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의 시집을 정리했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읽지 못하는 미안함이 아니라 그 마음이 허영이라는 걸 깨달아서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한 시들, 읽고 싶을 때 읽어야지 하며 쌓아둔 시집들은 그 마음의 결과였다. 물론 계절마다 떠오르는 시집이 있고 시가 있다. 좋아하는 단어가 등장하거나 좋아하는 것들이 나오면 더 찾아서 읽기 마련이데, 그러다 보니 어떤 시집은 하나의 시만 읽고 나머지 시들은 읽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박준의 시집 『마중도 배웅도 없이』도 꼼꼼하게 읽지는 않았지만 이번 시집에는 유독 짧은 시들이 많았고(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제목 때문인지 아쉬운 느낌이 있었다. 누군가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것이 시인의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만가만 그 일상을 따라가다 마주한 상실과 슬픔은 박준의 시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걸 확인한다. 특별할 것 없는 하루하루에 대한 소회는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기억하라고 한다. 처음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읽는 시가 지독하게 쓸쓸하고 외롭게 다가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해가 지면

책도 그늘이 됩니다

두어장씩

넘겨가며 읽었지만

이야기 속 인물들은

아직 친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호숫가 마을에

막 도착한 대목에서

책을 덮습니다

귀퉁이를 잇새처럼

좁게 접어둡니다

바람이 크게 일고

별이 오르는 밤이면

우리가 거닐던 숲길도

깊은 속을 내보일 것입니다

(「소일」, 전문)





올해는 비가 잦습니다

서쪽 마을에서 생각보다

오래 머물렀습니다

버린 기억을

테두리처럼 두른 것이

제가 이곳에서

한 일의 전부입니다

끝을 각오하면서도

미어짐을 못 견디던 때였고

온전히 가져본 적 없어

손에 닿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한움큼씩

쥐고 보던 시절이었습니다

틀림없이 나를 향해

다가온다 싶으면

일단 등부터

지고 보는 버릇도

이즘 시작된 것입니다

(「은거」, 전문)

책을 읽다 멈추고 잦은 비를 바라보며 걱정하는 일상은 우리가 보낸 지난여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건 얼마나 큰 위로인가. 박준의 시가 닿는 곳에는 그런 다정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런 다정함과 그 뒤에 감춰진 고단함을 생각한다. 나는 가늠할 수 없는 어떤 것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마음이나 형체를 알 수 없는 감정들.

유월과 칠월을 지나는 동안에는 쌀을 두컵씩만 씻었습니다 그 사이 뜨물 같은 마음도 생겨 아득한 것마다 가까이했습니다 움켜쥐면 적은 듯도 했지만 반듯하게 펴면 이내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아래 흰빛」, 전문)

자꾸만 ‘미음’을 ‘마음’이라 읽는 건 왜일까. 끓이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걸까. 그러면 끓이면 그 마음은 뜨거워질까, 아니면 끓이다 보면 증발하는 것일까. 아니다, 모든 건 다 제목 때문이다. 엉켜 붙은 어떤 마음, 자꾸만 꿈에 보이는 누군가를 떨쳐버리고 싶은 내 마음. 그 모두와 이별해야 한다. 마중도 배웅도 없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미음을 끓입니다 한 솥 올립니다 회회 저으며 짧게 생각합니다 같이 사는 동안 보여주지 못한 나의 수선이 어른거립니다 이내 다시 되작거립니다 체에 밭쳐둡니다 아시겠지만 진득하게 남은 것은 버려야 합니다 묽어져야 합니다 고개를 파묻습니다 나는 아직 네게 갈 수 없다 합니다 (「마음을 미음처럼」, 전문)

시집을 읽다 보면 솟구치는 욕망. 시집을 더 읽어야 한다는, 더 갖고 싶다는 허세가 커진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것들을 다스릴 줄 안다. 적어도 지금은 그렇다. 11월의 마지막 날, 박준의 시를 읽다가 엉뚱하게 허연의 시를 찾는다. 11월의 시가 아닌 시월의 시. 이번에는 ‘시월’ 대신 ‘십일월’을 넣어서 읽는다. 이별하는 시간이다.

