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의 긴 여행 ㅣ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유디트 헤르만 지음, 우영주 옮김 / 마르코폴로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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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디트 헤르만의 소설 『집으로의 긴 여행』은 이상한 소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짧은 분량의 소설은 이렇다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묘사와 풍경이 전부라 말할 수 있다. 뭔가 일어날 듯하면서도 일어나지 않는 묘한 긴장감. 선뜻 명확하게 말하기가 어렵다. 쉽게 수월하게 읽히지도 않았다. 책을 덮고 나서야 자꾸 소설 속 인물이 생각난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어떤 이름으로도 호명되지 않은 ‘나’의 하루를 상상하게 된다. 이런 게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이 지닌 특유의 분위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의 글을 읽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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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30년 전의 기억으로 시작한다. 담배 공장에서 일하며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반복되는 ‘나’의 무료한 일상에 찾아온 기회. 그것을 선택했을 때 기회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그것은 한 남자의 제안이었다. 자신을 마술사라 소개하는 남자는 ‘나’의 키가 적당하다며 자신의 상자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톱질당하는 젊은 여자,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그저 누워있기만 하면 되고 빨간 원피스를 입기는 해야 한다고. 고민하던 ‘나’는 마술사가 알려준 집으로 찾아간다. 마술사와 그의 아내를 만나 설명을 듣고 직접 상자에 들어가 몸을 웅크려본다. 마술사는 크루즈 오로라호를 타고 싱가포르로 떠날 거라며 7일 후에 만나자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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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조금씩 짐을 챙겨 공장에는 말하지 않고 떠나기로 한다. 그러나 떠나지 않았고 ‘오티스’를 만나 결혼했고 딸 ‘앤’을 낳았다. 앤은 열여덟 살이 되자 집을 떠났고 나는 오티스와 이혼했다. 그리고 지금은 오빠 〈사샤’가 있는 동네에서 오빠 가게에서 일을 돕고 있다. 오빠와 한 집에 사는 건 아니고 혼자 지낸다. 옆집에는 ‘미미’라는 여자가 산다. 한때 오빠와 사귄 여자. 조각가이자 화가인 미미는 세 번의 결혼을 했지만 실패했다. 미미의 부모는 돼지 농장을 운영한다. 남동생 ‘아릴드’는 가족이 아닌 여자를 선택했는데 여자가 떠나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60을 바라보는 오빠는 스물한 살의 여자친구 ‘니케’가 있다. 오빠 입장에서는 애인이고 니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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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로 시작했던 소설은 사샤, 미미, 니케, 아릴드가 등장하며 그들의 이야기가 합쳐지고 확장된다. ‘나’는 혼자 지내면서 앤의 연락을 기다리며 일상을 오티스와 공유한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은 미미의 등장으로 달라진다. 혼자 지내는 집의 천장에서 들리는 이상한 소리, 그 짐승을 잡기 위해 아릴드가 덫을 놓지만 잡히지 않는다. 거침없이 자유로운 미미, 뿌리가 어디 있냐고 묻는 미미와 함께 바다에 나가 수영을 한다. 아릴드의 농장에서 그와 밤을 보내기도 하고 사샤의 집에서 니케를 게임을 한다. 니케가 과거 어린 시절에 상자에 갇혔었다는 말을 듣는다. 니케가 겪은 일은 방임이었고 가정 폭력이었다. 사샤는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라고 하지만 ‘나’는 집으로 간다고 말한다. 오빠가 생각하기엔 집이라 할 수 없는 그곳으로.




