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에 여름휴가 특집 책이 실렸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공포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추리소설은 꽤 읽었다. 초등학교 시절 컴퓨터가 등장하기 전 모든 아이들이 다니던 곳이 있다. 바로 주산학원. 나는 매일 빠짐없이 학원에 갔는데 주산 보다는 학원 상담실이던가에 비치되었던 셜록 홈즈 시리즈 때문이었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중학교때는 괴도 루팡을 섭렵했고, 007에 이어 여명의 눈동자로 유명한 김성종의 작품 중 도서관에 있던 모든 책을 읽었다. 앞으로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공포, 추리소설 특집을 정리해본다. 추리소설은 모르겠지만, 공포영화는 아무래도 손도 뻗지 않을까 싶다. 무서우니까.
"일본 드라마 <호타루의 빛>에서는 퇴근 후 시원한 맥주 한 잔과 툇마루, 그 마루에 같이 앉을 사람 한 명만 있다면 여름은 반딧불처럼 반짝반짝 행복한 계절이 된다고 한다. 하지만 툇마루나 옆에 앉을 사람 한 명 없다 해도 장르소설 독자들은 여름엔 울지 않는다. 추리소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와 딴 데 신경 쓸 틈이 없으니까. 해거름에 문틈으로 들어오는 바람 맞으며, 비 오는 밤에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추리평론가 박현주씨와 소설가 이종호씨가 올여름 다양한 취향을 충족시켜줄 추리소설과 공포소설들을 골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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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작가 루이즈 페니의 <스틸 라이프>(피니스아프리카에)는 정통 추리소설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전원의 가을 풍광을 담아 아기자기한 재미를 보여준다. 이 소설은 퀘벡주의 스리파인즈 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비밀을 감춘 소박파 회화를 소재로 하여 인간의 선의와 악의를 들여다본다. 영어권 추리소설의 주요 작품상을 휩쓴 소설 시리즈의 첫 작품이기도 하다.
사건 수사 분야에서 여성의 불리함을 토로하면서도 박력 있는 서술을 보여주는 추리소설들도 있다. 하드보일드 탐정 무라노 미로가 스너프 필름의 여배우를 찾아 나선다는 내용인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기리노 나쓰오, 비채)과 수사 전문 기자 안니카 벵트손이 올림픽 경기장 폭파범을 추적하는 과정을 그린 <폭파범>(리사 마르클룬드, 황금가지)이 대표적이다. 일본과 스웨덴이라는 문화도 다르고 홀로된 여자와 가정주부라는 개인적 배경도 상이하지만 사회인으로서 여성이 느끼는 쓸쓸함은 유사하다.
<완전 연애>(마키 사쓰지, 문학동네)는 케이블 채널의 데이트쇼 같은 제목과는 달리 되레 남자 독자들이 좋아할 수도 있는 추리소설이다. 언뜻 보기에는 어릴 적 만난 한 여인에게 평생을 바치는 한 남자의 지고지순하면서도 어리석은 애정을 묘사한 로맨스이지만 여기에 불가능한 원거리 공간이동 살인사건이 섞여서 기묘한 추리소설이 탄생했다. 또한 페미니스트를 가장한 마초 주인공의 가장 좋은 견본인 007 시리즈가 재출간되어 강한 남자를 원하는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이언 플레밍, 웅진 뿔)에서 제임스 본드의 대사와 행동을 보면 시쳇말로 “손발이 오그라들다” 못해 저릴 정도지만 007의 뻔뻔한 매력 덕분에 책장은 휙휙 넘어간다.
지하철에서 미국 드라마를 보는 대신 책을 읽고 싶다면 유럽 추리소설에 눈을 돌려 봄 직하다. 상반기 베스트셀러인 독일 추리소설 <백설 공주에게 죽음을>(넬레 노이하우스, 북로드)은 오래전의 미제 사건을 파헤치는 내용의 미국 드라마 <콜드 케이스>와 성격이 유사하다. 한창 예쁠 나이에 죽은 소녀들이 있다. 그 죽음으로 인생이 바뀐 남자가 사건 발생 후 10년 뒤에 진실을 찾아 나선다는 설정은 새롭진 않지만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대칭적으로 촘촘히 배열하여 긴장감을 높였다. <로앤오더: SVU (성범죄 전담반)>의 팬들에겐 이탈리아 추리소설인 <속삭이는 자>(도나토 카리시, 시공사)가 적격이다. 어느 날 발견된 여섯 개의 왼팔. 그중 다섯 개는 실종된 여자아이들의 팔이었고 수사관들은 아직 살아 있을지도 모르는 여섯 번째 아이를 찾기 위해 정체 모를 연쇄살인범과 두뇌 게임을 벌인다. 실제 범죄 심리학자였던 작가는 인간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악과 그를 부추기는 속삭임에 주목한다.
한국 추리소설로는 ‘어둠의 변호사’ 시리즈 3탄인 <정신 자살>(도진기, 들녘)이 있다. 삶이 못 견딜 정도로 괴로운 이들에게 정신만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상한 연구소와 집을 나간 아내를 찾는 남편, 4년 전 일어난 등반 사고 등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사건들을 유기적으로 결합한 소설이다. 현직 판사로 재직중인 작가는 현실적인 법률 사례들을 주 사건에 엮어가며 서사를 구축했다. 결말 부분의 과잉 요소가 아쉽지만 시리즈물로서 개성이 쌓였다.
