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엉뚱하지만 소설가의 첫 에세이는 언제쯤 출판되는 게 좋은가 생각해 보았다. 독자에게 좋아하는 소설가의 에세이는 등단이나 활동 기간과 상관없이 언제라도 반갑다. 글이라는 건 같지만 그 주제가 다르니 기존에 만났던 글과는 색다른 분위기를 기대하게 된다.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을 떠올리면 어떤 작가는 주 종목이라고 하기엔 그렇지만 시나 소설보다 에세이가 더 좋을 때가 있다. 그리하여 그 작가의 에세이가 연이어 나오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출판사의 마케팅일지도 모른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지 모르지만 김초엽의 소설이 아닌 에세이가 반갑다는 말이다.


SF 소설에 대한 경계심을 풀어준 작가라고 할까. 그러니 김초엽이 들려주는 SF 이야기, 책과 소설 작업에 대한 이야기, 쓰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과 우연들』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그가 어떻게 소설을 쓰는 작가로 살게 되었는지, 거기가 SF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와 그로 인해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진솔한 진심이 담긴 책이다. 특히 내게는 SF에 대한 이해와 그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이 아닌 다양한 분야의 책들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막연하게 작가라면 방대한 양의 독서를 할 거라는 생각에 편협한 독자라는 답이 왠지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가 소개하는 책들은 제목만으로도 어렵고 난해한 내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는데 정작 그의 글로 통해 만나보니 궁금하고 직접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한 권의 소설을 쓰면서 부수적으로 읽은 책도 많았다. 역시 쓰기 위해서는 읽는 일도 중요하구나 싶다. 과학책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작가, 과학과 SF의 경계는 미묘하다면서도 그가 과학을 사랑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에세이에서 독자는 작가의 쓰기에 대한 이야기를 기대한다. 김초엽은 이 책에서 자신의 소설 쓰기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대학원 시절 직접 소설 쓰기 모임을 만들고 주말마다 그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때는 소설가가 되려는 생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소설 작법에 대한 책도 소개하는데 한 번씩 소설을 쓰다가 난항에 빠질 때 참고를 하는 정도였다. 결국엔 쓰기는 누군가의 기술이 아니라 저마다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그럼에도 그런 책들을 보면 든든한 마음이 드는 건 작가도 마찬가지.


에세이에서 김원영 작가와 『사이보그가 되다』를 쓰는 과정을 들려주는 부분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김초엽 작가가 후천적으로 청각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첫 소설집을 읽고 한참 후에 알았던 나는 그가 기고한 글을 검색해 읽은 기억이 있다. 해서 초고를 거의 뒤엎는 과정, 편집자가 제시한 방향성, 기술발전으로 인한 장애의 미래를 다루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고민하는 과정의 진정성이 느껴졌다. 


개인의 경험이 어떻게 사회와 연결되는지, 이 경험을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나와 타인의 경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그런 이야기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만 개인의 경험은 사적인 서술에 그치지 않고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104쪽)


다른 의미일 수 있지만 최근 노벨문학상 수상을 한 아니 에르노가 떠올랐다.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글 쓰는 일은 때로 세계 전체를 뭉쳐 내 손에 가져다 놓고, 과거와 현재 곳곳으로 나를 데려가 주는 빽빽한 거미줄 위에서 벌어지는 화려한 작업 같다가도, 때로는 나를 뚝 떼어내 좁고 작은방, 오직 책들로만 둘러싸인 방에 고립시킨다. 재미있지만 가끔은 심심하고 외롭고 심지어 고통스러울 때도 있다.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154쪽)


책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작가이기에 책방이나 읽은 책에 대한 부분은 빼놓을 수 없다. 이런 책을 사야지 하고 들어갔지만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엉뚱한 책을 손에 넣게 되는 일, 일이든 여행이든 어떤 지역을 방문할 때 작은 책방을 찾아 그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책을 사는 일. 책 목록에서 내가 읽고 좋았던 책(레이철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클라라와 태양』,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을 발견하는 일도 즐겁지만 아직 만나지 못한 새로운 책과의 우연한 만남도 즐겁다. 에세이의 제목처럼 말이다. 