이별하는 것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아는 사람은 시월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병동으로 옮겨지기 시작하는 단풍잎. 영혼이 빠져나가 파삭거리기만 하는 풀밭, 초속 오 센티미터로 떨어지는 마지막 열매들. 죽은 새끼들을 낙엽에 묻고 날아가는 새들. 그리고 흙장난하는 아이들 이마에 불어오는 사연 많은 바람. 시월엔 가득 찼던 것들과 뜨거워졌던 것들이 저만치 떠날 짐을 꾸린다. 그걸 알아챈 추억들도 남쪽으로 가고. 시월엔 이별이 전부다. 시월은 이별밖에 할 줄 모른다. 시월에 무릎을 꿇는 이유다. 세상엔 만남의 몫이 있는 만큼 헤어짐의 몫도 있어서 이토록 서늘하다. (「시월의 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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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5-11-30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해주신 시들이 참 좋네요. 지금의 정서와 맞물려 곱씹게 됩니다. <시월의 시>가 특히 와닿네요.

자목련 2025-12-03 15:18   좋아요 0 | URL
허연 시인의 이번 시집<작약과 공터>의 시들이 참 좋아요^^

구단씨 2025-11-30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처음에 시집을 종종 사곤 했는데, 이제는 사지 않게 되더라고요.
거의 다 읽지 않게 되고, 다시 펼쳐봐야지 하는 다짐은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요.
근데 또 이상하게도 요즘 시를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어요.

저는 요즘 세계문학을 정리하고 있어요.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사서 채워넣었던 것들이 이제는 정말 장식으로만 머물고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이제 다가올 내일, 12월은, 2025년과 헤어지는 시간이겠네요.

자목련 2025-12-03 15:20   좋아요 0 | URL
좋아하는 시집, 좋아하는 시만 남기려고 하는데 그게 또 어렵네요 ㅎㅎ
저도 읽지 못하는(아니, 읽지 않는) 세계문학도 정리할 예정입니다.

12월 따뜻하고 건강하게 이어가세요^^
 

일기예보에 따르면 오늘 내가 사는 지역에 첫눈이 내릴지도 모른다. 첫눈을 기대하는 건 아니지만 첫눈이 오면 올해의 가을과는 완전히 작별하고 겨울을 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첫눈보다 먼저 김장이 김치냉장고에 안착했다. 항상 김장을 하시면 챙겨주시는 장로 님 덕분이다. 배추김치, 파김치, 총각김치, 섞박지까지 다양하다. 무를 좋아하는 나는 총각김치와 섞박지가 빨리 익기를 기다린다.


겨울이 되니 김장을 담기 위해 배추와 무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뒤늦게 고춧가루의 가격도 걱정된다. 김장을 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친구의 어머니가 담그시는 김장이 줄었으면 싶고, 다른 친구의 어머니가 사시는 절임배추가 괜찮았으면 좋겠고 올케언니가 김장을 담글 때 오빠가 많이 거들어주기를, 언니네 김장을 도와주러 가는 친구가 해야 할 일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


가을의 열매로 식탁 위에는 감과 귤이 가득하다. 베란다에 가지런히 익어가는 대봉과 아침마다 깎아먹는 단감과 귤들. 이 모든 일상이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도 같을 거라 확신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갑자기 허리가 아파서 꼼짝도 못 하는 작은언니를 보면서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아플 수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약을 처방받고 괜찮아졌다고 말하지만 아닐 것이다.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축복인가. 반대로 달라지고 싶은 간절한 이에게 어제와 똑같은 일상은 얼마나 저주스러울까.





지나치게 극단적이지만 우리는 축복과 저주, 그 어딘가를 살아간다. 우선은 축복을 생각하며 김연수와 황정은의 소설을 읽는다. 『2025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수상작보다 황정은의 단편을 『2025 제19회 김유정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도 마찬가지로 김연수의 단편을 먼저 읽는다.


내린다는 첫눈이 내리면 그 모습을 가만히 볼 수 있는 순간이면 좋겠다. 온다는 첫눈이 오면 반갑게 맞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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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선 2025-11-18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두 권을 함께 샀어요. 따라읽겠습니다

자목련 2025-11-21 09:52   좋아요 0 | URL
나란히 놓인 두 권을 상상합니다. 함께 읽는 일, 좋아요!

