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력이 떨어진다. 속도도 떨어진다. 읽기, 쓰기, 어떤 일을 진행하는 속도. 모든 게 그러하다. 당연하다. 늙고 있으니까. 아니 이 늙음은 나에게만 한정된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들의 속도와 집중력이 있으니까. 시간의 느림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속도와 상관없이 제 속도로 뚜벅뚜벅.


노란 은행잎이 가득하다. 가로수의 잎들이 누렇게 빨갛게 변한다. 곧 가을이 사라질 징조다. 입동이 지나면 바로 겨울이 올 것 같기도 하고. 옆집은 김장을 하려는지 어제 보니 문 앞에 파와 큰 대야가 가득하다.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구나. 올해 배춧값은 어떤가. 김장을 직접 담그는 건 아니지만 항상 궁금하다.


계절은 계절대로 흐르고 나는 나대로 흐른다. 읽고 싶고 궁금했던 책을 샀다. 소설이다. 예소연의 단편집 『사랑과 결함』, 조해진의 장편 『빛과 멜로디』. 곧 읽겠지. 읽게 되겠지. 이주혜와 위수정의 소설이 궁금한데 위픽 시리즈는 살짝 주저한다. 중고로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성급한 마음을 접어두고.







여름 옷을 정리하면서 옷 몇 벌을 버렸다. 내가 좋아했던 티셔츠를 거리낌 없이 버리는 쪽으로 밀었다. 겨울 신발 하나 쓰레기봉투에 넣어 입구를 묶었다. 책도 몇 권 버렸다. 이런 단호함이 필요하다. 책은 더 큰 단호함이 필요하다. 가을이 가기 전에 책을 정리하자. 가을이 너무 빨리 가버려서 타이밍을 놓쳤다는 핑계는 대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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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4-11-06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드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설렘의 상실인 것 같아요. 집나간 설렘을 함께 기다려요.

자목련 2024-11-06 15:08   좋아요 0 | URL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걸 설렘이 알아야 할 텐데요.
 


10월과 함께 가을이 왔다. 더 이상 창을 활짝 열지 않는다. 환기를 위한 시간이 아니면 활짝은 사양한다. 징검다리 휴일을 지나고 나니 이번 주는 어영부영 다 사라졌다. 실은 추석 연휴부터 어영부영 보냈다. 여름 명절 같은 더위에 지쳐서 하는 일 없이 짧은 안부를 나누는 게 전부였다. 느닷없이 임시공휴일이 된 국군의 날은 모두가 쉬는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가족 일원 중 한 명은 월차를 쓰고 10월의 첫날을 쉬었다고 했다.


아무튼 덧신이 아닌 양말을 챙겨 신어야 할 10월이 되었다. 올해는 10월, 11월, 12월까지 세 달이 남았다.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내년에는 얼마나 빠르게 지나갈 것인가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냥 가을이니까 시집을 샀다. 분명한 명분도 있다. 시집의 제목에 ‘작약’이 있으니까. 자고로 작약을 좋아하는 이라면 이런 제목의 시집은 구매해야 한다. 뒤늦은 발견으로 미안해할 정도다.






이승희 시인의 『작약은 물속에서 더 환한데』, 김경미 시인의 『당신의 세계는 아직도 바다와 빗소리와 작약을 취급하는지』, 그리고 신용목 시인의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까지 세 권의 시집. 세 권의 시집을 훑어보다 멈춘 시는 이런 시다.