어떤 책들이 우리를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세계로 이끈다면, 책방은 그 우연한 마주침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다. 좀 더 많은 책이 그렇게 우연히 우리에게 도달하면 좋겠다. 우리 각자가 지닌 닫힌 세계에 금이 간다거나 하는 거창한 일까지는 일어나지 않더라도, 적어도 우리는 조금 말랑하고 유연해질 것이다. 어쩌면 그냥, 그런 우연한 충돌을 일상에 더해가는 것만으로 충분할지도. (234쪽)


작가의 에세이는 그가 쓴 소설에 대한 궁금증과 이해를 위한 안내서 같은 역할을 한다.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소설을 썼는지,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지 전체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일부라도 느낄 수 있기에 이미 읽었던 소설이나 예정된 소설 읽기를 더욱 풍성하게 이끌어준다. 김초엽의 소설로 SF 소설에 대한 친근감이 생긴 후 예전보다 SF를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책과 우연들』 통해서 읽고 쓰는 일의 기쁨이 커졌다. 


나는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이 유토피아 자체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불가능에 맞서는 태도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2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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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1-04 13: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이참. 이런 문장을 쓰시면 괜히 저는 감동을 받잖아요.

˝개인적 경험을 토대로 자전적 글쓰기가 타인과 연결되어 어떻게 공감과 연대로 이어지는지 생각했다. 결국 쓴다는 건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니라 모두의 일이 될 수도 있다는 멋있는 일이구나. 작가라는 주체가 아니라도 말이다. 물론 작가에게 글쓰기는 보통의 독자나 일반인과는 다른 무게가 있겠지만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을 때는 누구에게라도 찾아오니까. 그게 무슨 글이든 말이다.˝

무물론 저한테 쓰신 말이 아니라 아니에르노와 김초엽과 여타의 훌륭하신작가님을 포함해!!! ㅋㅋ. 글을 쓰는 우리 모두가 감동받을 문장이지만... 괜히 오늘 쓴 글도 생각나고 그래서 저는 그냥 감동을 받아 버리는 것이지요.

그럴 수 있을까요? 앞이 보이지 않을 때의 공감과 연대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저는 그래온 것 같아요. 어느 시기마다 분명 어떤 책이 있었고 어떤 문장이 있었습니다. 하하. 그래서 저도 그 경험들을 토대삼아 읽고 쓰는 모양입니다. 어쨌든 나의 언어를 만들어가는 것. 멈추지 말아요, 우리! ​힘!!

자목련 2022-11-06 10:37   좋아요 2 | URL
♡♡♡♡♡♡♡
네, 우리는 그럴 수 있어요. 말씀처럼 어떤 시기에 어떤 책의 어떤 문장으로 힘을 얻고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서로를 알지 못해도 서로를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삶으로 성장하고 있어요. 그것이 서툴고 애쓰는 몸짓일지라도 말이에요!
 

‘놀라운 책이다’란 최재천 교수의 추천으로 시작하는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는 현재의 우리가 있기까지의 인류 역사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한 1만 2000년 전부터 인간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생물 지리적으로 추적한다. 하여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나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를 관심 있게 읽은 이라면 더욱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인류의 역사와 문화가 어떤 과정으로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알려주는 인문 지식의 안내서로 충분하다. 


‘WEIRD’(위어드)는 서구의(Western)의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사회에서 자란 사람들을 말한다. 국제사회를 이끄는 이들(강대국의 모습), 아마도 현대인이 추구하는 대표적 모습이라고 하면 맞겠다. 하지만 인류가 이렇게 변화하기까지 결정적 역할을 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대답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과 전쟁 정도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그보다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워어드 심리의 시작점이 어디인지 알게 된다. 