나는 부엌에서 나와 정원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길의 가로등은 이미 깨졌고, 모두가 잠들었다. 하늘은 높고 별이 가득했다. 포근한 밤이었다. 마을을 나와 어두운 시골길을 따라가면, 들판에 묵직하게 서 있는 외딴 농장이 보였다. 이 세상은 나의 세상이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여기 있기 때문에. 그게 전부다. (83쪽)


분명 닫힌 현관문이 열려 무섭고 천장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안전하다 할 수 없는 곳이지만 나에게는 집이다. 옆집의 미미도 있고 친구라 할 수 있는 아릴드도 있다. 오티스와 앤의 기억이 있는 그곳을 떠났다. 떠날 수밖에 없었다. 오티스의 집은 물건으로 가득 찼고 앤과 살았던 집에서 앤은 떠났으니까. 어린 시절에도 그런 공간이 없었다.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왔지만 집을 들어갈 수 없었던 시절.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엄마. 열쇠가 없던 사샤와 계단에서 기다려야만 했던 그때에도 집은 없었다.


나를 비롯한 미미, 사샤, 니케, 아릴드도 다르지 않았다. 저마다 상실을 경험하고 상처를 지녔고 고독하게 지내고 그들만의 집으로 돌아왔다. 불운과 불행이 익숙한 고립된 섬처럼 살았지만 서로를 만나 연결되고 관계를 맺는다. 아직은 서툴고 위태로운 듯 보이지만. 떠났다 돌아올 수 있는 곳, 나는 앤에게 그런 곳이고 싶다. 어쩌면 앤에게는 여행 그 자체가 집일 수도 있다. 억지스럽게 의미 부여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나쁜 소식이 없는 평화로운 신문을 읽으며, 매일 아침으로 완숙 달걀 세 개를 먹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렇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하고, 그리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111쪽)


거칠고 쓸쓸한 분위기로 가득한 소설이지만 그 끝에는 다른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 작은 찻잔의 온기, 열어둔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다 내음, 점점 가까워지는 자전거 소리, 그리고 마침내 ‘나’를 부르는 기다리던 목소리 같은 것들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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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사로 인생 공부 - 내 삶을 비추는 명문장 100 필사집
오수경 지음 / Birdbox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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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는 거리가 먼 친구에게 선물한 책. 주문하면서 살펴보니 내가 좋아했던 드라마 대사도 보여 반가웠다. 책과는 상관없이 요즘 꽂힌 드라마 <연애박사> 속 대사는 이렇다. “나는 한번 삼키면 절대 안 토해. 타 죽어도 절대로 안 토해. 절대로 못 돌아와. 끝까지 가는 거야. 그래도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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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착한 나진 ㅣ 오늘의 젊은 작가 60
이서수 지음 / 민음사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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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려고 나섰는데 낯선 여자가 앉아 있다면 어떨까? 순간 아찔할 것이다. 집을 잘못 찾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무시할 수도 있다. 조심스레 문을 닫고 가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우리의 ‘나진’은 그러지 못한다. 제목이 암시하듯 나진은 ‘착한’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이고 싶으니까. 여기서 뭐 하냐고 묻는다. 불편은 감추고 친절하게.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내 집까지 찾아올 수 있다는 설정은 너무 무섭다. 오래전 알았던 사이라 해도 연락이 끊겼으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니까.


낯선 여자는 나진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15년 전 나진이 국어 과외를 했던 학생 중 하나인 다혜였다. 힘들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냐고. 세상에나 그 말을 믿고 찾아왔다고? 15년이나 지났는데. 어떻게 찾았을까? 나진은 다혜를 집에 들이고 출근한다. 나진과 다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진은 왜 다혜를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을까. 다혜가 반가워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어쩔 수 없어서, 상황을 모면하려고 그랬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걸 다혜가 의도했다면 나진의 일상은 어떻게 될까?


스물셋의 나진과 열다섯의 다혜를 생각하면 어른과 아이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서른여덟의 나진과 서른 살의 다혜의 현재를 보면 둘 다 성인 여자이다. 서른 살 여성이 도움을 청할 사람이 나진뿐이었을까. 정말 그래서 찾아온 것일까. 다혜에겐 어떤 사정이 있을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착한 나진은 그렇게 다혜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보호와 돌봄이 필요했던 열다섯의 다혜를 떠올리며, 그때나 지금이나 나진은 그저 선의를 베푸는 것이다.