발이 구두를 다 써서

발가락이 구두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

귀가 말을 다 써서

더는 듣고픈 말이 없는 것

다 쓴 관계들이 가득한 사진첩들

다정도 부드러운 손을 다 썼을까

저녁노을 다 써 버린

커피색 유리창 옆

당신과 맞잡은 나의 손이 풀린다 (김경미 「다 쓴다는 것」, 전문)



시집과 더불어 읽고 싶은 단편은 조경란이 수상한 『2024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이 책에는 신용목의 단편도 있다. 시인의 단편이 궁금하다. 이미상 단편을 읽을 수 있는 소설 보다 : 가을 2024』. 그건 그렇고 어쩌자고 나는 자꾸 시집을 사는지 모르겠다. 시를 읽지도 못하고 시집을 정리하기도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시 읽는 밤이면 좋겠다. 시 읽는 밤이 이어지길 바란다. 시가 머무는 밤, 시가 맴도는 밤이면 좋겠다. 2024년 가을이 그렇게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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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10-04 19: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조경란 작가가 영예를 안았군요.
그렇지 않아도 조용해서 뭐하며 지내나 궁금했는데
소식들으니까 반갑네요. 예전에 잠깐 인연이 있어서 말이죠. ㅎ
나중에 한 번 사 봐야겠습니다.^^

자목련 2024-10-05 16:32   좋아요 3 | URL
오, 그 인연이 궁금하네요 ㅎㅎ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yamoo 2024-10-07 1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경란 작가...아직도 건재하군요. 제겐 너무 지루한 작품이라 몇 권 읽고 말았습니다. 서하진과 조경란 등은 좀 지루하더군요. 공선옥 작가가에 비해서요....^^;;

자목련 2024-10-08 17:06   좋아요 1 | URL
말씀하신 공선옥 작가와 비교하면 지루하다고 할 수 있죠. 조경란 작가의 초반 소설을 열심히 읽었던 때가 있는데....

그레이스 2024-10-16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시경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습니다.
제목때문에 ㅎㅎ
 

이상하게 오늘이 9월 1일인 것 같다. 8월은 힘들고 긴 시간이었다. 더위에 약한 나는 올여름을 조금 다르게 기억할 것 같다. 먹고사는 일의 위대함을 새삼 느꼈다. 내가 먹자고 나를 위해 무언가를 끓이고 데치고 볶는 일이 정말 귀찮았다. 움직이지 않고 멈춘 채 모든 게 내 앞으로 이동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2024년 여름, 정확하게는 8월은 유독 나를 지치고 힘들게 했다. 응급실에 다녀온 8월이기도 했다.


지난번 꺼냈던 삼계탕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그러니까 정확하게는 실패한 삼계탕, 열심히 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 못한 삼계탕 이야기. 복날에는 삼계탕을 먹어야 한다는 고정관념 같은 게 있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기억이 한몫했다. 식구가 많았던 우리 집에서 삼계탕은 닭죽의 개념이 컸다. 할머니, 아버지, 오빠를 위주로 식단이 꾸려졌다. 이효리가 엄마와 여행에서 오징어 찌개 먹으면서 자신의 그릇에는 오징어도 몇 개 없었다는 말처럼 언니들과 나의 국그릇에는 닭고기는 없었다.


삼계탕으로 돌아오면 삼계탕을 끓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인삼을 비롯한 약재를 넣은 게 아니라 닭, 찹쌀, 마늘만 넣어도 충분했으니까. 냄비가 아닌 전기압력밭솥이 만들어줄 삼계탕이었으니까. 그냥 닭만 잘 손질하고 찹쌀을 품은 닭을 만들면 그만이라고 나는 착각했다. 우선 재료부터 실패의 전운이 돌았다. 작은언니가 사다 준 닭은 너무 컸다. 진짜 컸다. 10용 밥솥에 안착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닭 다리는 예쁘게 포갤 수 없었고 힘을 주어 잘라내야 했다. 급환 마음에 찹쌀을 불리는 것도 잊었다. 어떻게든 밥솥에 넣고 삼계탕 메뉴를 선택했다. 기다리면 되는구나 여겼다.