인류가 농경생활을 시작할 때 부족과 씨족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족장과 대표의 권한이 가장 컸고 그들은 대부분 연장자였고 남성이었다. 부족 내 결혼을 통해 인구를 확장시켰고 부족 내의 결속을 중시했다. 그러나 집단 형태의 삶은 어느 순간 개인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심리적 변화도 일어났다.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로 알 수 있다. 개인주의와 개인적 동시가 발생하여 자기중심, 자존감, 자기 고양의 태도가 생겼고 전통과 연장자에 대한 순응과 복종은 낮아졌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르는 쪽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전체론적 사고보다는 분석적 사고를 키우게 만들었고 단체가 아닌 개인의 소유를 중요하게 여겼다. 집단에서 벗어나니 자유의지의 선택이 중요해졌다. 누구가 당연한 일 아니냐고 할 수 있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렇지만 개인이 아닌 부족사회로 돌아가 보면 놀랍고 대단한 일이다.


집단에서 개인으로 바뀌는 일, 그것은 친족 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저자는 강력한 동기로 종교를 언급한다. 성경을 읽는 것으로 문해율을 높이고 결혼과 가족에 대한 구체적인 조항을 내세운 '결혼 가족 강령'을 통해 집단적 친족 기반 조직을 해체하고 파괴한다. 기독교의 이러한 관행은 기독교 제도의 확산을 촉진하기 위한 방한이기도 했다.


기독교의 방침들은 설득, 배척, 초자연적 위험, 세속적 처벌과 결합되며 점차 의례로 포장되어 가능한 모든 곳에 전파되었다. 이 관행이 서서히 기독교인들의 내면에 자리 잡고 이후 세대들에게 상식적인 사회규범으로 전달되는 가운데 사람들의 삶과 심리가 크게 바뀌었다. 이 방침들은 보통 사람들에게 집약적인 친족 기반 제도가 없는 세계에 적응하고, 이 세계를 중심으로 사회 관습을 재편하도록 강제하면서 그들의 경험을 서서히 변형시켰다. (220쪽)


친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일이나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집단적으로 보였던 도덕적 심리적 기준이 개인의 몫으로 바뀐 것이다. 대표자를 선출하거나 경제적 활동을 하거나 모든 분야에서 말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표와 그림도 사촌 간의 결혼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관계에 대한 것으로 그만큼 중요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 이 책에는 많은 그림과 표, 그리고 그래프가 등장한다. 하여 어렵고 힘들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부분도 많았다.


종교에 대한 인간의 의존적 심리를 전쟁과 연결한 부분도 흥미롭다. 알다시피 전쟁이 인간 심리에 작용하는 부분은 크다. 사회적 유대와 공동체에 대한 결속력이 커지고 그 분야에 투자한다. 사회 규범은 집단의 생존을 증진하도록 문화적으로 진화했기 때문에 전쟁을 비롯한 충격적 사건은 심리적으로 이런 규범 및 관련된 믿음에 대한 헌신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상호 의존으로 집단을 단결시키고 전쟁, 지진, 그 밖의 재난을 통해 종교에 더 헌신하고 참여하게 된다고.


전쟁은 사람들의 상호의존적 심리를 부추김으로써 도시 중심지의 시민 전체를 포함한 자발적 결사체 성원들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을 것이다. 전쟁은 또한 자발적 결사체의 성원을 늘렸을 것이다. (431쪽)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친족 기반 제도의 중요성이 줄어들면서 고된 노동과 효율, 자제력, 인내심, 시간 엄수에 대한 개인의 평판을 높이는 것이 중요해졌다. 앞에서 언급한 WEIRD(위어드) 심리의 핵심 요소다. 이러한 것들은 도시가 성장하고, 시장이 확대되고 친족이 아닌 자발적 결사체가 늘어남에 따라 자신의 특성에 맞는 사회 분야와 직업을 선택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인성의 구조를 새롭게 정식화하여 맥락이나 관계보다 개인적 성향의 중심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혁신이라는 것은 결국 집단 지성으로 이끌어 낸 법률, 과학, 사회 전반의 규범 같은 것들이다. WEIRD(위어드)의 심리가 더 낭느 사회로의 진화를 이끌어내고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라는 걸 저자는 말한다. 최재천 교수의 말대로 놀라운 책이며 방대한 자료에 감탄한다. 무려 10년 동안의 시간을 들여 이 책을 썼다는 걸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연구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저자가 고백한 대로 편향된 인구 집단을 표본으로 했다고 하지만 아시아(특히 한국)의 경우는 많이 부족해 아쉬운 건 사실이다. 


