉬는 나라는 말과 글도 나란히 빛난다고 느낍니다. 사투리는 그냥 ‘고을말’이 아니라, 스스로 살아가고 살림하고 사랑하는 하루를 스스로 가꾸고 빚은 말씨입니다. 남을 흉내내지 않고서, 스스로 생각하고 가꾸는 마음을, 스스로 깜냥껏 엮고 빚어서 드러내는 ‘새말짓기’가 사투리입니다. 우리나라 맞춤틀은 바로 이 사투리를 깡그리 죽이거나 억누릅니다.

그런데 이런 대목에서 그치지 않더군요. 저는 미역국을 끓일 적에 멸치나 고기를 아예 안 씁니다. 이를테면 풀밥(채식) 미역국인데, 무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무미역국’이고, 배추를 바탕으로 미역국을 끓이면 ‘배추미역국’입니다만, 맞춤틀을 켠 채 글을 쓰면 ‘무 미역국’이나 ‘배추 미역국’처럼 띄라고 붙잡지요. 맞춤틀은 우리가 새롭게 가꾸거나 짓는 모든 살림살이하고 얽힌 낱말을 고루 담지 않거나 못 합니다. 또한 맞춤틀은 다 다른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를 하나도 못 담거나 안 담습니다. 우리가 쓰는 한글은 온갖 새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까지 낱낱이 갈라서 담을 수 있다고 합니다만, 정작 다 다른 새소리나 물소리나 바람소리를 글로 담는 글바치는 이제 아주 보기 어렵습니다.

참새만 하더라도 ‘짹짹’ 노래하지 않습니다. 째째째째 찌찌찌지 쮜쮜 찟 찟 찌르릉 쪼릉 찌링 짭짭 칫칫 치리치리 짜르르르릉 쪼빗쪼빗 ……처럼 끝없이 다 다르게 노래하는데, 이런 ‘참새소리’를 맞춤틀을 켠 채 쓰면 다 고치거나 지우라고 나오지요. 더욱이 ‘참새소리’나 ‘박새소리’나 ‘딱새소리’처럼 붙여쓰기를 할 수도 없는 맞춤틀입니다. ‘바람소리’도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없기 때문에 띄어쓰기를 하라고 나올 텐데, 왜 띄어야 할까요?

글을 쓸 뜻이라면, 글로 내 마음을 담으려는 길이라면, 글로 내 삶과 살림과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려는 하루라면, 우리는 이제 맞춤틀을 끌 일입니다. 이러면서 낱말책(사전)을 읽을 일입니다. 비록 국립국어원 낱말책이 우리 살림말을 두루 안 담았어도, 가장 수수하고 흔하다고 여길 낱말부터 찾아볼 노릇입니다.

글쓰기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열이나 스물쯤 이를 낱말책을 늘 자리맡에 놓고서 일부러 들춰서 읽을 노릇입니다. 왜냐하면, 익숙한 말이란 있을 수 없거든요.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말꽃을 쓰는 일을 하지만, 날마다 낱말찾기(사전 검색)를 끝없이 합니다. 아주 흔하고 수수한 ‘하다·있다·보다·가다’ 같은 낱말도 여태까지 10만이 훨씬 넘도록 다시 찾아보고 살펴보고 읽으면서 새기고, 낱말풀이를 제 나름대로 가다듬습니다. 우리말이건 한자말이건 영어이건 다 찾아볼 노릇입니다. 우리가 쓰는 글에 담는 모든 낱말을 낱낱이 낱말책에서 손으로 종이를 넘기면서 살펴보고 찾아볼 때에 글힘이 붙고 글살림이 피어납니다. 익숙하게 쓰던 말씨라고 여겨서 낱말책을 안 뒤적이는 사람은 글힘이 사라지고 글살림이 안 자라더군요.

바로적기(표준어·정서법·철자법)가 좀 어긋나더라도 글이 엉망이거나 못날 수 없습니다. 띄어쓰기가 좀 틀리더라도 글이 엉터리라거나 어설플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바로적기와 띄어쓰기를 내려놓을 일입니다. ‘마음쓰기’와 ‘삶쓰기’를 할 일이라고 느낍니다.