다혜는 청소를 하고 밥을 해놓고 나진을 기다리며 제 집처럼 지낸다. 제발 빨리 나가주기를 바라는 나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말이다. 나진은 다혜를 볼 때마다 15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나진은 최선을 다했다고 여기며 과거에서 벗어나려 애쓴다. 다혜 말고도 나진에게는 골칫거리가 있다. 회사를 그만둔 직원 이상우가 훔쳐 간 비품 때문인데, 나진과 연결시키려면 연결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과거 나진에게 고백했던 상대이기도 해서 찜찜한데 그 물건을 맡아달라며 나진에게 보낸 것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나진은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편하지 않다.


설상가상 전세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대출도 없는 전 재산으로 얻은 전세였는데 사기라니. 부동산 중개인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나진 대신 다혜는 아무렇지 않게 제 일처럼 모든 걸 해결한다. 집을 구하고 짐을 정리하고 이사를 주도한다. 집을 구하는 비용도 모두 다혜가 해결했다. 회사도 그만두었는데 이상우가 사장 부인과 외도를 했고 나진과 삼각관계였다는 괴소문 때문이다. 지칠 대로 지친 나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혜가 차려준 밥을 먹고 다혜가 이끄는 대로 생활한다. 다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외출을 하는데 무엇을 하러 다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다혜는 엉뚱하게도 나진에게 복수를 해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 전세 사기를 친 사람을 찾아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걸 아는데. 나진에게 이제 일상은 욕이 되었다. 욕이라도 해야 살 수 있었으니까. 사는 동안 내내 착하게(착한 사람으로 보이게) 살아왔는데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 세상을 원망하고 사기 친 사람을 욕할 수밖에 없다. 그런 나진을 다혜는 조금씩 움직이게 만들었고 부동산 중개인에게 사과를 받아낸다. 동네 산책을 하고 벚꽃을 구경할 수 있게 만든다. 주인집 할아버지와 막걸리를 마시고 할아버지가 키우는 개 찐빵과도 친해진다. 15년 전 학교에서는 왕따를 당하고 엄마의 방치와 빚 때문에 혼자 집에 남겨진 다혜를 선의로 도왔던 나진이 지금은 다혜의 돌봄을 받는다. 춥고 혹독한 겨울과 봄과 여름까지.


나진은 이제 달라졌다. 그 달라짐이 나쁘지 않다. 착한 나진도 아니고 우리의 나진도 아니다. 그냥 나진일 뿐이다. 이사면서 가지고 온 이상우의 물건(횡령을 위한 낡고 바랜 A4용지)을 돌려주리고 한다. 이상우는 부산에 있다며 나진에게 부산으로 오라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나진은 부산에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상우의 친구가 운영하는 탁구장에서 둘은 만났다. 이상우에게 따지고 화를 낸다.


나진은 아무 대꾸 없이 찢어진 용지를 한 아름 모아 든 다음 이상우가 서 있는 네트 너머로 힘차게 내던졌다. 파괴되기 전에는 못 넘어가도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 이상우는 그걸 모르는 것 같았다. 나진도 예전엔 몰랐다. (166쪽)


나는 '파괴된 뒤에는 어디든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이 통쾌하고 기분이 좋아서, 몇 번을 읽었다. 우리 착한 나진이 파괴하지 못한 것. ‘우리’와 ‘착한’을 생각하면서. 나는 무엇을 파괴하지 못했을까. 무엇에 갇혀 있고 끌려다니고 있을까. 그럼 다혜는 진즉에 파괴된 것일까, 아니면 파괴한 것일까? 타인의 삶을 파괴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사기를 치는 사람과 사기를 당하는 사람, 선의와 호의를 악용하는 사람, 직장에서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는 사람. 어쩌면 누군가의 진심을 아는 건 어렵고 진심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도 않는 세상에서 속내를 감추는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스릴러 같기도 하고 사회고발 소설 같기도 하다. 어른의 역할이 부재한 사회, 해결하지 못하는 전세 사기까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은 어디에도 없다는 걸 확인시키면서 그럼에도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건 돌봄과 연대가 아니겠냐고 말한다.


