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를 주제로 다섯권의 책을 읽었다. IT 트렌드 책은 별도로 읽었거나, 읽는 중이다.
사실 <트렌드 코리아>는 무엇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반해, 정작 기대하지 않았던 <라이프 트렌드>는 읽어볼만한 구절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노블리스 오블리제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시티즌 오블리제이다.
우리사회에서는 노블리스 오블리제, 노블리스 오블리제 하지만, 정작 사회를 바꾼 것은 민주주의를 만들어낸 것은 깨어있는 시민이다. 그럼에도 보수 신문들은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강조하는데,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군사문화의 시기와 연결된다는 것이다.
불과 1년 여 전의 촛불혁명에서 과연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본적이 있는가?
다른 트렌드 책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 시티즌 오블리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뭐 바뀌겠어 하며 체념하던 기성세대와 달리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불매운동 목록을 만들어 소비하고, 정치성과 상관없이 촛불을 들었다. 비록 소박하겠지만, 시민들의 가져야 할 의무를 다한다. 시티즌 오블리제, 깨어있는 시민이야 말로 최근의 중요한 트렌드 아닌가.
* 한 예로 작년 어메이징 브루잉 컴퍼니라는 수제맥주집이 뜬다며 하고 부서에서 회식장소로 정할때, 젊은 직원 하나가 슬쩍 나한테 이야기한다. 채용문제로 시끄러워요. 30-40대가 트렌드니 뭐니 하며 쫓아다니는데, 20대는 다른 정보를 공유하고 있었다.
* 그런 점에서 본다면, 트렌드코리아는 사람을 단순히 소비의 주체로 전락시켜 버린다. 정치성을 배제한 듯 하지만, 수동적 소비자로 만들어 놓고 분석하는 썩 좋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이른바 솔선수범의 긍정적 이미지로만 포장할 수는 없다. 어려운 사회적,도덕적 의무를 먼저 실천하는 책임있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실용적 수단으로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즉 의무이기 이전에 지배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일 수 있다는 얘기다. 피지배 계급으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그들을 따르고 체제에 순응하게 만들려면 그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여기고 우러러보게 만들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느 방식으로 해석하든 간에 노블레스 오블리주 뒤에는 상위 계급이라는 고전적인 계급 논리가 적용되어 있다는 점이다.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해 부당한 비판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 '백 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신념을 지켰던 경주 최부자 가문을 비롯해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던 숱한 가문들의 이야기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품격을 여실히 보여 준다. 전 세계 최고의 부자로 손꼽히는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막대한 기부를 통해 사회에 기여하는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운다. 다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계급 논리에 갇힌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유효 기간이 끝났다는 것이다. 이제는 시민 모두의 사회적 역할 즉 시티즌 오블리주가 중요해지고 있다. 거기에 귀족이 따 로 있고, 평민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계급 분리 의식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사실 나는 사회 지도층이라는 표현에 거부감이 있다. 교수, 의사, 판사, 검사, 정치인, 고위 관료, 기업 경영자 등 갖가지 사람들에게 사 회 지도층이라는 타이틀을 붙여 준다. 사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야 한다는 식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누구를 지도한다는 말인가? 사회 지도층이란 표현 자체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이다. 상위 계급이 보편적 다수인 일반 국민들에게 가르침도 주고 모범도 보여야 한다는 것인데, 이보다 더 민주주의의 근간을 해치는 말이 있을 까?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 시민은 평등한 존재다. 부와 지위와 권력 으로 서열을 만들어 내고 우월적 지위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것은 너무나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이런 말을 쓰고 있는 것일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검색에서 '사회 지도층'을 검색하면 1929년 2월과 4월에『동아일보 에서 사용된 흔적이 보인다. 공식적인 지면에서 최초 사용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라이브러리 검색에서 찾을 수 있는 첫 기록은 이것이다. 기사 내용을 보면 "실로 이 사회지도층의 가림업는 편달과 지도를 바들수 잇섯든 까닭이거니와”라는 구절이 있는데, 사회 지도층이 일반인들보다 우월한 존재이며 그들을 잘 따라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다. 사실 이 말이 일제강점기에도 자주 쓰인 것은 아니다. 1년에 한두 번 쓰이는 정도였고, 해방된 후인 1950년대에도 간간히 쓰였을 뿐이다. 이 말이 급격히 많이 쓰이게 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이고, 이후 점차 사용 빈도가 높아졌으며 이 흐름은 1990년대까지 이어졌다 흥미로운 것은 사회 지도층이라는 말이 언론을 통해 널리 유포되던 시기가 공교 롭게도 박정희를 시작으로 전두환과 노태우에 이르기까지 군사 정권 시기와 겹친다는 점이다. 계급의식이 공고한 군사 문화를 사회에 그 대로 이식하던 시기와 맞물린다는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들어 있는 사람은 아무도 기뻐하거 나 춤추거나, 환호할 수 없습니다."2014년 8월 한국을 방문한 프란 치스코 교황이 해미 읍성에서 열린 '제6차 아시아 청년 대회 폐막 미사, 강론 때 한 말이다 2008년, 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와 비슷 한 말을 한 적이 있다“깨어 있는 시민의 단결된 힘이 바로 민주주의의 보루이자 우리의 미래입니다." 그가 생전에 공식석상에서건 비공식 석상에서건 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자주 언급했던 표현이 바로 '깨어 있는 시민' 이다. 그리고 개어 있으라는 것 '깨어 있는 시민이 되라는 것, 시민의 건강한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것이 바로 시티즌 오블리주 가 요구되는 시대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114-116