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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전나무의 땅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7
세라 온 주잇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12월
평점 :
나이가 들면서 어렸을 때 먹지 않았던 음식을 맛있게 먹는다. 국이나 찌개에 들어 간 작은 파도 골라내던 내가 파의 고유한 단맛을 알아버렸다. 요리를 만들 때 하나라도 빠지면 아쉬운 양념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이다. 자극적인 맛이 아닌 재료 본연의 맛이 얼마나 맛있는지 말이다. 처음 만나는 세라 온 주잇의 소설 『뾰족한 전나무의 땅』은 그런 소설이다. 그러나 고수가 아니면 소설 도입 부분에서 바로 그 맛을 발견할 수 없다. 고백하자면 얇은 소설을 단숨에 읽지 못했다.
부여된 이름이 없는 화자(글을 쓰는 직업을 가진 이로 짐작)는 바닷가 마을 ‘더닛 랜딩’에서 여름을 보낸 이야기라 할 수 있는 『뾰족한 전나무의 땅』은 특별한 사건이 없이 흘러간다. 어찌 보면 똑같은 하루의 반복이며 비슷한 일상의 연속이다. 비슷하다고 해서 어제만 살지 않는 것처럼 삶은 이어진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삶도 마찬가지다. 조용하고 고요하게 지내고 싶었던 화자는 하숙집 주인 ‘토드 부인’의 따뜻한 오지랖 때문에 그럴 수 없게 된다. 야생 약초 애호가인 토드 부인은 몸이 아파 찾아온 이웃에서 복용법을 알려준다. 토드 부인을 찾는 방문객은 끊이지 않고 화자는 어느 순간 부인이 자리를 비운 사이 동업자 노릇을 하게 된다. 토드 부인은 화자를 “우리 동생”이라 부르게 된다.
토드 부인과 친밀해진 화자는 이웃의 이야기를 듣고 더닛 랜딩을 알아간다. 더닛 랜딩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게 없다. 어떤 아픔을 지녔는지, 몇 년을 어부로 살았는지, 누구와 결혼하고 혼자 남았는지, 어떻게 긴 시간을 견뎠는지. 더닛 랜딩은 그런 마을이었다.
토드 부인이 우리 이웃의 역사를 전부 이야기해주었다. 같이 어린 시절을 보냈고, 부인의 말을 빌리자면 “저마다 고생을 잔뜩 하고 그 고생의 명암을 전부 깨우칠 때까지” 함께했다. (23쪽)
소설은 화자를 통해 만난 더닛 랜딩 사람들의 삶을 들려준다. 토드 부인의 엄마와 남동생이 사는 섬 ‘그린 아일랜드’ 방문한다. 직접 배를 몰고 도착한 그곳에서 토드 부인의 엄마 ‘블래킷 부인’과 ‘윌리엄’을 만난다. 건강하고 다정한 블래킷 부인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토드 부인에게 특별한 장소로 간다. 그곳은 토드 부인이 남편과 연애할 대 즐겨 찾던 곳이었다. 그리고 남편의 이야기를 듣는다. 언제나 유쾌한 토드 부인에게도 슬픔이 있었고 외로움이 있었다.
어느새 독자인 나는 화자와 함께 그의 여정에 동반하며 귀를 기울인다. 토드 부인의 오랜 친구인 포스딕 부인의 방문과 그를 통해 듣게 된 조애나의 안타까운 삶.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고 혼자 ‘셀히프 아일랜드’에서 혼자 살아간다. 그녀를 걱정하며 찾아온 이들에게 아무도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단절된 생을 살다 죽었다. 포스딕 부인이 떠나고 화자는 이웃 선장에게 부탁해 배를 타고 그곳을 찾는다. 조애나의 무덤으로 길을 찾아가며 이제는 잊힌 조애나의 삶을 생각한다.
우리 모두의 생에는 외따로이 고립된 장소가 있다고, 끝없는 후회와 비밀스러운 행복에 바쳐진 장소가 있다고, 우리 모두가 한 시간이나 하루쯤은 동행 없는 은둔자이며 외톨이라고 나는 스스로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이 역사의 어느 시대에 속했든 우리는 이 똑같은 감옥의 수감자들을 이해하고 만다고도. (126~127쪽)
현재를 사는 이들은 조애나의 선택을 이해하기 힘들다. 그깟 사랑이 뭐라고, 자신을 버린 남자 때문에 고립된 채 살아간 그녀를 비웃는 이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것이 그녀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할 뿐이다.
화자는 더 이상 방문자가 아닌 더닛 랜딩의 일원으로 바닷가 마을의 축제에도 참여한다. ‘보든가 모임’으로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이들이 한자리에 모여 음식을 먹고 즐긴다. 미리 도착한 ‘블래킷 부인’과 함께 토드 부인과 화자는 마차를 타고 모임 장소로 향한다. 흙먼지 날리며 달리는 마차의 행렬 그 안에는 그리운 이를 만난 기대로 부푼 사람들이 있다. 곳곳에서 마차를 타고 사람들이 모여 만찬을 즐기고 추억을 나눈다. 언제나 헤어짐은 아쉬운 법. 모임이 끝날 때면 다음을 기약한다.
“다음 여름에”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아직 여름이 우리 것이고 나뭇잎이 초록임에도. (167쪽)
화자도 더닛 랜딩을 떠날 시간이 왔다. 부두에 나가서 배웅하지 않더라고 이해해달라는 말을 남기고 토드 부인은 나간다. 작별 인사를 전하려는 화자에게 고개를 젓는 토드 부인의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헤어짐의 서운함과 애석함이 가득할 것이다.
다시 들어가 아담한 집을 둘러보자 갑자기 집 안이 적적하게 느껴졌고, 내가 쓰던 방이 처음 도착했던 날처럼 텅 비어 보였다. 나와 내 소지품이 전부 죽어 없어진 듯했다. 나는 토드 부인이 귀가했을 때 손님이 사라진 집이 어떻게 보일지 깨달았다. 그래, 때때로 사람들은 눈앞에서 사라진다. 인생의 한 막이 결말에 다다르면 그저 멀거니 바라볼 수밖에 없다. (194~195쪽)
『뾰족한 전나무의 땅』는 글 쓰는 화자와 그녀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눈부신 초록과 바닷가 풍경이 따라오는 소설이다. 화자가 보낸 여름의 시간은 잔잔하고 평온하다. 그 잔잔함과 평온함을 만든 건 마을 전체를 살피는 토드 부인과 든든한 어른으로 건재한 블래킷 부인과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 살아가는 이들 덕분이다. 뱃사람으로 살아온 이들, 뱃사람인 남편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사람들. 그들은 모두 청년이 아닌 노인이며 대부분 여성이다. 소박하고 다정한 이들이 살아가는 더닛 랜딩을 그려본다.
쓸쓸한 것 같지만 전혀 쓸쓸하지 않은 바닷가 마을. 화자를 선생님이라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 가운데 유독 선명한 건 “우리 동생”이라는 토드 부인의 목소리라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잔잔한 그리움이 쌓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