“넌 참 이상한 사람이야. 그렇지만 너의 일부분은 좋아. 싫은 점도 있지만 참아 줄 만해. 결국 그런 사람을 곁에 두게 되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가 어느 한 시기에 내 곁에 있었던 나진 씨를 못 잊는 것처럼 나진 씨도 어느 한 시기에 곁에 있었던 나를 못 잊었으면 좋겠어. 이 집에서 보낸 봄과 여름을.” (196쪽)


소설에서 나진를 부르는 다혜의 호칭은 세 번 변하는 데 그게 참 좋았다. 그건 관계의 변화이기도 하고 둘 사이의 거리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니까. 선생님으로 시작해, 언니, 그리고 나진 씨. 수직관계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대등한 관계. 비로소 어른과 어른으로 마주한 두 사람의 모습은 독립적이면서 아름답다. 마침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나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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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6-10-2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 좋아하는데, 이책도 읽어야 하는데...

자목련 2026-10-27 09:28   좋아요 0 | URL
이서수 작가 좋아하시면, 이 소설도 만족하실 것 같아요!

꼬마요정 2026-10-23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섭게 시작해서 나름 희망차게 끝나는군요. 이 책 읽어보고 싶습니다.^^

자목련 2026-10-27 09:29   좋아요 1 | URL
이 책, 좋았어요. 꼬마요정 님도 좋아하셨으면 좋겠어요!

Jeanne_Hebuterne 2026-10-29 0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서수 작가의 이야기는 늘 좀 살벌한 밥벌이를 배경으로 조용히 쉴 곳을 찾는 것 같은 목소리여서, 이 책도 궁금했는데 자목련님 리뷰 보니 읽어야겠구나! 싶은 마음!

자목련 2026-10-30 09:30   좋아요 0 | URL
정말 정확한 표현이네요! 궁금하셨다면 충분히 만족하실 거라 생각해요. 좋았던 소설이거든요!
 
우리 세희 ㅣ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58
조해진 지음 / 현대문학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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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살아간다. 나의 안위와 행복이 우선이다. 나의 상처에만 매몰되어 주변을 둘러볼 여력이 없다. 그러다 움찔한다. 나를 둘러싼 우리를 만난 때,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과 마주했을 때 말이다. 누군가 역사의 한 조각이라 말하고 누군가 나로 이어져, 나와 연결된 단단한 뿌리라 말한다. 나의 조부모가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았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나는 그들의 젊음을 모르고 부모의 시간을 모르는데 말이다.


조해진의 『우리 세희』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끊임없이 타인을 향한 연민과 이해를 놓지 않으려는 작가임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그 무게가 달랐다. 어쩌면 실존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소설로만 읽어도 이루 말할 수 없는 슬픔과 맞닿는다. 한 사람의 생이 이처럼 참담할 수 있을까. 역사라는 거대한 운명 앞에 한 개인의 삶은 무참히 무너질 수밖에 없는가. 끝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이방인이었던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자 기쁨이었다.


소설은 업무를 위해 런던에 도착한 연주가 선생님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선생님은 연주의 죽은 엄마 오세희와 연결된 분으로 연주 자신과도 이어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엄마와 같은 세계와 속한 사람이라고 해야 할까. 엄마가 한국에 오기 전 살았던 그곳, '자이니치'로서 재일한인들이 살았던 대학시절 선생님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선배이자 친구로 지낸 선생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다. 선생님은 일본에서 나오 자랐고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했지만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차별과 냉대를 받았다. 선생님과 센세를 만날 때마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로 연주는 이제껏 생각하지 않았고 몰랐던 시절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이 떠나면 일본의 양로원에 계시는 치매를 앓는 외할머니를 제외하면 엄마 세희를 기억할 사람은 선생님의 아내 센세뿐이다.