페넬로페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31일, 일요일
날짜도 또렷이 기억나네요.
그 날 갑자기 허리가 삐긋해
2주동안 꼼짝도 못했어요.
병원에 입원해 mri찍고
혹시 모를 병이라도 있으면 수술까지 각오했었는데 다행히 증상은 없었어요.
주사맞고 약 먹고 물리치료하고 ㅠㅠ
정말 갑자기 아프더라고요.
한 번 아프니 모든 것이 힘들어 밖에서 전쟁이 나도 상관없겠더라고요.
자목련님께서도 책 많이 보시고 글 쓰니 앉아있는 시간이 많으니
허리 정말 조심하시길요^^

자목련 2025-11-21 09:56   좋아요 1 | URL
2주 동안 입원도 하셨군요. 아픈 경험은 정말 무서워요.
근데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고 몸을 혹사하지요.
몸을 달래고 돌보며 살아야 하는 시간라서는 조금 서글프기도 하고요 ㅎㅎ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감기 조심하시고요!

blanca 2025-11-18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정말 바람이, 손이 시려웠어요. 김유정 문학상은 사지 않아서 김연수의 단편은 자목련님 얘기로 들을게요.

자목련 2025-11-21 09:59   좋아요 0 | URL
겨울이 가을을 밀어내고 있는 것 같아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어보겠습니다!

바람돌이 2025-11-18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작가님 에세이말고 소설집 나온지 꽤 오래되어서 이제쯤 나오지 읺을까 기다리는데 말이죠. 아쉬운대로 이 책ㅂ 터 읽어야할까봐요

자목련 2025-11-21 10:00   좋아요 0 | URL
저도 소설집 기다리고 있는데 소식이 없네요. <작은 일기>에서 언급한 단편이 이 단편이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책읽는나무 2025-11-19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주 열무를 얻어버려 알타리무 김치를 담궈뒀어요. 양념만 만드는데도 하루가 소비되더군요. 그리고 밤엔 김승옥 수상 작품집을 한 편씩 읽었더랬죠. 왠지 김승옥 수상 작품집 책을 떠올릴 때면 김장 이야기와 황정은 작가님과 김연수 작가님이 떠오를 것 같아요. 그리고 눈 이야기를 읽다 보니 최은미 작가의 <김춘영>도 떠오를 듯도 하구요. 거기에도 눈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자목련 2025-11-21 10:02   좋아요 1 | URL
나무 님이 담근 알타리무 김치는 얼마나 맛있을까요!
단편을 읽는 가을밤, 낭만적입니다. <김춘영>은 아직인데, 어떤 눈을 만날까 궁금하네요^^
첫눈이 내렸다는데 저는 못 봐서 소설에서 마주해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25-11-20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지난 주에 감을 따고 왔네요. 이제 나이가 많은 감나무는 많이 버거운지 작은 감들만 열려 있더라구요. 귤도 주문해서 벌써 10키로를 먹어치웠습니다. 추운 날씨는 싫지만 겨울에 먹을 수 있는 과일은 좋군요. 김유정 문학상은 저도 받았답니다. 이번에 책이 예뻐요^^

자목련 2025-11-21 10:07   좋아요 1 | URL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감 따는 일은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귤은 정말 빨리 사라져요. 겨울에만 먹을 수 있는 과일, 더 맛나고 특별하네요^^
김유정 문학상, 즐겁게 읽으세요!

yamoo 2025-11-21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탁 위에 감과 귤이 가득하다니...참으로 풍요롭네요..
책상 위 책과 커피 한잔 그리고 귤...늦가을의 고즈넉한 청취가 묻어나는 사진입니다. 차분하고 좋네요^^
저는 한국소설 대신 트레버 소설을 올려놓고 싶은 계절입니다..ㅎㅎ

자목련 2025-11-26 08:44   좋아요 0 | URL
풍성한 시골 인심 덕분입니다. 지금은 식탁이 깨끗하고요 ㅎㅎ
 


삶의 어려움이 표출되기까지 그것은 조용하게 움직인다. 아무도 모른다. 안간힘을 쓰느라 애쓰고 있다는걸. 그런 삶을 알고 경험한 이만이 한눈에 포착할 수 있다. 클레어 키건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놀라는 이유가 그것이다. 어떻게 그녀는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까. 그럼에도 이토록 아름다운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짧은 분량의 단편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 을 읽으면서 안감힘과 고요함이 동시에 몰려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슬픔이고 절망이며 어떤 결단과도 같은 것이었다.