갈비찜을 해 본 경험을 믿었다. 물론 갈비찜은 훌륭했다. 나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삼계탕은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고 압력 추가 흔들렸고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내가 맞이할 주방의 최후를 말이다. 삼계탕이 완성되었다고 친절한 목소리가 말려주었다. 밥솥을 열기 전 나에게 닥친 시련을 보았다. 밥솥 주변이 기름이 가득했다. 김이 빠지면서 상부장에도 기름의 흔적이 남았다. 처리는 뒤로하고 밥솥을 열었다. 아니, 젓가락으로 닭은 찔러보니 깊숙이 들어갔다. 문제는 찹쌀이었다. 찹쌀이 제대로 익지 않았다. 밥솥 뚜껑을 닫고 대충 정리 후 삼계탕 메뉴를 선택했다. 사진은 교훈을 삼으려 남겼다. 잘 보면 찹쌀이 익지 않은 게 보인다.





2시간을 들여 만든 삼계탕은 맛은 썩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뒷정리는 힘겨웠다. 기름을 닦아내는 일, 밥솥 청소는 덤이었다. 그리고 삼계탕을 먹는 일이 남았다. 문제는 양이 많다는 것. 나는 끼니 때마다 삼계탕을 먹었고 결국엔 음식물 쓰레기로 버린 것도 있다. 나는 닭으로 만든 요리를 좋아한다. 치킨, 닭찜, 닭볶음탕, 모두 잘 먹는다. 달걀도 좋아해서 삶은 달걀, 장조림, 달걀 프라이도 좋아한다. 하지만 당분간 삼계탕은 먹을 자신이 없다. 내년에는 삼계탕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냥 배달시켜 먹을 것이다.


재미없는 삼계탕 말고 책 이야기를 해 보자. 김애란과 조해진의 신간이 나왔다. 둘 다 장편이다. 이승우의 산문도 나았다. 궁금한데 선뜻 구매는 안 했다. 이상하다. 잘 모르겠다. 조금 천천히 읽어도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이 마음이 언제 바뀔지 모르겠다.


길고 길었던 8월이 가고 9월이다. 9월에는 조금 더 신나게 조금 더 명랑하게 지내고 싶다. 책도 좀 열심히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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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9-02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 찹쌀이 생쌀이네요?! ㅋㅋㅋㅋ
고생하셨습니다... 내년부터는 꼭 사드세요~ ㅋㅋㅋㅋ

자목련 2024-09-03 11:24   좋아요 0 | URL
맛집까지는 아니어도 식당에 가거나 배달 시키려고요 ㅋㅋㅋ

망고 2024-09-02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제 삼계탕 먹었어요^^ 제가 한 건 아니고요ㅋㅋㅋ 요리는 정말 재료준비랑 정리하는게 너무 짜증ㅋㅋㅋㅋㅋ자목련님 수고하셨네요 다음부턴 시켜먹읍시다ㅋㅋㅋㅋㅋ

자목련 2024-09-03 11:24   좋아요 0 | URL
맛있는 삼계탕을 드셨을 것 같아요!
잘 하는 집에서 배달하는 걸로^^

다락방 2024-09-02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아 삼계탕의 처참한 모습..
뒷수습 하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이 글 읽고 삼계탕은 사먹자고 외워둡니다!!

자목련 2024-09-03 11:25   좋아요 0 | URL
삼계탕을 쉽게 본 제 실수 ㅎㅎㅎ
우리 맛있는 삼계탕을 사 먹도록 해요^^

페넬로페 2024-09-02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여름은 정말 너무 더웠어요.
불 옆에서 음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힘들지만, 재료를 다듬고 먹고 나서 정리할 때까지 드는 수고도 엄청나요
ㅠㅠ
외식비나 배달비가 비싸 웬만하면 집에서 직접 해 먹으려고 하니 더 힘든 것 같아요.
요즘 삼계탕 한 그릇이 거의 이만원 가까이 하더라고요.
닭 한마리에 이것저것 넣어 푹 삶으면 되니 저는 ‘집에서 요리해 먹자‘파 입니다. ㅎㅎ
내년엔 찹쌀 불리는 것, 잊지 말기!