연주가 런던에 온 이유는 일본계 영국인 예술가 ‘제이비 류’를 취재하기 위해서다. 그가 제주 4·3의 비극을 다룬 자품을 전시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연주가 런던에 머무는 3일 동안 선생님의 죽음과 동시에 연주 엄마 세희의 삶을 들여다본다. 현재 런던에서 연주가 느끼는 이방인을 향한 차별과 세희가 서울에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타인의 시선, 선생님과 엄마의 부모가 살아온 오사카의 삶을 교차하며 들려준다.


'자이니치'로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다시 일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서글프고 고단한 삶에 대해서. 단 3일이라는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연주는 모멸감을 느끼고 치욕스러웠는데 엄마 세희와 외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땠을까. 1942년 원산에서 오사카 항만공사 인부로 강제 징용된 세희의 부모,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했던 시간. 그럼에도 세희는 단 한 번도 일본 사람이었던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는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로,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왔다는 이유로 조롱거리가 되었다. 세희는 평생 한국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내력이 죄가 되고 죄는 죄책감으로 수렴되는 삶이었다. (47쪽)





한국 어디에도 기댈 수 없던 세희가 자신을 아는 선생님과 재회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 어린 연주는 그런 엄마를 지켜보며 세희가 선생님과 센세를 만났을 때 보였던 모습을 지울 수 없다. 연주가 런던에서 단 3일 동안 머무는 동안에 받았던 이방인으로의 시간을 세희와 선생님, 그리고 그들의 부모는 평생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그건 그들이 원한 것도 아니었고 잘못도 아니었다. 역사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견디며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그랬기에 세희의 오빠는 세희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 북으로 떠난 것이다. 동생은 자신과 달라야 하니까. 그러나 그렇게 북으로 떠난 오빠의 죽음은 세희를 가장 힘들게 했다. 그러나 세희도 알고 있었다. 오빠의 죽음은 개인이 아니라 역사와 국가의 문제라는걸. 개인을 지켜줘야 할 국가가 부재했다는 것을. 그것은 ‘제이비 류’의 작품에서도 이어진다. 그의 할아버지가 고향 제주에서 겪었던 무자비한 폭행도 역사와 국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라는 것. 살아남기 위해 그곳을 떠나야 했던 심경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는가. 오롯이 혼자 감당해야 할 거대한 슬픔을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알 수 없다. 다만, 세희와 선생님이 서로에게 회복의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할 뿐이다. 거기에 그들의 이야기를 듣은 연주가 다시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려 한다는 것을. 세희라는 이름 속에 담긴 그들의 사랑과 기쁨, 그리고 소망을 말이다. 기억이 흐려져 손녀인 연주를 세희라 부르는 외할머니의 목소리마저도 소중하다.


‘세’ 뒤에 ‘희喜’를 넣어 ‘세희世喜’를 완성한 사람은 외할아버지였다. 세이지 sage의 꽃말은 ‘구원’. 그러니까 ‘세희’는 세상과 세상에 속한 스스로를 구원하면서 기뻐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의미였다. 히로코가 그저 몸에 맞는 옷이라면 세희는 보호막 같은 옷에 가까웠다고 엄마는 말했다.