표제작 「너무 늦은 시간」이 제일 좋았다. 좋았다는 건 강렬했다는 것이다. 평범한 보통의 일상을 무심하게 전개하는 동시에 그 안에 담긴 함축적인 메시지. 주인공 남자 카헐의 행동을 묘사하며 그를 향한 동료의 시선과 걱정은 단순한 배려의 태도로 보인다. 그러나 정작 키건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여성 혐오와 차별이다. 카헐의 결혼이 왜 파탄 났는지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 말이다. 끝내 카헬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이다. 알게 되더라도 제목처럼 너무 늦게 알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희생까지는 아니더라도 동등한 관계가 필요하다는걸, 그것이 가장 기본적인 예의라는 걸 그는 알지 못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가족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억울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가족 모두가 식사를 하는 시간, 어머니의 가사 노동이 당연하다 여기더라도 어머니가 자기 접시를 들고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발을 거는 남동생, 그걸 보고 웃는 아버지. 그런 집안에서 보고 배운 대로 그는 살아왔으니까. 카헐은 아버지가 웃지 않았더라면, 그런 아버지가 아니었더라면 생각하며 안타까워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한다. 변화하려는 노력은커녕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걸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카헐은 연인 사빈이 준비하고 만든 음식은 맛있게 먹으면서 배번 음식 재료 값이 아깝고 설거지가 많다고 잔소리를 늘어놓고 사빈이 지갑을 놓고 와서 대신 계산을 한 것을 기억하고 생색을 내는 남자다. 사빈에게 고마운 마음은 전혀 없는 그 모든 게 당연한 남자. 결혼 준비 중 결혼반지 사이즈 조정을 위해 비용을 지불해야 할 때도 돈이 아깝다 말하며 화를 낸다. 이런 남자랑 결혼을 찬성할 이가 누가 있을까. 사빈의 결정은 옳은 일이고 현명했다.

타인의 상처와 슬픔에 대해 관심 없고 무지한 이기적인 카헐을 보면서 상실과 절망을 온몸으로 경험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펄롱이 떠올랐다. 마침 영화를 보기도 했다. 카헐의 대척점에 있는 이가 펄롱이라고 생각했다. 타인에 대한 연민, 고통을 나누려 애쓰는 마음은 경제적 부유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그가 자신 선함, 삶에 있어 중요한 것들에 대한 생각들. 아픈 이들을 위한 연대와 그들에게 손을 내미는 일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펄롱은 그걸 해낸 사람이다. 수녀원에서 만난 소녀를 지나치지 않았다. 이름을 물었고 도움을 주려 했다. 늘 거기 있으니까란 말이 이렇게 따뜻하고 힘이 있던 말이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내 이름은 빌 펄롱이고 저기 부두 근처 석탄 야적장에서 일해. 무슨 일 있으면, 거기로 찾아오거나 아니면 나를 불러. 일요일만 빼고 늘 거기 있으니까.” (『아처럼 사소한 것들』, 82쪽)

키건은 카헐과 펄롱을 통해 현실을 비판하지만 그 방법을 달리했다. 카헐 개인의 문제를 여성 혐오로 이끌어냈고 수녀원의 소녀를 돕는 펄롱의 모습으로 잘못된 사회 규범을 고발한다고 할까. 놀라운 통찰력은 키건 고유의 아름답고 비범한 문장으로 그려낸다. 「너무 늦은 시간」의 첫 문장처럼 말이다. 고요할 정도로 차분해 강한 울림으로 남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키건의 소설은 두 번 읽게 된다.