자목련 2024-09-03 11:26   좋아요 1 | URL
내년 여름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지금은 식당에 가서 먹기를 권장합니다 ㅎㅎ
페넬로페 님이 직접 요리하신 녹두가 들어 간 삼계탕은 정말 맛있을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4-09-02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더위에 무척이나 취약한
닝겡이랍니다. 더위여 제발
가라 ~

지난 주말에 냉동실 정리를
했는데, 오리 닭 정리하다가
손에 기름이 묻어서 정말 고
생했답니다. 손을 닦아도 닦
아도 냄새가 지지 않더라구요.

신간이 나오면 왠지 사야할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또 한편
으로는 당장 읽지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 공감합니다.

자목련 2024-09-03 11:27   좋아요 1 | URL
낮에는 뜨겁지만 그래도 서늘한 날들이 시작된 게 느껴져요.
냉동실 오리는 무슨 요리가 되었을까요?

책들 구경하다가 몰랐던 신간 소식을 듣고 고민합니다. ㅎㅎㅎ

coolcat329 2024-09-02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냥 백숙으로 해 먹는데 압력밥솥보다는 냄비에다가 하는 게 뒷처리가 쉽더라구요. 기름이 참 짜증나죠? 고생하셨어요. 😓

자목련 2024-09-03 11:29   좋아요 0 | URL
저도 다음에는 그냥 백숙을 해야 할 것 같아요 ㅎㅎ
기름 청소는 끝이 너무 멀어요!!

독서괭 2024-09-02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응급실이라니요. 괜찮으신거죠 자목련님? ㅜㅜ 김애란 신간 반갑습니다. 다 읽고 리뷰 못 쓰고 있는 1인…

자목련 2024-09-03 11:30   좋아요 0 | URL
어쩌다 보니 음급실, 괜찮습니다. 독서괭 님 고맙습니다.
김애란 신간 벌써 읽으셨군요. 좋으셨나요? 좋았겠죠!!

2024-09-02 18: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9-0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쟝쟝 2024-09-02 2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먹자고 나를 위해 삼계탕을… 자목련님… 멋짐이 폭발합니다 ㅋㅋㅋ 실패하면 어쩝니까 ㅋㅋㅋ 복날에 셀프 삼계탕 끓이기라는 자기애의 실천! 본받겠사옵니다! (저녁 설거지하기 싫은 쟝쟝)

자목련 2024-09-03 11:33   좋아요 0 | URL
요리를 해 줄 이가 없으니 내가 먹자고 나를 위해서 합니다 ㅎㅎ
설거지는 정말 귀찮지만!
나를 위해서 책도 주문하고 쇼핑도 하고 ㅋㅋㅋ

구단씨 2024-09-02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맞아요.
기름지고 영양(?) 덩어리 음식을 먹는 건 좋은데 뒷수습은 고생이죠...
저희는 가끔 포장 삼계탕을 먹거나 식당에 가서 먹습니다.

지독한 여름이었네요. 오늘은 그래도 바람이 조금 불어서 숨이 쉬어졌습니다.

자목련 2024-09-03 11:35   좋아요 0 | URL
포장 삼계탕, 식당에 가서 먹는 삼계탕이 좋습니다.
닭을 사는 일은 자중해야 합니다 ㅋㅋㅋ

가을이 오고 있는 것 같아요. 평온한 날들 이어가세요!

거리의화가 2024-09-03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독한 더위에 삼계탕을 직접 시도를 해보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박수받을만한 일입니다!
맛은 괜찮았다고 하셨지만 뒷수습 때문에 힘드셨겠어요ㅠㅠ 많은 양을 계속 먹는다는 것도 그렇고요.
음식 재료부터 만드는 과정이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 내년 여름에는 꼭 삼계탕 사서 드시기를!^^

자목련 2024-09-03 11:36   좋아요 0 | URL
사다 둔 닭이 노려보고 있어서요 ㅎㅎ
닭이 커서 정말 고생했어요. 음식을 버리는 일은 참 어렵습니다. ㅠ.ㅠ
올여름은 여러모로 특별한 여름이에요^^

청아 2024-09-03 0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올해 삼계탕을 먹어보질 않았네요. 복날에도 닭한마리 사먹었어요ㅋㅋㅋㅋㅋ
자목련님 고생하셨습니다. 서재 분위기가 더 화사해졌네요!

