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라이더 - 대한민국 세금의 비밀 편 프리라이더 1
선대인 지음 / 더팩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프리라이더(무임승차자)는 경제학적 용어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그 혜택을 보는 사람들을 뜻한다. 쉬운 예를 들자면 단독주택이 있는 골목에 폭설이 내렸는데 10가구가 살고 있다고 가정하자. 이 중 8가구에서 나와 골목의 눈을 말끔히 치웠다면 눈을 치우지 않고 골목을 이용하게 된 두가구는 프리라이더(무임승차)로 볼 수 있다. 무임승차자 문제는 주로 공공재(공공의 성격을 가진 물건이나 서비스)에서 발생하게 된다.
 

저자 선대인은 공공서비스라는 것으로 이 프리라이더를 설명한다. 길을 내고, 공원을 이용하고, 불이 나면 소방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경찰들이 치안을 담당하는 공공서비스는 시민들의 세금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뉴스를 보면 이 나라의 장관이라는 이들은 대체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았고, 우리나라 최고의 기업이라고 하는 삼성그룹도 세금 문제(이건희가 이재용에게 넘겨주면서 상속세를 내지 않았던)가 거론되고 있다. 그렇다고 장관이나 이건희 일가가 도로를 사용하지 않고, 치안서비스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시민들의 세금으로 세금을 제대로 내지 않는 이들에게도 공공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즉,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혜택만을 누리고 있는 프리라이더(무임승차자) 인 것이다. "세금이나 건강보험료를 내지 않는 사람이 각종 국방과 교육, 건강보험 등 공공 서비스 혜택을 누리는 게 무임승차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이 같은 무임승차 문제가 만연하게 되면 그 국가는 재원 부족 등으로 적절한 수준의 공공재를 제공할 수 없게 되고, 종국에는 붕괴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단순히 세금을 내지 않는데 그치지 않는다. 2MB 정부에서 보듯이 탈세 등의 혐의가 있는 이들이 국가의 장관 등 국가를 운영하는 자리에 있다는 뜻이다. 국민들이 내는 세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세금은 내지 않으면서 세금을 흥청망청 써대고 있는 것인데 선대인은 그들이 어떻게 세금을 낭비하고 있는지 각종 자료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현 정부의 세금이 많이 쓰이는 곳 중에 하나는 건설사업이다. 특히 4대강으로 대변되는 현정부의 방향은 건설이외에 아무런 정책도 가지고 있지 못하는데, 선대인의 지적에 따르면 이 4대강 공사의 입찰이 대기업의 나눠먹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최저가 입찰인데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이 적당하게 배분받는 것은 그들이 모종의 담합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4대강 공사는 대부분 입찰 받은 시공사가 해당지역 모든 공사를 전부 다하는 턴키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런 턴키 방식은 대체로 3~40% 정도 부풀려져 있다는 것이다. 즉, 국민의 세금으로 대기업 배불리는데 쓰일 뿐이다.

근래에 이루어지는 많은 공사 중에 하나가 바로 민자방식이다. 국가예산이 아닌 민간자본으로 건설을 하여 국가 예산을 아낄 수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민자공사의 경우 수익이 예상에 못 미칠 경우 국가 혹은 지방정부가 손실을 보장해 주고 있다. 어떻게 하든 수익이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사업인 셈이다. 여기에 한가지 문제가 더 있다. 건설은 민간회사가 하지만 공사를 마치면 운영은 페이퍼 컴퍼니에서 이루어진다. 주로 대기업들이 자본을 댄 페이퍼 컴퍼니가 운영수익 및 손실에 따른 정부 보조금으로 수익을 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세법상 배당분에 대해서는 법인세를 물리지 않고 있다. 페이퍼 컴퍼니는 말 그대로 실체가 없는 회사이기 때문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들에게 배당을 해버리면 끝이다. 돈은 벌지만 세금을 안내고 있는 것이다. 맥쿼리라 불리는 회사가 대표적인 페이퍼 컴퍼니이다.

 

이렇게 대기업에게 국민 세금을 가져다 주는 현 정부는 부자들의 감세까지 추진하고 있다. 실제로 종부세들은 세율이 낮아져 부자들의 세금을 낮춰주고 있다. 게다가 대기업들은 상속세도 내지 않고 자식들에게 회사를 상속하고 있다. 법으로 정해진 세금을 내지도 않고 있고, 그 법 마저 바꿔 세금을 깎아 주는 것이 현 정부가 하는 일이다.

 