얽히고설킨 인간의 싸움과 모든 것이 어떻게 끝날지 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삶은 대체로 매끄럽게 흘러갔다. (「너무 늦은 시간」, 12~13쪽)

두 번째 단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에킬섬 하인리히 뵐 하우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선정된 여성 작가의 이야기다. 혼자만의 시간, 자신만을 위한 공간에서 글을 쓰려는 순간 전화 한 통이 걸려온다. 상대는 독문학 교수라며 집을 둘러보고 싶다고 말한다. 집 앞에 와 있다고. 무례한 남자에게 여성 작가는 저녁에 다시 오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손님을 위한 케이크를 준비한다. 남자는 대접받은 차와 케이크를 맛있게 먹으면 글을 쓰지 않고 케이크나 굽는다며 여성 작가를 가르치려 한다. 생전 처음 보는 여성 작가에게 권위를 내세우며 무시하는 태도에는 여성차별이 깔려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른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보는 남자의 표본이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마지막 단편 「남극」은 추리나 스릴러 소설처럼 보인다. 남편과 아이가 전부였던 여성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간 도시에서 벌어진 이야기. 술집에서 만난 낯선 남성과의 하룻밤은 일탈이 아니라 가장 위험한 일이었다. 남편과 다르게 세심하고 친절한 남자. 그 끝엔 무엇이 있을까.

체로 매끄럽게 흘러가는 삶의 이면에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은 소설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도 여전하다는 걸 키건은 말한다. 그녀만의 시선과 방식을 세상을 향해 계속 외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까지. 한쪽이 사라질 때까지.

우리가 아는 것, 항상 알았던 것,

피할 수 없지만 받아들 수도 없는 것은

옷장만큼이나 명백하다.

한쪽은 사라져야 한다.

필립 라킨, 「새벽의 노래 Aub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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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5-10-29 14: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헐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쉽지 않을 듯 보이네요.ㅠㅠ

자목련 2025-10-30 12:22   좋아요 0 | URL
그쵸, 완벽하게 변하지 않는 한 어려울 것 같아요.

책읽는나무 2025-10-30 21: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키건의 소설은 참….대단한 내공인 듯 합니다.
무조건 좋아요.^^

자목련 2025-10-31 09:42   좋아요 0 | URL
얼마나 많은 시간 공들이고 연습했을까, 저도 무조건 좋아요!
 


어린 시절의 일기는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밀린 일기를 쓰는 일은 고역이었다. 지금처럼 과거의 날씨도 쉽게 알 수 있던 때가 아니라 날씨를 떠올리는 게 제일 힘들었다. 선생님께 칭찬을 받고 싶은 일기, 착한 일을 하지도 않고 부모님을 도와드리지도 않았는데 착한 아이인 것처럼 거짓을 쓰기도 했다. 하루를 반성하고 가장 인상적인 일을 기록하는 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청소년기의 일기는 누군가를 향한 고백이자 고민의 기록장이었다. 친구와의 갈등, 좋아하는 이성에 대한 감정을 유치하고 화려하게 썼다. 나만 읽어야 했다. 아무도 봐서는 안 되는 비밀이었다. 나만의 일기장은 그런 것이었다. 어른이 된 후에는 일기장을 구매한 기억이 없다. 그 후로 나에게 일기(日記)는 책을 읽은 기록,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의 토로, 누구나 볼 수 있는 글이 되었다. 제목부터 금기된 무언가를 만날 것 같은 알바 데 세스페데스의 『금지된 일기장』을 읽으면서 몇 년 전 붙박이장을 정리하며 발견한 노트 한 권이 떠올랐다. 나는 안도했다. 가족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찾았기에. 모든 페이지의 글은 조각났고 폐기되었다.


소설 속 발레리아는 남편을 위한 담배를 사러 갔다가 담배 가게에서 공책을 충동적으로 구매한다. 금지된 일이라며 가게 주인은 거부했지만 발레리아의 간곡함에 판매한다. 금지된 일이라고? 남편을 위한 담배를 산다고? 놀랄 수 있다. 1950년대 이탈리아에서는 일요일에 담배만 파는 법이 있었다고 하니 『금지된 일기장』이란 제목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일기는 필자와 독자가 같아야 한다. 그래서 소설 속 ‘발레리아’는 자신의 일기장을 숨겨야만 했다. 변호사 남편 미켈레, 대학 졸업을 앞둔 아들 리카르도, 대학에 들어가는 딸 미렐라가 알아서는 안 되는 생애 가장 큰 비밀이었다.