책 전체를 다 이해하는 일은 무척 어렵지만 인류 심리 진화와 문화를 조금이나마 배우고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인류학을 공부하거나 관심이 있다면 훌륭한 교과서가 될 것이며 인문 교양서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책이다. 오늘날의 세계 전반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며 인류 역사를 관통하는 것이 무엇인가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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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과함께 2022-10-27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보니 올해 <총 균 쇠>를 읽기로 했던 연초의 계획이 생각나네요… 이 책도 흥미롭네요~

자목련 2022-10-28 14:09   좋아요 1 | URL
네, 말씀처럼 흥미로운데 어렵기도 했어요.
목표치를 정해두고 읽어야 읽을 수 있는 책이었어요. 꼼꼼하게 읽지는 못했고요. ㅎ

stella.K 2022-10-2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밌을 것 같긴한데 책값도 장난 아니고
벽돌책이네요.ㅠ

자목련 2022-10-28 14:11   좋아요 1 | URL
벽돌책은 하루에 읽어야 할 양을 정해두어야 읽게 되는 것 같아요.
요즘 책값이 너무 비싸요. ㅠ.ㅠ
 

평전은 엄중하게 다가온다. 한 사람의 일생을 압축해 놓은 기록이라서 그럴까. 사만다 로즈 힐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을 읽기 전 조금 주저했다. 한나 아렌트란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의 작품을 읽지 않았기에 어려운 책이 아닐까 걱정을 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려운 책은 아니라고 하겠다. 나 같은 독자도 읽었으니 누구라도 한나 아렌트에 대해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책이라고 자신할 수 있다. 이미 한나 아렌트에 대해 말하는 책들은 많지만 처음 접하는 이에게는 친절한 입문서다. 그의 저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조건』만 알고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녀의 다른 책들도 궁금하게 만들었으니까.


저자 사만다 로즈 힐은 한나 아렌트 선임 연구원으로 『한나 아렌트 평전』에서 한나 아렌트의 일생과 함께 그의 저작과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인간관계를 다룬다. 한나 아렌트의 사상이나 철학에 치우치지 않고 삶과 작품을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 1906년 독일에서 태어났다. 그는 좀 남다른 내면을 지닌 소녀였다. 한나가 일곱 살에 아빠 파울이 세상을 떠났을 때 “엄마, 모든 여자가 겪는 일이잖아요”라며 엄마 마르타를 위로했다고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놀림을 당할 때 마르타는 유대인으로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 


한나는 열네 살부터 철학을 공부할 거라 생각했다. 아버지의 서재를 통해 발견한 세계, 삶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고 싶어서 철학을 택한 것이다. 그 공간이 한나의 철학을 향한 열정의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 즈음에 하이데거의 제자가 되고 연인으로 발전한 건 운명의 일부였는지도 모른다. 에드문트 후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야스퍼스를 만나 철학적 사유를 배우게 되었다. 귄터 안더스와 결혼 후 한나는 안더스의 글을 교정하고 안더스는 한나의 논문 출간을 도왔다. 그러나 한나의 정치적 활동으로 균열이 시작되어 안더스는 파리로 떠나자 한나는 공산주의자들의 탈출을 돕는 지하 조직체를 도왔다. 그 과정에서 당국에 체포를 당했으나 다행히 풀려나자마자 독일을 떠났다.