세금과 관련해서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지금 우리가 내고 있는 세금이 3~40년 전 개발시대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 경제는 생산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었고, 금융경제나 자본경제는 활성화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정부의 세금수입이 주로 생산경제에 부과되었다. 하지만 현재에 이르러서는 금융,자본경제가 생산경제의 몇 배에 달하지만 세금제도는 구식을 따르고 있어 생산경제의 세금이 몇 배에 달하고 있다. 특히 주식시장 활성화등을 위해 주식차액에 대한 세금을 물리지 않는 세금구조를 갖게 되면서 연봉 5천만원의 직장인은 정해진 세율에 따라 세금을 내게 된다. 보통 2백만원 정도의 근로소득세금에 이외의 세금 더 내게 될 텐데 주식으로 5천만원의 수익을 거둔 경우에는 세금을 전혀 내지 않는다. 부동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해진 기간 만 넘긴다면 별로 세금을 내지 않는다. 그래서 봉급생활자에게는 쏙쏙 세금을 거두어 가지만 불로소득이라 할 수 있는 수익에 대해서는 세금을 조금만 걷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평생 내는 세금은 약 5억 원에 이른다. 이 5억 원의 주인 노릇을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 나라의 운명이 바뀐다. 이 돈을 제대로 쓰면 이 나라 경제에 활력을 주고 국방을 튼튼히 하며 이웃의 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을 도울수 있다. 우리 부모님들을 좀 더 편안히 모시고, 우리 아이들 교육의 질도 크게 높일 수 있다. 반면 이 돈을 잘못 쓰면 기득권의 배만 더욱 불리고 금수강산의 자연을 훼손하는 엉뚱한 사업들을 잔뜩 벌려놓게 된다. 사각지대에 놓인 이웃들이 고통 받게 되고, 많은 돈을 탕진하면서도 우리의 삶은 개선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이 나라가 잘 되기를, 삶의 질이 올라가기를 바란다면 이제 5억 원이 어떻게 걷히고 쓰이는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새로운 인시을 바탕으로 납세자 혁명에 함께 나서야 한다."(5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을로 간 한국전쟁 - 한국전쟁기 마을에서 벌어진 작은 전쟁들
박찬승 지음 / 돌베개 / 201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을 조금만 더 들여다 보면 남과남 북과북에서의 전쟁을 마주하게 된다. 군이 아닌 민간인끼리의 학살을 어떻게 봐야 할까. 박찬승의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바로 그 점에 주목하고 있다. 전쟁 중 전투와 상관없이 후방에서 사망한 민간이 더 많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마을에서 어떤 전쟁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전쟁을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남과 북, 미국과 소련이라는 눈에 보이는 요소 이외에도 친일과 항일운동이 함께 내재되어 있고, 양반제도가 무너지는 과정과 신문명과 옛것을 추구하려는 전통과의 마찰이 그 속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까지도 양반가문에 의해 마을이 좌지우지 되었다. 특히 소작문제는 한국전쟁 당시까지 심각한 사회문제였다. 그런 과정에서 양반가문에 억눌렸던 머슴, 소작농 들이 인민군의 진주와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를 냈고, 반대로 국군의 재점령으로 반대의 상황이 이루어진다. 때로는 양반가문 사이에 잘 나가는 문파와 그렇지 않은 문파가 있다. 잘 나가는 문파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자연스레 그들의 기득권세력을 유지해나갔고 자연스럽게 우익세력에 가담한다. 그런다 그렇지 않은 문파에서는 비교적 사회주의 사상을 쉽게 받아들이고 항일운동 및 건국운동에 앞장서고 인민군의 진주시 인민위원장 등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국군이 들어서면서의 상황은 뻔하다. 이 뿐만 아니다. 미국의 남한 신탁통치와 더불어 기독교가 자연스레 이승만 세력을 지원하는 우익의 성향을 띄게 된다. 그러나 종교를 아편으로 생각한 공산군의 남한 점령은 기독교에 심각한 위기이다. 특히나 기독교세력에 의해 핍박받았던 무속인들은 기독교세력에 대한 반감을 표출한다. 마찬가지로 국군이 점령하고 기독교는 굳건한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마을로 간 한국전쟁'은 이런 사회적 현상을 잘 보여주는 다섯가지 사례를 보여준다. 과연 남한내부에서의 전쟁이 어떠했었는지를.

 

1장 진도 동족마을 X리의 친족학살 사건

서울경기를 제외하면 꽤 많은 씨족마을이 현재까지 존재한다. 진도의 경우도 창녕 조씨나 밀양박씨에는 밀리나 임진왜란 이후 자리를 잡은 현풍 곽씨가 있다. 현풍 곽씨는 장파, 중파, 계파의 3개의 파를 이루어 X리에 자리잡았는데 일제시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고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준비 등이 중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에 반해 계파의 경우는 별로 세력을 갖지 못하면서 각 파간의 보이지 않는 경쟁이 있었다. 갈등이 본격적으로 폭발한 것은 보도연맹 사건 때 였는데 계파 출신의 경찰에 의해 곽씨 일가 5명이 처형당하면서였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는 과정에서 보도연맹 사건에 앙심을 품었던 좌익계에 의한 학살이 일어난다. 경찰 가족에 대해 아이 부터 노모까지 처형하는 등 족보상 약 110명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다시 국군이 들어오면서 좌익계열 들이 입산을 하고 남은 가족 약 20여명에 대한 보복 학살이 이루어진다. 각 파간에도 큰집은 우익, 작은 집은 좌익 등으로 구분이 되었기에 파 간 학살도 있었지만 크게는 중파와 계파간의 갈등이 컸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계기로 중파는 흩어지는 등 세력이 약해졌고 인민군의 희생자였던 계파가 세력을 찾았다고 한다. 결국 남북간의 정치 갈등이 진도 X리 친족내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고향을 등져던 부역자가 고향에 돌아오길 희망했지만 고향 측의 반대로 인근마을에 살았다고 하니 친족간의 갈등이 현재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장 영암의 모스크바 한 양반 마을의 시련