일기장을 어디에 숨길까 고민하는 발레리라의 모습은 안타깝다 못해 짠하다. 그렇다. 어디에도 발레리아의 공간은 없다. 8년 전부터 직장에 다니는 워킹맘인 그녀에게 그녀를 위한 시간도 없었다. 사소한 것부터 모두 그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러니 일기를 쓸 수 있는 시간은 가족 모두가 잠든 후였다. 매번 일기를 쓰고 일기장을 숨길 때마다 전전긍긍하면서 일기를 써야 할까. 왜 일기를 써야 할까. 그것이 이 소설의 가장 핵심이다. 발레리아에게 일기를 쓰는 시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욕망과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솔직한 마음을 일기를 쓰면서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가족과의 관계를 생각할 수 있었다. 성인이 되면서 갈등이 생긴 딸 미렐라, 우유부단하고 미숙한 아들 리카르도, 자신을 ‘엄마’라 부르는 남편. 이제껏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항상 나의 삶을 하찮게 생각했다. 결혼과 출산 빼고는 특별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연히 일기를 쓰기 시작한 후로, 사소한 말투나 단어 선택이 지금까지 중요하게 여겼던 일들만큼, 아니 때때로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매일같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을 이해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야말로 가장 은밀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다. 왠지 그렇지 않은 것 같아 두렵다. (51~52쪽)





소설 속 발레리아의 나이는 마흔셋이다. 젊고 아름다운 나이다. 그러나 1950년대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그녀는 끼인 세대다. 여전히 꼿꼿하고 우아한 자세로 살아가며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머니와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며 대립하는 딸 미렐라. 자신과는 다른 신념을 지녔고 그것을 행동으로 실행하는 딸을 대하는 발레리아의 모습은 그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를 닮았고 나아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딸과 엄마의 관계를 관통한다. 미렐라와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원수가 되어간다고 느끼는 감정. 미렐라를 지지하고 응원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만약 나였다면 그게 가능할까. 선뜻 답을 할 수 없다.


그날 저녁 일기장을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숨긴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의자 위로 올라가 일기장을 침대 시트와 수건을 보관하는 수납장 위에 올려놓았다. 일기장을 숨기면 20년 동안이나 내 딸에게 밥을 해먹이고, 가르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 아이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신중히 살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애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는 의구심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71쪽)


발레리아는 직장에서 돌아와 살림을 도맡아 해야 하는 게 버겁지만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건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일탈이 필요했고 자유를 원했다. 책을 읽으면서 그녀를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에서 그녀가 가벼워지기를 나는 간절하게 바랐다. 소설이라는 걸 알면서도 소설이 아닌 일기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발 후련해지기를 바랐다.


나 자신을 파괴하고 싶었다. 무거운 변장을 하고 다니다 지쳐버린 듯 나라는 껍질을 벗어던지고 분노가 뒤섞인 후련함을 느끼고 싶었다. (199쪽)


이런 글을 쓰는 발레리아의 마음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발레리아의 손길로 채워지고 만들어진 집이 분명한데 그녀의 것이라고 여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니. 그 공허함을 알 것 같아서. 나만의 공간을 바라지도 않고 다만 작은 책상을 갖고자 하는 누군가가 떠올라서.


참 이상한 일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인데도, 우리는 마치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비인간적인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척 행동해야만 한다 게다가 일기장을 사무실에 가져다 놓으면, 집에는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질 것이다. (331쪽)


아무도 모르는 SNS 비밀 계정, 비상금 계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아지트, 깊은 곳에 간직한 마음, 도저히 꺼낼 수 없는 그 무언가, 그 모든 것이 금지된 일기장은 아닐까. 『금지된 일기장』에서 발레리아는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순간을 꿈꾼다. 그것은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과 연결된다.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500파운드’, 나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돈과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책은 남성의 책보다 더욱 짧고 더욱 응집되어야 하며, 지속적이고 방해받지 않는 장시간의 독서가 필요하지 않게끔 꾸며져야 한다고 나는 과감하게 말할 것입니다. 여성은 언제나 방해를 받을 테니까요. (『디 에센셜: 버지니아 울프』)


『금지된 일기장』, 『자기만의 방』과 함께 도리스 레싱의 단편 「19호실로 가다」가 생각나는 건 나뿐이 아닐 것이다.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의 말이 귓가에 맴돈다.