한나는 파리에서 난민 신세가 되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독일이 아닌 프랑스에서 당한 일이라는 게 놀라웠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부당함을 당해야 하다니. 강제수용소를 탈출해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했다. 그 후 영어를 배우기 위해 미국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며 공부와 연구를 했다. 한나는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으로 특별한 유대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럼에도 유대인을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항상 생각했다. ‘한나에게 유대인 문제는 언제나 정치적 문제였다.’(157쪽) 최초의 여성 교수 임용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자 제안을 거절했다. “저는 여성이라는 데 그다지 특별함을 느끼지 않아요. 언제나 여성이었거든요.” (203쪽) 언제나 여성이었다는 한나 아렌트, 정말 멋지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독일을 비롯한 전체주의와 그 안의 유대인 문제를 연구하고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리하여 『전체주의의 기원』이 나왔고 전쟁이 끝나고 이스라엘에서 열린 전범재판을 직접 보기 위해 다른 일정을 다 취소했다. 한나는 아이히만의 재판 참석이 과거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재판은 한나에게 유대인의 슬픔에 대한 일종의 역사적 실태 조사에 가까웠다. 그 기록을 담은 보고서 『예루살렘이 아이히만』은 논란과 비판을 받았다.


한나는 타인의 잘못에 내가 책임을 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즉 내가 하지 않은 일에 죄책감을 느낄 수는 없다. 하지만 독일에서는, 잘못이라고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죄책감을 느끼고, 아이히만처럼 모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한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가담한 자들과 저항을 선택한 자들의 차이는 무엇인가? 대답은 ‘사유’였다. 가담하지 않기로 결정한 사람들은 스스로 사유라는 것을 했다. (240~241쪽)


한나 아렌트에게 철학과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유였다. ‘한나는 낙관과 절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으로 현재가 아닌 과거나 미래를 바라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131쪽) ‘한나에게는 개인의 책임이 집단 경험보다 훨씬 중요했다. 결코 가벼운 고민이 아니었음에도 ‘가볍게’ 결론을 내렸다는 건 한나가 그만큼 개인의 책임에 더 큰 무게를 두었음을 의미한다.’ (133쪽) 현재를 직시하는 힘, “그러므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 (212쪽) 그는 그런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사상가로 알려진 한나가 시를 썼다는 사실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땅은 곳곳에서 시를 쓴다.

가지런히 나무를 땋아놓고 

우리더러 나아가라고 한다.

이 세상 곳곳을.


활짝 핀 꽃은 바람을 맞으며 기쁨을 누리고

풀은 연하고 나긋한 바닥에 싹을 틔우며

하늘은 파란색으로 물들어 밝게 인사하고

태양은 부드러운 체인처럼 회전한다.


한껏 취한 사람들…

땅, 하늘, 햇살, 나무…

봄마다 새로 태어나

전지전능한 놀이 속에서 즐거워한다. (〈프랑스 드라이브〉, 199쪽)





권더 안서스와 이혼 후 하인리히 블뤼허와의 결혼 생활은 균형 있는 삶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면서도 간섭하지 않는 어려운 관계를 둘은 지속했다. 노년에 친구들을 만나고 여행을 다니며 보낸 시기에서 사상가가 아닌 한나는 자유로웠다. 생이 끝날 때까지 집필을 놓지 않았던 한나. 그로 인해 지금까지 많은 이들의 관심과 연구가 끊이지 않는다. 사만다 로즈 힐가의 『한나 아렌트 평전』 은 어렵지 않은 평전으로 철학이나 사상을 공부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훌륭한 안내서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나 아렌트의 저작을 차례로 만나도 좋을 것이다. 


한나는 사유를 ‘난간 없는 사유’라고 표현했다. 사유란 붙잡을 곳 없는 계단을 하염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한나의 따르면 붙잡을 곳 하나 없을지 몰라도 계단이라는 서 있을 곳은 주어진다. 자유롭게 밟고 디딜 이 계단이야말로 한나에게 유서 없이 남겨진 유산이었다. (3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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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10 11: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의 지적 사유적인 삶의 이력에 비해 이 책의 서술량이 얇고 좁다고 생각 했습니다
아마도 이책의 작가는 한나 아렌트가 세상에 남긴 수많은 저서와 논문을 독자들이 스스로 찾아 읽기 바랬던 것 같네요