영암의 영보는 전주최씨와 거창신씨의 동성마을이었다. 영보의 경우 일찍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받아들여져 1930년대에 영암공산주의자협회가 만들어졌고 소작이전에 따른 불합리한 소작에 항의한 영보농민시위 등이 일어났다. 영보 마을 역시 해방후 우익, 경찰에 의해 곤란을 겪기는 했지만 전쟁이 터지면서 자연스럽게 인민위원들을 조직하는 등 활동을 한다. 그리고 인민군이 후퇴하자 영암의 모스크바라 불리는 영보사람들은 화를 피해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근처로 피란을 간다. 상황이 개선되면서 전원자수하는 특이한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해방후 인민군 점령시 일부 처형된 이들이 있긴 하였지만 근처 마을 구림과는 달리 학살은 없었다. 이는 일찍 부터 사회주의를 받아들였고 양성씨간의 유대관계가 좋았고 또한 농민시위에서 보여준 지도층 지도력에 양반,평민간의 관계 또한 좋았기 때문이다. 반면 근처 구림마을에서는 좌익에 의한 교회방화학살사건으로 우익 쪽 주민 32명을 학살하였고, 반대로 경찰이 진입하면서 마을주민에게 사격을 가해 78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구림마을의 경우는 보수적인 양반동네라 평민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했고 이에 대한 보복이 일어난 것인데 이에 반해 영보는 마을 전체의 공동체적 결속력이 강했다. 그렇더라도 사회주의라는 딱지에 의해 영보의 두 가문은 세력이 많이 줄어들었다.

 

3장 양반마을과 평민마을의 충돌, 부여군의 두 동족마을

부여군에서는 두 동족마을이 있었다. 진주 강씨의 A마을은 민촌(평민)마을이었고 B마을은 세도정치로 유명했던 풍양조씨의 반촌(양반)마을이었다. 조선이 멸망하면서 형식적으로 신분제는 없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양반 출신들은 평민들을 하대하였고 조선시대 마냥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경우가 많았다. 두 종족마을에서도 그런 관계는 지속되어 B마을에서 A마을을 하대하였다고 한다. 마을의 성격만큼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A마을은 사회주의 경향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온데 반해 B마을의 경우는 일찍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등 보수적인 색체가 강했다고 한다. 이들 사이의 갈등을 폭발시킨 것 역시 보도연맹 사건인데 보도연맹 사건에 A마을 4명이 처형당하게 된다. 이후 인민군이 들어오자 A마을이 위상이 강해졌고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자 경찰과 A마을은 B마을을 포위, 연행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A마을은 B마을의 물건, 집기 등을 마음대로 가져가고 B마을 사람들이 돌아온 후에도 이런 약탈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런 갈등관계는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는데 홍수에 대한 두 마을의 필요에 의해 두마을은 화해를 하게 된다. 게다가 학교에 가기 위한 나루터가 B마을에 있어 A마을의 현실적 필요도 관계 개선의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두 마을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갈등이 증폭이 가져올 폐해를 깨달았다.

 

4장 땅과 종교를 둘러싼 충돌, 당진군 합덕면 사람들

당진의 합덕면은 특이한 갈등 양상을 띠고 있다. 종교-사상의 갈등, 성씨간의 갈등, 지주-마름간의 갈등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지주중에는 지방에 거주하는 재지주와 거주하지 않는 부재지주로 나뉘는데 부재지주의 경우 마름(소작농중에서 세우기도 함)이라는 대리인을 통해 소작을 운영한다. 재지주의 경우 유연하게 소작 정책을 펼치거나 덕을 배풀기도 하는데 마름의 경우 소작권이라는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착취를 일삼았다. 이에 마름과의 갈등이 굉장히 컸다. 합덕면의 경우는 종교 갈등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천주교에서 H마을의 상당한 토지를 사들였는데 이를 소작을 하였다. H마을은 그래서 상대적으로 편한 조건에서 소작을 할 수 있었고 우익청년회가 조직되는 등 종교의 영향과 더불어 보수화되었다. 반면 주변 Y마을의 경우는 종교-사상적으로 틀렸고 농수문제로 H마을과 갈등관계에 있었다. 인민군이 내려오자 H마을을 습격해 신부 등을 압송하고(후에 처형됨) 주민 8명을 처형하였다. 하지만 상황이 바뀌자 Y마을 청년 모두가 H마을 청년단에 끌려가 취조를 당해야 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처형되었다.

합덕면에서는 이와 더불어 성씨간 갈등도 나타났다. z마을에서는 해주 오씨, 의령 남씨, 선산 김씨 등 세 성씨가 주류를 이루고 살았는데 이 중 오씨가 영향력이 가장 약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남씨 일가의 남정갑은 면서기를 하며 징병,징용을 담당했고, 남정갑의 아버지는 일본인 부재지주의 마름노릇을 했는데 해방과 동시에 남정갑의 아버지는 마을 주민들에 의해 조리돌리기를 당했다. 서울로 피신한 남정갑 부자는 미군정과 함께 돌아와 조리돌리기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오씨 가문은 풍비박산이 난다. 인민군이 진주하자 세상이 바뀌어 남정갑 등 남씨 일가를 처형하게 되는데 이에 오씨 일가 및 남씨일가의 머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이 진주하면서 상황이 바뀌어 선별된 부역자가족은 모두 쫓겨 나게 된다.