이 세상에서 철저히 혼자였으면 좋겠어요. (「19호실로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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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8-18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잊고 있었어요. 이 책 읽고싶은거... 자목련님의 멋진 리뷰 덕분에 다음 읽을 책에 바로 놓습니다. ^^

자목련 2025-08-19 09:36   좋아요 1 | URL
이 소설, 좋았어요!
바람돌이 님의 리뷰는 항상 좋은데 이 책의 리뷰는 얼마나 좋을까, 벌써부터 기대가 큽니다^^

바람돌이 2025-08-19 12:01   좋아요 0 | URL
방금 알았어요. 자목련님 왜 북플에 친구 신청이 안되어 있었을까요? ㅠㅠ 부디 친구 신청 받아주시어요.^^
 


지난 12월 3일 밤을 기억한다.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밤, 그다음 날 나의 마음은 이랬다.


어젯밤 뉴스 속보로 뜬 자막을 보고 믿지 않았다. 비상계엄 선포라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채널을 돌리고 뉴스를 봤다. 대통령의 담화가 나왔다. 그는 무슨 생각일까. 왜 그런 걸까. 대통령이니까. 대통령은 그래도 된다고 생각한 걸까. 비상계엄을 선포하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될 거라 생각한 걸까.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순간 무섭기도 했다. 내가 모르고 경험하지 못한 역사 속 비상계엄이 그려졌다. 소설 속 한 장면이 떠올랐다. 국회의원이 국회로 모이고 담을 넘고 무장한 군인들과 대치하는 모습은 실재였다.


뉴스를 보다 잠이 들었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다시 TV를 켰다. 비상계엄은 해제되었다. 대통령의 설명은 없었다. 비상계엄을 건의한 국방부 장관의 이름을 검색했다. 그는 3개월 전에 계엄 가능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어제 군을 동원했고 소집해제를 지시하며 수고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왜 그런 걸까. 여당의 원내대표는 대통령의 담화를 뉴스를 통해 알았다고 한다. 국회의원을 국회가 아닌 당사로 모이라고 했다고 한다. 국무회의가 있었다고 하는데 참석한 국무 회원은 무슨 생각을 했던 걸까.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다. 긴 잠에 빠지고 싶다. 뉴스를 그만 듣고 싶다. 뉴스를 그만 보고 싶다. 그런데도 정신이 뉴스를 향한다. 시간 날 때마다 검색한다. 대통령의 자진사퇴, 즉각 사퇴, 내각 총사퇴, 대통령 탈당, 탄핵론의 기사를 읽는다. 대통령은 정말 무슨 생각이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한국은 ‘여행 위험 국가’가 됐다. 정치에 큰 관심이 없고 정치적인 인간이 아닌데 정말 싫다. 화가 난다. (20241204의 메모)


우리는 12월 3일을 기점으로 ‘그 이후’의 삶을 살았다. 누군가는 응원봉을 들고 광장으로 나가고 누군가는 하루 종일 뉴스만 보고 누군가는 애써 외면하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감정을 추스르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며 2월 말부터 헌재의 판결 선고 일을 기다렸다. 파면이 될 거라 믿으면서도 만에 하나 파면되지 않으면 어쩌지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겨울, 봄,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었지만 그 겨울밤에 느꼈던 분노는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황정은의 『작은 일기』로 읽는 그 시간은 다시 분노를 불러온다. 통렬한 분노.