추리소설을 지적인 유희로 여기는 독자들에게 어울리는 두 작품이 있다. <추상오단장>(요네자와 호노부, 북홀릭)은 책에 숨겨진 비밀을 추적하는 비블리오 미스터리로서, 다섯 편의 단편과 그 결말이 되는 다섯 개 문장의 짝을 맞추면서 과거 사건의 진상을 찾아낸다. <죽음본능>(제드 러벤펠드, 현대문학)은 프로이트의 후기 사상인 죽음본능에 의거하여 1920년의 월가 폭탄 테러 사건을 해결하고 살인 납치 사건의 범인을 찾는 스릴러이다. 이 책은 야심만만하게도 테러 수사, 추격전과 로맨스, 추리, 정치와 심리학, 사실과 허구 등 대중소설의 모든 요소를 집어넣었다.
도둑과 사기꾼들이 주인공이 되어 벌이는 좌충우돌 모험담을 일컫는 케이퍼 소설 계열의 작품으로는 <마리아비틀>(이사카 고타로, 21세기북스)이 있다. 도쿄에서 모리오카까지 가는 신칸센 열차에서 돈 가방을 두고 벌어지는 킬러들의 대결을 속도감 있게 그린 오락적 소설이다. 전작인<골든 슬럼버>와 비교하면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감상은 약하지만 결말은 여전히 여운이 있다.
여름의 문제는 너무 빠르게 지난다는 것이다. 방학은 짧고, 휴가는 더욱 짧고, 추리소설 독자들에게는 더더욱 짧다. 이미 나온 소설들과 앞으로 쏟아져 나올 책들을 읽으려면 한 계절로 충분할까. 미처 다 오지 않은 여름이 벌써부터 아쉬워진다. 박현주/추리평론가
공포문학은 독자 성향에 따라 작품의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나뉜다. 연쇄살인마가 등장하거나 인간의 어두운 본성을 탐구하는 현실적 공포를 선호하는 독자가 있는가 하면 미지의 공포나 원혼 같은 초자연적 공포만을 찾는 독자도 있다.
현실적 공포를 다룬 대표소설로는 일본공포문학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한 기시 유스케의 <검은 집>(창해)이 있다. 사이코 연쇄살인마를 다룬 소설로 추리기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미저리> 이후 사이코 캐릭터를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읽는 내내 오싹한 공포를 선사한다.
공포를 말하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스티븐 킹이다. 얼마 전 출간된 그의 신작 <언더 더 돔>(황금가지)은 그가 왜 오랜 세월 ‘호러 킹’으로 군림하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투명한 돔이 생기면서 외부와 단절된 한 마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악이 어디에 숨어 있고 어떻게 창궐해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는지 너무나 현실적인 묘사로 보여주고 있다.
스티븐 킹의 <언더 더 돔>처럼 인류 종말의 어두운 미래를 다루는 작품인 코맥 매카시의 <로드>(문학동네)도 추천 1순위 작품이다. 문학을 좋아하는 모든 독자들이 즐겁게, 그리고 굉장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걸작으로, 스티븐 킹이 극찬하며 추천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미지의 공포를 말하면 단연 러브크래프트다. 그중에서도 <광기의 산맥에서>(동서문화사)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남극대륙에 도착한 탐사대가 거대한 얼음 속에 묻힌 고대의 유적지를 발견하게 되고 그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들에게 쫓기는 과정은 흡사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에일리언>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실제 <에일리언>은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에서 영감을 얻었으며 수많은 에스에프(SF)와 공포영화들이 러브크래프트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스즈키 고지의 <링>(황금가지)은 원혼을 소재로 한 공포소설의 최고봉이라 할 만하다. 영화가 워낙 유명해 책은 쉽게 포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단언컨대 그 생각을 재고하라고 말하고 싶다. 링은 심리공포소설이기에 다소 지루하게 느껴졌던 영화보다 추리적인 재미에서 월등하고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긴박감과 오싹한 공포는 가히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최근 각광을 받는 공포소설로 좀비물이 있다. 좀비물의 효시라 일컬어지는 리처드 매드슨의 <나는 전설이다>(황금가지)는 좀비들에게 둘러싸인 인류 마지막 생존자의 고독과 절망적인 공포의 깊이를 담담한 필체로 써내려간 수작이다. 흔히 좀비물이라 하면 정신없이 달아나고 쫓아가서 물어뜯는 액션과 잔혹한 장면을 떠올리지만 이 작품을 접하고 나면 그런 선입견 대부분이 걷힐 것이다. ‘나는 전설이다’는 좀비물이기 이전에 로빈슨 크루소보다 더 고독한 어느 남자의 처절한 생존기인 것이다.
벌써 5년째 매년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한국공포문학단편선(황금가지) 시리즈는 국내 공포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는 검증된 작품집이다. 이전 국내 공포소설이 소설이라기보다는 싸구려 괴담에 가깝다는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은 것에 반해 한국공포문학단편선 시리즈는 탄탄한 필력을 갖춘 국내공포문학 작가들이 오랜 기간 공들여 쓴 다양한 장르의 공포소설을 모아놓은 단편모음집이다. 공포소설에 입문하는 독자들이 선택하기에 가장 무난한 작품이란 생각이다.
이종호/소설가, <분신사바> <이프> 지은이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48657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