 

5장 두 명문 양반가의 충돌, 금산군 부리면의 비극

금산군 부리면은 해평 길씨와 남원 양씨 두 양반 가문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1931년 부터 1960년까지 단 한명을 제외하고 모두 길씨와 양씨 중에서 면장이 배출되었다. 그리고 두 성씨는 혼인으로 돈독한 관계를 이루어왔다. 일제시대 길씨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많이 나왔는데 반면 양씨는 대체로 우익편에 있었다. 특히 길씨 중에서 주류는 우익에 길씨 비주류와 양씨는 우익에 대체로 섰었다. 보도연맹과 인민군 점령시 길씨, 양씨 일가 중에서 처형자가 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마을에 비하면 그리 큰 사건은 아니었고, 대규모 학살도 없었다. 이는 두 가문이 사돈으로 돈독하게 묶여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관계에 금이 간 사건이 발생한다. 길씨를 중심으로 한 좌익들은 인민군 후퇴 후 근처에서 빨치산이 되는데 1950년 11월 2일 우익을 중심으로 한 결의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빨치산이 결의대회장을 습격해 78명을 학살하는 일이 발생한다. 우익을 대변했던 양씨집안과 비주류 길씨 집안의 많은 이들이 학살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길씨와 양씨간의 관계는 깨어졌고, 이후 길씨는 마을에서 세력이 급격히 축소된다.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에서 나오는 질문은 바로 '국가는 무엇했냐'이다. 실제 해방이후 신탁통치를 거치면서 형식적으로 남과북 각각에서 각 세력(이승만과 김일성)이 장악했지만 실제 마을 공동체까지 장악했느냐에 이르러서는 의문이 따른다. 마을에서는 아직까지 마을 내부의 권력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을 치루면서 국가는 마을내부의 갈등을 이용 혹은 방치하여 마을 내부까지 정치적 안정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남과 북 각각 인민위원회와 우익청년단을 이용해 마을을 단속하고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마을의 문제 역시 제대로 된 국가의 부재에 의해 나타난 반작용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생각조차 용납되기 힘들다. '평온하던 남한에 적화야욕의 북괴가 침략했다'라는 한국전쟁의 패러다임 속에서 이런 마을내부에서의 전쟁은 논의의 토대를 갖기가 힘들다.

이제 한국전쟁 60년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세대의 거의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다. 전쟁을 경험한 세대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기억이 사라지기 전 이런 작업이 보다 활발히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래야 겁 없이 전쟁을 이용하려는 세력들(현 정권과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언론)의 행태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될 것이다. 전쟁을 이용해 정치적 안정을 찾으려는 사람들 생각에 국민이라는 자신들의 정치적 도구일 뿐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 쓴 한국전쟁과 전후 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 - 구술로 풀어쓴 한국전쟁과 전후사회
이임하 지음 / 책과함께 펴냄/ 18,000원
 
한국전쟁은 공식적인 기억만을 강요한다. '평화롭던 한반도 적화야욕에 가득찬 북괴가 침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사실이 아니지만(38선 근처는 상시 전투중이었고 이승만은 북진통일 주장과 함께 북한이 남침을 어느정도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강요는 전후사회를 규정짓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쟁의 다른 부분 후방의 삶이나 민간인에 대한 문제는 거론 대상이 되어서는 안되었다. 전쟁미망인, 한국현대사의 침묵을 깨다는 역사속에서 여성의 문제를 다뤄온 이임하가 한국전쟁의 미망인들에 대한 구술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과 한국사회를 엿보는 작업이다.

 

지은이는 전쟁미망인을 크게 세가지로 분류해 접근하고 있다. 군경미망인, 피학살자미망인 그리고 상이군인미망인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는 과정은 미망인의 정치적 입장과도 연관되어 있다. 군경미망인의 경우 쉽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반면 피학살자미망인의 경우 처음에는 주저한다는 것이다. 피학살자란 남한 군경에 의해 학살된 이들을 말하는데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의 정책상 이들은 강요된 침묵과 일상화된 차별을 받아들여야 했음을 알려준다.

 

미망인이 된 과정을 보면 군경미망인들은 전쟁 중 제2국민병등으로 강제징집을 당하고 남편을 잃은 경우이다. 한국전쟁을 다룬 책들을 보면 우리가 영화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국충정의 마음으로 입대한 사람보다는 강제로 끌려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가계의 형편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졌는데 색출이나 회유에 의한 경우도 상당했다. 피학살자미망인은 말 그대로 보도연맹 학살 등과 연관이 깊다. 갑자기 불러내서는 한군데 모인 남편이 학살을 당한 경우다. 상이군인 미망인의 경우는 한국전쟁에서 신체적 장애를 입은 이들과 결혼한 경우인데 이후 오랜 치료과정을 겪거나 사망하는 경우이다. 특히 상이군인과의 결혼은 애국적인 행동으로 칭송받았는데 이들과 결혼한 여성들은 대부분 상이군인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결혼했다고 한다. 상이군인들의 경우 신체적 장애 뿐 아니라 전쟁에 의한 정신적 질병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상이군인미망인의 삶은 그 자체로 공포였다.

 

미망인들의 삶은 전후사회의 변화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대부분이 스스로 생계를 이어나가야 하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적 가부장사회를 무너뜨리는 역할을 한다. 생계를 위한 억척스러움이 지금이 한국의 아줌마를 형성하게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미망인들은 대체로 농사, 바느질, 행상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는데 최소한의 자본으로 가능했던 행상이 이 때 급격히 증가했다고 한다. 사실 여성이 시장에 가는 행위자체가 흔하지 않던 시절 이들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적잖은 충격이었다.