세희야,라고 불리면 더 이상 무서울 게 없었다고도. (95~56쪽)


우리는 때로 아프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역사를 지나간 과거로 여긴다. 현재가 아닌 과거니까. 돌이킬 수 없고 바꿀 수 없다고 쉽고 안일하게 생각한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책을 통해, 수업을 통해 그런 일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았다. 나는 모어를 잃은 적이 없고, 전쟁을 경험한 적도 없고 단 한 번도 이방인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여기 나로 존재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으니까. 역사의 고통은 온전히 회복될 수 없고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는 걸 몰랐다. 그 불가능한 상처를 잊어버린다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그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몸 안에 새겨져 있다. 숨이 멎는 날까지 내 피와 뼈에 저장된 그들의 이야기는 단 한 줄도 분실되지 않으리라. (116쪽)


그러니 나는 이제 기억하려 한다. 보호막 같은 옷을 입은 세희의 마음을, 감히 우리 세희라 불러본다. 조해진의 소설을 통해 연주처럼 내 몸에 새겨둔다. 언제 어디서든 모어를 말하고, 어디든 갈 수 있고, 원하는 삶을 위해 살아갈 수 있는 내가 여기 존재할 수 있는 근원에 대한 감사를 전한다. 그리고 단호하게 말한다. 간직하고 기억하여 잊지 않겠다고, 나와 우리는 그들과 이어져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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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 사과
박솔뫼 외 지음 / 북다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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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기도 전에 기대하는 게 있다.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6』 대상작인 박솔뫼의 「사과」가 그랬다. 정확하게는 기대가 아니라 떠오르는 소설이 있었다. 박솔뫼의 「사과」란 제목과 흩어지는(이별하는) 과정을 담았다는 소개에서 나는 은희경의 단편 「내가 살았던 집」속 문장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사과 역시 자기들끼리 닿아 있는 부분에서부터 썩기 시작한다는 걸 알았다. 가까이 닿을수록 더욱 많은 욕망이 생기고 결국 속으로 썩어 문드러지는 모양이 사람의 집착과 비슷했다. 갈색으로 썩은 부분을 도려냈지만 살이 깊게 팬 사과들은 제 모양이 아니었다. (「내가 살았던 집」 중에서)


하지만 박솔뫼의 「사과」는 결이 달랐다. 뭐랄까.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은 채 다투지 않고 헤어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것은 우리의 일상에서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박솔뫼의 소설이 예의 그랬듯이 산책하듯, 걷고 이동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를 담은 듯했다. 「사과」의 주인공 ‘애리’도 다르지 않았다. 사원 숙소를 제공하는 회사에 다니는 애리는 주 4일일하고 주말엔 카페에 나간다. 애리는 기차를 타고 이동한다. 카페의 손님이자 커피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커피의 맛을 구현하는 일을 하는 ‘선호’를 만난다. 애리와 선호는 가까워지며 선호의 집에서 주말을 보내기도 한다.


선호가 출장을 가면서 애리는 선호의 집에 머물며 선호의 화분을 돌본다. 보통의 연인이라면, 아니 소설에서 그런 관계를 다룬다면 떨어져 있는 게 힘들어 보일 텐데 둘 사이에는 그런 게 없다. 애리는 선호가 출장에서 돌아오면 둘 사이가 멀어질 거라는 걸 아는 듯하다. 특별한 사건 없이 말이다. 이상한 건 시간이 흐른 뒤에 둘은 여전히 카페 직원과 손님 사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모든 게 예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커피 본연의 맛이 사라진 세계에서 커피를 파는 카페 직원 애리와 다르게 아버지를 통해 그것을 아는 선호, 회사 숙소에서 출퇴근하는 애리와 부모님이 남겨준 바닷가 근처에 건물을 세놓은 선호. 선호는 애리를 흙이 묻은 감자를 굳이 씹어 먹는 사람이라고 느꼈고 애리는 자신이 먹던 건 사과라고 보여줄 수 있었지만 변호하지 않았다. 어떤 만남은, 어떤 연애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서서히 이별이 이어지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사과」는 연인 사이의 이별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서로 다른 존재라는 인식과 삶이 흐르는 대로 흘러가게 놔두는 삶의 순간에 대한 포착이라고 할까.