범람하는 정보 속에서 깊고 넓게 사유하는 시간이 줄어 버렸습니다
현재를 직시하는 힘!
결국 독서 만이 오늘 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

vita 2022-10-10 12:47   좋아요 2 | URL
와 스콧님 말씀 정곡을 찌르네요. 저도 같은 걸 느꼈어요, 이 책 읽으면서. 저자 역시 한나 아렌트 전공이지만 이 평전을 쓰면서 미지의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한나 아렌트를 직접 스스로 찾아 읽으면서 사유하고 더듬어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느껴졌어요. 많은 이들이 한나 아렌트의 사유의 깊이와 폭에 지레 질리지 않고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사만다가 응원하고 있다는 걸 느꼈거든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2 | URL
스콧님과 비타 님의 말씀처럼 이 책은 그런 부분이 아쉬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데, 저 같은 독자에게는오히려 이런 접근이 더 좋았던 것 같아요.
한나 아렌트에 대해, 그의 저서에 대해 검색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레삭매냐 2022-10-10 11: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사서 대기 중이랍니다.

곧 읽기 시작해야겠네요.

자목련 2022-10-11 14:36   좋아요 1 | URL
매냐 님, 즐겁게 만나세요^^*

미미 2022-10-10 12: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을 읽고서야 그녀가 시를 썼다는 걸 알았어요.
시(詩) 적인 표현력이 그녀의 글에도 드러나는것 같아 신기했고요.*^^*

자목련 2022-10-11 14:37   좋아요 2 | URL
어쩌면 철학이 아닌 시인이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어요^^

vita 2022-10-10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의 시적 감수성은 한나의 사유를 더 정밀하게 다듬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던 거 같습니다. 그게 하이데거의 영향인지 아니면 한나에게 있었던 본래적인 시적 감수성을 하이데거가 알아보고 그 촉을 건드린 걸 수도 있구요. 여러모로 훌륭한 평전이라고 여깁니다. 자목련님 말씀대로 더할나위 없을 정도로 ‘훌륭한 안내서’라고 여깁니다. :)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2 | URL
저는 아버지의 서재도 한 몫을 하지 않았을까 혼자 생각했어요.
이 책으로 한나 아렌트에 대한 접근이 용이하지 않을까 싶어요.

거리의화가 2022-10-10 18: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나 아렌트를 아예 모르는 사람에게는 입문서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것 같습니다. 읽어봐야겠어요^^

자목련 2022-10-11 14:38   좋아요 1 | URL
저 같은 독자에게 특히 그랬어요. 화가 님도 즐겁게 만나시길 바라요^^

책읽는나무 2022-10-1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난간 없는 사유...표현 자체도 참 멋있어요.
저도 아렌트 노블책 잡고 읽고 있어서 반갑네요^^
자목련님도 아렌트!!! 그래서 또 반갑구요^^

자목련 2022-10-11 14:40   좋아요 2 | URL
한나를 바라보는 저자의 이해와 사유도 좋았어요.
그로 인해 저 같은 독자도 쉽게 다가갈 수 있겠구나 생각했으니까요.
노블책도 흥미로울 것 같아요!

그레이스 2022-10-1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인용문 ‘난간 없는 사유 ‘ 정말 멋있는 표현! 무엇에 기대어 사유하는것이 아니라 위험할지 모르지만 자유롭게 사유하는 것의 의미!일듯요
데려갑니다

자목련 2022-10-13 09:38   좋아요 1 | URL
평전은,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그 인물을 대해 연구하고 세상에 내놓은 저자도 중요하구나 생각했어요.제가 한나 아렌트의 생을 다룬 다른 책들을 만나지 못한 덕분이기도 할 테고요. ㅎ
 

책 읽기는 이어진다. 속도는 느리고 집중력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성실한 토끼가 되어야 하는데 자꾸 거북이가 된다. 아니, 베짱이가 더 맞겠다. 그래도 그 느림이 좋다. 적정한 속도를 이룬다고 할까. 책을 들이는 일도 그에 맞게 느려진다. 가을이니까 소설을 읽어야지, 이유는 붙이기 나름이다. 가을엔 소설,이라고 하면서 곁에 둔 두 권의 소설이다. 하나는 단편집, 하나는 장편소설이다. 