 

미망인들은 개인적 삶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는 단순히 남편을 잃어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상식적인 삶 외에 가족(시댁)간의 관계가 더 큰 고통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국가적 침묵은 곧 시댁에 의한 감시와 통제로 나타난다. 생계마저 책임져야 할 이들에게 시집살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감시와 통제는 삶 자체를 옭아맨다. 문제는 이런 시댁에서의 삶 또한 차별의 연속이었다는 점이다. 게다가 시댁에서는 이들에 대한 외모등에 대한 통제가 심각했는데 일제시대 때 부터 이어오던 몸빼라 불리는 옷을 강요해 이들에게서 여성성을 빼앗고자 했다. 이런 억압속에서 헤쳐나오는 길은 분가였는데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부터 자식의 교육을 내세워 분가에 성공하곤 했는데 분가후에야 이들은 비로소 가족이라는 억압에서 벗어났다. 이 과정에서도 사망남편에게 나온 보상금등은 모두 시댁차지였다. 물론 군경미망인의 경우와 다르게 피학살자미망인의 경우는 조금 다른 행태를 보인경우도 있다. 피학살이라는 고통을 시부모와 미망인 당사자가 공유하며 이겨 나간 경우인데 이는 피학살이라는 사실이 사회가 가족전체에 던지는 차별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전쟁미망인의 분가는 또 다른 문제를 가져왔다. 상경후 여성이라는 약점때문에 사기를 당하고 돈을 떼이는 일이 허다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여성 혼자 생계를 책임진다는 것에 대해 색안경을 끼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역할을 했다. 그래서 전쟁미망인들에게는 억척스러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였다. 그러나 사회적 조건 역시 전쟁미망인들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불과 얼마전까지도 지속되었던 호주제 덕에 구조적으로 재혼이 쉽지 않았고(호주, 대표적으로는 시아버지가 호적을 떼어주지 않는) 재산에 대한 권리도 호주가 가지고 있어 사별전 남편이 재산에 대한 권리를 행사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부동산 계약 등에서 제약을 받아 구조적인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피학살자 미망인의 경우에는 여기에 더해 연좌제라는 틀안에 갖혀 죄인처럼 살아야 했다. 본인의 취업 뿐만 아니라 자식의 취업에 까지 제한을 받아 평생을 그 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이지 않게 이들을 옭아맨 것은 국가에 의한 침묵 강요이다. 1956년 현충일을 만들어 전쟁미망인들에게 추도식에 참석케 했지만 정작 현충일은 손님들, 정부당국자들을 위한 행사였다. 화환, 군례, 추도사는 그들을 위한 행사였을 뿐 이었다. 박정희 시대에 들어서는 호국신령 등으로 전사자들을 치켜 세우고 전사자들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강한 국방과 산업화를 이야기했다. 게다가 유가족이라는 광범위한 용어를 사용해 더 이상 전쟁미망인들이 설 자리가 없게 되었다. 
원호보훈법 등의 제정으로 전쟁미망인들에 대한 보조가 시작되었다. 금전적인 도움과 취업알선이었다. 국가보훈대상에 대한 취업을 법률로 정한 것도 이때 부터이다. 그러나 한달에 몇 만원도 되지 않는 보조와 보훈대상자 취업자들에 대한 차별로 이런 국가 정책은 정책으로만 필요했을 뿐 실제 전쟁미망인과 그의 가족들을 고려하지는 않았다.
또한 분가한 전쟁미망인들이 상경하고 이들이 집단 거주지들이 형성되면서 이는 사회적인 문제가 된다. 가진것 없고 생존을 위해 남은 것이라고는 악다구니만 있던 이들에 대한 언론은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추었다. 이들은 1970년대 재개발등의 문제와도 결부되는 등 한국사회 현대사의 문제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이 책은 구술사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전쟁미망인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정리, 구성한 것이다. 구술사라는 형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전쟁미망인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해석 및 보충설명이 이루어지는데 전쟁미망인들의 이야기가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외면하고 싶기도 하다. 항상 현실은 현실같지가 않다. 읽는 내내 불편한 마음으로 한장 한장 넘길 수 밖에 없었다.
 
"전쟁의 원인, 과정, 결과보다 전쟁을 한 사람들 그리고 전쟁터에 안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전쟁의승패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전쟁을 겪은 사람들의 상처와 고통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전쟁미망인, 전쟁고아, 상이군인, 참천군인, 피할살자 유가족의 이야기는 전사에는 기록되지 않는 전쟁 이야기와 전후 사회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이들 가운데 전쟁미망인은 전쟁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면서 전쟁 경험, 국가 폭력, 트라우마, 젠더, 가족, 침묵 따위의 문제를 제기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쟁미망인의 구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녀들의 구술이 가치가 있는 것은 지금까지 그녀들이 말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위의 문제들(범주)를 제기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범주들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으며 우리사회를 구성해왔다."(378~37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쟁과 사회 -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김동춘 지음 / 돌베개 / 200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한국전쟁 50주년을 기념해 출간되었다가 개정된 책이다. 김동춘의 전쟁과사회는 그 동안의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연구되어온 한국전쟁을 사회학적 차원에서 연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연대기적 구성보다는 피난, 점령, 학살이라는 주제로 권력을 가졌던 세력과 일반 대중들과의 입장을 보여준다. 그런면에서 일반 대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저자는 한국전쟁을 국가중심적 시각에서 벗어나 사회구성원의 차별, 고통과 희생의 차원에서 접근하려고 하고 있다. 현대의 고전이나 명저 등에 이름을 올리는 것을 보면 전쟁과사회가 기존 연구의 한계를 벗어났다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에서 전투과정외의 것을 따져본다면 피난이 먼저 떠오른다. 북한의 압제를 피해 피난을 떠나야 했던 무리들, 그 과정에서 수 많이 이산가족들이 발생했다. 그러나 저자는 이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기존의 피난이 1.4후퇴때의 피난에만 초점이 맞춰졌었는데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의 서울 점령과정에서의 피난이 있었다. 이를 1차 피난, 1.4후퇴때의 피난을 2차 피난이라 할 수 있다. 1차 피난 때는 정부의 거짓말(서울을 떠나지 말라는)도 있었지만 일반 대중들은 서울을 떠나지 않았다. 이미 지식인들은 이승만정권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1950년 총선에서 이승만세력의 참패는 일반 대중 마저도 이승만정권에서 멀어졌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일반 대중에게 북한이나 남한이나 별 차이를 못 느꼈던 것이다.그래서 1차 피난은 국가공직자, 친일파, 월남한 이북출신, 미군가족이 주류였다. 불과 며칠사이에 일어난. 서울 이외의 지역에서도 1차 피난을 떠나는 이들이 많지 않았는데 농번기라는 특성에 농민들이 쉽사리 땅을 떠나기가 쉽지 않았다.