자목련 2024-09-03 11:37   좋아요 1 | URL
내년 복날에는 삼계탕이 아닌 치킨을 먹어야겠어요. 맥주랑!!
서재를 둘러봐 주셔서 감사하고요^^

꼬마요정 2024-09-03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계탕 이야기 너무 재밌어요. 크으 자신을 위해 요리하는 건 정말 멋집니다. 하지만 뒷수습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죠.
내년엔 꼭 맘에 드는 삼계탕 드시길 바랍니다^^

이제 정말 여름의 끝이 보입니다. 추석 때까지 덥긴 하겠지만, 8시가 되도록 지지 않던 해가 7시만 되어도 안 보이니 말입니다. 계절이 참 신기합니다. 응급실 다녀오셨다는데 이제 괜찮으신가요?

자목련 2024-09-04 11:44   좋아요 1 | URL
내년에는 색다른 보양식을 먹고 싶습니다!
어쩌다 보니 응급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곧 낮의 열기도 사라질 것 같아요. 가을이 시작되고 있는 것 같아요^^
 


올해 작약의 시간은 끝났지만 시로 작약을 만난다.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작약의 계절에 만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쉬움은커녕 반갑다. 이렇게 또 작약에 빠져든다. 조용미 시집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서 발견한 시다. 이 시집을 구매하려고 했던 건 아니다. 안희연의 신간을 살펴보다가 문학동네 말고 창비나 문지에서는 어떤 시집이 나왔나 찾다가 조용미의 신간을 보았다. 목차를 보다가 작약을 보았다. 아니, 작약이라니 그럼 이 시집을 사야지.






저 작약의 본을 짐작해 볼까


내 이파의 작약은 한때 귀신이었다가 한때 기린이었다가

한때 흰뺨검둥오리였다가 한때 벚나무모시나방이었다가

한때 거미게였다가


어쩌면 나였던 누구였다가, 단공도 부단공도 모르는 크게

깨우진 자였다가 공재고택의 향나무였다가


이번 생에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이 고리를 끊으려 했던

그저 사람이라는 이름을 얻은 고독한 자였다가


마침내 확연히 명백한 작약이 되었다 내 앞의 작약이 되었다 (「작약의 본생담」 , 전문)



먼 산 작약

산작약


옆 작약

백작약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당신 없이,


백자인을 먹으면 흰머리가

다시 검어진다


잠을 잘 수 있다


백자인을 먹으면 다시 나의 자리로

돌아간다


측백나무의 씨

온석 같은 열매 속에는


백자인 여섯 알이

가만히

들어 있다


저수령 넘어 은풍골로 작약을 보러 간다 (「작약을 보러 간다」, 전문)







사진첩에서 작약을 찾았다. 백작약, 사라 작약, 레드 참 작약. 작약이 피고 지던 순간을 떠올린다. 올해의 작약이 준 행복들. 그리고 곧 수국이 가져다줄 기쁨도 생각한다. 물론 『초록의 어두운 부분』에 수국에 관한 시도 있다. 그 시는 수국을 마주할 때 읽어야지.


시가 있어 좋다. 시로 작약을 만나서 좋다. 이런 시를 써 준 시인이 고맙다. 유희경의 「심었다던 작약」에 이어 이제 조용미의 작약도 기억할 것이다. 책장에 조용미의 다른 시집이 있다. 모아두기만 한 시집을 펼치는 여름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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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있다. 슬프다, 아프다, 그립다, 이런 말로 정리하기 어려운 감정 말이다. 저마다 고유한 감정은 결과 폭이 다르다. 같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같은 질량으로 판단하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사느라 바빠서 내면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좋을지 생각나지 않아서, 이유는 많다. 그런 복잡하고 엉킨 감정을 하나씩 풀어 이름을 붙인 이가 있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의 저자 존 케닉이다. 감정이라는 거대한 가지에 붙은 잔 줄기에 이름을 붙이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것을 정리한 내용이 바로 이 책이다. 쉽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신조어 사전이다.