12월 3일 오후 세면대 밸브에서 물 새는 걸 발견하고 집수리 기술자와 약속을 잡은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하는 글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파주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그 마음을 나는 짐작할 수 없다. 그 광장의 집회를 모른다. 그 새벽의 시간을, 그 추위를, 눈 인사를 나누고, 먹을거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가는 이들의 마음을. 현장의 긴박함을, 두려움을 모른다. 수도권에 사는 친구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들었고 기사를 검색했을 뿐. 황정은처럼 잠을 못 자거나 숨을 쉴 수 없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난 두 달은 아름답고 좋은 것들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지만 그보다 내게는 오염의 시간이었다. 뭐가 오염되었느냐면. 매일 갱신되는 새로운 사건과 경악과 한계가 없는 것 같은 질 낮음으로, 어제의 경악이 오늘의 경악으로 무던해지는 일이 반복되어서, 그런 식으로 세상을 향한 감感이 오염. (106쪽)




그러나 전혀 모를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도 그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므로. 표현과 생각의 차이는 다르겠지만 궁극적인 결말은 같다고 느끼니까. 때문에 이 책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겪은 이들이 무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기록이라 말하고 싶다. 반복되어서는 안 될 시간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과 개인적인 기록. 뭐라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는.

누군가 같은 공간에서 작가의 곁을 스치고 함께 구호를 외치고 박수를 쳤을지도 모른다. 피곤에 찌든 얼굴로 하루하루를 견디며 낮에는 각자의 자리에 있다가 밤에는 시위에 참여했을 사람들. 작가처럼 가족과 친구들이 참여하고 헤어지기 전에 밥을 먹으며 잠깐의 일상을 누렸을지도 모른다. 그런 작고 소소한 일상의 귀함을 알기에 나는 어떤 결의나 결기가 전해지는 문장이 아닌 잉어빵 노점에서 잉어빵을 사며 쓴 이런 문장에 울컥한다. 이웃의 안위를 걱정하는 마음, 서로가 서로를 아끼는 극진한 태도.

우리 동네 가게들, 내가 은밀히 좋아하는 화곡동 상인들, 이웃들.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난다. 삶이 얼마나 더 힘들어질까. 좋은 것, 웃음을 보면 그것이 뒤흔들리고 사라질 날이 먼저 짚이는 이런 날들은 도대체 언제 끝날까. (154~155쪽)

그 시간을 지나왔고 우리는 또 같은 듯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그 이후로 달라진 것들을 생각한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오염되고 손상된 일상은 말끔하게 복구되고 회복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주의를 살피며 경계하는 태도를 지니고 긴장하게 살지도 모른다. 상흔으로 남아 함께 할 것이다.


가능성만을 바랄 수 있을 뿐인 세계는 얼마나 울적한가. 희망을 가지고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기가 너무나 어려운 세계, 그 어려움이 기본인 세계는 얼마나 낡아빠진 세계인가. 너무 낡아서, 자기 경험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세계. 다만 이어질 뿐. (171쪽)


황정은의 『작은 일기』는 말한다. 기억하라고, 기억해야 한다고, 우리가 무엇을 했고 이뤄낸 게 무엇인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런 이유로 『일기 日記』의 이런 부분을 찾아 읽게 된다. 기록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질문하고 다름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함과 마주한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기억은 망각과 연결되어 있지만 누군가가 잊은 기억은 차마 그것을 잊지 못한 누군가의 기억으로 다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잠재적 화석이다. 뼈들은 역사라는 지층에 사로잡혀 드러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퇴적되는 것들의 무게에 눌려 삭아버릴 테지만 기억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기억하고, 기억은 그 자리에 돌아온다. 기록으로, 질문으로. (『일기 日記』,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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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5-07-22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번 황정은의 신간은 그 이야기를 담고 있군요. 새삼 황정은이 우리와 같은 마음을 지녀서 좋다는 생각이 드는데, 같은 마음이 들어서 좋은건지 좋은데 같은 마음이 드는건지 그건 뭐가 먼저인지 모르겠네요.

자목련 2025-07-27 09:49   좋아요 0 | URL
그러네요. 제 경우는 황정은이 좋은 게 먼저 인 것 같기도 하고요.
폭염의 날들, 건강하게 지내세요!

책읽는나무 2025-07-23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황정은의 신간이로군요.
황정은은 늘 황정은 답다란 생각이 듭니다.

자목련 2025-07-27 09:49   좋아요 1 | URL
황정은 답다, 황정은 어떻게 생각할까. 잠깐 궁금합니다. ㅎ
나무 님, 시원한 하루 보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