2차 피난의 경우는 전반적으로 일어난 피난이었다. 그러나 주된 이유는 미국의 공습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다. 미군의 공습이 군대 이외 마을지역에도 무차별적인 공습을 감행했기 때문에 대중들은 그 공습을 피해 피난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부의 말을 믿고 1차 피난을 가지 않았던 이들에 대한 남한과 보수우익(친일파로 이루어진)에 의해 잠재적인 부역자 혹은 북한친양적으로 찍히는 상황은 피난을 갈 수 밖에 없는 배경을 만들어냈다. 저자는 1차 피난을 정치피난, 2차 피난을 생존피난이라고 규정짓는다.

 

한국전쟁에서 남,북한 서로 상대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한다. 먼저 남한의 대부분을 점령했던 북한은 대중참여 인민주의를 펼치지만 형식만 있었을 뿐 실질적인 영향력은 없었다. 점령지에서 인민위원들을 선출하는 등 나름 대중이 참여하지만 일본제국주의, 미국제국주의, 자본가 등에 대한 재판은 증오와 매국노 처벌이라는 도덕주의와 결합해 반대편에 대한 숙청으로 나타난다. 이로 인해 전쟁초기 북한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던 자영농, 소규모 자본가들이 등을 돌리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다시 남한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면서 상황은 반대가 된다. 먼저 피난하지 않은 이들에 대한 분류작업이 시작된다. 일단 부역자로 몰리게 되면 총살에서 부터 구타 등 인간 이하의 처우를 감내해야만 했다. 이는 일반 대중뿐 아니라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까지 해당된다. 1950년 5월 선거에서 참패했던 이승만 정권은 피난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제거와 부산 국회파동 등으로 정적들을 일거에 제거할 기회를 갖게 된다. 게다가 부역자 처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우익청년들의 행동은 남한 정부의 눈가림속에 무소불위의 힘을 갖게된다. 그리고 친일파들은 이를 계기로 자신의 친일 행적을 알고 있는 이들을 부역자로 몰아 처단하며 권력을 되찾는다. 이 역시 이를 방조한 정부의 역할도 한 몫 했다.

군 점령지에서 일어난 또 하나의 작업은 바로 징집이다. 젊은이들은 북이건 남이건 징집을 당하지 않기 위해 숨거나 산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래서 전쟁초기 징집이 되는 운이 나쁜 경우에 해당했다. 북한 점령시 초기에는 의용군 징집이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CIA의정보에서는 서울 학생의 절반이 의용군에 가담했다고 하는데 이는 1950년대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감정이 어땠는지 보여주는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북한은 점령지에서 강제징집 및 물자 동원정책을 실시하는데 이는 북한이 애초에 의도했던 토지개혁을 통한 민중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는 결국 지지층이 되어야 할 노동자, 농민들마저 등을 돌리게 한다. 남한 역시 방위군이라는 이름으로 징집을 하는데 자위대라는 이름의 우익청년들은 지역내에서 부역자 처단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이 때 부터도 남한 군대내 부정부패가 심각했는데 방위군에 대한 보급품을 착복하여 수많은 방위군이 부상과 아사로 사망하였다. 이런 징집은 우리가 근래 상영되는 영화 혹은 드라마와는 상충되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참전을 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참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학살이다. 한국전쟁에서의 학살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낯설다. 나치에 의한 유태인 학살 부터 최근의 동티모르학살까지 학살은 외국에서나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러나 노근리 사건에서 밝혀진바와 같이 한국전쟁당시 남한과 북한에서 이루어진 학살이 많았다. 저자는 학살을 3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는 작전으로서의 학살이다. 제주 4.3사건, 거창양민학살 사건 등이 이에 해당하는데,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학살을 말한다. 여기에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수뇌부의 묵인하에 이루어지는 학살 또한 작전으로서의 학살에 해당한다고 봐야 한다. 북한을 도왔다고 의심되는 지역을 학살하는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특히 미공군에 의한 전북 익산 및 경남 창녕 등에 대한 폭격은 인민군이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인 마을에 폭격을 가한 경우다. 둘째는 처형으로서의 학살이다. 인민군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인민군에 동조했던 이들에 대한 처형이 바로 이에 해당한다. 이는 전쟁초기부터 발생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마자 각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좌익 인사들에 대한 처형을 단행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인민군도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우익 포로들을 처형하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우익청년들에 의한 자의적인 처형이 많았다. 무심결에 동무라고 말했다가는 처형되었던 시절이었는데 국가권력이 생명의 위기에 빠진 민중을 노리갯감으로 여겨 보복한 반윤리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셋째는 사적인 보복으로서의 학살이다. 국가의 명령이나 국가로부터 받은 권리를 바탕이 아닌 개인, 가족간의 원한관계에 의한 학살이다. 이는 한국전쟁이 서로의 영토를 거의 점령한 특이한 경우이다 보니 한 마을에서 어떤 가족은 북에 어떤 가족은 남에 협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처단하는 일이 많이 발생했다.