슬픔에 이름 붙이기란 제목처럼 슬픔에 국한된 내용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숱한 감정들, 고독한 순간들, 내밀한 심연과 마주하는 순간을 새로운 단어로 설명한다고 할까. 여섯 장에 걸려 외부 세계, 내적 자아, 당신이 아는 사람, 당신이 모르는 사람, 시가의 흐름, 의미의 추구까지 주제별로 모은 300여 개의 단어를 만날 수 있다. 신조어 사전답게 그가 만든 단어는 어원에 대한 설명이 더해진다. 가령 이런 것이다. 슬립 패스트(slipfast)는 형용사로 어원은 slip + fast다. 뜻은 세상에 참여하지 않고도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전혀 발자국을 남지 않고도 사람들의 대화 속을 자유로이 헤맬 수 있게.


존 케닉의 설명을 읽고 나면 아마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어떤 일에 개입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게 되는 그런 순간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물론 이건 나의 생각일 뿐이다. 생각해 보면 이처럼 어떤 단어는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되지만 똑같지 않을 수 있다. 어느 연인은 “사랑해”란 말 대신 둘만의 신호로 특정 숫자를 언급하기도 하고 “고요해”란 말로 대신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니 이 책은 자유로이 해석될 수 있다.







영어로 만든 단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르다. 맞다. 그러나 가만히 이 책의 신조어를 하나하나 읽다 보면 깊은 밤 누구에게 들킬까 혼자만 돌아보았던 순간의 감정이나 막연하게 이해받고 싶었던 감정이 스쳐지나는 걸 느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의 순간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여러 해 동안 알아온 누군가에게도 개인적이고 신비한 내적 삶이 존재한다는 깨달음이란 그노시엔느(Gnossienne)라는 단어를 만났을 때 그랬다. 짐작했듯이 에릭 사티의 피아노곡 제목에서 차용한 단어다. 사랑하는 연인이라고 해서 다 알 수 없다. 전부를 알고 싶지만 전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 사이에는 늘 어떤 거리감이 존재할 것이다. 어쩌면 견유학파의 말이 맞는지도, 사랑은 그저 환상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은 성스러운 종류의 환상일지도, 아이들을 인도하기 위해 나타나는 파랗게 빛나는 신들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기만 한다면, 그것은 힘을 지닌다. 그리고 그거면 충분하다. (137쪽)


그럼에도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이런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게 아닐까.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싶고 조금 더 상대의 슬픔이나 아픔을 이해하고 싶은 간절함에 말이다. 그런 마음 조각들이 프로젝트란 이름으로 모여 이런 사전이 되었다. 사실 이 책에 대해 말하는 건 어렵다. 한국어가 아닌 외국어라는 점에도 그렇지만 직접 읽었을 때 와닿는 기분이나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에. 문득 떠오른 건 전시 같은 형태로 소개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책엔 단어를 표현한 콜라주 작품이 있기 때문이다. 앞서 끌렸던 단어 Gnossienne엔 이런 작품으로 만날 수 있다.






날씨 따라 마구 달라지는 감정, 계절마다 뒤바뀌는 감정, 그때의 감정을 획일적인 하나의 단어로 표현하는 건 삭막한 일이다. 시대에 따라 유행하는 말이 다르고 같은 말인데 세대에 따라 다르게 사용된다. 그뿐인가, 어떤 말은 사멸한다. 그런 점에서 존 케닉의 이런 프로젝트는 의미 있다.