요즘 출판사 1984BOOKS에서 나온 책들이 다 좋다. 직접 읽어본 책도 좋고 이웃이나 블로그의 평도 좋다. 그래서 이번에 들인 책은 안드레이 마킨의 소설 『어느 삶의 음악』과 소설 보다 시리즈다. 『소설 보다: 가을 2022』는 이서수, 위수정 작가의 단편에 대한 기억이 좋았기 때문이다. 계절마다 나오는 이 시리즈는 그냥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작가들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느낌을 받아서 신중하게 구매할 생각이다.





가을에 들였으니 이 짧은 가을이 끝나기 전에 읽어야 마땅하다. 그러니 이런 명분은 기껍다. 조금 빠른 속도를 내야 할 것이다. 사진 속 책장의 책들 가운데 읽어야 할 책이 보인다. 황정은의 글을 천천히 다시 읽고 싶다. 책을 좋아하는 것과 책을 아는 것은 다르다. 


어쩌면 나는 황정은의 글을 알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백의 그림자』, 『디디의 우산』, 『연년세세』는 다시 읽고 리뷰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세 권은 읽기에 그친 책들이다. 리뷰를 쓸 때 책은 다시 정리되고 그 책에 대한 마음도 커진다고 생각한다. 


읽어야 할 책이라는 기준은 딱히 없다. 지난번에도 말한 것처럼  그저 끌리는 대로 읽는 게 즐겁다. 아마도 곧 이어 끌리는 대로 만나게 될 책은 김연수 단편집과 2022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모두가 좋은 책이 아니라 내가 좋은 책, 그뿐이다. 그리고 그런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잃어버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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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2-10-06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성실한 독서가가 되고
싶으나, 집중력의 저하로(핸드폰
과 너튜브 탓을...) 책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런 느낌입니다.

그래도 느림보 거북스 스타일로
꾸역꾸역 읽고 있답니다.

저도 1984BOOKS에 눈길이 가네요.

황정은 작가의 책은 어떤 책 읽고
나서 식겁해서 소장한 책도 읽을
염두를 못내고 있네요...

자목련 2022-10-07 09:10   좋아요 1 | URL
황정은의 어떤 책일까 궁금하면서도 최근에 나온 연작이나 에세이는
그에 비하면 무난해서 읽으셔도 좋을 듯해요^^

그레이스 2022-10-06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을엔 소설!
옳습니다 ~~

자목련 2022-10-07 09:09   좋아요 1 | URL
노벨문학상 발표에 힘입어 가열차게 읽어보아요!
 

어떤 책은 제목부터 호기심을 자극한다. 김수정의 『감정을 파는 소년』이 그러하다. 감정을 팔다니, 그게 가능할까.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풍부해서 판다는 걸까, 필요 없다고 느끼는 감정을 판다는 걸까. 만약 이 모든 게 가능하다면 나는 어떤 감정을 팔고 어떤 감정을 사고 싶을까. 감정을 산다면 어떻게 사는 걸까. 가격 책정은 적당할까. 책을 읽기도 전에 이런저런 생각으로 꽉 차있다. 


소설은 제목 그대로 감정을 사고파는 가게의 이야기다. 감정을 팔러 온 이들의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과 그것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들려준다. 후미진 곳에 자리한 가게의 사장은 ‘정우’, 하지만 감정을 매입하는 이는 ‘민성’이란 이름의 소년이다. 사장은 정우지만 가게의 모든 일은 민성의 몫이다. 


가정 먼저 만나는 감정은 사랑이다. 책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게 사장을 사랑하는 여자는 혼자만의 사랑이라고 여겨 그 감정을 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중에 사장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사랑을 팔아버려서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감정을 팔아버리면 감정은 사라진다는 말이다. 반대로 사랑이란 감정이 필요하면 민성의 가게에서 사랑을 구입할 수 있다. 