국립국어원 낱말책에 ‘신나다’라는 낱말이 2014년에 드디어 실렸습니다. 저는 2001년부터 국립국어원에 왜 ‘신나다’를 올림말로 안 싣느냐고 따졌습니다만, 열네 해 동안 “사람들이 ‘신나다’처럼 붙여쓰는 일이 드물기 때문에 올림말로 안 싣는다”는 대꾸만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왜 ‘신 나다’처럼 띄어서 쓸까요? 바로 맞춤틀 탓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입으로 말을 할 적에 “신 나요”처럼 띄어서 말하지 않습니다. “짜증 나!”처럼 띄어서 말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신나!”에 “짜증나!”처럼 ‘붙여말하기’를 합니다. 다시 말씀을 여쭙니다만, 국립국어원은 2014년에 드디어 ‘신나다’를 올림말로 삼았습니다만, 2025년 오늘까지도 ‘짜증나다’는 올림말로 안 둡니다. 이밖에도 ‘쓸모없다’는 올림말로 있으나 ‘쓸모있다’는 올림말로 없습니다. 아직도 ‘아들딸’만 올림말일 뿐, ‘딸아들’은 올림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맞춤틀로 글을 쓴다면 ‘아들딸’로 적을 적에는 붙여쓰기로 두겠지만, ‘딸아들’로 적으면 맞춤틀은 ‘딸 아들’처럼 띄라고 나옵니다.

글쓰기를 하다가 이런 작디작은 낱말에서 자꾸 멈추거나 걸린다면, 우리가 드러내거나 담거나 나누려고 하는 마음과 삶을 잊거나 놓치기 일쑤입니다. 숱한 사람들이 ‘가르치다·가리키다’를 가려쓰지 못 하더라도 그리 대수롭지는 않습니다. 두 낱말을 섞어서 쓰거나 잘못 쓰더라도 우리는 이 낱말을 쓰는 분이 무슨 말과 무슨 이야기와 무슨 마음을 나타내려고 하는지 알아듣습니다.

저는 전라남도에 삽니다. 전남에서도 고흥이라는 시골에서 살기에 곧잘 전남말이나 고흥말이 튀어나옵니다. “그랑께요.”라든지 “거석한디요.” 같은 말을 글로 옮기면, 이런 사투리도 맞춤틀은 다 지워버리려고 합니다. “그란디 말이죠” 같은 사투리를 “그러한데 말이지요”처럼 굳이 서울말씨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굳이 “우리말의 정확하고 올바른 사용”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말을 알맞고 즐겁게 쓰”면 넉넉합니다. “올바른 우리말 사용”이란, 우리 마음을 스스로 옥죄고 억누르고 가두는 틀이라고 느낍니다. 우리가 마음을 기울일 곳이라면 “즐겁고 신나게 우리말 노래”로 나아갈 일이지 싶습니다.

우리는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다 다르지만 다 닮은 듯한, 이러면서도 마음으로 다가가고 다가오면서 새롭게 다룰 말씨(말씨앗)”을 물려주기에 어른스럽습니다. 이렇게 해야 맞는다든지, 저렇게 하면 틀리다고 금을 긋는 틀이 아닌, ‘마음·말·만나다·마주·맑다·물’이 얽힌 수수께끼를 들려주면서 ‘밤·밝다·밭·바탕·바다·바닥·바람·파람(휘파람)·파랑·팔·활개·팔랑·펄럭·날개’가 얽힌 말밑을 하나하나 짚고 알려줄 적에 비로소 어른답다고 봅니다.

자목련 2025-02-17 11:55   좋아요 0 | URL
숲노래 님, 답글이 늦었습니다. 귀한 글 감사합니다.
익숙한 말과 다 아는 말도 있을 수 없다는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숲노래 님이 사시는 곳은 봄이 가까이 있을 것 같습니다.
건강하고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