박솔뫼의 「사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설정은 ‘잠’이었다. 내가 느끼기에 애리는 잠이었고 선호는 꿈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를 잠이라고 구현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박솔뫼뿐이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것, 내가 언제든 갈 수 있는 공간, 잠.


애리는 잠이라는 상태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잠이라는 장소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여긴다. 어느 곳에서 살든지 나에게 잠이라는 곳이 있고 나는 잠을 잘 때 그곳에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 「사과」, 14쪽)


잠과 꿈은 서로 다른 존재로, 잠은 자신에게 주어진 장소이고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공간이었다. 꿈은 애리가 가끔 볼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래서 애리는 잠을 자지 않을 때도 가끔 꿈을 꿀 수 있었다. ( 「사과」, 22쪽)





자선작 「비둘기 옮기기」도 흥미롭다. 여러 나라의 도서관에서 시간을 보내며 지금 읽는 것을 다른 것으로 옮기고 싶다는 열망에 지닌 화자의 이야기.‘도쿄’와 ‘나카타’를 거닐며 마주한 풍경과 사유. 그것은 박솔뫼 본연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비둘기와 고양이는 같을 수 있을까. 아니면 얼마나 다를까. 서로 다른 존재를 옮기는 일, 서로 다른 존재를 옮기는 것과 말하는 것. 그것은 이해하고 노력하는 일일 것이다. 「사과」와 「비둘기 옮기기」는 박솔뫼의 매력에 빠지기 충분한 단편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게 읽었다는 말은 아니다. 박솔뫼의 소설은 풍경, 산책, 걷기, 이동과 같은 분위기로 남았다.


비둘기를 고양이로 옮길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비둘기는 이전처럼 보이지 않기는 했고 비둘기는 날아가지도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후로 나는 비둘기를 이전과 같이 보지 않고 아주 조금 고양이처럼 보게 되었다. (「비둘기 옮기기」, 54쪽)


5편의 우수작품상도 나쁘지 않았다. 성혜령의 「하악」은 화자 ‘자인’이 보낸 마흔 번째 생일 이야기다. 엄마와 함께 장애시설에 거주하는 여동생 ‘태인’을 보러 가고 나머지 시간은 사촌 동생인 ‘서린’을 만나는 하루를 담았다. 장애를 가진 태인, 완벽한 외모를 가진 서린, 그 사이에 자인.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을 대비하면서 우리 사회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자기들은 정상이고 너희들은 비정상이라며 분명하게 선을 긋는 사람들. 이제 자인은 분노하지 않는다. 구분하는 게 편리하다는 걸 자인도 아니까. 실은 자인도 이 시설과 마을로부터 분리되고 싶으니까. (「하악」, 100~101쪽)


정희원의 「영주」는 학교 폭력 피해자인 ‘영주’가 가해자이자 방관자였고 현재 작가가 된 화자 ‘우진’을 느닷없이 찾아와 자신의 죽음을 지켜봐 달라고 말하는 이야기다. 우진에게 영주의 등장은 잊고 살았을지 모르는 과거가 불쑥 나타나 자신을 옥죄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우진은 그런 영주를 피하지 않고 만나고 영주가 원하는 곳으로 운전을 한다. 과거의 죄의식 때문일까.


반려견 ‘조아’의 유골함을 어디에 안치할까 고민하다 가족묘에 안장하기로 한 임솔아의 「나의 빈 묘에」, 우연히 발견한 벽에 박힌 쇠갈고리로 자신의 거죽을 벗긴다는 기이한 설정의 정기현의 「그거 점 된다」, 사고로 인해 두 다리가 마비된 ‘세진’의 재택근무 일상과 제목 그대로 일일업무를 보고하는 하루를 담은 황시운의 「일일업무 보고서」까지 현재를 살아가는 다양한 우리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문학이라는 허구의 세계로 치부할 수 없는 현실의 단면을 말한다. 사느라고 바빠서 놓치고 있던,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기는 삶과 고스란히 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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