그러나 이런 학살은 전쟁이 지난 50년 동안 묻혀졌었다. 특히 전쟁 당사자인 국내에서는 이런 학살에 대해 공식 언급은 불가능하였다. 그나마 AP 통신을 통해 노근리사건이 밝혀지면서 잊혀졌던 학살들이 하나 둘 거론되고 있지만 정부의 의지가 없는 한 제대로 된 조사와 그로 인한 역사적 화해는 멀어 보인다. 재미있는 사실 중에 하나는 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상당히 많은데도 불구하고 그간 인민군의 학살에 대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저자는 인민군의 학살을 조사하다가 국군, 미군 및 우익에 의한 학살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추정하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되었지만 한국전쟁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가 국내에서 나온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전쟁의 발발에 초점을 맞췄던 기존의 연구에서 벗어난 점 그리고 사회적으로 접근한 점에서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한국전쟁을 통해 발생한 국가억압체제가 오늘날의 한국사회 가정, 학교, 사회에서 벌어지는 차별과 억압으로 폭력이 구조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는 인민군 편, 국군이 올라왔을 때는 국군 편을 들 수 밖에 없었던 사회적 구조가 자유당 시절엔 자유당을 민정당 시절엔 민정당을 찍는 순응주의적 태도로 나타났다는 점에도 주목하고 있다. 학살의 경우도 현재화되고 있는데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일어난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한국전쟁이 현재까지 미치는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 분향소를 폭력적으로 철거했던 서정갑 등 보수주의자들의 행태는 점령 당시 남한에서 있었던 모습과 유사해보이고 북한에 대한 압력을 위해 집회를 하는 그들의 뒤에 일본 극우파 인사와 자본이 참여했다는 사실은 한국전쟁의 왜곡된 사회구조가 지금까지 진행된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은 단순히 남과 북의 전쟁이 아니었다. 한반도로만 국한되어 보더라도 남과 북 그리고 남한,북한내에서의 좌익과 우익의 전쟁이었고 한 마을에서 가족과 가족의 전쟁이었다. 그만큼 복잡했는데 이는 결국 남과 북 서로의 국가주의라는 틀안에서 소중한 목숨이 하찮게 여겨졌다. 이런 국가주의를 넘어서야 제대로 한국전쟁을 바라볼 수 있고 되짚어 볼 수 있고 나아가 국가주의가 갖는 폐단을 공감해 현재와 같이 준전시상태가 지속되는 소모적 환경을 극복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왜곡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하고 심도있는 한국전쟁 연구와 한국전쟁을 일반 대중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의 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 - 한국, 동서독, 프랑스, 폴란드, 헝가리…
역사문제연구소.포츠담현대사연구센터 공동기획 / 역사비평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전쟁의 당사자라는 사실은 생각에서도 많은 제약이 따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전후 약 2세대가 지나면서 한국전쟁에 객관적인 시선을 담을 수 있게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실제의 모습에 대한 말할 수 없었던 기억마저 사라지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이렇게 한국전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자 한 책이고 기억해야 할 점을 짚고 있다.
 
한국전쟁은 남한과 북한의 한반도내에서의 전투라는 내전의 성격보다 훨씬 크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소련과 미국이 깊숙히 개입되어 있었고 중국과 서구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했던 국제전의 성격마저 갖고 있다. 전쟁의 발발과 과정 그리고 전후에 있어 남북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영향을 끼쳤던 중요한 사건이다. 2차대전 종전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세력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세력으로 나뉘어 체제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의 공산화정책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대해 군사적 대결도 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소련은 1946년 이란사태와 1948년 베를린봉쇄건을 통해 계속 미국을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일어난 애치슨 선언 등에서 나타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 남북한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는 의견도 있다. 중심부 즉, 미국과 소련의 대결을 주변부 한반도에서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무력대결을 통해 공산세력에 대한 저지의지를 강하게 보여준 셈이고 소련은 공산화전략에는 차질을 입었지만 중국의 확실한 등장과 더불어 세계를 양분할 수 있는 세력임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이를 통해 구소련의 해체 전까지 있었던 냉전체제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엄청난 군비를 통한 군사적 대립에 해당국가에 대한 통제가 심화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남북한이라는 대리전을 통해 서로의 힘을 확인하고 이는 제3차 세계대전으로의 발전을 막았던 계기도 된다.
 