아마도 특정 단어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그 단어에 반하게 되거나 반가움을 표할지도 모른다. 한국어로 번역해 사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내 안의 감정을 정리하여 이름을 붙이고 싶은 욕구를 느낄지도 모른다. 하나의 감정에 대해 고유하고도 차별적으로 펼쳐놓는다고 할까. 결코 같을 수 없는 무게의 슬픔 혹은 감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어떨까. 존 케닉의 이 책처럼 나만의 시를 쓰고 사전을 만들어봐도 좋을 것이다. 남다르고 각별하게 기억될 책이다.


단어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고 변화하면서 시대에 뒤처지거나 새로운 의미를 띠는 경향이 있다. 그럼에도 단어는 겉으로는 제자리에 고정된 듯한 모습을 보이며 우리의 삶에서 우리를 달래주는 존재로, 우리가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마다 의지할 수 있는 무언가로 남는다. (292~293쪽)


독특하고 특별한 『슬픔에 이름 붙이기』을 읽다 보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책이 있다. 바로 이 책을 추천한 김소연의 『마음사전』이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은 제목 그대로 마음사전이다. 나도 모르는 나의 마음, 알고 싶지만 단단한 문으로 가로막힌 당신의 마음을 향한 두드림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바람결에 달라지기도 하는 감정의 상태, 숨어버린 마음, 속이 상해 울컥한 기분을 달래주는 글의 집합체! 전부를 다 소개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이런 단어로 충분하다.


은은한 것들은 향기가 있고, 은근한 것들은 힘이 있다. 은은함에는 아련함이 있고, 은근함에는 아둔함이 있다. 은은한 것들이 지닌 아련함은 그 과정을 음미하게 하며, 은근한 것들이 지닌 아둔함은 그 결론을 신뢰하게 한다. 은은한 사람은 과정을 아름답게 엮어가며, 은근한 사람은 아름답게 맺는다. (「은은하다: 은근하다」, 전문)


「은은하다: 은근하다」를 읽는다. 마음과 감정의 이름을 불러주면 그것들은 진정 선명한 형태를 지닌다. 명확하게 내게로 온다고 할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을 생각한다. 그는 향기를 지닌 사람,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서는 빛이 난다. 그 빛은 멀리서 알아볼 수 있도록 환하고 아름답다. 어렵겠지만 은은하고 은근한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성찰하는 고독의 시간을 통해 단련하는 사람.


다른 책으로 김신식의 『다소 곤란한 감정』이다. 모두에게 같은 감정을 강요할 수 없고 타인의 감정을 섣불리 예단해서도 안 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감정 비평이라고 말하고 싶다.


타인의 감정 상태에 이름 붙이기가 심해지면 어찌 될까. 당신의 하루. 본인의 감정을 굳이 해석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자신을 자신을 잠시 내버려두고 싶은 날. 그러나 누군가는 당신의 심적 상태마저도 어떤 감정이라며 이름 붙이려 한다. 감정에 관해 스스로 무無의 상황에 놓이고 싶은 싶은 시공간을 확보하기란 점점 어렵다. 감정에 관한 무의 상황도 특정한 감정임을 확인하려 드는 시도 때문에. (『다소 곤란한 감정』, 212쪽)


하나의 현상에 대해서 모두가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언론이나 전문가의 말을 들으며 그들의 감정에 휩쓸리곤 한다. 그들과 다른 감정을 표출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할까. 다른 감정을 소유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을 낼 수 있어야 한다. 개개인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그 안에서 다양한 감정을 읽어내는 일은 중요하고 필요하다.


나의 슬픔에 이름을 붙이는 것처럼 타인의 슬픔과 감정에도 내가 모르는 이름이 있을 수 있다. 서로의 이름을 알려주고 불러주는 일, 위로와 회복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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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6-16 17: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딴 얘긴데 마음사전을 쓴 김소연 작가가 시인겸 건축가인 함성호 씨와
부부지간이더군요. ㅎ

자목련 2024-06-16 17:11   좋아요 1 | URL
네, 함성호 씨의 산문을 통해 알게 되었어요. 시인과 소설가 부부, 소설가 부부도 많더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