집안을 돌보지 않고 가정폭력을 일삼으며 결국에는 도박에 빠진 아버지를 향한 ‘증오’로 가득한 삶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증오를 팔기로 한 손님에게 정우는 누가 증오를 사겠냐며 거부하지만 민성은 달랐다. 증오라는 감정 역시 누군가에게는 필요하다며 구매한다. 그리고 얼마 후 증오를 사겠다고 온 이가 있었다. 7년 동안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지지 못하는 여자에게는 증오가 필요했다. 증오를 사러 온 여자의 사연이 그렇다. 여자는 처음에는 남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 헤어지지 못한다고 여겨 가게에 와서 사랑을 팔고자 했다. 그러나 민성은 여자에게 남자를 사랑하는 감정이 없다고 말한다. 그동안 7년이라는 시간의 정에 붙들려 살았지만 이제는 끝을 내야 했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는 떨쳐버리고 싶은 감정이 누군가에게는 간절하게 필요하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다.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는 것처럼 완벽한 감정이란 없다. 노량진 고시촌에서 함께 공부를 하는 정우와 종현에게도 마찬가지. 경제적인 지원이 어려워 고시촌 총무를 하는 정우에게는 열등감이 심했고 반대로 너무 편안하게 공부하는 종현에게는 자극이 될 열등감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서로를 격려하며 공부하던 사이였지만 정우는 종현을 의식했고 결국 자신의 열등감을 팔았다. 그렇다면 내 안에 있는 감정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 바로 그것이 민성의 능력이다. 민성이 손님의 손에서 그 감정을 추출하는 것이다.


“슬픔과 사랑은 떼어낼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 상대방에 대한 사랑 또는 나 자신에 대한 연민, 세상의 모든 슬픔은 누군가를 사랑해서 생기는 감정이니까.” (141쪽)


민성의 말처럼 슬픔과 사랑은 한 몸처럼 붙어있어 누군가 사랑하는 일에는 때때로 큰 슬픔이 동반하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시작될 때 이별은 생각할 수 없기에 이별을 감당하기 어렵다. 사랑 때문에 슬프고 사랑 때문에 아파도 우리는 사랑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닐까. 연인을 향한 사랑뿐 아니라 가족, 친구, 세상을 향한 사랑까지도. 


감정이란 참 이상하다. 자신의 감정은 자신이 가장 잘 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객관적이지 못한 게 감정이다. 이처럼 내 안의 감정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어렵고 그 과정을 알아가며 성장하는 것이다. ‘사랑’, ‘증오, ‘열등감’, ‘슬픔’, ‘기쁨’, ‘행복’등 다양한 감정을 잘 표현하고 스스로 다스릴 수 있다면 상대의 감정에 의해 다치지 않고 잘 지낼 수 있다. 친구와의 관계, 정체성, 여러 가지 감정과 맞닥뜨리는 청소년들에게 이 소설이 자신의 감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감정을 분류하고 정리한다는 소재가 독특하면서도 좋다. 세상에 쓸모없는 감정이 없는 것처럼 우리는 저마다 소중하다는 걸 알려준다고 할까. 


“사랑은 플라스틱 통에 담아서 따뜻하게, 증오는 캔에 담아서 차갑게, 열등감은 나무 그릇에 미지근하게, 슬픔은 머그에 담아 실온보다 조금 따뜻하게.” (141쪽)


따뜻한 사랑과 슬픔, 차가운 증오, 미지근한 열등감, 차별적인 감정을 상상한다. 그리고 현재 나의 감정 상태는 어떤지 생각한다. 넘치는 감정은 무엇일까. 다채로운 감정 이야기, 그 안에서 솔직한 자신의 감정과 마주하는 순간, 조금 편안해지는 쪽으로 감정을 다스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한다. 


미래에는 정말 이런 소설처럼 감정을 파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소설 적 상상으로는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구체적으로 따져보면 무섭다. 필요에 의해 직접 경험하지 않는 감정을 사고 파는 일, 불필요하다고 느끼는 감정을 구매해서 대체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공감이 사라진 시대라고 하면 맞을지도 모른다. 타인의 아픔이나 상처를 알지 못하고 위험에 빠진 이를 구하려면 그 경험을 구매한 사람만이 가능한 시대.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란 제목이 쓸쓸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가 정녕 감정이 사라진 무미건조한 그런 미래가 될까 두렵다. 감정만 파는 게 아니라 도덕, 사랑도 파는 시대가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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