남북한 내부적으로도 한국전쟁은 체제안정화(?)에 큰 역할을 한다. 남한이나 북한모두 불안정하게 정권을 잡았던 이승만, 김일성에게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반공이라는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지게 되었고 김일성 역시 당내 일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국전쟁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체제 안정화에도 큰 기여를 한다. 서로 상대방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면서 산업기반을 모두 파괴해버렸기 때문에 남북한 모두 새로운 경제체제를 도입할 수 있게 된다. 더군다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시범적 대립장소가 되면서 남북한 모두 상당한 경제원조를 받게 된다. 국가재정(수입)이 남한의 경우 1959년 52%, 북한의 경우 1955년 28%가 해외 원조가 차지하게 되었다. 농업중심의 남한의 경우 전근대적 유산을 청산하고 자본주의체제를 급속하게 발전시킬 토대를 형성했고, 상업자본이 발달했던 북한은 한국전쟁을 통해 체제의 반대하는 자본세력들이 제거되었기에 사회주의 건설을 촉진할 수 있게 되었다.
남한사회를 규정하던 헌법의 변화는 남한에서 더 강하게 드러났는데 균등경제의 정신을 담고 있던 1948년 건국헌법이 1954년에 이르러 시장경제 중심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이다. 즉, 남한은 1948년 건국보다는 1954년의 체제가 이후의 체제를 형성했다. 사실 균등경제는 남한 내부의 지주, 소작의 문제를 해결하고 국가중심의 재건을 원했던 이승만 정부의 생각이었지만, 미국은 미국의 자유로운 투자를 위해 시장경제를 강력히 요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미국의 원조가 절실했던 이승만정부는 균등경제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이는 현재의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가 형성되는 기틀이 되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삼성, 현대가 모두 이 때 시작된 기업이라는 점에서도 현재의 남한 자본주의는 전부자본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남북한에 끼친 영향 중에 재미있는 사실중에 하나는 분단국가였던 독일과의 관계이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연대에 따라 비자발적인 지원을 북한에 하게 되는데 동독 기술자의 파견과 북한대학생 유학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동독기술자의 파견은 동독기술자들의 식민주의적 행태와 그런 행태에 대해 좋은 인식을 하지 않았던 북한과 북한내부사정에 의해 실패로 돌아간다. 북한의 대학생파견의 경우도 귀환한 유학생들이 전문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곳으로 가지 못하고 몇 몇 유학생들은 자본주의세계로의 탈출과 유학생을 따라온 동독여성들의 북한에서의 부적응 등으로 성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자극받은 남한은 서독에 견습생 파견 등 강한 요구를 하게 되는데 이에 따른 것이 바로 파독간호사와 광부이다. 그러나 독일로 파견된 광부들이 실제 광부가 아니었다는 점과 서독 역시 당시 열악한 광산업을 대체하는 효과를 얻었기 때문에 남한은 외화획득, 서독은 노동시장 안정이라는 서로의 이해관계를 충족시켰던 관계였을 뿐이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도 파독간호사와 광부들이 서독에 이민을 신청하는 등 예상외의 결과에 직면하게 되며 모순에 빠진다.
한국전쟁 과정 역시 동서독에 영향을 끼쳤다. 동서독 양측이 한국전쟁을 자신들의 체제를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동독의 경우는 미국제국주의에 대한 경고로 서독은 스탈린 공산주의에 대한 경고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내부적으로는 이런 경고가 큰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동독의 경우 전쟁위험이 개인주의적인 방어형태로 나타났고 서독 역시 전비증가에 대한 우려로 나타났다. 약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한국전쟁을 체제경쟁과 무력통일이 갖는 위험성에 대한 교훈을 갖게 되었고 느슨한 대화의 끈을 계속하게 된 것이다.
 
전후 남한사회는 한국전쟁을 기억하는 사회가 되었다. 반공의식에 의한 자기통제 매커니즘이 발동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되었는다. 이런 반공규율사회를 지속시키위해서는 지속적인 전쟁의 기억이 필요했다. 그리고 여기에는 국가의 공식기억만이 필요했다. '잊지말자 6.25','때려잡자 공산당'이라는 표어아래 한국전쟁에 대한 어떤 논의도 설자리를 잃어버렸다. 한국전쟁 직후 이를 위한 전쟁기념물 충혼탑 등 건립이 줄을 이었고 박정희 정권 후반, 전두환 정권 초반인 1977년 부터 1981년까지 한국전쟁 전적비 등이 수없이 세워진다. 전쟁에 대한 공포의 기억을 강화해 안보체제 정당성을 확보해 강도 높은 사회통제를 위해서였다. 이런 공식적인 강제 기억의 정점은 1994년 문을 연 전쟁기념관이다. 1988년 계획된 전쟁기념관은 전후세대들의 6.25에 대한 인식이 약하고 6.25를 경험하지 못한 세대의 6.25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한 반공안보관 정립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국가에 의한 강압된 공식기억은 90년대 후반 들어 노근리사건 등 비공식기억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2MB 정부 이후 반공의 목소리가 다시금 커지고 있다. 특히 보수세력에 의해 진행되는 이런 과거로의 회귀로의 뒤에는 일본 극우세력과의 관계가 의심받을 정도여서 한국전쟁에 대한 논의를 다시금 후퇴시키고 있다.
 
한국전쟁에 대한 11가지 시선은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전쟁의 전후 과정 및 현재까지의 영속성을 잘 살피고 있다. 당사자의 경험에 의해 제한된 논의의 경계를 풀어헤침으로 앞으로 더 다양한 연구결과가 나올 수 있을 희망도 갖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